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장미정원
작고 어린 신과 가정교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저택은 해무에 휩쓸리지 않도록 단단히 돌을 박아 만들어 나무결이 떨어지거나 들뜬 구석이 없었다. 오래된 벽돌집 치고는 말끔한 갈색이 남아있었고, 중간의 흰 대리석들도 모서리가 조금 닳긴 했지만 부서질 정도로 너덜거리지 않았다. 결벽할 정도로 깐깐한 관리인이 천수를 살아 최대한 노력한 광경 같았다. 굴뚝을 타고 시선을 내리면, 아직 피지 않은 덤불들이 솜씨좋게 잘려 창 안 쪽을 슬쩍 가려주거나 정원에서 뛰놀 아이를 가리기 좋게 서있었다. 이상한 배치다. 이 주위에는 농부가 하루나 이틀 정도 농삿일을 할 용도의 움막이나 숲의 사냥터지기가 겨울에 묵곤 하는 오두막 밖에 없었는데. 새 가정교사는 언덕을 오르고, 집이 아주 가까워질 즈음에 맨 윗층의 창에서 흰 커튼처럼 움직이는 실루엣을 본다.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거나 아이의 작은 옷이 휘날리는 형태 같았다. 에리크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들이 으레 곧 올 사람을 기다리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는 광경을 안다. 들은 대로 말이 없는 아가씨인가, 싶었다. 신문에도 인내심이 좋은 사람을 원한다고 써있었고. 별 문제는 없겠지. 잘 관리된 철문 앞에서 초인종을 두어번 누르자 조금 급하게 헤드 드레스를 끼워 넣은 여자가 달려와 문을 열었다. 붙임성 좋고 어린, 동생이 서넛 있어 생기는 붙임성 좋은 목소리가 옆에서 빠르게 따라 붙는다. 오늘은 안개가 덜 해서 오실 때 괜찮으셨죠, 들판도 저 멀리까지 보여서 기분이 좋네요, 빨래를 늦지 않게 널어둬야겠어요, 같은 소리를. 이미 그를 이 집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수다스러운 광경에 당신은 조금 살가운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집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소란스러운 저택일지도 모르겠다고…….
집안의 문은 대부분이 무겁고 책이나 유리가 너무 빛을 받지만 않게끔 커텐을 잘 걷어둔 응접실은 조용하다. 자기 이름을 메릴린이라고 소개한 메이드는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며 걸음을 재게 놀려 계단을 올라갔는데, 카펫이 깔렸는지 위층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먼저 앉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조용히 방 안을 돌아다닌다. 작지만 여럿이 앉을 법한 응접실의 소파, 품질 좋은 조각상, 어제 꺾은 듯한 작은 꽃과 크리스탈 유리병. 작고 부드러운 실크 슬리퍼. 잘 세공되어 빛에 비추면 사방에 난반사 되는 작은 크리스탈 공. 소파 밑에서 삐죽 나온 레이스 손수건 — 사용인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운 —, 테이블에 올려둔 동화와 시 단편선. 응접실에서 아이가 자주 오가는 모양이었다. 일손이 많지 않으니 꼼꼼히 치우기도 그렇고, 어른들도 엄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깥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대화의 한 면이 소리를 한껏 죽여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니예요, 모리츠 아가씨. 지난번처럼 엄하게 구실 분처럼 보이지 않았는 걸요.”
“에잇, 일단 인사부터 하셔야지요. 리본도 단정히 하시고요.”
“해달라고요? 네에, 뒤돌아보세요.”
낯을 가리는군. 어리광도 많고. 당신은 말을 고른다.
그리고 문이 느리게 열리며 메이드가 두 손을 모으고 들어온다. 치맛자락 뒤에 숨은 듯 녹색 옷자락이 얼핏 보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민다. 열살? 혹은 더 어려보이는 소녀다. 머리가 그 나이치고는 착실히 길어 반은 리본으로 묶었고 나머지는 늘어뜨린 어린 아이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희미하게 안녕하세요, 하고는 입을 다문다. 시선이 머리부터, 천천히 발끝까지 내려간다. 당신은 그게 꽤 ‘어린애’의 방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수줍은 아이들은 으레 생각이 많기에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넘긴다.
“이 분이 모리츠 아가씨세요. 낯을 조금 가리시지만 저한테 한번도 나쁘게 구신 적 없으셔요. 아주 상냥한 분이시랍니다.”
메릴린은 변명하듯 종알거리고는 아이의 등을 살짝 민다.
