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병찬이 운동용 워치를 장만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라커룸에 휴대전화를 포함한 모든 소지품을 두고 오므로 훈련 중에도 제 어린 연인에게서 오는 사소한 연락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카드사에서 결제 아나운스 문자를 받은 것은 개인 훈련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병찬은 하던 일을 멈추고 왼쪽 팔을 까딱하여 나열된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GS26 결제 12,500원 (일시불) 13:30. 병찬 명의로 된 신용카드는 무려 한도가 기천만원에 달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지금은 제 어린 연인이 사용 중에 있었다. 병찬의 부재와 동시에 시작되는 연인의 생활의 궤적을 그렇게나마 알고 싶었던 그가 연인의 손에 강제로 쥐어준 것이었지만. 

병찬은 땀에 절어 뒷목에 달라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역방향으로 쓸며 또 편의점에 갔네, 하고 혼잣말했다. 신용카드를 쥐어준 것은 그 족적의 확인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비용 걱정없이 마음껏 하였으면 바라는 애정의 발로였다. 그것에는 든든하고 제대로 된 한끼 식사도 포함이었으나 결제 내역에는 그런 기대를 가벼이 배반한 채 익숙한 편의점 명칭만 예사로이 나열되곤 했다. 또 컵라면과 인스턴트 식품을 비롯해 맥주 따위로 끼니를 때우려는 걸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병찬은 돌연 부산스러워졌다. 다리를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못 해 달달 떨었고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체육관 곳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지겨울만큼 봐 와서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창 밖의 풍경을 잠깐 응시했다. 그러다가 한 쪽 손을 번쩍 들어 휴식을 요청했고 전술 구상을 위한 단체 훈련이나 모의 경기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구는 흔쾌히 승낙되었다. 마침 비시즌이었고, 전략이나 스킬을 체득하기 보다는 기초체력을 중심으로 개인 역량을 단련하는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커룸으로 돌아간 병찬은 개켜진 옷가지 가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바일을 찾은 뒤 최근 통화 목록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처럼 전화를 거는 날의 구 할은 수신 거절을 당하곤 해서 서운한 마음이 고개를 비집고 나오는 거야 예삿일이었지만 다음 날이 되면 그런 거절의 역사는 까맣게 잊은 채 좋아하는 아이에게 난생 처음으로 연락을 건네는 소년의 심정으로 다시금 전화를 걸어보는 병찬이었다.

통화는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예의 전화를 수신할 때 건네는 인삿말은 고사하고 응, 이나 왜 전화했어요, 하는 물음조차 소거된 정적이 이어졌다. 운을 떼는 것은 언제나 병찬의 몫이었다.

"상호야, 밥은 먹었어?"

ㅡ ⋯.

"오늘 나올 때 보니까 역사 앞에 한식당 생겼더라. 상호 네가 한식을 좋아하던게 생각이 나서. 괜찮으면 저녁에 같이 갈까?"

ㅡ ⋯몇 시에⋯ 오는데요?

"일곱시까지 갈게. 훈련 끝나자마자 달려갈게."

ㅡ 네⋯ 끊을게요.

"어어, 이따가⋯"

일방적인 단절은 시월 초순이란 일교차가 심한 법이니까, 따듯하게 챙겨 입으라는 병찬의 권유가 끝나기도 전에 찾아왔다. 그래도 오늘은 제 어린 연인의 기분이 썩 나쁘진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니 병찬은 마음 한 구석에 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근래 상호는 병찬이 귀가하는 시각에 이미 제 방에 틀어박혀 다음날 병찬이 집을 나설 때까지도 통 나오질 않았으니, 겸상을 하는 것은 제법 오랜만인 일이었다. 외식은 물론이고 양방향의 소통 자체가 간만이어서 병찬은 조금 들떴다. 첫 소풍을 떠나는 유아처럼 애드벌룬처럼 부푸는 마음은 내일 모레 서른줄에 접어드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병찬은 정규 일과가 마무리되자마자 로커룸으로 달려가 상호에게 '나 끝났어 상호는 잘 쉬고 있어? 오늘 형한테 시간 내줘서 정말 고맙다. 이따 보자.' 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기대감과 함께 송신했다. 샤워를 한 뒤 환복하고 잰 걸음으로 체육관을 빠져 나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이었다. 

