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등

타로카드 합작 [IX 은둔자] #수정공

* 이것저것 추가서사 및 스포일러 경고. 6.3까지 진행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크리스타리움 필드 내 NPC 대사, 칠흑 외전 못 다한 이야기 등 참고.

* 4.5~5.0 사이 시점

* 크리스타리움 낮 BGM

드란족 청년은 뒤로 따라오는 쌍둥이 엘프족을 데리고서 원개좌의 계단을 올랐다. 2층 높이에서 크리스타리움의 풍경을 보여주며 하나씩 소개하는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미약한 들뜸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요즘에도 이따금 바깥에서 새롭게 크리스타리움을 찾아오는 손님이나 이주민이 있습니다. 보통은 위병이 신변을 인도해서 관련 업종 관계자와 연계하여 진행되는 식이죠.”

“우리처럼 수정공의 지인이 오는 일은 많이 드문 편인가?”

“아무래도 그렇죠?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수정공의 손님으로 오신 분은 여태 몇 번 보지 못했거든요.”

엘프족 소년은 베사드의 답변에 고민하듯 턱을 괴었다. 반면 다른 한쪽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도시를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 말이야, 당신이 보기에 수정공은 이곳에서 평판이 어때? 이렇게 커다란 도시를 운영하는데 모두가 같은 의견일 순 없겠지만, 당신의 의견이 궁금해서.”

“크리스타리움은 수정공이 혼자 이끄시는 도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결정은 지부의 수장으로 뽑힌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회의해서 결정하거든요. 제가 보기에 어떻냔 말씀이지요? 음…. 존경받고 사랑받는 분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요.”

“꽤 민주적인 절차로군. 그가 직접 고안한 방식인가?”

“예, 그렇습니다. 제 의견은 아니고…어머니의 의견이지만, 수정공께선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알리제는 알피노가 고향의 무엇을 떠올리는지 짐작이 간다는 듯 턱을 문질렀다. 사랑받는 지도자라.

“그렇지만 수정공이 저 탑에서 떠날 수 없다면 필연적으로 중요한 결정에 관여하게 되잖아. 예를 들어, 누가 이곳에 머물고, 머물지 못하게 할지, 그런 것 말이야.”

“그런 거라면, 아주 오래전에 비슷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의 할머니께서 아주 어리실 적에 겪으셨다고 합니다. 빛이 범람하여 세상을 집어삼키려던 때였습니다.”

베사드는 쌍둥이를 박물진열관 쪽으로 안내하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었다. 정말로 오래된 이야기였다. 100년은 족히 크리스타리움을 이끌어왔고, 빛의 범람도 그즈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은둔하는 현자, 혹은 수정공. 크리스타리움의 높다란 탑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었다. 화내는 모습도 별로 본 적이 없고, 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신비로운 사람. 그러나 베사드는 크리스타리움에서 지내는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 크리스타리움이 처음 이 땅에 나타났을 무렵의 일입니다. 수정공이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부당하게 이 도시를 점거하고 자기들이 차지하겠다고 협박하는 무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멸망해가는 마당에, 운 좋게 얻은 주인 없는 것들이니 힘이 센 자기들이 가지는 게 당연하다면서요.”

“뭐 그런 사람들이…. 그래서 어떻게 됐어?”

“고뇌가 많았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극악무도하다고 해서 위험한 밖으로 내보내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니까요. 물론, 지금도 콜루시아 섬이나 아므 아랭에도 사람 사는 곳은 있습니다만….”

당시의 상황을 더 자세히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 모양새가 그려졌다. 그들이 온 원초 세계라고 해서 비슷한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머리가 좋은 만큼 이후의 흐름을 예측한 알피노는 딱딱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쫓아낼 수밖에 없었겠군.”

