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찬종수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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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까."

삼 주 전부터 잡은 약속.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와중에 자율 훈련까지 외면하고서야 겨우 만들어낸 자유시간이었다. 최종수도 그랬고 박병찬도 그랬다.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둘이 그랬으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는 주변 사람도 어림짐작이 가능할 정도다. 그리고 최종수는 박병찬을 마주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마 말한 당사자가 박병찬이었더라면 그의 평소 성격에 기대어 혹시 장난이냐고 한 번 물어볼 수 있었겠지만 발신인은 장난하고는 인연이 없는 최종수였고 수신인은 그런 성격을 잘 알 수 밖에 없는 최종수의 연인, 박병찬이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성격이 좀 옮은 점이 있어서 최종수도 장난이라고 할만한 것을 아주 가끔 치곤 했지만 이것은 경우가 달랐다. 최종수는 이런 것으로 장난을 칠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박병찬은 가만히 최종수를 바라봤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한 최종수는 박병찬을 기다린다. 매몰차게 뒤돌아 걷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얼굴에 박병찬은 그제야 발을 떼어 다가간다. 둘의 눈높이는 차이가 크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도 눈에 띄게 올려다보는 일은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저보다 큰 이의 눈을 마주한다. 여전한 얼굴에 박병찬은 한참이나 눈을 마주하다가... 자신도 놀랄 만큼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 곧 미국 가."

"...뭐? 갑자기?"

"아직 확정은 아닌데 가고 싶어. 제의도 들어왔고."

"아니, 종수야... 그래, 일단 축하해. 그래서 헤어지자고?"

"어."

여기서 박병찬은 이마를 짚는다. 최종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한다. 최종수는 장거리 연애를 할 생각이 없는 거다. 자신이 없던가. 근데 또 이유를 짐작하니까 자기도 붙잡는 말이 안 나왔다. 그야 미국과 한국이다. 손을 뒤집은 듯이 시간이 정 반대에 가까웠고 가는데에도 반나절을 소모해야 하는 곳. 차 타고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데도 둘은 바빠서 서로를 못 봤다. 근데 그런 곳이면 전화도 제대로 못 주고받을 것이 뻔하다.

순간 불쑥 욱하는 마음이 튀어 오른다. 너는 그걸 나한테 다 단정 짓고 말하냐? 근데 뭐, 아니면 어쩔 건가. 만약 최종수가 박병찬이 신경 쓰여서 미국에 가는 거 재고한다고 했으면 당장에 미쳤냐고 소리 지를 거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 핑계 댔으면 박병찬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겠지. 근데 그거 다 따져도 먼저 헤어지자고 들은 마음이 진정되지를 않았다. 적어도 미리 말해줄 순 없었나? 그냥 카톡으로라도... 근데 또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것도 좀 웃기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이번 따라 약속 잡는 것에 적극적이더니 직접 말하고 싶어서 그랬나?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박병찬은 고개도 못 들고 한숨만 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최종수는 가만히 기다려준다.

한참을 그러다가 결국 박병찬은 고개를 든다. 최종수가 가지 않는 이유도 알았으니까. 확답을 기다리는 게 뻔했다. 여기서 만약 박병찬이 미련 가지고 롱디 연애 한 번 해보자고 잡으면 최종수는 잡혀줄 거다. 유지하려고 애를 쓰겠지. 그러면 안 됐다. 최종수 정도면 저기 가서 좋은 피지컬 취급도 못 받는다. 아마 플레이 스타일도 많이 달라질 테고 시차도 적응해야 하고 여기선 상상도 못했던 강자에게 치이면서 멘탈도 좀 흔들리겠지. 그런 상황에 고작 제 애인 챙기겠다고 잠이라도 줄이거나 하면 큰일 난다.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그런 걸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해선 안 됐다. 그리고 그런 거 안 할 거면... 연인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아마 최종수도 박병찬이 그런 생각할 거 다 짐작해서 자신이 먼저 말해줬을 것이다. 제기랄. 박병찬은 한숨 한 번 더 쉬었다.

"그래. 알았어... 헤어지자."

