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픽션3
Helium(1)
늘 그렇지만 두루뭉술하게 쓰는데다 과거날조 있음.
+) 문체 고친답시고 자꾸 뭐 의식하지 말고 쓰는대로 쓸까 고민중이다…
야쿠모는 방금 막 팩스로 도착한 따뜻한 서류 한 장을 손에 든 채로, 반바퀴 돌아 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퀴달린 의자의 서스펜션이 인간의 몸무게대로 고스란히 출렁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사무실 안을 요동치며 울려퍼졌다. 야쿠모는 시선을 종이에 고정한 채로, 눈가 언저리까지 길어버린 제 버석거리는 마르고 검은 머리의 뒤통수를 벅벅 문질렀다. 옆머리 약간을 고정한 은빛의 역삼각형 머리핀이 쏘아보낸 미미한 반사광이 발작적인 손짓을 따라 칼을 휘두르는 양 마구잡이로 온 벽면을 그어댔다. 그것도 잠시, 금새 우뚝 멈춰버린 손가락을 따라 머리핀이 얌전히 내려앉았다. 야쿠모가 조용한 사무실에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팩스의 요지는 간단했다. 하나, 소방법이 바뀌었다. 실질면적 15평방미터 이내의 원룸도 소형 소화기를 비치해야만 한다. 둘, 새 법은 소급적용된다. 여기까지는 사내 법무팀의 검수를 거친 확실한 정보이며, 근처 원룸에 거주하는 그에게도 마뜩찮고 성가시지만 유용한 정보였다. 셋, 이에 따라 지사에서는 각 소규모 플레이트에 거주하는 주민들로부터 동의서를 작성받아 각 가정에 폐사 제품인 소형 소화기를 무료 배급하고자 한다. 넷, 그러니까 받아와라. 야쿠모는 머릿속에 이름을 떠올리기도 싫은 자신의 빌어먹을 과가 홍보부의 지방 특화 파견형 분과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야쿠모가 익숙하게 무게중심을 실어 다시금 의자 등받이에 몸을 메다 꽂았다. 의자는 요란하게 용수철과 댐퍼 찌그러지는 소리를 뱉어내며 넘어질듯 기우뚱거리던 몸체를 반작용으로 도로 세우고는 고작 아주 약간 뒤로 밀려났다. 사무실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책상 위에 앉아있던 작은 마스코트 인형이,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의문이나, 입을 열었다.
“짜증 다 냈어?”
“왜 직원은 제 돈 주고 사야 하는 건데. 직원 할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거기가 짜증 포인트?!”
“태클 걸지 마라, 큐모스. 나 기분 안 좋으니까.”
“끼긱끼긱 팩스 인쇄잉크 찍히는 소리에 야쿠몽의 마음도 꾸깃꾸깃.”
“정말 쫙쫙 찢어버리고 싶다.”
“오옷. 해버려, 해버려. 의사가 하는 시튜브 채널에서 그러는데, 종이 찢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좋대!”
“찢어서 어쩔 건데. 시키는 일인데 해야지.” 야쿠모가 서류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근데, 그거 어떻게 해? 집집마다 가서 물어봐? 똑똑. 누구세요? KMS 생생더스트시티과에서 나왔습니다. 그거 아세요? 뭘요? 소방법이 바뀌었다는데요? 네에에에에에에? 정말요오오오오오오?”
큐모스가 솜인형 몸뚱이의 하얀 겉옷자락을 펄럭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라서는, 자리와 목소리를 빙빙 바꿔대며 장난치듯 상황극을 펼치기 시작했다. 야쿠모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큐모스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미쳤다고 그걸 어느 세월에 가가호호 돌려. 그건 최후의 수단이고.”
“그럼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걸까나?”
“찾아봐야지….” 야쿠모가 반으로 접은 서류를 한번 더 반으로 접으며 말 끝을 흐렸다.
“오오, 이제 좀 관록이 느껴지는데? 방법은 찾으면 있다!” 큐모스가 공중에서 한바퀴 빙글 돌고는 과장되게 두 팔을 펼쳐올려 으쓱거리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요란하게 굴지 좀 마. 하아, 상업지구 안내사무소에 물어봐야하나.”
“좋았어, 아주 힘찬 대답이군! 이 사축 녀석에게 안내방송 한 세트 건네 주도록!”
“그런 건 또 대체 언제 배운 거야? 단말 잠금 패턴을 바꾸던가 해야지, 나 참.”
“미션 임파서블!! 보안 단말의 잠금을 풀어라!! 빰빰빠밤 빰빰빠밤~”
야쿠모는 허공에서 의기양양한 만세 포즈로 의욕을 불태우는 하얀 솜인형을 상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야 주상복합이지만 원래 직원 거주시설이었으니 거주구역쪽에도 관리사무소랄게 있다던가 하겠지.”
