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내빛전A

명명 命名

FF14 | 빛전수정/빛전라하 | 5.0~6.25 스포

  • FF14 5.0 부터 6.25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점성술사 주직(캐스터 직군 통달)인 개인 빛전 설정이 있고, 이름이 나옵니다.

-수정공, 당신에게도 이름이 있지?

영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물었다. 수정으로 된 손은 지팡이를 꽉 그러쥔 채, 그렇다 혹은 아니다 대답도 않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100년 만에 벌써 레이크랜드를 넘어 라케티카 대삼림까지 세 번이나 되찾은 밤하늘이다. 크리스타리움의 광장과 소란으로부터 온 불빛이 번지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아래로, 서로 색이 다른 녹색 눈이 수정공을 향했다. 그는 대답 없이도 고개를 끄덕이곤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당신에게도 분명 이름이 있을 거야.

그러했다. ■■■에게는 차마 그에게 말하지 못하고 목 안으로 삼켜낸 이름이 있었다.

-이름에는 큰 힘이 있어. 수정공이라 불리는 게 어떤 힘과 영향을 지니는지, 당신도 알다시피. 저 하늘의 별에도 이름이 있어. 진짜 그 별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저 별을 오쉬온이라 부른다면 오쉬온으로 역사에 기록되겠지. 그렇게 오래도록 오쉬온이 되는 거야.

당신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거겠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점성술사. 200년 후에도 영웅으로 칭송받는 자. 깊은 어둠 속의 빛, 달이 뜨지 않는 세계의 유일한 밤. 등대와도 같은 이다. 수정공은 영웅의 말에 작은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다. 간만에 보는 밤하늘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감상을 불러 일으킨 모양이다.

-수정공. 당신은 내게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어.

대답하기 어려운 말에는 비겁하게도 침묵으로 도망쳤다. 수정공은 단단하게 굳어버린 오른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괜히 그를 밀어붙인 듯해 미안해졌는지, 영웅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언젠가, 내가 세상을 구하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나면...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그래. 얼마든지. 수정공은 대답을 삼켰다. 그 역시도 꿈이 있었다. 너른 하늘과 같은 바다 위를 항해하고, 들판을 내달리며, 바람을 가르고 날아서 동경하는 영웅과 모험을 하는.

꿈.

정신없이 내달리는 동안 아모로트의 종말을 뛰어넘고, 아씨엔까지 쓰러뜨렸다. 끝내 어설펐던 계획은 영웅에게 들통이 나 이름을 불리고야 말았다. 이미 보여준 얼굴을 이제 와서 숨긴 들 우습다. 수정공은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도 발걸음은 가볍다는 게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는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랬는데, 분위기가 다소 이상했다. 꼭꼭 숨겨두던 비밀을 알리게 되니 가뿐해진 것은 수정공 그 하나 뿐이었던 걸까. 돌아오는 길에도 웃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영웅의 모습에 수정공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여태 처음 만난 날부터 졸졸 따라다닌다 싶을 만큼 수정공을 쫓아다니던 어둠의 전사가 그의 곁에서 보이지 않다니,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까지도 미묘한 기류를 느낀 모양이었다.

“수정공, 혹시 어둠의 전사 님과 싸우셨어요?”

성견의 방에 최근 안건을 가지고 왔던 라이나가 의아하게 물어왔다. 송곳으로 심장을 푹 찌른 듯이 따끔해 수정공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아니…. 다만, 그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구나.”

“이런, 수정공이 잘못한 거라면 사과하도록 하세요. 먼저 사과하는 게 지는 일은 아니니까요. 소중한 이라면 소중하게 대해 주셔야죠.”

태연하게 잔소리를 해대는 라이나의 말에 수정공은 나이 많은 이 특유의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샐쭉해지는 눈매에도 슬쩍 시선을 피할 뿐, 여간 고집스러운 게 아니다.

“네가 다 크긴 했구나. 내게 그런 말도 하고.”

“수정공께서도 얼굴만 봐서는 할아버지 같지 않으니, 이럴 때만 할아버지처럼 굴지 마세요. 그러시지 않아도 꼬박꼬박 할아버지라고 불러드릴 수 있으니까.”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뺨을 쓸어본 수정공은 떨떠름하게 피가 이어지지 않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영웅에게 얼굴이 들통난 이후로 구태여 가리고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다시 쓰고 다니는 편이 좋을까. 정체를 숨기고 이 크리스타리움을 운영했던 초기 목표는 어느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언제라도 떠나기만 하면 된다 싶었던 게 문제였던 듯하다. 라이나를 비롯한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은 모두 수정공의 변화에 아닌 듯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제는 그의 이름이 되어버린 '수정공'에게 지어진 무게였다.