결국 영혼 털린 목소리로 긍정이나 한다. 답이 그거 밖에 없었다. 박병찬의 모든 고뇌를 가만히 지켜본 최종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박병찬이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으면 최종수도 좀 서운했을 텐데 끙끙거리면서 받아들이려는 꼬락서니 보니까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미소 지으면서 저를 쳐다보는 최종수를 보며 박병찬은 입을 꾹 닫았다. 뭘 웃어 인마... 괜히 삐죽거리면서도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투덜대고 싶지 않아서 박병찬은 고개를 숙였다. 3년 간의 연애가 끝이 났다. 서로를 위한 배려로 이루어진 이별이니 아름다워야 하는데 박병찬은 이 모든 게 어쩐지 허무하기만 했다.


여전히 둘은 더럽게 바빴기 때문에 그 후의 만남은 최종수가 미국으로 가기 전,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절절한 이별 같은 건 안 했다. 단 둘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미국 간다는 거에 최종수 부모님은 당연하고 많진 않지만 최종수도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은 두 손 넘칠 정도로 있었다. 그 친구들이 모두 최종수를 배웅 하러 온 그 사이에서 박병찬은 자기 제대로 안 쳐다보고 다른 사람에게 짧게 인사 남기는 최종수만 바라봤다. 부모님 한 분 한 분 다 끌어안은 최종수가 그제야 박병찬을 봤다. 박병찬은 그 시선 마주하다가 충동적으로 말한다.

"이왕 가는 거 잘 하고 와."

"그럴 거야. 잘 지내, 형."

사이가 나아지고 어느 정도 친해진 뒤 병찬의 항의로 최종수는 병찬을 형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솔직히 쟤 말대로 나잇값 못하고 기분 좋아했는데 저 호칭을 지금 들으니까 기분이 미묘했다. 그래서 박병찬은 최종수의 말에 대답 못 했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 최종수는 그대로 가버렸다. 전처럼 박병찬의 대답을 들어주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근데 박병찬은 떠나가는 최종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어쩐지 너무 서러워진다.

충분히 대화했고 충분히 생각했다. 이게 맞았다.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충분한 시간도 줬다. 안 헤어지면 안 되냐고 매달릴 시간도 충분했다는 얘기다. 결국 잡지 못했으니 떠나는 모습을 보며 잘 지내. 하며 깔끔히 잊거나 잘 묻어둬야 하는데 박병찬은 지금 당장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다. 그러면 최종수가 혹시나 뛰어와 주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그런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근데 잡을 수가 없으니까 울고 싶은 거다.

박병찬은 결국 멀어진 최종수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 뒷모습을 미련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변 사람들 몇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몇은 서로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최종수의 부모님들은 본인들과 함께 온 다른 지인들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병찬만이 이 지인 무리에서 혼자 유리되어 있었다. 그것이 죽도록 외롭다고 생각하며 박병찬은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연락을 전혀 안 했다. 박병찬은 거기서 적응한다고 바쁠 애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고 최종수는 하도 바쁜데다가 마지막 때 보니 아직도 마음 정리 제대로 안 된 꼴 보고 그랬다. 박병찬은 어차피 헤어진 거 새로운 사랑이나 찾을까? 했는데 잘 안됐다.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지냈다. 애초에 한국에서도 바빴던 몸들이라 자주 못 만났고 곧 시즌이 되니까 좀 잊을만해 졌다.

근데 소소하게 생각이 났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를 때마다 여유가 나면 전화로 괜찮냐고 물어봤던 거나, 가끔 특이한 새 메뉴에 흥미 가지면 좀 질색하면서도 묵묵히 같이 먹어줬던 거. 비시즌에는 박병찬이 가고 싶다고 염불 외웠던 그 달의 지역 행사 같은 거 같이 가줬던 거나... 또 어쩌다 같이 자는 밤에 비가 오면 저 자신이 통증 때문에 깨기 전에 본인이 먼저 일어나 찜질팩을 데워오는 것들이 생각 났다. 몇 개는 남이랑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견딜만했는데 비가 오는 날은 힘들었다. 특히나 박병찬은 제 속을 함부로 꺼내놓지 않는 인간이라 더 그랬다.

