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소리

병찬종수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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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의 만남 이후 박병찬과 최종수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프로 구단이었다. 최종수는 1라운드 1픽을 받았고 무릎 부상 때문에 미묘한 취급을 받던 박병찬은 그래도 1라운드 순서였는데 한 구단이 최종수와 박병찬을 모두 선택한 것이다. 그 덕에 박병찬과 최종수는 아주 오랜만에 마주할 수 있었다.

박병찬은, 솔직히 최종수와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박병찬이 사람을 좋아하는 편인 것은 맞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은 이에게 굳이 제 마음 한 자락을 내어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말을 걸었다. 사이좋게는 아니어도 이제 팀 동료니까 사인을 주고받을 정도는 되어야지.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요~ 종수."

많이 다가가진 않았다. 세 발자국 앞에서 손을 작게 흔들었을 뿐이지. 최종수는 바로 답하지도 않고 박병찬의 기색을 살피듯 빤히 쳐다보더니, 의외로 얌전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며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역시 고개는 뻣뻣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박병찬은 익숙하게 웃어 보였다.


최종수와 박병찬은 숙소에서 지냈다. 숙소가 훈련장 바로 앞이었으니 그 이점을 마다할 선수가 별로 없기도 했고. 숙소가 미어터지는 탓에 방은 2인 1실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박병찬은 최종수와 같은 방을 배정 받았다. 와. 이거 괜찮나. 박병찬은 흘끔 최종수를 보았지만 최종수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저쪽도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박병찬은 그제야 아, 내가 너무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하는 짧은 생각을 했다.

룸메이트가 된 최종수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최종수는 언제나 조용한 편이었고 의외로 박병찬이 무언가를 물으면 성실히 답했다. 운동선수이다 보니 생활 패턴도 비슷하여 부딪힐 일이 없었고 심지어 어느 날 숙소에서 쉬다 무언가 먹고 싶어져 반쯤 장난 삼아 외출한 최종수에게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과자 좀 사달라고 했더니 숙소의 모든 사람들이 집어먹을 만큼 이것저것 잔뜩 사 와주기도 했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박병찬은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는 종수의 머리를 가볍게 몇 번 쓰다듬었다.

최종수의 불면증은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었는데 최종수는 단 한 번도 약을 먹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그다음 날 몸이 둔해진다는 이유였다.

박병찬은 잠귀가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제가 잠들기 전, 그리고 어쩌다 가끔 물이나 화장실 등의 이유로 중간에 깨면 항상 조용히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기에 부족한 잠으로 몸이 둔해지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을 짧게 했더랬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가 이거 보라며 보내준 이미지에는 밤에 잠이 잘 오는 법. 이라는 게 적혀있었다. 거기엔 다른 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온다는, 커플들을 노린 듯한 정보가 적혀있었는데 박병찬은 그걸 보니 어쩐지 최종수가 생각이 났다. 뭐... 이런 거 말하면 안 들어줄 것 같은데. 그래도 박병찬은 형아고 최종수는 생각보다 얌전한 동생이었으니까 한 번 말이나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언제나처럼 깔끔히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벌써 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최종수의 침대에 다가가 걸터앉으니 최종수가 눈이 번쩍 떠 박병찬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깜짝 놀란 듯 반응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없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동안 같이 지냈다고 이리 다가오는 것에 경계심이 보이지 않는 것이 퍽,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박병찬은 말을 걸었다.

"종수~ 형이 불면증에 좋다는 정보를 알아 왔는데 해볼래?"

"...뭔데?"

"남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온다던데?"

최종수는 그 말을 듣고선 저를 놀린다고 생각한 건지 바로 인상을 팍 찌푸리며 노려보기 시작했고 박병찬은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뜻으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형아가 한 번 도와줄 테니까. 어때?"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사실 박병찬이 이리 한 번 더 권유한 이유는 최종수가 절대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박병찬은 사실 최종수를 놀리려고 했다는 뜻이다.

