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효] 녹턴 0-10
0. 광대(THE FOOL) = 유랑
정방향 :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생각 없음, 어리석은 행동, 별 볼 일없는 상태 등. 그외에 노이로제, 정신상황의 불안정, 어지러운 사생활, 여행, 방랑, 직업을 잃음, 무수입, 변덕, 무 목적한 상태
역방향 : 실수나 문제를 알아차림, 제정신으로 돌아옴, 목적있는 여행, 다음 목적을 위한 이직 등을 의미합니다. 희망이 보인다, 길을 바로잡다, 즐거운 여행, 집중할 수 있음
*
여자란 희한하다. 항상 편을 가르고, 어딘가에 소속되어있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소속되지 않은 이를 배척한다. 언제나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살벌한 교실에서 사물이나 선생은 의미가 없다.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학기 초에 이미 온전한 무리는 이루어져 있다. 같은 학교 출신, 이웃집 친구, 혹은 취미가 맞는 친구 혹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동떨어져있던 아이들이 우연찮게 모이게 된 경우.
친하다기엔 애매하다. 그저 이동수업 때, 급식시간 때 같이 다니지 않으면 튀니까 튀고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어울린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결국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평범한 친구 사이에서 나눌 법한 대화는 나누지 않는다. 관계는 일방적이다. 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가장 순하게 생긴 동그란 인상의 그 아이는 자신을 김효진이라고 소개했다. 언제나 기운차고 발랄했다. 아무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 정도로 친화력도 좋았다. 아마 그 애는 이 소름끼치는 교실에서조차 모든 애들이 자기의 친구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런 애가 이 무리에 속해있다는 것은 확실히 의아한 일이다. 김효진은 성격이 좋다. 아마 과반수 이상의 아이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을 것이다. 아주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닌 이상 자신에게 향하는 무조건적인 호의에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그런데도 김효진은 이 무리를 굳이 고집했다. 원한다면 어떤 무리에든 끼어들 수 있을 텐데도.
나머지 두 사람은 '아주 까탈스러운' 케이스였다. 김효진과 이름이 똑같은 박효진은, 추측컨대 김효진이 이 무리에 존재케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김효진의 옆에는 언제나 박효진이 있다. 이름이 똑같다, 어렸을 때부터 이웃 집이었다, 같은 학교 출신이다. 박효진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자랑하듯 소개하는 동안 박효진은 반응이 없었다. 서늘한 무표정. 언제나 그랬다. 김효진과 박효진은 언제나 붙어있었지만, 언제나 말을 거는 건 김효진이었고 박효진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목격한 반응다운 반응은 고개를 저은 것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내가 아는 박효진의 목소리는,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모르겠는데요', '못하겠습니다' 교사가 지목했을 때의 대꾸였다. 언제나 그 대응이 반복되자 어떤 교사는 날 무시하냐며 길길이 날뛰었고, 어떤 교사는 어르고 달랬다. 그러나 박효진은 한결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거나, 때리면 맞거나.
박효진에 대해 아주 예전부터 친구였다고 김효진이 말했을 때 손가인은,
“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조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김효진은 멈칫했지만, 이내 그 특유의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손가인과 박효진은 이단자나 반항아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적어도 손가인은 조금 더 사회성은 있는 반항아였다. 수업시간 쉬는시간을 가리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자기 일쑤였지만, 적어도 선생님의 지목을 받으면 대답은 한다. 책도 읽고, 누군가 말을 걸면 대꾸도 한다. 아주 간간히지만 자기가 먼저 말문을 틀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시비조이더라도. 그러나, 얼핏 박효진과 동류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이 둘은 상극이다. 나는 손가인의 박효진을 향한 노골적인 적의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때로는 교과서를 던지고, 때로는 우유를 부었다. 두 번 다 내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말리지 못했, 아니, 않았고, 박효진은 교과서를 쓰레기통에 버렸으며 우유가 머리 위에서부터 교복에까지 흘러내렸을 때는 뒤늦게 찾아온 김효진이 더욱 난리를 치며 화장실에 데려갔다. 그 날 박효진은 학교를 조퇴했다. 손가인은 나를 쳐다보았다. 얇고 붉은 입술이 움직인다. 나는 말야, 사실...
네가 제일 싫어.