애초에 바빠서 제대로 못 만나다 보니 최종수의 부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근데 그래서 그런가, 눈에 띌 때마다 개 아프더라. 원래 박병찬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부류인데 마음 좀 뜰라치면 빈자리가 와닿아서 외로움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원래 이런 거 티 안 내고 묻어두는 걸 잘했는데 쓸데없이 눈치 좋은 최종수가 다 끄집어내 놓고 홀랑 가버리니까 갈 곳 잃은 외로움이 박병찬에게 몸통 박치기를 해댔다.

근데 뭐 그렇게 청승 떠는 것도 두어 달이다. 휴식 시간 끝나면 토 나오는 비시즌 훈련 시간이고 그거 견디다 보면 또 시즌 시작이고. 박병찬은 외로움들의 몸통 박치기에도 슬슬 익숙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또 그의 특기 분야였으니까. 그냥 할 일 하면서 살았다.


박병찬은 운명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살다 보면 가끔 그 단어에 대해 떠올리곤 한다. 농구라는 것을 처음으로 했을 때가 그랬고 다리를 다쳤을 때, 농구부가 없던 조형고에 마침 농구부가 창설 되었을 때, 기어코 준향대에 합격했을 때도 그랬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딱히 고의는 아니었다. 그야 뉴욕은 미국 관광하면 바로 떠올리는 거 아닌가. 자기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니었다. 같이 여행 가기로 한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정했던 거다. 박병찬은 이런 데에선 yes맨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최종수가 현재 속한 팀의 연고지를 생각하긴 했지만 딱 그 뿐이다. 그렇게 뉴욕에 놀러 와서 낮에 실컷 놀다가 뻗은 친구들한테 산책 좀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근처 농구 코트를 찾아갈 때까지만 해도 박병찬에게 이렇다 싶은 목적은 없었다.

근데 농구 코트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검은 실루엣에 가까이 다가가니까 어쩐지 익숙한 뒤통수면 약간 말이 달라진다. 편한 트레이닝 복이지만 다부진 체격을 알 수 있었고 복슬복슬한 검은색 머리카락은 쓸데없을 만큼 익숙했다. 박병찬은 그 순간 확신에 사로잡혔고, 형편 없을 만큼 힘 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종수야...?"

그러자 상대방이 벌떡 일어난다. 박병찬은 그 순간 꽤 오래 떠올리지 않았던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이내 마주한 최종수가 그다지 놀란 눈이 아닌 것에 약간 의아해졌다.

"...안 놀라?"

"여기 올 거 알고 기다렸는데."

"뭐? 어떻게 알았는데?"

"형 인스타 맨날 보니까."

아하. 그러니까 자기가 뉴욕 여행 왔다고 올려댄 인스타를 보고 숙소까지 유추해낸 다음 보나 마나 농구 코트 찾아서 기어 나올 걸 예상했다는 거다... 운명은커녕 따지자면 좀 구질구질한 행동인데 박병찬은 쓸데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야 최종수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겠나. 자기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박병찬은 제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고 최종수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굳이 꼽을 주진 않았다.

"나 보고 싶었어?"

"당연한 거 아니야? 형은... 내가 여기 사는 거 모르고 놀러 왔어? 왜 온다고 연락을 안 해."

"그야 헤어진 지 3년이 넘은 전남친한테 놀러 왔으니까 만나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친구랑 왔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형이랑 내가 안 좋게 헤어졌어?"

"그건 아닌데 그냥... 아, 종수야. 어떡하냐. 나 오랜만에 너한테 형 소리 들으니까..."

"어."

박병찬은 입을 잠시 다문다. 최종수는 재촉하지 않았다. 박병찬이 잘 말하다가 입 다무는 건 세 가지였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거나 괜히 궁금하게 만들고 싶거나,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말을 고르거나. 첫 번째는 보통 싸울 때 그랬고 두 번째는 장난을 칠 때인데 지금은 둘 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니 최종수는 기다렸다. 한참이나 눈동자만 굴리면서 입을 우물거리던 박병찬은 곧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종수야."

"왜."

