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장나민과 이설

 

 

아, 이런. 미안하다, 설아. 야자 조퇴는 담임 선생님이 허락해주셔야 해서 말이야. 오늘 하 선생님이 출장을 가셔서 조퇴는 어렵겠는데… 몸이 많이 안 좋니? 감독 선생님께 말씀 드릴 테니까 양호실에서 쉬렴. 굳이 책임질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는지 열심히 설득하는 부담임의 말에 이설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아직 7교시가 남아있었다. 그깟 야자 한 번 빼는 게 뭐라고 이렇게 힘드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야자 조퇴증을 끊어주던 담임 선생님의 부재가 새삼 실감이 난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규 수업시간이 끝나면, 이설은 기필코 야자를 튀어야 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돌아온 이설은 다음 시간의 교과서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펼쳤다. 때맞춰 들어오는 담당 과목 선생님에 자는 중인 짝을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짝이 허둥대며 책을 꺼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철저한 내신관리로 내년의 고3 생활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목표였기에 이설은 수업에 집중해야했다. 게다가 이 선생님은 열정적이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편이라 이설 외에도 많은 학생이 집중하고 있었으나 이설의 신경은 온통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자신의 가방에 쏠려 있었다.

 

 

 

가방에 팬사인회 당첨권이 들어있는데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공부에 미친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런 역사적인 날, 이설은 등교를 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수업을 듣는 것부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초조함에 물어뜯은 엄지손톱이 너덜거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설은 가방을 챙겨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교실을 나섰다. 청소 준비로 소란스러운 교실에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설이 맡은 청소구역은 매점 옆의 휴식 공간이었다. 아이스크림이며 과자 봉지, 가끔 출처를 알 수 없는 담배꽁초로 매일 더러워지는 데다가 혼자서 해야 하기에 인기가 없는 청소구역이었으나 이설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혼자서 할만한 점과 오늘 같은 날,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대충 청소를 마친 이설은 벤치에 곱게 세워든 가방을 둘러멨다. 빵빵한 가방 안에는 당첨권 말고도 체육복 상의와 바지로 두 번 감싼 카메라 가방이 들어있어 묵직했다.

 

 

 

8교시 예비 종이 울리고 나니 매점을 오가는 기척들도 뜸해졌다. 하려면 지금이었다. 매점 근처의 담은 평균 키의 이설이 도움닫기만 하면 쉽게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낮아서 여학생들도 종종 애용하는 곳이었다. 담과 가볍게 거리를 둔 이설이 두어 걸음 도움닫기를 했다. 점프를 뛰어 담벼락 끝을 잡는다. 좋아. 반동을 이용해 잽싸게 담벼락 끝으로 한쪽 다리를 올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오.”

 

 

 

그 움직임에 감탄한 것은 이설뿐이 아니었는지 나직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 손에 힘이 빠졌지만, 다행히 이설은 담벼락에 안정적으로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이설이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어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삐딱하게 서서 뽕따를 입에 문 장나민이 이쪽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심부름이라도 다녀온 모양인지 한쪽 팔에는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뭉치가 끼어 있었다.

 

 

 

왜 하필 걸려도 같은 반 애한테… 이설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그런 이설을 물끄러미 보던 장나민이 말을 걸었다.

 

 

 

“음, 친구야?”

 

 

 

같은 반이라고 하지만, 아직 학기 초인 데다 딱히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설의 이름을 모르는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장나민은 물고 있던 쭈쭈바를 한손으로 주물러 쥐어짜고 있었는데 딱딱하게 얼어있는 내용물이 손아귀에서 사정없이 뭉개지고 있었다.

 

 

 

“착지할 때 말야. 개 조심해.”

 

 

 

…뭐? 예상 밖의 대화였다. 황당한 이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나민은 말을 이었다.

 

 

 

“이 주변에 미친개가 많대.”

 

 

 

동사무소에서 광견병 주사는 다 맞혀준 걸까?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예방 주사에 관해 혼자 생각에 잠긴 장나민은 쭈쭈바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걸음을 돌렸다. 얼떨떨하게 굳어 있던 이설은 이내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미친개는 보이지 않았다.

 

 

 

*

 

 

 

다행히 그날의 탈주는 장나민 외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듯했다. 담임도 부담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후로 이설은 며칠 동안 장나민의 눈치를 살폈다. 닷새쯤 경계하고 있었으나 장나민은 그 날의 일은 다 잊은 모양이었다. 장나민은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만큼 발도 넓었다. 이름도 모를 동급생의 사소한 땡땡이 같은 것을 기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이설은 장나민에 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했다. 그래, 뭐 탈주야 흔한 일이니까. 며칠간 자신을 신경 쓰이게 하던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이설은 편안한 마음으로 운동장 스탠드에 기댔다. 클래스메이트들은 짝을 지어 배구 토스 연습인지 뭔지를 하고 있었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피곤한 이설은 쉴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적인 풍경의 틈바구니에서도 장나민은 눈에 띄는 존재였다. 같은 체육복을 입고 있는데 홀로 다른 세상이었다. 다른 이들이 현장 다큐라면 장나민은 청소년 성장 드라마라고나 할까. 군계일학. 당장 아이돌을 해도 너끈히 센터를 차지할 놈이었다.

 

 

 

물론, 최고는 우리 애들이지만. 이설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 흘린 배구공이 이설의 근처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왔다.

 

 

 

“어?”

 

 

 

공을 가지러 온 사람은 장나민이었다. 눈이 마주친다. 또 보네. 내내 같은 교실을 쓰는 사람에게 건네기엔 적절하지 않은 인사다. 망했다. 이설은 직감했다.

 

 

 

“저번에 담 넘은 거 말야.”

“아.”

“설이 너 병원이라도 간 거니?”

 

 

 

분명히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음에도 저승사자의 선고보다 무섭게 들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많이 걱정하시더라. 그렇게 말한 장나민은 변명을 준비하던 이설을 내버려 둔 채 손아귀에서 공을 굴리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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