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Part. 1
홍연님 리퀘
w.녹
늘 어느 때와 똑같이 서류를 훑고 있었다. 아직 부임하게 된지 얼마 안 된 홍연에게 있어서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공판이 없었기 때문에 당장 다음 날 있을 재판에 관련된 서류를 한 차례 더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바빴을 때 지나가듯 공판에 대해서 추가된 증인이 있으니 확인해보란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보지 못했던 증인의 서류가 끼워져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그런데 또 웃기게도 검사 측 증인이 아니라 피고인 측의 참고인으로 내세워져 있다. 무슨 말을 해서 재판을 엎으려고.... 물론 그가 어떤 말을 내뱉던지 간에 재판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어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 재판으로 끝난다면 문제가 없을 일이다. 하지만 재판 중에는 날카롭게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게 증인이 애인 되는 사람일지라도 대우가 달라서는 안 된다. 재판의 일로 인해서 둘의 사이가 불편해질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번 사건을 맡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증인으로 나선다는 걸 알려주지도 않고. 괜히 섭섭함이 물밀려온다.
어쨌거나 재판은 순조롭게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멘탈 관리도 포함이다. 이런 데에서 흔들려서는 프로 답지 못하다. 답답하게 목끝까지 차오르는 거북함을 삼키고 읽고 있던 서류철을 정돈해 접었다. 가방에 넣어 챙기고 사무실을 나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무겁다. 집에 돌아가면 제 애인과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떴던 게 고작 십 분 정도 전이었는데. 곧 다시 되잡고 기운을 차려보며 웃어보지만 한 켠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좀 늦었네."
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성철의 목소리는 벽 너머에서 뭉개지듯, 조금 작게 들렸다. 특별히 서로 시간을 정해두고 만나는 건 아니지만 유독 늦는 날에는 서로 연락을 하는 편이었다. 평소에 별다른 일이 없다면 마주쳐서 당연하다는 듯이 식사를 했는데. 얘기도 없이 늦어진 탓에 말이 나온 것이다. 딱히 화내거나 하기보다는 감상에 가까운 성철의 발언이었지만 복잡한 심경인 탓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일이 늦게 끝났다고, 그 한마디면 됐다. 괜히 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무심코 툭 내뱉은 것은 결코 의도한 게 아니었다.
"내일 증인으로 선다면서요."
"아. 그거. 그렇게 됐어."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아니라 서류로 본 것은, 남에게 애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같아서 전혀 유쾌하지 못하다. 심지어 퇴근 전에야 알았으니 자신이 가장 나중에 안 셈이다. 그런데 성철은 별 생각도 없이 무덤덤해 보였다. 섬세하지 못한건지, 그냥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둘 중 어느 것이든 그다지 달갑지 않다. 뒤늦게 방에서 나와 애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성철이 홍연의 앞에 섰다. 풀이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앞으로 그림자가 졌고 그게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자기 얘기를 왜 남한테 들어야 해요?"
"뭐?"
"나한테 먼저 말해줄 수 있었잖아요. 말 할 생각은 있었어요?"
서러움이 복받쳐 꺼내지 않으려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금 꺼내지 않고서는 정돈되지 않아 다음날의 공판에 영향이 갈 수도 있었으니 오히려 내뱉고는 잘 꺼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어쩌면 화가 났을 것 같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무서워서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할 것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았다.
"고개 들어."
"... 미안해요. 말 하지 않고는 속상해서 못 버틸 것 같았어요."
"고개 들라고."
많이 화가 났나 보다. 순식간에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의외로 그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이제야 퇴근한 애인 얼굴을 보네. 무덤덤한 낯은 눈을 마주치자 웃음이 번졌다. 어느 때의 퇴근 날과 같게 성철이 홍연을 품에 가뒀다. 다른 점이라면 다녀왔냐는 인사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는 정도다.
"늘 어른스럽게 굴려고 하더니 너도 투정을 부릴 줄도 아네."
"네?"
"나잇값 해서 좋다고."
"애같이 감정적으로 군 게 뭐가 좋아요."
"그게 좋은 거야. 긴장하면서 애쓰지 않고 편하게 구는 모습을 본 거."
달래듯 작고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홍연의 귀에 낮에 흘러들었다.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풀어지면서 따뜻한 품에 녹아들듯 파묻히니 성철이 웃으면서 몸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넌 의욕 넘쳐서 일 할 때 너무 진지하잖아. 너랑 둘이 있을 때 그런 건 사양이야."
그러니까 너랑은 앞으로도 둘이 있을 때 일 얘기는 안 할거야. 단호하게 긋듯이 말하는 그에, 섬세하지 못하긴. 성철은 상상 이상으로 섬세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신이 바보처럼 굴어버린 것 같아서 귀며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성철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하는 편이다. 그도 생각하는 부분이 많겠지만 이게 그 만의 다정이고 표현이었을 것이다.
"... 내일 안 봐줄 거에요."
"바라던 바야. 어디 가서 내 애인이 일하면서 바보같이 굴었다는 말 안 돌게 봐줄 생각 마. "
얄미워. 그렇지만 싫지는 않다. 다 컸다고 생각한 홍연에게 여리거나 어리게만 보이는 부분을 꺼내게 만든다.
늘 어느 때처럼 성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어서와. 홍연은 마찬가지로 답을 한다. 다녀왔어요. 저녁 식탁으로 향하는 걸음이 아까처럼 마냥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성철이 장난스럽게 무게를 실었지만 훨씬 가뿐하게 느껴졌다.
부제. 아마도 그를 사랑하는 많고 많은 이유 중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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