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드림

Shepherd's Purse. 미완

냉이,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메테오와 이야기를 다 나눈 르페인은 돌아서서 익숙한 청년을 쳐다보았다. 눈에 튀지 않는 색을 차려입으며 여행자라 자칭하는 청년. 잠시 말을 걸까 고민했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순서를 뺏었으므로 마음을 돌렸다. 수염이 덥수룩한 메테오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르페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절친한 친우는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는 터프한 행색과는 다르게 귀신처럼 밤말과 낮말을 알곤 했다. 정말 귀신이라도 있나 보지. 농담조로 이야기하기엔, 르페인도 귀신 같을 걸 보곤 하지 않던가.

대답을 흐리며 르페인은 자리에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발목에 긴 천자락이 걸린다. 이 밝고 푸른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고원의 흙과 재를 닮은 색이 나긋한 바람에 흔들렸다. 귓가에 황금 장식이 부딪히는 쇠소리가 들리고, 밤이 오지 않는 거대한 천당에 서서. 그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깨지며 흔들리는 그의 천국과 함께.


조언자.

예언자.

방랑자.

여행자.

그를 부르는 이름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오지를 걷다보면 수평선에 홀연히 나타난 작은 천막. 이국적인 향이 입구에서 늘어지고 손때 먹은 향로가 기둥에 걸려 달그락거렸다. 산양이 떼를 지어 버석한 풀을 불평 없이 뜯어먹었다. 양떼의 등은 거무죽죽한 털로 된 동산처럼 보였고, 그 사이로 천막의 주인이 허리를 피고 손을 흔들었다. 천막의 손님들은 교역로를 지나가는 상단이 주를 이루었다. 거만하고 야박한 상인들도 까마득한 여행길을 거치고 나면 지쳐서 성질이 누그러 들었다. 그들은 천막의 주인이 이 황야에 홀로 사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다가, 신비로운 분위기에 알아서 짐을 풀고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다. 랄거의 떨어진 혜성, 벼락 모양으로 난 흉터를 가진 청년의 이야기는 이 지역에선 흔한 것이었다. 해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르페인은 까맣게 탄 카드를 잘 섞으며 질문을 했다. 무엇이 궁금하여 왔느냐고. 그들은 평범한 점쟁이에게 할 법한 질문을 여럿 늘어놓았고, 르페인은 고개를 저으며 익숙하게 거절했다. 두건의 금속장식이 짤랑거림을 멈추어서야 설명 들을 준비가 된 손님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시장에서 보았다면 그런 질문을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송곳으로 과일을 베려면 시원치 않은 법. 나는 다른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해드릴 수 있습니다. 손님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그게 언제 손님에게 닥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정말 궁금하지 않다면 방금 하신 질문들의 답이라도 찾아드리겠습니다.

가끔은 손님이 보란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때로는 불쾌한 실랑이가 시작되곤 했었다. 그러다 테이블이 조용해지면, 르페인의 카드는 비로소 파멸과 고통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어떻게 해야 그 유성을 피해갈 수 있을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시작에 이미 빈정이 상해버린 손님은 르페인의 점을 믿을 기미가 없었다. 복채는 대부분 빈손이었고 르페인은 개의치 않았다. 본래 그런 직업이었다. 그의 신력은 누군가의 생일이나 복날보다는 재수가 진저리 없는 날에 쓸모가 생겼다. 강인한 정신을 신조로 삼는 기라바니아인들에게 그런 종교만이 허락되었는지. 자신이 어쩌다 그런 신앙을 모시고 직접 행하는 사제가 되었는지. 오직 세월만이 설명해주리라.


르페인 메로프의 기구한 삶. 젊은이가 기구할 것이 뭐 있다는 구박을 들을 성도 싶다마는. 그에게 구박을 할 수 있는 세대는 잘 살아남지 못했다. 수차례 들이닥친 시련 속에서 그는 어느덧 평균 수명을 반 넘게 나이를 먹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수두룩한 카드를 뽑아본 그의 손가락은 카드에 베이고 눌려 생긴 굳은 살도 있었다. 이 손으로 그는 전쟁터와 세상 끝을 오가며 운명을 바꾸었다. 기껏 뽑은 카드가 재앙을 나타냈을 때, 그는 지고한 신과 그들이 거주하는 천국에 빌고 빌어 예언을 비집고 뒤집었다. 고이 순종하는 것은 그의 사명이 아니었다. 혜성을 피해 살아남은 조상을 본받아 파멸의 별을 읽는 후손. 그는 자신을 찾는 손님에게 운명을 피해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조상들이 랄거의 비석에 남긴 글귀는 이렇다.

