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날개
유진래빈 용X인간 AU 시리즈
1. 국경의 그림자 STier ver. 차유진(용)X김래빈(인간)
해가 지고 있었다. 전투의 막바지였다. 이보다 더 어두워지면 눈 밝은 마법사와 용 이외에는 전투를 벌일 수가 없어서 두 진영은 암묵적으로 해가 지기 전까지를 전쟁의 시간으로 삼았다. 저 멀리 해보다 밝은 불이 어른거렸다. 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냄새에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고, 붉게 타는 대기에 검은 연기가 묵직하게 섞여 들었다. 이쪽의 피해도 상당했지만, 적군도 제법 많은 사상자를 냈으니 오늘 밤은 기습이 없을 터였다. 한동안은 서로 각자의 진영에서 군을 추스르리라.
김래빈은 휘파람을 짧게 끊어 불었다. 산 자들은 돌아갈 때였다. 그의 용은 멀리서도 그의 휘파람 소리만큼은 기가 막히게 찾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서 있던 망루에 기이한 돌풍이 불었다.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대충 잡아매며 그는 망루의 가장자리에 선 채 시간을 가늠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추락.
낙하의 감각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중력과 거센 바람, 제 몸이 부러져버릴 것 같은 저항력을 느끼며 그는 이대로 지상으로 던져져 죽는 상상을 했다. 이럴 때면 종종 드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 망루의 그림자 아래로 그의 몸이 잠겨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검은 용의 주둥이가 그를 낚아채 올릴 테니까. 용의 등 뒤에 얹어진 김래빈은 급격한 선회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갈기를 붙들고 고맙다는 듯 그 목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귀환하자.”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수습하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의미가 없었다. 벌써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곳은 이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 더 많이 오는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한 번 날개를 크게 펄럭이는 것으로 그에게 화답한 용이 고요히 활공했다. 전장이 점점 더 멀어졌다.
그의 나라와 옆 나라가 이 국경의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인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국경을 맞대고 싸워왔고 서로에게 던진 도발로 이 땅의 몸값은 불필요할 만큼 부풀려졌다. 이제는 왜 싸우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정탐과 작은 분쟁, 승패 없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자원과 병력이 성과 없이 소모되었다.
이건 그냥 자존심 싸움이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지만 그 옳은 말을 대놓고 왕 앞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지원도 없이 지지부진한 싸움이 계속되는 이 국경에 파견되는 건 결코 영광이라 부를 수 없었다. 군에 들어왔을 때부터 열다섯 가지 주요 수신호와 세 종류의 군사 암호체계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지형지물 및 보급체계에 대한 이해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래빈은 그 길에 승리가 없으리란 걸 곧 파악했다. 다만 그는 광휘 없는 의무라고 그 무게를 바닥에 내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사람이 왜 영광 없는 길에 내몰리게 되었을까. 뻔한 이야기다. 김래빈의 파견에는 몇 가지 이해관계와 높으신 분의 괘씸죄가 얽혀있었다.
그의 페어 용, 차유진은 좀 특별했다.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검은 용을 길들이게 된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용과 페어를 맺을 수 있는 건 선별된 용기사와 왕족뿐. 차유진은 그 성미며 능력이 전투에 나서 공을 세우기에 좋았고 약간 까탈스러워 제어하기 어려운 느낌까지 완벽하게 콧대 높은 어느 왕족 나으리 취향이었다. 예컨대 예전부터 왕족에게 가기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차유진이 김래빈을 선택하지만 않았더라면.
차유진은 용이었고 제 페어를 선택하는 데 인간 사이의 알력을 신경 쓰지 않았다. 김래빈은 그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공격에 반복적으로 머뭇거리고 종종 상사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용기사 대신 정찰병으로 빠질 예정이었지만 용의 지목에 모든 게 뒤집혔다. 왕이야 제 자리를 언제 노릴지 모르는 왕족보다는 아무 힘 없는 김래빈이 오히려 좋았고. 용은 사납고 기사가 영리하니 좋은 한 쌍이 되겠구나. 왕은 그렇게 명령했고 차유진을 오래 노리고 있던 왕족은 심사가 뒤틀렸다.
‘용기사가 제 용에게만 기대는 것도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닐 테지. 공격이 어렵다면 수비는 잘할 테냐?’
이미 몇 년간 공방이 이어져 온 저 먼 국경으로, 마치 넌 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 보겠다는 듯이. 그들은 그렇게 페어를 맺자마자 이곳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돌아갈 기약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상, 혹은 중앙에서 누군가 그들을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요원하리라.
그들은 익숙하게 요새의 무너진 성벽 안쪽에 내려앉았다.
“다친 데는?”
없어. 김래빈은?
“나야 뭐,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니까….”
말끄트머리에 죄책감이 묻어있었다. 남들이 보면 화났다고 오해할 만한 얼굴이었지만 차유진은 미간이 찌푸려진 그 얼굴이 염려에서 나왔음을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날개 부근을 쓸어내리는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확인해보게 변해봐.”
