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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

드레해리

dessinemoiunmouton by 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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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밑은 아늑했다. 

해리는 눈을 떴다. 닫힌 입 안에 선율이 진동한다. 음……. 탁자 아래 늘어진 그늘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그는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불러 보았다. 손이 박자를 따라 허공을 만지더니 배 위에 엎어 놓은 총보를 들어 뭔가를 써 넣었다. 쥐고 있는 연필은 뒤꼭지가 너덜너덜했다. 필기를 마친 눈이 빠르게 초점을 잃었다. 지난 연습을 복기하느라 정신이 도로 합주실로 날아갔다.

두 사람이 앉기에는 작은 감이 있는 식탁이었다. 해리는 상체만이 온전히 그 밑에 들어가 있었다. 멍하니 누워 있던 몸이 리듬을 되찾는다. 햇살이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아침부터 내내 맨발이었다. 자각하는 순간 비스듬히 걸쳐 있던 슬리퍼가 발끝에서 떨어졌다. 탁, 하고 밑창과 바닥이 닿는 둔탁한 소음이 퍼졌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타일을 해리는 뒷머리에 깔고 누운 채 떠올릴 수 있었다. 만화경으로 본 세상 같았다. 안개가 낀 듯 습하고 흐린 살구색이었다. 드레이코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색깔이잖아.’

무늬를 죽인다는 해리의 논평에는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욕실이 아닌 다른 공간은 모두 나무로 바닥 마감을 했는데 부엌만 그랬다. 색감 외에 불만은 없었다. 청소하기 편했고, 누우면 시원했다. 해리는 눈을 감았다. 한낮의 태양빛이 길게 늘어져 입술에 닿았다. 구름이 비껴 가는 모양이었다. 오후의 조도는 낮고 깊다. 음을 정비하는 첼로의 현처럼.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포터, 뭐하는 거야?”

작고 이상한 평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증발했다. 해리는 별종을 보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동거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막 연습실에서 돌아왔는지 드레이코는 어깨에 악기 가방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게,” 해리는 눈이 간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난 피아노 밑에 누워 있는 걸 좋아하거든. 이 집에는 피아노가 없잖아.”

드레이코는 문손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철컥 하고 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사다 줘?”

그는 팔짱을 끼고서 자신의 말이 불러오는 여파를 감상했다. 연한 녹색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으로 살아 있는 것이 반짝거렸다. 드레이코는 그늘에서 올려보는 활엽수를 생각했다. 해리가 터뜨린 웃음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사이사이 빛이 번진다. 유리와 섬유를 통과해 들어온 얼룩이 공간에 끌고 다닌 자국이었다. 창가에서 자라는 나무가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게 중심을 간지럽혀서 드레이코도 약간은 웃고 말았다. 소리와 함께 공간의 모든 것이 자리를 뒹굴었다. 작은 소요. 

“빨리 답하는 게 좋을걸. 좀 있으면 악기사 문 닫을 시간이니까.”

“글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둘 곳도 없잖아. 해리는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자리에 앉았다. 머리 꼭대기가 아슬아슬하게 식탁 밑판에 닿았다. 

“같이 산 지 일 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새로울 게 남아 있다니.” 

“넌 뭐, 안 그런 줄 알아?” 

해리는 작게 툴툴거리면서 뒤통수를 헤집었다. 언제나처럼 무용한 정돈이었다. 드레이코는 좀전까지 아라비아 타일 위에 잉크가 번진 것처럼 펼쳐져 있던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동거인의 선택적인 청소 강박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닥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해리는 곧장 답하는 대신 음을 끌었다. 낮은 G의 울림이었다. 

“어제 내 졸업연주곡 첫 연습이 있었거든. 어떻게 조정하면 좋을지 궁리하던 중.” 

물결처럼 흔들리는 소리가 입과 코를 통해 흘러나와 바닥에 가라앉았다. 4분의 3박자로 바뀌면서 나오는 첫 주제부 말이야. 하강하는 첼로의 진행이 귀에 계속 맴돌아. 지휘봉 대신 연필을 쥔 손이 공중에 선을 그었다. 해리는 첼로를 사랑했다. 그 편애가 드레이코는 못마땅했다. 맹세코 자신이 바이올린 수석인 것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휘자라면 모든 악기에 공평한 책임감을 가져야 마땅했다. 드레이코는 자신이 책임과 애정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거긴 딘이 잘 끌어 줘서 걱정할 게 없고 진짜 문제는 바순인데…….”

“위즐리하고 롱바텀?” 

이마를 찌푸린 채 턱을 쓸던 해리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생각하느라 흐려진 눈에 빛이 돌아왔다. 

“너 다 기억하는구나.”

“학생이 얼마나 된다고. 몇 년 동안 봐 왔는데 모르는 게 바보 아냐?”

