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사내
“작은 도련님!”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을 빗질하는 것은 가장 어린 하인 아이의 일이다. 졸린 얼굴로 마당을 쓸던 아이는 침의 위에 장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온 도련님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장나라에게 다가왔다. 잠에서 깨기에는 이른 시각이기는 하나, 작은 도련님이 요 며칠간 제대로 잠을 주무시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 집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가에 거뭇한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도련님이 싫어할 걱정 대신, 아이는 까치발을 들어 작은 도련님에게 조용히 속닥거렸다.
“큰 도련님도 일어나 계십니다.”
“…고맙다.”
앳된 티를 벗어나 사내다워진 근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수심이 어렸다. 안타깝게도…. 그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를 내는 일 없이 그저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집안의 자랑이자, 화랑도를 이끌게 된 큰 도련님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저자의 시정잡배들도 알았다. 모두가 큰 도련님의, 화랑의 결의를 칭송했으나 작은 도련님만큼은 크게 화를 내며 큰 도련님의 참전을 반대했다. 둘은 유별날 정도로 사이가 좋은 형제였다.
작은 도련님, 장나라는 다시금 집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마음이 갑갑해 잠시 나가 있던 것뿐인데 새벽의 찬기가 주변에 남아있는 듯했다.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더워질 것이다. 새벽에는 장포를 걸쳐야 했고, 낮의 훈련이 끝나면 등목을 해야 했다. 초여름의 날씨는 늘 그랬다. 알고 있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장나라의 형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추운데 밖에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문 너머에서 장나라의 방문을 알아챈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 없이 걷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형의 침소 앞인 모양이었다. 장나라가 가만히 문을 밀어 열었다. 꼿꼿한 자세로 동경 앞에 앉아있던 형이 고개를 돌려 장나라를 바라보았다. 형의 얼굴은 아직 분칠을 하기 전이었음에도 새하얬다. 똑같이 산천을 누비고 다녔는데도 형의 살은 햇볕에 타는 법이 없었다.
집안의 사람들이 걱정하더구나. 형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분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가루가 가볍게 흩날렸다. 얼굴을 새하얗게 칠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자를 닫은 형이 가지런히 정리된 상자 중 제일 작은 상자를 꺼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널 걱정하고 있고.”
“형이 나를 걱정하기는 했어?”
걱정했으면서, 이래? 홀로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형의 말투에 성질이 긁힌 장나라가 큰 목소리를 냈다. 평소였다면 목소리를 낮추라고 주의를 주었을 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상자를 열고 그 안의 연지함을 꺼낸 형은 능숙하게 약지에 연지를 묻히고 있었다. 이제 열여덟이 된 형의 손은 얼마 전 보았던 스물다섯의 장군보다도 훨씬 컸다. 약지가 가벼운 움직임으로 눈가를 스친다.
“물론이지.”
조금 늦은 대답이었지만 장나라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양쪽 눈가를 칠한 형이 다시금 연지를 묻혔다. 분으로 색을 잃었던 입술이 새빨갛게 칠해졌다. 신국의 제일미라 불리던 기생이 어떤 화랑을 보고는 그 미모를 시샘하느라 사흘 밤낮을 앓아눕게 했다던 소문의 얼굴다웠다.
모두가 꽃의 사내라고 말하는 얼굴이었지만, 장나라는 그런 형의 얼굴이 낯설었다. 표정이 지워진 얼굴은 물론이고 온갖 곳에서 들여온 잡동사니로 어지럽던 침소 또한 그랬다. 형과 형의 검이 없었다면 주인이 없는 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의관을 갖추는 형의 모습을 바라보던 장나라가 고개를 돌렸다.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코끝과 목이 따가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허리에 화랑도의 문양이 들어간 천을 둘러 옷을 고정하던 형이 장나라를 보며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장나라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직 의관을 정제하는 것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형은 장나라에게 다가가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어 토닥였다.
“울면 안 되지.”
“어떻게 안 울어.”