“그럼 거길 가면 거주구역 전체에 한꺼번에 얘기할 수 있는 건가?”
“문제는 그래서 그걸 어디다 물어서 확인하냐는 거고.”
“응, 그리고?”
“나는 지부장이 싫다.” 야쿠모는 이 말과 동시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으메, 멋져부러.”
“야, 그건 또 언제적… 어휴, 됐다.”
“삐삑, 감다뒤 디텍티드. 요즘 레트로가 유행인 거 몰라?”
“내버려두면 우리 할머니가 쓰던 50년 된 너덜거리는 합성가죽 비즈 버클 벨트도 레트로라고 두르고 다니게? 뭐가 정도껏이어야지.”
“그게 뭐야? 진짜 있어?”
“내 것도 아닌데 지금도 있는지 어떻게 알아.”
말을 마친 야쿠모는 책상 가까이로 의자를 바싹 당겨 앉으며 모니터 패널에 손가락을 대고 밀며 이리저리 화면을 움직였다.
“뭐 찾아?” 큐모스가 물었다.
“관리사무소도 관리사무소인데… 생각해보니 그게 있으면 좋을 것 같단 말이지.”
“그거?”
“구조도. 하다못해 소방용 비상탈출안내도라도.”
“있잖아,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큐모스가 분홍색 모자를 쓴 구름같은 모양의 머리통을 야쿠모의 어깨 윗께로 들이밀며 말했다.
“안 돼.” 야쿠모가 아랑곳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꾸했다.
“관리사무소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는 건… 관리비가 나간다는 거잖아? 그럼 여태는 어떻게 했어?”
“더스트 시티 플레이트의 관리 주체는 회사인데다, 발령나면서 수당 나오고 업무비 처리됐으니까, 몰라.”
“뭐뭣… 그럼 생활비 빼면 따박따박 통장에 월급이 그대로 꽂혔단 소리?! 시튜브에서 본 자린고비 황금저축생활의 환경이었단 말이야아~?”
“그딴 거 모르거든? 너 대체 뭘 보고 다니는 거야?”
“30대 남성이 많이 보는 추천 채널?”
“보안 폴더라도 만들어야지, 이거 안 되겠네.”
“뿌뿌~ 야쿠몽은 심술쟁이.”
“한 살짜리 신생아는 얌전히 키즈 어플이나 가지고 놀아.”
“우우, 야쿠모는 큐모스에게 거미소년과 얼음공주 시리즈를 허하라!! 일폰 일야쿠모 독재 반대!!”
“그건 또 대체 뭐야?”
“상원 깃발과 하원 깃발을 반반 섞은 쫄쫄이를 입은 거미소년과 금방 녹는 얼음 드레스를 입은 얼음공주가 변기가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에 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항상 변기가 폭발하고 드레스가 녹고 거미소년이 반으로 잘려. 유명한 영화래. 3분밖에 안 하는데 엄청 많다?”
큐모스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야쿠모는 여전히 한 손으로는 이 문서 저 문서 띄워가며 모니터를 스크롤링하는 한편, 빈 손으로 자신의 단말을 잡아끌고는 이따금씩 내려다보며 급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 잠시간 길게 야쿠모의 시선이 단말에 머물렀다.
“재밌지?”
“너는 남의 단말로 대체 뭘 처 보고 다니는 거냐?”
최근 시청 동영상을 재생 도중에 끈 뒤, 야쿠모가 모든 시청기록 삭제 버튼을 누르고는 고함쳤다.
“야, 웃기지 말고 ‘딩동댕 스트리트’ 같은 거나 보란 말야. 이게 왜 자꾸 어디 헛도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얼레리꼴레리, 히멜 채널 시청기록도 없어졌대요.”
“너도 제발 잠깐이라도 없어져 보는 게 어때!”
“붸에에.”
큐모스가 제대로 된 대답 대신 빽빽한 자수로 이루어진 솜인형의 눈과 입의 어딘가에는 있을 가공의 혀를 쭉 내미는 소리를 내며 저만침 먼 사무실의 어중간한 허공으로 멀찍이 떨어져갔다.
“찾으러 못 가니까 사무실에서 나가지는 마.” 야쿠모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건성으로 일갈했다.
“흥이다!” 새침한 대답과는 다르게, 큐모스는 그 자리 허공에 붕 뜬 채로 무중력상태처럼 빙글빙글 위아래를 뒤집어가며 돌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회사 문서 폴더의 하위 디렉토리를 뒤적거리던 야쿠모는 대강 몇가지 문서의 복사본을 만들어 새로운 폴더로 빼 모았다. 새 폴더에 적당한 이름을 적어 붙인 그가 습관적인 하품과 기지개를 켠 뒤였다.
