눈물의 끝에서 자줏빛 꽃의 겉잠을

눈물의 끝에서 자줏빛 꽃의 겉잠을 9화

히스클리프

‘이쪽으로 오시죠’

클로에를 대신하여, 이번에는 히스클리프가 더 레이븐의 손을 잡았다.

귀공자다운 완벽한 품위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더 레이븐을 이끌었다.

그곳에 파우스트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가, 힐끗 잠깐이나마 히스클리프의 배후를 본다.

파우스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은 만끽하셨을지요.’

가뿐하게 망토를 흩날리며, 더 레이븐을 향해 파우스트가 우아하게 상반신을 앞으로 굽혔다.

부드러운 눈매로 아름답게 미소지은 모습은 산뜻한 멋진 청년 그 자체였다.

생기가 넘치고 아름다운 녹색의 사이로 내려오는 부드러운 빛처럼, 비쳐 보이는 상냥한 표정.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말았다.

그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 지금보다 더 순수하고, 밝은 미래로 달려나갔을 시절……

중앙 마법사였던 시절의 그는, 혹시 이런 청년이었을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슬슬 휴식 시간이네요. 부디, 이쪽으로.’


마지막으로 도착한 침실에서는, 순서대로, 이미 역할을 끝낸 마법사들이 벽가에 나란히 서있었다.

방의 중앙에는 단 한 명. 루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키라

(어라… 공주가, 따라오지 않아?)

침실에 한 걸음 들어선 순간, 배후에서 구두 소리가 시끄러워졌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우왕자왕하기 시작한다.

무심코 문 옆에 멈춰 서버린 나에게, 피가로가 눈짓했다. 의식용 향초나 진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키라

(의식의 준비가 가장 엄중한 곳이니까,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까.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못하는 구나……)

다른 마법사에게도 눈짓하며, 나도 방구석에 섰다.

그 순간에도 방황하던 구두 소리에, 가슴이 아파졌다.

합리적인 판단도, 도리도 버리고,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입구를 찾는다.

‘피도 눈물도 없다’던 공주가, 소중한 친구를 위해서.

루틸

‘어서오세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다른 마법사가 지켜보는 중, 루틸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이 더 레이븐을 침대까지 에스코트 했다.

상냥한 몸짓은 평소대로였지만, 항상 밝고 대담하던 루틸보다 훨씬, 상냥하고 정중하게.

긴장한 눈빛에 애달픈 희망을 실으면서.

더 레이븐

…….

더 레이븐은 조용했다. 텅 빈 눈동자도, 변하지 않은 채.

이끌리는 채로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의식의 효과가 더 레이븐에게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틸

…….

아키라

(원래라면, 이 다음에 의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말. ‘당신의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말하며 끝.)

(하지만……)

한 번 더, 세게 눈을 감은 다음, 루틸은 감싸 안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조심히 수기를 펼친다.

루틸

요란다 씨……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

더 레이븐

……!

겉잠을 자고 있던 더 레이븐의 눈동자가, 한 순간에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방 안에 불길한 검은 연기가 확 퍼지기 시작했다.

튀어오르듯이, 더 레이븐은 일어섰다.

루틸

왓……!

클로에

루틸!?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바로 알지 못했다.

느낄 수 있었던 건, 루틸을 습격한 손톱의 번쩍임과, 강한 빛, 무언가가 크게 깨지는 소리.

정신을 차리자, 조개 껍데기의 파편이 흩어지는 와중에 더 레이븐이 기괴한 비명과 함께 몸부림치며 뒹굴고 있었다. 경직된 루틸이 그것을 바라본다.

피가로

루틸, 괜찮아?

루틸

네, 네! 미스라 씨의 부적이 지켜줘서……

미스라

퇴마와 결계의 부적이에요. 한동안, 저 더 레이븐은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클로에

다, 다행이다…! 설마, 잠의 의식이 깨지자마자 더 레이븐이 루틸을 공격할 줄은……

아서

불완전한 의식과 재앙의 영향일지도 몰라. 더 레이븐의 마력도, 아까부터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

미스라

이 느낌. 시간이 지나면 귀찮아지겠네요.

루틸. 한 번 더, 더 레이븐이 당신을 공격하면 제가 저 녀석을 죽일 겁니다.

루틸

……

용서없는 미스라의 말에 루틸의 입술이 떨렸다.

난폭하게 뒹구는 더 레이븐을 바라보면서, 강하게, 수기를 움켜쥔다.

하지만 미스라는 그런 루틸의 옆 모습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본다.

미스라

……? 어째서 멍하니 서있는 겁니까?

