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싸우고, 사랑하라! 1

양키 쪼빵

백업 by 옥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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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쾅.

그 노크소리는 평범하게 살아온 전영중의 인생을 뒤엎는 서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열어줬지.

Eat, Fight, Love!

퀴퀴한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30년 된 다 쓰러져가는 건물의 3층. 깨진 창문은 청색 전기테이프로 대충 막고. 다 떨어져가는 빨간 시트지로 떼인 돈. 못 받은 돈의 ㅅ 짜는 이미 떨어진지 오래라 검은색 끈적이만 남았다. 10평은 될까 싶은 낡은 내부에 살림살이들이 형편 없이 널부러져 있었다. 탈탈 소리를 나지만 대충은 돌아가 쓰고 있는, 날개에 먼지 앉은 선풍기, 금방이라도 골동품으로 가야할 것 같은 녹슬은 난방기. 30년은 더 되보이는 금성 냉장고 한 면엔 중국집, 치킨집, 백반집 따위의 쿠폰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래도 사무실 구색을 맞춘다고 처박아둔 노란 잎의 이름 모를 식물들. 한 켠에 날짜 지난 신문지 묶음들과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연장들. 대부분의 물건들은 꾀죄죄했으나, 손때가 탄 물건들이었다. 

낡아 빠진 사무소의 주인은 동인천의 악귀라 불리던 사나이였다. 비록 지금은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부스러기를 흘려가며 강냉이를 씹어대고 있었지만. 

한껏 젖힌 의자를 바로한 남자는 제 입가를 툭툭 털었다. 

“얘들아, 손님 받아라.”

어디서 빌려왔는지 모를 흑백 만화를 보며 낄낄대던 막내가 책을 덮고 일어섰다. 아씨, 한창 재밌는 부분인데… 하고 겁도 없이 투덜거리면서. 한번은 기를 잡아야겠다, 가끔 보면 병찬이 형은 너무 풀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좀 나서 그런가 본데… 

투덜거리는 막내가 잘 열리지 않는 뻑뻑한 문을 힘을 주어 문고리를 잡아 끌자 끽! 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앞엔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는 감색 쓰리피스 정장을 갖춰입은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려간 눈매에 아랫속눈썹이 길지만, 얼굴은 앳되어보였다. 웃고 있는 얼굴이 꽤나 귀염상인 편인다. 

“들어가도 돼요?”

아, 네네. 이쪽으로 오세요. 손님보다 키가 더 큰 막내는 굽실거리며 아까까지 앉아 있던 검은 소파로 안내했다. 영중도 읽고 있던 책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 말했다. 일어선 김에 한 잔 준비해드려... 흥신소의 잡무를 도맡아하는 상호가 쪼르르 1평짜리 탕비실겸 창고겸 주방겸 다목적실 -오픈형-에 가서 커피믹스를 태웠다. 모카 골드? 화이트 골드? 역시 도련님이니까 프리미엄이 붙은 화이트 골드로 태워야겠다. 꿈지럭대고 있으니 병찬이 한 마디 거든다. 이번엔 물 조절 좀 잘해라. 네. 내 것도 태워오고. 이것저것 주문이 계속 날라왔다. 

곁눈질만 할 뿐. 박병찬은 의자에서 등 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영중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접대는 내가 하게 되었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자, 가늘어진 눈과 맞닥뜨렸다. 

“일 하나 좀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요.”

“바로 본론? 재미 있네.”

건너편에서 마음에 든다는 듯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거기 있지 말고 여기로 오시라니까요. 영중은 자신의 상사에게 핀잔을 줬지만, 듣는 척도 안했다. 그래, 그래야 고집불통 관념적 미운 2n살 박병찬이지… 

“피차 바쁜사람들끼리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나 싶으니까.”

수트까지 빼입은 남자 쪽은 바빠보이는 것은 명백해보였지만, 사실 이쪽은 그렇지 않다. 몇 달째 들어오는 의뢰가 없어 월세가 밀린 탓이었다. 머리 속에서 저번 달 가계부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월세가 팔십 (이건 안 냈고.) 식비가 음, 이백? … 이건 넘어가고. 가스비 이십. 지출내역 어쩌고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 해서 총 사백이 좀 넘어가. 수입은 이백만원 좀 안 됬던 거같은데. 

암담하다.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와버리게 된 거지?

커피를 세 잔 태운 기상호가 팔자 좋게 늘어진 병찬에게 컵을 내려놓으며 황급히 속삭였다.

“헐. 저 사람… 그 사람이에요. 그, 그 원중건설 둘째 아들!”

원중건설. 대한민국에 내로라 하는 중공업 대기업. 공격적인 투자와 건설로 부를 축적하고. 돈이 돈을 부른다고. 문어발식 경영으로 식품.뷰티. 전자기기.문화 산업 등 구석구석 발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기업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재벌 중에 재벌. 대대로 내려오는 올드머니를 다루는 대기업들이 늘 그렇듯 드러운 돈 세탁을 잘 돌린다는 걸로 뒷동네에서는 꽤나 유명했는데.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들키지만~. 알게 모르게 유흥까지 손 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진실은 모른다.

이런 내부 속사정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박병찬은 그냥 눈썹을 한쪽 들어올리고 만다.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에 맞게 대접 -착수금-을 불러드려야지. 이제 꺼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마무리는 내가 할테니까 됐고 갖다 나르기나 해라. 네네..