사전에 일러 두었던 한식당은 집에서 도보로 오 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기에 병찬은 일전 귀동냥으로 알게된 디저트 숍을 찾았다. 같은 구단 소속의 후배가 여자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법론을 열정적으로 설파하던 때에 무심하게 귀 기울였던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디저트 숍에 향하는 동안 부풀었던 기쁜 마음은 텅 빈 쇼케이스와 함께 상실되고 말았다. 이벤트에 익숙지 않았던 병찬이 저명한 디저트 가게들이 매일 소량의 판매 수량을 한정해 놓으며 대개 이른 오후 중으로 매진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가게는 이미 폐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량한 쇼윈도 앞에서 마른세수를 연거푸하던 병찬의 곁으로 파티셰로 보이는 남자가 슬며시 다가와 정말 죄송하다며, 괜찮다면 받아주시라 하며 신메뉴 투명한 박스에 담긴 레몬케이크와 바닐라빈이 들어간 에클레어를 건넸다. 값을 지불하려하자 다음번에 또 와주시라는 말로 얼버무릴 뿐이어서 병찬은 고개를 여러번 숙이면서 가게를 나왔다. 약속 장소를 향해 부드럽게 차를 모는 동안에는 우주의 모든 기운이 병찬의 등을 떠미는 것 같다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던 한식당 앞에서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상호가 저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일곱시 십분 전이었다. 조금 더 늑장을 부렸으면 상황이 퍽 곤란해질 뻔 했겠는걸. 병찬은 제 손목을 내려다 보며 아찔함을 느꼈다. 저는 한 시간이든 반나절이든 기다릴 수 있었지만 상호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병찬이 가지는 기다림의 지표는 설레임과 기대감이었지만 상호의 경우에 그것은 고독과 불안이었으니까. 그래서 병찬은 그가 단 일 초의 외로움이라도 느끼지 않도록 늘 다방면으로 마음을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트레이닝복에 러닝화를 갖춰 입은 상호가 저 멀리서 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이 기이하게 꺾여 걸음걸이가 엇박자를 탈 때마다 병찬의 마음은 바닥도 모르고 가라앉았다. 병찬은 짧은 거리를 달리다시피하여 상호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주었다. "역시 다음부터는 데리러 갈게." 병찬이 말했다. "그 정도도 못 걷는 병신은 아니에요." 상호가 눈을 홉뜬 채 비아냥댔다. 혀 아래 숨겨둔 화살이 그렇게 말하는 상호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 병찬은 못내 마음 아팠다.

좌식 테이블을 권유하는 직원의 안내에 병찬은 손을 내저었다. 결국 선택한 자리는 출입구에서 가장 먼 안쪽 입식 좌석이었다. 불고기와 순두부찌개를 주문한 뒤 병찬이 잽싸게 수저를 놓고 컵에 물을 채우는 동안 상호는 얌전히 눈을 내리 깐 채 물수건으로 손을 닦거나 앞접시가 놓일 자리를 공연히 닦았다. 겨우 그런 일을 했을 뿐인데 병찬의 손짓보다 훨씬 느렸다. 약간 굽은 어깨와 내리깐 시선에는 사람과 오랫동안 단절하여 묻어나는 경직된 분위기가 있었다. 병찬은 그런 상호에게 뭐라도 말을 붙이고 싶었고 그의 오늘 하루 일과가 궁금했다. 그가 종일 어떤 생각을 했고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좋아하는 만화책이나 DVD를 보았는지, 보았다면 어떤 점이 재미있었는지, 만일 그가 그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종일 잠을 잤다고 할 지라도 잠자리는 편안했는지, 중간에 깨진 않았는지, 배가 고프진 않았는지, 도중에 꿈을 꾸었는지⋯. 가능한 질문들은 병찬의 심장어귀에서 화수분처럼 솟았다. 하지만 언젠가 병찬이 그런 질문들을 숨기지 않았을 때 그 만면에 드리운 수치심을 목도했던 일이 있은 후 두번 다시 그의 일과에 대해 묻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병찬은 대신 디저트가 포장된 박스를 건네고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레 눈 앞 소년의 기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유명 파티셰가 만든 거래. 상호 네가 만화책 읽는 거 좋아하니까, 그때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돌아가는 길에 대여점 들러서 신간이라도 빌리는 건 어때?"