“그렇습니다. 이곳 어딘가에 가둬두거나 하기엔 당장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것도 부족했다고 할머님이 말씀해주셨거든요. 지금처럼 번듯한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세계의 멸망을 앞두고 저마다 안전한 곳을 가지고 싶어 했다. 베사드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시대였으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착민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살아있는 크리스타리움의 역사가 되어 그의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그는 이제 이 도시의 안내인을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도시에 크리스타리움이라는 이름이 붙고 나서, 저 수정으로 된 탑에 거하시는 그분께 수정공이란 호칭까지 생기고 나니, 그분께서도 무언가 염려가 있으셨을 겁니다. 타고난 종족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느 한 부류를 편애하거나 편들어 준다고 싸움이 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수정공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발목까지 닿는 긴 옷자락으로 체형을 가리고 다녔다. 베사드는 그런 그의 모습마저도 멋있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터였다. 크리스타리움의 모든 향방은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고, 수정공이 심려하는 건 이 도시의 안전과 연결되는 일이었다.

연금술 의료관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쉐사밀이 해준 이야기처럼, 그가 지켜봐 온 수정공은 항상 필사적으로 도시를 지키고자 했다. 자주 미간을 찡그린 채로 박물진열관의 책을 조사하는 건 다반사였다. 베사드는 모렌에게 어린이용 책을 받으러 갈 때마다 몇 번씩 마주쳤던 수정공을 기억한다.

“할머니께서는 자주 수정공께서 한밤의 등불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어두운 하늘 바다 아래에서는 여기, 지하의 조명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보인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베사드는 삼학좌의 식물표본관 곳곳을 밝힌 등을 가리켰다. 쌍둥이는 안내인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등불이라 칭하던 목소리, 실제로 등불처럼 빛나던 이, 미약한 빛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수정공은 그들이 겪어온 이들과 다르지 않은 상징일 것이다. 어둠을 더듬지 않도록 길을 밝히는 존재. 해가 저물지 않는 세상의 등대이자 이정표.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박물진열관 꼭대기의 모렌님께 여쭤보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여기까지 안내해주어 고맙네.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맞아, 나도 궁금한 게 해소됐어. 나중에 또 볼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저는 우주의 화음 시장에 주로 있으니 그쪽으로 오시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가볍게 인사한 드란족 청년―원초 세계에서는 아우라 렌족으로 분류될 베사드가 몸을 돌렸다. 알피노와 알리제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본 뒤, 커다란 문을 열었다. 동시에 두 사람은 이곳에 처음 떨어진 순간을 떠올렸다.

“또 그 사람을 혼자 두고 오게 됐잖아!”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내게도 나름의 필사적인 이유가 있음을 이해해주게나.”

“하아…. 일단은 알겠어. 당장은 어쩔 방법이 없으니 이곳의 상황이라도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할 거야.”

“나도 알리제의 말에 동의하네. 일단은 나도 이곳의 상황을 살피는 데 주력하도록 하지. 야슈톨라와 위리앙제를 만나볼 수 있다면 그쪽을 우선하도록 하고.”

“그래…. 혹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주게.”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던 알피노는 책장을 덮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시를 세우고, 체제를 다듬고, 사람들이 자립하여 소통할 자리를 마련하고, 중재하고…. 그에게서 익숙한 인상을 받는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거야. 그렇지, 알리제?”

“그래. 나도 같은 걸 느꼈어. 게다가 영웅을 위험에서 구하겠다고는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추상적인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지. 이를테면 오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이나,”

“그것을 가져다줄 영웅, 말인가.”

알리제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몇 권 되지 않는 책은 벌써 옆으로 밀어놓은 채였다. 애당초 세계가 반파되면서 남은 자료 자체가 많지 않은 탓에 볼 수 있는 것도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냥 첫인상이 그럴 뿐이지, 진짜 속내는 여전히 모르겠어. 이 세상에 대한 것도, 책으로 얻는 지식은 너무 적어. 직접 부딪혀서 알아보는 게 더 좋겠단 생각뿐이야.”

“동감이야. 저렇게까지 미지에 싸인 인물이 신임을 얻는 것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일세. 이 도시를 위해 헌신적인 태도임은 알겠어. 그러니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겠지. 하지만, 지도자라는 위치는 그것만으로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나.”

“넌 실패했던 그거 말이지?”

“아픈 과거는 잊어주지 않을래?”

실없는 농담에 쌍둥이 남매는 책을 완전히 덮었다. 더는 책상에서 골몰할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 수정 탑에 기거하는 은자가 운명의 수레바퀴가 맞물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책을 반납하면서 알리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만나는 이들 마다 물어도 수정공의 평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간혹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도시의 규모를 생각하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만한 도시를 100년이나 이끌려면, 보통 사람은 아닐 걸세.”