손가인은 말했다. 방관자인 척 하지 마. 이 미친 공간에서 우린 가해자 아님 피해자일 뿐이야. 충혈된 눈이 나를 째려볼 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죄책감도 두려움도, 그저 생각했을 뿐이다. 아, 간파당했구나. 교실 안 무리 속에서 우리는 이단이었고, 누구보다도 중립에 가까운 위치에서 자연스레 느는 것은 눈치다. 우리는 예리하다. 다만, 눈을 감는 게 더 편안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손가인은 내 앞에서만 박효진을 괴롭혔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1. 마법사(THE MAGICIAN) = 창조
정방향 : 새로운 시작, 희망한 곳의 입학 혹은 입사, 창조력, 독창적인 생각, 강한 의지, 새로운 느낌의 연인, 공상력, 발명, 공부, 말을 잘함, 솜씨좋게 잘하다, 기술적인 것, 연극, 예능,취미, 숙달된 모양, 경험 많은 모습, 베테랑.
역방향 : 교활함, 속임수, 어눌함, 미숙함, 미숙한 기술, 학력이나 경험의 부족, 약한 의지, 연기되기 쉬운 상태, 믿음직스럽지 못함, 실수를 부르다. 지식과 기술의 부족, 잘못된 선택, 망설임, 제자리걸음의 사이.
*
“놔.”
“효진아.”
“놓으라고 했잖아.”
가볍지만은 않아보이는 실랑이를 보면서도 나는 박효진이 벙어리는 아니었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쥐고있던 쥬스 팩을 꽉 쥐자, 팩은 손 안에서 금세 우그러진다. 나는 멀리 떨어져있는 체육 선생의 눈치를 보며 운동장 바닥에 팩을 던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찌그러져 있는 팩을 다시 한 번 운동화로 짓밟았다.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나는 성만 다른 두 효진의 눈에서 당혹감이 교차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박효진은 입술을 꾹 깨물고 몸을 틀었다. 김효진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소란을 놓치지 않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반 애들 몇몇이 김효진을 에워쌌다. 학교에서 물증이 없고 심증만이 존재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대개 가해자는 정해져 있다. 편들어줄 사람이 적은 쪽이다.
당사자보다 더한 난리를 치며 박효진을 데려와서 사과시켜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왁왁거리는 년들이 있었다. 시끄러웠다. 일의 전후를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저렇게 일방적인 한 쪽의 편을 들 수 있는 것은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이들한테 살가운 김효진과는 달리 박효진은 그렇지 못했으니, 으레 성격좋은 쪽의 효진이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기 마련인 것이다. 김효진은 날뛰는 몇몇 년들을 겨우겨우 뜯어말리고 있었다. 저것도 병신이다. 실수든 고의든 맞기까지 했는데 감싸줄 마음이 드나. 누가 먼저 불씨를 뿌렸든 간에 변함없는 사실은 박효진은 때리고 김효진은 맞았다는 건데.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가방을 들쳐멨다. 어딘가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종이 치면 땡땡이를 칠 작정이었다. 오늘은 수업받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김효진을 둘러싼 무리들 중 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무리의 리더 격인 애였다. 죽으나 깨나 남자, 연예인, 화장 얘기밖에 모르는 애였다. 언젠가 자리 운이 더럽게 없었을 때 저 년이 내 앞 자리에 앉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꽥꽥거리며 고장난 기계처럼 줄창 똑같은 말만을 반복했고, 저 년의 따까리들은 또 그걸 좋다고 맞장구치고 앉았었다. 씨발, 한 마디면 닥칠 것들이 말끝마다 지저분한 말은 또 어찌나 섞어대던지. 내 귀가 다 썩어나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화장이 하얗게 뜬 그 년을 째려봐주자 금세 시선을 피한다. 좆도 없는 것들이 나대기는 더럽게 나댄다. 차라리 박효진처럼 조용한 게 낫지.
그러나 이내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박효진은 그냥 조용한 게 아니다. 사람 속을 긁어가며 조용하다. 말을 걸어도 씹고, 대꾸 한 마디 없는 게 들리는 걸 뻔히 아는데도 무시당하는 기분이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답답한 것도 정도가 있다. 계단을 오르다, 문득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걸린다. 조미혜는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을 시선을 교환하고 조미혜는 자리를 피하듯 안으로 들어간다. 아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주머니에서 아폴로를 하나 꺼내 물었다. 우리 학교 매점의 좋은 점은 추억에 젖을만한 불량식품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교문 옆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주저앉았다. 웬만해서는 들키는 일 없는 곳이었다.
