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12000자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성탄일이 가까웠으므로 회당의 어디에서나 육계나무 껍질을 부순 듯한 냄새가 났다. 낮게 타는 촛불이 겨우살이와 자작나무 사이에서 키를 줄였고 호두 기름이 담긴 기름등이 어슴푸레하게 타올랐으니, 적막한 중정을 건너 고해실로 가는 모서리를 도는 내내 계절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절을 증명하려는 듯이 네모진 뜰을 둘러싼 형태로 나립한 회랑을 지나던 도중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설경 정취가 근사했다. 부러 사람들을 떼어놓고 홀로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반듯한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마른 뜰의 풀밭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한창이었다.
이곳 바실리카 대성당은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웨스트 캐피탈-신 브리튼 협약이 체결된 이후로 사람들은 북쪽의 뉴런던과 구별하기 위해 구 런던을 그렇게 불렀다-의 수많은 랜드마크 중에서도 유독 각별하게 여겨졌다. 십칠세기 저명한 건축가의 손에 의해 면면히 다듬어진 회당은 이교도들이 모시었던 달의 여신의 신전 터 위에 세워진 일신교의 사원으로, 한번 무너졌다가 다시 지어진 이후에는 수 세기 동안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근대의 서막을 알리듯 도시를 휩쓴 대화재 속에서도, 이십 년 전 세상을 크게 뒤흔들었던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돌 조각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곳을 영원 그 자체를 수호하는 불침의 사원으로 여기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사랑과 행복, 아름다움과 믿음, 그리고 온갖 가치 있는 개념들이 이곳에서 발원되었다. 영원불멸하기를 비옵니다. 옛것들이 사라지고 오래된 것들이 쉬이 빛바래는 시대였으니, 사람들의 기원은 일견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딜런은 정말로 영원을 기도로써 전취할 수 있는 것 인지에 관하여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차이는 단지 그것이 얼마나 지연되고 있느냐로부터 비롯할 뿐이며.
회랑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는 느리게 걸음을 떼었다. 너무 이르게 도착하는 것도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다리게 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았다. 걸음의 빠르기를 가늠하면서, 그는 석면마다 정교한 부조가 글월처럼 새겨진 모서리를 돌아 백운암 열주가 늘어선 회랑을 통과했다.
주 예배당에 도착하고 나서 남자는 습관적으로 봉헌초에 불을 붙였다. 짧게 손을 모아 묵상한 후 주위를 둘러보면 기다리는 이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시간을 확인하면 정각. 다소 느긋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면 채광창을 통해 부드러운 겨울 빛살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둥근 천장 위로는 십이천사의 도상이 선명했다. 웨스트 캐피탈 예술대학 학생들이 재학 중에 한번씩은 꼭 찾아와 보고 간다는 정교한 천장부조는 그 유명한 시스티나 대성당의 걸작과도 종종 비견되는 명물이었다. 그린 이의 이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어느 유명한 대가가 이중 계약의 추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감추고 그려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는 이 천장화를 살펴볼 때에, 어린 학생들은 꼭 어느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이나 입을 벌린 채로 서있곤 했다. 그 학생들의 태반은 목이 아파올 때 즈음 고개를 내리고 서로를 마주보면서 천사가 꼭 누군가를 닮았다고 재재대고는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모른 척 학생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을 듣고 있자면 자연스레 실소가 샜다.
“성 바실리오가 천사를 무어라고 불렀는지 알고 계신가요?”
생각의 중간을 가로지르면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임의 회랑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속삭인대도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귓가에 명료하게 내려앉았다. 딜런은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
“미풍, 또는 형체 없는 불이라고 칭하였지요.”
“어째서 그러합니까?”
“우리가 알 수 없는 차원을 순례하는 공경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신의 사자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영성의 결정체와도 같으니 기실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금언은 이처럼 높은 차원의 존재를 범상한 인간의 형상 안에 잡아두고자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염두에 둔 바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렇군요.”
