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담아 ■■을 ■■■
여행 끝에, 언젠가 돌아올 너에게
* 6.5까지 메인 및 서브, 사이드, 레이드 스토리 스포일러 포함 (크리스탈 타워, 알렉산더, 오메가, 단골손님 마그라트 등)
* BGM이 중간에 여러 곡 삽입되어 있습니다. 재생 자유
* 라하히카CP / 가내빛전 이름과 설정이 나옵니다
0.
영웅이 사라졌다.
1.
이전에도 이따금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훌쩍 떠나곤 해서 알아채는 게 늦었다. 그는 몇 개월씩 자리를 비우고 먼 우주까지 날아갔다 오기도 하고, 제1세계나 보이드에 방문하기도 하여서 종종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곤란을 겪곤 했다. 링크셸이 닿지 않으면 어디 오지 산간에 또 처박혀있나 보지, 하는 생각으로 기다리다 보면 어느샌가 올드 샬레이안이나 라자한, 그리다니아 등지에서 출몰하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적이 워낙 화려한지라, 이번에도 비슷하게 처치 곤란 의뢰라도 떠맡은 건 아닌가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부재가 한 계절을 넘어가고, 해를 넘어서면서부터 의아해졌다. 시작은 타타루가 고민 가득한 얼굴로 올드 샬레이안의 아고라에서 서성이던 날이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용?”
“어머, 타타루!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발데시온 분관의 문을 열고 들어온 타타루가 대회의실을 두드렸다. 그라하와 함께 서류를 정리하던 쿠루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박 상점의 사장님을 맞이했다. 동그란 모자를 비스듬히 쓴 라라펠은 드물게 근심 가득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 중에 모험가님과 연락이 닿으신 분은 따로 없으신 걸까용?”
“모험가? 아모? 아니? 나한텐 연락 없었어.”
“내게도 따로 연락은 없었는데…. 왜? 급한 일이야?”
“아뇨, 그게 아니라용….”
쿠루루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달리 들은 소식은 없었지. 매번 어딜 가기 전에 얘기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검지 끝을 맞대며 망설이던 타타루가 작은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문제를 알렸다.
“모험가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데, 어제 꿈에 요정님이 연락을 주셨지 뭐예용.”
“요정? 픽시족 얘기하는 거야? 주황색 머리면 페오일 텐데.”
“네, 맞아용. 요렇게 머리를 묶고용, 몇 번 찾아오셨던 요정님이었어용.”
곧바로 알아들은 그라하의 말에 타타루가 두 손을 올려 양 갈래처럼 쥐었다. 페오가 갑자기 타타루에게 왜 연락했지? 잠시 그가 또 제1세계로 넘어가 크리스타리움의 수정 동상을 종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모험가님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해서용….”
“어?”
“다른 세계로 넘어가도 꿈으로 지켜볼 수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모험가님이 있는 곳을 확인해달라고 했어용….”
세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아무리 픽시족이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단순히 엿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요청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정공으로 살았던 시간이 긴 그라하만큼은 알았다. 이건 페오 울이 보내는 경고였다.
2.
“어디 신대륙 구석까지 들어가서 원시생활이라도 하는 거 아니겠나.”
긴급히 소집된 새벽의 회의실 구석에 기대 선 에스티니앙이 팔짱을 끼고 툭 의견을 제시했다. 머리를 헤집은 산크레드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전 세계 어디 있든 잠은 잘 텐데, 꿈을 볼 수 없다는 건 적어도 원초세계 안은 아니란 소리겠지.”
“그런 편리한 능력이 다 있었군.”
“픽시족이 드나드는 꿈은 세계의 경계가 희미해서 그렇습니다. 거울세계나 원초세계 정도는 얼마든지 건너뛸 수 있지요.”
위리앙제가 근심 어린 얼굴로 설명을 덧붙이며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야슈톨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기껏 해산했던 새벽의 혈맹이 다시 모이는 계기가 영웅의 행방불명이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적어도 보이드와 제1세계, 원초세계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거울 세계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은데…. 꿈을 통해 접근할 수 없다면, 외부 간섭이 쉬운 곳이 아니란 뜻이겠죠. 정확한 것은 더 파봐야 알겠지만…. 이거 또 쉽지 않은 일이 되겠어요.”
"하아…. 그 사람은 쉬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일에 휘말린 거야? 아니, 뭐라고 탓하는 건 아니고. 걱정하는 쪽 생각도 좀 해줬으면 좋겠어서."
알리제가 한숨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턱을 괴고 고민하던 알피노는 줄곧 말이 없는 그라하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나?"