“어쨌거나, 어둠의 전사 님은 사람이 좋으셔서 어지간한 일은 다 그냥 받아 주실 거란 말이에요. 꼭 말로 표현하셔야 돼요. 그 분이 아무리 모든 것을 읽어내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어도요.”

“그래, 알겠다. 알아들었으니 그만 해주게.”

“당신께서도 마찬가지에요. 말로 꺼내지 않으면 자각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는 법입니다. 할아버지.”

애정이 가득 담긴 그 눈은 수정공을 향했다. 그는 따뜻한 염려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을 쫒아가다보면, 그 길가에는 이렇듯 좋은 사람이 많았다. 미래와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멸망을 앞둔 세계에서조차 희망을 쌓는 사람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사는 사람들. 수정공은 이제 온 삶을 다해 사랑하게 된 크리스타리움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날이 다가옴을 짐작하면서도, 내심 아쉬워졌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영웅에게는 결국, 제대로 사과를 못했던 것 같다. 화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언제부턴가 다시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라하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다정하고, 애정을 퍼주는 모습에 그라하는 하려던 말을 전부 속으로 담아두게 되었다. 이렇게 빚을 지고서야, 그를 제대로 마주볼 면목이 없었다.

기회는 자꾸만 엇나갔다. 먼 우주 끝에 둥지를 튼 절망과 멸망해 가는 원초세계. 세상이 바스라지고 있는데 그까짓 감정을 내세우기엔 시간이 너무 짧고도 촉박했다. 그렇게 자꾸만 뒤로 미루고, 미뤄지다가... 지금에서야 후회하며 떠올렸다.

왜 지금 그 시절의 기억을 되짚었느냐면, 조금 앞으로 시간을 돌려야 했다.

처음 이변을 눈치챈 사람은 타타루였다. 그가 대체 어디서 뭘 했는지는 몰라도, 다들 영웅이나 빛의 전사, 모험가, 혹은 어둠의전사와 같이 워낙 다양한 호칭으로 부른 탓에 눈치챈 게 늦었다.

“세상에! 글쎄, 대박상점 일을 부탁드리려고 했는데용!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거에용!”

그러면서 흩어져 있던 새벽의 사람들마다 링크펄로 연락을 걸어 물어본 것이다. 일단 올드 샬레이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구두로 물어보고 다닌 모양이었다. 문제는 다소 심각했다. 누구도 빛의 전사가 가지고 있던 원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부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입에 담았던 이름인데도.

영웅을 바로 앞에 두고서도 이름을 말하지 못하니 모두가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샬레이안의 누메논 대서원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이 일에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은 죄다 동원되었다.

그렇다 해도,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영웅은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최근에 다녀온 동선만 정리했는데도 턱이 빠질 지경으로 돌아다녔다. 울티마 툴레에는 오미크론과 재밍웨이의 일을 돕는다고 다녀오고, 일 메그의 픽시족도 만나고, 보이드에는 또 언제 갔다왔는지! 옴팔로스며, 고대의 판데모니움.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목록의 모험에 피가 들끓었던 것도 잠시, 그라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영웅을 흘겨보았다.

“뭐가 그렇게 바쁜가 했더니 끝내주는 모험을 다녀왔구나?”

“하하…. 그치만, 라하 너도 바빴잖아. 같이 모험을 떠나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 불러 대더니, 나 없이 미래 계획을 짜놓고 말야.”

“윽, 그건….”

"알아, 그냥 투정 부린 거야."

어깨 한 번 으쓱한 영웅은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먼지나 풀씨 묻은 옷 그대로 대서원에서 자료를 뒤적거리던 그는 이내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달의 수호자 특유의 까맣고 동그란 동공에 그라하가 고스란히 담겼다. 부드러운 눈웃음 어디에도 조급함은 보이지 않는다. 되려 그라하만이, 혹여라도 이것이 어떠한 전조일까 싶어 불안해졌다. 그의 태도가 여느 때와 다를 것 하나 없어서.

“이왕 샬레이안 본국까지 와서 날 돕겠다고 최고의 마도사와 현인들을 모아놓고 답을 찾는 것도 재밌긴 해. 아이테리스를 탈출하겠다고 방주를 지을 때 빼고 또 언제 이런 일이 있겠어?”

