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내빛전A

the End of the world

사망소재 if | 롸빛

* 6.55까지의 스포일러 포함 / 설정 날조

* 사망소재 주의

세상은 유례없는 기로에 섰다. 종말마저도 이겨냈으나 어디서든 위협은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인식하지 못한 깊고도 어둑한 곳. 아주 구석진 곳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이윽고 빠르게 퍼져나가 행성 하이델린을 집어삼켰다. 맙소사, 신이시여. 이미 별바다에 머물던 거대한 신성은 빛을 잃은지 오래인데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쥐고 기도했다. 제발 누구라도,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당연하게도 그들은 이전에도 이미 세상을 구한 바 있는 영웅을 찾아나섰다. 해산했던 새벽의 혈맹은 다시 조직되었고, 재앙의 선두에 섰다. 속절없이 밀려오는 재난이 땅과 바다, 하늘을 휩쓴다. 이미 제7재해로 갈라지고 무너지며 지반을 뚫고 나와 그 상흔을 남겼던 거대한 편속성 에테르가 산산히 부서졌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점차 줄어들었다. 마치 빛의 범람으로 노르브란트만이 살아남았던 제1세계처럼.

알피노 르베유르는 작성하던 수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는 단출한 갑옷을 입은 보초병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인사도 생략한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알피노님,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게…. 영웅 님의 처소에서….”

거기까지만 듣고도 알피노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영웅이자 모험가,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천장이다. 그라하는 눈을 깜빡이며 어지러운 이마를 짚었다. 물에 푹 빠졌다가 건져낸 것처럼, 무거운 사지를 겨우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그는 침대에 있었다. 누구의 방이지? 건물의 양식은 샬레이안 특유의 석조지만, 적어도 발데시온 분관은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무거운 몸은 제 것이 아닌 듯 어색했다. 손 아래로 바스락거리는 시트와 종이가 눌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그라하는 간신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하얀 벽을 손으로 짚어가며 움직였다. 그나마 가까운 책상에 탁상 거울이 놓여있었다. 엎어진 거울을 뒤집어 든 그라하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제 얼굴을 마주했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제 방도 아닌 곳에서 눈을 뜬 그라하는 당황한 채로 거울을 다시 뒤집었다. 어디로 숨을 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어차피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상정하고 들어오는 듯했다.

“아모, 자리에 있나? 들어가겠네!”

“…알피노?”

기억보다 조금 더 키가 크긴 했지만, 르베유르 가의 도련님은 그를 보자마자 휘둥그레 눈을 떴다. 창백한 얼굴의 군인이 그의 뒤에 서 있었고, 문고리를 잡은 채 들어오려던 도련님은 얼어붙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서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다음에야 알피노가 물었다.

“그대가…어떻게 여기에 있지?”

“어?”

“아니지. 질문을 다시 하겠네. 어떻게 살아있는 건가? 분명히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네. 그대는 그라하 티아가 맞는가? 만일 그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참칭자라면 용서하지 않겠네.”

새파란 빛을 내며 현학 도구가 떠올랐다. 날카로운 첨단이 그를 향해 겨눠졌다. 그라하 티아는 낯선 상황에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리고 기억보다 장성한 동료의 두 눈을 보았다. 수호천절이라고 하는 거짓말…이나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말로 장난칠 사람도 아니었고. 요마의 장난인가? 꿈을 헤집어 이상한 내용을 보여준다거나.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라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어…. 신분증이나 서류를 보여준다고 해도 그런 건 위조할 수 있는 거고, 내 기억을 너희에게 보여줄 방법도 없으니까. 이런 질문을 울티마 툴레가 아닌 곳에서 또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 이어질수록 알피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라하는 멋쩍음에 머리를 긁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나는 그라하 티아. 새벽의 혈맹에 소속되어 있고, 얼마 전까지 발데시온 위원회에서 다음 일정 준비를 돕고 있었지. 눈을 뜨니 낯선 공간이라 좀 당황스러운데…. 설명해줄 수 있겠어?”

“…맙소사.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럼, 괜찮은 겁니까?”

옆에 있던 병사가 넌지시 알피노에게 물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밖으로 물렸다. 상대가 누구건 알피노 혼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한편 손을 내린 그라하는 소박한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렇게나 쌓인 책더미와 뒤섞인 온갖 시약들. 가구라곤 침대와 옷장, 책상에 책장이 전부인 단출한 구성. 눈에 익은 구성이었다.

“우선 자네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부터 구분하세. 기억을 잃은 건가?”

“그건…아닌 것 같은데. 딱히 공백이나 누락을 느끼진 못하겠어.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나는 처음에 그대가 껍데기를 뒤집어쓴 아씨엔인줄 알았네. 하지만 원형 아씨엔이 전부 죽은 지금, 이제 와 그런 일을 할 자가 있을지 가늠이 가지 않는군….”

“아.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겠구나.”

아씨엔의 이름이 나올 즈음엔 그라하도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나, 수정공으로 있던 시절 엘리디부스가 그리했던 적이 있었고, 에메트셀크 역시 육체를 옮겨 다녔으니 말이다. 원형이 아니더라도 파다니엘과 같은 윤회자도 있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모든 아씨엔이 빠짐없이 소멸했는지도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이미 별바다로 돌아간 그들의 영혼이 다시 환생하여 아씨엔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했다면?

난감한 기색으로 그라하가 알피노를 향해 제안했다. 바깥에서 들리는 폭음을 이제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아씨엔이 아니라고 해도 말뿐이고, 정 의심스러우면 묶어둬도 괜찮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알피노 역시 점점 가까워지는 소란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덧문까지 닫힌 창문 앞으로 간 그는 잠금쇠를 풀었다. 그는 그라하를 향해 손짓하여 가까이 불러들였다.

