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14

진화랑 1개, 영혼의 연결 기반 썰 2개. 2024년 1월 24일 연성.

1. 데빌의 인격은 사라졌으나 데빌의 저주가 화랑에게 스며들어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진에게 자유를 주고 버티는 화랑과 그런 화랑을 보며 반드시 구하겠다 다짐하는 진으로 진화랑.

당신에게 제안할 게 있어, 빅터. 그 말에 빅터가 제 앞에 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세계를 상대로 한 카즈야와의 일전을 끝내고 간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생기와 활력이 넘치지만 이상하게 조금 지쳐보이는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던 청년이 제안이라는 무언가의 떡밥을 가지고 찾아왔다라. 흥미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제안이라, 일단 들어볼까. 빅터의 말에 청년, 화랑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알거라고 하더군. 화랑, 어디있지? 빅터는 익숙하게 데빌의 힘을 이용해 날개를 퍼덕이며 제 앞으로 날아온 진을 보며 이젠 숨길 생각도 없나 보군, 이라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라며 중얼거린 것도 잠시 진의 눈이 너무나도 확고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빅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그가 사라지기라도 했나? "

" ...UN군이 날 감시하고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데빌의 인격은 사라졌고 더 이상 폭주 없이 데빌을 다룬다지만 데빌 인자를 가지고 있는건 나 뿐이니까. 그런데 그 감시가... 어느 순간 갑자기 끊겼지. 그리고 절묘하게도 화랑의 소식이 끊어진 것도 그 쯤이었다. 결국 소거법으로 UN이 화랑의 생사를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지.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

" 결정적으로? "

" 알리사가 UN의 시스템을 해킹했다 "

알리사를 잘 알고 있는 빅터는 그 말로 더 이상 발뺌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는 제 선그라스를 고쳐 쓰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진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대로 진은 빅터에게 안내를 받아 UN의 연구소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섰다. 정말이지, 그와의 약속을 내가 먼저 깨게되다니 나중에 잔뜩 원망을 듣겠군. 빅터의 말에 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 진의 중얼거림에 빅터의 걸음이 느려졌다.

" 제안을 먼저 해온건 그 쪽이네. 갑자기 나타나서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손해가 전혀 없는 제안이라 당연히 받아들였지 "

" 당신들에게 손해가 없다면... 화랑에겐 손해만 있다는건가? "

" 손해만 있는건 아니지. 그에게 손해라고 한다면... 자유를 반납했다는 것 하나 뿐일까 "

영문을 모를 그 말에 진의 인상이 펴질 기미도 없이 보안 카드를 몇번이나 찍으며 도착한 곳은 문만 하나 달랑 있는 삭막한 곳이었다. 창문 하나 없이 단단하게 닫혀있는 철문을 바라보던 진은 자네는 운이 좋군, 이라며 운을 띄운 빅터가 뒤돌아 자신을 바라봄과 동시에 한쪽 벽이 열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두터운 벽에 가려져 있던, 창문 너머의 장면에 눈을 부릅떴다. 말로 설명 들을 필요도 없이 바로 상황 파악이 가능해졌으니. 빅터의 목소리와 함께 보인 건 그야말로 피바다의 현장이었다. 바닥, 벽, 천장. 피가 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변에는 가구로 보이는 파편들이 여기저기 산산조각 부셔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진이 찾던 화랑은 그 현장 한가운데서 웅크린 체 제 어깨를 뜯을 듯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화랑의 어깨 죽지에 솟아오른 그것은.

" 날개...? 설마! "

" 그 설마지. 자네만 데빌 인자의 소유자가 아니야. 그에게도 데빌 인자가 스며들었다. 그 결과로... 그는 매일매일 저를 데빌화 시키려는 데빌 인자와 싸우고 있지 "