"⋯그, 요즘에는 전자책으로 나와서 그걸로 보면 되는데⋯."

"그랬어? 그래도 종이책은 특유의 손맛이 있지 않나? 형도 네 나이땐 책 읽는 걸 좋아했거든."

병찬이 눈을 접어 웃었다.

사실 병찬은 종이책을 읽을 때마다 손가락을 베였던 경험이 숱했기에 종이책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상호가 그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났고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종이책만이 주었던 자극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생의 감각이었다. 요즘은 조그마한 모바일 너머의 세상이 우리의 삶을 흔들고 그래서 현실과 주객전도 되고는 하니까 그런 것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건⋯ 맞아요."

"⋯."

"요즘에도 대여점이 있나? 마지막으로 간 게 너무 오래돼서⋯."

"어, 어! 자, 잠깐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를 크게 들썩인 병찬이 휴대 전화를 뒤적였다. 몇 달 전, 언젠가 상호에게 소개해줄 요량으로 만화 대여점 몇 군데를 북마크 해두었는데 그것을 보여주려는 모양이었다. 핀 마크가 빼곡히 표시된 지도를 내밀자 허리를 쭉 뺀 상호가 성큼 가까워졌다. 숨을 집어삼킨 병찬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체 하며 긴 손가락을 뻗어 스크롤을 이어가는 것에 골몰했다. 디지털의 푸른 빛을 쬐는 상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젖살이 전부 빠진 얼굴은 성마르고 두드러진 턱선때문에 날렵하고 성숙한 느낌을 주었지만 표정 없는 얼굴과 고집스런 입매 때문인지 여전히 소년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외모의 특성이 아니더라도 상호를 언제나 아이처럼 여겨줄 병찬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투박한 손이 튀어나와 액정을 문질렀다. 가까운 거리의 대여점 상호명을 클릭하자 ―영업종료― 라는 안내문이 떠올랐다. 재정난에 폐업한 것이었고 그런 비극은 비단 그 가게의 사정만은 아니었다. 병찬이 찾아온 것들은 정보의 주인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그 효용을 잃었다. 무감한 낯으로 바라보던 상호가 "요즘엔 대여점 잘 없어요. 죄다 만화카페 같은 거만 있고." 말했다. 병찬은 제가 그 사업장의 주인도 아니면서 단절된 명맥 앞에서 두 귀를 붉혔다. "네가 원한다면 새 책을 사줄 수도 있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한 것은 결코 그 낯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충동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네, 감사해요." 말하며 몸을 물렀다. 병찬이 건넨 제안은 상호의 어깨에 잠깐 머무르다 떠났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을 때 즈음 주문해두었던 메뉴가 하나씩 나왔고 순식간에 번듯한 한상이 차려졌다. 밑반찬으로 나온 가지튀김을 병찬이 제 쪽으로 끌어왔다. 상호가 싫어하는 찬이었기 때문에. 흑임자 드레싱이 뿌려진 게살 샐러드를 상호가 병찬쪽으로 밀어 주었다. 병찬이 좋아하는 찬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살펴준 길고양이가 발톱을 숨긴 채 품에 안겨드는 듯한 고양감이 밀려왔다. 방금 전의 행위에서 정서적 합일을 느낀 것은 오로지 병찬 뿐인 듯 했지만 오늘 하루 내내 병찬의 등을 떠밀었던 신비로운 기운이 방금 전의 행위로 하여금 어떤 명징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은 병찬의 마음 속 빗장을 풀게끔 했고 사고와 입이 가벼워지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병찬은 아주 예전부터 그에게 전하고 싶었던, 인스턴트를 끊었으면 좋겠다던가, 술을 줄였으면 한다던가, 제가 준 카드를 거리낌없이 써 주었으면 좋겠다던가 하는 말을 꺼냈다.

