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내빛전A

지식은 잠 못 이루고

Nessun dorma

*5.3~ 스포일러 포함

가내빛전 이름 나옴, 빛전수정 cp 함유

세상에 밤이 돌아온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책장이 빼곡한 박물진열관은 그 사이 한 번의 증축과 두 번의 개축을 거쳤습니다. 한때는 제대로 된 역사서 대신 어린이용 동화책으로 찾아야 했던 자료도, 이제는 제법 번듯하게 역사 전집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박물진열관의 관장인 모렌씨는 수십 년째 이곳을 관리하며 매일 새로운 책을 꽂아 넣고,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저는 이곳 크리스타리움에서 나고 자라 밥 먹듯이 드나들던 곳에 새로 취직을 했고요.

오늘만 해도 새로 들어온 책이 한가득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재생 활동이 활발해지는 만큼 채집한 표본과 연구도 쭉쭉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이전에는 사람이 살 수 없어 무의 대지라 불리던 곳에도 꽃이 피고 물이 흘러 첫 번째 이주민이 들어간 후로 시간이 제법 흘렀습니다. 이번에 올라온 보고서 중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가 매우 건강하다고 합니다. 빛의 에테르의 균형이 맞지 않던 지역이라 혹여라도 문제가 있을까 산모도 의료진도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한편 완전 개방된 율모어를 주축으로 한 콜루시아 일대 개척 사업도 어느정도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며 점차 녹지를 늘려가는 추세입니다. 이대로만 진행한다면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도 노르브란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고 멀리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중용의 공예관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반듯하게 뽑힌 새 책의 책머리마다 박물진열관의 도장을 찍고, 장서 목록에 책의 제목과 저자를 기록하는 일을 했습니다. 일련번호가 틀리지 않게 도장의 숫자를 일일히 바꾸는 것은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 들어왔을 때 작업해두면 후에 정리하거나 찾을 때 편해지거든요.

"어라. 관장님, 이건 어디서 들어온 책인가요?"

"무슨 책이요?"

제목도 저자도 쓰여있지 않은 낡은 책이 새 책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꼭 손으로 직접 적어 엮은 듯해서 출간된 책이라기보다 수기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가죽 표지가 조금 너덜거리는 책을 모렌 관장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표지나 속표지에 제목과 저자가 적혀있지 않아서요. 수기 같은데, 다른 사람의 분실물이 잘못 들어온 게 아닐까요?"

"아~. 픽시족이 전달해준 모양이네요. 이건 제대로 들어온 새 책이 맞습니다. 제게 주세요. 제목과 저자를 기록해둘게요."

"아니에요, 제가 하던 일이니 알려주시면 제가 적겠습니다. 뭐라고 기록하면 될까요?"

"음…. 그럼 제목은 <노르브란트 견문록>, 저자는 아모리 비케라고 적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책을 들고 돌아가는 제게 모렌 관장님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왜 그런 표정이었는지는 목록에 기록을 하고 호기심에 책장을 넘겨보고서야 알게 되었죠.

세상에, 믿겨 지시나요? 그 책은 과거의 영웅이 직접 쓴 수기였습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 어둠을 되찾는 여정을 적은 게 아니라, 노르브란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발견하고 관찰한 것을 하나하나 기록한 일종의 백과사전과 다르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사실 크리스타리움에 사는 사람 중에 어둠의 전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록 저는 그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꽤 관심이 많았습니다. 박물진열관에만 해도 같은 이름으로 들어와 있는 책이 몇 권 있거든요. 가령 픽시족의 생태라거나, 잊혀진 푀부트 왕국의 역사, 롱카 유적지에 대한 기록, 심해―템페스트의 전경, 드워프 족의 전통…. 온갖 다양한 주제로 작성된 책은 지금도 많은 곳에서 참고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노르브란트 견문록>은 영웅이 지나간 길을 따라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콜루시아에서 채집한 고지대 밀의 마른 겨가 한쪽에 붙어있고 그 밀을 빻아 만든 밀가루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가 한쪽에 들어갔습니다. 누구랑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향신료를 추가한다면 무엇이 좋을지.

몇가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재료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발라시아와 알라미고는 어디일까요? 알라미고 소금이 꽤 여기저기 쓰이는 거로 보아 맛이 좋은 소금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물론,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해도 어둠의 전사가 노르브란트 출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적힌 적은 없어도 그와 그를 데리고 온 수정공이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닐 거란 추측은 꽤 신빙성 있는 가설로 쓰이고 있거든요. 어둠의 전사가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이야기를 증언한 기록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내용이라 학술적으로 신뢰도가 높지는 않아도, 저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영웅은 어째서, 이 땅에서 나고 자라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노르브란트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어쩌면 학자로서의 호기심이나 탐구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이것이 애정이라 확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수기에는 곳곳에 생각의 흐름을 따라 작성된 메모가 있었습니다. 두서 없고, 원인과 결과가 적혀있지 않은, 말 그대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적어둔 수첩 같았습니다.


* 타워의 단말기로 기능하는 육신에 식사는 불필요. 그러나 미각이 마비되어 있지 않은 듯함.
* 픽시의 식사 방식을 참고. 호기심과 흥미 위주의 시식.
* 긴잎라벤더의 꽃 부분에 달걀을 덧칠한 뒤 곱게 간 정원사탕무 설탕을 묻힌 간식 테스트
   └라케티카 대삼림 익스 마야 숲, 파노브 마을 남향 들판 자생지 있음
 - 칼로리가 높지 않고 소화작용이 어려운 몸으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듯함.
* 긴잎라벤더꽃 사탕은 시판용으로 제작하여도 괜찮을 듯함. 어린이 사이에서 인기가 좋음.
 - 크리스타리움에서 시판하기로 함.
* 보습제.
 - 황금 벌꿀로 왁스용 밀랍을 제작할 수 있나?
   차라리 호박정향으로 정향유를 만드는 게 나을 듯.
               └아므 아랭 호박석 산맥 남부 채집
 - 실험 결과 : 항산화 작용과 항염활성 반응을 보임.
 - 선물이라고 주면 부담스러워 하려나. 화장품으로 시장에 내놓는다고 하면...?
 - 요즘 들어 균열이 늘어난 것 같던데.

그가 바라는 대로 되었는지는 우주의 화음 시장을 둘러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호박정향유는 여기저기서 많이 쓰이는 재료거든요. 긴잎라벤더 사탕은 저도 어릴 적부터 간식으로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사람을 향한 고뇌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누구라도 알 것입니다.

이토록 신경 쓰던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호기심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저는 뒷부분에 이르러 진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책을 덮어버렸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장막 대문 너머, 꼭대기에 이른 자리에 누가 있는지를.

수기 한 페이지에 붙은 영청암 파편 뒷면에는 찢겨나간 페이지의 흑연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초상화였습니다. 아마 처음 이 책을 접하는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따라 그가 저술한 모든 책을 파헤치고 나서야 보일 지도요.

저는 추리 소설의 정답을 알아낸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들떠 책을 옆으로 미뤄놓았습니다. 일이 다 끝나면 빌려서 천천히 읽어볼 예정입니다.

옛날,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세상의 기록을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