2. 여교황(THE HIGH PRIESTESS) = 지혜
정방향 : 교양이 풍부함, 깊은 생각, 지식, 학식과 학력, 인텔리젼스, 고등교육, 전문교육, 꿈꾸는 마음, 로맨틱한 생각, 플라토닉 러브, 통찰력, 향상심(向上心)이 강하다, 깊은 지식, 정신적지주.
역방향 : 천박함, 공부를 좋아하지 않음, 깊은 생각없이 행동함, 속된 생각과 생활, 닳고닳음, 진학하지 않음, 상식이 없음. 프라이드가 너무 높다, 흥미없는 것에는 무지, 히스테리, 독신주의, 스트레스.
*
종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서, 깔고 앉았던 가방을 들쳐멨다. 주위는 조용했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고, 생각했는데. 아폴로 하나를 다시 꺼내 물고 익숙한 사람 둘을 쳐다보았다. 양호실이 있는 건물 앞에 김효진과 박효진이 있었다. 화해했나 보지? 역시나 그 나대기 좋아하는 년들의 참견은 별 도움도 안 된 모양이었다. 하긴, 사과를 시킨답시고 김효진 앞에서 박효진을 무릎꿇히기라도 하려 한들, 그 때는 그 성격좋은 김효진도 훼까닥 돌아서 그 년들 뺨을 후려갈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데, 지금 수업시간 아니었나? 뭐 신경쓸 바는 아니지만, 하고 발걸음을 틀려 했을 때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됐다. 여자 둘이서 입술을 부비는 희한한 광경 말이다. 벽 쪽에 밀어붙혀져 있던 박효진의 눈 감은 얼굴이 아주 잠깐 보였다. 신기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싶어서. 겹쳐져 있던 몸이 떨어진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박효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김효진은 몸을 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뛰는 소리가 건물 안으로 사라져갈 때까지를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효진은 양호실의 문을 열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가방을 내팽겨치고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 아폴로 봉지를 쑤셔박았다. 양호실로 향했다.
양호 선생은 기본적으로 학생에 대해 무관심하다. 뭐 굳이 따지자면, 이 학교 선생들이 대부분 그랬다. 교칙에 위배되는 일이 있으면 막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괜히 귀찮은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전혀 아프지 않아보이는 나에게 눈짓으로 침대 한 칸을 배정해준 것만 봐도 그렇다. 양호실의 공기는 무겁고 답답하다. 유독 뜨겁다. 종종 꾀병을 핑계삼아 이 곳에서 잠을 때우던 양아치들과는 달리 나는 이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금세 벽 쪽을 보고 누워있는 박효진을 발견한다. 박효진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조금 세게 앉았기 때문에 침대가 흔들렸는데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없다.
야.
박효진을 부른다. 조용한 양호실 안에서는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튀기 때문에 일부러 소리를 죽였다. 박효진은 무시한다. 몸이 반복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본인은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모습이 자는 척임을 안다. 내가 자주 했기 때문이다.
너 자는 거 아닌 것도 알고, 벙어리 아닌 것도 알아.
대답 안 해? 반은 협박조였다. 체념한 듯 박효진의 눈이 천천히 뜨인다. 박효진은 여전히 벽을 보고 있다.
일어나. 나와.
박효진이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앙문다. 귀찮은 일에 엮여버렸다고 어림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을 걸 구실을 제공해준 것은 어디까지나 박효진이다. 물론 김효진, 박효진 둘 다. 나는 박효진의 손목을 낚아채 일어선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백 퍼센트 따라오지 않았다. 그런 애니까.
3. 여황(THE EMPRESS) = 풍요
정방향 : 행복, 안정, 순조로움, 풍부함, 번영, 수확, 예술, 아름다움, 좋은 토지와 좋은 자연. 결혼을 암시하거나, 혜택받은 애정이나 결혼생활, 임신, 좋은 출산, 자식에게 봉양을 받음을 나타냅니다. 예술적 센스, 결혼, 임신, 다정하고 사랑스런 여성, 이상적 연애, 모성애.
역방향 : 어찌할 줄 모름, 집중력이 없음, 활동의 정지, 늦는 것, 불안정한 애정, 교만함, 사치, 질투, 임신의 연속이나 불임증, 사랑이 없는 맞선 결혼. 이혼, 불임, 지루한 육체관계, 절망적인 연애 혹은 결혼, 제멋대로인 지성이 없는 여성.
*
교사 뒷편,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담벼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박효진은 서 있는 채였기 때문에 앉으라고 권유할까 하다가 애도 아니고 앉고 싶으면 어련히 알아서 앉겠지 싶어 내버려뒀다. 나는 주머니에 쑤셔박아뒀던 아폴로 봉지를 꺼내 하나를 더 입에 물었다.
