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righter Winter Day
* <희망의 등불> 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유의... 라고 꼭 적어야하는가
* 지인의 여성 아우라 빛전에 대한 설정 날조(...)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그럴 리가 없다네. 다시 확인을 부탁해도 괜찮겠나?”
르베유르 소년의 강점은 어떤 상황에서든 저 목소리에 침착함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루이수아 르베유르의 손자라는 그 혈통이 그를 그리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인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20대의 청년들이 할법한 경험을 해버린 탓인지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그것이 나쁘지 않은 특성이라고 여겼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링크펄 너머의 사람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결과를 낼 것을 요구하는 소년은 분명, 그 어떤 배신이 닥쳐도 저런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일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서늘해지곤 하는 오사드의 초원과 이곳, 커르다스 고원의 기후는 확연히 달랐다. 이쪽이 조금 더 습하고, 그렇기에 얼어붙었을 때 더욱 아파진다. 한랭한 그리다니아와는 또 다른 기후였다. 그녀는 이런 겨울이 익숙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런 상황도 익숙하지 않다. 벽난로 곁에서 끊임없이 졸아버리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고장난 것처럼 구는 사람이 밉거나, 귀찮을 법도 하건만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는 것은 그 아이의 성정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그것을 알 수 없는 게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녀는 소년의 서두에 희미하게 웃었다. 눈을 깜박였다고 생각했건만, 졸았나 보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애매하게 뻗은 손이 어째서인지 우습다. 어색하기도 해서, 조금 급하게 덧붙인다. 넌 곤란한 말은 항상 그렇게 시작하더라. 그 말에, 소년은 조금 웃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하거나, 재밌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런 종류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늘 좋았다. 몇 가지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줄어든다는 것이 그것들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자꾸만 가물거리는 눈꺼풀 탓에 시야가 흐릿하다. 소년은 당황한 것처럼 작게 몸을 흔들었다. 하하하. 힘없는 웃음소리가 입술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말라며 나무라거나 탓하는 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소년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피노,”
졸음에 이미 머리끝까지 잠겨있어, 한참 만에 뱉은 말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누가 그 위로 먼지를 잔뜩 흩뿌린 것처럼, 잿빛으로 침침했다.
“그대의 말을 받아들여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 하네. 음, 우리가 울다하에서 경험했던 그 일련의…….”
소년의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을 바라보고서,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잠이 슬슬 달아나고 있었다. 그 배신들. 그것은,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상처를 받았다기보다도 형용하기에 올바른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신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 일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을 정도로 무신경한 사람까지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일에 무딘 것은 이럴 때 오해를 사기 좋다.
“아무튼, 그 일의 여파로 그리다니아에 개설해 두었던 자네의 예금이 정지되었어.”
“그건 참,”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심각하다는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년은, 마치 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재해를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인 것이다. 내가 범죄자라도 된 것 같네. 그녀는 함께 웃기 위해서 그 말을 덧붙이려다가, 정말로 자신이 범죄자 신세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 호칭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단어는 속이 쓰라리다. 그렇다고 그를 따라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우물우물 대답을 늘어놓은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괜찮아.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계좌들은 신분증도 겸하니까. 자네가 그 안에 푼돈만 넣어두었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리다니아에서도 마음 편히 다닐 수 없다는 건…….”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서인 듯, 소년이 숨을 잠깐 들이마셨다. 아무리 그래도 어울리는 말은 찾을 수 없을 텐데. 그녀조차도 무슨 말이 가장 어울릴지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꽤 기이한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다니아에서도 그녀는 더는 환영받을 수 없다.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그것이 아주 감상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순순히, 저가 오사드에서 에오르제아로 넘어오면서 많은 것에 무뎌지고 포기했음을 인정했다. 잃어버리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자신의 책임이 있든 없든, 없어진 것에다가 돌아오라고 외치는 그 의미 없음이란.
“그런 건 좀 쓸쓸하지.”
“굳이 그렇지도 않아.”
“그건 오르슈팡 공이 우리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라네.”
소년은 제법 단호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의 계좌를 되찾는 일은 오사드에서 온 그대의 신분 때문이라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 그전에 우리의 결백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 없는 명백한 사실이고.”
“그건 맞지만,”
“그러니까, 이제는 그 난롯가에서 벗어나 코코아 가루가 든 양철 컵을 내려두고 나와 함께 용머리 전진기지라도 산책하는 건 어떤가?”
“결백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은 많다네. 눈의 집 안에서 그런 식으로 의자에만 파묻혀 있으면 다들 그대가 낙담했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계좌가 정지된 것으로는 타격도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른단 말일세.”
“그런 것까지 증명해야만 하다니.”