“발데시온 위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꽤 오래전에 기억이 끊긴 것 같아 설명하겠네. 지금 세상은 멸망을 앞두고 있네.”

“뭐?”

“검은 장미가 아닌 다른 것이 제 8재해를 일으켰네.”

붉게 타오르는 하늘과 새까맣게 죽은 대지. 물은 뿌연 거품이 끼어 해안선으로 온갖 지저분한 것을 밀어냈다. 바다를 낀 절벽에 지어진 건물은 창밖으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알피노는 이제는 익숙하여 덤덤하지만 지친 얼굴로 설명을 이었다.

“우리는 재해를 막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으나 역부족이었네. 여덟 번째 재해는 동시에 많은 재해가 밀어닥쳤네. 단순히 세계 하나가 무너져 통합되는 과정이 아닌 것 같았어. 그래서 우리는 어떤 아씨엔이 되살아나 세계통합을 다시 시도하려는 거라고 추측했네.”

“어떻게, 그런…. 분명 미래는 바뀌었을 텐데….”

“그래. 바뀌었지. 종말을 막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우리는 해냈지. 하지만 살아있는 한 완벽한 결말은 볼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실이었네. 인생은 연속적인 거잖나. 이야기처럼 해피엔딩 이후에 멈추는 것이 아닌.”

“….”

잠시 충격을 소화하듯 말이 없는 그라하의 표정을 보던 알피노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많은 상실과 죽음을 지나온 표정이었다. 한때 도시를 이끌던 그가 여러 번 보았던 얼굴이기도 했다. 재해가 동시에 여러 가지가 일어났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추측이 있다. 아득해지는 감각을 억누르며 그라하가 입을 달싹였다.

“제…제, 1세계는….”

“그곳은, 아직 건재하네. 어떤 연유인지 넘어가는 문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아모가 직접 다녀와서 확인해주었네. 노르브란트에서 나는 식물과 크리스타리움에서 물건을 받아와 줬네.”

“하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라하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피노는 하늘을 눈으로 훑다가 창문을 도로 닫았다. 멀리 붉은 하늘 너머에서 까만 비행체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이드 역시 멀쩡하다네. 달에 있는 문이 닫혀 연락하기가 번거로워졌으나 간신히 사역마를 보내 안부를 확인했지. 아. 혹시 제로를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기억해. 응, 기억하고 말고…. 분명 투랄 대륙의 툴라이욜라로 향한다고 이야기했던 것까진 기억이 나.”

“그래…. 일단 쉬고 있게. 아모는 곧 밖에서 전투가 끝나는 대로 돌아올 걸세.”

“기다려. 전투라면 나도 갈게.”

기억도 온전치 않으면서, 그렇게 말하려던 알피노는 그라하가 꺼내든 무기를 보더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손 하나가 아쉬운 마당이니 그의 도움을 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괜찮을까. 어쩐지 알피노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잠깐, 잠, 잠깐! 잠깐만!”

그라하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 강제로 침대 위로 눕혀졌다. 사방에서 그를 둘러싼 치유사들이 형형한 눈을 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시선으로 당장이라도 해부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단지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인 그라하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마물에게 독성이 있었던가? 그런 종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군다나 자기 말고도 다친 사람은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다 제쳐두고 그에게만 이런 식이었다. 둘러싼 치유사들 중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작은 조명을 들고 와 그라하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니, 난 괜찮, 윽!?”

“조용히 하세요. 진찰 중입니다.”

“….”

눈에 곧바로 조명을 몇 번 쏘아보고는 그의 혈관이 지나는 자리를 짚어 진맥한다. 에테르가 가볍게 몸을 훑고 지나갔고, 몇 가지 간단한 치유마법이—베네피크나 케알 등의 익숙한 것도 포함하여—쏟아졌다. 그라하는 꼼짝없이 차가운 진료용 침대에 누운 채 손발 끝을 꼼지락거렸다. 무기는 이미 빼앗겨 멀리 벽에 기대놓았다. 손을 뻗는다고 닿을 위치가 아니어서 곧 포기하듯 몸에서 힘을 빼었다. 그들은 진찰하기 수월해진 그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한참을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체크하더니 문가의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어때? 진단 결과는? 이상은 없고?”

“네, 치프. 특이점은 없으며 아주 건강합니다.”

“그럴 거 같았어. 잠깐 자리 좀.”

사무적으로 대화하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라하는 눈을 홉뜨고 목소리를 좇았다. 전투 동안에도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다 끝나고 후방 진료소로 끌려오고 나서야 나타나다니.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사람이다. 치료사들 사이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온 갈색 머리의 치유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라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무감한 시선. 어쩐지 그라하는 그것이 껄끄럽게 거슬렸다.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치료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라하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 아깐 어디 있었어?”

“최전방에. 그보다 말하지 말고 누워있어.”

“뭐? 나 아까 멀쩡하다고 진단받았잖아!”

“기다려.”

항의하며 일어나려는 그라하의 이마를 모험가가 손바닥으로 눌렀다. 강한 힘이 아닌데도 그라하는 곤란하게 눈을 굴리기만 할 뿐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허투루 일할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정말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러는 걸까. 치유사들이 하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에테르 흐름, 양호. 생명활동, 양호. 영혼의 정착, 양호. 왜 그런 것을 체크했을까.

“아모, 너 말이야….”

“쉿. 슈톨라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해.”

질문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입을 막은 모험가가 그라하에게 몇가지 장치를 붙이기 시작했다. 생소한 물건들이다. 알라그의 양식이 섞인 것으로 봐서 새로 개발한 물건인 모양인데, 그보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가 문제였다. 그라하는 입을 막은 손을 강하게 떼어냈다.

“뭐를…,”

“뭘 말인가요? 내가 오기 전에? 뭔가 꾸미는 게 있나요?”

