返魂
라하히카 | 반혼 [명사] [불교]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그 혼을 집으로 도로 불러들임. 또는 그런 일.
BGM
6.0까지 스포일러 포함
타닥타닥. 발소리가 발데시온 분관의 대회의실로 향했다. 익숙하게 문을 열어젖힌 쿠루루는 단번에 서류를 보고 있던 그라하를 찾았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할 틈도 없이 그에게로 다가간 쿠루루가 곧장 물었다.
“라하! 혹시 아모가 어디 간다고 들은 거 있어?”
“아모…? 그걸 왜 나한테?”
“찾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연락이 안 닿아서. 너는 그 사람이랑 제일 친하니까 들은 게 없나 했지.”
그렇게 친해 보였나? 그라하는 의아하면서도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글쎄. 그가 가끔 그라하에게 이런저런 안부를 남기거나 행선지를 얘기해주기는 해도 매번은 아니었다. 종종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방을 묻곤 했지만…. 도리어 그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경로가 바뀔지 모르는 모험가인지라 나중에야 알게 되는 일이 더 많았다. 알지 못하는데 대답을 어떻게 해.
“…아니. 나도 달리 들은 이야기는 없어.”
“그래? 이번 외출은 좀 오래 걸리네….”
난감하게 고개를 젓는 그라하의 반응에도 쿠루루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어. 나중에 다시 찾아와달라고 말해야겠다. 일하는 거 도와줄까?”
“괜찮아. 이제 거의 다 끝나기도 했고, 또 다른 곳에 가볼 거라.”
“그렇구나. 늘 고마워, 고생해줘서.”
“별말을. 이건 우리의 일이잖아.”
평소대로 해사하게 웃은 쿠루루가 대회의실을 나섰다. 그라하는 어쩐지 겸연쩍게 느껴져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모의 안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야 동경하는 사람이니 가까워지면 좋지.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그라하는 문득 그가 종종 길게 자리를 비울 때면 제1세계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만 그가 있을 법한 장소를 떠올려보려 했으나, 통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이마를 손끝으로 긁은 그라하는 떨떠름하게 시선을 내렸다.
수정공으로 머물던 시절의 기억에도 그가 즐겨 찾는 자리는 알지 못했다. 굳이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아도 항상 곁에 있었으니까. 그 시절 아모리 비케는 크리스타리움 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어둠의 전사님이 수정공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는. 그렇게 졸졸 따라다녔으니 언젠가는 퍼질 소문이었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낸 그라하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흩어진 서류의 도식이나 숫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수정공이 후드를 벗고 나서부터 꽤 데면데면하게 굴었었지. 왜 그랬는지 결국 이유는 못 들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가 그라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던 걸지도 모르고. 입가를 쓸어내리던 그라하는 그가 돌아오거든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기다림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 줄도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
크리스타리움의 푸르고 둥근 지붕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빛으로 뒤덮여있던 시절에 비하면 새파랗게 청명한 하늘은 호수보다도 맑았다. 점차 활기를 띠는 도시를 뒤로 하고, 수십의 계단을 오른 중갑옷이 철컥거렸다. 장막 대문에 서 있던 문지기는 상대를 발견하자 딱딱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라이나님. 이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수고가 많네. 혹시 위에 올라간 어둠의 전사께선 아직 내려오지 않으셨나?”
“예. 달리 주신 연락은 없습니다. 안에 신호를 보낼까요?”
아하. 문지기는 굳게 닫힌 문과 높게 솟은 탑을 올려다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흰 머리칼의 비스족 위병단장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수정공의 손님이자 도시의 영웅은 종종 오래도록 탑에 머무르곤 하셨으니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두지. 편히 지내시도록 따로 연락은 넣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경례를 주고받은 라이나는 천천히 계단을 되돌아갔다. 점점 더 높고 멀어지는 탑의 상층부에 닿은 빛이 흩어졌다. 햇빛과는 다른 빛 알갱이가 보인 듯도 했다. 미간을 조금 찌푸린 라이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오래 걸리시는 군요….”
어둠의 전사가 방문하는 동안 크리스탈 타워의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은 오래되지 않은 불문율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우뚝 선 수정공 앞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그를 발견한 날. 그 이후로 라이나는 그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사람을 막았다. 이번에도 그는 며칠에 걸쳐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개를 내저은 위병단장이 다시 광장을 가로질렀다.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 역시 결례가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라이나는 영웅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
수정 바닥 위에 놓인 그리다니아의 노란색 꽃다발을 만지던 아모는 당황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수정이 마치 얇은 설탕으로 된 껍질처럼 바스라지더니 아래로 후두둑 떨어진 것이다. 껍데기를 깬 알처럼 투둑, 투두둑 떨어진 수정 안의 흰 살결과 붉은 머리칼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채도를 가졌다.