최종수는 그런 박병찬을 한참 노려보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그대로 벽에 몸을 붙였다. 박병찬이 누울 자리를 만들어줬다는 뜻이다. 박병찬은 그것에 조금 당황하여 최종수를 내려다보았고 최종수는 뭐야? 라는 듯한 눈으로 박병찬을 마주 보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이제와서 농담이었다고 일어서면 진짜 놀린 거라 시인하는 꼴이다. 물론 그게 문제는 안 되지만... 뭐, 형아 말이라고 한 번 져주는 것 같은데 잠깐 어울리는 건 나쁘지 않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박병찬은 제 자리에서 베개를 하나 가져와 최종수의 옆에 누웠다.

애초에 배구선수들의 체급을 생각해 놓은 침대는 두 사람이 눕기에 조금 버거웠지만 어찌저찌 붙어 잘만한 크기였다. 그렇게 박병찬과 최종수는 나란히 누웠다가 아차, 싶은 박병찬이 최종수에게로 돌아누웠다.

"너 심장 소리 들려줘야지."

최종수는 그 말에 잠깐 눈을 위로 뜨며 가지가지 한다... 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박병찬 쪽으로 돌아눕더니... 그대로 박병찬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와, 나 남이랑 이렇게 자본 거 어렸을 때 부모님하고 밖에 없었는데. 박병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종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심장 소리 들려?"

그 질문에 최종수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효과가 직방이라 벌써 자는 건가? 박병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품의 최종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최종수는 나른해진 박병찬이 잠들락 말락 할 때에야 조용히 대답했다.

"잘 들려."


그렇게 최종수의 불면이 드라마틱하게 해결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최종수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고 평소보다는 조금 더 잤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병찬은 웃으며 다음에도 필요하면 부르라고 말했고... 최종수는 정말 불렀다. 그 뒤 매일 밤을.

박병찬은 최종수의 행동에 조금 당황해서 혹시 형 품이 마음에 들었냐. 안 그래 보이더니 사람 온기 좋아해? 형이 좋아졌구나? 따위의 말을 했으나 최종수는 그 모든 말을

"싫으면 안 해도 돼."

로 일축했다. 싫냐고? 글쎄... 싫진 않지. 뭐 대단한 거라고.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이니 싫을 이유도 딱히 없었다. 최종수는 품에 안긴 내내 뒤척이는 거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고 박병찬은 그 커다란 녀석을 껴안으며 팔도 올리고 다리도 올리고... 엄청 편하게 잤으니까.

뭐, 그래도 먼저 저리 말하는 걸 보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박병찬은 언젠가부터는 최종수가 부르지 않아도 최종수의 침대에 누웠다. 자연스레 최종수의 침대엔 언젠가부터 두 개의 베개가 있었고 최종수는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울 때면 당연하다는 듯 벽에 몸을 붙여 박병찬이 누울 자리를 남겨두었다.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아도 의외로 박병찬의 민간요법은 효과가 꽤 있었던 모양이다. 2~3시간을 겨우 자던 최종수는 점차 수면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더니 이제 5시간 정도는 충분히 잘 수 있게 되었다. 충분한 시간은 아니지만 그 전보다는 덜 졸았으니 효과가 없다곤 할 수 없다.

심장소리 요법 효과 엄청나네. 박병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패스한 공을 정확히 림에 맞춰 던져넣은 최종수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잘했어! 그렇게 말하는 박병찬에게 최종수는... 웃어주진 않았지만 손을 내밀어 작게 세레머니를 했다. 박병찬은 그 소소한 행동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론 꽤 어울리는 것 같아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 박병찬은 제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굳이 마음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종수는 아주 얌전했고 박병찬이 말을 걸면 허투루 대답하지 않았으며 박병찬이 무리 없는 부탁을 하면 모두 들어주었고 밤에는 박병찬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로 잠을 청했다.