“지루해.” 큐모스가 허공에 둥실둥실 흘러다니며 중얼거렸다.
“그럼 뭐 일이 별거냐.”
“지난번에 봐놨던 목베개를 사는 건 어때?”
“다음 달에.”
“왜?”
“넌 몰라도 돼.”
“우리 사이에 비밀 없기로 했잖앙, 자•기•양~”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뿝뿌뿌~”
대화를 끊어버리듯 구식 키보드의 타건 소리가 이어졌다. 그 지루한 손가락 노동의 소음을, 큐모스는 견디지 않았다.
“야쿠몽은 말야, 왜 애인이 없어?”
“뭐?”
“결혼은?”
손을 멈춘 야쿠모가 고개를 들어 어슷하게 모니터에 반쯤 가려진 큐모스를 향해 시야의 초점을 옮겼다. 큐모스의 등 뒤로 어둑한 실내를 그나마 밝히는 몇 안되는 실내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야쿠모는 어쩌면 처음도 이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감상을 떠올렸다.
“너, 결혼이 뭔지나 알아?”
“사랑하는 사람이랑 이러쿵 저러쿵? 섹스도 하고?”
“무슨 기대를 말아야지.”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건 별로 좋지 않댔어.”
“설명하면 이해는 하냐?”
“노력은 해 볼 수 있잖아? 다시 생각해보면 별다른 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그게 단순히 내 마음가짐에 달린 일일 때야 그렇겠지.”
“그럼 뭔데?”
“허수아비한테 하는 고백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하면 그만이라고.”
“그럼 맘에 맞는 상대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한 살 배기의 논리 구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쾌락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냔 말이다. 끝.”
“혹시 그거야? 경제적 수준이 맞는 상대와 필요에 의한 결합을 원한다는 합리주의?”
“그런 거 아니야. 끝.”
“그럼…”
“끝이라고!” 야쿠모가 고함쳤다.
“그럼 뭔데? 얘기를 해야 알지.”
야쿠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하면, 그럼 뭐. 알아는 듣냐?”
“적어도 지금처럼 얘기만 꺼내도 화가 날 일은 없지 않을까?”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혹시 여자들한테 인기 없어서 그래?”
“맘대로 생각해.”
“그럼 뭐야?”
“대체 왜 갑자기 연애 타령인데?”
“지루하잖아. 이런 순간에 연락 한줄이라도 딱 올 곳 있으면 너도 표정 좀 펴고 살 수 있을 거 같단 생각 안 해봤어?”
“솜인형주제에 뭘 안다고…. 밥먹듯이 야근하는데 대관절 연애를 언제 해?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반년만에 차이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서로 사정이 다양하니까 누군가와는 맞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잠깐 스쳐지나가는 인생의 한순간만이라도 말야. 인생은 짧으니까 뭐든 하고 보자고들 하잖아? 즐겁게 살자!”
“연애까지는 그렇다 쳐도, 적어도 결혼은 거기서 빼. 그리고, 이제 전화 할 거니까 조용히 해.”
“알겠어.”
곧 사무실 업무용 구식 유선 전화기의 수화기를 집어든 야쿠모가 큼직한 숫자 버튼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연결음에 뒤이어 수화기 너머로부터 큐모스에게도 어렴풋이 들릴 정도로 큼지막한 낡은 기술이 쏟아지는 그 다음을, 야쿠모가 이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이어받았다.
“예, KMS **지사 홍보부 생생더스트시티과의 야쿠모입니다. 혹시 지금 소장님 계실까요? …아, 그럼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요? 예예. 예, 소장님. 아, 다름이 아니고 저희가 이번에―”
얼마간의 통화, 몇 시간의 서류 작업, 그리고 얼추 정시 퇴근 비슷한 것을 하고, 야쿠모는 닫히는 문을 등 뒤로 한 채 발 옆구리를 비벼 신발을 벗는 한편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끌러내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방을 옷걸이에 던져 걸었다.
“하아…” 야쿠모가 긴장이 풀린 긴 숨을 내뱉었다.
“퇴근! 퇴근이다! 빠라빠빠빠~”
그 사이로 신나게 어딘가의 CM송을 읊으며 허공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큐모스를, 야쿠모는 적당히 손을 내저어 날파리 내치듯 쫓아내고는 단말 화면을 모니터로 캐스팅해 출력시켰다.
“『수고히멜~ 아, 방송만 미리 켠 거야. 오늘 컨텐츠 시작은 예고한 대로 10분 늦어요~』”
“수고큐모스~”
“오랜만에 안 늦었군.”