검은 비늘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김래빈은 상처를 확인하고 싶을 때면 그에게 인간의 형태를 요구했다. 순순히 인간의 형태로 변한 차유진을 김래빈은 한 바퀴 돌아가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크게 다친 데는 보이지 않았다. 몇 군데에는 마법으로 인한 화상 흔적이 남았지만, 그 정도라면 이런 곳에서는 대단히 경상이었다. 안도와 착잡함, 숨기지 못하는 염려를 담은 눈동자를 앞에 두고 차유진은 인간의 손으로 김래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묻은 재와 묵은 피로를 털어내듯이.
“김래빈.”
“왜?”
차유진은 오늘도 잘 버텼다고 하는 대신 용으로 변해 그 목을 휘어 상대를 제게 끌어당겼다. 용의 큰 몸에 가려진 김래빈의 어깨에서 점점 긴장이 풀리고 힘이 빠져 결국 그에게 툭 기댈 때까지. 그 뺨을 한번 길게 핥아준 차유진이 작은 인간의 걸음에 맞춰 서서히 다리를 움직였다. 내일은 그래도 전투가 없겠지. 용의 그늘 아래에서 아주 자그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유진은 가만히 날개를 기울여 그 연약함을 감춰주었다.
서로 마주치지 못한 시선들이 서로를 향해 엇갈렸다. 차유진에게 모든 전투를 일임한다는 죄책감, 자기 때문에 김래빈이 힘든 곳으로 발령받은 게 아닐까 하는 부채감. 서로 말하지 않는 각자의 상처가 표면 아래에 고여있었다.
둘은 서로 사랑을 했다. 통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 * *
지리멸렬해도 전쟁이었다. 부상과 죽음은 언제든 그들 가까이 있었다. 차유진이 아무리 빠르고 사나운 용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용을 상처입히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작살이 그에게 날아왔을 때 그는 피하지 못했다.
난전의 한가운데였다. 추락을 면하고 요새로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다. 차유진의 부상으로 용 대신 말을 타고 돌아온 김래빈은 오자마자 그를 찾았다. 희게 질린 얼굴에 곧 울 것 같은 밭은 숨을 그의 비늘 사이에 쏟아낼지언정 김래빈은 울지 않았다. 울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작살을 뽑아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가 온몸을 매달려 작살을 뽑아내고 나서야 차유진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다. 언제나 보급품, 특히 의약품이 부족한 이곳에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처치를 받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물론 뒤늦게 쏟아진 김래빈의 눈물을 닦아주기에도 날개나 혀, 꼬리보다는 인간의 손이 더 편리했다.
다음 날은 비가 거세게 내렸다.
용의 모습을 선호하는 차유진을 위해 요새에서는 반파된 건물을 얼기설기 수리해 통째로 그의 공간으로 넘겨주었다. 비를 가리는 방수천 너머로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석조 건물을 울렸다. 김래빈은 여전히 약 냄새를 풍기는 차유진에게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대어있는 용의 몸이 나지막한 숨소리를 따라 느리게 오르내렸다. 인간들이 머무는 공간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기가 제일 편했다. 용과 기사 사이의 유대를 제하고서도 김래빈은 친해질 만하면 구성원의 면면이 바뀌는 이 요새가 좀 낯설었다.
“비가 오면 전투가 없으니까, 만약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린다면…,”
거기서 김래빈은 말을 멈췄다. 떠나온 고향의 방향을 더듬던 시선이 내리깔리더니 긴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아니야. 그보다는 전쟁을 빨리 끝내 평화가 오는 게 더 맞겠지.”
김래빈.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용의 투명한 홍채가 그를 향했다. 나랑 같이 도망쳐. 말이 혀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그 말에 돌아올 답을 알아 차유진은 고개를 젓고는 그를 품에 둔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내 짝. 야속한 내 반쪽.
너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차유진은 김래빈에게 이미 두 번이나 짝 맺기를 거절당했다.
전승되는 전설에서는 마치 운명처럼 굳건한 신뢰 관계로 묘사되지만, 이 나라에서 용-기사 페어는 근본적으로는 계약 관계였다. 용과 기사 사이 페어 계약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친구처럼, 혹은 가족처럼 가까워진다고는 해도 용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오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의 수명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너무 짧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건 용들에게 아주 어리석고 덧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래도 차유진은 귀하고 제멋대로 굴어 모두가 어려워하는 용에게 오로지 그것이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김래빈을 마주했을 때부터 불가항력처럼 그를 사랑했다.
인간으로 한 번, 그리고 다시 용 모습인 채로 한 번. 처음에 고백했을 때는 거절의 이유를 듣지 못했고, 다음엔 용 모습이 더 좋냐고 물어보았다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는 고함만 들었다.
‘용이 짝을 버리는 일은 없다며.’
김래빈은 아주 나중에야 지나가듯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네 짝이라는 이유로 차유진 네가 여기 계속 붙잡혀있게 된다면 좀 싫을 것 같아서.’
그러면 같이 떠나면 되잖아. 차유진의 말에 김래빈은 고개를 젓고 나는 그럴 수 없지, 하며 그와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너는 가도 돼. 잘못한 건 인간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지켜야 할 게 있어.’
빌어먹을 책임감이었다. 차유진은 그러고도 몇 년을 더 머물렀다. 멈추지 않는 분쟁 속에 보급이 점점 더 줄어들고, 아군마저 하나둘 도망쳐 점차 황량해지는 요새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희망으로. 요새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하지만 결국엔 한계였다. 떠나기 바로 전날, 노을이 내린 성의 꼭대기에서 김래빈을 제 위에 앉힌 차유진은 물었다.