아모는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다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거리가 멀어지자 균열은 더욱 빠르게 번졌다. 이내 상체의 색이 모두 돌아온 수정공의 눈꺼풀이—뜨였다.
“…아.”
“….”
“…이게, 어떻게 된?”
어색하고 당황스럽게 눈꺼풀을 깜빡인 남자가 새빨간 눈을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의 영웅은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영웅?”
몇 번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던 남자가 힘겹게 대답했다.
“수정공.”
그가 죽음에서 깨어났다.
***
다리에 수정 파편이 곳곳에 묻어난 채로 남자가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가 땅을 짚을 때마다 타각, 타각, 하고 공간을 울렸다.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하던 그를 영웅의 녹색 눈이 좇았다.
“곤란하군.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분명 저곳에서 지팡이를 쥐고 선 것이 마지막 기억인데….”
시선이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당황스러웠는지, 수정공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불현듯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 그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설마. 내 계획이 실패했나? 다른 이들은?”
“진정해. 전부 잘 돌아갔고, 그 뒤로 시간이 좀 흘렀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모는 그를 진정시키듯 손바닥을 내보이며 천천히 휘저었다. 자칫했다간 그대로 성견의 방까지 뛰쳐나갈 기세라 영웅은 문으로 향하는 길을 몸으로 가려 막았다.
수정이 된 직후에 기억이 멎은 그에게는 종말이 지나간 시간이 비어있었다. 침묵하던 수정공이 영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역시 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모험을 좋아하던 성정은 그대로일까. 모험가는 녹색 눈을 옆으로 굴려 그의 안색을 살폈다.
기억을 이어받았다고는 해도, 이곳에 남은 수정공은 이제 원초세계의 그라하 티아와 다소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라하 티아에게 그의 기억이 이식되고, 그 뒤로 겪었던 많은 일을 더하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선 수정공은 연장선인 그라하와는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를테면 제8재해를 겪은 뒤 살아남아 사라진 미래에 남은 자들은 원초세계의 미래에 태어났을 그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부모는 재해를 겪지 않았으니 어쩌면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예 태어나지도 못할 이도 있을 것이다. 재해에서 비롯된 이름과는 전혀 다른 단어가 이름으로 붙고, 절망으로 가득한 세태에 영향받은 그들과는 다른 성격이 될 것이다.
“그 전에 이 현상을 먼저 밝혀내는 게 우선이겠지.”
그러나 딱 수정공이 이곳에서 잠들 때까지의 100년하고도 스물 몇 년을 보낸 그라하티아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같다. 그는 아모리 비케가 겪은 이야기를 궁금해하면서도 일의 우선순위를 매겼다. 호기심을 삼킨 그의 귀가 뒤로 반듯하게 누웠다.
“어쩌면 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겠어. 탑을 다시 통제하기 위해 단말기 역할을 하는 내 육신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지. 이것은 심려의 방으로 돌아가 확인하면 될 일이야. 그런데….”
이내 상황을 받아들인 듯, 그는 젖혔던 후드를 끌어올려 머리를 덮었다. 붉은 머리가 까만 천 아래로 숨었다. 타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팡이를 짚은 수정공이 그를 지나쳐 탑 안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하게 되었으니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알릴 거야?”
수정공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순 없지. 이미 퇴장한 역할이 다시 등장해봤자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야.”
“그들은 널 환영할 텐데도?”
“그래도 안 돼.”
단호한 대답과 함께 그가 멈추어 섰다. 동그란 공간에 멈춰선 그의 발밑에 새겨진 금빛 문양이 마치 그가 종종 쓰는 마법진의 일부와 닮았다. 아모리 비케는 그의 수정과 물렁한 육신이 반씩 섞인 발을 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난 이미 죽은 사람이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거고. 지금 갑자기 나타나 사실은 살아있다 하더라도 언제 또다시 역할이 끝나 원상복구 될지 모르는 마당에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두 번의 상실은…, 어렵지 않겠나.”
그래. 줄곧 따라오던 위화감이다. 그는 이른 시일 안에 두 번째 상실이 오리라 상정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진행된 수정화를 보더라도 그럴 만 했다. 아모는 갈라진 틈새를 혈관처럼 낀 수정팔을 보았다. 곧 그의 발에서부터 자라난 수정이 다리를 잡아먹고, 걷지 못하게 되거든 두 번째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미안하게 생각해. 부디 그대도 이 일을 함구해 주었으면 한다만….”