밖으로 조금의 소리마저 새어갈 수 없도록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화랑은 이를 악문 체 저를 데빌화 시키려는 데빌 인자와 끊임없이 싸웠다. 젠장, 빌어먹을...! 제 어깨 죽지에서부터 꿈틀꿈틀 솟아오른 날개를 움켜쥔 화랑이 단숨에 힘을 줘 그대로 날개를 뽑아냈다. 그 여파로 또 다시 새로운 피가 흩뿌려졌다. 뽑아낸 날개는 이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으나 화랑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렸다. 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절규하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화랑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난 오른쪽 눈은 데빌의 붉은 눈이었다. 으극... 피눈물을 흘려가며 저를 어떻게든 데빌화 시키려는 데빌 인자를 그저 몸으로, 정신력으로 버티던 화랑의 절규가 그친 건 10분 후였다. 하아... 하아... 짜증나는 괴물 자식...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화랑은 겨우 데빌화가 멈추자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나도 나지만 진짜 너도 끈질기네... 혈액 속에 녹아든 데빌 인자가 흐르며 저를 호시탐탐 노리는걸 느끼던 화랑이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는 휙,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의 진을 바라보았다. 흠칫, 그런 화랑의 움직임에 놀란 것도 잠시.

" 걱정 말게. 창문은 매직 미러라 안에선 밖이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잠시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화랑은 안쪽의 또 다른 문이 열리고 들어온 과학자들을 보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곤 그대로 그들을 치료를 받으며 뭐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화랑의 모습을 본 진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문고리를 붙잡는 걸 막은 것은 빅터였다. 자신을 막는 빅터에 진이 눈이 매섭게 변했다.

" 놔 "

"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 그와의 약속을 이미 어긴 상태여서 이것까지 허용하면 후폭풍이 무섭거든 "

" ...데빌의 문제라면 어째서 나한테 오지 않은거지? "

" 그 반응으로는 자네의 어머니도 자네에게 비밀로 했다는거군. 정말 다같이 약속을 너무 잘지킨단 말이야 "

" 무슨 소리지? "

" 그가 그러더군. 이미 한 차례 폭풍을 견딘 후 곧바로 자네에겐 비밀로 하고 자네의 어머니를 찾아갔으나 돌아온 대답은 정화의 힘을 지닌 카자마의 힘으로도 그의 데빌 인자를 정화시키는건 불가능하다... 였다고 "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의 진에게 빅터의 설명이 이어졌다. 통상의 데빌 인자와 달리 명백한 악의와 저주의 기운을 띄고 있어 오히려 카자마의 정화의 힘에 극렬하게 반응하고 폭주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 그에게 이런 저주와도 같은 데빌 인자를 심은건 아마도... 그 말에 진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래, 화랑에게 그런 저주와도 같은 데빌 인자를 심을 수 있는 건... 이미 소멸하고 제 안에서 사라진 데빌의 인격일 것이다. 자신의 숙주인 진과 자신을 이겼던 화랑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기 위해서. 끝까지... 악 그 자체였다.

" ...얼마나 자주 데빌화에 시달리고 있지? "

" 처음엔 일주일에 한번 정도였지만 최근엔 하루에 한 번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지 "

" 어째서 UN이었지? "

" ...데빌 인자에 관심이 있으니 분명 데빌 인자를 제거 혹은 빼내는 기술도 연구 중이겠지? 라며 묻더군. 실제로... 사실이기도 했고. 그 동안 샘플이 없어서 그저 이론상으로만 연구하고 있었지만 마침 그가 제 몸의 데빌 인자를 빌미로 거래를 해온거지. 우리 입장에서도 자네보다는 스스로 찾아 온 그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게 낫고. 그리고 무엇보다 "

" 무엇보다? "

" 세계의 밸런스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강한 무력 집단이니... 자신이 데빌에게 잡아 먹히면 바로... 처리해 달라고 하더군 "

빅터가 처리라고 말을 골랐지만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린 진이 이를 악물었다. 화랑, 너는 끝까지... 나한테 숨기고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할 생각이었나? 정말이지... 너의 그런 점 가끔 너무 화가 나. 아니, 나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닌가. 모든 것이 해결되기 전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떠올린 진이 쓴 미소를 지은 순간. 치료를 잠시 중단 시킨 화랑이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고 열린 창문 앞으로 다가왔다. 분명 매직 미러라 안에서 밖이 보이지 않을테지만 마치 화랑은 보인다는 듯 진과 눈을 마주쳐왔다. 피눈물 자국이 남은 눈이 잠시 진을 바라보다 힐끔 그 뒤에 서 있던 빅터에게 향했다. 오우, 진짜 그의 직감은 무섭다니까. 작게 중얼거린 빅터를 향해 칫, 혀를 찬 화랑이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들어 제 피로 창문에 서툴게 일본어로 무언가 적어내려갔다.