불쑥 마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팔짱을 낀 흰 머리의 미코테족은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진료실 안을 눈으로 훑었다. 바로 그라하와 모험가에게서 눈이 멈춘 마녀는 작게 헛숨을 뱉었다.

“…맙소사. 아모.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에요?”

“음….”

“해명을 좀 해줘야겠어요. 내가 반대쪽 경계를 보고 오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문을 닫은 마녀가 자물쇠를 걸었다. 찰칵. 밀폐되었으나 그라하는 모험가의 뒤에서 그의 손짓을 보았다. 뭐, 잡으라고? 얼떨결에 손을 잡기 무섭게 훅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눈을 홉떴다. 야슈톨라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아모!” 그대로 슉, 텔레포가 시전되었다.

갑작스러운 동반 텔레포는 멀미를 유발했다. 메슥거리는 속과 함께 장비를 다 빼앗긴 통에 가벼운 차림으로 벽을 짚은 그라하는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교감한 적 없는 에테라이트다. 올드 샬레이안에서 시범으로 만들던 예드리만과 연결된 에테라이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까. 어떻게 그를 이끌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서른도 되기 전에 샬레이안 마법대학 교수 제의를 받은 모험가라면 방법을 찾았겠거니 했다. 창백해진 얼굴을 쓸어내린 그라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해 뜰 녘과 해 질 녘 사이의 노을이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저물지도, 동이 트지도 않는 하늘.

“….”

마치 빛으로 가득 차 있던 제 1세계의 하늘과 같은 것일까. 그라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멀리 놓인 투박한 돌산과 자연을 엉망으로 헤집은 알라그 시대의 유적을 보았다. 유적지. 남방 메라시디아인가. 아니면 영 다른 곳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다. 폐허처럼 버려진 마을에 에테라이트만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알라그 유적지로부터 끌어온 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비척거리긴 해도 움직이기 편해진 그라하는 에테라이트와 알라그 유적 사이에 연결된 전송 장치로 향했다. 옆에서 말이 없던 모험가는 하늘을 보는 듯하더니 그의 뒤를 따라왔다.

“여기는 어디야? 왜 도망쳐 온 거고?”

“음….”

“말해주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녹색 눈이 고요하게 굴러갔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시선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그라하가 알지 못하는 몇 년 사이에 변했다. 무언가 크게 결여된 사람처럼 공허한 시선은 세상을 무감하게 훑고, 움직임에서는 습관적인 친절만이 엿보일 뿐이다. 수많은 가설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그라하는 적당히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정 말해주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내고 싶지 않았다. 상처입히면서까지 알고 싶은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말해주겠지.

대답 없는 모험가를 향해 그라하는 가볍게 숨을 뱉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려고? 새로운 모험? 알라그 유적 탐색…을 하려던 건 아닌 거 같은데.”

“보고 싶은 만큼 봐도 돼.”

“아무리 그래도 상황 파악 못하고 유적지에 달려갈 만큼 내가 철이 없진 않다고….”

“진짜로. 내부 보안 시스템은 거의 다 해체해놨어. 안전해.”

“….”

이쯤 되면 거의 대놓고 꾀는 수준이었다. 붉은 꼬리가 요동치듯 흔들리다, 그라하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잠깐은 괜찮잖아?

“그럼…. 잠깐만. 잠깐만 안에 둘러보고 나오자. 본부도 오래 자리 비우면 위험하다며.”

“알피노가 얘기해줬어?”

“어? 응.”

그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고개를 내저은 모험가는 그라하보다 앞장서서 알라그 유적지를 향해 걸었다. 과연 보안장치를 다 해체해놨다는 말이 옳다. 방범 장치가 죄다 부서졌으니 기능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처참하게도 파괴된 흔적을 잠시 황망하게 보던 그라하는 앞선 재촉에 뒤따라 걸었다.

“빨리 와. 거의 다 해체한 거지, 전부는 아니어서 미적거리다간 보안에 걸리니까.”

“아. 그래. 알겠어.”

“시르쿠스 탑처럼 규모가 큰 건물은 아니야. 달라가브 구속함과는 좀 비슷할 거 같긴 한데, 더 정확히는 마과학 연구소 정도의 규모지. 정식 명칭은 ‘남방 식민국 부속 연구소’야.”

앞서 걷는 모험가는 하나씩 건물 구조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라하는 곧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더니 그의 말에 반문했다.

“남방…그건 어떻게 알았어? 알라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었나? 근처에 조사단이 주둔했던 흔적은 없는데, 연구자는 아무도 안 왔던 거야?”

“여기 주변에 떠돌아다니던 알라그 공이 설명해줬어. 여긴…거점과 너무 멀고 오는 길이 험해서 조사단을 파견할 수는 없었어.”

“그럼 내가 첫 방문 연구자인가?”

“자잘한 건 내가 몇 개 들고 가서 물어보긴 했지만.”

“어쨌거나.”

걸음이 성큼성큼 옮겨가는 통에 주변이 휙휙 지나갔다. 거의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로 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 승강기에 올라탔다. 아직도 동력원이 작동하는 것은 신기하다. 아지스 라 기함섬처럼 대규모 영토라면 모를까, 이 밖에는 알라그 이후 시대의 문명이 침식했고 정착해 살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말이다.

“용케도 이 안의 물건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네. 보안이 꽤 삼엄했나 봐?”

“음…. 끝도 없이 몰려오긴 했지.”

“엑. 위험하잖아. 그걸 뚫고 들어온 거야? 역시 대단해. 그런데 왜 갑자기 알라그 유적에 관심을 가졌어?”

모험가는 대답 없이 그라하를 응시했다. 아, 그래. 나 때문이다, 이거지. 그라하 역시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맞대응했다. 표정에 미동 없는 모험가는 탁하게 색이 빠진 눈으로 그를 훑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애매하고 모호한 반응에 그라하가 미간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모험가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커다란 문턱을 넘었다.