“알겠어.”
말끝을 흐리는 수정공의 권유에 아모는 칼같이 대답했다. 지금껏 제대로 듣지도 않는 듯이 굴었던 것치곤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수정공은 몇 번쯤 입을 달싹거리다 침묵했다. 그의 심정을 굳이 캐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올라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진 않을 거야. 라이나도 당분간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둘 거고.”
미동 없던 영웅의 얼굴이 부드럽고 온화하게 풀어지며 미소 지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죠, 수정공.”
“…그,”
“문제 있어?”
호선을 그리는 입매, 한 걸음 떨어진 거리. 졸졸 따라다니면서도 넘지 않던 보이지 않는 선이 느껴졌다. 심해의 도시에서 후드를 벗은 이후 더 멀어진 간격이 돌아왔다. 그래도 소울 사이펀을 완성할 무렵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
혹시 화가 났냐고 물어보려던 수정공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묻지 않아도 아모는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음 상할 일이 있던가?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봐도 수정공은 도통 답을 찾지 못했다.
***
먹거나 잠들지 않아도 되는 몸이란 숨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다. 수정공은 마치 탑에 머무는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사람의 눈을 피해 기거했다. 수정공은 그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심려의 방에 머물렀다. 해가 들지 않아 밤낮을 알 수 없으니 두 사람의 하루는 아모를 기준으로 흘렀다.
육신을 가진 영웅은 잠과 식사마저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수정공이 몇 번쯤 휴식을 권해도 고개를 내저으며 머무르는 이유는 단순히 걱정이 아닌 듯했다. 돌아보면 책을 뒤적거리고 있지만, 다시 눈을 돌리면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마치 수정공을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수정공은 난감했다. 아무래도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되살아나면 불안한 게 많기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가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집요하게 굴 이유는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탁. 책을 덮은 수정공은 다시 한번 인내하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지켜본 적 없는 것처럼 무릎 위의 책장을 넘기던 아모가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려가서 식사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떻겠나?”
“괜찮아. 아직 가방에 육포도 남았고….”
“제대로 식사하지 않으면 몸이 축날 걸세. 자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부디 다녀오게.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여기 있을 테니까.”
그를 빤히 바라보던 영웅이 옆으로 도르륵 눈을 굴렸다. 양쪽의 채도가 다른 녹색 눈이 방을 한 번 훑고 다시 수정공에게 돌아오기까지, 침묵이 길었다. 영웅은 난감한 듯이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내가 옆에 있으면, 그…방해돼?”
마치 어미에게 등 떠밀린 아이처럼 눈을 깜빡이는 영웅의 모습에 수정공은 말을 잃었다. 왜지? 당혹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모험가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뱉었다.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부산스럽게 귀가 누웠다가 꼬리를 휘적거린다. 부끄러워하는 태도는 낯설었다. 익숙하기도 한가? 그가 한때—노르브란트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 말이다—수정공을 졸졸 따라다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살짝 고조된 얼굴로 웃으며 보이던 태도와 비슷했다.
어쨌거나 굴그 화산에서의 일 이후로는 본 적 없던 태도기도 했다. 수정공은 그의 눈을 유심히 살피다 곤란하게 웃었다.
“방해는 아닌데, 걱정이 되어서 그러네.”
여전히 미동 없는 영웅을 보며 수정공이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내쫓기듯 심려의 방 밖으로 떠밀린 미코테의 귀가 축 늘어졌다. 수정공은 미안한 듯이 웃으면서도 한치의 물러남 없이 그에게 의뢰를 맡겼다.
“이렇게 된 거, 바깥 상황을 좀 보고 와주겠어? 별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내부에서 파악하지 못한 문제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제야 모험가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터덜터덜 그가 떠나간 성견의 방에 홀로 남은 수정공은 새파란 거울로 눈을 돌렸다.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매끈한 수정의 단면. 그 위를 수정으로 된 팔로 쓰다듬던 남자는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
장막 대문으로 나온 모험가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선명한 햇빛에 손을 들어 올렸다. 이마 위로 그늘을 만든 그는 당연히 보여야 했을 사람이 없자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늘 문 앞을 지키던 경비 자리가 비어있다. 달리 사람이 차출될 일이 있었나? 미간을 찌푸린 모험가는 높은 계단을 내려가며 도시를 한눈에 훑었다. 그림 속을 걷는 듯이 푸른 하늘과 푸른 지붕, 그리고 넓은 도시에 정적이 흘렀다.