"응? 아. 그게…. 거울세계에 가장 깊게 관여하던 원형 아씨엔은 전부 사라졌잖아? 그런데 남은 아씨엔…. 그러니까, 윤회자 같은 경우에는 원형보다 능력이 훨씬 제한적이라 거울세계에 간섭할 순 없었을 거 같아서. 제1세계만 하더라도 다른 아씨엔이 아니라 원형인 에메트셀크가 직접 오기도 했고."
"그렇지. 아씨엔이 없는 마당에 거울세계의 균형이 기이할 정도로 무너지진 않을 거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더 어려워지는군…. 애초에 우리가 가본 적 없는 거울세계를 관측할 방법이 있나?"
알피노의 물음에 발데시온 분관 대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글쎄. 산크레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장담은 못 하죠. 야슈톨라도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팔짱을 낀 채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알리제는 한 손을 들어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꼭 거울세계로 갔을 거라고 단정할 순 없지 않아? 그 사람이라면 우주 끝에도 갔다 왔으니, 다른 곳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잖아. 만 이천 년 전 고대에도 갔다 왔는데…."
"아."
"아?"
여럿이 동시에 감탄사를 뱉었다. 시선이 저에게로 몰리자 알리제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뭐야, 왜? 그라하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한탄하듯 말했다.
"다른 시간대로 빠졌을 가능성도 고려해야겠네…."
"첩첩산중, 갈수록 태산이로군요."
"하….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 좋아요. 도전정신을 자극하네요."
허공을 보며 읊는 위리앙제 옆에서 야슈톨라가 의욕적으로 웃었다.
3.
먼저 영웅의 소지품을 확인했다. 그가 소유한 아파트의 열쇠는 그라하가 가지고 있었기에, 집에서 개인 물품을 확인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불이 꺼진 난로와 빼곡한 책장, 바닥에 어지럽게 쌓인 책. 모든 것이 그가 사라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책 표지 위에 쌓인 먼지를 손끝으로 쓸어본 그라하는 후 불어 날리고 고개를 돌렸다.
"환기라도 해야 하나…."
커다란 창문을 열자 바람이 내부를 훑고 지나갔다. 곳곳에 스민 그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훅 지나갔다. 환기를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저지 라노시아의 하늘이 우중충했다. 유리창이 닫히자마자 거센 빗줄기가 후두둑 쏟아졌다. 창고 한구석에 걸어둔 마른 꽃다발을 보던 그라하가 손을 뻗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진 꽃이 손에 묻어났다. 언제 준 거였더라. 그리다니아의 꽃집에서 사 왔다고 했다.
사실 아무 때나 편하게 쓰라고 열쇠를 준 것 치곤, 아파트는 정말이지 숙소의 역할을 눈곱만큼도 못했다. 매번 책장 한가득 쌓인 자료를 뒤져서 읽고, 여기저기서 모은 희귀 판본을 들고 토론하고, 종일 읽다 지쳐 카우치나 바닥에 널브러져 잠들곤 했으니 실상 발데시온 분관이나 누메논 대서원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라하는 문득 책장의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칸과 칸 사이의 틈에 손가락을 넣고 긁어서 당기니, 문처럼 열렸다. 그 뒤에는 온갖 마도서에서 떼온 수식과 이론을 뒤섞은 마법진이 붙어 있었다. 야슈톨라가 연구하던 세계를 건너는 마법? 그보다는 수정공이 실현했고, 아젬의 크리스탈로 체험한 소환 술식에 가깝다.
"아냐. 소환이라기보다, 이건…."
전송이 더 옳은 명칭일 것이다. 누군가를 당겨오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곳으로 보내는 술식. 하지만 완성된 게 아닌데? 목표 좌표도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냥 말 그대로 연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붙였다 떼며 시험해본 흔적이다.
순간 그라하는 핏기가 발목을 통해 밑으로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하는 예감이다. 아니겠지. 하지만, 진짜라면? 그가 만일, 미완성된 술식을 실험하다 불의의 사고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날아갔다면.
….
그라하는 창백한 얼굴로 종이를 꺼내 문 뒤의 술식을 빠르게 베껴 그렸다. 주변에 널브러진 이론서 중에서 관련된 서적을 제목만 보고 뽑았다. 그와 함께 몇 날 며칠이고 밤이 새도록 떠들어댔으니 어떤 책에서 무슨 이론을 참고했는지 훤히 알았다. 하지만 이 술식을 같이 연구한 건 아니었어. 그가 홀로 연구해서 깜짝 선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당장 새벽의 혈맹에만 해도 제1세계에 다시 보고 싶은 얼굴을 두고 온 사람이 여럿이었으니.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
두 손 가득 책과 종이를 끌어안은 그라하가 창백한 얼굴로 책장 뒤의 술식을 응시했다. 다시 시동을 건다고 해서 동일한 곳으로 날아가리란 보장은 없다. 둘 다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져 미아를 둘로 만드는 것보다 그를 끌어오는 게 낫다. 어디에 있는지만 찾으면, 수정공이 썼던 술식을 개량해서든, 크리스탈 타워를 조작해서든 방법은 만들면 된다.