“어쨌든 내부 유적 자체는 거의 그대로 남아있어. 보고 싶은 게 뭐야? 생명체 연구? 부속 연구소답게 규모가 작긴 하지만 꽤 알차게도 해 먹었더라고. 유리관에 들어있던 생물이 수십 마리였어.”

“‘였다’는 건 그것들 역시 전부 해치웠단 뜻으로 들리는데.”

“달리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 왔다.”

보안 장치가 부서져 파직거리는 잡음을 뱉는 문을 지난 다음에야 걸음이 멈췄다. 한눈에 보기에도 건물의 7할은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처럼 보이는 것이 에테라이트보다도 크고 새파란 수정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맥박 하는 심장처럼 두근거리는 파장과 함께 에테르를 뿜어내고 있었다. 커다란 동력원. 이 주변이 폐허로 변하고도 그대로 시스템이 유지되던 원인이었다. 빨간 눈에 파란빛을 담은 그라하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주위를 훑었다.

“대단해…. 이건…. 정말로 커다란 에테르 결정체야. 거의 크리스탈 타워의 꼭대기를 뜯어다 놓은 것과 다르지 않은 수준의 밀도잖아. 대규모…백성석인가. 이걸 찾아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노렸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백성석을 왜?”

결국 모든 의문은 ‘왜'로 귀결된다.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그라하는 말문이 턱 막힌 듯이 얼어붙었다. 그를 빤히 응시하는 녹색 눈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딘지 용의 것과도 닮았고, 혹은 잠깐이나마 만났던 고대인의 것과도 같았다. 그도 아니면 저것은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라하를 보던 모험가는 바깥의 하늘을 가늠하더니 느릿하게 손짓했다.

“곧 돌아가야 해. 시간이 늦었어.”

“…아직 밖엔 노을이던데?”

“라하. 가자.”

단호한 발언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렸다. 그라하는 이내 밝게 빛을 내는 대형 수정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그 유적지는 언제고 다시 와서 조사할 기회가 있겠지. 그라하는 모험가가 내민 손을 당연하게 맞잡았다. 살갗이 닿자마자 움츠렸던 그의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꽉 움켜쥔 손바닥 사이로 열이 옮아 곧 미지근해져 그의 손이 어떤 온도였는지 잊어버렸다. 바짝 팔을 끌어당긴 모험가가 그를 이끌고 텔레포를 시전했다.

노을은 저물지 않았다. 조금 더 어두워지긴 했으나 밤이라기엔 밝고, 낮이라기엔 어둡다. 어슴푸레한 빛이 주둔지 곳곳에 내걸렸다. 그라하는 텅 빈 복도를 둘러보고 그림자에 몸이 가려지도록 걸었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실례할게. 밤 중에 미안해.”

“아뇨. 그러지 않아도 당신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어요. 아모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았을 테니, 당신이 찾아오는 게 차라리 나았겠네요.”

야슈톨라는 문을 열고 들어온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게 뻔하니 그라하는 거절하지 않고 맞은 편에 앉았다. 마녀가 손을 휘저으니 찻잔이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잡은 그에게 야슈톨라가 먼저 운을 떼었다.

“일단 당신은 적어도 ‘그라하 티아’가 맞긴 한가 보네요.”

“푸흡! 그, 그래?”

“어머. 본인도 별로 자신이 없었나 봐요?”

잔을 기울이다 말고 사레에 들린 듯 그라하가 잔기침을 뱉어댔다. 당황하는 그와 달리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뗀 마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옆에 놓인 냅킨을 들어 입과 주변을 닦은 그라하는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기억에도 없는 장소에서 눈을 떴더니 마지막 기억보다 몇 년은 지나있던 데다, 내가 죽었었다고 하니까….”

“게다가 재해까지 일어난 마당에 아씨엔의 재등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맞아.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모든 일에 100퍼센트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잖아.”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댄 마녀는 손끝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세상에 어떤 일도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 확신했던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을 그들은 몇 번이고 겪지 않았나. 줄곧 고민하던 마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부터 먼저 물어보죠. 당신,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 날짜가 어떻게 되죠? 아니, 잘 모르겠다면 연도로 대답해도 좋아요.”

“뭐? 아마…제 6성력 기준으로 1579년….”

“…역시.”

무언가를 알아낸 듯 야슈톨라는 골치 아픈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깊은 한숨과 허공을 헤매는 눈.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연도만으로 어디까지 생각이 뻗었을지, 그라하는 짐작도 못 했다. 뛰어난 마도사들은 늘 그렇듯이 상대의 앎과 별개로 자신의 사고를 빠르게 전개하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서라도 주면 좋으련만. 마녀는 그것을 알았는지 뒤늦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또 혼자 생각하고 있었네요. 당신의 정체가 무얼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내 정체 말이지. 나도 몇 가지 짚이는 구석은 있긴 한데.”

“들어보지 않아도 대충 알 거 같네요. 클론, 부활, 가짜 신분, 기억상실…. 이런 시나리오 중 하나겠죠?”

그라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하는 범위가 비슷하긴 하지. 그간 해온 일이 있고,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야슈톨라는 영 찜찜한 얼굴이었다. 마녀는 찻잔의 둘레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는 당신의 기억이 1579년으로 끊어졌다는 점이에요. 그 연도는 어느 모로 봐도 애매하고, 굳이 콕 집어서 그 시기의 기억을 백업했다고 해도 이상해요. 마지막 남은 소울 사이펀은 아모가 들고 있었어요. 당신이 그것을 개인적으로 만져볼 기회가 있었다면 모를까.”

“나는 그에게 따로 요청한 적이 없었어. 굳이 찾아볼 일도 없었지.”

“그래서예요. 만일 내가 아모였다면, 최대 4년 전의 기억으로 꼽았을 거예요. 지난 5년간 너무 많은 것이 변했거든요.”

“…올해로 1581년이야?”

