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키군

[노자키군] 재회

*월간순정 노자키군 12권을 읽으시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내용입니다! 아직 12권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열람을 권장해 드리지 않습니다.

평소와 같은 따사로운 오후. 카시마는 평소와 같이 땡땡이를 쳤다. 오랜만에 밖에 나가 파르페를 사 먹는 것보다는 한가롭게 쉬고 싶었다. 카시마는 살금살금 학교를 돌아다니며 호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죽이곤 신명 나게 놀았다.

 그때, 그의 시야에 음악실이 들어왔다. 교정 나무 아래에서 낮잠도 자고, 한창 활동 중인 동아리에 침입도 하며 놀기도 해봤지만 피아노를 치고 논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노자키의 부탁으로 피아노를 쳤었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툴게 쳐달라고 한 것이 기억났다. 하여튼 별난 녀석이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쪽 음악실은 부실과도 한참 멀고, 이래저래 피아노에 흥미가 간 카시마는 피아노를 치며 놀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못 하는 게 없는 그였기에 편하게 피아노를 두드리며 놀았다.

 "카시마. 뭐 하는 거야?"

 "아. 유즈키. 그냥 심심해서. 피아노 치면서 놀고 있었어. 원하는 곡 있으면 쳐줄까?"

 "아니. 괜찮아."

 "유즈키는 참 솔직하구나."

 "칭찬 고마워."

 "아하하... 그래. 맞다. 나 일부러 서툴게도 칠 줄 알아. 꽤 신기하니까 들려줄까?"

 "오? 그거 재밌겠네. 들려주라."

 "좋아."

 카시마는 정성스레 피아노를 연주했다. 물론 서툴게. 현재 땡땡이를 치는 중이긴 하지만 명색이 연극부라 그런지 연주 자체도 치는 모습도 그럴듯하게 서툴러 보였다.

"와, 진짜네. 너 진짜 못 친다."

"기왕이면 '못 치는 것 같다'라고 해줄래...?"

"뭐, 어때. 네가 괜히 연극부는 아니구나. 실감 나는 연기였어."

 그때였다. 교실 문을 얼마나 세게, 또 급하게 열었는지 엄청난 굉음이 음악실에 울려 퍼졌다. 아래층 사람들은 음악실에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줄 알 것이다. 그 굉음에 카시마와 유즈키가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그보다 큰 목소리가 음악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혹시... 「유키코」...?!”

 그 굉음의 정체는, 라노벨 같은 대사를 내뱉은 이토였다. 이토는 이렇게나 뜬금없이 들이닥친 후 바닥에 나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저 녀석도 연극부야...? 더럽게 실감 나는 연기네."

 "아니. 내가 연극부를 나가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땡땡이 치지만 쟤는 아마 연극부가 아닐 거야. 아마, 아마도..."

"너야말로 연극부 맞냐?"

 

 이 오후는 이토에게도 평소와 같은 한가로운 오후였다. 아까까지는. 그는 평소와 같이 평범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층 더 높은 레벨의 피아노 교재를 칠 수 있게 되어 아주 신이 났을 터였다. 그 순간, 음악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핸드폰에 고이 담겨 있는 어느새 벨 소리로 설정해버린 그 소중한 멜로디가.

 바로 고백 메일 보내기 대회에서 유키코에게 받은 피아노 연주였다. 이토도 알고 있다. 그 아이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걸. 노자키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라는 걸. 하지만 그의 귀에 또렷이 들려오는 멜로디는 그런 생각 따위 잊어버리기 충분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음악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라노벨 남자 주인공 같은 생각을 한 이토가 음악실 뒷문을 박차고 들어왔지만 세오와 카시마는 그런 사정을 알 리 만무했다. 사실 안다 치더라도 그 둘이 공감할 확률은 미지수였지만.

 "하여튼 저 녀석, 연극부는 아닌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널 보고 온 것 같은데. 네 방향으로 주저앉고 울고 있잖아. 제법인데. 카시마?"

 "매일같이 와카마츠를 울리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유즈키."

 "그건 기쁨의 눈물이지."

 "어, 음... 알겠어. 일단 저기 울고 있는 남자애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네 추측대로면 나 때문에 우는 게... 맞는 것 같지만. 난 쟤 이름이 뭔지도 몰라."