천사의 비가시성에 대해 속삭이는 그는 알기나 하려나. 예술대학 학생들이 앳된 낯을 붉히며 소년 천사가 꼭 발디우스 공작 각하를 닮았다고 속삭인다는 사실을. 딜런은 걸음을 좁혀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단정하게 사제복을 차려입은 타이바스가 그린 듯이 웃고 있었다.
“늦으셨군요, 사제님.”
“기다렸나요, 형제님?”
“조금요.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뭘 하고 있었길래?”
“당신 구경.”
부연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 지었다. 아무도 없는 회랑이었지만 이 대화를 포함해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나 표정 따위는 모두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있을 것이므로 말은 줄일수록 좋았다. 타이바스 역시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가볍게 손을 내밀어 청했다.
“그러면 이제 손을 잡을까요? 보는 눈이 많아요.”
딜런은 내밀어진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디선가 셔터가 눌렸을 것이다. 영원히 고정되어 널리 보여질 것이라면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는 편이 좋았다. 그들의 아름다운 우애를 온 세상이 경신(敬信)하도록. 청년들은 오월에 피어나는 야생 장미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게, 이튿날 조간신문의 삼면 정도에 두 사람의 사진이 실렸다. 딜런은 두 사람 몫의 커피를 잔에 옮겨 따르면서 기사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훑어보았다.
《 발디우스 공작과 반 갤러해드의 아름다운 회동 》
며칠 전에도 이브닝 스탠다드에서 비슷한 헤드라인을 본 것 같은데. 이제 슬슬 기자들의 창의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단락을 읽어내려갔다.
지난 3일 웨스트 캐피탈의 바실리카 대성당,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당 부속 박물관 준공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그중에서도 발디우스 공작과 반 갤러해드 부사장의 모습은 특별히 눈길을 끄는 바가 아닐 수 없었다. (…) 두 사람은 다가오는 15일에 예정되어 있는 종전 기념일 행사에도 마찬가지로 동반 참석할 예정임을 밝혔으며 또한…….
그 아래로는 두 사람의 정다운 만남과 식장의 화려번창을 묘사하는 미사여구가 이어졌다. 내용의 치밀함이 이 모양이니 무엇이든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패션 잡지에서는 두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착용한 의복이나 소품들을 분석하는 코너가 인기였고 두 사람이 함께 방문한 레스토랑은 그다음 주면 예약 손님으로 만석이 되었다. 사적인 공간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매분 매초가 정치이자 쇼 비즈니스인 셈이었다. 딜런은 혀를 차면서 신문을 반으로 접다 말고 도중에 손을 멈춘 채 사진 속 타이바스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파파라치들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으로 일상의 일부가 되었으니 새삼스럽게 혀를 찰 필요도 없었으나……. 고해하자면 사진 찍는 솜씨 하나 만큼은 칭찬해 줄 만도 했다. 그는 사진 속 남자의 희고 반듯한 낯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 끝이 지면에 닿았다. 사진 속에 붙잡힌 눈빛은 다정했고 손길은 상냥했다. 모두 저를 향하는 유일임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무엇을 향한 나긋함이겠는가? 딜런은 수시로 제게 되물었다. 그러나 매번 증명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고.
“신실하게 잘 나왔네요.”
언제 왔는지, 어깨너머에서 타이바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심호흡 후 딜런은 그린 듯이 웃으며 손을 거두고 그의 몫으로 준비해 두었던 커피잔을 내밀었다. 잘 잤어요? 덕분에요. 아, 커피 고마워요. 짧은 인사가 오가고 잔이 한번 기울고 나자 화제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 말 칭찬인가요?”
“신실하게 나왔다는 말? 그럼요.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어련하겠습니까?”
“그다지 기쁘지 않은데. 누가 사진 칭찬을 그렇게 합니까?”
“기쁜 척이라면 익숙하잖아요.”
“당신.”
“농담입니다. 오렌지 먹을래요?”