김래빈. 여길 지키는 게 아직도 의미가 있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눈을 감았다.
그날 차유진의 거처에는 마치 떠날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비상약 몇 가지가 든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거대한 용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저 멀리, 아주 천천히 사라져 갔다. 상부는 뒤집히겠지만 이미 놓친 용을 다시 잡을 방법은 없을 터였다. 성벽의 어두침침한 그림자 아래에서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던 김래빈은 이제 나도 무기를 들 때가 왔구나, 하고 쓸쓸히 중얼거렸다.
* * *
용은 정말 오래 살았다.
‘나중에 이 지역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면 그때 다시 와 보자. 여기도 지금은 이렇지만 원래는 꽤 아름다운 곳이었대.’
밤을 새워 보초를 서던 어느 날 요새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김래빈이 소곤거렸던 말을 기억해낸 건 용이 요새를 떠나고도 아주 한참이 흐른 뒤였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인간의 땅을 잊었던 차유진은 기억을 더듬어 옛 요새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 땅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오랜 전쟁으로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진 땅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탐내지 않았다. 그렇게 잊혔다. 모든 게 폐허가 되어 그들이 머물던 요새도 터만 남아 자연만이 무성하게 덧없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는 그곳에서 차유진은 조금 허망해졌다. 이제 네가 그렇게 지키고 싶던 땅의 미래야, 김래빈. 우습지.
김래빈이 그리웠지만 만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차유진은 예상외로 제 기사의 흔적을 일찍 찾았다. 근처 묘비에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생몰 연도를 보면서 차유진은 그래도 오래 살았다 중얼거렸다. 아마 새로운 용을 만난 모양이지. 용 없는 용기사는 보통 오래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유진이 모르는 게 있었다. 김래빈은 다른 용과 계약을 맺지 못했다. 이득 없는 전장에 새 용을 보내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용이 없는 용기사란 한낱 병사였고, 김래빈은 제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가 이리저리 소모되다 부상으로 퇴역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옛 요새 근처에서 전쟁에 떠밀려가며 살다 죽었다.
말년에 김래빈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데려다 건사하며 지냈다. 전쟁으로 부모며 터전을 잃은 아이들은 드물게 용이 뜨는 날에는 겁에 질려 울었다. 김래빈은 우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혹시 모를 위협을 피해 바위 뒤에 숨어 조곤조곤 속삭이곤 했다. 용이 다 저렇지는 않다고. 가끔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용은 아름답고 영리하고 경외할만한 종족이라고. 인간이 저 용들을 전쟁에 쓰는 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 날 김래빈은 제 용의 검은 비늘과 빛나던 눈과 가끔 지친 날 말없이 제게 드리워주던 거대한 날개의 그늘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런 이야기들을 차유진에게 전해 줄 사람이 없어 그는 약간의 배신감과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가 떠난 후로도 김래빈이 크게 힘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묘비를 내려다보다 변덕처럼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버려진 땅에 용이 산다는 소문이 느리게 돌았다. 용은 지나가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땅에 접근하려는 군사와 다른 용, 귀족들의 존재에는 퍽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행객 중 하나는 그 용이 언젠가 인간에게 길들었던 개체일 거라고 장담했지만, 인간이 용을 자유자재로 길들였던 것도 꽤 이전의 일이라 국경에 나타난 원숙한 용을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폐허에 살 수밖에 없는 빈한하고 절박한 사람들은 곧 용의 그늘에서 조심스레 삶을 꾸리는 데 익숙해졌다. 용은 대개 일정한 구역에 머물렀고 그 땅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용은 대부분 김래빈의 묘비 근처 좁은 땅에 몸을 뉘이거나 근처 계곡을 선회하며 호수에 몸을 담갔다. 차유진은 그렇게 여러 해를 살았다.
어느 날 차유진은 땅에서 솟아나고 자라는 작은 보랏빛 꽃을 보았다. 그는 그 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김래빈이 알려주었던 수많은 초목 중 하나였다. 먹어도 되는 꽃이라고 그가 일러주었던 게 기억나 무심코 꽃을 땄다가 긴 줄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꽃이 꼭 김래빈 같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뒤로 그 꽃을 눈여겨보았다. 그 꽃은 따로 키우지 않아도 봄이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자랐지만, 용의 몸뚱이를 전부 덮기에는 아무래도 수가 부족했다.
그는 오랜만에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 한때 김래빈이 충성했던 나라는 저 경계 너머로 물러갔으니 예전의 화폐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인간의 땅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차유진은 주변에 서식하던 짐승 몇을 손쉽게 잡았고 그걸 다시 곡식과 돈으로 바꾸어 그 돈으로 작고 하찮은 꽃의 종자를 다량으로 얻었다. 그 종자를 묘지 주변 땅에 뿌리며 그는 온통 피어난 보라색 꽃들 사이에 파묻히는 상상을 했다.