 "오~ 이름도 모르는 놈을 울린 거야? 휘유~"

 유즈키는 본인의 연애사는 쌩 달아나면서 남의 연애, 특히 누굴 부추기는 것에는 참 관심이 많은 것이 꼭 초등학생 같았다. 카시마는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저기, 안녕. 너 이름이 뭐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

 "뭐? 너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어...? 응..."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너와 내가 쌓았던 추억은 다 의미 없었던 거야?"

 "미안하지만... 무슨 말인지 눈곱만큼도 모르겠는데. 정말로."

 "이 사람들 왜 이렇게 기억상실 이벤트의 미연시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거야!"

 "잠깐, 미코시바! 지금 나가면 안돼!"

 "노자키! 늦었어! 미코링은 저번 주부터 올 배드엔딩이었던 미연시 게임의 후속작을 플레이했단 말이야! 비극 소재 이벤트에 맛이 갔어!"

 음악실 앞문으로 노자키와 치요, 미코시바가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행색을 보니 아까부터 몰래 지켜본 듯했다.

 "뭐야, 그... 미코시바잖아. 어, 치요랑 노자키도 있네. 니들 뭐하냐?"

 "어... 그니까 유즈키. 그게 말이야..."

 "소재를 찾.."

 "노자키!"

 치요는 다급하게 노자키의 입을 막았다. 분명히 부탁받았다고 했으면서 노자키는 종종 만화가인 걸 카시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으려고 했다. 덕분에 치요는 노자키랑 카시마가 만나기만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 그게! 저기 울고 있는 이토가 우리 반이거든! 근데 너무 서럽게 울길래 무슨 일인가 뛰어와 봤지. 근데 생각보다 난감한 상황이길래 어떻게 해야 할까 지켜보고 있었어!"

 "그렇구나. 진짜 난감한 상황이긴 해. 이토랬나? 쟤 좀 봐.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코시바가 소리를 치며 난입하고 우리들끼리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럽게 울고 있어. 도대체 무슨 사연인 거야?"

 "어, 그래... 그건 또 말이야..."

치요도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반 아는 사이 정도인 남자아이가 우리 반에서 개최한 고백 메일 보내기 대회에서, 고백 메일을 받아 평가하는 사람이었는데 노자키가 보낸 고백 메일 속 가상의 인물에 푹 빠져버려 그 가상의 인물이 친 것으로 되어있는, 카시마가 친 서툰 피아노 연주만 들으면 가상의 인물이 떠올라 저렇게 펑펑 운다는 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치요는 특이한 장르를 파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오타쿠처럼 난감했다.

 "사쿠라의 같은 반 친구인 저 남자아이가 사쿠라네 반에서 개최한 고백 메일 보내기 대회에서 고백 메일을 받아 평가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보낸 고백 메일 속 가상의 인물에 푹 빠져서 그 가상의 인물이 친 것으로 되어있는, 네가 친 서툰 피아노 연주만 들으면 가상의 인물이 떠올라 저렇게 펑펑 우는 거야."

 "노자키!"

 "아... 음... 그래. 그랬구나. 알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웃기는 녀석이네."

 "유즈키!"

 "아니야... 알고 있어. 나도 참 웃기는 놈이지? 노자키가 만든 가상의 캐릭터에 이렇게나 과몰입해선... 하지만.."

 이토가 또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노자키는 자기가 초래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진엔딩을 본 후 게임 BGM을 다시 들으며 울컥하는 미코시바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 그 서툰 연주 말이야... 다시 들려줄 수 있을까? 이상한 부탁이긴 하지만... 꼭 듣고 싶어."

 "그래. 딱히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코링, 카시마... 오늘 부활동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러게 말이야..."

 서툰 피아노 소리가 다시금 음악실을 메우기 시작했다. 방과 후의 따스한 햇빛이 피아노를 비추고 이토는 눈물을 머금으며 카시마의 연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때? 노자키. 좋은 소재는 얻은 것 같아? 유키코와 이토의 사랑 이야기라던가..."

 "아니. 쟤네는 사랑 이야기 같다기 보다는..."

 "보다는?"

 "익숙한 멜로디에 과거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추억하는 노인과 그런 노인에게 행복한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아이 같달까..."

 "그건 확실히 순정만화보단... 명작동화네..."

 "카시마!!"

 "으악, 호리 선배? 여긴 어떻게?"