그래서 조재석 앞으로 서빙된 한강 커피. 이게 뭔가 하고 잠시 깜빡거리다가 한모금 마시고 웃는다. 커피 맛 좋네. 그래요? 처음 듣는 칭찬에 기상호의 얼굴이 환해 보인다. 그럴리가 없는데… 영중은 자기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가 차마 뱉지 못하고 한동안 입 안에 물었다. 진짜, 이건 깜빵에 가야 할 수준이다…  종이컵을 내려놓지 못하고 시선을 살짝 올리자 남자가 종이컵을 중앙으로 스윽 밀고 있었다. 미각에 문제 있는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였나 본데…  맛있는데 더 드시지 그래요. 눈치 없이 기상호가 히히 거리면서 권유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 빠르더니, 얘가 왜 이러나 싶어 곁눈질을 했다. 아니, 나는 배불러서 이제. 커피 먹고 왔어요. 헉, 그렇구나… 시무룩해진 얼굴을 보니 가관이다. 여기서 정보값 없는 대화는 끝낼 필요가 있어 영중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다시 선로를 틀었다. 본론이나 얘기하죠? 

“별 건 아니고, 취미 용품 들여오려고 하는데. 나랏님 눈치가 좀 보여서. 잘 아는 전문가들한테 맡길까 하고 이렇게 찾아왔지. “

눈을 접어가며 웃는 낯이 친절해보인다. 근데 은근슬쩍 말을 까네. 이런 타입은 불편해서 영중은 입을 다물고 안 쪽 볼을 훑었다. 그래도 이번 생활비가 빠듯했는데 큰 건 들어왔으면 했지만, 이건 좀… 슬쩍 고개를 돌려 병찬을 봤지만 별 미동이 없다. 계속 진행하라는 건가… 아님 그냥 생각이 없나?

“그런 걸 전문으로 하는 데가 있을텐데요, 굳이 여기까지 걸음하신 이유가?”

“음, 국내에서 유통되는 종류가 아니라… 좀. 그런 것도 있고.”

빙긋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이 어딘가 그늘져있다. 양 손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숙인다.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버릇인지 왼쪽 엄지에 끼어진 금반지를 만지작 거리며 돌렸다. 여기서 그냥 기절시키고, 이 남자를 털어버려도 제법 돈 나올거 같은데. 무슨 용기로 저렇게 귀중품을 차고 왔지. 겁대가리 없는 게 정말 귀중하게 자란 도련님 답다.

“뒤 밟히는 건 사양이라서요. 특히 형한테 들키면…”

꽥. 하고 목 긋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피곤해지거든. 경영권을 포기하고 자기 살고 싶은대로 사는 한량이라더니, 정말인가. 소문으로는 군수 용품 모으는 거에 관심이 많다고 듣긴 했다. 실제로 열거한 목록들은 한국에서 구하기는 어려운 총기류였다. 실제로 사냥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왜 모으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철딱서니가 없다는 걸 방증하는 거기도 하겠지. 도련님의 철없는 장난감들을 무사히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아이의 품에 안겨주면 임무 완수. 다시 말해 때 아닌 산타 할아버지 노릇을 하라는건데.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뗀 병찬이 흰 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아, 사무소에선 거치적 거리니까 입지 마시라니깐… 결국 빨래는 나나 기상호가 할텐데.

“그럼 내용을 일단 들어 보자. 영중이 넌 잘 받아 적고.”

“그럼 작업 치는 곳은 어딘가요.”

근처에 있는, 올해 초에 받은 가죽 커버의 다이어리를 펼쳤다.

“대륙.”

대답과 동시에 처진 눈매에서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까의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이고, 피곤한 곳에서 빼오라고 하시네.”

벌써 돈을 뜯어내려는 밑밥깔기인가. 병찬은 우는 소리를 냈지만, 입가는 호선을 긋고 있었다.

“말은 대충 맞춰놨으니 싣기만 하면 돼요. …응, 확실히 감시가 걸리는 게 좀 피곤하기는 한데. 남의 돈 받아 드시려면, 그 정도는 해주셔야지.”

그리고 제가 재미 없는 액수를 내밀 것도 아니고. 눈을 감고 웃는 재석이 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가슴 포켓에서 척 봐도 고급스러운 만년필로 슥슥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그러고 명함을 다시 뒤집어 저들에게 슥 내밀어 보인다. 익숙한 원중 로고와 본부장. 조 재석.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었다.

“전무님, 이제 가보셔야…”

“아아, 그래. 일단 위에 적은 게 선착수금이고. 아래가 일 잘 끝나면 완료금. 과정이 깔끔하면 제가 보너스 좀 더 챙겨드릴 수 있고요.” 

그럼 이만. 왔을 때도 그랬지만, 돌아갈 때도 빠르게 퇴장하는 남자다. 존재 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만큼 존재감은 엄청났다. 영향력이 엄청나네. 역시 이런 카리스마라는 건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몸에서 배어나오는 걸까.