다음 해 봄, 묘비 주변을 온통 뒤덮은 꽃 사이에 누워 잠들었을 때 차유진은 꿈을 꿨다. 다른 용과 페어를 맺지 않고 그를 기다리던 김래빈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꿈이었다. 김래빈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같이 떠나자며 웃었다. 둘은 전쟁도 슬픔도 없는 땅으로 날아가 인간의 짧은 생애 내내 서로 거리낌 없이 사랑했다. 차유진은 용이라 인간과는 그 기억력이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김래빈의 웃는 얼굴은 꿈속에서도 흐릿했다. 어쩌면 그가 실제로 웃는 모습을 본 게 아주아주 오래전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꿈에서 깨어난 차유진은 조금 울었다. 거대한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묘비를 툭툭 적시며 흘러내렸다.
* * *
시간이 계속 흘러도 여전히 그곳은 어떠한 국가도 차지하지 못했다. 지형이 바뀌고 나라의 이름이 달라질 때까지 차유진은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
용은 묘비에 이끼가 끼고 틈새로 식물이 자라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는 바람과 비에 묘비의 균열이 커지고 어설프게 새겨진 이름과 생몰 연도가 점차 지워지고 깨져가는 걸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묘비가 완전히 무너져 무성한 꽃들 아래로 사라진 그날 차유진은 묘 아래를 파헤쳤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김래빈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묘비 아래에는 다 삭아가는 인골이 있었다. 그는 소박하고 녹슨 반지 두 개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와 김래빈이 나누어 끼던 반지였다. 요새를 떠날 때 그의 거처에 두고 갔던 반지가 소중한 것처럼 손가락뼈에 걸려있었다. 두 반지는 나란히 걸려있었는데 마치 잃어버릴 걸 걱정하듯 좀 더 큰 사이즈의 반지가 아래에 있었다. 그는 반지를 소중하게 챙긴 후 계곡 옆 널찍한 바위 위에서 다 삭은 뼈를 태워 날렸다.
차유진은 어느 날엔가 그 반지 두 개를 삼키고 사라졌다.
용은 사라졌지만, 그곳에는 그 뒤로도 보라색 꽃물결이 봄마다 일었다.
2. 범에 이무기 날개 다는 격 TeSTAR ver. 차유진(인간)X김래빈(이무기)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에는 옥황상제가 살고 지상에선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 어느 산 깊은 골짜기에 이무기가 하나 살았는데, 어찌나 수련을 열심히 했던지 본래 검었던 머리가 군데군데 희게 세고 눈썹은 아예 하얗게 물들었다. 뱀이 오백 년을 수련하면 이무기요, 또 이무기가 오백 년을 수련해 승천하면 용이라. 그 이무기는 아주 오래 수련해 용으로 승천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갑자기 그 이무기에게 하늘로 올라오라는 옥황상제의 명이 떨어졌다.
한낱 이무기 주제에 어떻게 저 지고하신 상제 명을 거역할까. 부랴부랴 하늘로 올라가니 지상의 인간 하나를 감시하는 청천벽력 같은 명이 내렸는데, 승천도 하지 못한 이무기에게 임무가 내려지는 건 전례 없는 일이라. 그 말을 들은 온 하늘과 땅의 신선이며 신수들이 웅성웅성하는데 이 고지식한 이무기는 그저 성심을 다하겠노라 고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이무기, 지상으로 내려오자마자 인간의 거죽을 덮어쓰고 바로 그 인간의 거처로 향하는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소인은 이무기로 불초하게나마 상제의 명을 받고 이 댁 둘째 아드님을 지켜보러 왔소, 라. 듣고 있던 다른 인간들, 이게 참인지 혹은 이 객을 정신이 나갔다 쫓아내야 하는 건지 이리저리 혼란스러운 와중에 드디어 차씨 집안 둘째 아들이 그 소란을 듣고 대청에 등장하였는데, 이무기가 그를 보니 눈에 띄는 붉은 머리에 옥처럼 고운 얼굴, 거센 기세가 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지라.
‘과연 범 같은 종자로다.’
속으로 상제의 명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이무기를 찬찬히 뜯어보던 차씨 집안 둘째 아들. 네가 진정 이무기라면 그 증명을 해보라며 대뜸 말을 던지는구나. 이무기, 그 말에 둘러쓰고 있던 인간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본 모습 드러내니 안개가 뭉클뭉클 일어나고 신비로운 기운이 마당을 감도는데, 이게 무슨 일인고. 드러난 이무기의 몸체가 구렁이만도 못한 길이니 둘러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 헛웃음을 짓고 차씨 집안 둘째 아들도 코웃음을 친다.
“새끼 뱀한텐 일 없는데.”
이 집 담장이 무너질까 부러 제 몸을 줄인 이무기의 큰 뜻을 누가 짐작할꼬. 그래도 기죽지 않은 이무기 꿋꿋하게 명받았으니 옆에 있어야겠소, 하고 우기니 결국 그때부터 차씨 집안 둘째 아들 옆엔 항상 이무기가 붙어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만난 이무기와 인간이 어떻게 어엿한 천계의 한 쌍이 되어 신선이며 영물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는지를 풀어내는 이야기다.
* * *
차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제 입으로 용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이무기가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건가?’