“내가 하죠. 앉아 계세요, 합하.”
“화났어요?”
“아닙니다.”
“합하라고 부르길래.”
“아닙니다─.”
딜런이 찬장에서 크림색 접시를 꺼내면서 대답했다. 타이바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턱을 괴었다. 평소보다 진하게 우러난 듯한 커피가 입에 썼으나 굳이 불평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평일 아침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딜런 반 갤러해드가 손수 껍질을 벗긴 오렌지를 입에 댈 수 있는 특권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특권을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타이바스는 관계의 기원을 더듬어 떠올려 보았다.
18세기 말엽까지 그레이트 브리튼 제도의 북서쪽 끄트머리에서 간소한 자치권을 유지하며 간신히 국가의 모양새를 유지해왔던 에드바르트 공국이 검을 빼어 들고 열강들의 룰렛 게임 가운데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은 반 세기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다. 에게 해의 어느 작은 섬에서 우연찮은 기회로 채탄된 백탄(白炭)이 기존의 에너지원에 비해 약 62배 가량의 출력을 낸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상인과 도둑들을 가호하시는 헤르메스의 저울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칠십 년 전이니, 정치와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총아들이라면 긴 부연 없이도 그들이 어느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는지를 짐작할 만했다.
과학자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도 무엇이 썩고 삭아 만들어진 것인지를 밝혀낼 수가 없었기에 천사의 뼈라고도 불리는 이 미지의 퇴적물이 세상에 나온 후, 많은 도표와 지도들이 다시 그려졌다. 조간 신문에서 발표되었던 조례가 석간신문에서 정정되었고, 정오의 라디오 방송에서 밝혀진 결백이 다음날 새벽 호외로 재고발되었다. 소문과 추측을 사랑하는 음모론자들만이 데일리 익스프레스가 첫눈처럼 나부끼는 거리를 기쁘게 배회했다. 발표와 선언, 통보와 속보, 사고와 성명이 날마다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잉글랜드의 소도시 취급을 면치 못하던 에드바르트 공국이 잉글랜드 왕실에 위임해 두었던 국방권과 외교권을 되돌려 받겠노라고 선언한 것도 개중 하나였다. 혁명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그 누구도 예비되어 있지 않을 때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원인에 의해.
잉글랜드는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 그들의 기회주의적 선언을 비난했지만 호기(好機)를 놓칠 수 없었던 공국은 쉽게 결심을 물리지 않았다. 양국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잉글랜드에 공급하는 공국의 민족주의자와 잉글랜드의 극우주의자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닿았으니, 사태는 자연스레 전쟁이라는 최종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때 나선 것이 교회였다. 한 세기 전, 우호적 정교분리가 암묵적으로 규범화된 이후 지금까지 세속의 파란에 대해 침묵을 지켜오던 캔터베리 대주교가 공국과 잉글랜드 사이를 중재하고 나선 것이다. 사목적 권고라는 형식을 취했으나 명백히 정치적 개입이었다.
종교 윤리적인 측면에서 대주교의 선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와는 별개로, 대주교의 개입 덕분에 일촉즉발의 사태가 가까스로 진정되었다는 사실 만큼은 인정해야만 했다. 두 나라의 온건주의자들이 어렵사리 마련한 공식적 회담이 수 번, 비공식적 회담이 십 수 번씩 열린 끝에 가까스로 하나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신 브리튼 협약. 잉글랜드가 에드바르트 공국을 독립적인 자치 국가로 인정하고 우방 수교국으로 대우하는 대신 공국은 잉글랜드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백탄 생산량의 일부를 정기 지급한다는 내용의 이 협약은, 이전까지 서로 목덜미를 물어뜯지 못해서 안달이던 두 나라의 관계를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나라가 이 협약을 위해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다.