피바람이 다가온다.

제국의 식민지 정책 속에서 태어난 삶은 그다지 살만하지 못했다. 평생 2등 시민에, 전통 신앙 종사자로서 허구난 날마다 압수 수색을 받았다. 그래도 색색으로 천을 짜는 점술사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다. 르페인이 점을 치는 카드는 양육자가 쥐어준 대로 새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점을 보러 오는 사람이 적었다. 그들은 오로지 토속 신앙의 집행자로서 생계를 유지했다. 여전히 고원 사람들은 부모가 장례식을 치르는 방식으로 혈육의 장례식을 치르길 바랐고, 전통이 더 뿌리 깊은 마을에선 경삿날에도 사제를 불렀다. 마냥 심심한 삶은 아니었다. 검손하게 살 것을 맹세한 대로 르페인과 형은 산양 떼를 유목하며 고원의 온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척박한 땅에 드높이 세워진 랄거 상이 부서졌을 시절. 그리고 고원에서 세워진 나라가 기울었을 시절. 전란이 휩쓸었을 시절. 양육자로부터 들은 역사는 자랑스럽지 못한 패전국의 이야기였고, 자국의 긍지란 것도 흐려진 지 오래였다. 푸른 기름으로 움직이는 쇠와 그 기계가 뿜어내는 불로서 지배층이 된 외지인들은 기라바니아 원주민들을 착취했다. 에오르제아 대륙에서는 ‘무풍의 시대’라 부르던 때에 고원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한 몸처럼 믿고 의지한 형이 울분을 참지 못해 천막을 뛰쳐나갔던 날. 르페인은 알라미고의 미련에서 등을 돌렸다. 병역으로 뽑혀간 젊은이가 말도 할 수 없는 몰골로 돌아왔다던가. 그 사람이 형제와 긴밀한 사이였는지는 말을 삼갔다. 다만. 며칠 후 병력 차출 순번이 르페인 앞으로 올 것만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지옥이 열리고.

무정한 인간이었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대지의 온화한 그림자로 숨어들어갔다.

르페인은 고찰했다. 떨리는 손으로 뽑는 뻣뻣한 종이 조각마다 걸린 불길한 검은색에. 그는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어둡고 뜨거운 철붙이의 영혼 없는 존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며 그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짜고, 늙은 산양에게 방울을 달았다. 불안 속에서 물었지. 영혼이 없는 것의 운명을 점칠 수 있을까.

달이 둥글게 부풀다 다시 여윌 세월이 몇 번 지났다. 새로 짜인 천은 모양이 성기어 금세 실이 풀렸고, 방울을 달아 보낸 늙은 양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나먼 산중에 딸랑 거리는 환청을 들으며 르페인은 신들의 거처와 존재에 대해 이토록 깊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같은 자리에 너무 오래 친 천막은 진흙색이 되어갔다. 그림자에 잠겨 흙이 마르지 않는 자리. 풀이 마르고 풀허리가 닳아 끊기는 계절이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천막의 주인은 작은 산양에게 방울을 메고 마을에 맡기러 내려갔다. 계곡 깊은 자리의 잘 자란 풀을 먹어, 제국이 불러들인 지옥과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무리에는 그해에도 생명이 태어났었다. 어미의 등무늬가 고스란히 올라온 작은 암양은 주인이 부리는 육식 짐승도 무서워 않고 주인의 뒤를 잘 따라왔다.

더는 환청이 아닌 방울소리를 달고 마지막까지 그가 교류를 이어가던 작은 마을에 당도했을 때, 그가 찾던 마을은 평소보다 사람이 붐비는듯했다.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주목을 끌자 몇몇은 그에게 총구를 겨누기도 했다. 그러나 누렇고 푸른 옷을 기워입은 사람들은 민간인에게 금세 경계를 풀었다. 해방군 세력이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이들은 그의 형한테 들었다며 아는 척을 해왔다. 형은 잘 지내던가요. 섭섭한 마음을 주워담으며 안부를 나누고 촌장과 산양의 값을 치고 있노라니 서쪽에서 불길한 굉음이 들렸다.