차유진은 제 목에 감겨있는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느릿하게 몸을 뒤튼 뱀, 아니, 작은 이무기, 아니, 아무리 봐도 뱀 같은 무언가는 졸면서도 용케 손가락을 피해 구물구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가을이니 그렇게까지 추운 날씨도 아닌데 누가 뱀 아니랄까 벌써 동면의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당사자가 들으면 펄쩍 뛸 말이다.
‘뱀과 이무기는 뿌리가 같다고 하여도 엄연히 다른 족속이니, 말조심하게.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이무기에게 뱀이라 부르면 원한을 사는 법이야.’
이무기는 혹시 쥐를 먹어야 하냐고 물어보았을 때였다. 그때 얼굴 제법 살벌했었지. 물론 저 이무기가 인상과 다르게 허술한 성격이라는 건 만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들통났다. 심지어 본체로 돌아가면 눈이 동글동글해 더 이상 인상이 무섭지도 않았다.
그는 옅은 한숨을 쉬곤 뱀을 목도리처럼 감은 채 작은 사랑채로 들어섰다. 집안에서 사랑받는 둘째 도련님의 방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방바닥은 미리 때워둔 군불로 적당히 따뜻했다.
“계속 잘 거면 차라리 자리를 깔고 자지 그래.”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거리는 대가리를 손가락으로 어르며 깨우자 눈을 가늘게 뜬 이무기가 주변을 살피다, 곧 익숙한 풍경을 확인했는지 그의 팔을 타고 스르륵 떨어진다. 이윽고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등장하는 건 희멀건 피부에 군데군데 검은 물이 빠지지 않은 머리, 길게 찢어진 눈을 가진 인간의 형상이다. 틀어 올린 머리를 고정한 끈이 뺨 어림에서 사부작거리면 오른뺨에 있는 점이 보였다 보이지 않기를 반복했다.
“아니. 이제 일어나야지. …변명이 되지는 않겠다만 아무리 도력을 쌓아도 신체적 한계를 느낄 때면 여전히 수행이 부족한가 싶어.”
입가를 가린 손 아래에서 채 삼키지 못한 하품을 흘려보낸 이무기, 김래빈은 정좌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잠을 깨려는 것처럼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 그렇지만 차유진이 보기에는 자꾸 꾸물꾸물 눈이 감기는 게 영 글러먹었다.
옅게 한숨을 쉰 그는 김래빈을 떠밀었다. 장에서 꺼낸 이불을 잽싸게 덮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누르고 머리를 고정하고 있는 끈의 매듭을 잡아당겨 풀어내면 이불 새로 길고 흰 머리카락이 차르르륵 흩어졌다. 김래빈은 이불 아래에서 어정쩡하게 바르작거리나 싶더니 차유진이 하나부터 열까지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는 사이 얌전해졌다. 묵직한 솜이불이 퍽 마음에 드는지 고개까지 폭 파묻은 걸 숨쉬기 편하게 이불을 약간 걷어주면서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오늘만 벌써 도합 세 번째 한숨이었다.
그를 감시하겠답시고 찾아온 이무기는 참 세상 물정을 몰랐고, 지나치게 투명하게 그 속이 들여다보였고, 곤란하게도 차유진은 그게 싫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흩어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었다. 비늘 감촉처럼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그 머리카락 끝에 입 맞추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제 속마음을 들여다보며 차유진은 상대를 그저 친우로 아끼는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넘었음을 알았다.
“같은 이불 덮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을 때부터 끝났지, 무얼.”
드러난 이마를 장난스레 툭 건드리면서 차유진은 중얼거렸다. 김래빈은 삿된 것들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며 처음부터 손님방을 거절하고 그의 이불 속에 기어들어왔다. 아마 핑계는 아닐 것이다. 그런 조잡한 핑계를 대기에 그는 너무 곧다.
‘아, 너무 좁은가? 그렇다면 이 모습은 어떠한가?’
차유진이 기겁하는 모습에도 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뱀 모양으로 변하더니 또아리를 틀며 이러면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모습을 보며 그때의 차유진은 이건 뭔가 싶었더랬다.
지금은, 조금 야속하다. 천계의 길을 걷는 것들은 다 이렇게 세속의 욕망을 모르는가, 싶어서.
“천계고 승천이고 수양이고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자네 때문에 고민이야.”
그는 턱을 괸 채 상대를 한참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장지문 너머로 여종을 불렀다.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물을 찾을 게 분명하니 자리끼를 부탁해야 했다.
* * *
차유진이 봉을 휘두르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마당을 울렸다. 그 봉이 움직이는 궤적 끝에 서 있는 김래빈은, 그러나 평연한 얼굴이다. 제게 채 그 끝이 닿기 전에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봉 위에 올라섰던 그는 그 봉이 기울어지기 전에 다시 재주넘기로 사뿐하게 땅에 내려앉았다. 그의 긴 소매와 머리카락이 봉이 일으킨 바람에 펄럭였다.
“오욕칠정(五慾七情)도 결국엔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부분이라, 마음을 정(淨)하게 하는 길은 본성을 다 없애는 데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을 제어하느냐 그것에 휘둘리느냐의 문제이니….”