발디우스 공작과 딜런 반 갤러해드 부사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제도에 하나밖에 없는 왕립 신학교 세인트 폴케리아에서 부터 시작된 그들의 우정은 결코 필부들의 것과 같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왕세자의 독남이자 계승 서열 제 2순위인 왕실의 직계 발디우스 공작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백탄 채굴 사업에 거금을 투자해 지금은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갤러해드 이노베이션의 차기 총수 딜런 반 갤러해드였으니 기실 조합부터가 별난 셈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아담하고 네모진 기숙사 방에서 함께 십대를 지나 보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식으로 은밀한 교환과 모호한 유대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폴케리아를 졸업해 세상으로 나오려는 바로 그 때에 신 브리튼 협약을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이었다는 것이다. 각국의 고집 센 보수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두 나라의 우호를 선전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행정부가 발견한 것이 바로 두 사람이었다. 딜런은 반 갤러해드의 공식 상속인으로서 내정된 직후였고 타이바스는 성무(聖務)에 뜻을 두고 명예 사제로서 서품을 받기로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였으니 시기조차 참으로 절묘한 일이었다. (물론 시기의 절묘함이 정말로 우연이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으나, 동화 속 이야기는 기적에 가까울수록 감동을 주는 법이었으니 의심스럽더라도 우연이라고 믿는 편이 자타 모두에게 좋았다) 빈 부분은 채워 넣어졌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베일로 덮였다. 모난 부분은 잘려나갔고 얼룩이 묻은 곳 위에는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졌다. 두 사람의 유대는 출신을 뛰어넘은 청년들의 아름다운 화합으로 주목받았고, 사람들은 빚어낸 듯한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정치가들은 행복해했고 시민들은 열광했다. 협약은 두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두 개의 수도가 생겨났고 새로운 국경일이 지정되었다. 백탄을 태우며 날아오르는 비행선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도시의 불빛들은 점점 더 화려해져 갔다. 타오르는 듯한 야경, 감미로운 음악 소리. 그 가운데에서 타이바스는 가끔 딜런이 이 유별나고도 복잡한 관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하곤 했다. 졸업과 함께 찾아왔어야 했던 이별은 세상에 의해 봉합되었고 떠나가야 했던 사람은 붙잡혔으니. 그에게 있어서 이별은 지연된 것일까, 혹은 삭제된 것일까. 그를 잡아놓고 있는 것은 우리의 약속일까, 혹은 세간의 협약일까.
“당신, 듣고 있어요?”
타이바스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뭐라고 했어요?”
“종전 기념일 행사 말입니다.”
“다음 주라고요? 알고 있어요, 그 정도는. 감색 넥타이를 매자고 했잖아요.”
“보안 등급을 조정하지 않겠어요?”
“……이유는?”
“과격파 행동주의자들의 행보가 심상하지 않아요.”
“초대 일정에 차질이 생길 텐데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딜런은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오렌지의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 시고 차가운 물이 스며들면 타이바스는 생각한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혹은 상해일까, 혹은 관계의 끝장일까. 발디우스 공작일까, 혹은 자신일까.
“타이바스?”
둘은 달랐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발디우스 공작과 타이바스는 한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었으니 무엇을 염려하고 돌보든 간에 그가 저를 아끼고 신경 쓴다는 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눈이 마주치면 그 낯이 반절은 읽혔다.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 그러나 결코 경솔하게 재촉하지 않는 입. 그는 누구보다도 매끄럽게 웃을 줄 아는 남자지만 타이바스는 그가 세상만사에 지쳐 달의 뒷면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듯이 기울어지는 모습을 안다. 그럴 적에 손을 뻗어 그의 팔꿈치를 쥐고 발디딤을 단단히 다진 후에 몸을 돌려세워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철없던 십 대 시절, 그가 품어왔던 그림자가 미처 봉합되지 못한 정신의 생채기 틈을 통해 자신이 예비해 두었던 은쟁반 위로 쏟아지던 날을 기억한다. 그 날 밤 오만한 정신으로, 은쟁반을 든 타이바스는 기꺼이 그에게 약속을 제안했다.