“…?”
정적. 많은 인구가 살아가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넓은 광장을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 없다. 멀리 의료관 앞은 텅 비었고, 천개좌로 향하는 길목에서 훈련하고 있을 법한 위병단도 보이지 않는다. 기이할 정도로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정적이 어우러지니 도시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다 어디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모리 비케는 입을 다물었다. 급히 계단을 내려가 의료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연히 있어야 할 쉐사밀과 페이 한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만큼은 의료관을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나? 텅 빈 카운터를 본 모험가는 시장으로 향했다. 비어있다. 중용의 공예관도, 아마로 승강장도, 목장도 전부. 초코보나 아마로 한 마리조차 없다.
텅 빈 원개좌.
섬뜩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과수원에서는 멀쩡히 식물 위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데 표본관의 항아리에 든 커다란 막대가 돌아간다. 곳곳에 불이 들어온 지하의 등을 보던 모험가는 이내 격자무늬 철교 앞에 섰다. 한참 동안 다리 너머를 바라보던 모험가는 그대로 돌아 장막 대문으로 향했다.
성견의 방을 거쳐 심려의 방으로 돌아가자 책더미에 파묻혀있던 수정공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왔나?”
“…수정공.”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가 책장을 덮었다. 심각한 표정의 모험가는 자리에서 일어난 수정공을 빤히 응시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죽었어야 할 사람. 그렇다면 이곳은 그가 익히 알던 곳이 맞는가?
창백한 얼굴의 영웅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것만으로 수정공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섰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음에도 수정공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탄식을 뱉었다.
“맙소사….”
모험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나치게 생생하여 문제였다. 이마를 짚고 가까운 책더미에 걸터앉아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전부 살아있는 사람처럼 선명하여서.
“이것은 허상이구나.”
수정공이 결론을 내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기에 판단은 빨랐다. 그 많은 사람이 갑작스럽게 증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떤 전조증상도 없이, 원형 아씨엔마저 모두 소멸한 이 시기에 도시 하나를 해먹을 위협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심해 밑바닥에서 보았던 환영 도시. 그것과 다르지 않은 공간이다. 이곳은.
“누가….”
자연스럽게 원인을 추론하려던 수정공은 하얗게 질린 모험가의 안색에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이 정도의 힘이 있던가? 불가능하진 않다. 만일, 크리스탈 타워의 힘을 쓸 수 있다면…. 그러나 이 환영의 적용 범위는 어디까지지? 두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인가, 아니면 어디 있을 지 모를 크리스타리움 주민들 모두 포함인가, 현실의 도시 위에 덧씌워진 것인가…. 사고가 가지를 치듯 뻗어나가는 가운데 겨울철 나무껍질처럼 버석한 소리가 났다.
“…미안해.”
영웅은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질린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대가 왜?”
차분한 대답에 녹색 눈동자가 방황하듯 바닥을 더듬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짝 굳어버린 영웅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당신을, 당신에게,”
“힘들다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내 욕심으로 당신을 되살렸어.”
기어이 죄를 시인한 모험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도망쳤다. 뒤돌아 문을 열고 심려의 방 밖으로 나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적어도 이 환영 도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성견의 방을 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수정공은 천천히 손을 무릎에 얹었다.
깊은 탄식과 함께, 노인은 씁쓸하게 수정이 된 발끝을 보았다.
***
이것은 죄의 대가다. 타락의 증거다. 선두에 나서야 할 영웅이 한 사람에 얽매이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끝내 인내가 끊어진 신화의 리라 성인처럼 그는 멈춰서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템페스트에서 이미 선례를 봐놓고도 그럴 마음이 들었어?
아냐. 사실은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
아모리 비케는 단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차마 그라하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것을 아무도 대답하는 이 없는 시황제의 옥좌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수정으로 된 조각상을 보며 혼자 읊조렸을 따름이다. 채 영글지 못한 사랑, 이루지 못한 소망, 잊히지 않는 상실, 지우지 못한 비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영웅의 약점을 유일하게 흘려놓을 공간이었다.
그가 되살아난다면, 하는 미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라하가 수정공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모는 차가운 옥좌 앞에 두고 온 이가 자꾸 눈에 밟혔다. 텅 빈 껍데기인 것을 알면서도, 알면서도. 그는 결국 사람에 불과하여서 눈에 보이는 것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곳에 남겨진 것 역시 그라하의 파편이고, 수정공의 파편이며, 그가 사랑했던—사랑한, 아니, 사랑하는 이이며, 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미련이다.