"나 진짜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여기 목적지도 친구들이 정했고 지금도 미국 농구코트는 어떤가 궁금해서 나온 거란 말이야. 너한테 연락할 생각 전혀 없었어. 네 말대로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닌데 구질구질해 보이면 네가 더 신경 쓰일 거 아니야. 안 신경 쓰면 그건 그거대로 좀 서운할 것 같고."

"..."

"근데 지금 너 보니까, 너 보고 싶어서 죽겠어... 어떡해?"

내내 무표정이던 최종수는 박병찬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한껏 올려서 웃었다. 최종수는 안 그래 보이면서 가끔 감정이 과해지면 얼굴이 굉장히 찡그려졌는데, 보아하니 어지간히 웃긴 모양이었다. 박병찬은 최종수가 그러는 걸 그냥 봤다. 최종수가 저렇게 웃으면 보통 박병찬이 헛짓거리를 해서 본인이 생각해도 부끄럽거나 바보 같을 때였는데 지금의 본인이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근데 오랜만에 저런 표정 보니까 또 좋더라고. 그래서 그냥 박병찬은 헛웃음만 짓다가 하하! 크게 웃었고 그에 맞춰 최종수도 같이 소리 내 웃었다. 둘이서 바보같이 한참 웃고 나니까 농구 코트 구석에 주저앉아있더라. 최종수만 보고 온다고 눈치 못 챘던, 먼저 농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웬 아시안들이 미쳤다 싶었는지 피하고 싶은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박병찬은 그것도 웃겨서 좀 더 웃다가 말았다.

그렇게 주저앉아있으니 아직 더워지기 전의 선선한 바람이 분다. 둘은 마침 부는 바람에 잠깐 침묵했고, 이어 박병찬이 먼저 말을 건다. 구질구질한 모습 보이기 싫었다고 했지만 애초에 먼저 그런 건 최종수니까 박병찬은 맘껏 구질구질해지기로 한다. 그중 하나는,

"너 실력 부진은 뭐야?"

"나라고 뭐 항상 잘하나. 그냥 컨디션 난조지."

최종수의 소식이란 소식은 죄다 찾아본 것을 숨기지 않고 티 내는 것 부터다. 박병찬은 NBA 기사는 다 찾아봤다. 거기서 Jong-su choi 들어간 기사는 번역 돌려서 자세히 읽었다. 이것도 굳이 안 말하려고 한 거였는데, 박병찬이 먼저 일어난다. 주변 불빛으로 농구 코트는 은은하게 보였고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손을 뻗는다. 최종수가 들고나온 농구공을 던져 패스 해주면 박병찬은 익숙하게 공을 튕겨본다.

"계약은?"

"3년 뛰면 꽤 뛰었지. 평생 여기에서 지낼 생각도 아니었고 이 정도면 커리어 나쁘지도 않으니까 돌아가려고."

박병찬은 그대로 손을 들어서 슛을 날린다. 깔끔하게 림을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박병찬은 종종 무언가를 결정할 때 슛을 날렸다. 잘 들어가면 긍정, 튕겨 나가면 부정의 결과를 예상하곤 했다. 박병찬은 최종수를 바라본다.

"넌 어땠어?"

"뭐가."

"나 없으니까 어땠냐고."

"방금 질문 진짜 구질구질했다."

"더 구질구질할 예정이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줘, 종수야."

"어떻긴... 바빠서 생각도 잘 안 나던데."

"어떨 때 났어? 문득 내 생각 날 때 있었을 거 아냐."

"...뭐. ...농구화 사러 갈 때 이거 하자고 이상한 색 들고 오는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식단 하는데 치팅데이가 하루쯤은 필요하다고 칼로리 폭탄인 음식 먹자며 꼬시는 사람 없을 때."

"또 있어?"

"가끔 자다 깨서 물 마시러 거실 나갔다 오면 또 깼냐며 안아주는 사람 없을 때."

"응."

"...집에서 가만히 쉬는데 놀러 나가자고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을 때."

"네가 더 내 생각 많이 했겠다. 그렇지?"

"형은 어땠는데."