달칵 소리와 함께 뒤에서 숨죽이던 기상호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지 서둘러 명함을 까디볐다. 허헉..! 순간 기상호의 얼굴이 평소의 3배로 못생겨졌다. 안구가 튀어나올 것 처럼 커지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입에선 침이 새어나올 것처럼 떡하니 벌어졌다. 흉한 꼴을 보던 박병찬이 배를 잡고 깔깔 웃더니, 야 뭔데. 오바 떠냐. 이러고 시선을 옮겼는데. 3배 못생겨졌다. 옆에 있는 기상호랑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기본 페이스가 미남인지라, 기상호보다는 덜 망가졌다.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큰 아들놈 두명을 키우고 있는건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는 영중 역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

… …!!!!!

이, 이정도면.. 당분간 월세는 물론이고 식비까지 한참이나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거짓말은 아니겠지? 아니 겨우 자기 취미생활 때문에 이만큼이나 투자한다니. 역시 부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영중은 애써 침착한 척 했으나 흥분한 탓에 높아진 목소리 톤이 주체할 수 없었다.

“병찬이 형. 어떻게 하실거에요? 이거 받을 거에요?”

“어, 받아야지.”

별 탈이야 없으면 다행이겠지만. 잘못 먹었다간 뒤질 수도 있는 지뢰다. 말이야 베테랑이라고 했지, 자기네들 손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오퍼 준 거 아닌가. 게다가 박병찬이 꼬붕 둘을 데리고 나온 거도 이제 피곤한 일엔 개입하고 싶지 않아서 손 털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배 곪아가며, 흙먼지 뒤집어쓰고, 개같이 쓰레기통을 뒤지던 세월을 헛되이 날려버릴 수 없었다. 꼬라지는 이래보여도, 나름대로 하한선이 있는 쓰레기들이다.

“근데, 이거 부두 쪽에 인맥이 좀 있어야겠는데요. 아직 아는 사람 남아있어요?”

“아니, 애들 다 빵갔거나 죽었지~.”

아님 나 죽이려고 눈 시뻘개져서 사시미 들고 칼춤 추는 애들만 남았을걸? 박병찬은 아주 재밌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낄낄댔다. 이 대책없는 양반아…

“그럼 어쩔 작정인데요?”

“어떻게든 되겠지? 딱히 생각하고 움직인 적이 얼마나 있었다고. 게다가 우리 월세 밀린지 좀 되서 칼빵 맞기 전에 주인집 할머니가 우리를 죽일거 같은데?”

“그럼 이 의뢰… 받는 거에요? 햄들?”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막내의 말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좋지. 그래도 세명 중에 가장 두뇌회전이 제일 빠른 놈이다. 어리더라도 잔꾀로 헤쳐나온 녀석이다. 그래도, 꽤 괜찮은 해결책을 내줄지 모른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 선착수금도 받았으니까 오늘은 탕수육이랑 양장피도 시키면 안 돼요?”

… …아이고 철 없는 것아.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영중은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금 발발하는 걸 느꼈다. 이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상호야! 그렇죠 병찬 햄? 덤앤 더머도 아니고 뭐가 좋다고 자기네들끼리 손 짝짜꿍하고 신이 나셨다. 신이 나셨어. 지금 이 상황에 짱개 주문을 하고 싶어요? 어 하고 싶어~ 존나 하고 싶어. 상호야, 너도 배고프지? 저 똥개 놈은 또 나랑 박병찬을 저울질하고 권력 높은 쪽에 찰싹 달라붙겠지. 네네,네네. 배고파요. 저것 봐, 하씨… 진짜 이딴 곳에 내가 왜 따라 나섰는지 모르겠다.

박병찬은 양귀를 막고 양장피~탕수육~ 단어에 음을 붙여가며 영문 모를 이상한 노래나 부르다가 아 맞다. 영중아 니가 시켜주라. 저번에 그 집 맛있더라. 이러더니 또 괴상한 노래를 불렀다. 한 구석에서는 기상호가 남은 커피를 홀짝이더니 그렇게 맛 없었나? 이러고 있다. 

이 대책 없는 상사랑 천지 모르는 꼬마애를 데리고 어떻게 일해?

아이고, 두야...

* * *

“상호야, 이거 맛있당. 어디서 사왔냐?”

“아, 그거요. 햄. 잠깐 볼 일 있어가지고 노량진 다녀왔는데 괜찮죠. 싸게 판다길래요.”

190cm에 가까이 되는 남자 둘이서 딱 달라붙은채 쪼그려서 열심히 부채를 부친다. 둘 사이로 피어오른 연기가 어떻게든 창문 바깥 쪽으로 나가라고 방향을 틀라고 노력하고 있었다. 노력이 가상하다고 해야할지. 저렇게까지 해야하는 건지. 외근을 다녀오자마자 보는 꼴이 저 모양이니 전영중은 오늘도 혈압이 올랐다. 그러나, 어쩌랴. 저들이 나의 동료이거늘. 미덥지 못해 보여도 어찌됐든 밥값……...을 했던가. 했었던 거로 하자. 아니면 고달프다. 고달파진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걸어오자 둘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실내에서 구우면 불난다고요. 그리고 안그래도 주인집 눈치 보…”

얍. 잔소리 그만. 마요네즈 찍은 노가리가 영중의 벌린 입으로 들어왔다. 마, 맛있죠. 눈치는 존나 보면서 또 이럴 때는 행동대장인 개막내새끼가 히히, 하고 웃었다. 노릇하게 구운 노가리의 훈훈한 탄내가 입 안을 감돌았다. 맛…있기는 하네. 어쨌든 입 안에 들어온 것을 아깝게 버릴 수는 없었으니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질겅질겅 씹다가. 순간 꺠달음을 느낀 표정을 지은 영중은 황급히 씹던 노가리를 꺼냈다.