제가 죽이기 전에 수기를 읽고, 더 레이븐이 공주를 떠올리게 하고 싶잖아요?

자요. 그렇다면 빨리 해야죠.

루틸

……!

그랬지…… 그랬었죠. 아직 기회가 있는데, 힘이 빠질 때가 아니었죠.

감사합니다. 미스라 씨. 할게요!

루틸은 다시 수기를 펼쳤다.

어떤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 남쪽 나라의 초원을 떠올리게 하는 녹색 눈동자로, 똑바로 더 레이븐을 눈에 담았다.

루틸

요란다 씨. 지금부터 읽는 건, 눈물의 공주의 말이에요.

부디, 들어주세요.

……‘백성들이, 내 곁으로 찾아왔다.’

‘사병을 유행시킨 까마귀 마녀를 쫓아내달라고.’

더 레이븐

그아아, 아아!

아아아아아……!

히스클리프

드…… 듣고 있는 걸까요? 저 더 레이븐……

아서

어떠려나…… 저 외침이, 과거를 떠올린 것에 대한 외침이라면……

마도구를 방심하지 않고 꺼내 든 히스클리프와 아서가 소곤거렸다. 클로에는 불안한 듯 오웬을 돌아보았다.

클로에

오, 오웬. 더 레이븐이 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아?

오웬

아무 말도 안 해. 말 따위, 전부 잊어버렸으니까. 우리들이 성에 왔을 때부터 계속 변함없어.

따뜻한 거라던가 뭐라던가, 전부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야.

클로에

……그건……

오웬

하하… 여기서부터, 더 레이븐한테 어떻게 따뜻함을 전해줄지, 기대되네. 클로에.

클로에

……

루틸

‘나는 까마귀 마녀를 불렀다. 우리 가문의 별장에, 세상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ㅡ.

피가로

루틸, 조심해. 슬슬 부적의 효과가 끝나고 있어.

피가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 레이븐이 뒹구는 것을 멈췄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매트리스를 찢은 다음,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가볍게 하늘에 뛰어 올랐다.

루틸의 머리 위에서, 다시 발톱이 서늘하게 반짝인다.

미스라의 마도구가, 차가운 빛을 모았다. 코웃음을 치고 있던 오웬이 트렁크에 손가락을 걸었다.

필사적으로 수기를 읽는 루틸의 옆 모습이, 약하게 일그러졌다.

미스라

<아르시>ㅡ

파우스트

<사틸크나트 무르클리드>

미스라의 해골이 입을 열기 직전, 눈이 부실 정도로 순백의 광선이 더 레이븐을 직격으로 꿰뚫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억압당하는 듯이, 뛰어 오른 자세 그대로 더 레이븐이 공중에서 발버둥쳤다.

강하고 믿음직스럽게 빛나는 거울을 가리고, 파우스트가 조용히 루틸을 본다.

파우스트

계속해라. 네가 마지막 한 줄을 읽을 때까지. 내가 막고 있겠다.

아직 포기하지 않아도 돼.

루틸

아… 감사합니다!

피가로

손을 빌려줄게. 파우스트. 루틸, 더 레이븐은 우리에게 맡겨.

아서

클로에, 히스클리프! 우리들도 파우스트를 지원하자!

젊은 마법사들과 피가로가, 차례차례 주문을 외웠다. 루틸이 필사적으로 낭독을 이어간다.

오웬은 트렁크를 꺼낸 채로 어깨를 움츠리며 조소했다.

오웬

아직도 할 거야? 이 연극. 마지막에는 어차피, 그 녀석을 죽일 텐데ㅡ.

루틸

‘나는 실패했다’

더 레이븐

……!

발버둥치던 더 레이븐이, 갑자기 움찔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있을 수 없는 각도로 목을 돌리고, 텅 빈 눈동자가 문 옆의 한 점을 바라본다.

그곳에, 파란 드레스의 영애가 있었다.

클로에

엣…! 눈물의 공주!?

히스클리프

의식의 결계가 있으니까, 여기에는 우리들 이외에는 들어오지 못할텐데… 어떻게…

더 레이븐

구, 아아, 아…… 아…

오웬

……

……‘공주님’……?

루틸

ㅡ‘한 번이라도 그녀의 헌신을 칭찬해야만 했다. 그녀에게 감사를 전해야만 했다.’

‘불러낸 마법사가, 너라서 다행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이 수기에서만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서.’

몸을 질질 끄는 것처럼, 공주가 걷는다. 더 레이븐을 향하여.

억지로 방에 들어온 것인지, 맑고 옅게, 윤곽이 무너지는 그 모습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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