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것이 이 편지의 제목이다
이드실라에게
※ 1차.
※ 허락 없는 발췌를 금합니다.
없는 것이 이 편지의 제목이다
먼저 말해두겠는데, 난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도 이렇게 얌전한 인삿말은 안 써. 그런데 “어이, 잘 지내셨는가” 따위로 서두를 열면 당신이 아니꼬워할 게 뻔하니 구태여 고리타분한 인삿말을 넣은 거라고. 기특하게 여겨도 좋아.
지난번 편지에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해안가에 들렀다가 다시 중부 평야로 돌아왔다고는 말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벌써 달포 전의 일이 됐지. 받는 사람이 당신이라 털어놓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해 목장이 별로 고향처럼 느껴지지 않아. 그렇잖겠어? 칠 년 동안 전쟁터에서 구르다 왔으니 너른 목초지 따위가 익숙할 리 있겠느냐고. 처음엔 내 동생 얼굴도 못 알아볼 뻔했어. 부모님은 그새 많이 늙으셨더군. 아직도 그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만강하신지요? 여러분의 살인자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뭐, 이제 양을 칠까요? 늑대 잡는 일이면 더 좋겠군요.” 젠장. 우습군.
그러고 보니 당신 고향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어. 폭풍 숲 말고 그 전에 살던 곳 말이야. 당신에게는 너무 까마득한 일인가?
하여간, 원래는 여기서 오십 일쯤 드러누워서 게으름 피우다 갈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은 보름도 안 돼서 파기했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지금은 쭉 서쪽으로 가는 중이다. 바위산이 나올 때까지는 계속 가 보려고. 아주 편해. 해 지는 곳으로만 걸으면 되는 셈이지. 지도 없이 걷는 중이라 정확히 어디라고 짚어 말할 수는 없겠어. 요새 들르는 마을에 간간히 난쟁이들이 섞여 있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멀리 온 것 같아. 서쪽으로 갈수록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데 동쪽에 뭘 두고 온 건지 알 수가 없군. 내 짐은 언제나 가볍고 길벗은 늘상 말 한 필 뿐이니까.
당신, 이드실라. 내가 일전에 괜찮지 않은 일은 괜찮지 않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기억하나? 여기 오는 동안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봤어. 난 그위디온이나 당신처럼 경력 쌓인 레인저들이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처럼 구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왜들 그렇게 담담한 거야? 안 어울리게 웬 점잖은 척이냐고?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냐는 둥, 화를 내 봤자 뭐가 달라지겠냐는 둥, 그리고 나서는 한때 전부였던 것을 미련없이 놔 버리지.
나도 알아. 미련 가진들 뭐가 달라지겠어? 내 말은,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거야. 당신들은 물 먹은 장작 같아. 옆에 있으면 연기만 매캐하고 도무지 언제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자꾸 지랄 같은 헛소리만 지껄이게 되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환장할 노릇이로군. 썩을 놈의 전쟁이랑 당신 다리 얘기 말인데, 이제 다시는 꺼내지 않겠어. 괜찮다는 인간에게 당신 도대체 왜 괜찮은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얼간이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 그런데 제기랄, 난 당신들이 체념한 꼴 보는 게 정말이지 끔찍한 모양이야.
편지가 아니라 쓰레기가 돼 버렸군. 다시 써 봤자 똑같은 꼴일 테니 그냥 부쳐야겠어. 답장하려거든 바위산으로 보내. 그때까지 난쟁이 친구나 한 명 사귀면 좋을 텐데.
폭풍 숲에 안부 전해 줘.
오스퇴가르드.
추신. 여기서 기른다는 담뱃잎을 얻었어. 잎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나더군. 씹는 담배로도 쓴다는데…… 여하간 여행 선물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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