다음에 보자. 그 문장에 진의 눈이 커졌다. 반드시 제 안의 데빌 인자를 없애고 네 앞에 서겠다는 화랑의 의지가 섞인 문장. 그 문장의 마침표를 찍자마자 뒤로 돌아 걸어가며 화랑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서히 내려오는 두터운 벽이 진의 시야에서 화랑을 가리고 마침내 쿵, 소리를 내며 화랑은 또 다시 그 좁은 곳에 자신을 가뒀다. 잠시 말이 없던 진이 뒤로 두어발짝 물러섰다.

" 이제 어쩔거지? "

" ...모든 걸 이용하겠어. 카자마의 정화의 힘이 안된다면 아자젤에 대해 알고 있는 그녀의 힘, 그의 퇴마의 힘. 그 외의 모든 수단을 이용하겠어. 난... 누군가를 희생해서 얻은 자유 따위는 필요 없어 "

특히 그 희생자가... 화랑이라면 더더욱. 기다려, 화랑. 반드시... 널 구해줄게. 내가 너에게 구원 받았던 것 처럼. 그것까지 포함해서... 너야. 언젠가 화랑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 진이 주먹을 쥐었다.


2. 영혼의 연결, 짧은 진화랑+준의 일상.

잘 때도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진심으로.

각인을 맺고 반려가 되자 화랑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하게도 진의 집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그래봤자 자신의 집이 도장에서 진의 집으로 바뀌는 것 뿐이라 그닥 거창한 감정 따위는 없었고 백두산도 쿨하게 제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래봤자 고생은 자기가 하는거니까. 백두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출퇴근 2시간 경험해봐라. 그리고 백두산은 첫 날 미시마 재단의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나 혼연의 상태로 잠에 취한 체 진의 손에 잡힌 화랑을 보고는 기함을 토했다. 뭐, 진도 예상 했다는 반응이었던지 백두산과 바로 담판을 지어 도장일은 일주일 중 3일로 몰아서 하게 되었고 덕분에 화랑은 졸지에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다.

깜박깜박. 잠에서 깬 진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뚜둑, 뚝. 목을 돌리며 굳은 몸을 풀어주던 진이 손을 내리자 푹신푹신하고 따뜻한 털뭉치 같은게 닿았다. 뭐지...? 고개를 돌린 진의 시야에 들어온 건. 한참 잠에 취해있는 앙증 맞은 사이즈의... 삵이었다. 저에게 닿은 진의 손에 잠에서 깨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던 삵은 몸을 둥글게 말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언제 돌아온거야, 화랑.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이 남아있다며 다음날 온다던 화랑은 새벽에 바이크를 타고 온 듯 했다. 일 끝내고 2시간을 내리 바이크를 타고 돌아왔다라. 피곤하겠네. 이미 진즉에 일어날 시간이 지났음에도 화랑은 깨어날 기미도 없이 계속 잠에 빠져있었다. 깨울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진이 주섬주섬 손에 쥔 건... 폰이었다. 카메라 기능을 켠 진이 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찰칵, 찰칵 꽤나 큰소리가 연신 울리는데도 화랑은 깨어날 기미도 없이 새근새근 잘만 잤다.

" 정말이지,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귀여움이네 "

고양이과 동물의 귀여움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제 반려라고 생각하니 더 귀엽게 느껴졌다. 폰을 내려놓은 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삵의 머리를 손등으로 살살 문지르다 이내 천천히 머리부터 등까지 쓰다듬자 그 손길이 기분이 좋은건지 골골골 소리까지 내던 삵이 덥썩 진의 손을 붙잡더니 그 손에 제 머리를 비벼댔다. 아, 죽겠네 정말.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진이 양손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안아 천천히 누우면서 제 가슴 위에 삵을 올려놓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귀여운 이 생명체가 제 반려라니. 정말이지... 행복하네. 그렇게 생각한 진이 손가락으로 삵의 머리를 매만지며 조용한 아침 시간을 보냈다. 물론... 잠에 반쯤 취한체 깨어난 화랑이 지금 제가 누구의 위에 있는지 깨닫고 그 얼굴에 오선지를 그어주기 전까지만.