“아뇨.”

마녀는 확정적인 어조로 단언했다. 미묘해진 표정을 한 그라하와 눈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읊었다. 불온하게도 마녀의 등 뒤로 닫힌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유리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길한 붉은 하늘 아래 몰아치는 바람이 까만 낙엽을 이리저리 실어 옮기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수십 년이 지났다고 생각해요.”

어째서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야슈톨라는 부연 설명을 붙였다.

“시간축이 어긋난 감각이 들어요. 마치 짧은 기간을 몇 번이고 반복한 것처럼.”

덜컹, 쿵, 덜컹. 바람에 커다란 물체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세지는 바람은 점차 폭풍이 되어가는 듯했다. 본부 건물은 크고 튼튼하게 지어 날아갈 걱정은 없었지만, 창문 틈새로 스며 들어오는 소리가 마치 원혼의 울음소리 같았다. 우우우, 우우우우—.

“분명 이곳에 있는 흔적인데도 에테르의 흐름이 뚝 끊겼다 이어 붙인 것도 같고, 아니면 잔상처럼 흘러간 흔적이 여러 겹으로 뭉쳐있어요. 이런 흔적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했고, 지난 5년 동안 갈수록 늘어났죠. 무슨 뜻일 거 같아요?”

“…어떤 마법을 여러 번 사용했구나?”

“단순히 마법을 여러 번 겹쳐 썼다면 그런 흔적이 남지 않아요. 그저 대규모 에테르의 흐름이 있을 뿐.”

마녀의 등 뒤의 창문은 이제 당장이라도 열릴 것처럼 덜컹거렸다. 마치 바깥에서 누군가 주먹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나는데도 마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라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그의 입을 막고 심장을 커다란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이 되돌려졌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렇게 대규모 범위의, 국소적인 기간만을 되감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역시 증명하지 못했죠.”

쿵! 쿵! 쿵!

“당신은 어느샌가 죽어 있었어요. 내 감각에 따르면 그건 벌써 꽤 오래된 일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작 4년이 지났다고 하더군요. 재앙이 일어나고 1년 지났을 무렵, 당신이 죽었다고 해요.”

쿵! 쿵!

“잘 생각해봐요. 내 눈에 당신의 육신은 한 치의 어긋남도, 위화감도 없어요. 이전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했던 기록도 봤어요. 도가와 우네의 말에 따르면 클론은 최소한의 기능만을 구성해두었기 때문에 생식 능력이 없다죠. 그 말은 제대로 된 생명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할 거예요.”

쿵!

“당신은 적어도 클론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 따위, 난 들은 적도 없어요. 과거 그러한 일을 시도했던 이들이 불러낸 사자(死者)는 모두 본인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였어요. 국지적 규모의 야만신이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당신은 분명하게 자신이 ‘그라하 티아’라고 했고, 나도 그걸 부정할 생각이 없어요.”

쿵.

“어쩌면 당신 역시 ‘아몬의 잔데’처럼 자신을 ‘그라하 티아’로 인식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란 사람이 그런 알 수 없는 것이었다면 ‘앎’을 위해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죠.”

….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이 멎었다. 끔찍한 침묵이 공간을 뒤덮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야슈톨라는 그라하가 자신이 쏟아낸 말을 소화하기를 기다렸고, 그라하는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와 자신의 안에서 솟아나는 온갖 추론과 가설에 번호를 매겨 정리했다. 아주 짧은 정적은 오랜 고요처럼 머물렀다. 그라하가 먼저 바짝 마른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는 부활자도 클론도 아닌 가능성이 떠오르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 틀림없이 같아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과거에 죽은 누군가를 살리는 방법. 당신이 한 번 성공적으로 해낸—”

“—과거의 인물을 불러온다.”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발견한 사람처럼,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금기를 건든 것만 같은 껄끄러움과 불편함이 남았다. 무엇보다 그라하 티아를 과거로부터 불러올 만한 사람이라곤 단 한 사람뿐이기에. 남의 사적인 영역을 멋대로 파헤치고 들여다본 직후의 떨떠름한 정적이 맴돌았다.

“맙소사….”

작은 탄식과 함께 그라하는 이마를 짚었다. 아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제야 야슈톨라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마녀가 멀리 반대쪽 경계를 보고 돌아오는 한 달 남짓한 기간 사이에, 모험가는 짐작도 가지 않는 짓을 저질렀다. 그라하는 문득 자신이 눈을 뜬 공간이 그의 방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손발에 채이던 종이, 바스락거리는 시트. 그것은 마법진이었다. 비록 그 끄트머리 몇 조각만 기억났지만.

“난…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아모를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어째서?”

“그가 당신을 잃고 한동안, 꽤 오래 앓았어요. 어쩌면 지금도.”

그라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죽었느냐고 물어봐서 대답을 듣는다고 무언가 달라지는가? 아마도. 그것이 모험가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 될까? 그것 역시 아마도. 하지만 어떤 상처는 치료하기 위해서 아픔을 참아야만 했다.

“난…어떻게 죽었어?”

“뻔하고 비극적이었죠. 재앙은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우린 손이 부족했어요. 모두가 힘을 합쳐 이겨내 보려고 아등바등했지만 피해는 불가피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곳마다 뛰어다녀야 했죠.”

“…힘들었겠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아무렴, 사람을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는데 피로가 대수인가요? 하지만 가랑비처럼 우린 조금씩 지쳐갔고, 먹고 잘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동분서주했어요. 당신은 그 과정에서 사람을 지키다 죽었어요. 거긴 후방이었는데,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갑자기 들이닥친 마수 떼와 지진이 동시에 몰아닥쳤고…. 당신이 가장 뒤에 남았다고 했어요.”

너무 뻔해서 대답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니기에 위로할 수도 없다. 야슈톨라는 이제 오래되어 상흔조차 흐려진 사람처럼 말했다.