"카드 말이야. 예전부터 너한테 그런 걸 주고 싶었거든. 너는 또래보다 빠르고 나는 또래보다 늦으니까 예전부터 형 노릇이라곤 전혀 하지 못 했잖아. 네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써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형이 기쁠 것 같아."

"⋯내가 언제 형한테 이런 걸 원한적이 있었나."

상호가 젓가락을 소리나게 탁, 내려 놓았다. 다툼의 기척을 읽어낸 주변 객들이 하나 둘 이쪽을 향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병찬과 상호를 흘깃 보고 저들끼리 몇 마디 주고 받다가 다시 그들을 훔쳐보는 식이었다. 개중에는 농구선수 병찬을 알아본 이도 있었는데, 살벌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병찬과 상호는 그 세계에서 유리된 존재들처럼 보였다. 상호는 입맛이 죄 떨어졌다는 낯으로 물수건을 끌어와 손을 벅벅 닦아내더니 헛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감탄을 뱉었다. "형 노릇?" 그것은 혼잣말에 가까워보였다.

"형이 생각하는 형 노릇이 뭔데요? 좀 들어나 보자. 나 예전부터 이거 궁금했어."

"미안, 내가 경솔하게⋯."

"내가 제일 약해져서, 그래서 형이 가장 간절했을 땐 자기 인생 찾아 떠나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돈으로 위로하는 거? 형이 말하는 형 노릇이 고작 이런 거예요? 아니면 이것도 어른의 사정이에요? 나는 또 영영 모르는?"

"⋯."

"시간이 흐른 지금도 형을 이해 못하겠어요. 아마 영영 못할 것 같고요. 아니면 내가 반푼이라 그런가?"

"그런 식으로 너 깎아 내리지마. 듣기 힘들다."

상호는 입술을 감쳐 물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한 구석을 싸늘히 하는 자조적인 미소를 삐뚜름하게 걸친 낯이었다. 치켜뜬 그의 삼백안이 형형했다.

"이제 와서 제가 뭐 대단히 달라질 수 있는데요?"

"무슨 소리야. 너 아직 스물 다섯도 안 됐다."

"이제 나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왜 아직도 나⋯ 데리고 살아요?"

"그건⋯."

"사귀던 애새끼가 다리 병신된 거 보니까 옛 생각도 나고 그래서?"

거기까지 말한 상호는 일순 숨을 집어 삼키며 벼려진 화살촉같은 말을 거두었다. 희멀건 낯은 제가 그런 말을 내뱉은 것에 대한 회오로 범벅되어 있었다. 제가 뱉은 말에 상처받은 기색이었고 병찬을 상처입힌 것은 그의 말이 아닌 상처받은 얼굴 그 자체였다. 상호가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드는 자신이 무엇보다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상호의 물음에 병찬이 머뭇거린 것은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보편적 정서의 언어가 과연 그들 사이의 맥락에 끼어도 좋은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지 결코 모호한 마음에 기인한 망설임 같은 게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진 신비한 아우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들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아우라를 비단처럼 두르고 둘만의 세계에 빠졌던 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이 지나오지 않았는가. 각자 고장난 나침반을 들고 방황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 사이에 너무 많은 거리가 생겨나지 않았느냐고. 병찬은 그렇게 생각했고 가능하다면 전지전능한 누군가에게 명료한 답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리란 걸 알았다.

여기 더 있으면 토할 것 같아요. 물잔을 비운 상호는 금방 자리를 떴다. 병찬은 그를 따라가지 않고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방금 전 상호의 말에서 형 얼굴 보면 토할 것 같아요, 라는 행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낸 까닭이었다. 혼자가 된 병찬의 곁으로 그를 알아본 여자 두엇이 그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함께 내민 흰 종이는 가게용 벽걸이 달력을 황급하게 찢어 두어번 접은 것이었다. 용지와 펜을 건네받는 순간 손에 힘이 죄 풀려 놓치고 말았다. 가련하게 낙하하는 희디힌 종이를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팔랑팔랑.