그동안에도 경전 구절이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낭랑하게 흘러나온다. 다시 차유진이 그에게 봉을 찌르고, 그는 살짝씩 몸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제게 가해지는 위협을 흘린다. 범인은 눈치채기조차 어려운 공방이 고요하게 오갔다. 매일 오전마다 반복되는 그들의 일과이자 수련의 일종이었다. 경전의 한 구절을 읽어준 김래빈은 눈을 감고 지긋이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야기를 줄줄 잇기 시작했다.
“예컨대, 내가 너를 그래도 꽤 봐왔으니 내가 자네에게 정을 붙이는 건 자연스럽다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정이 들었다 하여 내가 감시를 소홀히 한 끝에 자네가 바르지 않은 길로 들어서도록 용인한다면 그건 내가 휘둘리지 말아야 할 것에 휘둘린 탓이다.”
봉을 거둔 차유진은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팔로 걷어내더니 대뜸 물었다.
“그거 김래빈이 나한테 정이 들었다는 뜻이지?”
“…자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기는 한 겐가?”
대답은 않고 그저 히히 웃더니 물을 끼얹어야겠다며 우물가로 향하는 너른 등을 바라보다가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여전히 몸가짐에 경망스러운 부분이 남아있으니 저걸 어찌하면 좋을꼬. 범의 기상을 느꼈던 첫 만남이 온데간데없었다.
‘실력이며 기운이 일취월장 중이고 본성이 선하고 남에게 해 끼친 적이 없으니, 언행을 다듬으며 마음을 닦으면 금세 승천할 수 있을 게 분명하거늘.’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자질은 분명했다. 차유진이 웃음기를 거둔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그는 그 강렬하고 순수한 기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세가 혼란스러울 적에 그런 기를 가진 이의 운명은 보통 둘이다. 왕이 되거나, 혼란의 중심이 되거나. 지금의 세상은 평화로운데다 아직 저이가 어리고 힘이 미약하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세의 굴곡은 천계조차도 쉽사리 예견할 수 없는 것. 자칫 잘못하면 그 주변의 운까지 끌어들이는 상을 가지고 있으니 기왕이면 천계로 올라가는 게 안전했다.
‘그러니 조금 더 온 힘을 쏟으면 좋겠는데.’
함께 천계에 올라가면 좋은 벗으로 지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오는 차유진에게 그가 벗어두었던 상의를 건네며 김래빈은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해 흘려보냈다. 수련은 누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을이었지만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에 데워진 정자는 그리 춥지 않았다.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손에 쥔 채 김래빈은 정자 근처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대대로 벼슬을 지내왔던 집안답게 연못에는 관상용 비단잉어가 먹이를 기대하며 어른거리는 그림자 근처에서 텀벙거렸다. 그의 앞으로 송홧가루에 약간의 곡식과 꿀을 섞은 다식을 밀어주던 차유진이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잉어를 좋아했던가?”
아니면 혹시 먹이? 하고 농을 거는 상대를 떨떠름한 눈으로 물리친 김래빈은 다시 연못을 바라보았다. 위협도 없고 굶주림도 없는 환경이다. 인간의 손에 키워져 색을 내기 위해 다시 교배되는 것들.
“따지자면 이들 역시 등용문을 넘는 순간 후학이 될 수 있는 몸이거늘 이런 곳에선 마음이 안일해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테니 애석하여 보고 있었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자네 후학 여기 있잖나.”
무슨 소린가 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차유진이 당당하게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김래빈이 그에게로 급박하게 몸을 기울였다. 기운이 세다는 건 즉 인간 중에선 드물게 등선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차유진이 천계로 갔으면 좋겠다 설득해왔고 수련에는 흥미를 보여 곧잘 따라도 신선이 되는 건 귀찮다며 계속 거절해온 쪽은 차유진이었다.
“드디어 천계로 올라갈 다짐을 한 건가?”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손등부터 뺨까지 검은 비늘의 흔적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차르르륵 하고 비늘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 모습에 차유진은 얼마 전에 보았던 그의 본체를 떠올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썩 고운 모양새는 아니라며 저어하는 걸 겨우 설득했는데 그의 집에서는 또 너무 좁아 힘들다 하여 근처 야산까지 가야 했다.
그곳에서 보게 된 거대한 본체는 뱀과 용 사이 어딘가의 기이함이 흘렀다. 인간에게는 낯선 그 모습을 보고도 차유진은 겁먹지 않았다. 물끄러미 저를 보고 있는 자색 동공 속 부드러운 눈빛이 언제나의 김래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온 상체를 다 써 가며 상대의 콧잔등부터 뿔 사이를 쓸어 주었다. 곱네. 하면 웃는 것처럼 흘러나온 이무기의 콧김이 그의 팔을 간질였다. 그 모습을 회상하며 그는 다과로 올라온 약과를 입에 넣었다. 무슨 약재를 넣었는지 단맛 가운데 씁쓸함이 묻어났다. 마치 김래빈을 보는 제 마음 같았다.
그는 언젠가 천계로 떠나가겠지.
“글쎄. 아직은 확언하기 어렵겠는걸. 뭐. 천계가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네가 나를 좀 더 잘 설득한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아니, 승천이 무슨 설득씩이나 필요한 일이란 말인가??”
승천할 자격이 있다는 것으로도 영광이거늘. 눈빛에 그대로 속이 묻어나왔다. 그 얼굴에 대고 차유진은 손을 저었다. 자네는 몰라.