박병찬은 그런 최종수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은 박병찬이 내가 너 보다 두 살 많은데, 라고 운을 띄우자 그래서? 라고 답하기에

"형이라고 불러주라~"

라고 말했더니 눈가를 찌푸리며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곤 결국 형이라는 호칭을 써주기도 했다. 박병찬은 사람을 좋아한다. 특히나 제게 져주는 사람은 엄청 좋아한다. 최종수는 어느 순간부터 박병찬에게 약하게 굴었다. 박병찬은 그런 사람이 좋았다. 박병찬은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 때에 최종수를 꾹 안아주었다. 최종수는 얌전히 품속에 제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이 모든 일들은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워졌다.


프로구단이 준비해준 숙소는 대부분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제집을 구해 숙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단체 생활을 어지간히 좋아하거나 혹은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는 게 아닌 이상은 그랬다. 박병찬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으나 떠날 이유도 딱히 없었던지라 남아있었고 최종수는 이유는 몰라도 하여튼 남았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숙소를 떠나가니 남은 것은 박병찬과 최종수. 이렇게 둘 뿐이었다. 나중에 구단이 새 선수를 데려온다면 다시 여러 명이 지내는 숙소가 되겠지만 하여튼 당장은 단 둘이었다는 거다.

둘만 남은 숙소에서 박병찬과 최종수는 더 많은, 별것 아닌 사소한 대화들을 나누었다. 아침을 차리면 같이 먹을 건지, 오늘 훈련은 할 만 했는지, 어제의 경기는 어땠는지, 내일은 무얼 할 건지 등. 그런 소소한 대화들.

어느새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좋은 동생이 되었다. 최종수는 꼬박꼬박 박병찬을 형이라고 불렀고 박병찬에게 그런 최종수는 꽤 귀여워 보인 덕이다. 그래서 박병찬은 결심한다. 최종수에게 제 생각을 말하기로.


"농구를 그만할까 해."

간만에 저녁을 배달해 먹자는 박병찬의 권유로 저녁을 먹고 둘 다 씻은 뒤 거실에서 TV를 보면서 박병찬이 꺼낸 말이었다. 최종수는 애초에 TV라는 것을 보지 않았기에 오직 박병찬 만이 오래된 예능프로를 보고 있었다. 내리감아진 눈을 떠 최종수가 바라보는 것에 박병찬은 가만히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봐? 너도 알잖아. 요즘 자주 무릎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있어. 이왕이면 휴식기를 가지는 게 좋을 거래."

둘이 속한 구단은, 강호라기엔 조금 문제가 있는 구단이었다. 박병찬과 최종수가 들어 온 뒤에는 거진 둘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박병찬은 자주 무리했고 빠르게 상태가 나빠졌다. 그런데도 박병찬은 언제나 게임을 뛰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박병찬은 저를 마주 보는 최종수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최종수는 언제나처럼 무감한 눈으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기대를 했을까. 박병찬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저는 최종수에게 대답을 기대했나? 무슨 대답을 기대했기에 적당히 주제를 넘기거나 얼버무리지도 않고 그저 최종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나.

최종수는 한참이나 박병찬을 살펴보는 것처럼 찬찬히 모든 구석을 살피다가 조용히 말했다.

"쉬다 돌아와."

박병찬이 작게 헛웃음을 짓는다.

"돌아오라고?"

"돌아와."

"못 돌아오면 어쩌게?"

최종수의 낯은 여전히 무감하다. 박병찬은 처음으로 그의 속을 모두 뜯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해? 무슨 생각을 해서 그렇게 말해? 무슨 뜻으로 말했어? 내가 휴식기를 가지게 되면 들을 말들을 알잖아. 그러고도 여전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 거 아니야. 그런데도 왜 그렇게 말했어?

박병찬은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최종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박병찬의 손을 잡아 왔고, 별일 없었다는 듯 단조로운 말투로 말했다.

"이제 잘 시간이야."