상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뒤집어보니 상호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병찬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병찬을 만난 것은 상호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열여섯의 여름 무렵 인천의 모 학교와 연습 경기를 펼칠 때였다. 병찬의 무릎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한 상호가 팀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에이스 스토퍼로서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던 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상호는 그 날의 활약에 대하여 양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상호가 대기 중인 벤치가 제대로 데워지기도 전에 상호는 이미 병찬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건너편 벤치에서 파란색 후드티를 걸친 채 때론 진지한 얼굴로, 때론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으로 경기에 집중하는 병찬에게 이상하리만큼 시선을 빼앗겼던 상호였다. 그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 나직한 목소리 외에도 그가 저와 같은 벤치 신세라는 점은 상호로 하여금 마음의 빗장을 허물게 만들었다. 이윽고 그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걸 알았을 때 배신감 대신 상호를 찾아온 감정이 경외라는 점은 참으로 의외였지만. 그러니 원래 면밀한 관찰에 재능을 보이던 상호라 하더라도 그 시선에 하릴 없이 섞이는 사심을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상호는 코트 위의 병찬을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낱낱이 해체하여 감상했고 그날의 경기 기록은 그 집요한 관찰의 결과와 다름 아니었다. 다만 상호가 감히 병찬에게 호감을 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완전히 이성의 영역에 머무르지 못하고 감정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야 만 것, 그래서 상호의 전술이 병찬을 궁지로 몰았을 뿐만 아니라 종내에 그를 한계까지 치닫게끔 만들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로부터 늘 가책은 시작되곤 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쓰러진 병찬이 처치실로 실려가다시피 사라졌기 때문에 상호가 그와 제대로 대화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합숙 훈련이 있던 날이었다.

상호가 처참한 슛 성공률의 퍼센티지를 0.001% 이라도 끌어 올리기 위하여 체육관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골대에 공을 통과시키는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던 병찬이 기척을 느끼고 들어와 본 사정이었다. 상호는 몇 번이고 림을 맞고 튕겨져 나오는 농구공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어쩌면 이런 기술들은 재능의 영역인 것 같다고 병찬에게 말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언어에 투정이 잔뜩 묻어 있어서 상호는 마음이 졸아 붙었다. 부정적인 예감은 야속하게도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병찬에게 크게 혼이 났다. 네가 말하는 재능의 영역은 NBA에 가서나 있을걸, 말하는 목소리는 꼭 조소하는 듯했지만 결국 타고난 재능을 가질 수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해보라는 이야기였다. 힐책하는 듯한 훈육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 얽힌 병찬의 마음과 격려를 상호도 모르지 않았다. 

벽걸이 시계를 흘깃 보고 시간의 흐름을 가늠한 병찬이 체육관을 나가며 너 그렇게 재능 없지도 않다고, 그런 말을 건넸을 때 상호는 누군가 제 몸을 천장으로 잡아 당기는 듯 전신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난생 처음 받은 인정이 그 누구도 아닌 병찬에게서부터 왔다는 사실은 상호를 고양시켰다. 병찬을 알게된 이래로 모든 판단의 기준이 병찬을 중심으로 재정립되었던 까닭이었다. 더구나 그때의 상호는 유독 제게 불친절한 시기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칭찬과 격려 하나가 무척 간절했다.

상호는 병찬의 그 말을 마음 속 타임캡슐 안에 넣고 힘에 부칠 때마다 꺼내 보았다. 