“저는 진짜로 점심을 차리러 가봐야해요. 이번에도 늦으면 부엌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훈제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안녕. 메릴린.”
“예에, 아가씨. 선생님과 인사 나누세요!”
그리고 고요함이 남는다. 당신은 말할 거리를 고민하다가, 느리게 테이블의 책을 집어든다. 손 때가 꽤 묻은 자국이 있었는데, 그건 반 즈음까지만 그랬고 나머지는 희었다. 당신은 그 흰 부분 중 하나를 펼친다. 조금 어려운 단어가 있을지도 모르는 동화기는 했다. 천사와 악마가 나오고, 신이 나오는 것들은 늘 그랬다.
“좋아하는 책인가요?”
“……네에.”
네, 보다는 에 — 와 비슷한 유령같은 소리다. 그는 상대를 재촉하지 않고 2인용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아이가 오기를 기다린다.
“에리크라고 해요. 메릴린씨가 말해주셨나요?”
“……네,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
작고 명확한 소리. 문장을 이루는데에 웅얼거림은 많지 않았다. 힘이 없을 뿐이군, 당신은 생각하더니 동화책의 손때가 많은 부분을 천천히 살핀다. 아이는 느리고 뭉그러진 동작으로 슬리퍼를 신고, 손수건을 얼른 주머니에 쑤셔넣더니 당신이 앉은 소파 끝에 앉아 당신이 든 책을 응시한다. 아이에게는 훈육이나 강요보다는 자신감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어보였다. 우물쭈물하는 꼴이 크게 혼나고 주눅든 강아지 같았기에.
“그럼, 읽을 수 있는 시나 글을 한편만 들려줄 수 있을까요? 중간에 틀리거나 멈춰도 괜찮아요.”
“……그러면,”
책을 손에 쥐여주자 아이가 천천히 입을 떼어 읊기 시작했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 나, 참새가 말했네. 내 활과 화살로 내가 죽였다네.”
“누가 울새가 죽는 것을 보았나? 나, 파리가 말했네 내 조그만 눈으로 내가 보았네. “
……
” 하늘의 모든 새들은 탄식하며 울었다네. 불쌍한 울새를 위해 울려퍼지는 조종을 들으며. “
당신은 아이의 발음이 굳이 흠잡을 필요 없이 말끔한 것을 깨닫는다. 무슨 단어를 읽히든 그는 두어번 읽고 잘 암송할 것 같이 보였다. 왜 책의 반만 읽어왔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성격일까? 아니면……. 당신은 문득 여기 오기 전 받았던 편지를 떠올린다. 어렵겠지만 성경을 읽게 도와줄 수 있냐고. 아이가 단어를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느리게라도 읽히기를 원한다고 적었던 편지. 아, 그러면 내일은 단어라도 나누어 가르칠까……. 좋은 아이이니까, 아마 곧잘 따라올 것이다. 이만치 조용한 아이는 여느 저택에서도 본 적 없으니.
그것은 소원과 함께 이파리를 맺고 소원이 질 때 피어난다. 그리고 누군가 꽃을 보고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저택에서 머무는 것이다.
■■■■■■ 가문의 일화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쟁의 포탄이 그 동네를 덮치기 전에 가주를 뺀 전원이 잠들 듯 행복하게 죽어 이후의 참상을 볼 일이 없었다거나, 장정 몇 무리가 옮기는데만 사흘이 걸릴 정도로 무겁게 보물과 서문을 싣고 온 배 안에 선원은 하나도 없어서 유령이 떠민 배라는 흉흉한 부를 얻었다거나. 예술에 재능이 있어 세계를 뒤흔들 샛별이 되었으나 물감의 납이 그를 갉아먹어 쓰러졌다거나. 행복의 형태를 이해하지 못한 존재가 제멋대로 적어 만든 소원 쪽지 같은 형태가 가문을 둘러싸고 불안하게 떠내려왔으나 가주는 언제나 한 사람 — 운 좋으면 몇이 살아남았다— 의 후손을 남기고 기우듯이 대를 이었다. 그것이 의무인 양. 그들은 그런 불운과 행운에 대한 이야기에 신이 구원하셨노라 증언했다. 실제로도 누구보다 신실하게 십자가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거대한 헌금을 퍼부었으니 납득할만도 했다. 욥처럼 고난과 보상을 번갈아 받는지도 모르지. 몇몇은 그들을 조금 신성시했고 몇몇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몇 세대가 이어지자 그것은 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비일상이 계속 되면 일상이 되니까.