 "어떻게긴 뭐가 어떻게야. 일단 부실부터 가고 이야기.."

 "끄흑..흡...흐흑..."

 "와. 이 녀석 또 우는데. 이 정도면 재능이다. 재능."

 "호리 선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맞아요! 이게 이토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순간인데!"

 "이토 녀석... 난 이해할 수 있어...!"

 "미코링! 도대체 몇 시까지 게임을 한 거야?"

 "어, 어떡하지? 일단 연주 계속해?"

 "당연히 계속해야지! 난 아직 아무 소재도 못 찾.."

 "노자키!"

 "잠깐, 이거 내가 잘못한 거냐?"

 "일단 다 조용히 하고 앉아요! 그리고 가만히 있어! 이토는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울고 있다고! 봐봐! 유즈키가 이토를 가지고 실험하려고 하잖아!"

 "야, 너 간지럼 태워도 지금처럼 계속 울 수 있냐?"

 "유즈키!"

 치요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 친 결과 모든 인원이 차분히 음악실에 앉아 카시마의 서툰 피아노를 감상할 수 있었다. 호리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다시 말을 꺼냈다간 아까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 올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카시마의 목을 낚아채고 부실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사... 사쿠라. 카시마 녀석, 분명 피아노를 잘 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일부러 서툴게 치는 거야...?"

 "하... 제 같은 반 친구인 저기 울고 있는 이토가 제 반에서 개최한 고백 메일 보내기 대회에서, 고백 메일을 받아 평가하는 사람이었는데 노자키가 보낸 고백 메일 속 가상의 인물에 푹 빠져서 그 가상의 인물이 친 것으로 되어있는, 카시마가 친 서툰 피아노 연주만 들으면 가상의 인물이 떠올라 저렇게 펑펑 우는 거예요. 그래서 더 듣고 싶다길래 들려주고 있어요..."

 "어... 음... 그래. 그렇구나."

 호리는 자세를 고쳐잡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카시마의 연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선배 혹시...! 이토가 카시마한테 관심을 가진 걸까봐...? 질투... 인걸까?'

 "노자키... 다음 연극은 부족한 피아노 실력에 고뇌하는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 건 어떨까?"

 '이 연극 오타쿠가...'

 "카시마는 참 잘생겼어. 그치?"

 '이 사람, 결국엔 카시마의 얼굴만 감상하고 있어...'

 "저기요! 유키코의 노력이 담긴 피아노라고요! 집중해서 감상하세요!"

 '이 과몰입 오타쿠가...'

 "거기 빨간 리본 타이인 너도! 노자키 뒤로 숨으면서 자지마!"

 '유즈키... 학교에서 강제로 데려간 연주회의 학생처럼 졸고 있어...'

 

 몇 분이나 흘렀을까. 길고 긴 연주는 유즈키가 대놓고 자기 시작하고 호리가 쪽지를 쓰며 대본 아이디어를 노자키와 나누기 시작할 무렵 끝이 났다. 이토는 퉁퉁 부은 눈을 문지르며 살짝 쉰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카시마... 연주해줘서 정말 고마워. 워낙 유명인이라 네가 인기가 많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학교의 왕자님이라 불리는 것도 이해가 가. 어쨌든 오늘 연주를 들려줘서 정말 고마웠어."

 "어... 어? 그래. 그렇구나. 좋게 들어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이제 더 안 들려줘도 괜찮겠어?"

 "이젠 정리됐어. 이 멜로디를 다시금 들으니..."

 "벨 소리로 매일같이 들었지 않았나..."

 "라이브랑 그거랑 같겠냐. 사쿠라!"

 "아, 알겠어. 미코링."

 "마음이 정리 좀 정리된 기분이야. 유키코를 완전히 잊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해."

 "이토... 실연당한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말을 쏟아내고 있어."

 "오! 그거 괜찮은 소재인데. 고맙다."

 "노자키! 너는 이 상황을 보면서 죄악감이라던가 측은지심조차 들지 않는 거냐?"

 "포기해. 미코링. 노자키, 지금 데드라인이야... 이번 호... 휴재할지도 몰라."

 이토는 그렇게 싱긋 웃은 후 교실을 떠났다. 노자키에게 금쪽같은 소재와 호리에게 백드롭 당한 후 끌려갈 카시마만을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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