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비는 예고되어있다

느와르 AU

그러고 보니, 하고 운을 띄운 클라이언트가 앉은 채로 허리를 조금 굽혀 서류를 들여다본다. 수익과 정산, 대체적인 그래프를 훑어가던 손이 잠시 멈춘다. 운을 띄운 것도 잊었을 즈음에 가볍게 지나가는 말이 붙는다.

"아는 보안업체 없으신가요?"

컨설턴트는 미간을 구기지 않는 데에 성공한다. 다소 뜬금없는 말도 들어줘야 응해준다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몇 가지 업체를 꾸리려는 듯 고개가 미세하게 기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클라이언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를 들여다볼 뿐이라, 어떤 표정을 지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관심해보였다.

"저희 회사의 보안이 괜찮은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거래에 대해 문제라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잠시만요……."

다소 나른하고 무료한 목소리. 고작 20대의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클라이언트는 예의도 없이 말을 자르고, 파일의 마지막 장까지 다 넘기고서야 용건을 말한다. 노래를 틀었으면 대여섯곡은 능히 흘렀을 시간이었다. 사람을 골리는 것도 아니고.

"저희 회사 보안 체계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회사를 바꿀까 싶더라고요."

"이런, 무슨 사고라도?"

"……무슨 정보가 노출될 뻔 했다더라고요…. 사소한 거라 큰일이 되기 전에 막았다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잖아요."

아버지는 이런 일 나오면 매번 '넌 몰라도 되니 너나 입단속 잘해!' 로 살짝 넘기시는 경향이 있고요. 너스레를 떨며 클라이언트가 턱을 괴고 키득인다. 우아하고 격식없는 척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해보지 않은, 소위 온실 속 도련님 같은 모양새. 컨설턴트는 같이 너스레를 떨며 대꾸한다. 아무래도 고지식한 나잇대라 그러실 수도 있죠. 그렇죠? 그래서 업체를 구하고 있는데.

"노노에 씨 쪽이 괜찮으려나. 다른 분한테도 앙케이트하는 중인데, 꽤 도움이 됐어요."

"부디 쓰신다면 이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서비스가 더 붙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이거 추천인 혜택도 있어요? 젊은 클라이언트가 그 나잇대의 웃음을 띄우고 웃다가 손을 내젓는다. 그렇게 된다면 필히 연락드릴게요. 이번 컨설턴트분하고는 좀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가늘게 뜬 붉은 눈동자가 위 아래로 상대를 훑다가, 가볍게 손을 내민다.

"잘 부탁드려요, 노노에씨."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카와씨."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잘 닦인 복도, 신축 건물이 아닐텐데도 고상하게 잘 관리된 벽의 장식들, 이따금 잊을 법도 하지만 잊지 않고 깔끔히 닦아낸 블라인드와 창턱의 먼지들. 부드러운 배색의 회사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숨이 막힌다. '여기까지 지켜보고 있다' 라는 사실을 여실히 어필하고 있다는 점에서. 컨설턴트는 손자국 없이 말끔히 닦인 회전문을 밀고 나와, 한참을 걷고 난 뒤에야 한숨을 내쉰다. 넥타이를 조금 끄르고 나면 어깨에 드디어 힘이 빠졌다.

"빈틈 없는 도련님이야, 참."

그리고 어떤 피평가자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유리창의 바깥으로 보이는 범위까지 컨설턴트가 돌아가는 광경을 지켜본 차였다. 어울리지 않는 서류 가방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이다. 조금 뛰기라도 하면 뻣뻣하게 걸릴 모양새던데. 그것보다는 귀에 걸린 이어폰이나 어깨에 매는 편한 가방, 혹은 너비가 넓은 점퍼나…… 경찰 수첩이 잘 어울리는 인상이지. 유카와 란야는 빈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 끝으로 문지른다. 티스푼이 갸우뚱, 기울다가 다시 자리를 잡는다. 다음에도 그럴까? 지독하게 연기하던데. 얼마나 건드려야 꼬리를 잡을 수 있을까….

"참 빈틈 없는 형사님이죠. 사람 성가시게."


"아."

"아, 노노에씨…."

노노에 마사키는 그제야 처음으로 클라이언트의 난감한 얼굴과 마주한다. 아까 엘레베이터 앞에서 서있던 모습은 분명 어디 데이트 가는 사람의 행색이었는데. 비를 조금 맞고, 바람도 조금 맞은 듯한 얼굴로 다시 돌아와 제 앞에 서있는 건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혹시, 일정이 있으신가요?"