잠깐, 노가리?

미친. 

지금 재정난인데 무슨 노가리를 사 와?

“싸다 해서 사온건데요… “

“얼마에 샀는데.”

“이 만큼 해가… 삼만원 줬…아니다. 더 많이 줬… 는데요.”

“아니 깡패새끼가 덤터기 쓰고 다니면 어떡해? 니 덩치랑 얼굴이 아깝다. 어?”

“아니이… 그래도 병찬 햄도 좋아하시는데…잉잉.”

또 지 불리하면 우는척하는 기상호를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더 속터지게하는 건 입가 근처에 검댕이를 묻히고 그래 그래. 너무 뭐라하지는 마 .하는 말리는 시누이 같은 제 대장이시다.

아니, 이 생활력도 없는 둘을 데리고 어떡하냐고...

평소에도 없는 살림에 저놈의 만화책은 왜자꾸 사냐거(병찬이형도 같이 보는데요…) .그래도 대장이라는게 맨날 어디서 부숴먹고 돈 물어줄 일을 만들지 않나(미안 ㅎㅎ). 사이가 좋다가도 자기가 감시하고 있지 않으면 지들끼리 머리뜯고 치고박으니 사이 좋게 있으라고 신신당부해도 소용 없고. 그러다가다 학주 눈 피해 편의점 가는 철부지 마냥 합심해서 배달시켜 먹을 생각만 하고?

그러나 아무리 땅을 치고 후회하더라도. 슬픈 현실은 웬수보다 못한 둘은 신뢰해야할 그의 동료이며 이곳은 전영중의 직장이다.

“아, 참. 영중아. 저번에 그 원중 도련님한테 계약서에 사인 하라고 좀 전달 해주라.”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는 건지, 아니면 진짜 시키려 했던 게 맞는지… 그러나 여기서 반발해도 무슨소용이겠냐마는. 영중은 자의 반, 타의 반 속아넘어가주기로 했다. 그가 내민 종이를 훑어보자, 대략적인 개요가 적혀 있었다.

일시는 xxxx년. x월 x일 

상하이에서 밀항으로 들어오는 어선에 실려오는 —를 

인천항 부두에 받아서 의뢰인에게 전달하면 완료.

“계약서를 직접 가져다 줘야 합니까? 그냥 받으러 오라해요.”

“으음. 워낙 바쁘신 분이기도 하고. 감시가 따라붙으면 피곤하다네. 이 정도 딜리버리는 해줘야지, 우리가.”

받은게 좀 있잖아? 엄지와 검지를 이어 동그랗게 만들고 흔들어보였다. 그래, 손님은 왕이지. 그리고 돈을 많이 주는 손님은 신이고.

영중은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걸 할 짬빠가 아니였는데 이 초초초소규모5인이하 사업장에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사장님은 인천항 작업치러 가고, 막내는 부산항으로 출장 간댄다. 둘다 먼 곳을 가는데, 불평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예, 하고 종이를 받들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잠만. 박병찬은 난잡한 책상을 뒤졌다. 정리 좀 하시라니까. 있어봐, 잔소리는 좀 있다 하고. 아, 여깄네. 하고 노트 모서리를 죽 찢은 꼬깃한 쪽지를 내밀었다. 펼쳐보니 그냥 헤븐, 라고만 적혀 있다.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을 요하는 시선을 보내자 이 신뢰성 떨어지는 머리께서 아, 거기로 오래. 로 끝을 낸다.

“하늘나라라도 가라는 거에요? 여기가 어딘데요.”

“클럽이랬어. “

* * *

해서 살면서 올 일 없을거라 생각했던 클럽 앞이다. 무슨 영문 모를 티슈 조각들 같은게 입구에서 부터 쭉 깔려있고 삼삼 오오 다들 쭈그리고 담배를 피며 저들끼리 떠들어대다가 자신이 지나가자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쳐다본다. 부담스러워서 괜히 카라깃의 끝만 만지작 거리다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굴에 열이 올라 홧홧하게 올랐다. 

