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長의 聲張
센티넬버스 AU
그 순간은 공백이라거나, 침묵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순간이었다. 숨을 삼켜 코와 입안에서 바람이 도는 소리나, 귀를 오래 눌러 막으면 들리는 희미한 맥박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마땅히 받아야할 압력이나 흐름에서 똑 떨어져나와 홀로 있는 기분이었다. 유카와 란야는 그 순간을 고립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난파로 부르려고 했는데, 그건 원래 있어야할 곳이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 그만 뒀다.
「 순순히 협조해주기로 했고, 나이와 상황 참작을 해서 큰 처벌은 없어요. 하지만 외출에는 제한이 있어요. 꾸준히 어디 있다는 보고도 해야하고요. 괜찮나요? 」
「 ……. 」
「 네, 그러면 며칠 뒤부터는 테스트를 해야하니까, 지금은 쉬세요. 」
담당 조사관은 이런 일을 여러번 겪은 것처럼, 대답없는 사람 앞에 안내서와 계약서를 펼쳤다. 숙소에 대한 설명, 벌점이나 벌금, 향후 처우에 대한 안내 - 국가의 기관을 증명하듯 그것은 간결하고 후하게 적혀있었다 - 들. 유카와는 대충 훑고 성의없이 이름을 휘갈겼다. 오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곳에 머물 때도 가이드며 다른 인간들하고 부싯돌처럼 굴렀는데, 이 단정하고 답답한 기관에서 그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
노노에 마사키를 목격한 건 들어오고 난 뒤의 일주일 후였다. 그의 옆에는 곱슬머리의 청년이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곱슬머리의 웃음이 주를 이뤘고 한 쪽은 단답으로 툭툭 내뱉는 형태였는데, 시선이 떨어지기 어려웠다. 즐거워보였고, 괜찮아보였다. 여기의 반 수가 각자의 지옥에 갇혔다가 이끌려나오는데도, 감히. 운 좋게 일상을 일구고 있다는 배반감이 응어리지다가, 남자의 어둡고 푸른 눈과 마주치자 목 뒤를 달구는 수치가 되어 뚝 떨어졌다. 결국에 그는 없었던 것처럼 도주하여 밤새 뒤척였다.
행복과 단란을 바란 적도 없는데 그 장면은 종종 회자되고 왜곡되어 나타나곤 했다. 이름도 모르는 이가 감히 그걸 넘봤다고 혼내기도 했고, 그 떠드는 어린 애 자리에 앉아서 서늘한 시선을 몇분이고 마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달이었고, 많은 고립과 망각과 왜곡을 내두르고 나자 그 환상은 끊겼다. 아마, 자라는 아이들이 장난감 하나를 골라 얼굴을 처박는 것과 비슷한 증세였으리라.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안 것은 1년 뒤였다. 그 날은 정말로 첫 단추부터 꼬여있었다. 맡게 된 범죄자의 정신 상태는 손대지 않아도 이미 기이해서 뒤틀 수도 없었다. 환각제를 꾸준히 복용했다는 사실을 전부 몰랐던 탓에 그는 붙잡은 손을 몇번이고 뒤틀며 식은땀을 흘렸고, 파고들어 겨우 제압하고 난 뒤에는 온 몸에 불을 붙인 듯 뜨거웠다. 살겠다고 호흡을 고르면 그것은 살에 달라붙는 얼음이 되어 정신을 아주 더럽게 만들었다. 이름을 부르는 임시 가이드를 밀치고 달려나오면 감각이 하나둘씩 꺼졌다. 나약한 몸뚱아리가 빠르게 차단과 도주를 택해준 덕에 그는 우주를 유영하듯 꿈틀거렸고 어둠 사이의 시야와 살갗에 닿은 인영들이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꺼내줘! 저것 좀 어떻게 해봐!
