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의 레퀴엠
데못죽 엋건위주+이것저것
※가상의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au어쩌고 입니다※
※엋건 메인입니다만 삼각형이나 큰세×아현, 유진×래빈, 청우×배세 등의 여러 커플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니 혹시 못죽 커플링중에 지뢰가 있는 분은 뒤로가기를 추천드립니다※
그것은 류건우가 신재현의 필체로 읽은 것 중 가장 노골적인 감정이었다.
재현이 느닷없이 신성학 점수를 포기하겠다는 언급을 한 뒤의 일이다. 수업이 끝나고 개인 보관함을 열면 종종 붙어 있던 쪽지는 그 문장 이후로 늘 같은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3층 기숙사.
익숙한 위치에 붙어 있는 익숙한 글씨체. 메모를 떼어내 버린 다음엔 시계를 확인하고 걸음을 옮긴다. 건우는 관계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경위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쪽지가 가리키는 장소로 향했다. 이제 막 오전 수업 두 개가 끝난 참이라 바깥은 아직 한낮이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석조 건물은 대낮에도 혼자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오후의 햇빛 속을 지나 그늘에 잠긴 방에 도착하면 어느덧 익숙해지고 만 인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으로 벌어질 일 역시 익숙하다. 눈을 감고 형식적인 태도 뒤에 철저히 숨은 채 귓가에 속삭여지는 저속한 말들과 몸을 붙잡아 오는 손길을 받아들인다. 얼핏 애정 섞인 동작 같지만 맞붙는 살결은 양쪽 모두 서늘하다.
행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착각을 안겨주지만 어느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건우는 여운이 가라앉자마자 곧바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약속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했다.
“어디 가요?”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이길래.”
허리께를 더듬던 손이 정돈된 유니폼을 들추었다. 인상을 쓰며 손을 막자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입술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말도 안 해주고, 서운한데.”
그러나 건우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재현도 더 묻지 않았다.
“간다.”
말없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던 재현은 짧은 키스를 나눈 뒤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빠른 걸음으로 기숙사 방을 나가는 건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재현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시선이 분수대 앞의 한 인영에 날아가 꽂힌다. 좀전에 건우를 보던 시선과는 딴판이었다. 재현은 그대로 창가에 서서 분수대에 점점 가까워지는 건우의 모습을 주시했다.
건우는 발을 서둘렀다. 그늘에서 벗어나 햇빛이 쏟아지는 중앙 분수대에 가까워질수록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를 발견한 아현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정규 과정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마친 그는 이제 막 지원 실습을 끝내고 돌아와 정식 신관이 되어 있었다.
“건우 님, 뵙고 싶었습니다…!”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채 차분하고 맑은 웃음을 짓는 모습이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는 강한 신성이 당장 온몸에서 흘러넘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잘 어울리네.”
아현은 작게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며 얼굴을 붉히더니 건우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건우가 약간 놀란 눈으로 아현을 보았다. 그가 먼저 이렇게 거리를 좁히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라도?”
“저, 드릴 선물이 있어서… 잠시 뒤로 돌아주시겠어요?”
계속 뒷짐을 쥐고 있었던 게 그 이유였나. 건우는 피식 웃으며 그의 요청대로 돌아섰다. 아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좋은 냄새가 났다. 잘 세탁된 깨끗한 천의 냄새와 부드럽고 은은한 꽃 냄새. 선물이 꽃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아현의 팔이 조심스레 움직이더니 그의 목에 목걸이를 채웠다. 건우는 시선을 내려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보았다. 섬세하게 세공된 백합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법이 걸려 있는지 옅은 꽃 냄새가 풍겼다.
“고맙다.”
“...잘, 어울리세요.”
아현이 다시 맑게 웃었다. 언제 봐도 보기 좋은 미소다. 가끔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을 만큼. 건우의 입가에도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번졌다.
“어, 둘 다 여기 있었네?”
세진이 아현이 온 것과 같은 방향에서 걸어나왔다. 아현이 지원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본관에도 자주 얼굴을 비치더니 최근에는 공용 숙소가 있는 건물에만 머무는 모양이었다. 기사단 일이 바쁠 시기는 아닐 텐데.