병찬과는 그뒤로 간간히 연락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입시 때문에 바쁘던 병찬이 어느 날 문득 상호에게 전화를 걸어 지망하던 준향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상호는 마치 제 일인 것처럼 기뻐해주었다. 일렁이는 눈가와 함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수화기 너머의 병찬은 갑자기 우니까 참 당황스럽다고 타박을 주면서도 너한테 가장 먼저 알려주어야겠다고, '왜냐하면 상호 네가 그랬잖아, 또 보자고. 합격 화면 보자마자 네가 떠오르던 것 있지? 내가 그때 대답을 제대로 해줬는지 기억이 안나서 이 말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또 보자고 말이야.' 하고 말했다. 

2년 뒤 상호는 준향대학교와 서교대학교에 합격했다. 병찬의 말을 지침삼아 달려온 것 뿐인데 그 때의 병찬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됐단게 내심 놀라웠다. 병찬의 후배가 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으나 이 고민을 병찬에게 전했을 때 그는 상호의 성장 지표나 학교의 주목도를 보았을 때 서교대학교가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려 주면서도 '근데 상대팀으로 만나는 게 더 좋지 않아? 네가 내 앞을 막을 때 기분이 제일 좋거든.' 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 말에 상호는 뜬금없이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찬에게 반드시 제 졸업식에 와 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하였는데, 병찬은 '그럼 당연히 가야지, 형 쓰레기 만드냐?' 하며 도리어 서운한 티를 팍팍 냈다. 상호는 그것이 왜 당연한 일인지에 대해 내심 궁금은 하면서도 언젠가 나눴던 체육관에서의 짧은 대화가 상호 뿐만 아니라 병찬의 삶 또한 지탱해주었단 사실이 무척 기적처럼 느껴졌다. 

사진 속의 상황은 그런 우연한 정황들이 겹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날 병찬은 학교 앞의 즐비한 가판대가 아닌 지역 유지의 꽃집에서 사들인 꽃다발을 건네주었고 상호는 그게 좀, 많이, 엄청 감동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찬의 허리에 제 두 팔을 단단히 감고 '햄, 좋아해요⋯.' 하는 고백을 잇고 있었다. 품 사이에 끼인 꽃다발 때문에 더 가까이 밀착하지 못 하는 게 아쉬웠다. '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오해해도 돼?' 병찬의 말에 상호는 재차 되물었다. '방금 그거⋯ 저도 오해해도 돼요?' 공회전하는 대화 끝에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병찬이었다. '어,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인천에서 여기까지 오겠냐? 형이랑 만나볼래? 진지하게.' 병찬의 눈이 낮게 가라 앉았다. 너무 긴장했기 때문이라는 건 훗날에 알게된 사실이었다.

상호는 떨어진 사진을 주워 다시 책 사이에 끼워 놓았다. 그 책의 이름이 「나의 침울하고 소중한 이여」 라는 것은 어떤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마치 병찬의 전언처럼, 그가 그렇게 섬세하지 못한 사람이란 걸 익히 알고 있는데도⋯.

병찬이 출근하고 집에 완전히 홀로 남게 되면 상호는 가장 먼저 병찬의 방에 왔다. 방금까지 머무른 장소에는 그의 훈기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였다. 간밤에 그의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을 들추면 안에 갇혀 있던 그의 체취가 비강에 가득 스며들었다. 그러면 상호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한때는 제게 부족한 줄도 몰랐던 그 온기와 냄새 따위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것이다. 머스크와 레몬 향기가 엷게 나는 그의 살결 냄새를. 그 안락함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잠깐 뒤척이다 보면 다시 긴 잠에 들곤 했다. 눈을 뜨면 항상 오전이 사라져있었다.

