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이상기류

변호사 청명 x 기자 유이설

이상으로 판결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아니에요, 뭘요. 제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재판이 끝난 동시에 잔뜩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일그러진 얼굴로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는 남자와, 반듯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변호사라 불린 남자.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남자에게서 신뢰의 웃음이 새어나온다. 허리를 잔뜩 굽혔다 피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부축한다. 변호사는 남자를 감싸안듯이 부축하며 재판장을 나선다. 모범적인 변호사의 모습이었다. 유이설은 그런 변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았다. 아. 눈이 마주쳤다. 변호사는 잠깐 멈칫 하는 듯 하더니 다시 눈을 돌린다.

변호사, 그러니까 청명은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 눈치도 보지 않고 언제나 당당한, 그런. 대학교 2학년 때였나. 동아리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신호등이 바로 바뀌고 버스가 곧 도착하고. 하지만 뜻하지 않게 소소의 손에 이끌려 술자리에 참석하면서 유이설은 생각했다. 이러려고 잘 풀렸던 건가? 술잔이 아닌 물컵을 만지작대며 물만 연거푸 들이켰다.

 

“이거 미친새끼 아냐? 야 쟤 막아!!”

“아 제발 청명아. 법전은 사람 머리 내려치라고 만든 게 아니야. 어? 조금만 참자.”

“이거 놔, 선배. 저 새끼 못 잡으면 쟤 죽고 너도 죽는거야.”

“나는 왜 죽는데.. 야 빨리 청문선배한테 전화해!”

 

술집 한구석이 소란스러웠다. 소란의 가운데에서 한 손에 두꺼운 법전을 위협적으로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과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던 유이설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미친새끼. 선배, 쟤가 걔예요. 법학과19 미친개. 으응, 그렇구나. 뭐, 우리야 편하긴 하죠. 이상한 개소리하는 새끼들 전담 일진노릇 해주니까. 이제는 말리는 사람들의 팔을 이리저리 깨물고 있다. 진짜 개 같긴하네. 그쵸? 하는 짓이 아주, 개에요, 그냥. 개. 청명에 대한 유이설의 첫인상은 그랬다.

 

훗날, 다시 만난 청명은 조금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탁 좀 하자. 유이설은 청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재미없고 조용한 일상에 끼어드는 일이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거, 기사로 써서 좀 퍼뜨려줘.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런 곳에다가. 청명이 들고 온 것은 A기업의 비리들이었다.

그날부로 유이설은 강의를 듣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 모두를 기사작성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정리된 서류들을 여러번 읽어보면서, 문장들을 써내려갔다.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고 조용했던 유이설은 글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조사 하나를 틀리면 문장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었다. 샷이 추가된 커피를 들이키면서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이설에게 맡겨진 첫번째 기사의뢰였다.

 

**

 

유이설의 허벅지 위에 놓인 노트에는 어떠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뭐야?”

“일.”

“너 원래 이쪽 담당 아니었잖아.”

“그런 거, 안 나눠.”

 

참나. 내가 오라고 할 때는 그렇게 버티고 있더니. 이제와서?

 

재판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유이설의 옆에 서서 빈 노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왜 온 거야?”

“재판 보러.”

“그 말이 아니잖아.”

“기사 쓰러.”

“그 말도 아니잖아.”

 

ㅈ청명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은 서로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원체 말이 없는 편이었던 유이설의 의중을 빠르게 파악하고 움직였다. 청명의 작은 배려들이 유이설의 일상 곳곳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청명의 배려가 익숙해졌을 무렵, 법학과와 신방과의 종강파티 장소가 겹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이설은, 취했다. 거나하게. 그날따라 이상하게 술이 잘 받았었다.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들 몇몇과 술잔을 주고 받았다. 여기 안주 맛집이네. 유이설이 조용히 앉아 잔치국수를 흡입하고 있을 때, 옆 테이블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어느새 법학과와 섞여앉아 누가 어느 과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천천히 먹어. 더 시켜줄까?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진짜 정신없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청명은 조금 권태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술자리에서는 신나서 달리더니만.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귀찮음이 뚝뚝 묻어난다. 여기 국수 한 그릇만 더 주세요.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전혀 없었다. 생각보다 성실하네.

 

- 자료, 어떻게 모은거야?

- 글쎄.

- ......

- 기사 쓰는데 출처도 써야되나?

- 그건, 아니.