단 한 가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된다.
4.
사라진 영웅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많은 지식인이 손을 보태었다. 그가 구한 세계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 것이다. 특히나 리틀 샬레이안에 있던 학자들이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세계의 온갖 학회의 권위자를 동원하여 영웅의 술식을 파훼했다.
내로라 하는 굴지의 천재들이 머리를 맞대었는데도, 영웅의 술식을 완전히 복원하지 못했다. 아니, 아직 2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더 연구하다보면 실마리가 잡힐 지도 몰랐다. 세상을 넘는 것이 목적인데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우주 끝까지 가는 것과 세상의 벽을 넘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려운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어둠이 흘러넘쳐 구멍이 뚫린 보이드보다는 벽이 견고해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정공이 제1세계에서 영웅과 새벽의 혈맹을 끌어당긴 일만 해도, 실패를 거듭한 끝에 단 한 번의 성공이지 않았나. 그 마저도 사람의 에테르로는 감당할 수 없어 크리스탈 타워의 힘을 빌렸다. 당연히 영웅 혼자서 시동했을 미완성 술식과는 궤가 다를 것이다.
그쯤에서 새로운 가설이 나왔다.
에테르가 아니라 뒤나미스를 이용한 술식일 가능성은?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려면 이곳 행성 하이델린이 아니라 울티마 툴레에 가서 시도하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를 추적하는 일에 난항이 생겼다. 하다못해 술식을 발동했던 에테르의 흔적을 채취하기 위해 그의 아파트에 연일 연구원이 들락거렸다. 사적인 공간이 점점 흐트러졌다. 그라하는 차마 저지하지도 못하고 이마를 문지르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5.
그를 찾기 위해 별바다 밑바닥까지 뒤져보고 왔다. 기진맥진한 산크레드가 손을 내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없었어. 녹아내리다 만 흔적도 없었다. 적어도 죽어서 별바다에 떨어진 건 아닌 모양이야.
아니면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거나.
후자는 말로 꺼내지 못하고 삼켰지만, 얼추 짐작은 했다. 그래도 야슈톨라와 그라하는 그가 죽지 않아서 없을 가능성을 높게 쳤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 보기 싫다고 숨어버릴 사람은 아니지.
때마침 위리앙제가 레포릿의 도움을 받아 에테르를 추적할 방법을 완성해 왔다. 많은 에테르가 필요하니 크리스탈 타워에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라하 티아는 크리스탈 타워의 문을 열며 불쑥 떠오른 생각을 저편으로 묻어두었다.
6.
영웅이 사라진 후로 6년이 지났다. 그의 에테르를 추적하는 술식은 여전히 불발되었다. 그의 소지품이 떨어진 곳과 흔적이 남은 장소까지 찾아낼 수 있었는데, 오로지 그들의 영웅만이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서서히 모였던 연구진 중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우리에겐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후에 뭐라도 발견하게 되면 알려주세요. 그 땐 달려와서 도울게요."
가장 바쁜 연구원들이 빠지고, 각지에서 돕던 사람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언제든 요청하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는 있지만. 영웅을 찾기 위해 모였다가 전송 술식과 에테르 추적에 흥미를 느끼고 그대로 눌러앉아 만들어진 연구팀만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각지에 퍼져서 단서를 찾고 있는 새벽의 혈맹도.
7.
실패. 실패. 실패.
번번이 실패한다. 연구와 실험은 본디 실패의 연속이다. 또 새로운 시도에 실패했지만 괜찮다. 몇 번이고 시도하다 보면 어느 하나쯤은 얻어걸릴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의 성공을 검증하여 다시 재연하면….
"라하!"
불쑥 부르는 목소리에 그라하가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켠 쿠루루가 심각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바닥에 난잡하게 흐트러진 수식과 검산 과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곳을 어떻게든 걸어서 안으로 들어온 쿠루루가 그라하의 어깨를 짚었다.
"너 벌써 며칠째 잠도 안 자고 이러는 거야? 제발 부탁이니 좀 쉬어."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아냐, 선배. 괜찮아. 이런 건 원래도 익숙하고…."