밤 9시 20분.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운동선수로서도 꽤 이른 시간이었으나 박병찬은 그렇네, 라는 말을 하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익숙하게 최종수의 침대에 눕는다. 그대로 최종수를 끌어안으려고 했건만 제 팔을 잡은 최종수는 저를 그대로 밑으로 조금 잡아당기더니 이제 제 머리를 안아왔다. 별로 푹신하진 않은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게 된 박병찬은... 생각보다 편하진 않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최종수는 그런 박병찬을 고쳐 안아 귀가 닿도록 했고 박병찬은 그 모든 행동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심장 소리가 들린다. 조금 빠른 것 같았다. 그 심장 소리에 어느새 신경이 빼앗겨 박병찬은 항상 하던 굿나잇 인사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박병찬은 휴식기를 가졌다. 집에서 푹 쉬겠냐는 말에 치료센터도 숙소랑 가깝다는 말로 숙소에서 계속 지냈다. 숙소에는 여전히 박병찬과 최종수만이 있었다. 박병찬은 휴식기에도 훈련을 나왔다. 다만 전처럼 많은 훈련을 하진 않았다. 특히나 무릎에 무리가 갈만한 훈련은 거의.

주 3일은 물리치료사의 지도에 따라 무릎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치료를 받고 오는 날엔 최종수가 항상 마중을 하러 나왔다. 처음에는 그것에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것이 익숙해지고 나서는 가장 먼저 센터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최종수부터 찾았다.

최종수는 무릎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애초에 무언가 묻는 편이 아니었다. 박병찬은 집에 가는 그 짧은 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없는 소리조차도. 했다간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치료를 받지 않는 날에는 박병찬이 최종수를 품에 안아주었고 치료를 받는 날에는 최종수가 박병찬을 끌어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의 이야기도 많이 늘어났다. 서로가 마주 하지 않을 때에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따위의 소소한 이야기들. 박병찬은 그 시간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신입들이 들어왔고 박병찬의 휴식기는 끝이 났다. 박병찬과 최종수는 여전히 주전으로 뛰었으나 새롭게 들어온 신인들도 기량이 꽤 괜찮았다. 박병찬의 무릎은 전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았다. 성공적인 제왕의 재림이라며 치켜세우는 기사들이 나돌았다. 박병찬은 추켜세움이 단순한 아부가 아니도록 만들어주었다.

여전히 박병찬은 최종수와 함께 구단에서의 키 카드였지만 전처럼 무리하지는 않았다. 전처럼 모든 것을 둘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선수들이 빈약하지 않았으며 이미 또 무릎에 무리가 간 것으로 구단에서의 케어에 대한 책임론이 기사에 잔뜩 오른 탓이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박병찬이 얼마나 혹사 당했는지를 떠들었고, 그 여론을 신경 쓴 구단은 박병찬에게 최대 2쿼터의 시간만을 뛰어달라 했다.

박병찬은 사서 걱정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마냥 미래를 낙관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좋은 일이 오면 반드시 나쁜 일이 온다. 그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박병찬은 지금의 제 상황이 너무나 괜찮아서 곧 다가올 불행이 되려 두려웠다. 무릎이 또 고장이 날까, 아니면 뭐. 계약이 만료라도 되려나. 여기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구단에 트레이드를 당한다던가.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훈련에 집중하던 박병찬은 문득 제 옆에서 같이 훈련을 하는 최종수를 쳐다본다. 미미하게 찌푸려진 얼굴, 이어 다음 운동을 위해 걸음을 옮기는 최종수를 한참이나 지켜보던 박병찬은 손을 뻗어 최종수의 손목을 잡았다. 돌아보는 최종수의 얼굴이 마치 숨기는 것을 들킨 어린 아이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제 시선을 굳이 피하는 것에 박병찬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박병찬은 훈련장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또박또박하게 외쳤다.

"종수야! 너 무릎 아파?"


무리를 안 하는 건 박병찬 뿐이었다. 박병찬이 빠진 만큼 최종수는 더 뛰게 되었다. 무릎 부상은 아주 흔한 부상이다. 그 대단한 최종수라고 해도 걸리지 않을 이유가 없을 만큼 자주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박병찬이 고의로 만들어낸 소란 탓에 트레이너들이 다가와 최종수의 상태를 점검했다. 최종수는 별로 문제없다고 말하며 트레이너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박병찬이 그 소란 내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결국 한숨을 쉬며 병원에 가겠다고 말했다.