 

그럼 됐네. 알려고 하지마. 다쳐.

드라마 대사를 따라하는 건가? 이건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 거지? 국수를 흡입하는 것도 잊고 청명을 뚱하게 바라본다.

 

-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긴. 자료들의 퀄리티만 봐도 이건 일반인 유이설이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신비주의가, 좀.

 

- 근데, 이걸 왜 나한테?

- 그쪽이 과탑 아닌가?

- 아.

 

유이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여튼 이상해... 청명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유이설도 청명을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

 

 

“재판도 끝났는데, 이제 뭐할거야?”

“......”

“할 일 없으면 밥이라도 먹자. 그럴만한 시간은 되지?”

 

유이설의 손에 들린 노트를 손수 정리한 청명이 팔을 잡아끈다. 시간 없어. 어 나도 없어. 항의하는 목소리가 금세 묻힌다.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우리가 아무리... 아니다. 법원 근처 국수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말을 꺼내다가 만다. 애꿎은 물잔만 계속해서 만지작댄다. 유이설은 이런 자리가 불편했다. 전...비즈니스? 전.. 파트너? 전...남친은 아니다. 사귄 적이 없었으니까. 전..친구도 아니다. 친구였던 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유이설이 청명보다 두 살이나 더 많았다.

 

아무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한정적인 유이설의 세상을 넓혀준 건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소소, 청명, 윤종... 유이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렀다. 작고 소중한 인연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이설은 청명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자마자 청명과의 교류를 서서히 줄여나갔다.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유이설의 대학 동기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그럼 유이설은 이렇게 답했다. 그러게... 속으로는 청명을 생각하면서.

 

- 법원 앞이라매. 어디야?

- 나 국수집

- 혼자? 나 지금 점심시간인데 그쪽으로 갈까?

- 아냐, 오지마. 청명이랑 있어.

- ??

- 어쩌다보니.

- 오키키.. 나도 구애인사이에 낑겨서 밥먹기는, 좀.

- 구애인은 무슨. 사귀지도 않았는데.

- ?????????????? 안 사겼었다고?????

- 응. 내가 얘랑 사귄다고 했던 적 없지 않았어?

- 아니 둘이 분위기가 이상하길래 비밀연애인줄 알았지... 당사자가 먼저 말 안해주는데 헤어졌느니 어쨌냐느니 먼저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런가.. 청명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온 대학 친구의 연락이었다. 대학시절 좀 많이 붙어다니기는 했었다. 심지어는 잠(not sleep)까지 잤었으니 그런 분위기를 느낄만도. 비즈니스 치고는 좀 많은 것들을 함께한 사이였다.

 

- 너네가 안 사귀었다는 게 올해 가장 큰 충격임.

 

충격까지야.. 친구의 연락을 읽으려 문자창에 들어가려할 때 청명이 자리에 앉았다.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정의되지 않은 관계에 친구라는 라벨을 붙일 때까지는 딱히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청명은 전부터 유이설의 생각을 전부 꿰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정작 유이설은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

 

 

 

“답장 좀 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보지도 않아?”

“바빠.”

“나도 바쁘다고. 늦게 봐도 답장은 좀 하지?”

“급한 연락, 아니잖아.”

“그래도 좀 하라고.”

 

답답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린다. 그동안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도 잘 안읽었다. 읽어도 답장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나 차단한 거 아니야?

 

“핸드폰 줘 봐.”

“응.”

 

얼씨구. 달라고 하니까 또 준다. 헤어진 사이에 이럴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근데 너무 순순하게 주는 것 아닌가? 나랑 헤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이랑 만날 때는 핸드폰 공유도 잦았나보지? 청명의 눈썹이 휙 올라간다.

 

- 너네가 안 사귀었다는 게 올해 가장 큰 충격임.

 

사귀어? 누가? 유이설이? 저를 차단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간 메신저 창이었다. 제일 위의 빨간 숫자 1이 떠 있는 창의 내용이 눈길을 끈다. 청명은 앞에 앉아 국수를 흡입하다시피 먹고 있는 유이설의 눈치를 한 번 쓱 봤다. ...관심 없는 것 같지? 차단여부 확인하다가 그랬다고 해야지. 맹한 유이설은 그냥 고개나 한번 끄덕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청명은 봤다.

 

‘구애인은 무슨. 사귀지도 않았는데.’

 

음? 이거 혹시 내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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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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