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異常에 관하여
리는 숨을 죽였다.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숨고, 속이고, 죽은 척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빛에 그 무엇도 담아두지 않은 채로. 내가 내뱉는 숨의 총량을 계산한다면 남들의 반절밖에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제가 밟고 올라선 남의 숨결 역시 남들의 두 배는 될 것이다. 왜냐면 나는 타인의 삶을 발판으로 삼아 살아남았으므로. 리는 손에 들린 나이프를 빙글 돌렸다. 손에 익숙하게 감겨드는 감각. 나이프의 형태에 맞추어 변이해버린 삶. 후회나 죄책감은 없다. 삶이 살아남기 위해 삶을 시해하는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나며 마땅한 일이었고 다만 그저 남들보다 일찍 세상의 진리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리는 언제든지 자신 역시 누군가의 삶을 위한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안다. 리는, 딱히 필사적으로 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절실하게 삶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내재한 본능에 의한 생이었다. 리는 제가 숨을 쉬는 한은 어쩔 수 없이 살아있을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리의 삶의 형태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단순한 수단에 불과했다. 어떤 숭고하고 드높은 이상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당시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선택한 결정이었다. 남들과 다른 출발점이었고 가장 합리적인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도덕과 이상이 가미된 삶을 추구하기에는 비효율적인 환경이었다.
보통의, 사회에서 일반적이라고 규명되는 사람들과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했다면,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갔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고, 역시 지금와서는 별 의미도 가치도 쓸모도 없는 상상이다. 딱히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았으며, 현재의 제 삶의 처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리는 누구도 동정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무렴 어떠하리.
리가 기억하는 고아원은 다 낡아빠진 사각형 건물과 금이 간 벽면, 꺼림직한 소리를 흘리는 새까만 철문, 까슬한 이불의 촉감, 비좁은 방 안에서 살을 맞대고 눈을 감아야 했던 아이들, 마담과 린. 리는 제가 중국인인지, 혹은 조선인 혹은 한국인인지 조차 몰랐는데, 어쩌면 몇종류의 피가 잡다하게 섞여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이 고아원의 마담이 중국어를 썼고, 제가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된 기억도 여기서부터 시작했으므로 리는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습득했다. 애초에 출생과 태생만큼 이곳에서 무의미한 것도 없었다. 어디서 태어났고, 누구에게서 버려졌는지는 어떤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마담에게 얼마나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누가 가장 쓸모가 있는가. 마담은 일찍이 그의 말을 잘 알아 듣는 제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리는 자주 심부름꾼으로 지명받았다.
리는 그 고아원의 아이중에서 특별한 축에 속했다. 왜냐하면 여기선 툭하면 아이들이 바뀌곤 했는데 저는 꽤 오랫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수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아이들 중에 저 말고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게 린이었다. 린은 저보다 열댓살은 나이가 많았고 고아원의 잔심부름과 아이들을 돌보는 등 마담이 없을 때 고아원의 일들을 도맡아 했다. 마담이 일을 보러 며칠간 자리를 비우면, 심부름을 시키고 일정을 관리하는 것은 모두 린의 일이었다.
린은 아닌 척 하지만 정이 많았다. 심부름을 가는 아이들을 일일이 파악하며 확인했고, 바쁜 일정 중에서도 아이들을 데려와서 꼬박꼬박 씻기고 밥을 챙겨주는 것만 해도 그랬다. 마담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데. 게다가 린은 자진해서 아픈 아이들을 돌보곤 했다. 사실, 누군가를 간호할 만큼 충분히 자란 아이들이 없기는 했다. 마담은 그런 일에는 나서질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린의 몫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린은 숨기려고 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이 고아원을 떠날 때면 복잡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린 역시도 마담의 말을 듣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뿐이었다. 린은 고아원을 관리했고, 저는 오늘도 마담의 심부름을 다녀왔다.
하루는 외출을 다녀온 마담이 저를 불러내었다. 마담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부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적어도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그랬다. 리는 덤덤한 얼굴로 마담의 앞에 섰다. 마담은 한참을 말없이 저를 훑다가 입꼬리로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 리 양, 오랜만이구나. 우리 고아원에서 너만큼 일을 잘 하고 괜찮은 애들이 없었거든. 쭉 지켜봐 왔을 때 너만 한 아이가 없더구나. 새로운 심부름을 맡아보지 않겠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담은 웃으며 린을 불렀다. 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린은 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린이 마담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며 물었다.
-마담 무슨 일이죠?
-린, 이 아이에게 네가 하는 일을 알려 주렴. 아마 일이 줄어서 편해질 거야.
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보더니 이내 알겠어요, 하는 대답과 함께 내게 눈짓을 건넸다. 나는 린을 따라 방을 나섰다. 마담이 긴 외출을 끝내고 돌아왔으니 곧 아이들과의 송별회를 준비해야 할 것이었다. 리는 같이 방을 쓰던 몇몇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우리는 얼굴을 안 시간이 가장 오래된 사이이기도 하지만 그에 비하면 대화가 그다지 없는 편이었기도 했다. 척박한 공기를 뒤로하고 말 없이 린을 따라 복도를 걸으니 가장 안쪽의 문에 도달했다. 린은 문 앞에 서서 저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입술을 잘근 씹으며 시선을 돌렸다가, 한숨을 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넘기고는 다시 표정을 굳히고 시선을 고정했다.
-마담이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눈치가 빠르고 그럼에도 아무 것도 모른 척 하는 게 맘에 들었대. 그러니까 여기서 알게 된 것도 알아서 잘 처세해야 할 거야.
예상한 일이었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리는 새로운 심부름을 맡았다. 그러니까 대충 불법적이고 위험한 그런 일들. 법적으로 금지된 무언가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일. 낮엔 마담의 심부름을 했고 저녁엔 린을 따라 지하실에서 약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아마, 고아원의 아이들이 이곳저곳으로 전달하거나 받아온 물건들 역시 이와 관련 됐을 것이다. 리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꽤나 재주가 있었으니 마담은 그런 리를 괜찮게 여길 것이다. 린은 여전히 리를 포함한 아이들에게 퉁명스럽게 굴었지만, 묘하게 제게는 벽을 허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 일을 하게 된 지 얼마 있지 않아 여덟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고아원을 떠나게 되었다. 꼭 이렇게 한번에 아이들이 떠나곤 해서, 그때마다 남은 아이들끼리 작은 송별회를 열곤 했다. 아이들은 내일 떠나게 될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 리는 한 번도 그들에게 작별의 인사도, 행복을 기원하는 말도 건넨 적이 없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끼리 부둥켜 끌어안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아마 저 아이들은 서로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었다. 다시는. 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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