그는 소원을 듣고, 이루어준다. 소원의 범주는 관측되지 않았다. 세계 평화를 이룩해달라고 한 자는 없었다. 다들 그 때 그 때 급하거나 안온한 것을 바랐다. 가족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주세요. 부가 흘러넘치게 해주세요.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주세요. 재능을 주세요. 그러면 여인은 무릎에 손을 모으고 느리게 끄덕인 뒤, “장미가 필 즈음에 만날게요.” 라고 대답한다.
집에 돌아갈 즈음에 그는 막연한 확신을 얻는다. 번뜩이는 영감이나, 혹은 기쁜 소식이, 혹은 집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혹은 미적지근하던 상대의 얼굴에 사랑의 불길이 피어오르는 광경을 본다. 의심하는 이들마저도 언젠가 확신을 가진다. 그것은 확실히 자신이 원하던 것이었으므로. 마음에 들어차서 누구에게 터놓고 싶을 정도로 기쁘지만, 한명도 비밀을 공유한 적은 없다. 인간의 욕심이란 그렇다. 소원을 빈 사람들 대부분은 소원의 결과를 확언 받으려고, 혹은 감사를 표하려고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소원을 빌 때에 만났던 젊은 여인대신 흰 잠옷 원피스를 입은 어린 아이가 앉아있기 때문이다.
소원의 주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 그들을 맞이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택에 홀로 어린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내지 않기 위해 친척 아이를 잠시 데려왔다고 말하거나, 뭘 모르는 어린 메이드를 들이고, 입이 무거운 늙은 집사장을 들여 저택을 꾸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봐 — 혹은 아이가 죽을 시 소원이 사라질까봐! — 가정교사를 들인다. 신실하고, 그저 아이를 잘 위하며 입이 무거운 이들을 골라서…….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고, 당신이 소원을 잘 받아 삼키고, 행복에 젖어 깊은 꿈을 꾸고, 어느 날 장미가 잘 피어 문득 그 저택이 생각날 즈음에 당신은 창 밖에서 처음에 만났던 그 저택의 여인을 본다. 당신이 다음 가주를 책정하고, 혹은 책정하지 않았더라도 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무어라 변명하거나 애원하기 전에 당신은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안다. 장미가 다시 필 때가 되었다.
비밀은 이래서 잘 전해지지 않는다. 악마에게 소원을 빌어서 잘 되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오래 살고 싶고 예외를 만들고 싶어서, 그래서 신부 밑에서 올곧고 묵직하게 자란 당신 같은 사람이 항구를 거쳐 이 절벽 위의 저택으로 온다.
해무가 길게 머문다. 아침이 지나도 그것은 땅의 파도처럼 일렁이며 동네를 감싼다. 몇몇의 주민은 그 해무에 유령이 섞여 숨어든다고 해서 아이들을 겁주곤 했다. 나쁜 아이들이 아침 나절에 바깥을 함부로 헤매어 다니면 유령이 손을 잡고 끌어가버린다고. 으레 있는 소문이다. 하지만 아주 헛소리는 아닐지도 몰랐다. 취객이나 방랑자들은 해무 속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다정하고 상냥하게. “길을 잃으셨어요? 도와드릴까요?” 혹은 웃음소리. 반갑게 맞아주는 소리를. 따라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무시한 사람들만이 그런 일이 있었다며 수군댈 뿐이다.
에리크는 이런 헛소문 아닌 헛소문을 들으며, 창가에 앉아 정원에서 작은 컵과 잔, 인형을 들고 종알거리는 제 학생을 내려다본다. 메릴린이 지나가며 인형을 붙잡고 팔을 흔들어주다가, 금세 가버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끄덕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냥하게 말하듯이 인형에게 말하는 광경을, 본다. 소리는 아주 작은 데다가, 입모양도 보이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당신은 그것이 환영인사 같다고 생각한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반가워요.” 같은…….
그가 본격적인 성경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이 저택에 온 지 일주일 째였다. 그 기간동안 그들은 작은 숨바꼭질 — 라기보단 일방적으로 아이가 부끄러운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 혹은 거리를 두고 앉아 좋아하는 동화나 과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혹은 책을 읽고 있으면 메릴린이 끼어들어 둘이서 저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주방의 덩치 좋은 메이드는 아이에게만 상냥할 뿐 나머지에게는 썩 성격 좋지 않게 구니 식사 시간 외의 부엌은 얼굴을 들이미지 말 것, 이라거나. 나머지 사용인은 말이 없고 눈치를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지만 ‘선생님’께 나쁘게 굴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고 밤 중에는 잠귀가 예민한 사람들이 많으니 — 메릴린은 그 순간만은 조용히 종알거렸다, 특히나 주인님이요. — 나가시지 않는게 좋을 거라고. 간식이 필요하시다면 저녁 시간에 귀띰해달라는 애교 섞인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고용해주신 분 — 저택 주인분 께서는 — 언제쯤 오십니까? 한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군요.”