“너 김효진이랑 무슨 사이냐?”
“….”
뭐 딱히 대답을 요구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왜 싸웠냐?”
“….”
평소같음 무시하거나 괴롭히거나 둘 중 하나일 년이 이따위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못마땅하겠지. 나같아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박효진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지독할 정도로 대단한 포커페이스였다.
“효진아,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너 벙어리 아닌 거 알고 왔다니까. 중얼거리며 아폴로 봉지를 뒤적였다. 그리고 가장 안 쪽에 있던 희고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박효진의 얼굴에서 일순 당혹감이 어린다. 이런 걸로 놀라고 그래, 놀랄 건 아직 더 많은데. 내가 모범생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닐테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양호실 앞에서 김효진이랑 있더라?”
박효진이 흠칫했다. 나는 박효진이 그러한, '반응'을 보일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무슨 얘기하는지 이해해?”
다 봤단 얘기야. 그 순간 세상의 절망이란 절망은 다 짊어진 듯한 박효진의 얼굴은 퍽 유쾌한 것이었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은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박효진의 어깨를 잡고, 학교 외벽에 밀쳤다.
“나 지금 협박하는거야, 효진아.”
불쾌감으로 물든 표정, 그건 박효진이 내 앞에서 지었던 가장 솔직한 표정 중 하나였다.
“……냐.”
“크게 얘기해야지.”
“아무 사이도 아냐.”
“아, 그래.”
우리 효진이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입술을 부비는구나? 비아냥거리자 손이 날라온다. 자기도 모르게 한 짓일 것이다. 아마도. 박효진은 그런 일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깜냥이 못 되었다. 나는 그 손목을 잡고, 비튼다.
“누구나 다 김효진같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그딴 거 받아주는 건 김효진 뿐이야, 덧붙이고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버린 채 운동화로 짓밟았다. 침을 뱉었다.
씨발, 울음섞인 목소리로 내뱉는 욕지거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너무도 쾌청했다. 나는 처음으로 박효진을 보고 진심으로 웃었다.
4. 황제(THE EMPEROR) = 지배
정방향 : 권력, 수완, 유산, 힘, 지배, 남자다움, 행동력, 목적의 실현, 재산, 경제력, 뛰어난 장소. 경영자, 남편, 아버지, 장남, 정치가, 자신보다 지위 높은 남성을 가리킵니다. 리더적인 인물, 사회적인 성공, 출세, 독립심이 강하다, 권력.
역방향 : 무기력, 강하지 못함, 약함이 드러남, 행동력의 부족, 지배되지 않는 상태, 겉만 번드르함, 꾸려가기 어려운 경제력, 집안을 이을 수 없음, 신용을 잃음, 데릴사위, 차남이나 삼남을 가리킵니다. 행동력과 자신이 없음, 일의 실패, 좌천, 동료가 없음, 고지식, 애정을 강요.
*
연신 교복 소매로 눈가를 훔쳐내고 있던 박효진에게 아폴로 봉지를 내밀었다. 씨발, 씨발, 씨발. 반복해 내뱉는 욕설이 목소리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박효진은 아폴로 봉지를 뒤적이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거 주려고 한 거 아닌데. 박효진이 손을 까딱였다. 뭐, 하고 묻자 라이터, 하고 대답한다. 맡겨놨냐.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라이터를 꺼내 박효진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준다. 어설프게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예상대로 콜록거리며 심한 기침을 한다.
“병신.”
피우지도 못할 거 남의 담배는 왜 탐을 내, 탐을 내긴. 박효진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들고 몇 모금 마신 후 다시 땅에 버렸다. 박효진의 눈가가 빨갰다. 나는 가방을 들쳐메고 박효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박효진은 의외로 순순히 따라왔다. 멈춘 것은 교문을 나선 후였다.
“어디 가.”
여전히 훌쩍이고 있었다.
“집에.”
“가방…”
“넌 김효진 있잖아.”
네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 줄 걔 말이야. 박효진이 잠잠해졌다.
*
이젠 지쳤는지 포기했는지 박효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정했던 교복 마이는 어깨까지 흘러내려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다. 땀에 젖은 머리칼도 엉망이다. 그저 조금, 뛰었을 뿐인데 말이다.
“토할 거 같아.”
박효진이 내게 건넨 첫 마디였다.