"넌 이제 수정이 아니잖아, 그라하. 지금 네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아?"
미간을 찌푸리고 타박하던 쿠루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후두둑, 하고 종이 위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손등을 갖다 대었더니 피범벅이 되었다. 그라하는 난감한 얼굴로 휴지를 뽑아 코를 막고는 쿠루루가 다가오지 못하게 손을 뻗었다.
"이런…. 정말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고 그냥 갑자기 코피가 터졌어. 조금 쉬면 나아질 거야. 숨기는 거 아니고 진짜로."
"…. 네가 그럴 거 같아서 불러왔어."
"뭐, 누구를?"
"그라하 티아."
벽과 바닥을 빼곡하게 종이로 채운 방의 문턱에 익숙한 그림자가 섰다. 위로 길쭉한 남자는 빛을 등지고 그림자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누군지 훤히 보였다. 위리앙제가 참담한 얼굴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계실 거라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늦게 온 모양이군요."
"아…. 어서와, 위리앙제. 뭔가 알아낸 게 있는 거야?"
"….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뭐?"
놀란 눈이 길쭉한 엘레젠에게로 향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통에 바닥에 흩어져 핏자국이 묻은 종이가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그라하는 손과 얼굴에 피를 묻힌 채로 위리앙제에게 다가갔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빛이 발치에 닿았다.
"우선…. 좀 진정되면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들으셔서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 미안해. 많이 어수선하지? 금방 치울게."
붉은 꼬리 미코테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발과 팔을 휘적거려 대충 길을 트고, 탁자 위의 난잡한 책도 밑으로 밀어내 자리를 만들었다. 쿠루루는 난감한 듯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기대하시면…. 난감합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은 뭐라도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어."
맞은 편에 털썩 자리 잡은 그라하가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며 물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은 위리앙제는 자꾸 말을 망설였다. 그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그라하 역시 허리를 펴고 자세가 바뀌었다. 심각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고 싶어도, 이젠 그럴 수 없었다. 위리앙제는 몇 번쯤 보았던, 괴로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이제는…. 다른 안배를,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안배라면?"
"그가 너무 먼 미래나, 너무 먼 과거로 갔을 가능성을, 말입니다."
탁자 위로 침묵이 깔렸다. 기실 모두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던 말이었다. 그라하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이 피가 식는 느낌과 동시에 위리앙제가 또다시 모진 역할을 맡은 현실에 말을 잃었다. 언제나 가장 냉정한 현실을 알리는 전령으로 그가 선택되는가. 이미 한 번 그에게 같은 역할을 맡겼던 전적이 있는 그라하는 더욱 할 말이 없었다.
壹.
생각해보면, 제8재해가 일어났던 시간선에서도 빛의 전사, 영웅의 죽음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대로 200년이 지났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미코테의 평균 수명을 아득히 넘는 시간이니 당연히 모든 사람이 그가 죽었으리라 여겼다.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죽음이다. 재해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의 장례는 열리지 않았고, 빈 관이라도 문객을 맞을 일이 없었다. 안다. 이 세계에서 그가 죽은 이후의 시간을 아는 사람은 그라하 하나 뿐이다. 그는 멸망이 확정된 세계의 미래를 등에 업고 과거로 돌아갔으니 더욱 절절하게 알았다.
이미 종말의 위협을 넘었다고 해서 이 세상에 영웅이 필요하지 않을 일은 없다. 그가 가진 힘이나 엮인 권력자들 혹은 지식과 재물마저 탐내는 이가 많지만, 그런 것보다 영웅은 이미 그들의 친우이자 동료, 가족으로서 자리매김했다. 뭐, 누구는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그정도로 소중히 여긴다면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충분히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貳.
당연히 이해한다. 원초세계는 활동적이고 어디서든 살아만 있다면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그런데 원초세계도, 하다못해 거울세계에도 없다면, 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별바다를 뒤져봐도 없는 건 그가 적어도 최근에 죽지 않았다는 뜻이지, 까마득한 과거로 넘어가 죽었다면 지금쯤 윤회를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가 알고 있다. 어쩌면 그를 영영 찾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參.
어디에 누가 사는지 제대로 기록도 안 되는 세상이다. 평균 수명이 60년이라고 해서 정말 60살까지 살아남진 못한다. 사람은 쉬이 죽고, 쉬이 병들고, 쉬이 사라진다. 어디선가 소리소문없이 비명횡사하는 자가 한 해에만 몇 명인데. 통계를 내본 적이 없으니 제대로 기록된 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전 세계 인구조사를 실시하거든 구멍 난 곳이 한 두곳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세계와 시간마저 넘나드는 사람이다. 지평선과 수평선은 그를 가로막지 못한다. 하늘 너머 우주 끝에도 가본 사람이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달에서도 걷고 만 이천 년 전의 과거를 목격한 산증인이다.