평범하게 반팔티를 입고 갈 생각이었다. 서류 봉투를 챙겨 클러치 백에 넣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어- 영중아. 하고 제 상사가 저를 불러세웠다. 왜요? 하고 고개를 돌리니 눈썹을 찌그러트린 채 너, 설마 그러고 가려는건 아니지? 했다. 그냥 평범한 티셔츠에 면바지.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요… 하니 책상에 걸터 앉은 박병찬이 양 손을 짝 치면서 소리쳤다. 그래! 평범하니까 문제야, 평범해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반쯤 뜬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런데는 그렇게 입고 가면 빠꾸 당한댄다. 누가봐도 클럽 온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짓 하러 온 사람 같잖아. 응? 우리가 친히 배달-서비스를 해주는 게 뭐야. 뒤 구린 짓을 안 들키려고 하는거지? 근데 그렇게 티를 내면 어쩌자는거야- 영중아. 듣고보니 또 그럴듯한 말이라서. …그럼 어떻게 입고 가라고요? 평소와 다르게 제 의견을 수용하자, 박병찬은 신이 난듯 있어 봐. 내가 옛날에 삐끼들한테 좀 얻어 입은 옷이 있었거든. 어디히~보자하~. 예쁘은… 옷이이~. 하고 또 이상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빤딱거리는 싸구려 광택의 채도 높은 감색의 셔츠의 단추는 반쯤 잠겨 있었다. 박병찬의 강력 주장이었다. 덕분에 후덥지근한 바람이 가슴 안 쪽으로 들어와 민감한 부분을 간질였다. 자꾸만 벌어지는 셔츠를 여몄지만 아래는 착 달라붙는 바지 덕에 허벅지도 끼이고, 엉덩이 쪽도 여유 없이 딱 달라 붙었다. 그 덕에 걸을 때마다, 여실히 드러나는 자신의 … 음. 아무튼 그것의 실루엣의 위용이 드러난 덕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처음에는 위를 빤히 쳐다보다가 점점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자기네들끼리 수군 거리다가. 마지막 시선의 종착역은 제 얼굴이다. 수치스러웠다. 눈으로 희롱당하는 게 이런건가. 괜히 코 밑을 훑는 것처럼 손등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훔쳤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주목 받는 것도 억울한 것은 주변을 둘러보니 제 상사의 말 처럼 더한 꼴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한밤 중인 만큼 여자들도 한껏 노출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가 해변인지. 도시 한 복판인지 모를, 대담한 복장들이 많았는데. 오히려 눈길이 갔으면 그쪽이 더 가야하는게 맞았다. 

그래, 헌팅을 목적으로 한 것이니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수 는 있었다. 그런데, 왜. 똑같은 거 달린 남자가 제 몸을 보고 감탄하듯이 입을 헤- 하고 벌리는데? 아니, 정확한 이유는 정말 알고 싶지 않으니까 황급히 발걸음을 재촉해 안으로 입성했다.

화려한 조명아래에서 다들 거나하게 취한건지 몸을 이리저리 가누질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콩나물시루 처럼 빽빽한 인원에 충격을 받았고. 그 뒤에는 지독한 담배와 술냄새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도 조직에 몸을 담궜을 때, 아예 안 와본 것은 아니였으나. 목적이 춤을 춘다거나 이성을 꼬여내기 보다는 형님들 접대를 위해서 룸으로 들어가는 게 다반사였다. 아니라도, 한 적한 로열층으로 올라가 방 앞을 지키는 개 역할만 해왔지. 이렇게 사람이 바글거리는데는 처음이라 현기증이 일었다. 

도대체 조재석은 어디 있는거야?

비트와 함께 웅장하게 터져나오는 음악소리 덕분에 귀 먹은 기분이 들어 인상을 찌푸리고 귀 한 쪽을 댔다. 일단 계속 헤매는 것 보다 밖으로 나가서 연락을 해 약속을 만들고 접선을 하는 게 맞을 거 같았다. 이 대책없는 양반아, 그냥 장소만 덜렁 받으면 어떡하냐고. 생각해보니 시간 조차 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무르익어 가는지 사람들은 더 많아져 밀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오히려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박쥐들도 아니고, 왜 이 밤에 기어나와서… 그러나 자신도 밤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인생이다. 누구를 욕할 것도 못되었으나 너무 진이 빠졌다.

한숨을 내쉬고 사람들 틈 바구니에서 나가려고 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계속 은근하게 엉덩이를 터치한다거나 허리를 감싼다거나. 또 어떤 진득한 의도를 가진 손은 제 벌려진 셔츠 사이로 손을 넣기도 했다. 헉, 하고 놀라서 몸을 비틀었지만 깜깜한 탓에 누구의 소유인지도 몰랐다. 보통은 조막만한 손인데 가끔 커다란 손이 닿아올때면 눈을 질끈 감고 퍽 쳤다. 악, 소리가 났던거 같은데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이거 진짜 야근 수당을 받아야한다. 거기에다가 위험 수당까지, 다 챙겨 받아야한다. 이가 박박 갈렸지만 어쨌든 저 쪽으로 가면 밀도가 낮은 공간이 보여 무슨 대양에 헤엄치듯 몸을 비틀며 빠져나 왔다.

겨우 바깥으로 나왔나 싶었더니, 오히려 사람들에게 밀려버려 출구와는 정반대로 떠밀려왔다. 

…돌겠네.

그래서 불시착한 곳은 어느 테이블이다. 얼음 버킷에 술병들이 가득 채워져있고, 몇 명은 이미 스테이지로 갔는지 벽에 붙어 있는 길쭉한 소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괜히 남의 자리에 침범한 것 같아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허리를 숙여 나오려고 했다. 

“저기요. 심심한데 가지 말고 옆에 있으시면 안 될까요?”

부드러운 손이 제 팔뚝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어둠에 적응된 눈으로 보니, 쇄골까지 오는 웨이브 머리칼의 여자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제법 수수한 인상이었다. 상체를 다 가린 블라우스에, 허벅지 중간 쯤 오는 검은색 치마 차림. 그 마저도 부끄러운지 무릎을 최대한 고이 모으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나가서 놀고. 저는 이런 데를 잘 안 와서 어색하거든요. 눈썹 끝을 내리며 웃는 여자의 얼굴이 어쩐지 가련해보였다. 아… 하긴, 자신도 이런 데에 혼자 떨어져 있으니 뭐가 뭔지 몰랐다. 하물며 여자라면 더 그렇겠지.