“화장실 가서 해. 침대 더럽히지 말고”
“내가 왜 여기 있어?”
“따라왔잖아.”
너 생각보다 말 잘 한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생수통을 박효진에게 던져주었다. 자기가 앉아있던 옆에 떨어진 생수병을 주워들고 뚜껑을 따 들이킨다. 박효진은 반쯤 넋이 나가있는 상태 같았다.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조차 못하는 상태 말이다.
“걔랑 잤냐? 아니, 아니지. 걔랑 사귀냐?”
박효진이 들고있던 생수통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통, 하는 소리와 함께 페트병이 튀어오르고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든다. 아, 썅. 나는 나지막히 욕을 했다. 박효진의 양말이 축축히 젖어든다.
“어.”
저 말은 두번째 질문에 대한 응답일까, 아님 그걸 가장한 두 가지 질문 모두에 긍정하는 대답일까. 나는 티슈 몇 장을 뽑아 물 위를 덮었다.
“씨발, 다 했어, 다 했다고. 만족해?”
흐윽, 날카로운 음성 뒤에 이어진 흐느끼는 소리가 더 신경에 거슬렸다. 박효진의 감정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저 딴에는 최대한의 인내심 발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효진도 어지간히 대단한 인생을 살아왔구나, 혀를 찼다.
“김효진 불러줘?”
수업시간이고 나발이고 니가 부르면 올 텐데. 그러나 박효진은 고개를 젓는다. 나는 컴퓨터책상 앞 의자를 꺼내어 앉는다.
“걘 왜 그러고 사냐?”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5. 교황(THE HIEROPHANT) = 가르침, 원조
정방향 : 자애 깊음, 선량함, 관용, 동정심, 원조, 종교, 발전, 관혼상제, 공양, 좋은 행동, 공동으로 움직임. 고민의 해결, 자원봉사. 종교, 좋은 인연, 좋은 조언, 공헌.
역방향 : 지나친 행위, 자신을 너무 희생함, 관례를 무시함,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모양, 신앙심이 없음, 종교나 종파와 거리가 멈. 물질에 너무 집착함. 사기당함, 지킬수 없는 약속, 말이 지나치게 많다, 좁은 시야.
*
빨간색 염료에 담가졌다 나온 흰색 천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시뻘겋다. 추악하고 추잡하다.
*
“효진이는?”“몰라.” 박효진이 자리를 비운지 두 교시가 넘어선 후부터 김효진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불안을 한층 더 하게 하는 원인은 아마 손가인의 자리 역시 비어있는 탓일 거라고, 나는 막연히 예측했다. 쉬는 시간 어딘가를 갔다 돌아온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온 김효진이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한 말이 인상깊게 남아있었다. “양호실에도 없네.” 나한테 한 말일지, 혼잣말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나와 손가인, 박효진의 자리가 니은 자로 붙어있는 것과 달리 김효진의 자리는 제법 동떨어져 있다. 복도 쪽 앞에서 두 번째 자리. 달이 바뀔 때마다 시행하는 제비뽑기의 결과였다. 수업하는 내내 김효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뒤를 돌아보았다.
“있잖아, 미안한데 핸드폰 있어?”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나한테 달려와서 묻는다. 자기 주변에 있는 애들한테 부탁해도 흔쾌히 빌려줄텐데,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하지만 우리를 '필요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뭉치게 된' 무리라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김효진은 진심으로 '친구'라고 여기는 것 같으니까,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책상 서랍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 김효진에게 건넨다. 고마워, 김효진은 답지않게 힘없이 웃는다. 연결음이 울릴 동안 김효진은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통통 튀기는가 하면, 볼펜 꽁무니를 입에 문 채 잘근잘근 씹고, 이유없이 노트를 쭈욱 찢었다.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김효진에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다시 내게로 넘어왔다.
“너넨 좀 이상해.”
핸드폰을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김효진이 어? 하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쳐다본다.
“정상이 아냐.”
속은 어쨌든, 겉보기엔 친구란 사이로 엮여있는 사람한테 담담히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비롯해서 말이다. 김효진이 책상 옆에 걸어둔 가방을 든다.
“아아, 응, 그래.”
그럴지도, 하고 덧붙인다. 화난 것 같지는 않다. 김효진은 언제나와 같이 사람좋고 성격좋은 유한 태도로, 평범하게 '친구'가 건넨 '회화'에 '회답'을 했을 뿐이다. 나는 그런 반응이 박효진과 김효진을 묶어 설명할 때 정상적이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한테 나 아파서 조퇴한다고 좀 전해줄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효진은 자리를 나선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뻔했다.