“오랜만이다. 본관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아, 저번에 훈련하다 일이 좀 있었거든~ 그거 수습하느라.”
그래서 공용 숙소 건물에 묵는 중인가. 건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은 어때? 아현이랑 나랑 둘이서 같이 고른 건데, 마음에 들어?”
아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세진이 웃으며 목걸이를 가리켰다. 둘이서 골랐다기에는 아현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모양새로 보였으나, 건우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잘 골랐네.”
“역시 우리밖에 없지?”
세진이 아현의 볼에 제 볼을 기대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아현에게 눈짓했고, 아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만 가 볼게.”
“저…다음에, 또 뵐게요…!”
“그래. 다음부터는…”
건우는 잠시 아현의 묘하게 긴장한 듯한 얼굴을 살피다 말을 이었다.
“말 편하게 해라.”
“네, 네…!”
“그럼 다음에 봐!”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건우는 마주 손을 흔들고는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기 전 창가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인영을 향해 인상을 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가 건우를 보며 웃자 건우의 미간이 좀 더 구겨졌다.
“아현아, 무슨 일 있었어?”
정원 뒤 그늘진 건물 모퉁이에 멈춰선 세진이 듣는 이가 없도록 목소리를 낮춰 아현에게 속삭였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아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세진이 네가 오기 전에, 목걸이를 직접 채워 드렸거든.”
세진은 조용히 아현의 말을 기다렸다.
“옷 안쪽에 잇자국이 나 있는 걸 봤어. 그래서, 걱정이 돼서…”
“잇자국? 짐승한테 당한 건가?”
“아니, 꼭 사람한테 물린 것처럼 보였어…혹시 괴롭힘이라도 당하시는 걸까?”
글쎄, 괴롭힘 같은 걸 당해주고 있을 인물은 못 되지 않나. 혹시 인간형 마물? 세진은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상한 점은?”
“으음, 피부가 좀 울긋불긋했고…”
“화상 자국처럼?”
“아니, 화상 자국 같지는 않았는데…이만한 크기의 반점 같은 게 여러 개 있었어.”
그 말에 아현의 설명을 듣던 세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렇게 생긴 거였어?
인적이 극히 드문 구석진 길에서 은밀히 오가는 말소리가 수상쩍어 듣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짧은 마찰음과 함께 대화의 분위기가 점점 묘해져갔다. 청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약간 떨어진 곳에서 두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하려 집중했다. 얼핏 건우의 이름이 들린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러나 이어서 약한 신음성이 섞여 들려오기 시작하자 과연 더 듣고 있어도 되는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거보다 진했어? 내가 그동안 아현이 널 너무…
청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 또 아는 이름이었다.
-신성 담긴 몸에 그런거 남겨 두기가 좀 그랬거든. 그런데 이제는…
-세, 세진아, 그만…드, 들어가서…
역시 아는 이름. 청우는 거기까지 들은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돌렸다. 대화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알았고, 그 이상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바빠도 그렇지, 지원 가 있는 내내 연락 한 번 없이…
청우는 귀 주변에 끌어모았던 마력을 흐트렸다. 불만 섞인 목소리가 웅얼대는 게 마지막으로 약간 들리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분명 신성학은 포기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해 놓고 굳이 강의실에 들어와 제 옆에 앉는 행태를, 건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수업이 시작되었으므로 꺼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현이 빙긋 웃더니 만년필을 쥐고 건우의 노트에 적었다.
왜 그렇게 봐요?
유려하면서도 묘하게 각이 선 글씨가 새겨졌다가 몇 초 뒤에 사라졌다. 건우는 최대한 얼굴 표정을 평소와 같이 유지하며 대답했다.
이거 포기했다며.
수업도 안 듣는다고는 안 했는데.
점수는.
음, 내 의도와는 관계 없이 낙제할 예정이라.
무슨 개소리냐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문득 불길하다못해 불쾌하기까지 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건우의 표정 변화에 재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야 눈치챘어요? 후배님 치고 느린데.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