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된 기만
빛전수정 / 5.0까지 스포일러
가내빛전 설정있음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야슈톨라가 영웅의 상태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돈 바우스리가 콜루시아 섬 굴그 화산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율모어의 시민을 움직여 사닥다리 승강기를 기동하면서도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갈색 머리의 미스텔족, 새벽의 영웅이자 어둠의 전사. 사람의 동경을 한 몸의 받는 영웅은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비스듬하게 섰다. 계속된 전투와 누적된 피로 탓에 눈 밑이 거뭇하고 제대로 다듬지 못한 털은 푸석했다. 축적된 빛은 그를 갉아먹는다. 대죄식자를 연달아 넷이나 처치하면서 그의 안에 쌓이고 쌓인 빛이 그의 균형을 어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곤 피로 뿐인 아모를 빤히 쳐다보던 야슈톨라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더 묻지는 않을게요. 당신에게 준비한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까.”
“믿어주어…고맙군.”
“나는 아직 완전히 당신을 신뢰한 게 아니에요. 단지 지금까지 당신이 그 사람을 위해 보인 헌신, 그것을 근거로 움직일 뿐.”
야슈톨라의 날카로운 말을 수정공이 웃음으로 흘려넘겼다. 마녀 마토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위리앙제가 보증한다면 분명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긴 시간 새벽의 동료로서 지내온 자의 말이다.
굳이 들춰보려는 것은 얼굴 한 번 보인 적 없는 조력자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하나뿐인 영웅의 안위를 걱정하기 때문이리라. 그 깊은 애정에 수정공은 다시금 입맛이 씁쓸해졌다. 영웅을 아끼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말 뿐인 호소는 또 얼마나 공허한가.
부디 나를 믿어주게.
수정공은 후드 아래 그림자로 표정을 숨긴 채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환대와 응원을 받는 영웅은 낮에나 밤에나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참으로 그가 동경해 마지 않는 모습이 빛바랜 흔적 없이 생생하다. 눈이 마주친 영웅은 처음 노르브란트에 떨어졌던 그 날처럼 한결같은 미소를 수정공에게 보냈다.
율모어에서부터 정다움 마을까지 온 사람들을 두고 영웅이 걸음을 옮겼다. 갈색 머리의 미스텔족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도사 답지 않게 보폭이 크고 당당한 걸음걸이는 차라리 투사에 가깝다. 탄탄한 몸은 오로지 전투를 위해 단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실로 그는 싸움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책으로 읽고, 이야기로 전해 듣고, 먼 발치에서 보았던 영웅이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수정공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해가 지지 않는 하늘 아래에선 영영 녹슬지 않는 청동상 같기도 하였다.
“수정공, 할 말이 있어?”
“…아니. 그렇지는 않다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나를 쳐다보기에. 또 당신에게 내가 필요한 일이 생겼나 해서.”
그가 입을 열면 신화 속의 영웅은 한순간에 생명을 얻어 사람이 되었다. 떨떠름했다. 그는 본디 육과 혼과 백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어느 아씨엔에게 반박했던 것처럼, 도구나 병기가 아닌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서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여가며 그가 지치지 않도록 돌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을까? 아니면 그에게 부담이 되었나?
머릿속으로 갖가지 상념이 부상했다가 가라앉았다. 노르브란트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험한 전투를 잇다라 겪은 탓에 지쳤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매번 자신에게 무리하지 않았다고 둘러댔으나, 펜던트 거주관으로 들어가면 죽은 듯이 잠든다는 걸 알았다. 때로는 문앞에 서 있기만 해도 알아채는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는 동안 깨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오해는 달갑지 않군.”
수정공은 뻔히 그의 몸에 쌓이는 부담을 알면서도 함구했다. 그것은 곧 해결될 문제일뿐만 아니라, 그가 몰라야 할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건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를 살리겠다는 이유로 그에게 부담을 안기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수정공은 부러 느리게 대답했다.