모험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종말을 막아내어도 결국 한낱 사람이었다. 그는 전능한 신처럼 보이던 고대인이 아니었다. 한때 그 파편이었으나, 이제는 영영 갈라져 나와 다시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그렇기에 미약하고 불규칙적이며 예측할 수 없던,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어깨에 걸려있던 수많은 믿음과 희망, 원념, 증오, 기대와 같은 것들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걸어야 했던 영웅이다. 200년 후로 전송된 희망의 사자(使者)가 ‘읽어서 알던’ 모험담 속의 영웅. 지워진 역사와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책임져야 했던, 이제는 흔적만 남은 목소리를 이정표 삼아 ‘등불’로 삼았던 모험가.
질식할 것 같은 중압감도, 제대로 말을 전하지도 못한 채 떠나보낸 이별도, 발목을 잡아끄는 절망도 다 견뎌낼 수 있었다. 오직 그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 모든 환난 중에 그가 품었던 사사로운 감정이다.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것이 감정이라면, 영웅에게는 필요치 않았다. 아,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어그러뜨렸다. 영웅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제 한 몸 불태워버리는 영혼 앞에서 모험가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것이 균열을 만들었다.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끝내 행복을 쟁취하게 할 수는 있었어도, 영웅의 안에 사사로운 것들이 허락되자 균열을 타고 미련이 흘러넘쳤다.
기실 아모리 비케는 어떻게 이 환영 도시가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만은 명확했다. 그가 바랐기에 수정공이 되살아났고, 아무도 없는 도시에 단 둘이 남았으며…그는 머지 않아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오로지 그의 욕심으로 인해.
그것만이 모험가의 숨통을 조였다.
***
심려의 방을 뛰쳐나간 아모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그가 걱정되어 탑 안을 훑어보기는 했지만, 수정공은 그를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에게도 정리해야 할 마음이 있을 것이며, 가더라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환상 도시의 하나뿐인 거주민이고, 영웅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지 않은가. 무슨 말을 얹어도 도움이 될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정체를 들킬 걱정도 없으나 수정공은 여전히 후드를 쓰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채 심려의 방에 쌓인 책을 뒤적거리던 그는 이내 책더미에 기대어 앉았다.
잠이 오질 않으니 수면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식사도 불필요하고, 생명 유지를 위한 어떤 활동도 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살아있는 사람이란 걸 보이기 위해 남들과 먹지도 못할 음식을 씹을 필요도 없고. 그는 스스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행동을 무엇 하나 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건 살아있음의 증명이 아니라,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거품이 터질 때까지 남은 유예 기간을 가늠하고,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것이다.
도시 밖으로는 나갈 수 없나? 가능하다면 여행을 해보고 싶었는데. 단둘 뿐인 세상이라도 모험은 모험이다. 만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어도 소통할 상대가 있다면.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러다 문득 수정공은 딱딱하게 굳은 발등을 보았다. 이런 몸으로는 탑에서 멀리 나가지도 못하겠구나. 어쩔 수 없지. 모험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에게 예비된 모험은 전부 그가 떠나보낸 다음 생의 그라하 티아가 이어받았을 터였다.
조금 허탈해진 수정공은 헛웃음을 흘렸다. 나이 먹으니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한 모양이다. 탑의 단말기가 되면서 인간성을 다 버린 줄 알았더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 얄궂다. 몸뚱이가 전부 수정이 되어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사람일 수 있을까. 어쩌면 아모는 그 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누워있던 수정공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몸을 기대고, 심려의 방을 나서니 성견의 방 구석에 기대 누운 모험가가 보였다. 벽에 등을 대고 그대로 잠든 모험가는 무언가를 찾는 듯, 가방을 활짝 열어놓고 온갖 물건을 다 꺼내놓은 채였다.
“이대로 잠들면 감기들어.”
수정공은 천천히 그의 짐 속에서 담요를 찾아 꺼내 그에게 덮어주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 아래로 굳게 닫힌 눈꺼풀이 보였다. 양쪽의 색이 조금 다른 녹색 눈은 이따금 수정공이 잃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한때는 그에게도 녹색 눈이 있었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날 사명과 바꾸어 잃어버린 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험가는 수정공에게도 꽤 깊은 의미를 가졌다. 세상을 구할 영웅, 빛, 동시에 어둠.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였다.
“…라하.”
“그래. 여기 있네.”