“당신의 시신을 수습한 게 그 사람이에요.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처참했던 걸 며칠에 걸쳐 온전하게 만들어놨는데…. 난 그때 그 사람이 미쳐버리는 건 아닌가 했어요.”

머리가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짐작이 갔다. 가뜩이나 주변 사람을 잃는 일에 크게 앓는 사람이다. 트리거가 되었을 것이다. 확실하게.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어나서 최전방으로 향하는데…. 오히려 너무 평소 같아서 섬뜩할 지경이었어요. 당신이 보기에, 그가 지금 멀쩡해 보이던가요?”

“…아니. 아니. 전혀.”

“그렇죠. 다들 알면서 쉬쉬하고 있어요. 섣불리 그를 동정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는 데다 위로 역시 가당치 않죠. 단지 그가 털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건만….”

야슈톨라는 찻잔을 놓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마녀는 줄곧 신경을 긁던 위화감의 정체를 그라하와 마주하고서야 깨달은 참이었다. 마녀의 이름이 울고 갈 것이다.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난 애석하게도, 당신을 보고야 알았어요. 오래도 시간이 지난걸.”

모험가의 방 앞에는 마녀와 함께 돌아온 산크레드가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서 기다리던 사람처럼 그라하를 향해 손을 들었다. 위리앙제와 알리제는 전방에서 마주쳤으니, 어쩌면 야슈톨라와 함께 다녔으리라 생각했는데. 새벽의 일원 중에 죽은 건 그라하 티아 한 사람뿐인 모양이었다. 기억보다 피로하고 수척해 보이는 산크레드가 손으로 낯을 쓸어내렸다.

“그래. 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그 녀석이군.”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본인이 맞는 모양이네. 수정공 시절이 떠오르는걸.”

“날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 정확히는 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지.”

산크레드는 엄지로 문을 가리켰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들어간 모험가가 돌아온 이후로 얼굴을 비추지 않은 탓이었다. 그라하는 난감하게 볼을 긁적이다 그의 옆에 섰다. 문을 두드리면 열어줄까. 다른 이들보다 그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맞지만, 지금의 모험가에게도 그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라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아모. 들어가도 돼?”

대답이 없었다. 안에 사람이 있기는 한지 인기척은 들리는데. 산크레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숨을 뱉으며 자기 머리를 헤집었다.

“괜찮아.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있으니 열어주지 않는 모양이다. 둘을 한꺼번에 보기 껄끄러운 거겠지.”

“그렇지 않아. 뭔가 준비하고 있는 거 같은데.”

“됐어. 나라도 너랑 린을 한 자리에서 보면 할 말도 못 하고 있을 거다.”

“그런….”

불현듯 그라하는 제 1세계에 두고 온 그의 아이를 떠올렸다. 그래, 그 역시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생사조차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산크레드는 조금 거뭇하게 그림자 진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야슈톨라에게 대강 들었어. 솔직히 말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 반, 내게도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시도해봤겠지 하는 마음 반이다.”

“당신은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왔잖아. 그렇게 깎아내리지 마.”

“글쎄다. 내가 모든 것을 돌이키려 들지 않은 건 그럴 능력이 없어서였을 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가길 택했다지만, 만일 내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었다면….”

“지나간 일에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해.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과거로 돌아가기까지 했던 내가 하기엔 아이러니한 말이겠지?”

방문 너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부스럭거리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큰 소음은 아니어서 두 사람의 시선이 방문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그라하는 멋쩍음을 숨기지 못했다. 타인에게 연설하기에 그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 내몰려 지쳐가는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시간을 돌리기 전에도, 돌린 후에도, 다시 원초세계로 돌아온 뒤에도 보아왔던 광경이었다.

그라하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산크레드에게 생각을 전달하려 단어를 골랐다. 산크레드는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역시 현인이니, 보고 들은 것이 많은 만큼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도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내게 있어 그 일련의 과정은 과거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미래를 과거를 통해 잇는 거였어. 나는 그것이 후퇴가 아닌 전진이라고 생각해. 당신 역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는 대답 없이 그라하의 눈을 응시했다. 곧 눈을 돌리며 머리를 헤집듯이 쓸어 넘기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웃음을 흘렸다. 매번 보던 표정이다. 피로가 조금 가신 얼굴로 그가 어깨를 툭 두드렸다.

“위로 고맙다. 유념해두지. 또 보자고.”

이제 문이 열리길 포기한 건지, 산크레드는 손을 휘적거리며 인사하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라하는 다시 고요해진 방문을 돌아보며 말을 곱씹었다. 다시 보잔 말이지.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여기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과거에서 소환된 것이라면—과거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아모. 문 좀 열어줘.”

나지막한 목소리 후에 문고리가 찰칵, 돌아갔다. 열린 문틈으로 어두운 방과 그림자 진 얼굴이 보였다. 비스듬히 기댄 모험가는 그라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옆으로 비켜섰다. 선뜻 들어오란 몸짓에 그라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표정이 무기질적이다. 무슨 짓을 했고, 무엇을 얻으려 했던 걸까. 이제 그는 그의 소굴로 들어가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모험가의 방은 난잡했다. 이리저리 쌓인 책과 수정 조각, 약초와 나뭇가지, 마물 사체에서 채취한 온갖 재료가 뒤섞여 굴러다녔다. 그리고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탁자는 바깥에서 주워 왔는지 이리저리 헤지고 칠이 벗겨져 낡아빠진 목재였다. 옆에 대충 놓인 스툴 두 개는 짝도 맞지 않고, 도색도 제멋대로였다. 하나는 노란색, 하나는 검은색. 늘 두서없이 물건을 쌓아두더라도 가구만큼은 정갈한 원목을 쓰던 모험가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라하에게 의자를 권한 모험가는 맞은 편에 앉았다. 바닥에는 쓰다 만 종이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굵은 선을 낙서처럼 칠해둔 것이 뒤섞여 쓰레기공처럼 굴러다녔다. 뛰어난 마도사인 모험가는 마녀와 비슷하게 손짓 한 번으로 그라하에게 마실 것을 내어 주었다. 그가 원래도 즐기던 허브차였다.

