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전대 고버스터즈

신이라는 직업에 관하여

사쿠라다 히로무

소리꾼 by 박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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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고 노력했을 때에는 떠지지 않던 눈이 거짓말 같이 떠졌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사방이 하얀색이라, 순간 눈을 감고 있나 싶어 눈언저리를 더듬었다. 눈은 제대로 떠져 있었다. 맙소사. 분명 두 눈으로 자신의 몸이 데이터로 흩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는데, 하얀 배경 속에 이질적인 빨간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배에 힘을 주고서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누구 없습니까?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허무한 이 공간에는 자신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외치는 걸 포기하고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몇 시간 전을 떠올려 보자면, 자신은 진 씨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네 명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기계를 몰래 조작했고, 그 결과 사쿠라다 히로무는 데이터로 변해 소멸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아마도 여기는 죽은 자들의 장소겠지. 천천히 일어나며 이치간 버스터를 손에 쥐었다.

 

 “안녕.”

 

 낯선 목소리가 뒤 쪽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는 뒤를 돌아 낯선 이에게 무기를 조준했다. 고급스러운 찻잔에 종류를 알 수 없는 티를 따르고 있던 사람은, 이치간 버스터를 보고서도 태연하게 행동했다. 티 포트를 내려놓고선 방금 막 따른 차를 자신에게 권유했다. 마실래? 지상에는 없는 특별한 차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찻잔이 작은 소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뜨거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하얀 스웨터 위로 흘러 내렸다. 찻잔을 들고 있던 사람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털기 시작했다. 눈가가 떨려왔다. 죽은 자들의 공간이 아닌 건가? 아공간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인걸까? 나는 아직 죽지 않은 건가? 수많은 생각을 헤치고 다시 목소리가 정적을 깨부쉈다. 사쿠라다 히로무 군.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갑자기 박수를 치더니 작은 박을 터트렸다.

 

 “축하합니다. 지구에서 죽은 사람 1억 명 째를 달성! 했습니다~.”

 

 곱슬머리의 사람이 말과는 다르게 감흥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꽃가루를 뿌려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넋을 놓고 자신의 목에 작은 박을 거는 걸 바라만 보았다. 팔짱을 끼고서는 날 내려다보던 하얀 사람은 이내 한 숨을 쉬더니, 다시 제 자리에 앉아 스콘을 꺼내 들었다. 건포도가 박힌 스콘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사실 말이야. 사쿠라다 군은 여기 오지 않을 사람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지 뭐야. 원래는 진 군이 오기로 했었어. 뭐, 이젠 누가 되었든 상관이 없으려나. 그런 고로! 네가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줄게.”

 

 스콘 부스러기가 하얀 스웨터 위로 떨어졌다. 스콘은 맛있지만, 청소하기 힘들단 말이지. 늘어지는 말투로 이야기하던 하얀 사람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하얀 공간에는 자기 자신과 제 멋대로 지껄이는 저 사람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죽은 사람 1억 명 째라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니, 터무니없었다. 이치간 버스터를 내리고서는 목에 붙은 작은 박을 떼어냈다.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무슨 꿍꿍이야, 당신.

 

 “그야, 나는 신이니까.”

 

 새로운 향의 티를 찻잔에 따르며 웃었다. 신?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릴 적부터 수 없이 신에게 부탁했었다. 오늘 맛있는 밥을 먹게 해주세요, 산타 할아버지가 저희 집에 오시게 해주세요. 하지만 매번 신은 자신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장 절박하게 빌었던 순간에도 신은 귀를 닫고 방관하고만 있었다. 눈앞에 있는 신이 단 한번, 그 순간만이라도 제 소원을 들어주었다면 모두가 행복하고 아늑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뒤늦은 원망을 해 보았지만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지는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때 이루어주지 않았던 소원을 다시 빈다고 해도, 신이 정말 그 일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 지나간 과거는 되살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래는? 또 다른 미래가 존재하지는 않을까,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다리를 꼬고서는 바라보던 신이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소원 정했나보네. 엄청 느려.”

 “오늘로부터 10년 뒤의 미래로 절 보내주세요.”

 

 의외의 소원에 신은 심기가 불편했는지 눈썹을 꿈틀 거렸다. 사쿠라다 군이 혹시 자신을 다시 살려 달라고 빌까봐 걱정했는데, 그것 참 놀라운 소원이야. 계산기를 어디선가 꺼내선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 대신 조건이 있어. 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음성이 말을 막았다. 그들은 저를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조건이겠죠. 신이 잠시 입술을 씰룩이며 날카롭게 쏘아 붙이는 이를 바라보다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타닥거리는 타자 소리만이 무한한 공간을 채워나갔다. 보낼 준비가 되었는지 시선을 자신에게로 옮겼다. 목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10년 뒤의 특명부의 모습이란 꿈 꿀 수 없는 미래였다. 실상 말은 안하고 지내 왔지만, 모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메사이어와 함께 우리는 모두 죽는 거야.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네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죽었을 거야. 누구라도 죽지 않았으면 엔터가 너를 제외한 모두를 죽이고서는 지구를 지배했겠지. 이런 일로 나를 원망하지는 말아, 그야, 나는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변명을 한 가득 쏟아내던 신이 불쾌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어, 나는 신이니까. 그리고선 계산기의 하단 부를 경쾌하게 두 번 눌렀다. 주위가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장소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시신경을 타고 들어온 빛이 뇌 속에서 번쩍였다.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양 손을 휘휘 저으며 작별 인사를 하는 신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이 뒤로 당겨졌다. 빨간 선을 그으며 미래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신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10년 뒤의 고버스터즈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살려주라고 빌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트레이 위에 올라와 있던 마지막 쿠키를 집었다. 입 안에서 바삭 거리는 게 명품이었다. 아마 미래에서 돌아오면 자신을 살려 달라고 애걸할 것이다. 그럼에도 헛된 희망을 심어준 이유는, 그야, 나는 신이니까. 마지막 한 입을 넣고서는 두 손을 탈탈 털었다. 다음 사망자를 만나 볼까. 바닥에 떨어진 작은 박을 주워들고서는 공간 속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기에는, 신이라는 직업은 참으로 어려웠다.

 

어디선가 규칙적으로 삐, 삐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사방이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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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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