서쪽은 막연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방향을 겨우 알아차리고 거리를 가늠해기도 전에 코앞까지 적군이 들이닥쳤다. 촌장이 르페인의 손목을 끌었으나 그는 등에서 천구의를 띄우는 게 먼저였다. 숨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카드를 빼어들었다. 카드는 정방향이었다. 죽음. 적군의 군화보다 조잡한 가죽 신발이 민간인을 보호하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르페인은 기억 속의 전투용 치유마법 미약하게나마 떠올리며 가까운 군인들에게 방어마법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적군은 해방군과 접선하는 마을을 섬멸할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사암기둥이 미리 설치된 폭탄에 폭파되었다. 모래와 돌더미가 스러지며 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바람이 잘 부는 날이었고 그 바람은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에서 불어왔다. 잘 짜인 계획을 갖고 접근했고 그 계획의 목표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화약의 불길한 구름에서 처음 튀어나온 게, 총구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새도 없었으니까.

네메톤. 직접적으로 펼친 방어막에 첫번째 제압사격이 막혔다. 그러나 총칼을 든 2열대가 달려드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버티고 서있다간 급소를 찔리기 딱 좋았을 것이다. 난투전이 시작되기 전에 르페인 곁에 군인이 서넛 붙었다. 방어해주는 대신 치유를 맡긴단 마음가짐이 너무 무르지 않냐는 농담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국어로 날선 고함이 곧바로 찔러 들어왔다. 칼과, 총탄. 쇠가 스치고 칼의 이가 빠지는 파열음. 트리스켈리온. 죽은 사람의 넋이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미신. 지상에 빛나는 별을 깔면서 그가 뒷걸음질 하지 않는 건, 앞에서 버티고 서주는 방어진이 있어서.. 그것도 셋.

둘. 등 뒤는 막힌 골목이었다.

하나. 아니. 그는 자신을 가로막고 선 사람의 복부로 관통되어 자신에게 향하는 창끝을 보았다.

천국은 스러진다.

그의 등과 살을 깊이 가로지르는 벼락의 고통에서 다시 목숨을 부지했을 때 그의 손에는 소문과 달리 신의 힘이라던가 축복 같은 건 쥐어지지 않았다. 한여름의 말라버린 우물보다 볼품 없는 마력도 그러했고 두 다리도 서있는 것이 고작인 체력도 그러했다. 귀에선 이명이 들리고 턱은 다물리질 않았다. 카드를 쥔 손은 그대로 충격을 받아 관절이 굳은듯했다. 맹세컨대, 자신의 영혼은 이곳에 멀쩡히 걸어들어왔을 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원래는 이런 마법이 아니었다. 지상으로 불러들인 죽은 넋이 시전자에게 고통을 남겨선 안 됐다. 비리고 붉은 액체가 바닥과 팔을 뒤덮었다. 그러나 벼락이 그 혼자에게만 떨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검게 타버려서 그림도 읽을 수 없는 카드를 들었다. 죽음. 익숙한 무게감으로 손가락에 잡힌 종이의 이름을 외운다. 방금 벼락으로 자신의 죽은 부분까지 끌어 쓴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렇게 죽도록 어이없는 순간이어도 살아만 남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파괴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혼은 없기에.

르페인은 살아남았다. 몇 번 더 정상적인 넋을 부르고, 몇 번 더 금기를 부여하며. 미신으로 가득차고 역사에서 잊혀지는 낡은 마법 체계를 위험한 경지까지 다루었다. 그가 그토록 믿고 기만하며 시험하는 신은 그에게 벼락을 업고 다니는 듯한 흉을 새겼다.

마을주민과 해방군 중 몇몇은 목숨을 부지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목격한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파괴신 랄거께서 어느 점쟁이의 몸으로 강림하였고 제국군은 천둥우 앞에서 무릎을 꿇었노라고.

그게 그의 인생을 빛내게 한 작은 기적이었고.

그런 원치 않은 기적 탓에 르페인 메로프라는 청년은 제국민을 불온하게 선동한 죄로 수감되었다.