수술을 할 만큼 커다란 부상은 아니었지만 방치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결과에 따라 최종수는 강제로 휴식을 하게 되었다. 구단에서 소문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선수들 사이에 말이 퍼지니 금세 기사까지 났다. 최종수는 혹시나 무리가 될까 깁스를 했고 박병찬은 이제 자신이 차를 몰아 최종수를 병원과 집에 나르고 다녔다.

평소와 같이 약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최종수가 말했다.

"오늘 훈련 쉬지."

"그랬지?"

"바다 보러 가자, 형."

"...그럴까."

박병찬은 그나마 가까운 인천 앞바다에 내비게이션을 찍고 그대로 도로를 달렸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즐거워하며 거기서 뭘 할지 떠들었겠으나 최종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고 박병찬은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 최종수가 병원을 가면서 둘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줄었다. 잘 때에는 여전히 최종수를 안아주었으나 딱 그 정도였다.

한참 달려 도심을 벗어나 국도에 타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최종수의 입이 열린다.

"아직도 화났어?"

"어."

"... ... ...일부러 말 안 한 거 아니야."

"그러면?"

"그냥... 별거 아닌 줄 알고."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게 별거 아냐?"

박병찬은 무릎 부상에 대해서는 도가 텄다. 인대가 늘어나면 자연스레 통증이 느껴진다. 코치님이 최종수에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말 안 하고 뭐 했냐고 혼나는 모습은 이미 다 봤다. 박병찬은 알고 있었다. 최종수는 일부러 부상을 숨겼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몇 번이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박병찬을 배신감에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제게 일일이 모든 것을 실토할 이유는 없지. 근데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잖아. 박병찬은 그것을 따져 묻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닫아버렸다.

"...무릎이라서 형한테 안 말한 거 아냐."

"..."

"곧 경기도 열리는데 여기서 내가 쉬면..."

최종수는 말을 흐렸지만 박병찬은 이어질 말을 알고 있다. 애초에 제가 휴식기를 가지며 좀 더 혹사당했을 최종수이니 자신이 쉬게 되면 그다음 혹사 당할 이가 누군지 뻔히 짐작했을 것이다. 감독과 코치는 벌써 박병찬을 위주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최종수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아! 박병찬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남 앞에서 굳이 꺼내놓지 않고 미뤄두었던 예민함이 오랜만에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요즈음엔 항상 그랬다. 그래서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챈 후배들은 모두 제 눈치를 보았지만 그걸 풀어줄 여유도 남지 않아 박병찬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다는 무슨. 얌전히 숙소로 데려다 놓고 약을 먹인 뒤 재웠어야 했다. 어쨌든 최종수를 떨어트려 놓아야 했는데, 꼭 화해를 하자는 듯 먼저 청해오는 것에 순간 미안해져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종수야, 그만 말하자. 우리."

"...형."

"최종수."

"..."

"그만 말하자."

결국 박병찬의 목소리에 화가 담긴다. 박병찬은 일부러 최종수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침묵에 목적지를 향하는 내비게이션 만이 고운 목소리를 내었다.


두 사람은 바다 앞 벤치에 앉았다. 평일인 탓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간간히 놀러 온 듯한 커플들, 가족들, 근처에 사는 것 같은 사람들. 그 사이 속에 앉아있어도 덩치가 큰 두 명을 힐끔대는 사람이 많았다. 어쩌다 알아본 팬들에게 웃어주며 사인을 몇 번 해주고서는 겨우 찾은 조용함에도 둘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은 채로 침묵을 지켰다.

정확히는, 최종수는 흘끔흘끔 박병찬을 쳐다보았고 박병찬은 제 예민함을 죽이느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둘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최종수가 다시 돌아가자고 이야기를 꺼내고서야 일어나 차로 돌아갔다. 서로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자 갑작스레 최종수가 말을 걸었다.