영웅의 삶은 그런 것이니까. 소년은 그 말을 하면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경련하는 뺨 위로 그림자의 옅은 손가락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착각에, 다시 고개를 떨군다. 제대로 바라보기 힘든 웃음이었다. 슬며시 팔걸이에 고개를 기대자, 그는 살짝 실망했다는 듯이 옆의 의자를 꺼내어 앉는 것이다.
“커르다스는 추우니까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는 하네만,”
“별로 그렇지도 않아.”
“그러면 왜?”
“의욕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의욕? 반문하는 말을 들으며, 그녀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더욱 깊숙이 파묻었다. 그래. 이건 의욕의 문제이다. 다 마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콧소리로 대답한다. 으응.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쩔쩔매는 광경은 늘 우스웠다. 조금 놀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분명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별개로 가끔은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저 아이에게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알피노 르베유르라는 사람의 매력은 그가 아직 덜 자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 자란 사람처럼 군다는 점에 있었다. 아이의 말랑하고도 맑은 사고와 고급 지식의 조합이란.
“맞잖아, 사실. 나는 에오르제아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슈가르드에서 비공정을 타고 오사드로 떠나버리면 되는걸.”
“그렇지만, 갈레말은……”
“네가 아는 것보다 오사드는 넓을 텐데?”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한 말에, 소년은 난감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양철 컵을 쥐고서는 비장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 말투부터 이미 우습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당황하지 않으려는 티를 내는 꼴이 제법 그 나이대의 아이들 같다.
“그, 그 건에 대해서 그러면 자네를 설득해야 하니까, 오, 오르슈팡 경에게 말해서 코코아라도 한 잔 더 만들어 오겠네.”
“도련님이 할 수 있겠어?”
“가, 가루를 넣고 데운 우유를 넣기만 하면 되는 음료라는 건 알고 있다네. 자네마저 그런 거로 날 놀리지 마! 이미 타타루에게 충분히 당했단 말일세!”
그러고는 후닥닥 문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 문틈으로 몰아치는 눈보라가 너무도 하얘 눈 안쪽이 시려오는 감각을 느끼면서, 그녀는 그것이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락거리며 눈이 쌓이는 소리는 타오르는 장작 소리에 먹히고, 그것은 다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먹혀간다. 그녀는 그 의미 없음에 문득 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어딘가에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말로 좋다는 말인가. 오사드를 빠져나온 이래로 처음 얻은 순간이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 순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휴식이 부족한 사람 특유의 어색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리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색한 것은 싫었다.
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기지를 구성하는 포르탕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끝없이 친절하다. 그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것에 고개를 돌리려 애쓰는 것이다. 친절은 언제나 좋은 것이었으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기의 잔을 두 개 들고는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었다. 한때 회의를 위해 사용했던 테이블 위에 컵을 올려두고, 크림을 올려둔 쪽을 집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오르슈팡,”
그녀는 문득, 그녀가 강박에 빠진 노인 같다고 생각했다.
“알피노는?”
“알피노 공은 타타루 양과 함께 그리다니아의 예금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말하던데,”
그러고는 요령좋게 알피노가 끌어와 걸터앉아있던 의자에 앉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나의 맹우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보길래, 이렇게 왔지.”
“그런 건 없어.”
“눈의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고.”
“이건, 잠깐 쉬는 거야.”
“휴식인가.”
휴식. 그녀는 그 단어를 따라서 발음하려다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크기의 컵을 들고, 안에 들고 있는 액체를 미묘하다는 표정으로 흘긋흘긋 바라보는 그 남자를.
“왜 그러지?”
“아냐, 아무것도.”
“네가 아프다거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싫어졌다고 말하지 않는 건 안심이 되지만,”
“맞아, 그냥 그 애를 좀 놀렸을 뿐…….”
“그렇다고 네가 모든 것을 좋아해야만 한다는 건 아니야.”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덜 마신 티가 역력한 컵을 올려두고 그녀에게 웃어 보이는 것이다.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 그 박자에 맞추어 일렁이는 불꽃과 희미한 단애를 없애려는 듯이 밀려드는 연기. 그리고 맞은편 남자에게서 풍기는 잔뜩 젖은 눈의 냄새까지.
“어라, 코코아는 싫어해?”
“이런, 들켜버렸군.”
그러면서, 커피 쪽이 더 좋다고 어색하게 덧붙이더라. 그러면서 따라붙는 멋쩍은 미소에 그녀는 차마 좋아하는 것을 골라도 좋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서,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오사드. 그녀는 그 단어의 가장 앞부분을 발음하려다 그만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돌아갈 곳이지 저 남자가 돌아갈 곳은 아니지 않던가. 그의 영혼은 커르다스 중앙고지에서 살아간다. 그가 돌과 눈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선뜻 받아줘서 고마워."
그 말에 그 남자는 컵 속으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웃음을 숨겨버렸다. 어느 밝던 겨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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