죽음이 두려워요, 반?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지켜드리지요.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또 공허한 소멸로부터. 타이바스는 그것으로 자신의 유일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마음은 행동으로만 해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두려움도 연약함도.
모두 자신이 짊어지고 오르리라. 핏빛 노을이 선명한 골고다 언덕.
“당신 뜻대로.”
그는 웃었다.
날이 맑고 볕이 밝았으니 기념식은 왕실 소유 비행선인 세인즈버리 크라운 호의 갑판 위에서 예정대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갑판 위에 모인 기백의 귀빈들 가운데에서도 두 사람은 확연히 눈에 띄는 축에 속했다. 두 번째 줄에 나란히 앉아 점잖게 박수를 치거나 짧은 눈웃음을 교환하거나 귓속말을 속삭이는 모습은, 아마도 이튿날 조간신문을 장식하기 위한 수십 장의 사진으로 진작에 고정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두 사람은 시종일관 예의 바른 태도와 표정을 유지한 채로 길고 지루한 각 순서를 지나 보냈다. 매력적인 만큼이나 재미없는 젊은이들이라고, 사생활의 방면에서 그들의 결점이나 허실을 폭로해보고자 온갖 노력을 쏟아부은 황색지의 책임 기자조차 그렇게 평가한 두 사람이었으니, 그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어지간히 치밀하겠는가.
완전하게 아름답구나. 셔터 소리와 함께 한숨 소리가 나지막했다.
1부 행사가 끝나고 막간이 찾아왔다. 발디우스 공작의 기념사는 2부의 두 번째 순서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가 짧은 연설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딜런은 무의식적으로 따라 일어섰다.
“반?”
“……아.”
그는 자신이 따라 일어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조금 후에야 깨우쳤다. 타이바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따라오려고 했어요?”
“그러게요. 나도 모르게. 잘 다녀와요.”
그의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매무새를 습관적으로 가다듬어주고 나면 타이바스가 몸을 돌렸다. 짧은 속삭임, 맞닿고 떨어지는 손끝, 마주치는 시선, 다정한 눈빛 같은 것들은 언제나와 같았으므로 유별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째서인지 딜런은 몸을 돌려 걸어나가는 그를 붙잡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주어진 유예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탓일까? 기념식이 성공적으로 종료되고 완전히 하나가 된 나라가 더 이상 허황하게 빛나는 상징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에, 사람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게 될 때에, 두 사람의 결합이 더 이상 어떤 정치적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될 때에. 타이바스 발디우스는 과연 제 곁에 머무를 것인가?
하지만 어지러운 잡념들을 정돈하기도 전에 그는 떠나가고, 맞잡았던 손은 떨어진다. 손을 뻗어 붙잡을까 생각도 하였지만, 판단력이 그를 막아선다.
곧 공작이 무대에 오른다.
박수 소리, 셔터 소리, 군악대의 연주 소리가 지나가고 좌중이 고요해지기 직전이었다. 딜런은 자리에 앉아 높은 단상 위에 올라선 타이바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높은 곳에 서서 밝은 빛을 받는 그를 본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신이 가장 어여쁘게 여겨 빚어낸 피조물 같다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다. 아름답게 접히는 눈매로, 그는 언제나 말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저와 눈을 맞춘다. 어떤 의식의 일환처럼. 그러면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뒤로 있었던 일은 어째서인지 아주 느리게 지나갔기에 그 면면을 전부 기억한다. 중계용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남자가 메고 있던 장비 가방을 내팽개치듯이 벗어 던졌다. 단상 아래에서 붉은빛이 번쩍거렸고, 무대 아래에 서 있던 사회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회장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딜런은 귓가에 들려오는 소형 비행체의 날카로운 엔진 소리가 들려왔을 때 즈음에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는데, 그때 몸은 이미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타이바스!”