“그래. 너 뼈 아픈 얘기는 하지 말자.”

“윽,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나…! 어쨌든, 이 세계는 멸망해가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수정공이란 자가 이 도시에는 좋은 사람일지 몰라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아야겠지만.”

그것은 당연한 경계였다. 알피노와 알리제는 다시 눈이 아프도록 밝은 지상으로 걸어 나와 응접 대광장으로 향했다. 저 밝은 돌바닥 위로 떨어지는 게 햇빛이 아닌 달빛이라면 어떨까. 그들은 당연할 정도로 익숙한 밤을 낯선 땅 위에 상상해보았다.

“…난 왠지 믿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그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괘씸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이 죽을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그걸로 이 세계와 그 세계를 모두 구할 수 있는 거라면…. 믿어봐도 좋지 않을까.”

“희망에 걸고 싶은 거로구나, 알리제.”

“너도 그렇잖아.”

쌍둥이는 장막 대문의 높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아므 아랭으로 가보고 싶어. 세상을 구하려면 적을 먼저 파악해야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겸사겸사 나를 좀 더 갈고 닦을 기회기도 하고.”

“그럼 나는 콜루시아 섬으로 향하지. 이 세계의 기득권층은 어떤 이들인지, 그들과 연을 맺어둘 필요가 있을 걸세. 이 도시 바깥의 사람들과도 대화해보고 싶고 말이네.”

주먹이 맞부딪혔다. 만에 하나, 그들이 조력자라 여기는 수정공이 영웅을 도울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들만은 곁에 있어야 했다. 베일에 감춰진 그의 진의를 알 수 없으니.

 


심려의 방에는 사람 키보다도 높이 온갖 책과 자료가 쌓인 채 뒤엉켰다. 사람이 누울 자리 하나 간신히 남은 곳에 틀어박힌 남자는 연신 수식을 점검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아니다. 이번에도 틀렸다.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아무리 변칙적이라지만 더욱 변수를 줄여야만 했다. 왼쪽의 수정으로 된 팔이 바닥을 긁어 까득 소리가 나도록 펼쳐진 종이 위를 짚은 채 몰두했다.

몇 날 며칠을 먹거나 잠들지 않고 고민하는 일은 익숙하다. 이제는 점차 사람이었던 감각이 사라져도, 그는 견뎌내야만 했다. 끝없는 탐구와 고독은 고통스러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법이다. 그래, 운명의 수레바퀴가 맞물리기 직전이다.

빛의 전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구하고 자신은 모든 악업을 짊어진 채로 퇴장한다. 그보다 깨끗하고 뒤탈 없는 이야기가 있을까. 최소한의 대가라고 하기엔 이미 그가 건너온 시간선에 묻어둔 생명이 지독하게 많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크리스탈 타워에 희망을 실어 과거로 보낸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두 어깨에 사명감을 짊어졌다. 심장 대신 딱딱한 수정이 자리 잡는 대도, 포기할 수 없다. 그의 영웅이, 가장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저항했던 것처럼.

퍼뜩 고개를 치켜든 그가 숨을 들이켰다. 틈을 발견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는 정답이다. 벌써 마지막으로 소환을 시도한 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저쪽 세계에서는 얼마나 지났을지, 또 이번에는 얼마나 어긋날지 알 수 없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거울 너머 비치는 모습에 손을 내밀었다.

“―찾았다! 이번에야말로……!”

영웅의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혼이 닿는다. 지팡이를 꽉 그러쥔 손바닥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긁혔다. 한때는 그와 함께한 모험에 들떴던 청년이 간절하게 영혼을 불렀다.

“자, 빠져나가지 말아다오……!”

유구한 시간을 넘어 지금, 시공을 초월하여…희망을 이루기 위해.


베사드는 크리스타리움 우주의 화음 시장 마테리아 장인 근처에 있습니다.

참고 대사는 연금술 의료관의 쉐사밀, 박물진열관의 안시베르트, 베스덴, 샹틸드 입니다. 일반 퀘스트가 있지만 채집/제작 직업으로 말을 걸면 퀘스트를 수락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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