“지금 내게 천계가 가지는 매력이라곤 네가 있다는 것밖에 없는데.”
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김래빈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혹여 경망스럽단 평을 듣는다 한들 어쩔 수 없었다. 제 웃음엔 어지간히 약해 보였으니 그걸 믿을 수밖에.
“나는 그대를 연모하거든.”
* * *
‘나는 그대를 연모하거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김래빈은 여전히 저 말을 들었을 때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어조와 표정으로 자신에게 그 말을 했는지도. 그는 목을 꼬아 제가 몸 감고 있는 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차유진은 태연해 보였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일상에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차유진은 아침엔 여전히 한 상 가득 음식을 받았고 낮에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이치를 터득해갔으며 밤이면 저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그가 방심할 때쯤이면 기습하듯 구애 행위를 했다. 시와 함께 꽃가지를 꺾어 보낸다거나, 손 내밀어 얼굴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는 것 같은, 간질간질하고 낯선 행동을.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차유진을 옆에서 본지도 벌써 여러 해. 한낱 이무기의 몸으로 상제께서 감시를 명한 이유를 감히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김래빈은 차유진이 이유 없이 세상의 순리를 흐트러트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가슴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니 며칠쯤 차유진을 떠나있다고 한들 상제의 명을 어겼다 여겨지지는 않겠지. 그런데도 거리를 벌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처럼 온몸으로 느껴지는 인간의 체온이 지나치게 따뜻한 탓이고, 어쩌면 차유진과 나누는 대화와 일상이 생각보다 더 좋았던 탓이다.
짝을 맺어도 괜찮을지도 모르지. 김래빈은 차유진의 옆에서 평생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역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조금 간질간질한 것도 같았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 글을 읽고, 몸을 움직이고, 그 웃음을 보고, 때로 함께 유람을 떠나 풍경을 즐기며 지낼 수 있다면.
‘허나….’
종족도 성별도 상황도, 맞지 않는 게 너무 많았다. 그나마 천계에서라면 종족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짝을 맺을 수 있었지만 짝 맺은 이들은 높은 자리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세상의 도리보다 짝을 더 우선시했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유진은 제 짝으로 지상에 매이는 것보다 천계의 높은 자리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게 나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그럴 수 있는 실력이었고. 그래서 김래빈은 몽글몽글한 상상을 접고 끝까지 차유진의 좋은 벗으로 남기로 했다. 오래 쓸쓸하겠지만, 그 정도는 오랜 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정말 그럴 예정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건넬 거절의 말까지 생각해두었다. 그에게 급작스레 차유진의 혼례 소식이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자네는 이무기라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부터 약속된 상대가 있었어. 김래빈 네가 갑자기 천계니 상제니 하는 바람에 어르신들이 무슨 일인가 파악하느라 혼사가 늦어진 거지.”
차유진은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엄밀히는 김래빈의 등장에 집안 어르신들이 우리 가문에서도 신선을 내나 설레발치며 저울질하다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잠시 보류해두었던 혼사를 다시 진행하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야속한 이에게 자세하게 일러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럼 만약 자네가 혼인한다면….”
“책임져야 할 내자가 생기는 셈이니 하늘로는 올라가지 않겠지.”
김래빈에겐 차유진의 혼인 소식보다도 그 말이 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 상대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날 거절한다면 내가 천계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여기에서 계속 살려면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해. 혼인도 그중 하나고. 사실 내키지 않지만 별 수 없지.”
거절할 걸 알고 있었냐는 물음에 차유진은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씁쓸히 웃었다. 자네는 얼굴에 다 드러나. 퐁당, 퐁당. 차유진이 던지는 말은 하나같이 연못에 던져지는 큰 돌 같았다. 들을 때마다 김래빈의 마음에서 파문이 일다가 그 물결에 그가 일렁이는 사이 어느덧 풍랑이 되어 그를 휩쓸었다. 그의 속이 넋 놓은 채 그 파도에 휩쓸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유진은 무심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끝맺었다.
“상제께서 네게 나를 언제까지 지켜보라 하였는지는 몰라도, 아마 더 이상 문제될 만한 일은 없을 테니 이제 자네는 돌아가도 될 거야.”
옆에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내가 혼인하게 되면 너와 나는 더 이상 벗으로도 남아있을 수 없다고. 김래빈의 귀에는 그 말이 그렇게 들렸다. 최종 선고였다.
“갑자기, 이렇게 정해지면 나는 대체, 이걸 어떡하면 좋은지.”
그가 더듬거리는 사이 차유진은 뒷짐을 진 채로 한 발짝 물러섰다. 주의 깊게 김래빈의 기색을 살피는 것 같은 그 눈동자를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초조하게, 불안하게, 그는 방책을 더듬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 자네의 답을 오래 기다려줬다고 생각하는데. 어떡하긴. 자네는 자네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그건 싫어. 무심결에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상대를 위해서, 괜찮겠지, 벗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감정을 다스려야 하니까. 다양한 이유로 묻어두거나 간과했던 연정이 뒤늦게 번져나갔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영예, 지위, 가족, 부, 보장된 미래. 천계에서, 혹은 지상에서 차유진이 누릴 수 있었던 것들. 한때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여겼던 그 찬란한 가능성에 눈감고 외면하며 그는 차유진을 붙잡았다. 나는 네가 싫어서 거절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막무가내로 읊조리면 다정한 손길이 그를 다시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면, 김래빈, 그대도 나를 좋아한단 말이야?”