“당사자만 전~혀 조급해 하질 않으니 우리도 덩달아 기운 빠지는 건 알지요?”

“좀 봐줘….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옆에서 책을 뒤적거리던 야슈톨라가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지만, 영웅은 그저 허허실실 웃어 넘길 뿐이었다. 그야, 그는 당대 최고의 마도사들 중 하나니까.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라하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있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럴 때마다 그 잘난 알라그 문명을 속속들이 뒤져보면 답이 나올 것도 같은데, 그렇게 속 편히 해결되지 않으니까 문제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어머, 잠깐만요.”

“왜? 뭔가 찾았어?”

야슈톨라의 의혹 섞인 한 마디에 듬성듬성 둘러앉아 거의 책으로 들어갈 지경이던 사람들이 죄다 고개를 들었다. 그 중에는 새벽의 일원 뿐만 아니라 조달꾼 의뢰를 하다 친분이 생긴 교수나 학부생도 있었고, 그라하도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 하나 찾아 주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영웅은 그저 쉬어가며 즐길 작은 사건이라도 생긴 듯이 굴었다. 어쩌면 그는 자기 이름에 미련이 없는 것일까?

“고대의 주술…. 이건 또 너무 오래된 기록이군요. 구전 설화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어떤 학자가 옮겨 적은 내용이에요. 이름이 가지는 개념에 에테르를 덧씌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일종의 저주라고 되어있는데….”

“이거 창조마법 아냐?”

“네.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어쩌면 아씨엔이 변형시켜 가르쳐 준 것일 수도 있고요.”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은 영웅은 갈색 귀를 까딱거렸다. 이제 와 물어볼 아씨엔이나 고대인이 있기는 할까. 어쩌면 달에 사는 감시자에게 물어본다면 단서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은 그라하는 두 사람 사이에 머리를 쏙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달의 감시자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현존하는 마지막 고대인―파편 이기는 하지만―이니, 어떻게든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음….”

“아니면, 아는 고대인이 따로 있나요? 당신이라면 어쩐지 있을 것 같은데.”

그가 고민하는 동안 갈색 꼬리가 좌우로 느리게 살랑살랑거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마다 나타나는 미코테족 특유의 궤적이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결정한 듯, 귀가 파다닥 움직이더니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들자 당당하게 선언하기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 될 것 같으니, 그냥 이대로 두자.”

“어어? 왜?”

“답을 찾겠다고 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 귀찮기도 하고. 대충 보니까 마땅한 해결책도 없는 것 같아서. 에테르로 이름을 덧씌운 거라면, 녹아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별바다에 들어가면 지웠던 기억도 돌아온다잖아? 음. 아니면, 강한 마음을 담아 부르면 해결될 지도?”

하아. 야슈톨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라하는 손에서 미끄러진 책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말 그런 걸로 괜찮겠어?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그가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빛의 전사, 영웅, 혹은 모험가는 그 뒤로도 매우 바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돌아다니니 타타루로부터 “제발 잠시라도 좋으니 쉬었다 가세용!” 하고 한소리 들을 정도로. 책 좀 읽고 있나 싶어서 잠깐 눈 돌리면 희귀 광석을 캐오겠다고 달에 가고, 나무 구하러 사베네어로, 물건을 만들어 장터에 내놓고, 소대원을 훈련시켜야 한다며 또 훌쩍 사라졌다. 커르다스에서 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면 다음 날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발데시온 위원회를 멀리 떠나있을 수 없어서, 그가 주로 쓰던 분관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샌가 돌아와서 놀란 눈으로 어쩐 일이냐며 묻는다.

그라하는 처음으로, 그가 알던 영웅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제 생각을 정정했다. 자신은 그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안다고 자부했던 모든 행적은 영웅의 서사시에 적혀있는 모험담과 영웅담. 타인이 서술하는 그의 개인사는 과연 어디까지 사적일까? 그가 겪었던 커다란 흉터들은 모두가 기억하기에 기록되었다. 잃어버린 맹우, 뼈 아픈 이별, 붙들지 못한 상실. 책이 아닌 살아있는 그를 더 알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어쩌면 원초세계가 아닌 1세계에서의 관계가 더욱 깊었던 것도 같았다.

영웅. 그렇게 그를 부르려던 그라하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랜만에 꺼내는 호칭은 마치 그를 정체 모를 수정공으로 회귀시킨 듯한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대, 불안하지 않아?”

“…음?”