해방군이 카스트룸 아바니아에 갇혀있던 그를 구조했고, 에오르제아에서 온 외지인 단체가 그를 영입했다. 그 단체의 이름은 새벽의 혈맹이었다. 오랜 구금 기간동안 초월하는 힘을 보유한 채로 살아남은 그를 향해 의심을 품는 자도 있었다. 알라미고 성을 탈환하는 작전에서 그는 부족민들끼리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해방군에게 도움을 주었다. 감시가 풀린 것도 그 즈음이었고, 르페인 메로프의 행적이 묘연해진 것도 그 어디쯤이었다.


길다면 길었다. 천국문을 두드리고 지옥문을 걸어잠근 나날이었다.

밤하늘이 반사된 천구의로 점을 쳤을 때 그는 예지에 의문을 품곤 했다. 낡고 오래되어 맥이 끊긴 기라바니아의 점성술에는 스승도 마땅히 존재하는 않았다. 다른 학파는 별과 행성의 배치만을 알려줄 뿐, 르페인이 보는 거대한 뇌천의 번개줄기를 읽지 못했다. 뇌천을 중심으로 하늘의 별들을 옭아매고 솎아내는 파괴의 흐름. 그 창백한 빛줄기를 따라가면 별이 언제쯤 깨질지 손에 잡힐듯 선명했다. 그것이 르페인이 믿는 천국의 가르침이자 은총이었고 르페인의 입을 통해 비정한 진실로 전해졌다.

섬세하고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구강을 통해 신의 뜻을 발음한다. 대부분은 가벼운 불운이었다. 가볍지 못한 것을 말해야만 했다. 면전으로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나 비웃음, 가끔은 모욕적인 저주 따위였다. 뇌천의 움직임이 기어코 맞아떨어지면, 눈 먼 보복이 돌아오기도 했다.

르페인에게 관련된 별들이 계로정렬되기 뇌천의 주인이 직접적으로 별빛을 조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렬한 변화였다. 길성인지 흉성인지 구분할 단서가 턱없이 적었다. 이쯤의 그는 ????이미 해산된 일행의 부름에 쉬이 응했던 것은 그런 피곤한 일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다. 그 즈음부터 버릇처럼 미래를 점칠 때마다, 그의 앞에 거대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낌새를 읽어냈던 것이다.

망자의 종소리. 기묘한 색의 안개가 낀 도시였다. 메테오가 먼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깊은 사연을 가졌지만 함구하는 그라하. 그리고 올드 샬레이안에서 알게 된 협력자 쿠루루. 새벽에서 만나 신뢰를 쌓은 네카르.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잡담을 하고 있으니, 낯익은 얼굴이 하나 더 나타났다.

자신을 평범한 모험가라고 이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르페인은 그 사람을 손님으로 기억했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었고 지나가는 상단은 커녕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홀연히 천막에 자신보다 먼저 들어가 있어서는 하룻밤 묵어갈 자리를 물더랬다. 짐도, 일행도 없었다. 사람이 아니고 영혼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존재의 점을 쳐도 될까. 르페인은 직감적으로 든 의문을 속에 담아놓고 질문에 긍정의 답을 들려주었다. 기억에 남은 건 그게 전부였다. 다음날 그 사람은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분명 통성명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 그렇지요. 데릭. 맞습니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여행자가 끄덕였다. 짧은 긍정의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어떤 사건의 소개.

신역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는 흥미로웠다. 그리고 호수 위의 입구를 통해 빛이 흘러넘치는 곳에 들어갔을 때까지는 그랬다. 친근한 이들이 있으니 농담 같은 말을 곁들이기도 했다.

“이곳이 신역… 에오르제아의 신화에 관한 일이라면 제 생업과 직결되기도 하는군요.”

“예지를 받는다며, 이런 곳이 있는지 들어본 적 있어?”

“뇌천과 뇌옥의 이야기만 조금….”

르페인의 뒷목을 서늘하게 하는 기운이 모여 갑자기 신역에 기둥이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천구의를 빼들고 올려다봤다. 모두가 전투 태세를 갖출 만큼의 기운이었다. 그것이 르페인 자신을 살린 권능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부터 르페인은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하얀 대리석의 건축물과 벼락이 내리치는 천국.

그 한가운데 서있는 자를 상대하는 방향에 자신이 왜 서있었는지. 멍한 정신으로 관성적으로 빼든 카드에는 눈앞의 신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까마득한 높이에 떠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위 별을 구하는 모험에 이르기까지. 르페인은 그동안 말도 안 되는 모든 곳을 가봤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모험담이 빛을 잃었다.