XX, 나도 나가고 싶어! 라고 비명을 지른 게 상상 속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몰라 꽉다문 입새로 숨과 잘못 깨문 살갗의 피가 흘렀다. 아무리 손 뻗어도 벽이 닿지 않았고 내가 바닥을 제대로 딛고 있는지도 몰랐다. 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에,
뒷목을 덮어 짓누르는 손이 있었다. 순식간에 팔이 꺾이고 없는 줄 알았던 바닥에 뺨이 닿았다. 홀의 유리문이 열려 찬 바람이 들어왔다. 아, 오늘은 겨울이었구나. 열기와 냉기가 빨려들어가고 나면 감각이 선명했다. 눌린 어깨와 팔이 아팠다. 발톱이 하나 빠졌고, 무릎도 욱신거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돌아오면, 그제야 홀의 대리석 위에서 맨발로 내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등 뒤에 올라타 무게로 짓누른 남자는 그가 완전히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제 됐냐?」
무뚝뚝한 것 치고는 귀에 박히는 발음이었다.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려다본 시야에는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스쳤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유카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란야! 하고 달려오는 임시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노노에씨, 정말 감사해요. 이제는 제가 할게요….」
「됐습니다. 조심들 하시고.」
땀이 가득한 임시 가이드의 손이 제 팔을 붙잡아들고 뭐라고 애원하거나 안달복달하는 동안, 유카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제대로 살폈다. 명료하게 돌아오지 않은 감각으로도 상대가 저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알아챌 수 있었는데, 피곤과 짜증이 가득한 표정이었던 탓이다. 서늘한 푸른 눈이 제 꼴을 비웃는 것 같아서 그는 끝까지 눈을 마주쳤다가, 수습을 하겠다며 부축하는 가이드에게 기대어 일으켜질 즈음에 치웠다.
「고맙단 말은 안 하냐?」
「…….」
그게 맞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짜증 나게…. 그런 말로 대답한 것 같다. 최악의 첫인상이었겠지.
그리고 몇 년이었나? 몇 달이었나. 유카와 란야는 가이드를 몇 번이나 갈아치울 정도로 변덕스러운 그래프를 보였다. 유약한 일반인은 그에게 금방 휘말려 상담을 요청하거나 그만 두는 탓이었다. 결국 처음 들어왔을 때 만났던 조사원이 다시 나와 그와 긴 얘기를 나눴다.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나요?」
「그 사람들이 쉽게 휘말리는 거죠.」
「유카와군은 조절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요.」
「안 휘말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본인의 가이드 중에서는 없었죠. 본인의 조절이 필요해요.」
「……못하겠다면요?」
「…….」
불길한 침묵이 흘렀다. 쫓아내나? 그럴 수 있겠지. 그럴 거라면, … 아, 그는 오래된 분노와 배반감을 끌어와 웃었다. 악질적인 장난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나에게 휘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는 나를 싫어할테니까…. 싫어하는 걸 마주할 땐 그렇게 행복해지지 않을테니까.
「……혹시 가이드도 지정할 수 있어요?」
「음, 상황에 따라서는요.」
「그럼 노노에씨요.」
그 분은 이미 지정 센티넬이……. 그런 난감한 소리를 모른 척 자른 유카와가 한마디 덧붙였다.
「 그 사람 아니면 안돼요. 」
그렇게 마주한 서느란 푸른 눈이 짜증에 감싸여 있는 건 저열한 만족감이 일었다. 아, 그래, 당신, 정말로 날 싫어하는구나……. 테이블에 걸터앉은 유카와가 이죽이고 다리를 꼬아 턱을 괸다.
「당신을 부른 건 나예요. …잘 부탁해요.」
그 주는 센터가 유달리 부산했다.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규약이니 회의니, 국제의 이름이 달린 일정이 다가온 탓인지, 센터에 오래 근무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노트북이나 서류를 들고 펜을 굴리고 있었다. 노노에 마사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다지 서류 작업과는 관계없는 성가신 한량처럼 굴던 인간이 책과 노트북을 동시에 펼친 꼴은 썩 낯설어서, 아침을 먹고 들어가려던 유카와 란야는 그 모습을 흘끔, 흘끔 보다가 별 말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밥 먹고 바로 눕지 말라는 잔소리는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가 잔소리를 즐겨 듣겠는가? 그러니까 덜걱 좋다고 넘겨버렸지만.
00.