잠결에 읊조린 것처럼 잔뜩 잠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수정공은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후드의 그늘에 숨은 붉은 눈과 마주친 녹색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수정으로 된 팔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일어나려 움찔거리던 몸이 그대로 눌려 벽에 붙었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수정공이 낮게 물었다.
“진정하고 그대로 앉아있어. 내가 불편하다면 이쪽이 자리를 피해주도록 하지.”
“아냐. 그런…. 그런 게….”
“그래. 듣고 있다. 천천히 얘기해도 좋아. 이제 내겐 남는 게 시간이니까.”
“….”
“그전에, 나 역시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대답해 줄 수, 있을까?”
불안한 듯이 눈을 굴리던 영웅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수정공은 그의 움직임을 살피다 손을 떼고 그의 앞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그 태도가 꼭 그라하 티아로 살던 시절과 닮아서 영웅이 다시 움찔거렸다. 작게 웃음을 흘린 수정공은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고, 말을 고르듯 두 손을 맞잡았다.
“우선…. 어떻게 이런 현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묻지 말자. 그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으니까. 당장 내가 그대에게 궁금한 것은 이거야. 왜 나를 피했어?”
“그건….”
“내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에도 그랬지. 정확히 따지자면, 템페스트에서 돌아온 날 이후로 쭉 그랬잖아. 그대가 날 불편하게 여기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이유는 잘 몰라도 화가 났다고 생각했어. 내가 지은 죄가 많아 그 중 어느 것인지 가늠이 안 됐을 뿐이지….”
어느 때를 말하는지 짐작한 영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곧 목덜미까지 새빨개져선 손등으로 가리기에 수정공까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어라?
“당신이 나를 사람으로 보니까….”
더는 피할 곳도 없이 궁지에 몰린 영웅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위하듯 침묵하다 끝내 진실을 토해냈다. 그러나 수정공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어째서 이유가 되지?
“나는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당신 앞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어.”
한 번 트인 입은 구멍 난 풍선처럼 안에 있는 것을 전부 뱉어낼 것처럼 굴었다. 아모는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말 중에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횡설수설하듯 문장을 이것저것 주워 담았다.
“내가 아주 평범하고 볼품없는 알맹이만 남은 것처럼, 떳떳하게 말할 수가 없어. 알지? 당신은 날 받아주지 않을 거잖아. 이젠 이뤄야 할 사명이 없는데도, 당신에겐 늘 다른 1순위가 있었잖아. 사실 그때, 당신이 날 속인 건 아무렇지 않았어. 속은 적도 없고. 그렇지만 또…. 나를 두고….”
“잠깐. 잠깐, 아모. 천천히 얘기해도 괜찮아.”
“나는 절대로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지. 난 그걸 알아. 당신은 날 구하기 위해 세상 하나쯤 구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국 당신은 나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고 싶은 거지, 날 책임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잖아?”
말은 순식간에 날을 벼리고 비수가 되어 훅 날아와 꽂혔다.
“그랬다면 날 두고 죽는 계획 따윈 짜지도 않았겠지.”
똑바로 그를 향하지 않는 녹색 눈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라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가 지은 죄가 갑작스레 화살이 되어 돌아온 꼴이다. 아모는 이전보다 붉은 기가 줄어든 얼굴로 땅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있지, 라하.”
목소리에 물기가 스민 느낌은 착각일까.
“나는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밤을 불러오고, 어둠에 빛을 보내주고, 종말을 막는 것도 할 수 있지만…. 난 어느 한곳에 영영 머물 수는 없는 사람이라, 결국 끊임없이 떠돌아야 하거든. 그래서 난 언제나 내 여행에 당신이 함께하길 바랐어.”
지나간 여정이 떠올랐다.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하고, 그를 두고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뜨고, 모험담 속에서 그의 삶을 읽고, 이 땅에서 그를 기다리며 계획을 세웠다. 그와 새벽을 불러와 대죄식자를 격멸하고, 밤이 다시 돌아온 이 땅에, 그 미래에 수정공은 없었다.
“하지만 수정공. 당신에게 모험이란 결국 집으로 돌아오며 끝나는 특별한 사건이지 삶은 아니잖아. 나처럼 돌아갈 곳 없이 떠도는 삶에 잠깐 함께했다가 떠나는 게 모험이란 거지.”
계획이 틀어져 굴그 화산에서는 살아남았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정공은 크리스타리움의 미래에 이름으로 남아 함께하지, 살아있는 그라하 티아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일부는 원초세계로 향했다.
