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이 된 사고
청명이설
다시. 팔을 더 들라고.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요즘 힘들어?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하지?”
“……”
“내일 걔네 이겨야 되는 거 아냐? 이대로면 가까이 다가가기는 커녕 그 전에 나가 떨어지겠는데?”
“모르겠어.”
엉?
청명의 짜증 섞인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유이설이 입을 뗐다. 모르겠다고. 어떤 느낌으로 해야하는지. 짜증에는 짜증으로 응수하기로 했는지, 목소리에 불만이 섞여있었다. 매일 하는 수련이었고, 매일 하던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모르겠다니? 청명은 어깨 위에 올려뒀던 검을 밑으로 내리며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봤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한 손에 검을 늘어뜨리고서는 반대쪽 손을 쥐락펴락하며 중얼거렸다. 손을 쳐다보느라 내리깐 눈이 천천히 깜박인다. 어디가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제 몸 상태를 점검하며 생각에 잠긴 듯해 보인다. 유이설이 조용히 머릿속을 곱씹고 있는 동안 청명도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찼다. 그럴 수가 있나? 이렇게 갑자기 매일 하던 동작이, 그것도 새로이 습득하거나 바뀌지 않고 완벽히 구사하던 동작에, 위화감을 느낄 수가? 팔십 먹은 매화검존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머리를 비워.”
“비웠어.”
“거짓말 하지마. 비웠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생각 안 해.”
“지금 사고 머릿속이 생각으로 꽉 채워져 있는데?”
아니야.
유이설이 작게 항변했다.
“정확하게 움직이면서 이길 생각만 해야지. 이걸 어떻게 하더라? 하고 있으면 안된다고.”
“나도 알아.”
“그치. 나도 사고가 알고 있는 거 알아. 근데 지금은 모르는 것 같아서.”
정신차려. 이러다 내일 지면 사고 때문에라고 한소리 듣게 생겼어.
청명이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말했다. 그런 고민을 할 때는 이미 지났어. 할거면 다 이기고 해. 오늘은 텄다, 텄어. 한쪽에 내팽겨쳐뒀던 검집을 주웠다. 이제 들어가서 자. 검을 정리하는 청명의 뒷모습을 유이설이 가만히 바라봤다.
“잘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밤인사를 덧붙인다.
**
“청명.”
“……”
“청명. 청명.”
“……”
“청명. 일어나.”
아, 왜!
모두가 잠에 들고도 남은 깊은 밤, 청명은 저를 깨우는 작은 손짓에 성을 내며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제 멱살을 꽉 붙잡고 늘어진 작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이 이내 고개를 들고 얼굴을 바라봤다. 청명이 아는 한, 이 사람은…
“청명. 큰일났어.”
“…어, 그래 보인다.”
유이설이었다. 근데 이제 열살(추정)인.
“그래서 그랬나. 이래서 그렇게 느낀 거였나. 그래. 그래서였어. 그래서 그런, 악!”
“시끄러워. 조용히.”
원래의 손보다 훨씬 더 작아진 유이설의 손이 청명의 머리를 후렸다. 작은 손이라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을 잔뜩 부린다.
열살 남짓한 어린아이. 아니, 열 살이 맞긴한가? 너무 작고 마른 탓에 진짜 열살이 맞는지조차 의심된다. 청명은 앞에 앉은 작은 유이설을 조목조목 뜯어봤다. 검을 쥐느라 박힌 굳은 살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리저리 긁힌 상처들이 한가득이다. 길바닥 출신이랬나. 청명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
“……”
“……”
“……”
숨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아니, 분명 평소에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편하면 편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이 청명의 흔들리는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작아져서 그런가. 큰 유이설일 때도 가늠을 하기가 힘들던 머리통이 더 알기 힘들어진 것 같다고, 청명은 생각했다.
“어떡해?”
“…뭘?”
무엇을 물어오는지 뻔히 알면서 괜히 되묻는다. 뭘? 어려졌어, 나. 청명은 대답하지 못한다.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든다거나 하려는 게 아니었다. 진짜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답하지 못했다. 매화검존의 입장에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청명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이 일은 장문인께 알려야할 중요하고 큰 일이었다. 그것도 아아아아아주 큰 일.