肆.
한 번 시간을 돌린 후, 그전에 있었던 미래가 지워지는지 그라하는 모른다. 알렉산더의 케이스를 분석해보면 순환하는 시간도 존재했다. 그러나 엘피스의 사건을 생각해도 순환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어디에도 지나간 미래를 관측하거나 기록된 바가 없다.
그렇겠지. 바뀐 과거에서 연장된 미래이니 다른 미래의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수정공과 크리스타리움, 하나뿐이다. 유일무이한 기록이 지금 세계의 벽 너머에 있는 상황에서 연구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페오를 통해 꿈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수고로운데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라하는 포기할 수 없었다.
7.
"아직 8년밖에 안 지났어."
"벌써 8년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본 게 아니잖아."
"이제는 최악의 경우도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난 200년도 다시 버티라고 하면 그럴 수 있어. 그라하는 뒷말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던 그라하는 저를 바라보는 위리앙제와 쿠루루의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위리앙제는 천천히 손끝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저라고…. 저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짐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포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 겁이 나서 차마 입밖으로 내지 않는 가정을 말해야만, 말해야만…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쿠루루가 위리앙제의 팔을 잡았다. 그를 지지하는 손길에 위리앙제는 손을 겹쳐 잡고는 스스로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영웅이 돌아올 수 없는 세계나 시간대로 날아갔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아주 먼 미래나 과거에 돌아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도착하여 너무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도록, 우리가 무엇이라도 안배해둘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 크리스탈 타워."
상체를 숙이고 이야기를 듣던 그라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붉은 눈이 탁자 위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종이 위를 헤집고 다녔다.
"크리스탈 타워를 쓴다면 안배할 수 있어."
8.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절망하며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곗바늘이 움직이고 달력이 넘어갔다. 더 지체하다가 그가 돌아올 자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쿠루루는 겉으로는 멀쩡하게 굴어도 밤낮없이 영웅의 행적에 매달리는 그라하를 걱정했다.
그렇다고 그를 말리기엔 너무 절박해 보였고, 이미 스스로 길을 정한 어른이기에 방해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쿠루루 역시 영웅이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그가 뭐라도 해내길 기도할 뿐이다.
"돌아올 거야."
"…."
"돌아올 거야."
그라하는 자신에게 되새기듯 말을 반복했다. 어쩌면 단순한 기원이 아닌 주문 같기도 했다. 야슈톨라는 세계가 나눠진 이후의 마법과 주술은 그런 간절한 기원에서 출발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주문이 맞다고 했다. 마음의 힘으로 움직이는 마법이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종이 하나를 붙들고 수식을 써 내려가고 검산하고 다시 증명하기를 반복하던 그라하가 문득 손에서 펜을 떨어트렸다. 툭, 데구르르. 가벼운 것이 구르는 소리에 쿠루루가 고개를 돌렸다.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라하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라하? 왜 그래?"
"…어."
"응?"
"알아냈어."
붉은 꼬리가 휙 허공을 휘저었다. 이내 주먹을 꽉 쥔 그가 돌아섰다. 피로에 찌든 모습을 하고서도 눈이 생기로 넘쳐흘렀다. 쿠루루는 말을 채 듣기도 전에 휘둥그레 눈을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아냈어!"
α.
남자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눈을 찌르는 빛에 팔뚝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잠시 명순응을 위해 기다렸다. 여긴 어디지? 낯선 곳이다.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눈을 뜬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딘지 분위기는 달라도, 길가의 가로수나 까마득히 높은 건물은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라, 이건 또 뭐지."
불쑥 말을 걸어온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발끝까지 오는 새까만 로브, 얼굴을 가리는 투박한 흰색 가면. 후드 아래로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남자와 비슷한 갈색이었다.
"어디서 왔어? 사역마?"
"…."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운 듯 그를 훑어보던 흰 가면이 씩 웃으며 손을 튕겼다. 경쾌한 움직임은 익히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 그립고도 새롭기도 했던.
"너구나? 아젬의 사역마라던 게."
경쾌한 물음에 모험가는 다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있던 입매가 쭉 내려간 흰 가면의 고대인이 다시 물었다.
"내가 아젬인데. 넌 누구야?"
9.
"이걸 확인해줘."