따뜻한 찻잔을 쥔 그라하는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 고민했다. 모험가 역시 그가 무언가를 물어보리라 여겼는지 아무 말 없이 탁자의 끄트머리를 긁으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날 과거에서 소환한 거야?”

“응.”

“크리스탈 타워의 기록을 조사했겠구나.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아니지. 네게 이 질문은 무의미하겠다. 소울 사이펀을 사용했어? 알라그 황족의 피 없이는 탑이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네게 받았어.”

나에게? 그라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미래의 그라하 티아가 모험가에게 피를 넘겨주었다는 뜻일까? 가능성 있다. 아니면 죽은 그라하 티아에게서 채취했다는 뜻일까. 이 역시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기꺼이 피는 물론이고 육신도 넘겨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결과로 모험가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다면 그것은 문제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라하는 모험가와 시선을 마주했다. 녹색의—이전이었다면 투명하게 비치는 물빛의 청록과 숲의 새순처럼 푸르던 녹빛이 아닌, 보다 탁하고 어두워진—눈동자는 그와 마주하고서도 초점이 흐리게 보였다.

“…아.”

작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이 잘 안 보이는구나. 그것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유는 야슈톨라와 같은 에테르시를 터득했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한 덕일 것이다. 마주 앉은 이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져도 그는 보지 못한 것처럼 무감한 눈을 했다. 작은 한숨에도 기민하게 움찔거리던 귀는 미동이 없다. 어쩌면 청력 역시 조금씩 손상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라하는 어디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 사이 모험가는 작은 탁자의 끄트머리를 긁던 것을 멈추었다.

“돌려보내 줄게.”

“뭐라고?”

“왔던 곳으로, 네가 있어야 할 시간대로 돌려보내 준다고.”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자….”

당황한 그라하가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그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그의 발밑의 그림자가 짙은 것이 신경 쓰였다. 창밖이 보이지 않도록 단단하게 걸어 잠근 덧문과 그로도 모자랐는지 두꺼운 커튼으로 가린 방 안은 어두웠다. 오로지 천장에 달린 사슬등만이 미동 없이 어슴푸레한 빛을 뿌렸다.

그의 새까만 구둣발이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발끝에 챈 종이를 본 그라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마법진의 일부다. 그렇다면 주위에 굴러다니는 이 종이는 모두,

“돌려보낼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갑자기 불려와서 당황했을 거 아냐. 게다가 돌아가서 해야 할 일도 많고…,”

“기다, 기다려. 아모. 너무 갑작스럽잖아. 불러온 것도, 돌려보내는 것도. 거절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넌,”

“왜?”

순진한 아이처럼 그가 되물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그라하는 간신히 질문을 쥐어짰다.

“넌 그걸로…괜찮아?”

“뭐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가 대답했다. 혼자 멀리 성큼성큼 걸어가는 생각의 속도에 아득함을 느꼈다. 그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과거로부터 불러온 그라하는 그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기실 상실은 비슷한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험가가 그라하를 두고 제1세계로 종종 수정공의 육신을 만나기 위해 가던 것을 묵인했듯이. 그라하는 어떤 것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리를 갈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수정공과 그라하 티아가 연속선상에 있으며 같은 사람이란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과는 다른 영역의 문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은 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살고 죽는 동안 거대한 에테르의 흐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음과 동시에 혼은 별바다로 향하고, 육신은 에테르로 분해되어 세상으로 흩어진다. 아주 서서히, 조금씩, 별의 일부가 되어 녹아내린 후 다시 별의 조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수정공의 몸뚱이는 제1세계에 남아 영원불멸하도록 박제되었다. 수정탑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 묶인 에테르 덩어리는 그 자체로 희망의 상징이자 혁명의 깃발이며 모험가의 추억이 되었다. 그라하 티아가 원초세계에 멀쩡히 살아 숨 쉬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네가 원했던 그라하 티아는 내가 아니란 건 알겠어.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네가 희생한 것들은? 네가…네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느냔 말이야.”

그라하 티아는 모험가가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기 위해 잃어야 했던 것들을 가늠했다. 수정공이었던 그가 잃어버린 것과 같을 수는 없겠으나 비슷할 것이다. 감각, 인간성, 생명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 모험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미 지나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는 과오의 값이라고 치면 되니까.”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 네가, 네가 나를….”

“너는 아니지. 그라하 티아.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차갑게 말을 끊어낸 모험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잡으려던 그라하는 발을 무겁게 끄는 에테르의 흐름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시전된 마법이 그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우당탕, 요란하게 가구가 넘어가고 그는 땅에 묶였다. 그를 내려다보는 모험가는 길쭉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예전에 쓰던 것과 다르게 커다란 백성석이 달린 지팡이는 알라그의 유적지에서 뜯어온 것들을 조합해 만든 것처럼 보였다.

모험가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상체를 밟고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흩어져있던 종이가 날아와 그의 밑으로 마법진의 형태를 갖추었다.

“네가 그는 맞아. 엄밀히 말해서 내가 정확히 원본을 불러왔지. 그렇다고 해서 널 이대로 이곳에 묶어뒀다간 시간축이 엉망으로 꼬여버릴 거거든.”

“그걸 알면서 한 게 아니었어?”

“네 얼굴을 보니까 정신이 좀 들어서. 그땐 좀 미쳤었거든. 이해 못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왜 좀 더 나와 함께 있지 않았어? 그리워 했잖아.”