결국, 돌아선 장나라가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이상하네, 내 동생은 울음을 잘 참는 아이인데. 고작 한 살 차이면서, 형은 장나라의 앞에서 몇 살이나 많은 것처럼 굴었다. 형보다 작다고는 하지만 장나라 또한 또래는 물론이고 어른들보다도 키가 컸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웃던 형이 장나라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다가오는 손에 장나라는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닿은 손가락은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을 쓸어내나 싶더니 눈꼬리까지 길게 훑고나서야 떨어졌다. 장나라가 눈을 떴다.
“보기 좋구나.”
장나라는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형과 제법 비슷했다. 눈화장은 그렇게 하는 거야. 동경 끄트머리에 비친 형이 웃으며 말했다.
전쟁은 두 해 동안 이어지다 끝났다. 수많은 이들이 전쟁터로 향했고, 되돌아왔다. 되돌아온 사람 중에는 산 사람도 있었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장나라의 형은 전쟁이 끝나고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나라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신국 근처의 산에서 부러진 형의 검과 피에 젖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허리띠가 돌아왔다. 그 날, 장나라는 집안의 장자長子가 되었다.
스물다섯이 되도록 장나라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지만 할 수 없었다는 말도 맞았다. 죽은 장자의 혼이 집 주변을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집안에 시집을 올 만큼 용기 있는 아가씨는 없었다. 형의 유품이 도착했던 날부터 부모님은 장나라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살아있으니 되었다. 그들이 말없이 자신의 손을 잡을 때마다 장나라는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마다 쌍둥이처럼 닮은 형제라는 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은 양친뿐만이 아니었다.
“어르신! 아이고, 어르신!”
서라벌을 떠난 부모님 대신 집을 지키는 것은 장나라였다. 장나라는 집안의 ‘어르신’이었고 마당을 쓸던 제일 어린 하인 아이는 어느새 자라 열여덟이 되어, 얼마 전에는 딸도 얻었더랬다. 그런데도 하는 행동은 여전히 그때와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장나라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귀청 떨어지겠구나. 평소였다면 놀라며 저의 방정맞음을 사과했을 아이는 대문을 흘끔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장나라가 의아한 듯 팔짱을 끼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저기, 그것이… 지금,”
“손님은 받지 않는 시간인데, 무에 그리 허둥대느냔 말이야.”
서서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도, 손님을 맞이하기에도 늦은 시각이었다. 주변 사람이라면 절대 방문하지 않을 때고, 언질 없이 도착했다면 쫓아내 버리면 될 일이다. 아이 또한 이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다. 지나치게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수상해 장나라는 마당에 내려서서 아이를 달랬다.
“어려운 손님이더냐?”
“아니. 그건 아니온데,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런데 어르신께 알리지 않을 수는 없어서 말씀드리긴 합니다만… 제가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럽고… 횡설수설하는 아이의 말이 이어지자 장나라가 한숨을 쉬며 적당히 말을 끊었다.
“똑바로 말해주겠니?”
“지금 밖에… 큰, 도련님께서…”
큰 도련님. 그 말을 듣자마자 장나라는 마당을 가로질러 뛰었다. 문을 열어! 보기 드문 어르신의 호령에 대문을 지키던 하인 둘이 놀라 양쪽 문고리를 하나씩 잡아당겼다. 쏟아지는 노을빛을 등진 인영이 너무나 익숙해서 장나라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형!”
그 외침에 집안 곳곳에 있던 하인들이 수군거리며 모습을 드러냈으나 장나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문까지 단숨에 뛰어간 장나라는 대문 너머의 형을 발견하고는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문을 열었던 하인들도 형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여전하구나, 나라야.”
그렇게 말하는 형은, 열여덟의 그 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어르신! 도대체 저게 무슨…! 그 기이한 행색에 놀란 하인들의 목소리도 아랑곳않고 장나라가 대문을 넘었다. 형의 앞에 무릎을 꿇은 장나라는 형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이상하네, 내 동생은 울음을 잘 참는 아이인데. 형, 장나민이 그렇게 말하며 마주 꿇어앉아 장나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 온기에 장나라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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