일이 우선인 건 맞았지만 ,사실 종이만 건네주면 되는 일이고.. 적당히 말만 몇 번 나누고 돌아가면 되겠지. 남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주로 했고. 살면서도 남중-남고- 군대 3연속 쿰쿰한 냄새에 익숙한 전영중에게 여자에게 대하는 것은 다소 서툰 일이었다.

“아, 그럼.. 저 금방 나가 봐야하는데 괜찮으시면…”

“네에, 너무 기뻐요! 혹시 무리한 부탁일까 하고 걱정했는데 받아 주셔서 다행이에요.”

어둠 속인데도 여자의 볼이 살짝 상기되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전영중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 아뇨… 근데 저도 좀 재미 없을 거에요. 이런 데는 안 와봐서…”

“어머… 인기 많으실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그냥, 음…남중 남고 나왔거든요.”

그렇구나, 꺄르륵 웃는 여자의 목소리에 다시금 목 안쪽이 간질거렸다. 

말을 주고 받고 하니 그냥 별 내용이 없는데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깡패 새끼들 아니고, 어느정도 지능이 있는 일반인과의 대화이기에 즐길 수 있었던걸까. 만난 장소가 좀 그렇기는 했어도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거친 사회에 몸을 담느라 연애라는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밀어 내지 않고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젊은 나이에 비해 너무 연애 경험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니까.

이야기가 길어지자 여자가 데킬라잔을 들이밀었다. 잠깐만 얘기한다는 게 시간이 길어졌는데… 게다가 이런 일이라도 업무 중인데 술마시는 건 좀 그런 거 아닐까 싶다가도.안 마실수도 없고. 그래도 이렇게 작은 잔이라면, 마신다 하더라도 크게 취할 거 같지 않으니. 그리고 저 기대에 찬 눈을 보라. 이 한 잔만 마시고, 자리를 뜬다고 하면 얼추 타이밍도 괜찮을 성 싶었다.

제게 내민 솔잔을 받아, 마시려던 찰나에 팔을 쑥 잡아당기는 강한 인력이 느껴졌다. 덕분에 술잔에 들어 있는 갈색 액체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앗. 전영중 씨 아니야~?”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매던 클라이언트. 조재석이다.

“어, 찾고 있었는데 어디 있었어요? 그나저나 저를 어떻게 찾은거에요?"

이렇게 사람이 우글우글한데 나를 어떻게 찾아낸거지? 시력도 좋다. 그러자 소매를 걷은 셔츠 차림의 재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스테이지 옆에 있는 봉을 가리켰다.

“저기서 춤추고 있으면 위에 있어서 훤히 보이거든요. 그러다보니 … 음, 방해했던 건 아니죠?”

당황해서 떨린 눈으로 옆에 있는 여자와 눈 앞에 있는 재석을 번갈아보다가 무언가 해명해야 함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근무 태만이라고 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생각보다 중대 사항이였다.

“여기엔 사정이…”

“걱정 마요. 이런 걸로 패널티 안 줄거니까.”

왜냐면 난 당신이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내가 아량이 넓은 편이기도 하고. 조재석은 눈을 가스름히 뜬 채, 검지로 쿡, 하고 셔츠 위 가슴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움찔, 하고 어깨를 약간 떨었으나 정작 장본인은 영중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강하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깨에 닿는 가슴은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단단해서 평소에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보기에는 한량같은데, 제법 괜찮은 근육이었다. 옷을 입으면 좀 말라보이는 타입인가… 하고 영중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재석의 눈동자는 여자 쪽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이 사람은 데려갈게요? 원래 선약이 이 쪽이거든.”

“... 네. 그러세요.”

묘한 신경전이 일었다. 장 내가 어두워서 눈치 채지 못했으나, 클럽 조명이 번쩍일 때 마다 잠깐 반짝이는 그 둘의 눈은 심상치 않았다. 

“ 음. 생각보다 되게 조심성 없는 타입인가 보다.”

아까 여자에게 말했던 것보다 다소 발랄한 톤으로 농담을 던졌다. 아니, 농담이 맞을까? 경고에 가깝긴 했어도… 그러나, 그 말이 거슬리기엔 이미 더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손깍지를 끼운 온도의 정체. 팔목도 아니고 남자들끼리 손이라니..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거친 일은 안한 것처럼 앳되보이는 얼굴에 굳은 살이 있는 단단한 손이 대조적이었다.

“이런 데는 위험해요. 아무나 믿으면 안 되구, 그러니까 일단, 제가 잡아둔 룸으로 가죠?”

“그렇게 위험하다면서. 제가 조재석 씨 뭘 믿고 갑니까?”

“응? 그래도 구면이잖아요. 게다가 안 믿는다고 별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그쵸, 형? 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 위로 다양한 색의 조명이 어지럽게 비쳤다. 파래졌다가, 노래졌다가. 분홍색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어둠으로 잠식했다. 반은 그림자에 먹히고, 반은 조명에 비춘 그의 얼굴 색은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게 감추고 있었다.

“…형?”

“네에.  저보다 나이 많은 거 같아서요. 싫어요?”