**
“음, 그러니까? 이 아이가 지금 이설 도장인 거고? 대충 열 살? 즈음 인 것 같다? 라는 말씀인거죠?”
“어, 그렇다니까. 그리고 좀 조용히 말해.”
청명이 장문인에게 가 이 아이가 유이설이다, 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문인은 유이설을 알아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하긴, 청명도 이 상황이 황당해죽겠는데 현종은 오죽할까. 현종의 옆에서 함께 유이설과 청명을 맞은 현상이 현종의 턱을 슬쩍 닫아주었다. 현영은 이미 상황파악을 끝내고 천우맹 회의를 열여야 된다며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다 깨우고 있었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천우맹의 중요 인원들이 모인 자리가 금방 만들어졌다. 작아진 유이설을 무릎에 앉힌 청명이 상석을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작은 유이설은 작아진 머리로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을 따라가는 게 벅찼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상은 없는 건가요?”
“열 살로 어려진 게 이상이 있는 게 아니면 뭡니까?”
“그런 거 말고, 건강에 이상이 없냐, 이 말이잖습니까.”
“어, 이상 없어. 잡담하지 마. 애 자니까.”
임소병과 남궁도위가 작게 대거리를 하는 것을 물린 청명이 조용히 말했다. 낮게 말하는 모습이 퍽 다정했다. 유이설을 자연스럽게 ‘애’라고 칭하며 보여주는 부드러운 태도가 낯설다. 제 식구들을 끔찍이 생각해도 정작 말로는 내색하지 않는 청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청명이 화산의 제자에게 다정하게 애 취급하는 모습이라니. 애가 애를 애 취급… 자리에 앉은 모두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청명과 그 무릎 위에 앉아 청명에게 편안하게 기대어 자고있는 유이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청명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왜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아니, 그거 말고.”
“뭔데, 그럼.”
“왜 사매가 네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건지?”
“그러니까요.”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안돼. 자는 거 안 보여? 처음부터 저한테 맡겼으면 됐잖아요. 안 떨어지는 걸 그럼 어떡하라고. 안 떨어진 건 사고가 아니라 너 아니냐? 어 아니야.
유이설의 안녕이 확인되자 백천이 건강 다음으로 모두가 궁금해했던 주제를 꺼냈다. 거의 안다시피 한 자세였다. 청명의 손이 유이설의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소소가 화산에 온 뒤로부터는 관리를 받아 반질반질한 머리카락이었다. 어린 유이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머리칼을 청명은 살살 쓸어내렸다.
“아파, 청명.”
“아, 아팠어? 미안.”
잔뜩 엉켜서 청명의 손에 걸린 머리카락이 당겨진다. 유이설은 제 머리가 당겨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몽롱했던 눈에 초점이 잡히고 청명과 유이설에게 잔뜩 집중하고 있는 천우맹도들을 훑는다. 유이설은 본인에게 쏠린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청명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돌려 팔을 뻗었다. 유이설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청명이 뻗어진 손을 붙들어 목에 감았다.
“…뭐하는? 건지?”
“안아달라는 걸 안아줬을 뿐인데.”
다들 그렇게 보니까 부담스러워 하잖아. 눈 안 돌려? 지금 우리 사고는 열 살 먹은 꼬맹이라고. …누가 꼬맹이야. 어, 그래. 아니라고. 응, 아니, 아 아파!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청명이 말하자 유이설이 청명의 볼을 손으로 마구 꼬집었다. 어려지면서 폭력성도 같이 늘어난 건가? 빨갛게 변한 볼을 만지작거린다.
“청명아. 앉아라. 일은 마무리 하고 가야지.”
“일이랄 게 있나. 지금 당장에 사고를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도 없잖아. 기다리다보면 나아지겠지. …일단 먼저 재우는 게 낫겠다.”
어이, 사고. 일어나봐. 지금 방에 데려다줄게.
청명이 다시 잠들려는 유이설을 데리고 회의방을 나섰다. 청명과 유이설이 나간 천우맹도들은 모두 얼빠진 채 앉아있었다.
작은 유이설. 열 살의 유이설. …지금이랑 똑같네, 아주. 잠든 유이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 열 살이 이렇게 작은가. 제 손바닥을 겨우 채우는 손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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