그라하는 넓은 회의용 탁자 위에 도식과 수식, 책을 하나씩 펼쳐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도면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탁자를 둘러싼 새벽의 눈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탁자를 짚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울티마 툴레에서 존재 자체를 소비해서 뒤나미스의 힘으로 숨 쉴 수 있는 영역을 유지하던 거 기억해?"
"아, 그거 말이지. 바람이 불고 길을 잇던 거."
가장 먼저 길을 내었던 산크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존재한다는 인식 외에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가 덧붙였음에도 핀잔은 없었다.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던 그라하가 설명을 이었다.
"한 사람의 존재를 고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값이 무엇일까? 에테르? 하지만 모든 생명은 에테르를 가지고 있어. 이 에테르 덩어리와 저 에테르 덩어리를 구분하는 기준은 뭐지? 우리는 모두 나와 너를 명확히 구분하여 전혀 다른 개체로 인식하고 있잖아. 각각의 개체를 인식하는 가장 최소 단위가 무엇이냐는 거야."
"에테르 같은 물리적인 단위는 아니겠네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제하는 게 좋겠어요."
야슈톨라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그나마 알피노는,
"생김새나 나이, 종족…. 하지만 이런 것은 전체는 아니어도 일부 집단이 공유하는 공통점이지."
하고 말을 덧붙였다. 알리제는 머리를 잡고 고민하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위리앙제 역시 몇 가지를 손으로 꼽았다. 그러나 답을 조금 기다리던 그라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퀴즈도 아니고, 강의도 아니니까. 바로 정답을 말해도 상관없었다.
"그래. 뭐 생김새나 나이, 종족, 성별… 이런 것도 개체를 구분하는 정보값이 되긴 하지만, 가장 근본은 따로 있어. 이름."
마법진의 테두리를 두 손으로 짚은 그라하가 다시 강조했다.
"이름이야."
탁자를 둘러싼 일행의 시선이 커다란 마법진으로 향했다. 야슈톨라는 그것이 영웅의 개인 공간에서 나온 전송 술식임을 알아보았다. 한동안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결정적인 값이 빠져 있어 결국 미완으로 남은 것.
"잘 봐. 아모가 남긴 건 전송 술식이지, 왕복 통행용 술식이 아니야. 한마디로 가는 것만 가능한 일방통행이란 뜻이지. 수정공일 때 너희를 소환할 때 쓴 소환 술식과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어. 여기서 우리가 이 전송 술식을 완성하려다 실패한 가장 결정적 이유는,"
"목표 지점을 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팔짱을 끼고 듣던 야슈톨라가 말을 완성했다. 그라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문제였다. 영웅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다른 세계나 다른 시간대로 향하는 좌표 설정은 맨땅부터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당장 관측한 적 없는 거울세계의 텔레포 좌표조차 모르는데, 미지의 목표지점 설정은 불가능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그라하는 다른 종이를 하나 꺼내 마법진 위에 올렸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어. 목표 지정이라고 하니까 말 그대로 물리적 좌표만을 떠올린 거야.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당연히 목표 설정은 번번이 실패하고, 마구잡이로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성공할 리가 없지.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아모의 에테르를 추적하려고 했어."
"그런데 어디서 실마리를 얻은 거예요?"
"그거 있잖아. 모험가들끼리 하는, 언약."
아.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영웅은 지금껏 누구와도 언약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도 언약을 한 사람은 주변에서 드물게라도 볼 수 있었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찾는지 안다. 언약용 텔레포를 떠올린 야슈톨라가 턱에 주먹을 대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반지에 새겨진 상대방의 에테르를 따라가서 그 에테르가 자리한 지점으로 텔레포를 실행하는 방식이었죠, 그건. 에테라이트를 쓰지도 않고, 달리 사용하는 에너지원이 있는 게 아니어서 재시전에 텀이 길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런 건 단점이 아니에요."
"그렇군. 하지만 그는…. 언약 상대가 없지 않나.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으로 에테르를 추적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기준을 찾은 거야."
그라하는 이제 마법진 위에 빈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수식을 계산하여 보조 술식을 옆에 그리고, 다시 암산해서 결괏값만 적었다.
"기억은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라, 에테르를 덧씌워 지우더라도 별바다에 가면 녹아내려 다시 돌아온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름도 그렇지 않을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지고 사는 이름이라면 영혼에 새겨질 지표로 사용될 수 있을 거고, 동시에 우리가 그를 찾을 실마리가 되기도 할 거야."
"논리는 그럴듯해요.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있는 곳까지 추적은 이 보조 술식으로 진행하는 건가요?"