6. 연인(THE LOVERS) = 결합
정방향 : 연애, 유혹, 삼각관계, 오락, 놀이, 레져, 불장난, 바람기 많은 태도. 두개의 길 중 어느 쪽을 갈 것인가를 강요당함. 고백의 성공, 이상적인 연애, 두사람중 하나를 택일할 시기.
역방향 : 실연, 잘못된 상대를 선택, 배신, 방해.
?
*
“미칠 거 같아”
한참을 울던 박효진은 진이 빠진 후에야 벽에 기대서 숨을 고르다가 중얼거렸다.
“이미 미친 거 아니었어?”
“김효진은?”
“부르지 말라며?”
“내가 언제...”
이젠 자기가 한 일도 기억하지 못 하나보다. 그럼 니가 전화하던가, 하면서 컴퓨터 앞에 놔둔 핸드폰을 박효진에게 던져주었다. 박효진은 교복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침대를 더듬거리다가 겨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침묵이 깔린 방 안에는 박효진의 미약한 숨소리만 들렸다.
“안 받아,”
안 받는다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박효진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은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진다.
“넌 김효진 없으면 못 사냐?”
“...”
“그게 친구, 아니, 사귄댔지. 근데 애인 사이라도 그런거 좀 이상하지 않냐?”
“알아”
박효진은 무릎을 끌어모아 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묻는다.
“있으면 짜증나, 화가 나고, 돌아버릴 거 같아.”
“근데 왜 같이 다니는데?”
“없으면 죽을 거 같으니까.”
왜?
대답은 없다. 나로써는 평생이 가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설명이었다. 아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 못 하지 않을까.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쟤네니까.
“김효진이 너의 뭔데?”
무릎에 얼굴을 묻은 박효진은 몸을 좀 더 웅크린다. 그리고 대답한다.
“전부.”
인터폰이 울렸다.
7. 전차(THE CHARIOT) = 승리
정방향 : 승리, 영광, 개척정신, 독립, 지휘, 사랑의 성리, 라이벌과의 경쟁에서 승리, 최고의 성적
역방향 : 패배, 허약. 트러블, 전쟁, 전의 상실, 제자리걸음, 좌절, 능률저하, 성급함
*
나는 빨간색이 싫다.
*
“효진아,”
김효진은 성급하게 방 안으로 발을 내딛고, 나는 그 뒤를 좇는다. 박효진은 고개를 들고,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냐?”
“저번에.. 온 적 있었잖아.”
“그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김효진의 손에 시선이 멈춘다, 나는 웃었다.
“전부일만 하네.”
박효진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집에 가자, 이제.”
김효진의 손을 잡고 박효진은 일어선다. 김효진은 고마워 가인아, 하고 인사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만한 일을 했나? 오히려 뺨을 맞으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박효진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나니까. 김효진에게 몸을 의지해 자리를 나서려던 박효진이 고개를 돌리고 우리는 일순 눈을 마주친다. 박효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배웅까지 해 줄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닫히는 소리가 나고, 잠기는 소리까지 났다. 물에 젖은 축축한 휴지뭉치를 집어들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서랍 문을 열어 담배 한 갑을 꺼내 베란다로 나갔다.
날씨는 맑고, 밖은 평온했다. 오늘 아주 잠깐 내 인생에 끼어든 비일상만 아니라면.
지랄하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박효진의 달싹이는 입모양이 기억 속에 스친다. 병, 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이윽고 크게 소리높여 웃었다. 그리고 담뱃갑을 던졌다.
8. 힘(THE STRENGTH) = 의지
정방향 : 의지, 정신적인 힘, 용기, 결심, 전력투구, 신념, 불굴의 정신, 고난을 극복한 사랑, 확신, 열성, 도전적 태도
역방향 : 나약, 정신적 압박, 겁쟁이, 체념, 인내력 부족, 자신감 상실, 거짓말쟁이, 체력부족
*
딱 셋만 세는 거야 효진아, 그럼 다 끝나있을거야.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그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밖은 어두웠고 공기는 습했다. 집 안에 있는 건 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하나, 나는 베갯잇을 쥐었다. 둘, 허리를 틀었고, 셋, 기어코 너의 등에 상처를 냈다. 나는 내가 너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다.
“이게 당연한거야?”
“이게 당연한거야.”
세상을 재는 나의 기준은 오로지 너였다. 네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었고 그르다고 하면 그른 것이었다. 땀에 젖은 너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무서워..”