그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서 타이바스의 손목을 잡고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것은 단지 시도만으로 그쳤다. 바로 눈앞에서 무언가 크게 폭발했기 때문이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매캐한 연기를 잔뜩 들이마신 탓에 호흡이 답답했다. 이명이 시끄러웠다. 그는 사지가 멀쩡히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일으켰으나, 곧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려왔다.
비행선이 크게 기울었다.
갑판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단상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굴러떨어졌다. 사람과 물건들이 마구 엉켜 쏟아졌다. 딜런은 난간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 오래전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호화 여객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과 수도의 상공에서 곤두박질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죽음이 이처럼 높은 자리에 배속되었으니 불신자의 영혼일지언정 아버지의 왕국에서 가련히 여겨 거두어가시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위에서 단단하게 팔을 잡아당겼다.
“반.”
그것은 등 뒤에서 비치는 후광. 미풍, 혹은 형체 없는 불.
“……타이바스, 무사했어요?”
“그럼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말했잖습니까?”
“그건,”
“뭐야,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까?”
거짓말이었잖아요. 항변할 말은 고개를 드는 순간 물에 가라앉은 듯 녹아버렸다.
황폐한 테러 현장의 한복판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로 신의 사자가 존재한다면 이런 형상일 것임이 분명했다. 어째서인지 재난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는 눈부시게 반짝였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사정없이 나부꼈으나 그조차 아름다웠다. 잠시 말을 잃고 있노라면 그가 잡은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은 경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무대 뒤편의 빈 공간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붙잡은 손이 불에 달군 듯이 홧홧했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다. 죽음과 종언이 이처럼 가까이 놓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당신 말이 맞았네. 공국의 행동주의자들입니다. 그럼 뭐하나, 내 뺨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는데. 아무튼 지금은 귀빈용 통로로 가야 해. 탈출용 소형정이 있을 겁니다. 이인승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운전할 줄 알아요?”
“타이바스.”
“못하면 내가……네?”
딜런은 생각한다.
타이바스 발디우스는 약속을 기억했다. 온갖 사멸과 허무로부터 딜런 반 갤러해드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그리고 오직 그 만의 방식으로 이행했다. 그런 당신의 목전에서 내가 무엇을 재고 무엇을 따지겠는가. 세상의 잣대와 규준을 모두 불사르는 신광(神光)의 앞에서 죽음과 끝을 염려하는 어리석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갑판 위에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무언가를 놓친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두려움이라던가. 그는 웃기 시작했다. 끝은 오지 않으리라. 오기 전에 그가 불태울 테니까.
“반?”
“타이바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들로 하여 영원불멸토록 하옵시고,
“당신을 사랑해요.”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폭발음이 들려왔다.
기념식장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다. 범인은 공국 출신의 과격파 행동주의자들로 특정되었으나 사건이 일어난 것이 잉글랜드 왕실 소유의 비행선이라는 점이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흐렸다. 간신히 봉합되었던 양국 간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고 항의와 성명이 빗발쳤다. 라디오의 공영 채널에서는 더 이상 암스트롱의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위 현장에 대한 보도를 듣던 타이바스가 음량을 낮췄다. 딜런이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앞으로도 쓸모가 많겠어요.”
“곧 바빠지겠군요.”
“아직은 아니죠. 오늘은 오늘의 망중한을 즐기도록 해요.”
“쉬어본 지가 오래되어서 즐기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어쩔 수 없군요. 사제께 세속의 즐거움을 가르쳐드리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미소지었다. 곧 딜런이 고개를 숙였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도시는 천변만화를 겪는다. 어제 아름다웠던 것이 오늘도 찬란하리라는 법은 없고 오늘 흉악했던 것이 내일도 악독하리라는 법 또한 없다. 영원히 사는 사람도 깨어지지 않는 조각도 없다. 흔들리지 않는 이상도 낡지 않는 도덕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도시 위에서 연인들은 입 맞추고,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허무에 대한 공포도 잊어버린다. 오래전의 대문호가 현명히 통찰하였듯이,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하고 그 사람을 신으로 다시 확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사랑이기에.
*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