“나는 네 곁으로 몇 번이고 돌아올 수는 있어도 영영 머무를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 나를 잡지 않은 거고. 나도 널 억지로 끌고 나가지 않는 거고. 내가 왜…한 번도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았는지 알겠어?”
알겠다. 원초세계로 돌아가서도 그라하 티아는 그와 모험을 떠나고 싶어 하더라도,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책임지고 남았을 것이다. 그는 사명에 삶을 바치는 감각을 알았고, 결코 그에게 주어진 일을 훌훌 두고 떠날 수 없었겠지. 영웅이 말하지 않아도 원초세계로 넘어간 그라하 티아가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갔다. 바보 같긴.
속에 쌓아두던 말을 다 토해낸 영웅은 이전보다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수정으로 된 손에 제대로 닿지도 못하고 손끝으로만 수정 위를 쓰다듬던 모험가는 나지막이 고해했다.
“당신의 영웅은 보기보다 겁이 많아서,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거랍니다. 수정공. 부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널 되살려내고, 다시 한번 죽음을 겪게 만든 건 정말로 미안해. 두 번째는, 잠들 듯이 편안하게 해줄게.”
수정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우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라하 티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모험가는 바닥에 흩어진 짐과 수정공을 성견에 방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아마 이 환영 도시를 끝낼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까마득한 천장을 올려다본 수정공은 최후를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
“…페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모험가는 요정을 불렀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크리스탈 타워 안에 울렸다.
“페오. 이제 그만해.”
허공에서 피어난 빛이 빙그르르 돌아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잔뜩 화가 난 듯 조잘거리다가도 금세 가라앉았다. 그의 사랑스러운 요정은 이미 모험가의 상태를 느낀 모양이었다.
“내 어린나무는 정말 너무하지 뭐야! 나를 이제서야 부르다니, 더 화를 내고 싶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괜찮아?”
“페오…. 올 때마다 챙겨주지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이런 짓은 하지 말아주겠어?”
답은 간단했다. 크리스탈 타워를 쓴 것도 아니라면, 마법은 아니다. 이런 환영 도시는 아씨엔 정도나 되어야 만들 수 있는 거고, 단지 꿈이라면 요정왕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작 두 사람—아니, 한 사람만 들어가면 되는 꿈이니 품이 많이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좋은 꿈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의 어린나무는 이전보다 더 슬퍼 보이는 구나.”
요정왕의 작은 분신이 모험가의 머리 위로 내려와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 없이도 페오는 그와 감정을 공유한 듯 슬퍼 보였다.
“고마워. 날 걱정했구나.”
“너에게도 그에게도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을까?”
수정공은 진짜 수정공이었을까? 꿈속에서 만들어진 그라하는 원초세계에 살아 숨 쉬는 진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모로트에 남아있는 휘틀로다이우스처럼, 아모리 비케가 가진 수정공의 기억이 그를 생생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모험가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꿈에서라도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수정공은 생각한 적도 없나 보다. 조금 씁쓸해진 웃음과 함께 아모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는데,”
모험가는 제 어깨에 내려앉은 요정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내겐 두고 온 것이 너무 많아. 페오.”
작은 요정은 그의 뺨에 얼굴을 대고 노래하듯 조잘거렸다.
“나의 어린나무는 거짓말쟁이구나. 넌 그 사람도 이곳에 두고 갔다고 여기고 있잖니. 그래서 매번 그 쓴 맛 나는 감정을 가지고 돌아오지. 달콤한 것을 추구하는 건 우리의 본성이야. 언젠가 어린아이였던 당신도 마찬가지고. 입 안에 든 것이 너무 써서 여기 올 때마다 울고 있잖아?”
그 목소리가 마치 일인극의 독백처럼 느껴졌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여 이쪽에서 말하고, 다시 저쪽에서 말하는 배우의 대사처럼. 그러나 페오는 꿈속에서 사는 종족이므로 아모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었다. 요정이 말하는 아모는 실제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영웅의 실상이다.
“울지마. 나의 귀여운 어린나무.”
요정이 그의 머리 위에 기대 누웠다.
“이스네 피슈, 나는 두렵지 않아.”
모험가는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누구인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곳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셋뿐이다.
“이제 내게 진실을 보여줘.”
“아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인력이 있다. 아모는 끝내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한 번 돌아보아 비극을 만들어 놓고, 다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다니. 그러나 그가 부르지 않는가. 어떻게 못 들은 척하겠어. 아모는 다가오는 수정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모, 나는….”
“대답하지 마.”
“….”