아득한 어둠에 대한 공포를 토로했다.
“울지마.”
“..왜?”
“네가 울면 내가 힘들어.”
*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몸을 튼 손가인이 우유곽을 쓰레기통에 던졌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곽은 정확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 작고 나지막한 탄성이 들렸다. 커피우유네.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불만 있어?”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안 마시는 줄 알았어. 커피우유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물론 안 변하는 것도 있지만. 그치 효진아? 손가인은 의자를 뒤로 기울이며 박효진의 책상에 기댔다. 박효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오늘따라 안색이 창백했다.
“날씨가 구리네.”
창 밖을 바라보며 손가인이 중얼거렸다. 새벽부터 내리는 소나기는 여지껏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산 가져왔냐?”
어느 날을 기점으로 손가인은 박효진에게 말을 거는 횟수가 늘었다. 그래봤자 반응은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던가 젓던가, 두 가지로 나뉠 뿐이었지만. 박효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종 아예 침묵으로만 일관당하는 김효진이나 교사들에 비한다면 훨씬 나은 수준이기는 했다. 나는 박효진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하긴 넌 김효진이 알아서 하겠지.”
손가인의 시선이 옮겨간다. 우리는 눈을 마주친다. 넌? 나는 손가인이 내게도 그렇게 물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있긴 한데.”
“씌워줘.”
그런 부탁을 받으리란 것도 말이다.
9. 은둔자(THE HERMIT) = 탐구
정방향 : 사리분별, 어드바이스, 숨겨진 지혜, 진중함,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과의 만남, 학업, 진리의 추구. 전문가, 사리분별의 정확함, 고독을 즐긴다, 냉정침착, 노력.사람들로부터 떨어진 토지.
역방향 : 무분별, 경솔, 종은 어드바이스가 통하지 않음, 어드바이스를 듣지 않음, 부도덕, 어리석음, 무학. 도움이 안되는 공부와 연구, 독립을 하나 동료가 없다, 미숙, 사람이 해결할 수 없다, 비밀누설의 위험, 불순한 동기 혹은 의심.
*
“씨발, 죽여버릴거야!!”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소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깨어지고 부숴지고 넘어지고, 나는 지금 발광을 하고 있는 단발머리의 여자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손가인의 말대로라면, 가해자와 피해자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 미친 공간에서 오롯이 동정만을 받을 수 있는 완벽한 피해자. 였으나 지금 막 가해자가 된.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단발머리의 여자애 앞에 쪼그려앉은 또 한 명의 여자애는 날라리였다. 흔한 말로 일진이라고 하던가. 아무 때나 자도 되고, 수업을 빠져도 되고, 삥을 뜯어도 되는, 교실 안을 서열로 구분짓는다면 맨 위에 존재할 상위포식자. 얼굴을 감싸쥐고 있던 손 너머로 진득하고 붉은 피가 스며나오자 날카로운 비명들이 또 한 번 울린다. 난장판이었다.
“개같은 년, 씨팔, 좆같은 년..”
사람이 정신이 나가면 저렇게 될 수도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의자를 집어드는 단발머리 여자애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쪼그려 앉아있던 여자애는 덜덜 떨면서 간절하고 비굴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는다. 시선으로 도움을 청하지만, 우정은 생각보다 얄팍했던 모양이다. 결국 친구 따위가 상처입는 것보다 내가 상처입는 게 더 두려운 존재들 뿐인 것이다. 단발머리 여자애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했다. 저 애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같은 교실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그마저도 기억이 희미했다. 알고있는 건 전형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애라는 것 뿐이었다. 이유없이 도태되고 배제되는. 뭐 하나 모난 구석이 있는 것도 특출나게 튀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무시당했던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 편들어줄 사람-이를테면 박효진의 김효진처럼-이 없었다. 둘, 그렇게 당하는 애가 있어줘야 '내'가 안전하다.
단발 여자애의 팔은 곡선을 그린다. 의자가 손에서 떨어지고, 다시 한 번 비명소리가 울린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서늘하고 날선, 또한 낯선 목소리였다. 일순 공기가 얼었다. 오랜만에 듣는 박효진의 목소리였다.