부드러운 말씨로 대꾸하며 익숙하게 인파를 헤쳐나갔다. 유아독존 스타일인줄은 알았는데 또 연상 대접은 할 줄 아는구나. 왠지 의외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고 잠시 멈췄다. 못 들었다고 생각한 걸까? 저를 멀뚱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대꾸하려던 찰나 제 뒷목을 잡아 당겼다. 갑작스럽게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쏠렸다. 순식간에 제 머리통이 재석의 눈높이로 낮아졌다. 제멋대로인 애새끼네. 읏, 하고 당황해하는데 뒷목을 잡던 손이 경동맥을 타고 스물 올라와 제 볼록하게 올라온 귀구슬을 꾸욱 하고 눌렀다.

훅, 하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살거리는 말이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배경으로 온전히 들려왔다.

“애초에 제가 무슨 이득이 있어서 형에게 나쁠 짓 하겠어요.”

그쵸? 하고 순순히 속박을 풀어내고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순순하게 굴고 있지만. 아직 새끼라도 늑대는 늑대다. 순간 목이 물어뜯기는 것 같은 환상이었다. 자신이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맞았지만, 상대가 마음만 먹었으면 숨통을 끊을 수도 있는 그 찰나. 잠깐이였지만 제 목에 조인 악력이 아직도 선뜻했다. 

제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재석은 다시 유치원생 마냥 손을 맞잡고 인파를 익숙하게 뚫어나갔다. 영중도 말 없이 털레털레 따라갔다. 계단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다가가자, 재석을 알아본 가드가 바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러나 재석은 당연한 일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닥 말이 없었다. 억지스럽게 말을 꾸며내고 싶지 않았다. 땀에 손이 배여 자꾸만 클러치가 미끄러져 제 옆구리에 꼈다. 대신 신경쓰이는 지점이 있었다.

“이건 언제까지 잡..을 생각입니까?”

“아. 불편하셨구나.”

조재석은 순순히 손을 놓고, 무력을 어필하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밝은 데서 보니 아까 느꼈던 악력이 거짓은 아닌 듯 전완근이 두드러져 있었다. 저번에 방문했을 때는 정갈한 수트를 입어서 못 본 근육이었다.

엘리베이터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양 문이 열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전영중은 자신의 식견이 좁았음을 깨달았다. 보통 자신이 가던 곳은 복도식에 방이 늘어져 있어 문이 길게 늘어져 있는 방식이었다. 다닥다닥 붙어있기는 했어도 최소한 시켜야 하는 술 값만 해도 어마어마 했으며, 그 안을 들일 시다바리들의 팁만 생각해도. 간부들이 하룻밤 다녀오더라도 제법 단위가 커서, 몇 천이 우스운 정도였다.

그러나 재석이 도착한 곳은 차원이 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진 바- 아니 이것은 룸이라는 개념보다는 그냥 파티를 위한 로비였다. 케이터링이라도 된 것처럼 한 가운데에 주욱 늘어져 있는 핑거푸드와 넓직넓직하게 배치된 가구들은 모델 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모델하우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퇴폐적인 부분은 있었으나.- 한 쪽에는 당구대나 다트. 그리고 몇몇이 모여 카드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딜러로 보이는 남자까지 패를 돌리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룸’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 않나? 

놀란 눈으로 둘러보고 있는데, 재석은 별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넓은 소파에 여자 남자들이 뒤섞여서 놀고 있었다.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모르게 뒤엉켜서, 한껏 치대고 있는 모습이 동물의 왕국같았다. 독특한 것은 조합이다. 남-여 뿐만이 아니라 남-남도 제법 있었다. 그것도 제법, 낯부끄러운 모양새를 하고. 영중은 놀래서 멍하니 쳐다보다가 아마도, 시다를 들기 위해 온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가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러고보니 그런 찌라시가 있었다. 조형 건설 둘째가 바이라는 사실말이다. 남녀 불문한다는 것은 꽤나 유명하기도 했으며 더욱이 난봉꾼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였다. 하지만 그 소문의 출처를 직접 확인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소문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야생 다큐멘터리를 찍던 이들이 단번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무릎을 한껏 벌리거나 일어서서 인사를 나눴다. 대답 대신 하던일 하라는 식의- 손을 휘젓는 것으로 군림하는 자의 당연한 에티튜드를 보인다. 영중도 불편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한껏 가슴을 피고 따라 들어가 옆에 앉았다. 앉은 의자의 촉감은 적당히 푹신해서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있는 가죽이 다 떨어진 딱딱한 소파를 떠올렸다. 그것도 급할 때는 우리에게 제법 좋은 침대가 되어주곤 했는데,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근데 오늘은 평소랑 다른 스타일로 입었네요? 힘 준건가? “

쟁반 위에 올라와 있는 샤인 머스캣 한 알을 제 입에 쏘옥 넣고는. 나머지도 영중 앞에 들이밀었다. 아… 거절의 의미로 입을 꾹 다물었으나, 다시 한 번 입을 벌려 아앙- 하고 강조하였기에 눈을 꼭 감아 입을 벌렸다. 입 안에 들어오는 포도는 상큼하니 맛있었다. 애초에 이런 비싼 과일을 먹는 것도 얼마만의 일인지 몰랐다.

일부러 모른 척- 아니면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애써 잊고 있던 옷차림에 대해 지적이 들어오자 화끈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쪽팔린다… 그러니까 입기 싫댔는데 기어코 저를 입힌- 지금쯤이면 인천항을 떠돌고 있을 그의 상사를 원망했다.