요점은 그들이 해리의 졸업 무대에 올라갈 구성원이라는 것이었다. 드레이코는 멋대로 솟아오르는 애틋한 눈빛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음, 아무튼,” 해리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애들 실력은 내가 알거든? 그런데 자신이 없어도 너무 없어. 학기말에 스네이프 교수님한테 된통 깨진 후로 여태 회복을 못 했나 봐.” 

해리는 연필을 귀 뒤에 갈무리한 다음 악보를 말아 쥔 채 바닥을 기어 식탁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드레이코는 뻗어 오는 손을 잡아 그가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무게를 지탱해 주었다. 

“내 부재에 대한 유감은?”

“오.”

해리가 미소 지었다. 이제 높이가 맞은 눈은 바로 코앞에 열려 있었다. 드레이코는 수줍어 보이는 얼굴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손을 놓았다. 

“거절할 수 없는 자리잖아. 기회는 잡아야지.”

“그래. 그러니까 꽃다발을 못 주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네 졸업연주 때는 내가 제일 앞줄에 앉아 있을 텐데.”

“기회는 잡으라더니?”

해리는 입을 다문 채 흠 하고 웃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쳐다보는 눈이 알 수 없는 반짝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레이코는 입 속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있는지도 몰랐던 찻잔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경 쓰지 마. 난 그냥 널 놀리고 싶은 거야.”

다가온 입술이 뺨에 닿았다. 따라 놓은 홍차 위로 오후의 해가 머문다. 

차는 미지근했다. 

“……악보를 깔개로 쓰면 안 되지, 마에스트로.”

해리는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드레이코는 잔을 내려놓기 전에 한 번 더 홀짝였다. 속눈썹이 시선 위에 있어서 엷은 눈은 방향이 보이지 않았다. 찻잔은 귀퉁이가 구겨지고 곳곳이 올록볼록한 악보를 피해 테이블에 곧장 앉았다. 기호를 적신 얼룩은 갈색인데 눈앞의 살갗은 선홍이다. 정신을 뺏긴 틈에 손이 다가와 귀를 만졌다. 넋을 놓고 있던 해리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반응했다. 

“안경다리만으로도 좁은 자리에 뭘 끼워 넣는 일도 그만 좀 하고.”

젖은 입술이 비죽 웃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연필이 빙글빙글 돌았다. 해리는 품고 있던 총보를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말린 종이가 관성대로 몸을 펼쳤다. 

“좋아, 비겼어.”

“뭐가?”

해리는 표정을 관리하는 법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굴기로 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둘 사이에서, 적어도 해리에게는 그랬다. 나온 입을 넣을 생각일랑 없이 빤히 드레이코를 보았다. 연필을 놀리지 않는 손은 아직도 어깨에 걸친 케이스의 끈을 쥐고 있었다. 순간 마음이 누그러져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해리는 드레이코가 악기를 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방자한 도련님에게도 제 짝은 둘도 없이 소중했다. 그 모습을 알기 전까지는 애정이든 책임이든 받는 일 밖에 모르는 멍청이인 줄 알았다. 세상이 우스운 녀석이 노심초사하는 것이 좋은, 조금은 비틀린 심사이기도 했다. 

“저녁 먹었어?”

“아직 이르지 않아?”

전환된 분위기에 드레이코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흔들어 응했다. 

“점심을 걸렀더니. 같이 가서 말동무나 좀 해 줄래? 연습 영상 있는데 그거 봐 주면 더 좋고.”

“펍은 못 가겠네.”

“리무스한테 가려고. 한동안 못 봤거든.”

거리감을 아는 어른의 얼굴을 떠올린 드레이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의 주변 어른들은 하나같이 그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려서 겪은 사고 때문이라지만 몇몇은 정도가 지나쳤다(묶음으로 떠오르는 해리의 아버지와 대부의 환영이 드레이코의 콧등에 깊은 주름을 남겼다). 리무스 루핀은 개중 드물게 합리와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새로 들어온 직원이 있다던데…… 사교성이 좋다고 들었어. 근데 뭐, 괜찮겠지. 리무스가 어떻게든 해 줄 거야.”

해리는 탁자 위에 흩어진 악보를 한데 모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드레이코가 등에서 바이올린을 내렸다. 

“어떻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아, 제발.”

“수십 명을 통솔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사람을 꺼리다니.”

“그거랑 이건 다르지.”

드레이코는 해리가 뭐라고 답하든 관심이 없었다. 악기를 방에 두고 온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벽에 기대어 여전히 부엌에서 꾸물대고 있는 해리를 바라다보았다. 

“리무스가 도움이 안 되면 나라도 막아 줄게.” 

귀가 순식간에 물들었다.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런 것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우리 언제 가? 해 떨어지겠어, 자기야.” 

“신발 먼저 신고 있든가.”

“안 벗었어. 넌 양말도 안 신었네?”

“그만 좀 봐! 내가 알아서 할게!”

드레이코는 아우성치는 해리에게 떠밀려 현관으로 내쫓겼다. 이마며 손이 등에 닿아 뜨거웠다.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점점이 떨어진 면을 이으면 그 아래 뛰고 있는 중심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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