"……네?"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 유카와 란야의 존재란 다소 희박하고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 나이 또래 치고는 남과 파티를 즐기지도, 골프 따위의 교류를 자주 즐기지도 않았고 — 소문에는 병약한 체질이란 소리가 있었다 — 친한 사람이라곤 이따금 만나는 선생 정도였을 뿐. 대학도 조용히 지나쳐 기억하는 사람의 수가 극도로 적었다. 이 정도면 사회성 부족이 아닌가 싶었지만, 대화를 하는 걸 보면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알 수 없는 부분이라 보고서의 반이 백지였던 차에.

"일정 없으시면 혹시, …… 저녁에 영화 하나 보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잠시만요……."

무슨 영화? 라고 묻자 최근 개봉한 명작 리메이크 판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초라한 기색의 클라이언트는 낮은 헛기침을 연발하더니, 영화표가 갑자기 하나가 비어서, — 아마 그가 비와 바람을 맞게 한 이유겠지 — 이 영화를 꼭 보러 가고 싶은데, 마침 지나가셔서요. 그런 소리를 늘어놓고 눈썹을 늘어뜨린 채 웃었다.

"너무 뜬금없었나요?"

"상당히 그렇긴 합니다만."

"생각나는 사람이 얼마 없었어요."

아버지랑 보자고 하면 너무 그렇잖아요. 가늘게 휘어져 웃는 눈동자가 시선에서 떠나지 않는다. 일부러 맞추려는 듯 따라오는 것 같다. 묘하게 서늘한 기색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건 바깥의 비 때문일까? 아니면 문이 돌며 들어오는 바람 때문일까. 노노에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추가 관찰 보고서가 하나 추가되겠군.

"클라이언트랑 퇴근 이후에 보자고 하는 건 너무 그렇죠, 제가 무슨 주책이람……"

"……업무 외의 일인데 일 얘기는 꺼내지 않으시겠죠?"

"아, …… 아, 네, 당연한 얘기죠. 저 퇴근 후엔 라인도 안 보내요."

시선이 한번 더 맞부딪힌다.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서늘하다. 하지만 노노에는 순순히 끄덕이고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자기보다 조금 큰 실루엣이 머리를 쓸어넘기고, 조금은 분주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다가 엘레베이터에 먼저 올라탄다. 잠시만요, 하고 코트의 소매를 만지는 기색은 정장을 갓 입어본 아이 같다고, …… 그렇게 생각하다 앞을 다시 본다.

유카와 란야는 그의 뒤에서 가만히 생각한다. 비를 맞고 올 필요는 없었겠어. 하지만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걸려들 구석은 여러 곳에 두는 게 좋지. 노노에 마사키는 어디에 걸려들었을까. 비에 젖고 데이트에 바람 맞은 어린 청년의 안쓰러움, 아니면 이런 일을 같이 할 사람이 없는 병약한 청년, 혹은 이런 건 역시 안되겠다고 한 발 물러나는 소심한 구석? 아니면…… 단순 추가 보고 사항?

어느 쪽이든 좋았다. 탐구할 수 있는 건 마찬가지다. 경찰 측 정보는 좀 적었다. 특히나 제 측에서 꾸물거리다 걸린 녀석은 손을 대도 조용해서……. 노노에 마사키란 인간에 대해서는 결국 다소 우직하며 오래 근무한 형사란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걸로도 꼬투리를 잡아둘 순 있겠지만. 조금은 더 파고들어서 뜯어내고 싶은 게 이득이잖아. 그게 내가 물려받은 끔찍한 면이기도 하지만. 시계를 고쳐매면 막바지에 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려 엘레베이터의 가장자리로 몸이 밀린다. 컨설턴트와 몸이 바짝 붙는다. 희미한 담배 향기, 그 위에 방향제, 그리고 …… 묘한 꽃향기가 났다. 다음엔 이걸로 꼬투리 잡아서 애프터를 해볼까. 가까이 붙는 게 곤란한 척, 고개를 숙여 어깨에 고개를 묻자 상대가 살짝 움찔거린다.


"그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

"그 때 좀 설렜나요? 바짝 붙어서."

"스릴도 설렘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두지."

"형사님도 참."

유카와 란야는 유쾌하게 웃고는 묶인 손목을 한번 흔든다. 순순히 인정해도 좋을텐데 말이에요.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