아득히 먼 밤하늘에 영원히 걸려있을 것 같은 천국. 정면으로 비추는 태양. 별 한 점 읽을 수 없는 맑은 하늘과 뒷목부터 저릿하게 스며드는 강인한 파동. 심장이 괴로울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생업이 걸려 긴장했느냐는 메테오의 농담이 날아들었다. 그랬으면 나았을 것이다. 르페인이 다음 카드를 뽑았다. 한창 전투가 펼쳐지는 공간 밖에, 우두커니 서있는 사내를 닮은 카드가 나왔다.

눈이 마주쳤다. 금세 시선이 헤어졌다.

인간이 지은 모든 것들을 관장하는 대장장이를 지나고 고원의 석재로 지어진 석상에 이르렀다. 날아가는 내내 떨어질 걱정이 들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그림자를 달고 육신이 있으나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버겁게 차오르는 숨이 자신의 것 아닌 것 마냥. 헛웃음이 경직된 입꼬리를 겨우 비집고 나갔다.

별의 신을 받드는 늙은 하인. 별빛을 닮은 새하얀 옷을 입고 지혜를 담은 새하얀 수염을 기른 모습에서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르페인은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고개를 들었다. 벅차게 올라오는 것은 기쁨이 아니었다. 물음이었다. 수많은 기도였다. 셀 수 없는 세대를 지나 남은 유물 이 그가 다루는 점성술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다른 점성술사와 비슷한 구조로 펼치는 마법이었지만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구어이자 사어로 지어진 이름들. 이름을 외우며 천구의로 에테르를 변형하고 집약하며 체외로 내놓을 때 짧은 생으로 가늠하기 힘든 염원을 느껴왔다. 르페인은 그것을 한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랄거, 뇌천을 다스리고 뇌옥을 지은 당신을 섬겨온 인간들의 것이었다. 별을 읽어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중재자로서 들어온 인간의 뜻이었다. 신에게 가닿았는지 알 수 없이 사그러들 기도들이었다. 그 기도를 대신 하늘로 올리는 기구한 사제의 자책 또한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신에게 순종적이지 못한 종이었다. 궤도에서 탈락된 혜성이었다. 파괴의 운명을 담당하는 당신을 섬기느라 견고해질 수 밖에 없었던 고원을 위로하는 사제들. 삶을 견딜 것을 믿었지만 견디지 못한 이들의 넋을 건지는 사람들. 르페인은 그 중에서도 천국으로 보내며 천국문에 대란 의문을 지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여태껏 물을 수 없어 기억 속에 묻어둔 마음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강건한 신의 혜성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대도. 르페인은 그 마음에서 생각을 돌릴 수 없었다. 이 신역을 구성하고, 신의 권능을 이루는 에테르에 자신이 예고한 불운을 피하지 못해 사라진 자의 넋이 있을지도 모른단 의심이 들었다. 그토록 무정한 그조차 연민에 잠기도록 많은 일들을 지나왔고 그 끝에 신이 있었다.

사람들이 전지전능한 운명 앞에서 불운을 쥐어다 신들의 찬란하고 순결한 옷자락에 닦고 싶었다.

땅에 처박혀 날지 못한 별의 꼬리를 천국 바닥에 길게 빼어 그릴 것이오. 비유와 고운 허영으로 눈을 가리리다. 당신들의 책임을 물어 땅으로 그 귀한 눈을 둘 수 밖에 없도록 하리다. 성을 내러 노려본 신의 시선에 나는 미치지 않으리오. 빌어죽을 것들. 쥐어터져 죽은 것들. 작고 가련하여 태어난 지 얼마 못 되어 비열함이라도 되어먹는 대로 섬기는 것들. 살아있는 생명으로 존중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생을 살고 가 차게 식은 흙더미들. 생지옥을 내 몸에 역사로 썼는데 어찌 영겁을 사는 것들을 잠시 보았다고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우아한 침묵으로 이 참상을 모른 체한 것이 아니라면, 열에 열이어도 내게 눈짓 하나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도 슬퍼하였다면 신이여, 무수한 기도 끝에 당신들도 기어코 인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닮기라도 하였더라면. 당신들의 마음은 찢고 썩어 고통에 비참히 무릎을 꿇었을 터입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한순간 내린 벼락 같은 고통을 그의 심장이 몇 번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