"맞아. 하지만 전송 술식은 일방통행이라고 했잖아? 그의 이름을 추적하더라도 여기까지 끌어당기려면 양쪽 모두 단단하게 지탱해줄… 비유하자면 말뚝이 필요해. 우리가 그를 부르는 수많은 별명 역시 이름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더 명확하게 그의 존재를 이곳에 고정하려면 이름 같은 확실한 지표가 필요하지."
눈을 빛내던 두 명의 마도사가 시선을 마주했다. 야슈톨라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에 영향력을 부여하면 될까요?"
"이름에 영향력을 주는 건 명성이지. 책이든 신문이든 라디오든, 그 녀석 이름을 많이 부를수록 좋겠어."
곁에서 듣고 있던 산크레드가 한숨을 푹 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골치 아픈 이론은 잘 모르겠으니 결과만 얘기하자고. 저번보다 표정이 편안해진 위리앙제가 그 위에 덧붙였다.
"달에 있는 방송국의 레포릿들에게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래! 거기라면 전 세계가 아니라 우주까지도 방송될 테니, 더 효과적이겠네!"
"그럼 나는 지상에서도 영향을 줄 방법을 찾아보겠네."
르베유르 가의 쌍둥이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그라하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이것은 언제나 그의 영웅이 보여주던 광경이다. 희망이 들어서는 감각. 동 터오는 아침 녘과 별이 빼곡한 밤하늘을 바라보던 날처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쿠루루가 그라하의 등을 툭 치며 웃었다.
"너도 참 그 사람이랑 많이 닮았다니까."
"하하…."
그라하 티아는 잉크로 검게 지저분해진 손끝을 뒤로 숨겼다.
β.
"음~. 시간의 미아라.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그래도 문제 해결은 아젬의 몫이지."
팔짱을 낀 고대인이 모험가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아주 오랜만에 본 고대의 도시는 아모로트와 흡사하지만 다른 모양이었다. 아젬의 말로는 아모로트가 아닌 외곽의 도시라고 했으나, 이름을 들어도 어딘지 모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 여기구나. 네가 떨어진 곳이? 좋아. 어디 보자…. 시간의 틈새를 찾아볼게."
"….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응? 뭔데? 물어봐.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줄게."
돌아보지도 않고 허공에 생긴 균열을 살피던 아젬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먼 미래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아,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니. 그래서 그랬구나.' 같은 말만 했을 뿐,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14분의 9조각짜리 자신의 파편에 흥미를 가지기도 했고, 꽤 호의적이었다.
"―는 잘 지내?"
"응?"
손이 멈췄던 아젬이 그를 돌아보았다. 가면의 동그란 구멍 안쪽으로 고대인 특유의 빛나는 안광이 휙 날아와 꽂히는 듯했다. 아젬은 다시 능청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아~, 걔? 음. 뭐, 늘 지내던 대로지.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고, 화도 많고."
그렇게 대답한 아젬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작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어. 그렇지 않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네가 본 바다에 닿겠지. 자, 됐다! 문이 열렸어. 이쪽으로 가면 될 거야. 그쪽에서도 널 찾고 있는 거 맞지?"
손을 툭툭 턴 고대인은 동그랗게 커진 균열을 가리켰다. 그가 뚝 떨어졌을 때에 비하면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긴 했다. 균열 주위로 빛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술식을 물끄러미 보던 모험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과거의 잔재를 향해 웃었다.
"잘 있어, 라케시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젬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
널 기다리는 자들이 널 위한 등대가 되어줄 거야. 작게 속삭이는 인사가 인식의 끄트머리에 남았다.
10.
영웅이 사라진 후로 9년이 지났다. 그라하 티아는 어쩌면 마지막일 시도를 앞두고 두 손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축축하게 밴 땀이 미끈거려 바지에 문질러 닦았지만, 도로 차오른 탓에 별 의미는 없었다. 실패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언제나 이런 시도는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잖은가.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만약, 만약 또 실패하면? 그럼 다시 시도해야지.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어. 정말 안 되면 크리스탈 타워로 다시 들어가 그를 찾을 방법을 구할 때까지 잠에 들거나, 아니면 먼 미래나 과거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며 시간을 건너뛰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제8재해가 일어난 이후의 이론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크리스탈 타워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페오의 도움을 받아 제1세계의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정말로, 그라하 티아는 가능하다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수백 년의 동면 정도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한 번 한 것을 두 번이라고 못하겠는가? 물론, 그때는 두 번 못 할 짓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그에게 위험이 닥쳤다고 생각하면 그까짓 100년이야 세 번도 반복할 수 있다. 그쯤 되면 300살 먹은 이례적인 미코테가 되어 더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수준의 무언가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때야, 세상을 구원할 사람이 그 한 사람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말이다. 이번만큼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맹목적인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한때 그를 잃었던 세계의 절망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를 사지로 밀어 넣었던 순간의 죄책, 그가 한 번도 자신에게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에둘러 밀어내었던 과거를 향한 후회일 수도 있겠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보자. 그라하 티아는 그에게 사죄하던, 감사를 하던, 아니면 원망을 늘어놓거나 화를 내더라도 제발 그와 마주하고 싶었다. 벽이나 허공을 향해 한탄하고 화내는 것은 꼴사나웠다. 의미도 없고. 차라리 죽어도 눈앞에서 죽으라고. 울티마 툴레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을 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도, 이렇게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돌아오면 그에게 약속을 받아낼까. 어디 가면 간다고 연락이라도 해달라고. 붙잡아 놓는다고 붙들릴 사람이 아니라 거창한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좀 살아있다고 얘기라도 해주면 좋겠다. 연락이 안 닿을 곳으로 떠날 땐 가기 전에 귀띔이라도 해주고.