2-1. 자는 모습도 귀엽고 깜찍하다, 진심으로.

진? 진과 화랑이 각인을 맺고 반려가 되어 같이 살게된 후 처음으로 아침 일찍 진의 집을 찾은 준은 아직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발을 딛었다.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들어온 준이 향한 곳은 침실이었다. 손을 들어 똑똑 문을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지만 그래도 대답없자 준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작은 문소리가 나고 침실로 들어온 그녀의 눈에 귀여운 광경이 포착되었다.

" 어머나 "

침대 위에 자그만한 삵과 반시뱀이 서로 포개진 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반시뱀이 삵의 몸을 휘감고 삵은 그 반시뱀의 몸을 베개 삼아 자고 있는 이 귀여운 광경에 준이 환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다가와 침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의 반시뱀의 모습은 잘 알고 있지만 화랑의 삵의 모습을 처음보는 준은 생각보다 작은 혼연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 후후, 귀엽고 깜찍한 커플이네 "

인간의 모습일 때는 그저 늠름하고 다 큰 성인이지만 혼연일 때는 이렇게나 작고 귀엽다니. 정말 반류들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신기하다니까. 본인도 반류면서 - 심지어 반류 최강자 - 반류에 대해 감탄하던 준이 아, 작게 탄성을 내뱉고 폰을 꺼내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잠시 사진을 찍던 준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며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후, 둘이서 좋은 꿈꾸기를 라며 중얼거리곤 조용히 침실을 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어머님께 보여드리면 좋아하시겠지? 카즈야의 어머니인 카즈미에게 사진을 보여줄 생각을 하면서.


3. 영혼의 연결, 짧은 화랑+준. 이 일로 준은 화랑을 든든한 며느리(?)로 인식했다.

사람에게는 예상 외의 특기가 1개씩은 있기 마련이다.

준씨, 뭐하고 있어? 아침부터 사이 안좋은 두 부자의 대련 아닌 대련을 보던 화랑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주방에서 서성이던 준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제 사범인 백두산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존댓말을 하지 않는 화랑을 준은 자신들과 빠르게 친해지려는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지적을 하지않았다. 사실 그런 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이기도 했고. 화랑을 발견한 준이 환하게 웃었다. 아, 이제 점심을 준비해야해서.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화랑이 카즈미의 행방을 묻자.

" 어머님은 오늘 아버님이랑 외출을 하셔서 본의 아니게 점심 준비는 내가 하게 됐네. 음, 간단하게 하면 되겠지 "

" ...뭘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그 물은 뭐야? "

" 어제 남은 라면 끓인 물. 이걸로 된장국을... "

" 네네, 잠깐 스톱. Wait a minute "

" 어머, 화랑군. 영어 발음 좋네 "

준이 자신을 칭찬하든말든 화랑이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진이 말해준 것 같은데.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재료를 두 번 죽이는 수준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미식에 대해 잘 모르고 미각도 둔하다고 했던가. 이러다보니 미시마가의 모든 식사는 카즈미씨가 도맡아서 한다고 했지... 근데 왜 하필이면 오늘 자리를 비운건데, 진짜. 잠시 머리를 굴리던 화랑이 덥썩 준이 들고 있던 냄비를 대신 들더니 그대로... 안에 들어있던 라면 끓이고 남은 물을 버렸다. 화랑군? 다급한 목소리에도 태연히 냄비를 닦고 적당량의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린 화랑이 불을 켜며 입을 열었다.

" 혹시 집에 다시팩 같은 거 있어? 국물거리 낼만한거 "

" 응? 어, 잠시만... "

이내 화랑에게 다른 쪽 선반에 있던 다시팩을 건낸 준이 화랑이 자연스럽게 냄비에 다시팩을 던져놓으며 제 머리를 반 묶음에서 하나로 모아서 다시 묶고는 이번엔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호오, 그래도 미시마 가. 재료는 아주 넘쳐나네. 귀찮고 또 귀찮으니까 안에 들어갈 재료는 미역이랑 두부... 정도만 넣을까. 이게 된장인가? 좋아. 준씨, 칼질은 할 수 있지? 그럼 미역이랑 두부랑 대충 한입 크기로 썰어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재료를 꺼내 자신에게 들이미는 화랑에 준이 저도 모르게 재료를 받아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밑반찬 거리를 물색하던 화랑의 눈에 계란과 팽이 버섯이 들어왔다.