으흠.흠. 영중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풀려 있는 단추를 하나씩 다시 잠궜다. 어차피 잠입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제 상관 없으리라… 생각해보니, 그냥 티를 입고 만났어도 큰 일 날거 같진 않았는데. … 이거 속은 거 아니야?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게 옷을 입힐 때 볼이 씰룩이더니. 이거 가지고 논 거 아니야. 하, 또 당했어. 그 놈의 쓸데 없는 장난기. 돌아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복수해주리라. 이를 빡빡 갈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흐음?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응? 예쁜데 왜 잠궈요.”

남자 손 치고 길고 얇지만, 그래도 마디마다 불거진 손가락이 쇄골 근처까지 잠겨 있던 단추들이 저항없이 다시 툭, 툭 풀었다. 안 그래도 옷이 조금 작다고 느끼긴 했으나, 단추가 풀리자 마자, 셔츠 앞섶이 스륵하고 풀어 헤쳐졌다. 한껏 벌어진 셔츠의 끝이 바지에 집어 넣었기에 아슬아슬하게 영중의 몸에 감싸이고 있었으나. 그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 위로  손 끝이 제 가슴에 닿자 어쩐지 불에 데인것처럼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드니 재석은 그냥 웃기만 하고 있었다. 

멋대로 제 몸에 손 대었을 때, 화를 냈어야하는데. 타이밍을 놓쳐 어버버 거리는 사이 재석은 탁자 위로 올라온 서류 봉투를 가져갔다.아, 이거 때문이구나. 흐음. 음, 음. 콧노래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내며 상체에 긴장을 풀어 느슨히 하고 다리를 꼬았다. 천천히 서류를 훑는 모습은 여간 높은 사람의 모습이다. …좀 아니꼽긴 하네. 밑바닥 출신인지라. 

“다 아는 내용이네요.”

뭔가 실망한 표정인가? 항상 웃고 있는 인상이라 잘 모르겠다. 저것 또한 포커페이스라고 봐야해도 될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 쪽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서류에 종이를 꺼내고 팔랑 거리며 읽는데 별 표정 변화가 없다.

“확인 차 가져온거야. 우리도 벌써 작업 들어갔거든.”

“아아, 그렇구나. 난 또, 영중이 형이 저 맘에 들어서 따로 오신 줄.”

뭔가 어폐가 있다. 애초에 자신이 딜리버리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던가? 이런 타입은 미리 정보를 알지 않으면 뒤통수 당하기 딱 좋았다. 돌아가서 우리 쪽도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나중에 죽 쑨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내려다보더니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뒤로 손을 내밀었다. 참, 사인할 펜은 안 가져왔는데.. 당황해서 제 몸을 더듬는 사이, 이미 웨이터로 추정되는 남자가 다가와 재석의 손 위에 펜을 놓았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멋스럽게 사인을 끝낸 서류를 봉투에 잘 담아 영중에게 내밀었다. 나중에 복사해서 한 부 저희 쪽에 보내주고. 이렇게 되면 계약 체결이죠? 상큼하게 웃어보이는 재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호칭 정리나 할까요? 영중씨? 영중 형? 어느 쪽이 더 편해요?”

“조재석 씨가 편하신대로요.”

네. 그럼 전 형이 더 편하니까 형이라 부를게요.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고개를 까닥였다. 왜 그 호칭이 좋냐고 물으니 그게 더 친해보이잖아요. 한다. 돌아오는 대답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 하고 말을 삼키니 이번엔 제가 되물어온다. 

“그럼 형은 계속 조재석 씨같은 재미 없는 호칭으로 부를거에요?”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골라요, 의뢰인, 손님, 고객님, 아니면 그냥 도련님?”

“주인님이 괜찮은 거 같은데요?”

제 정신이 아니군. 뭐 이상한 거 많이 봤나. 하긴, 이런 유흥을 좋아하는 거 보면 납득 가능하지만 같이 어울렸다가 오해받는 건 딱 질색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재석씨로 불러드릴게요.”

“그럼 보기는 왜 줬대요?”

“보기에 없는 걸 골라놓고 말이 많네-. “

후움. 제가 원하는 대로 거래가 성사 되지 않자 입을 삐쭉인다. 이렇게 보면 영락 없는 어린앤데…어느 쪽이 진짜인지 분간이 잘 안간다.

“참, 다음에는 이쪽으로 와요.”

보시다시피 여기는 만나기가 좀 힘드니까. 이야기 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눈을 접어가며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웃어 보인다. 배려하는 것처럼 구는데 애초에 먼저 장소 선정을 한 건 저쪽이다. 좋은 사람인 척 구네. 역시 대기업 출신이라 그런가. 자신을 포장하는데에 능숙했다. 

재석은 제 왼쪽 바지주머니를 뒤져 영중에게로 무언가를 던졌다.  포물선으로 던진 것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다소 가볍다. 손을 펴서 물건을 확인하니, 

열쇠다. 

그것도 음각으로 고급스럽게 문장이 새겨진.

자신이 받아든 걸 확인한 재석은 팔을 괸 채 턱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미 잡은 사냥감을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는 포식자의 여유로운 작태다.

“꼭대기층으로 오면 돼요.”

“여기가 어딘데요.”

응? 

당연히 호텔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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