“아, 그분은 예고도 없이 오셔서요. 무역이니 사업이니 하신다고 늘 바쁘세요. 여기가… 본가가 아니기도 하고요.”
“모리츠 아가씨가 따님이 아닙니까?”
당신은 이상하게 아이에게 돌봐줄 어른이 적다고 생각한다. 이 수다스러운 메릴린, 먹일 걸 챙겨주는 주방장. 그리고 자신이 다다. 나머지 사용인들은 정원이나 빨래를 담당할 뿐 아이와 접촉을 자주 하지 않았다. 딸이든 동생이든 그를 챙겨줄 사람을 넉넉히 챙기는 게 의무가 아니던가……. 공평한 하나님의 어린 양일진대, 하고 신부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아, 따님은 아니시래요. 뭐랬지, …… 음,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사촌인데, 직계는 아니라고 들었어요. 제가 뭘 알겠어요. 돈 많으신 분들의 여러 사정이 계시겠지요. 그래도, 한 달이나 두 달에 한번씩은 꼭 뵈러 오세요. 손에 사용인들과 아이 선물을 잔뜩 들고 오시는 걸요.”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하기엔 아이에게 너무 소홀하지 않습니까? 라고 답하려던 당신은, 메릴린이 그 질문에 그다지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다. 대답도 아마 그렇겠지. 그는 좀 더 소홀한 상태로 자랐으리라.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따님이실 줄 알았습니다.”
“아하하, 아마 아닌 걸 금방 알아채실 거예요. 하나도 닮질 않으셔서.”
“하지만, 거실에 걸린 초상화가 꽤 닮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저택 벽난로 위에 걸린 오랜 초상화는 아름다운 부인을 그려두어 시간이 지나도 값어치를 단단히 받을 생김새였는데,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이 꼭 모리츠를 닮은 꼴이었다. 아이가 좀 더 냉랭하게 자라면 그런 얼굴이 될 법했다. 지금은 젖살 하나도 빠지지 않아 동그랗고 부드러이 생겼지만. 게다가 리본이며 머리 장식을 이따금 풀숲에서 빼먹고 돌아오는 일도 흔했고.
“……”
메릴린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까딱, 했다가 히죽하고 웃었다. 잘 모르겠다는 특유의 웃음이었다. 당신은 조금 섬뜩한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은 착각에 가까운 희미한 서늘함이라 금세 흩어지고 만다. 애초에 이 동네에 머무는 서늘함보다야 비견되지 않을만큼 밝은 인간의 약간의 그늘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음, 역시 잘 모르겠지만요. 정말 오래된 초상화라고는 들었어요! 갈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름답지 않나요? 장미랑도 잘 어울리고, 살아계셨더라면 온 파티에서 누구든 부르고 싶어할 외모라고 생각했어요.”
저 보세요, 전 누가봐도 입이 가벼운 어린 애 같잖아요. 메릴린은 진저 곱슬 머리와 부드러운 갈색 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리고는 빨래 바구니를 다시 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아뇨, 그렇게 어둡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예요! 모리츠 아가씨도 서서히 마음을 여시는 것 같구.”
그럼 햇볕 좋은 곳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다림질도 하고! 그는 발을 툭 구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바깥으로 향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와 동시에 방문 안에서 눈을 빼꼼 내미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래, 마침 시간이었다. 당신은 품의 성경을 들고 천천히 방문을 두드렸다. 그가 이미 눈을 내밀고 있긴 했지만.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선생님.”
두꺼운 커튼과 얇은 커튼이 안팎으로 걸린 창문, 아이가 쓰기에는 살짝 높거나 크지만 사용인이 있거나 발돋움을 한다면 충분히 올라설 법한 침대와 테이블. 도자기 인형과 부드러운 헝겊 인형이 선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밑에는 동화부터 오래된 고서까지 섞여 처박혀 있었다. 당신은 그 책을 읽어본 적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모리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이 예뻐서요. 당신은 그 책의 삽화들에는 별이나 사람의 해부도, 그리고 마녀를 색출해내는 삽화가 담겨있는 것을 안다. 언젠가 교회에서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다. …… 무엇이 예뻤을까? 당신은 묻지 않는다. 조금 섬뜩했으니.