"박병찬."

"...어쭈?"

"화내도 돼."

"...종수야. 최종수. 내가 어떻게 화낼 줄 알고 화내도 된다고 해?"

박병찬은 기가 차 사납게 혀를 찼다. 내가 엄청 잘해주니까 화내도 별것 아니어보이는 모양이지. 박병찬은 말로 하는 싸움도 그다지 지는 편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많은 만큼 약점도 잘 알아내는 편이다. 알 거 다 아는 사이끼리 말로 치고받는 게 가장 아픈 줄도 모르고.

박병찬은 그리 생각하며 기어를 잡았고 최종수는 그 손을 꾹 잡아 왔다. 박병찬의 시선이 최종수에게 향한다. 남들은 최종수의 표정이 기분 나쁜 것 말고는 항상 무감한 것 같다고 하지만 박병찬은 이제 최종수의 표정을 모두 알았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나 결심한 표정.

"너 때문에 말 안 한 거 맞아."

"...최종수."

"내가 쉬면 당연히 네가..."

"종수야. 너는 씨발, 내가 나보다 어린 애 무릎 갈아먹으면서까지 내 몸 보전하고 싶어 하는 새끼로 보여?"

결국 박병찬의 언성이 높아진다. 최종수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도 순간 치밀어오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가라앉지 않았다. 박병찬은 지금 이 말들을 후회할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난 이미 다리 병신이고 언제 은퇴할지도 몰라. 얼마나 오래 뛸지도 모른다고. 근데 넌 아직 아니잖아."

"박병찬, 나는..."

"내가 어디 부러져서 영원히 목발 짚고 살아도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뭐라도 돼?"

박병찬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최종수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저는, 그러니까. 최종수가, 감히 그 최종수가 고작해야 다리 병신 하나 때문에 무리까지 해서... 그러니까...

결국 박병찬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나와 목이 메였다. 최종수가 어린 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 별것 아닌, 의미 없는 다정에 기대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저도 정을 주게 되니 그것에 더욱 매달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 최종수를 받아들였으니 이것은, 어쩌면 박병찬이 초래한 일이었다.

"씨발... ...네가 어떻게 그래? 내가 이 부상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잖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너한테 다 말했잖아... 내가 너한테 뭐라고 그랬어. 몸 잘 돌보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응?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나한테라도 말해달라고 했지. 그런다며. 왜 약속을 안 지켰어? 종수야. 어? 왜 나한테까지 숨겼냐고."

숫제 애원에 가까운 말을 하고 나면 다시 침묵이 가라앉는다. 박병찬은 조금 훌쩍였고 최종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박병찬은... 다 망한 것 같았다. 애 취급 해놓고 지금 제일 애 같았던 건 저니까. 이렇게 성질내고 나면 다음은 어쩌지. 미안하다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화해를 청해야 하나. 이렇게 쏟아놓고 제 혼자 홀가분해지는 게 의미가 있나.

이래서 참으려고 한 건데. 핸들에 손을 올려 거기다 이마를 댄 박병찬은 다신 계획 없이 바다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다 박병찬은 짧게 미안해. 라는 한 마디를 남긴 뒤 차를 출발시켰다.


바다에 다녀온 탓에 숙소에 도착하니 10시가 가까웠다. 박병찬과 최종수는 각자 씻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박병찬은 조금 고민하다가 제 침대에 앉았다. 최종수는 그런 박병찬을 쳐다보더니 제 침대에 앉았다. 그러니 마주 보는 행색이라, 박병찬은 시선을 돌렸고.

"형."

"...응."

아직 불을 끄지 않은 환한 방 안에서 최종수의 눈을 마주한다. 오는 내내 마주하지 않았지만 제가 화를 낼 때의 얼굴을 보면 무슨 결심을 했던 한 번 무너졌을 텐데도 여전히 단단한 눈이었다.