"시작할게요."
술식을 둘러싸고 마도사 여럿이 섰다. 바닥에는 대형 마법진이 그려졌다. 사라진 영웅의 에테르를 좇아 이곳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마법이다. 그라하는 수평선에서 다가올 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부둣가에 서듯이 마법진 귀퉁이에 섰다.
깡!
수정으로 장식된 지팡이가 바닥을 내리쳤다.
11.
에테르가 흘러간다. 새까만 별바다를 유영하던 그는 곁으로 스쳐 가는 파편을 보았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 ■▒. ▒모…! ▒ㅏ,■! 수없이 많은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다. 모험가는 자연스럽게 그를 이끄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흐름 속에서 그가 보고, 듣고, 겪었던 많은 사건이 현재이자 과거이자 미래인 것처럼 지나쳐간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빠르게 멀어지고 곧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모!"
지나치게 밝은 빛 때문에 그는 눈을 찌푸렸다. 손으로 다시 눈꺼풀 위를 가리고 명순응을 위해 기다리자 주위에서 거칠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다. 여럿? 어디 이상한 데로 떨어졌나? 모험가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손을 내렸다.
"…이, 바보, 멍청이!"
옆에서 큰 목소리로 알리제가 소리쳤다. 아하, 작게 실소를 흘린 모험가는 멋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커다란 마법진 한 가운데에 주저앉은 그를 향해 마주 서 있던 그라하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서와."
목소리는 갈라졌고 눈 밑은 거뭇했다. 어찌나 피곤에 절어 있는지, 꼭 며칠 동안 마법 대학에서 통조림처럼 지내던 대학원생 같아서 아모는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걱정했냐고 물어보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그가 굳이 내색하려 하지 않아서 콕 짚어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모험가는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왔어."
씩 웃어 보이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라하의 표정도 조금씩 풀렸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아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팔을 벌렸더니 그가 부들부들 떨었다. 옆에서 이익! 하고 알리제가 알피노에게 잡힌 채로 허공에 발길질했다.
"당신 얼마나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는지 알아? 그동안 얼마나, 얼마나…!"
"알리제, 그도 방금 막 돌아왔으니 일단 진정하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나도 충분히 이해는 한다만!"
"음…."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모험가가 눈을 굴렸다. 마주친 산크레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을 곁눈질했다. 목숨을 조심하라는 듯이 손을 목 앞에서 털기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슈톨라는 힘이 쭉 빠진 듯 두 손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돌아왔으니 됐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지만."
"아…. 그럼, 일단."
모험가가 입을 열자 시선이 모였다. 그는 여전히 손을 꽉 잡고 있는 그라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자고 다시 얘기할까?"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그의 위로 푹 쓰러진 통에 온몸으로 그라하를 붙잡은 모험가가 어색하게 웃었다. 쿠루루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종이와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걔, 요즘 일주일에 2시간씩 잤어."
지은 죄가 너무 컸다.
12.
푹 쉬도록 놓아주고 싶어도 그라하가 꽉 붙든 손을 놓질 않아 아모는 그대로 그와 함께 발데시온 분관의 휴게실로 직행했다. 꼬박 16시간이 넘게 자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라하는 곁에 있던 모험가를 보더니 멱살을 쥐고 흔들다 다시 잠들었다.
비몽사몽 중에 한 짓 같은데 얼마나 억하심정이 쌓였으면. 아모는 조용히 자기 죗값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
남몰래 눈물 흘리던 모험가는 그렇게 사흘이 넘게 휴게실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후에야 겨우 석방되었다.
5천자 정도나 쓸 줄 알았는데 만8천자가 되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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