방안에 그라하를 들여다 앉혀놓고 음식을 준비하던 영웅은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까딱거렸다. 꼬리가 둥글게 휘며 살랑이더니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이름을 잃어버린 것 말이지? 글쎄, 딱히 불편하진 않은데. 다들 이러나저러나 잘만 불러주니까. 호칭도 제법 많잖아? 사실, 이름보다는 빛의 전사나 에오르제아의 영웅이니 모험가라고 불린 횟수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긴 하다만, 내게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알려준 건 너잖아.”

“하지만 수정공,”

그의 부름에 그라하는 얼어 붙은 듯 머그잔을 쥔 두 손까지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쉬콘 쿠키와 커피 쿠키를 가득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올린 그가 맞은 편 의자에 걸터 앉으며 팔에 턱을 괴었다.

“그대도 100년 가까이 이름 없이 살았는데, 나라고 못할 건 뭐야.”

“뭐?”

“불러주는 이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야, 이름은.”

돌이켜 보면, 그라하조차 그를 이름보다 영웅이라고 불렀던 적이 많았던 것도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얼굴을 본 그는 (“이런, 탓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난감해하며 턱을 긁었다. 투박한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동안 그라하는 머그컵 안의 코코아를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달콤한 향, 그와 닮았다.

“날 영웅이라고 부르는 게 싫은 건 아냐. 오히려 고맙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그렇지 않아. 넌 정말 대단한 영웅이야. 적어도 내게는.”

“고마워. 그래도 내가 해냈던 건 타인이 어깨 위에 올려놓은 희망과 가능성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으니까.”

“…부담이었나?”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해 차선이라도 해냈을 뿐이라던 영웅은 멋쩍게 이마를 긁적거렸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라하,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냥 불편하지 않아서 굳이 급하게 찾지 않는 거야.”

“하지만…… 그대, 너를 부르고  싶을 때. 나는 어떡해야 하지?”

천장의 등불이 깜빡거렸다. 붉은 눈을 빤히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는 양쪽의 색이 달랐다. 한때 그라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불현듯 물어왔다.

“내 이름의 뜻을 기억해?”

미코테식으로 지었지만, 비슷한 발음을 가진 공용어의 뜻을 가져왔거든. 언제고 그가 이름의 뜻과 함께 일러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에게는 호흡을 통해 전달되는 유의미한 호칭이 필요해. 그의 이름은 인류가 가진 가장 커다란 유산의 총칭이자, 미래에서 과거를 거스르게 한 동력원이었다. 그래, 분명히….

아모.”

사랑하는 자. 그는 생명이 가진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아모리, 비케.”

“봐, 너라면 찾아줄 거라 생각했어.”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되찾은 영웅은 코코아에 쿠키를 담갔다 빼곤 라하의 입으로 집어 넣었다. 이름 없던 수정은 뒤늦게 깨닫는다. 어째서 그토록 이름을 부르고 싶어했는지. 그가, 그리고 자신이. 이름을 부르는 행위 안에 들어있는 마음의 크기를.

아주 오래전, 이름을 숨기기로 마음 먹은 수정공을 떠올리며 그가 안타까워 했던 연유도.


이하 잡담...

아모리 비케 Amo'li Vike 는 달코테식 이름으로 지은 건데, 비슷한 발음인 아모르Amor에서 뜻을 따왔습니다.

아무래도 영웅은... 세계를 구하는 영웅의 이름은 근원의 형태를 가지는 게 멋있지 않을까...

그리고 추가로, 수정공이라 불리게 된 계기가 뭐였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네요. 처음 도착했을 땐, 라하도 자기 이름을 얘기해줬을 것 같은데, 어쩌면 그때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다 죽어서 수정공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얼굴을 가리고 살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자신을 숨기기로 마음 먹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100년 전, 젊은 라하는 집단과 집단의 충돌을 겪었을 때 무엇을 느꼈을까... 어깨에 짊어진 생명의 무게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지웠겠지...

자신의 종족이나... 그런 게 보이면 어느 특정 집단에게 치우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 그런 걸 기대할 수도 있어서 공정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사를 전부 묻어두지 않았을까.

생명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너무 무거운 일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랑을 나눠주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죠.

처음에는 그저 크리스탈 타워에서 따와 이름을 붙였을 텐데, 어느새 그렇게 많은 생명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 것이(그리고 사실은 그 모든 역사가 단 한 사람의 영웅을 위해서라는 게) 굉장히­― 오타쿠적으로, 그렇습니다.

이 얘기도 본문에 쓰고 싶었는데 마땅히 넣을만한 구석이 없어서 후기로 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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