그럼에도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는 몇 번이고 말을 곱씹는 버릇이 있었다. 최종수의 시선이 박병찬의 품으로 향한다. 박병찬은 아, 짧게 탄성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다. 최종수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었으나 박병찬이 제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짚자 뒤로 물러나며 익숙하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젠 이렇게 누우면 어둠에 익지 않은 눈으로도 최종수의 얼굴이 어디쯤 있을지 가늠이 되었다. 익숙하게 어깨를 잡아 끌어 제 품에 안자 최종수가 품을 파고든다. 부슬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면 그제야 안심한 듯한 한숨을 내뱉는 것에 헛웃음을 흘렸다.

"종수야 자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렇게 달래듯 말하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최종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머리를 작게 비비적거리며 긍정의 뜻을 보였다. 박병찬은 오늘이 너무 피곤했기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최종수의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동안 박병찬이 속한 구단은 4강까지 올라갔으나 우승 후보였던 다른 구단에게 참패했고, 박병찬은 아픈 무릎을 잡으며 작게 신음했다.

다행히 입원이나 재활을 할 정도는 아니었고 간단한 물리치료를 받으며 충분히 쉬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에이스 둘 중 하나는 막 회복했고 하나는 이제 휴식을 해야 하니 감독의 머리가 아픈 모양이다. 박병찬은 그런 감독을 별로 신경 써주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가만히 쉬고 있으려니 최종수가 다가왔다. 농구 선수들이 쓰는 거 말고, 조깅하면서 보니 어디 아파트 근처에 작은 농구코트가 있단다. 오가며 보니 쓰는 사람이 없다며, 같이 가자 권하는 것에 박병찬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선선히 동의했다.

그래봤자 박병찬은 무릎을 쉬어야 하는 환자였고 최종수는 그런 환자한테 일 대 일을 하자는 등의 헛소리를 뱉는 멍청이는 아니라 박병찬은 준비된 벤치에 앉아 슛연습을 하는 최종수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최종수의 말대로 작은 농구 코트는 아무도 없었다. 농구 골대에 녹이 슨 걸 보면 관리도 잘 안된 것 같았다. 이런 곳을 잘도 찾았네. 가만히 있다 보니 불쑥불쑥 산발적으로 생각이 떠오르다가, 굳은 살 박힌 손으로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면 짧게 생각이 점멸한다. 정말이지, 질투가 날 정도로 예쁜 슛 자세였다.

한참이나 침묵 속에서 슛연습을 하던 최종수가 땀이 맺힌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것에 늘어지듯 앉아있던 박병찬은 손을 작게 흔들어 보였다. 최종수가 가까이 다가온다. 박병찬과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마주 선다. 점심 때가 다 지나서야 나온 탓에 한참 연습을 한 지금은 점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최종수는 햇빛을 등지고 섰다. 최종수의 긴 그림자가 박병찬을 완전히 덮는다.

"...박병찬."

"어."

"전에... 네가 농구 그만둔다고 했잖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박병찬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늘 속의 최종수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무엇을 말할지 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 네가 없는 숙소나, 네가 없는 코트 위가 어색해."

담담하게 내뱉어지는 진심에 박병찬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따위의 기분이 아니었다. 아주 깊은 저 속을 억지로 누군가가 긁어내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 박병찬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내쉰다.

"너... 농구 그만둘까. 라고 말했을 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지."

"...어땠는데?"

"아주 오래 전의 나처럼...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어."

"너처럼?"

"나는 그때 농구를 그만두고 싶었는데도 그만둘 수가 없어서 계속했거든."

"응."

"너는, 내가 너한테 뭐라도 말해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돌아오라고 했어. 나는 네가 계속했으면 좋겠으니까."

"그랬어?"

"네가 수비를 벗겨내고, 그렇게 상대편이 너에게 집중 되었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네가 좋았어. 당연하다는 듯 나한테 던져지는 공이 좋았고... 그렇게 골을 넣으면 네가 눈을 찡긋거리면서 잘했어. 라고 말해주는 게 좋아."

