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춘하추동春夏秋冬

청명이설

춘하추동春夏秋冬

00

“사매, 이것 좀 봐. 꽃이야.”

화산 전각을 둘러싼 매화나무에서 꽃들이 활짝 피었다. 언제 앙상한 가지들만을 내비쳤다고 이제는 분홍빛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유이설은 절벽에 서서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봄. 봄이라.

유이설의 봄은 언제 다시 찾아던가?

그날 사형의 손을 잡았을 때 부터? 나도 그에 맞춰 매화를 피울 수 있게 되었을 때 부터?

아니면, 더 이전인가?

01

유이설의 첫 기억은 보드라운 손이었다. 따뜻하고 애정이 가득 담긴 그런 손. 어린 시절 유이설은 따뜻한 손을 붙잡고 몇시간이고 거리를 거닐었다. 장에 가서 먹거리도 사고, 살랑거리는 바람도 맞으면서. 가끔 손을 놓아도 기분 좋은 시선이 유이설을 주시한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 더 크고 딱딱한 손이 유이설을 안아든다.

어린 유이설은 거리를 걷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어릴 적 제일 먼저 찾아온 포근한 봄이었다.

름夏

02

익숙한 손이다. 보드랍고 따뜻했던 손이 자꾸만 온기를 잃어간다. 유이설은 그 손을 붙잡았다. 금세 다시 힘을 주어 마주 잡아올 것만 같은 손이 축 늘어진다. 마음 한구석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무언가 자꾸 끓어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울컥하고 터져버린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열을 빼앗겨가는 것이 싫어 유이설은 꽉 쥐었다. 마주잡은 손이 점점 뜨거워져 간다. 곧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일 것만 같다. 아닌가. 실제로 녹고 있는 건가. 제 눈 앞에 보이는 형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이설아.

손이다. 유이설은 자기를 안아드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단단했다. 품 속에 머리를 기대자 딱딱한 손이 감싸온다. 유이설을 감싼 손이 떨린다. 참을 수 없는 열기가 올라온다. 자꾸만 터지는 무언가가 멈추지를 않았다.

나 이거 책방에서 봤어. 이런 느낌은, 그러니까. 여름이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했어. 뜨겁고, 끈적끈적하고, 질척거린다고.

밖에는 비가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빗물을 머금은 공기가 축축하다.

을秋

03

매일 외출을 한다. 딱딱한 손을 마주잡고 거리를 걸으며 장에도 가고, 살랑이는 바람도 맞는다. 고개를 돌리면 단단한 손이 유이설을 안아온다.

하지만 봄이 되지는 않았다.

울冬

04

손과 발이 시려웠다. 얇은 신발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익숙한 공포가 밀려들어온다. 나가볼까? 하지만 나가지 말라고 했는 걸. 끌어안고 있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추워. 빨리 나가고 싶어.

분홍색 꽃잎이 흩날린다. 하얀 눈 밭에서 만개한 꽃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이설은 꽃잎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이설은 바위 틈속으로 몸을 더 움츠렸다.

아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상처가 잔뜩 난 손이 다가온다. 유이설은 몸을 움츠렸다. 그에 잠시 멈칫한 손은 속도를 더 늦춰 다가왔다. 손이 눈 앞에서 멈췄다.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듯 가만히 머무른다. 문득 유이설은 온몸에서 느껴지던 한기가 더이상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 앞의 손을 마주잡았다. 따뜻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유이설이 찾은 유일한 온기였다. 익숙한 품 속은 아니었지만 얼음장같은 손을 녹이는데 무슨 상관이 있으랴.

꽃들은 아직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피어나고 있었다.

사형, 다 끝났어요.

어, 그러냐? 그럼 이제 돌아가자꾸나.

어… 그 애는요?

여기 틈에 앉아있더구나. 아마도…….

…아아.

긴 머리카락을 대충 하나로 묶어올린 사내가 걸어왔다.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이 눈 위로 떨어진다. 유이설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 끝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조금 틀어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저에게 뻗어진 손 보다는 조금 작은 상처투성이의 손.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 같았다. 어디선가 온풍이 불어온다.

05

상처가 가득한 손을 붙잡고 들어선 곳은 화산의 입구였다. 유이설은 그대로 화산에 입문하여 화산의 검을 배웠다. 목검에서 진검으로, 작은 손이 검수의 손으로 변할 때까지. 유이설은 쉬지않고 검을 휘둘렀다. 시간만 났다하면 검을 쥐었다.

봄을 끌어오고 싶었다. 그때 그 매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시, 봄春

06

유이설은 가끔 멍하니 본인의 손을 들여다 본다. 어느덧 상처가 가득해진 손. 굳은 살이 이리저리 박혀있는 것이 그때의 손과 같았다. 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훔쳐내던 그 손과.

“사매. …사매? 뭐야? 야, 유이설!”

“아.”

그 손이다. 어릴 적 흩날리는 눈을 뚫고 꽃을 피워내던 손. 차가운 것으로만 이루어져있던 유이설의 겨울에 유일하게 뻗어진 온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길래 내가 말하는 것도 못 들어? 응? 아, 진짜. 또 딴 생각하네.”

“안했어, 딴 생각.”

“거짓말하지마. 그럼 내가 방금 한 말이 뭐였는데?”

“그건…”

“하, 이것 봐. 이래놓고 딴 생각을 안 했다고?”

청명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파바박 긁었다.

“매화 보여줘.”

“엥? 여기 많이 있잖아.”

“이거 말고.”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보여달라고?”

“응.”

청명은 구시렁대면서도 검집에서 매화검을 빼냈다. 곧 검 끝이 흔들리면서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붉은 검기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매화나무에 달린 꽃을 흔든다. 이내 유이설도 검을 든다. 검기가 섞이며 더욱 화려해진다. 매화 꽃향기를 실은 붉은 검기가 화산 전각으로 내려앉는다.

“네 꽃도 이제 만개야.”

청명이 전각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07

문득 유이설은 깨닫는다. 봄은 이미 나에게 와 있었구나.

08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보여달라고 따라다니는 것 좀 그만해. 보고 싶으면 네 걸 펼쳐서 보라고. 아니면 네 사부한테 가든가.”

“내 사부는 너야. 그리고 내 것보단 네 것이 더 완벽해.”

“아오, 진짜. 네 사부가 왜 나야. 진짜 사부가 들으면 슬퍼하겠다, 아주.”

“너, 슬퍼?”

“아 그 말이 아니잖아!”

꽃향기가 난다. 언제 왔는지 모를 완전한 봄이었다.

09

유이설은 저도 모르게 다가온 봄이 언제 제 앞에 나타났는지 돌아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아마 저 손으로 틔운 꽃을 보았을 때 겠지. 그게 몇 번이었든 유이설에게는 전부 입춘이었을 것이다.

화산의 검이 부러지지 않는 한 유이설의 봄은 몇번이고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했기에. 유이설은 봄을 좇는 것을 그만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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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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