야쿠모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느물느물하게 비웃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사는 거지.” 그가 중얼거렸다.
큰 모니터를 마주하고 침대 가장자리에 양 다리를 꼬아 앉은 그의 허벅지 위로 큐모스가 내려앉았다.
“오늘은 뭐 한대?”
“오컬트풍 RPG.”
“오컬트? 그게 뭐야?”
“비과학적인 미신. 귀신 나오고, 초능력자 나오고. 악마 소환도 하고. 음모론도 나오고. 아무튼 뒷골목 뭐 그런 거.”
“악마 소화아아안?! 그거 완전 재밌겠다!”
“난 내 눈 앞에 있는 거 하나로도 벅차니까 꿈도 꾸지 마.”
“앞에? 악마가 있어? 어디어디?”
“너 말이야, 너!”
“뿌뿌~ 나처럼 귀엽고 깜찍한 악마가 어디있다고!”
“그게 제일 악마같은 부분인데 말이야. 끔찍한 내용물을 대충 생긴 외관으로 덮어놓은 거 말야.”
“에에엥~ 그런 게 어딨어. 귀여우면 귀여운 거지. 이몸이 귀엽지가 않아?!”
야쿠모는 투덜거리는 큐모스를 외면하듯 그대로 옆으로 드러누워 화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라디오에서는 여느 택시답지 않게 제법 요란한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뱅오클리프가 *****의 스튜디오에서 보내드립니다!』” 스튜디오 내의 요란한 환호소리에 이어 DJ가 말했다. “『최신 트렌드의 트랜스 음악을 가장 먼저 접해볼 수 있는 곳, 여기는 바로 트•랜•스•국!』”
요란한 음악소리가 이어졌다. 야쿠모는 내심 안도했다. 이런 요란한 음악을 뚫고 말을 거는 운전기사는 없겠지.
“학생, 학생 맞지?”
“예?”
“아니, 얼굴이 앳된데… 혹시 학생인가 싶어가지고.”
“아, 예에… 곧 졸업이기는 한데.”
“그랬구만. 그런데 학생이 무슨 일로 ***을 다 가?”
“예? 아, 뭐… 그럴 일이 좀 있어서요.”
“뭐 가족이라도 있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일이 좀.”
“그렇구만.”
야쿠모는 팔에 턱을 괴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영 착잡했다. 창 바깥으로 가로등과 전봇대가, 행인이, 연석이, 가로수가, 골목이, 쓰러진 자전거가, 후미진 구 도심의 폐건물이, 다시 골목이, 주마등처럼, 기억나는 얼굴들처럼, 식은땀처럼, 찰과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에어캡에서 하차한 야쿠모는 낯선 거리를 둘러보았다. 먼 기억처럼 흐릿한 인상의 장소에서 분명하지 않은 충동적인 목표가 그를 잡아끌었다. 지정된 장소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살피고는 조용히 사서함의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유일한 내용물이었던 알약 몇 개가 든 작은 지퍼백을 챙기고, 얼마간의 현금을 그 비닐 대신 비치하고는 다시 조용히 사서함을 닫아걸었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으로 튀어나가기를 몇분, 흐릿하고 어둑하고 시끄러운 큰 방 한구석에서부터, 고요하고 허름한 방 안에서 너무 앳된 얼굴이라 공포스러웠던 소녀의 얼굴에 이르기까지, 지워진 지난 과정들이 드문드문 떠오르는 틈새로 날선 햇빛이 눈꺼풀 틈새로, 혹은 종아리와 발목을 태우고 붙잡아 묶듯 뜨겁게 그의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야쿠모는 눈을 뜨고는 몇분간 벙 찐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천장이라고 할 뻔?”
“시끄러워.”
“자는 내내 엄청 끙끙거리더라.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알 게 뭐야.”
그는 단말을 집어들어 요일을 확인했다. 온전한 휴일임을 확인하자마자, 야쿠모는 내팽개치듯 도로 팔을 내려놓았다.
“야, 큐모스.”
“응? 왜?”
“뭐같냐.”
“뭐가?”
“왜 이렇게 기분이 *같은지 모르겠다. 이유가 뭐같냐.”
“으음~ 방송 보다 잠들어서 악몽을 꿔서~?”
야쿠모는 조용히 손등으로 양 눈을 가로질러 덮었다. 이젠 그걸 악몽이라고 어디 구석으로 때려 쑤셔박으면 되겠군. 그는 생각했다. 눈꺼풀의 안쪽으로 앳되고 어린 얼굴이 볼록거울에 맺힌 상처럼 왜곡되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말로는 못다할만큼 처참하기 짝이 없는 기분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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