마지막 기회였다. 이 대답까지 하면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살며 봐왔던 것 중 가장 귀중하고 빛나는 것이 제 앞에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말해버렸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둑이 터진 것처럼 감춰두었던 속마음이 줄줄 새어나왔다. 자네는 나에게 정말로 두려울 만큼 아까웠는데, 그런데도 헤어진다고 하니 마음이 아파서…. 아마 이런 게 연모겠지. 나는 다만, 네가 나중에라도 후회할까….
그 말을 하나라도 놓칠까 조심스레 귀에 담던 차유진이 웃었다. 자네는 가끔 정말 중요한 걸 몰라. 김래빈의 뺨을 톡 건드는 손길에는 이제 숨기지 않는 애정이 묻어났다. 나는 지금 그런 거 다 필요 없이 네가 좋다고 말하는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았다. 기울어지는 고개와 제게 파고드는 입술을 밀어내는 대신 김래빈은 그 목을 끌어안았다. 펄럭이는 긴 소매가 연인의 첫 입맞춤을 가려주듯 드리웠다.
“어쩐지 검은 기가 늘어난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음…. 아마 탁기가 끼어서 그렇겠지.”
느른한 손길이었다. 차유진이 머리카락을 슥슥 매만질 때마다 잠이 쏟아졌다. 그의 말에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차유진의 손이 멈추었다. 자세를 바꾼 그가 잠시 김래빈의 헐벗은 어깨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하는 침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체의 욕구는 선계와는 거리가 멀다. 비단 그 이유뿐만은 아니겠지만. 그가 덧붙인 말을 차유진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으음, 하고 눈살을 찌푸린 차유진은 미리 말했다면 자제했을 거야, 하고 시무룩하니 타박이나 놓았다. 멈춘 손길이 아쉬웠지만 김래빈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건 정말로 별거 아니었다.
“그래. 말했다면 너는 아마 멈추었겠지. 그렇지만 차유진, 나는 괜찮아. 너와 함께라면 지상에 오래 머무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까지 각오했으니 어찌하겠어. 그러니 그다지 아깝지 않아. 어차피 널 욕심 내게 된 이상 이제까지 수련해왔던 게 어느 정도 무용지물이 될 것은 예상했고.”
김래빈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한마디가 천계에 가야겠다는 차유진의 결심에 불을 지폈다. 김래빈이 너와 함께라면 지상에 좀 더 오래 머물러도 괜찮다고 못 박은 그때, 차유진 역시 선택했다. 저 존재와 함께 영원을 누릴 수 있다면 지루한 수련도, 천계의 답답한 규율도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그는 손을 뻗었다. 품 안에 넉넉히 김래빈이 안겨들었다. 지상도 물론 좋은 곳이지. 제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망설임 없이 입술을 대며 그는 속삭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기다려, 김래빈. 너무 오래는 아닐 거야. 나는 언젠가 반드시 너와 함께 천계로 가 상제의 허가를 얻어 짝을 맺고야 말테니까.”
천계에서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은 혼인이 본래도 가능하다는 걸 차유진이 알게 되는 건 좀 나중 일이다.
* * *
치열한 시간이 흘러갔다. 모년 모월 모일. 차유진은 제 식구들을 불러놓고 깊이 절을 올렸다. 인간의 몸으로 선인의 자격을 얻었다는 건 큰 영광이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이별이었다. 가족들은 울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날은 꽃비가 내리고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했다. 차씨 집안에서 신선이 나와 하늘에 올랐다며 마을 사람들은 그 후로도 두고두고 그날을 회자했다.
선인이 되어 천계로 올라온 차유진은 제 터를 닦으며 김래빈이 용이 되기를 기다렸다. 때로는 지상에 놀러 가 아직도 승천을 못 했냐며 그를 놀리고, 도를 닦는 이무기의 옆에서 나란히 정좌하여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치 그가 아직 인간이던 그때처럼.
김래빈의 머리카락은 수련을 거듭할수록 점차 희어지다 어느 날 티끌 하나 없는 새카만 색으로 돌아왔다.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용은 저를 기다려 준 이를 따라 지상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
새 용이 태어난 날, 둘은 손을 잡고 상제의 앞에 나아가 서로와 반려의 연을 맺고 싶다고 읍소했다. 선인과 용이 짝을 맺는 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어서 상제는 흔쾌히 허락하는 것도 모자라 제가 이어준 연이라며 길일까지 내려주었다. 김래빈이 지상에 머물러도 좋겠다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고 저 인간 놈이 소처럼 일할 내 부하 하나 데려간다 하며 울부짖었던 건 새카맣게 잊어버렸는지, 유능한 자를 하나도 모자라 둘이나 얻었으니 이것은 제가 앞날을 내다본 안배라며 혼례가 끝난 후 으스대었다는 건 상제의 긴밀한 측근만이 알았다.
선인과 용에게도 영원은 없었다. 그래도 둘은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23. 08. 02. 윶랩 즉석 교류회에서 카피본으로 배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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