박병찬이 기분 좋게 웃는다. 그리고 자신도 어떨 때 최종수의 생각을 했는지를 말해준다. 최종수는 추임새도 없이 그 말을 가만히 들었고 말을 마친 박병찬이 굴러다니는 공을 가져오자 일어나서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박병찬이 패스를 해주자 그대로 최종수도 슛을 던졌다. 박병찬이 애매한 결정을 할 때마다 슛을 던져서 점을 친다는 걸 들은 최종수는, 처음엔 어차피 들어갈 건데 왜 던지냐고 물었다. 박병찬은 그냥 긍정적인 답을 얻고 싶어서지. 라고 대답을 했었다. 그 뒤로 최종수도 가끔 그런 확신을 얻고 싶을 때 공을 던졌다. 공이 깔끔하게 들어간다.

"내가 생각해봤거든."

"어."

"우린 헤어지길 잘 한 거 같아."

"...왜?"

"안 헤어졌으면 지쳐서 헤어졌을 것 같아. 근데 헤어져 버리니까 더 애틋하고 가끔 생각나서 후회되더라."

"그러냐."

"어. 그러니까 종수야."

최종수가 공을 주워온다. 박병찬도 최종수도 깔끔하게 공을 넣었다. 박병찬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의 슛점은 둘 다 성공인 거다.

"다시 사귈까?"

첫 고백은 최종수가 했고 첫 헤어짐도 최종수가 고했다. 그럼 두 번째 고백은 아마 제 것이어야 하는 거겠지. 그리고 아마 두 번째 헤어짐도 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사람 일이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박병찬은 멋대로 그리 정했다. 그리고 아마 그 두 번째 말은 절대로 꺼내지 않겠다고. 별 효용 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리 결심하며 멋이라곤 하나 없는 말을 한다.

박병찬은 첫 번째 고백에서도 첫 번째 헤어짐에서도 많이 고민하고 답했다. 최종수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는 미리 생각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의 답을 어느 정도 내놓았던 탓이다. 최종수는 이번에도 미간을 찡그리며 웃는다.

"왜?"

"지금 왜라고 그랬냐???"

"형, 형만 헤어져 봤어? 나도 같이 헤어졌거든. 헤어지니까 초반에만 좀 힘들지 나중엔 버틸 만 했을 거 아냐. 근데 다시 사귀고 싶으면 이유가 있어야지."

"진짜 무드 개박살이다. 종수야."

"낭만적으로 만들어보시던지."

"그래 내가 구질구질하게 굴어주마. 일단 첫 번째로 우리 둘 성질 받아줄 만한 사람이 서로 밖에 없어."

"어."

"그리고 너랑 헤어져도 잘 살았지. 하지만 사귈 땐 더 잘 살았잖아."

"그래."

"솔직히 우리 초반에 진짜 많이 싸웠고 그래서 서로 선 잘 알잖아. 이거 진짜 중요한 거거든. 다른 사람이랑 또 이런 조정 기간 거칠 바엔 그냥 재계약 맺는 게 낫지 않아?"

"무드 뒤졌냐?"

"아씨, 우리 사이에 무드가 어디 있어!!!"

지가 먼저 찾아놓고. 최종수의 미간이 펴질 줄을 모른다. 바로 오케이 안 해줬다고 삐죽이는 꼴이 너무 익숙해서 더 그랬다. 그래도 더 놀렸다간 진짜 삐져서 됐다고 하는 걸 한참 달래야 할 테니 최종수는 피실 거리는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박병찬에게 두 팔을 뻗어 보인다. 박병찬은 그걸 확인하자마자 후다닥 달려가서는 그 품에 팍 뛰어들어서 매달렸다.

딱히 받쳐주는 것도 없이 온전히 박병찬의 힘으로만 매달린 상태를 유지하면서 최종수는 공을 든 팔을 올린다. 박병찬은 여전히 매달려있었다. 예전엔 이러는 거 싫다고 떼어내려 기를 썼는데 이제는 신경도 안 썼다. 그 상태로 공을 튀겨본다. 박병찬은 최종수를 꾹 끌어안은 채 말했다.

"종수야."

"어."

"내가 자존심이나 가오 다 내려놓고 이러는 거 너 밖에 없어."

"알아."

여전히 무드가 없는 말이었는데, 최종수는 이 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거운 놈 때문에 점프슛은 안 되겠고 팔 힘만으로 슛을 날려본다. 역시나 깔끔하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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