" 다른 밑반찬은 뭐로 하려고 했어? "

" 아, 어머님이 만드신 오이 무침이랑 채소 절임... "

" 단백질 완전 부족이네. 그럼 간단하게 계란말이라도 할까 "

계란 두어개와 팽이 버섯을 꺼낸 화랑이 잠시 재료를 냅두고 다시팩을 꺼낸 냄비에 준이 자른 미역과 두부를 넣고는 끓이다 일본식 미소 된장을 넣고 살짝 간을 봤다. 음, 이 정도면 되려나. 화랑군, 나도. 그 말에 작은 종지에 국물을 덜어 건내자 준이 조심스럽게 맛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진걸 아는지 모르는지 화랑이 된장국이 끓기 시작하자 바로 불을 껐다. 국은 끝났고 다음은... 화랑이 다시 주방을 뒤져 작은 볼을 꺼내고는 계란을 깨고 팽이 버섯을 잘게 잘라 넣었다. 그리곤 꽤나 익숙한 솜씨로 섞기 시작하는 화랑을 보던 준이 들고 있던 작은 종지를 내려놓았다.

" 요리가 꽤나 익숙해 보이네 "

" 음? 아,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내 가족은 사범님 뿐이니까. 어릴 적에는 사범님이 도맡아서 하셨지만 다 커서 까지도 사범님한테만 맡길 수 없어서 이것저것 대충 하다보니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것 뿐이야. 그래봤자 복잡한 건 힘들고 돌려막기 위한 국 몇개랑 간단한 반찬 정도지만 "

" 근데 계란말이에 팽이 버섯...? "

" 아, 원래는 팽이 버섯전 하려고 한건데... "

" 한건데? "

" 귀찮아졌어. 하나하나 부치기 싫고 어차피 주가 뭐가되냐의 차이니까 "

그 말에 웃는 준을 뒤로하고 어느새 꺼낸 계란말이 전용 사각팬에 기름을 살짝 두른 화랑이 그대로 계란물을 붓고는 꽤나 익숙하게 계란말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준씨, 뮌가 재료 재활용은 좋은데 재활용 해도 되는게 있고 안되는거 구분 정도는 해줘. 라면 끓인 물은 그냥 버리는게 맞다고. 그게 무슨 쌀뜨물도 아니고 그걸로 국 끓이면 다른 재료 다 버리고 맛도 안난다고. 어머, 그 이야기 어머님에게도 들었어. 근데 왜 아직도 라면 끓인 물을 들이미는거야? 어이없다는 말과 표정과 달리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결국 예쁘게도 계란말이까지 완성시킨 화랑이 자르고 남은 자투리를 젓가락으로 잡아 준에게 들이밀었다. 역시 맛은 합격이었다. 화랑이 머리를 풀어 다시 반묶음으로 묶었다.

" 후아암, 이 정도면 대충 되겠지. 국은 먹기 전에 살짝 끓이고 바로 불 꺼. 일본식 된장은 오래 끓이면 떫은 맛이나니까 "

" 어, 두 사람 점심 안먹어? "

" 진이 따로 이야기 안했어? 우리도 외출 있는데 "

그럼 맛은 별로겠지만 맛있게 먹어. 고마워, 화랑군. 대충 손을 흔들고 주방을 나가던 화랑은 진이랑 마주친건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진. 너 준씨한테 오늘 우리 스케줄 말도 안했냐? 우리 몫까지 점심준비할 뻔했다고. 하여간에 정신을 어디다가 빼놓고...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에 작게 웃은 준은 이내 가스불을 다시 켰다. 대련이 끝났으니 곧 카즈야가 올거니까. 그리고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순간 멈칫 했던 카즈야는 카즈미가 해준 음식과 다르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맛있는 음식에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에게는 예상 외의 특기가 1개씩은 있더더니. 앞 뒤 사정을 들은 카즈야의 평가에 준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란말이를 입에 넣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식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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