“오늘은 이걸 읽어보려고 하는데.”
“……응.”
당신은 손때가 묻은 성경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간을 살짝 구기고 의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발이 닿지 않아 달랑거리는 다리가 불만스레 팔락인다. 당신은 내내 미뤄왔던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책을 처음부터 펼친다. 아이들이 흥미로울 부분은 사람과 사람이 엮여 벌을 받는 부분보다는 창세기였다. 빛이 있으라, 하는 구절을 당신도 싫어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읽었던 것처럼 천천히, 혹은 맘대로 읽어봐도 됩니다.”
“…… 느리게 읽어도 되나요?”
“그럼요.”
모리츠의 눈에 얼마나? 라고 묻는 눈빛이 몇 초 지나갔다가, 아주 느리게, 모음과 자음을 분리한 것처럼 하나하나 훑어나가기 시작한다. ㅌ-ㅐ 초-에에. 당신은 그것이 으레 짖궃은 아이들이 선생에게 저항하는 방식인 것을 알지만, 그를 제지하지 않는다. 어디 해보라는 듯이. 고집과 고집의 대결에서 처음부터 지면 교육이 힘들었다.
“ㄱ-ㅏ라, 사아, 대. ‘빛이 있으라.’”
명확한 발음. 빛이 있으라, 할때 아주 잠깐 구름 사이로 해가 비쳐 테이블의 유리를 비추고 지나간다. 당신은 눈이 부셔 잠깐 감는다. 아이는 유리 표면이 반짝이는 것을 손으로 더듬어 보다가, 다시 아무런 일도 없단 듯이 느리게 문구를 읽는다. 1장을 읽는데에는 30분이 걸려서, 당신은 차를 한 잔 다 마시고 새로 차를 우릴까 생각하다가, 결국 손을 들어 멈춘다.
“좋아요. 열심히 읽었으니 여기까지 할게요. 모리츠, 어려운 단어가 많습니까?”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만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다. 당신은 아이가 성경에는 손도 대지 않고 멀찍이 다과에만 손을 대려는 것을 눈치 채고, 접시를 끌어 근처에 둔다. 오독, 오독 소리가 들리다가, 자그마한 대답이 들렸다.
“읽기 어려워요.”
“어느 것이?”
“그냥, 잘 모르겠어요. 동화는 쉬운데, 이건 무거워서…”
“무거운 내용이기는 하지요. 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는 과정이니.”
“’우리’는 이렇게 창조되었나요?”
“…예, 형태를 직접 빚으시고 불어넣으신 것들입니다. 그들의 자손이니 마땅히요.”
“……그럼 신은 어디에나 있는건가요?”
“네?”
“바람도 빛도 동물도 우리도 전부 만들었으니까, 어디에나 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여기에도.”
“예.”
아이는 과자를 느리게 삼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여기에도. 여기. 하고 중얼거리다가, 자그맣게 웃는다.
“여기에도 있군요.”
“그 분과 같이 계신다는 게 기쁜가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가 여기 있다면 즐거울 것 같아요.”
그가? 당신은 그 호칭을 정정할까 고민한다. 그가 아니라 주님께서, 라고 해야하는 것인데. 그런데, …… 기이한 것이 있다면 그 소녀에게 그 호칭이 별로 틀리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아이에게는 순수성이 있어 때묻지 않게 신을 친근히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다만, 그렇지만, 아이가 친근함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그가 부르는 것은 신을 끌어내려 옆에 앉힌 것 같다는 기분을 당신은 느낀다. 그러다 모리츠가 찻잔에 든 티백을 꾹 누르자 정신이 든다.
“아, 그러면 떫어질텐데.”
“그래도 색이 우러나잖아요.”
“이 붉은 색이 맘에 듭니까?”
“이렇게, 붉게 물들어도 이것저것 섞으면 흐려진다는 게 좋아요. 여기에 우유를 넣으면 쓰지 않아요. 설탕도 잔뜩 넣을 거고요.”
그럼 이제 내 마음대로 만든 차가 되니까 좋아요.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말하고 우유가 든 주전자를 끌어 당긴다. 내 것을 만들어서 좋아. 하듯이, 눈가에 웃음기가 맴돈다. 당신은 첫날의 느낌과 다르게, 아이가 몰두하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몰두하여, 제 것으로 두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뭐, 아이들이 그렇지. 크면서 나아질 일이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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