마도사는 대답 없이 발아래 깔린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줄곧 미동 없던 눈매가 경련하듯 움찔거리다 느리게 접혔다. 그는 미소 짓기 위해 얼굴 근육을 처음 움직여 보는 기계처럼 굴었다. 그러다 곧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좋았어. 너랑 같이 있어서. 알라그 유적지에 데이트도 다녀왔잖아.”

“그건…. 너무 나만, 좋았, 윽!”

“조용히. 어차피 잘 안 들려. 해줄 말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다가 그냥 서류로 묶었어. 갈 때 가지고 가. 앞으로 도래할 위험의 단초를 최대한 조사한 것들이니까. 요긴하게 쓰일 거야.”

그라하의 입을 막은 모험가는 멀리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불러와 그의 품에 넘겼다. 바닥에 깔린 마법진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그가 대규모 마법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몇몇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꽉 닫힌 문은 잠긴 채 쿵쿵거리며 들썩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시간을 연구하다 보니 많은 걸 알게 됐어. 가령 우리가 보는 흐름이라는 것은 허상이라던가, 실제로 시간이란 인간만이 사용하는 개념이라던가.”

마법진이 웅웅거리는 소음을 뱉어냈다. 처음 왔을 때처럼 사지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감각이 들었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는 그라하의 머리 위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예전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뺨에 살랑거리며 닿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마치 강단에 선 교수처럼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읊었다.

“시간축은 수평이 아니라 동시에 공존하는 입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지. 미래와 현재, 과거 같은 건 무의미해. 실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고, 죽은 동시에 살아있지. 다른 시간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고작 납작한 3차원에 갇혀있기 때문에 때로 에테르의 힘을 빌려 벽을 뚫었기 때문이야.”

“…큭, 무슨….”

“몸이 무거울 거야. 시간을 넘으려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긴 하더라고. 넌 그래도 내가 성공적으로 불러왔으니, 돌아갈 때도 같을 거야. 손실된 곳은 하나도 없었어. 육신도, 기억도, 영혼도. 어쩌면 그것이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야. ‘현재’ 갇혀있는 내가 다른 시간을 뚫었다는 뜻이니까. 들어봐, 그라하. 너와 나는 ‘미래’와 ‘과거’로 인간적 개념상 분할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시간 안에 공존하는 거야.”

그것은 강의라기보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보통 사람이 들었다면 미치광이의 주절거림으로 들릴 말도 그라하는 일부분 이해했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그는 사람의 너머를 본 것이다. 재앙과 재난으로 멸망해가는 과정에서. 200년 후 갈론드 사의 후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라하. 모든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에 남아있지. 어쩌면 이 시간선도 사라지거나, 혹은 누락되어 탈선된 열차처럼 버려질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모든 시간은 함께 있기 때문에 영영 사라지지 않아.”

시야가 조금씩 빛에 파묻혔다. 그는 부서질 듯 흔들리는 문을 힐끔 쳐다보고는 그라하에게 속삭였다.

“네가 두고 온 미래의 친구들도, 어느 시간이든 너와 함께할 거야. 진실로, 공존의 의미로서.”

그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좀 더 로맨틱한 말도 있었잖아.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너와 함께하고 싶었다거나. 그러나 그라하는 그런 감성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미미하게 올라간 모험가의 입꼬리가 즐거워 보였다. 그는 이별을 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결말이라면 나쁘지 않다. 그라하는 ‘자신이 없는 미래'의 모험가도 결국에는 영웅의 길을 걷게 되리라 확신했다.

무거운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하고 떠나는 것이 아쉽다. 잘 있어. 나의 영웅.

—하. —라하.

“그라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라하는 번쩍 눈을 떴다. 묵직한 몸은 사지 끝까지 저릿했고, 물먹은 솜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익숙한 얼굴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를 짚은 그라하는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물었다.

“오늘이…며칠이지?”

“뭐? 갑자기 그것부터 묻는다고? 으으으.”

쿠루루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날이다. 힘겹게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우자 옆에서 손이 그의 상체를 받쳐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모험가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새삼 그의 표정이 생생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져서 깜짝 놀랐어. 텔레포를 잘못 타기라도 했어?”

“아…. 잠깐…. 기억을 좀 정리할 시간을 줘.”

“…그래, 알겠어.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럼 일단 따뜻하게 먹을 거라도 가져올까?”

“그래. 부탁할게. 고마워.”

쿠루루는 멀리서 기다리던 타타루에게 손짓하며 미명의 방을 나섰다. 둘만 남은 공간에서 모험가는 그를 빤히 지켜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따끔거려 이마를 짚고 있던 그라하가 난처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누굴 만나고 왔어?”

“귀신 같네…. 미래의 너를 만났다고 하면, 믿어주려나.”

모험가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어떤 조건도 없이 그라하를 믿어주었다. 그와 함께 전송된 서류뭉치를 들고, 그라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어디에서도 빛나더라.”

마치 모두를 이끄는 목자와도 같았지. 길쭉한 지팡이를 쥐고, 괴롭고 짐 진 자들 앞에서 앞장서는. 빛바랜 눈동자를 곱씹는 그의 앞으로 불쑥 갈색 머리카락이 드리웠다.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모험가는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푸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미래의 내가 더 마음에 들었어?”

“뭐?”

푸하핫, 그라하가 웃음을 터트리자 그는 불만스러운 듯이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미래에도 빛나는 영웅 같았으니, 동경의 위치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거나. 문득 그를 보내며 웃던 미소가 떠올랐다. 그라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씁쓸한 입맛을 삼켰다.

“아냐…. 그도 너인걸. 나는 네가 어느 시간대에 있어도 좋아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

모험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귀와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도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확신의 기반을 보고 왔다. 그라하는 웃으며 서류 위의 익숙한 필체를 손끝으로 쓸었다. 어쩌면 그가 수정공을 보기 위해 제1세계로 가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의 할로윈은 11월 1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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