“시끄러.”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면서 박효진은 단발 여자애의 팔을 잡았다. 그 애는 오열한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찢겨진 교과서, 성적 희롱이 담긴 낙서, 수시로 도둑질을 당하던 자물쇠 달린 사물함, 우유에 젖은 체육복. 가끔씩 손가인이 박효진에게 했던 괴롭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열하고 악질적이었던 행동들이 그제서야 기억을 스친다. 지금까지 기억을 못했던 이유는 아마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와앙, 조용한 교실 안을 울리는 높고 큰 소녀의 어린아이같은 울음소리는 족히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애가 이렇게 폭발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언제까지나 얌전히 당해줄 뿐 이런 봉변은 상정하지도 못했으니 지금까지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죄책감조차 없이 해왔던 것일 테다.
“닥쳐, 제발.”
박효진은 단발 여자애의 팔을 이끌고 교실 앞 문 쪽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등을 떠밀어 내보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의자를 맞고 쓰러져있는 여자애 옆에 나뒹굴던 의자를 집어들고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의자를 책상 안으로 넣으면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답지않게 유독 싸했다. 바닥은 흥건하게 피로 젖어들어 있었다.
“저거 어쩔거야?”
누구한테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전에, ‘저거’로 일컬어진 대상에 대한 위화감에 더욱 기분이 야릇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서. 이런 급한 때조차 서로 눈치만 보는 교실 안의 인간이란 생물체가, 욕지기가 일 만큼 역겨워졌다.
“구급차 불러.”
손가인이 쓰러져있는 여자애와 자주 붙어다니던 애를 지목해서 말했다. 혼자만 태연한 목소리였다. 이런 기이한 광경이 다 있나. 나는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손가인이랑 박효진을 보고 가장 인간같다고 느낀 것이.
10.운명의 수레바퀴(THE WHEEL OF FORTUNE) = 윤회
정방향 : 전진, 행운, 발전, 종은 미래, 과거의 사건이 미래에 이어짐, 돌연 날아드는 찬스, 운명적인 사건. 찬스가 온다, 행운과 우연이 동료, 훌륭한 변화, 새로운 만남, 운명적인 일 혹은 만남.
역방향 : 실패, 불운, 불행, 마이너스의 면이 나옴, 타성으로 해나감, 숙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함. 예상외의 실패, 기회를 놓치다, 운의 부족, 안좋은 인상
*
인생이란 건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엿같은 거야. 그건 네가 있고, 또 내가 있기 때문이겠지?
*
“너는 언젠가 날 미워하게 될거고, 어쩌면 치를 떨게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래도 난 널 사랑할거야.”
손등에 맞닿은 너의 입술은 언제나 부드러웠다.
*
“걔 이름이 뭐야?”
“뭐?”
“단발머리 여자애…”
“몰라.”
알 게 뭐야? 분명 우리는 같은 프레임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손가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다. 나는 내가 꿈을 꾼 걸까, 하고 생각했다. 지독한 악몽. 그리고 그 악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 우산 아래에 존재하는 손가인과 나라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어쨌든 걘 낼부터 학교 못 나올걸.”
“..왜?”
“애를 반 죽여놨잖아.”
“그치만 먼저 괴롭힌 건,”
“뭘 모르네. 가해자가 가해자 아닌 척 하려면 제일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거.”
추리만화 같은 데서도 자주 나오잖아, 젤 중요한 건 증거인멸이라고.
“너무 티나게 미쳐버려서, 조용히 처리했음 자기가 피해자로 끝날 수 있었는데 순식간에 가해자가 돼버렸어”
“그건 참.. 이상하네.”
어제의 피해자가 지금껏 억눌렀던 감정을 토해내자마자 가해자로 돌변했다. 그럼 뭘 어떻게 했어야 할까. 계속 그 저열한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었어야 했나? 선생은 이 학교의 경우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부모한테 도움을 청해야 했을까? 이딴 학교에 자식을 집어넣는 부모 중에 멀쩡한 작자가 있으려고.
“그래도 뭐, 학교를 때려치더라도. 본인은 속 시원하지 않을까?”
손가인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물론 남의 이야기지만. 아마 그 애에게 자신의 모습을 대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손가인이라면 그런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애에게 내 모습을 대입할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나는, 아마 의자를 집어들기보단 커터칼을 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야, 저기 궁상떨고 있는 거 내가 아는 애들 맞냐?”
우산을 고쳐쥐었을 때, 손가인이 어딘가를 턱짓했다. 나는 그 곳을 쳐다보았다. 김효진의 손에 들려있는 검은색 3단 우산, 비에 폭삭 젖은 채 마주보고 망연히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의 소녀 둘.
“꼴불견이다.”
김효진이 박효진의 손목을 잡아당겼을 때, 우리는 그 앞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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