"응."

"나는 네가 아주 오랫동안 나랑 뛰면 좋겠어. 계속 숨길 생각은 아니었고. 같이 뛰고 싶은 거니까... 그냥 최대한 버텨보려고 했어."

"응."

"앞으론 안 그럴 테니까 계속 나랑 농구 하자. 정말 더는 못 할 때까지."

해가 계속해서 기운다. 그림자도 그에 맞춰 조금씩 움직인다. 어느새 최종수의 그림자는 박병찬의 옆으로 비켜서고, 박병찬은 최종수의 옆에서 고개를 내미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뜨고 최종수를 바라본다. 역광 탓에 얼굴이 어두웠으나 그 담담한 눈빛은 여전히 느껴졌다.

박병찬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내가 농구를 계속하더라도 구단의 사정이나, 누군가가 우리 중에 한 명만 스카우트한다던가. 그런 이유로 우리는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너는 그리 말한다.

어린애의 투정과 닮아있다고 느꼈다가도 불현듯 깨닫는다. 이것이 너의 고백임을. 정말이지 멋이라곤 하나도 없는, 농구 밖에 모르는 사람의 고백이구나. 그리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크게 웃었다. 너는 내가 갑자기 웃어버렸음에도 놀라지도 않고 놀리냐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종수야."

"응."

"언젠가 내가 정말 다리가 망가져서 더 이상 너랑 못 뛰면? 그땐 농구선수를 그만두기라도 할 거야?"

"아니."

"내가 없는 게 어색하다며."

"그래도 네가... 아니,"

최종수가 한 발자국 다가온다. 애매하게 비켜섰던 그림자가 다시 박병찬을 덮었다. 같은 그늘 속에 있으니 최종수의 얼굴이 더 잘 보인다. 아주 예전에, 최종수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눈동자를 보며 인간 태풍보다는, 블랙홀 같은 것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검은 눈동자가 아니라 숫제 검은 구멍 같아 보였다.

이제와 새삼스레 마주하는 눈은 그늘 속에서도 빛이 있으니 사람의 눈동자다. 문득 제 눈은 네게 어떤 것으로 보일지. 그것이 궁금하면서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박병찬은 시선을 피한다.

"형이 내가 농구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 내가 골을 넣을 때, 형을 제치기 위해 집중할 때, 마지막 클러치 샷을 넣고 형을 돌아볼 때..."

최종수가 하나하나 짚어줄 때마다 지나가는 장면들이 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때의 내 모습이 어땠었지.

"형이 좋아하는 농구를 하는 순간들 중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니까."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고,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박병찬은 어쩐지 숨이 막혔다. 사람은 거울이 없는 이상 제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때의 제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 것은 전적으로 그때 저를 마주한 최종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제가 그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부정할 근거가 없었다. 박병찬은 다시 고개를 든다. 손을 뻗어 최종수의 손을 잡아끌면 최종수가 허리를 숙이고, 그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눈동자를 빤히 쳐다본다. 당장 제 눈동자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럼에도 그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없이 오롯이 그의 눈동자만이 제 눈에 담긴다. 아까의 그 아름답던 슛 자세가 생각났다. 너는 농구를 할 때 가장 아름답다. 당연하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할 때 가장 빛난다. 제가 가장 빛나는 순간도 그때겠지. 농구를 좋아하는 인간들끼리, 서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마저 농구가 끼워져있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당연한 것 같았다.

박병찬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박병찬은 항상 농구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제 저는 평생, 농구를 포기하지 못함을 다시금 확인 받은 이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종수야."

"응."

"너도 그래..."

네 말대로 너 역시 그 모든 순간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이제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너 또한 종종 함께 뛰는 저를 보며 눈이 먼 사람 같은 얼굴을 한다고. 박병찬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평생 사랑하게 되고 마는 것이 하나 늘어난, 아니 늘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언젠가 농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나는 영원히 너희 둘을 사랑하고 말겠구나. 병찬은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힘껏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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