나도 모르는 음소거 버튼을 누른 양, 잔소리가 뚝 사라지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유카와 란야는 유감스럽게도 기억력이 비상하게 좋았으므로, 마사키의 잔소리가 날아들어오는 타이밍을 알았는데…. 점심 때가 다가와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며, 방문 앞에서 잠깐 서성이던 발걸음은 에이씨, 하는 말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던 유카와 란야는 허망하게 열리지 않는 방문을 쳐다봤다.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점심이야 혼자 있을 때가 있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에이씨. 같은 소리를 중얼거린 유카와가 몸을 다시 뉘였다. 게임도 흥미가 떨어져 대충 꺼버리면, 어설프게 덮인 커텐의 사이로 센터의 정문이 비쳤다. 화환, 현수막, 플라스틱 의자들…. 나르는 사람과 지시하는 사람이 뒤섞여 소란스러웠고, 군데군데에 아는 사람이 몇 보였다. 이전에 보았던 곱슬머리의 센티넬이나, 몇번 스쳐갔던 임시 가이드들이었다. 다들 알게 모르게 귀찮다는 얼굴이었고, 급하게 끼어든 노노에 마사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저기 불려가느라 급하게 나간 모양이지. 잘 됐네. 헹, 하고 웃은 소년은 그냥 눈이나 붙이기로 했다. 몇 시간 뒤면 방송이 쩌렁쩌렁 울려 자지도 못 할테니까.
01.
오후 6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센터의 유구한 발전을 위해! 라는 사회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깨우기 충분했다. 대부분의 수면이 얕게 고인 물인 소년에게는 차고 넘칠 정도였고. 기분 나쁘게 일어났지만 머리는 여전히 몽롱한 탓에, 유카와는 멍하니 창가를 등지고 책장을 바라봤다. 어슴푸레한 저녁에, 여전히 드리워진 커튼은 방 안의 물체를 희미하게만 비췄는데도, 이제는 눈에 많이 익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희미한 분홍빛은 3월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사은품으로 내건 벚꽃 유루카라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파르라니 빛나는 유리는 여름에 잠깐 팔았던 동물 조각이었다. 그리고 스티커를 붙이고 조립하는 작은 유원지 모형들. 대부분은 그가 사오기보단 노노에 마사키의 독단적인 선물이었다. 버리지도 못하고 끌어안는 습관이 어지간히 즐거워보였던 모양이었다. 개자식. 떠올리다보면 떨어진 것을 전혀 주울 이유가 없었다. 이참에 전부 버리라지…. 알게 뭐냐고.
그리고 1시간이 더 흘렀다. 유카와 란야는 불도 켜지 않고 세 스테이지를 막힘없이 깼고, 바깥에서는 희미한 클래식이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섞여 들렸다. 웃음소리도 들렸지만 정말 기뻐서 웃는 사람이 없을 건 뻔했다. 비즈니스의 연속이겠지…. 남들 다 바쁜데 노니까 좋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여유로움이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갑자기 내버려져 먼 바다에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저 가운데에 참여하라면 죽을 상을 지었을텐데, 왜 이렇게 서럽게 서늘한지. 내팽겨쳤던 이불을 끌어당겨도 온기가 돌아오지 않아 유카와는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생각에 고이는 것보다는 외면하는 게 나았다. 언제나.
……가물가물한 졸음 사이로 현관을 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 같았다.
02.
자고 일어나면 한밤 중이었다. 하루의 반을 잠으로 떼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리도 나지 않게 맨발로 나가 방문을 열면, 노노에 마사키는 소파에 드러누워 팔로 제 눈가를 가린 채 잠들어 있었다. 셔츠나 아우터가 평소에 입던 것보다는 단정한 류였다. 넥타이만 테이블에 올라간 걸 보면 들어오자마자 잠든 거겠지…. 마룻바닥에 대충 던진 팜플렛이며 홍보 서류를 손 끝으로 집어 쓰레기통에 버린 유카와는 잠든 사람 앞을 서성이다가, 소파의 끄트머리에서 멈췄다. 이 화상도 얕게 자는 인간인 탓에 시선마저 조심스러워야 했다.
"……바빴어?"
그렇지만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을 신경 쓰는 건 노노에 마사키의 할 일이 아니며 보살핌은 한번도 달갑지 않았는데도……. 그런데도.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괜히 잘못된 것 같았다…. 물론 그딴 마음을 본인에게 공개한다는 선택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르지 않겠지만.
"…됐어. 자라. "
뒤척거리는 인영이 뭐라고 되묻기 전에 유카와는 방문을 잠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대로 새벽을 보내고 아침 나절에 잠들면 이번에는 한사코 짜증을 부릴 얼굴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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