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관하여
오월의 탄생
오월은 향긋한 계절이었다. 이 쓰레기 골목에도 오월이면 봄향기가 맴돌았다. 메이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제 이름이 오월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맘때쯤이면 유독 기분이 들뜨게 되는지도 모른다. 메이는 기억 속의 선율을 더듬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까딱였다. 날씨가 좋았다. 오월.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월은 탄생의 계절이라고. 오월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게 있으랴. 메이는 제 탄생의 순간을 떠올린다. 메이가 가족을 잃고 두 번째 삶을 맞이하게 된 해. 오월이었다.
초여름답지 않게 쏟아지던 폭우 속에서 제가 버려진 목숨을 운 좋게 겨우 연명하여 살아났음을 모르지 않는다. 숨바꼭질을 해 주겠다는 부모의 말에 들뜬 채 찾아간 이름도 모르는 동네의 길을 잘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저 오랜만에 부모가 자신과 놀아준다는 사실이 기뻤던 탓이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로는 높은 담장과 담장 너머로 볼 수 있는 것이 없었으며, 골목을 돌수록 낯선 곳밖에 보이질 않았지만, 메이는 부모의 손을 꼭 잡았다. 자 메이, 지금부터 1부터 100까지 세는 거야. 메이, 우리 같이 숫자 세는 연습을 했잖아. 메이, 메이는 착한 아이지? 다 셀 때까지 눈을 뜨면 안 돼. 부모는 아이의 손을 직접 이끌어 눈 앞을 가려주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구십 구, 백. 감았던 눈을 뜨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메이 바보야! 손을 떼야지! 맞아, 손을 떼야지. 슬그머니 연 손가락 사이로 때가 타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색이었는지 모를 회색 벽과 여러 방향으로 나있는 골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뭇거리던 아이는 부모의 손을 잡고 들어온 기억에 의존해 골목을 돌고 돌았다. 거리는 스산했고, 이곳의 분위기에 눌려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덜컥 겁을 먹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일찍이 찾아온 먹구름이 햇빛을 집어삼켜 거리는 금세 어둑해졌다.
집에서 먼 곳으로 놀러 온 사람치고 아이의 차림새는 그닥 적당한 편이 아니었다. 목 부분이 늘어지고 끝이 헤진 낡은 옷,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사람을 찾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몇 치수는 커 보이는 사이즈의 슬리퍼. 아이는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끌며 부모를 찾았다. 이질감이 큰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는 곧 하나 둘, 물기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메이의 정수리 끝을 가볍게 두드리던 물방울들이 세차게 뺨을 내리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레 내리는 폭우에 놀란 아이는 곧장 제 정수리를 가려 보였으나 조그만 손으로는 빗물을 제대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손을 머리에 꼭 붙이고 골목을 헤매다 차양막이 쳐진 건물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빈소한 옷이 물을 먹어 더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메이는 건물 외벽에 기대 발밑으로 뚝뚝 떨어지며 생기는 물웅덩이를 구경했다. 딱딱한 슬리퍼의 끝은 여린 아이의 발이 견디기에는 힘겨웠으므로 쓰린 발등이 따가워오기 시작했다. 爸爸, 妈妈, 找不到了, 메이 못 찾겠어요 꾀꼬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건물에 불이 켜지며 몇몇 발소리가 메이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사람들이 건물을 드나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이는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섞여서 귀가 먹먹해 질 때쯤에 메이는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곳에는 노란색 우비를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빗물 탓에 눈앞이 흐려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다. 또래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였으나 이 골목을 다니며 처음 본 어린아이었다. 비닐모자 사이로 튀어나온 검정 머리카락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이는 말없이 메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한참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교차하고 무언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상대가 먼저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눈 앞으로 내밀어지는 손이 보였다. 메이는 멀뚱한 표정으로 비를 맞고 있는 손바닥과 노란 우비를 쓴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거세게 내리는 빗방울이 우비를 내리치는 소리가 꽤 컸기에 팔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프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팔이 아플까봐 걱정이 됐다. 그리고 그는 저를 살짝 잡아 당기곤 쓰고 있던 노란 우비를 제게 씌워주었다. 안 잡았으면 버리고 갔을 거야. 메이는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금방 비를 맞아 젖어 드는 머리카락과 옷이 보였다.
하늘은 검게 물든 지 오래고 세차게 내리는 빗물 탓에 한 치 앞도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빗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사실 방금 전 손목을 잡아끄는 아이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을 때 빗물에 쓸려 슬리퍼 한 짝이 사라졌으나 메이는 묵묵히 입을 꾹 다물고 아이를 따라갔다. 빗물에 먹혀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메이는 제가 이 손을 놓쳐서는 안 됨을 알고 있다.
손을 잡고 따라간 곳은 크지도 작지도 튼튼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낡아 보이지도 않는 건물이었다. 낡은 전등이 깜박이는 검은 철장의 대문 앞에서 아이가 손으로 몇 번 만지작거리니 곧 빗소리를 뚫을 정도로 큰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이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대문을 들어서고 좀 더 걸으니 아까 전의 건물이 보였다. 아이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메이는 뒤에서 비를 맞으며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현관문이 열리고, 잔머리가 한가득 삐져나온 부시시한 머리를 한 여인이 문턱을 딛고 서 문에 기대었다.
- 다녀왔어 린. 자, 심부름 시킨 거.
- 리,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그거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네가 늦는 바람에 영민이 다 했잖아. 왜 늦은 건데?
- 골목에서 저런 걸 주워와서.
단발의 아이와 대화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마주친 눈에 메이가 작게 딸꾹질을 했다. 표정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 오 이런, 또야? 빌어먹을 놈들. 양심이라곤 다 튀겨 먹은 놈들밖에 없군. 왜 다 알만한 인간들이 굳이굳이 이 동네에 갖다 버리는 거지?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겠어.
여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더니 문에 기대 선 자세를 고쳐 섰다.
-거기 꼬마, 배가 멀쩡한 걸 보니까 다행히 아직 털리지는 않았나 보구나. 이름이 뭐니?
- 린, 여긴 한국이야. 못 알아 먹잖아.
말똥이는 눈망울로 두 사람을 쳐다보던 메이가 입을 열었다. 메이. 진 메이예요.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이 메이에게 향했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메이는 조금 몸을 움츠리고 눈치를 살폈다. 두 눈동자가 목적지 없이 굴러다녔다.
-아 정말, 이쪽이었어? 글러먹었군. 꼬마야, 운이 좋구나. 신발은 어디 두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오렴.
여자는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이도 곧 제게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현관은 열려있었다. 메이는 옷을 쥐었다 폈다가, 신발이 벗겨진 쪽의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다가 이내 현관으로 들어섰다. 빗속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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