모험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뛰어오는 바람에 후드가 뒤로 넘어가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이 익숙했다. 연륜이라고는 새겨지지 않는 영원불멸할 청년. 모험가는 미소 지으며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꿈에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네게 시키는 것 같잖아….”
그 정도로 비참한 짓은 하지 말자. 작게 덧붙이는 말에 수정공이 그의 손을 붙잡아 치웠다. 놀란 영웅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자 붉은 눈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돌아가면 내게 물어. 그라하 티아를 붙잡고,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해. 그 녀석이 뭐라고 답할지 나는 뻔히 알겠지만, 그대는 모르는 것 같으니.”
“뭐?”
“꿈이라서 네가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 같다고? 네 기억 속의 나는 제법 자아가 강한 모양이야. 정신에 간섭하는 내가 아닌 것 따위 느껴지지 않거든.”
붙들린 팔을 강하게 잡아당긴 수정공이 모험가보다 몇 단 높은 계단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이지를 잃기는커녕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아모. 내가 언제 너와 함께 여행하기 싫다고 했지? 날 데려가 달라고 했잖아. 네가 부르면 난 언제든지 응할 거야. 너와 함께하는 모험이잖아. 싫을 리가 있겠어. 그게 10년이든, 100년이든, 난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다.”
“….”
“200년을 넘어 100년 동안 기다린 집념을 우습게 보지 마.”
대답 없는 모험가의 손이 풀려났다. 그라하 티아는 후련한 듯 웃으며 페오에게 끄덕였다. 허공을 빙그르르 돌던 요정은 이내 웃으며 두 팔을 올렸다. 하늘에서 빛이 가루처럼 흩날리며 떨어졌다. 천장에서부터 녹아내리듯, 장막처럼 환영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아모의 앞에 선 수정공은 지팡이를 들고, 다시 후드를 올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움직임과 똑 닮은 자세로, 시황제의 옥좌로 변한 자리에 섰다. 머리에서부터 다시 발끝까지. 그는 수정으로 된 조각상으로 돌아갔다. 비참하고 슬픈 죽음은 없었다. 페오의 속삭임이 모험가의 귓가에 남았다.
슬픈 이야기는 싫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선 채로 잠들었다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혼곤한 모험가는 눈을 깜빡였다. 마주 선 수정공을 보던 그가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돌 위에 살갗이 닿았다. 매번 생각만 하고 한 번도 실행한 적 없는 일이다. 그는 수정으로 된 조각상에 입을 맞췄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불경죄라고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힐까. 세계에 밤도 되찾아줬는데 그 정도는 봐줬으면 좋겠다….
그의 상념을 깨듯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모리 비케님. 계십니까?”
화들짝 놀란 모험가는 죄지은 사람처럼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발치에 노란 꽃다발이 채였다.
“응. 곧 나갈게.”
커다란 문이 열리고 위병단장이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흰 머리의 비스족을 보자 양심이 따끔거려 모험가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직 계시는군요. 괜찮으시다면 식사하고 가시겠습니까?”
“아냐. 돌아가 봐야 할 일이 생겼어.”
“그렇습니까…. 아쉽게 되었군요. 그럼 이것을 그분께 전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이나가 건넨 작은 꾸러미를 받아서 든 모험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어여쁜 손녀딸의 선물이 함께라면 조금…괜찮지 않을까?
조금 상기된 영웅의 표정을 라이나는 능숙하게 모르는 척해주었다. 수정공이 건재하던 무렵, 흔하게 보았던 표정이었다. 아직도 할아버지와는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하신 걸까. 영웅께서는 다른 건 몰라도 연애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으신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제 할아버지의 둔한 눈치도 문제가 되는 걸 알지만, 팔이 안으로 굽은 라이나는 영웅이 부디 잘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
타닥타닥. 발소리가 발데시온 분관의 대회의실로 향했다. 쾅! 문이 열리자 놀란 그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문객을 보았다. 광장에서부터 뛰어왔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벅찬 숨을 뱉던 모험가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아모. 지금 돌아온 거야? 그러잖아도 찾는 사람이…,”
“라하.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우선, 부탁받은 물건부터.”
그라하는 모험가가 건네는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익숙한 포장지와 매듭법, 눈에 익은 모양새다. 제1세계에 다녀왔구나. 라이나가 또 물건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그라하는 아모가 제1세계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고 왔는지 조금 기대가 되었다.
“있잖아….”
한참을 뜸 들이듯 말을 머뭇거리던 모험가는 귀를 바짝 눕히고 꼬리를 휘적거렸다.
“나랑 여행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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