“나는 그대를 필요할 때만 부르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냐. 당신은 항상 내게 신경 써주잖아. 음, 그보다는…그래,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는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다정한 목소리에 섞인 웃음기는 떠나지 않고 입가에 고스란히 머물렀다. 아모는 혼자 있을 때면 피곤한 얼굴로 곧장 햇볕 아래 말라 바스라질 것처럼 굴다가 수정공을 보는 순간에는 물을 맞은 잎처럼 환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건 틀림없는 애정이다. 그것이 도리어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받아줄 수 없는 애정을 처음부터 외면하기란 얼마나 힘겨운지. 고개를 돌리는 수정공을 영웅의 시선이 좇았다.
“…괜찮아. 그대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어. 아니, 오히려 넘칠 정도지. 그대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하하….”
낮게 웃는 영웅을 보던 수정공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탈로스가 준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그대는 잠시 쉬어두게. 앞으로 큰 전투가 예비되어 있으니 말이야.”
크리스타리움 앞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에도 말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수정공의 이름을 입에 올렸던 아모리 비케는 그가 부인하자 이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것은 수정공의 모른 척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닌,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겠다는 의미의 수긍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바란다면 어떤 위험에라도 기꺼이 몸을 던질 것이다. 괴롭다. 살기 위해 위험에 처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수정의 탈을 쓴 독자는 자신이 동경한 것이 영웅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의 삶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낮게 중얼거린 수정공은 멀어지는 영웅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계획은 곧 막바지에 이르렀다. 굴그 화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마지막 대죄식자를 잡고 나면, 모든 기다림은 끝이 난다. 이야기는 옳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영웅의 서사시에는 악역이 한 줄 추가될 뿐이겠지.
작게 마른 웃음을 흘린 수정공이 몸을 돌렸다.
***
영웅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없었다. 죄식자는 산산히 흩어졌고, 누워있는 시신도 없었다. 그가 이끄는 전투는 언제나 그렇다. 뒤따르는 이로 하여금 경외를 품게 하며, 감히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길을 열어 젖히는 강대한 힘.
그러나 그의 본질은 힘이 아닌 영혼에 있다. 여태 힘을 가진 자는 많았으나 사람을 살아가게 하지는 못하였다.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건 다름 아닌 그가 내딛는 걸음. 그 걸음을 홀로 뒤따랐다.
타각, 타각, 지팡이가 땅을 짚는다. 크리스탈 타워로부터 멀어진 몸은 점점 무겁고 둔중해졌다. 걸음 하나하나 옮길수록, 땅에서 멀어질수록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풀 한 포기 없는 돌 산을 오로지 한 사람을 바라보며 미래에서 보낸 수많은 이의 희망을 짊어지고 오른다. 영웅이 항상 걷는 이 길을 단 한 번 오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 수정공은 웃었다.
“정말…굉장한 사람이야.”
죽기 위해 오르는 길인데도 슬프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긴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그가 알게 된다면 슬퍼하겠으나 머지 않아 덮어둘 수 있는 추억이 되리라. 길지도 않은 만남이었다. 짧게 스쳐간 악역 따위, 그에게 제대로 흔적이나 남길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지만, 수정공은 어깨를 펴고 자갈이 부스러지는 길을 오른다. 마치 하늘로 열린 듯한 계단을 오르는 동안, 눈을 찌르는 빛이 거둬진다.
드디어!
드디어, 이야기는 종막으로 향한다. 그의 책은 이곳에서 마지막 장을 덮을 것이고, 영웅에게는 부록이 되어 별첨될 것이다. 자신의 뒷장을 모조리 뜯어내어 그에게 붙일 수 있다니 그만한 영예가 또 있을까.
벅찬 마음으로 수정공은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때가 되었군. 모든 대죄식자의 힘이 한 곳에 모였다.”
그가 간과한 것이라면, 영웅은 이미 잃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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