상호는 어저께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가 언제 그런 걸 바랐나요. 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병찬이 주는 돈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주제에 그런 말이 잘도 나왔다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가진 사회적 위신과 자산, 선의, 죄책감에 기생하여 사는 기생충이 상호였으니 말이다. 제 자신이 모순 덩어리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 상호를 짓누르는 것들이 병찬의 부재와 자신의 선수 생명을 앗아간 갑작스런 교통사고였다면 지금은 그 양상이 약간 달랐다. 상호가 가장 괴로운 것은 타협되지 못하는 자기 내면에 있었다. 상호가 사랑하던 것은 전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래서 훗날 다시 사랑하는 것이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그것을 먼저 등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아주 행복하진 않겠지만서도 아주 불행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 병찬의 곁 만큼은 완전히 떠나는 것도 머무는 것도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문득 명치가 조여드는 느낌에 상호는 갈비뼈 부근을 다급하게 쓸었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근처를 서성이는 동안 턱 끝까지 차올랐던 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몽롱한 분노는 신체의 이상으로 돌아오곤 했기에 이런 증상도 하루이틀 겪는 일은 아니었다. 상호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무척 조용해서 우주의 진공 상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되어 눈시울이 화끈해질 뻔 한 걸 겨우 참아냈다. 눈꺼풀을 내리면 어저께의 미처 갈무리 되지 못한 기억이 기다렸다는 듯, 상호가 눈을 감고 번뇌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노도처럼 덮쳐온다. 

어젯밤, 병찬이 부재중인 집에 먼저 귀가한 상호가 화장실을 찾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방금 전 먹은 것들이 제대로 소화도 되지 않은 채 한데 엉겨있는 모양을 보고는 다시금 게워내길 두어번 반복한 뒤에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난리법석을 떨고 나니 몸에 기운이 쏙 빠져, 겨우 양치와 물 세수만 하고 방에 들어가 누웠을 땐 뱃속이 비어버리다 못해 쪼그라들 것 같았다. 병찬의 귀가는 하염없이 늦어지다가 쓰린 배를 부여잡고 새우잠을 자는 자세로 웅크려있던 상호가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옅은 잠에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느즈막히 이루어졌다. 방문 바깥으로 인기척이 들리다가 이윽고 길고 딱딱한 어른의 손등이 상호의 이마와 뺨,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상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와중에도 제가 고양이였다면 분명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손이 너무 차요. 은연 중에 뱉은 말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겁다. 누군가의 말이 머릿속을 둥둥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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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찬은 종종 준수를 만났다. 같은 구단에 몸 담고 있으므로 매일 마주치는 얼굴이었고 간단한 용건은 오고 가며 해결할 수 있었지만 때때로 그들은 인적이 드문 체육관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준수가 상호의 근황을 궁금해했으며, 병찬은 저만 아는 상호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나눌 때마다 이 세상에서 상호의 입지가 서서히 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몇 번 만남을 이어가던 사이 단골 비슷한 위치까지 오르게 된 병찬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이 크게 반색하며 알은체했다. 미숫가루 라떼! 맞으시죠. 기획으로 냉마 라떼 나왔는데 이거 어떠세요? 병찬은 어제 먹었던 것이 아직도 소화가 덜 되어서 허브 티를 먹을 요량이었지만 눈앞의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상호를 떠올리면 병찬은 항상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항상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그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져 단 한번도 같은 적 없었던 카페의 인테리어를 구경했다. 그러는 동안 내부에 들어선 준수가 샷을 두 번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병찬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쌀쌀한 공기 탓인지 그가 평소에 즐겨 뿌리던 향수 냄새가 한층 더 묵직하게 느껴져서 병찬은 티나지 않게 코 끝을 찡그렸다. 형은 진짜 한결 같네요. 저는 나이 드니까 이거 말곤 아무것도 안 들어가요. 특히 아침에는. 테이블 위에 소지품을 던지듯 내려놓은 준수가 연거푸 마른세수하며 말했다. 감춰졌다가 드러나는 얼굴은 여전히 푸석했지만 눈가가 한결 또렷해져 있었다. 의자를 끌어 테이블 쪽으로 바투 당겨 앉은 준수가 이윽고 "기상호 잘 지내요?" 하고 물었다. 병찬은 라떼의 스트로우를 한 번 빨아 당긴 뒤 "그냥 평소랑 똑같아." 했다. 

"평소랑 똑같다는 게 뭔지⋯ 여전히 형네 집에서 먹고 놀고 자고 한다는 건지⋯."

"지금은 그게 상호가 할 일이니까."

준수는 두 눈을 스트레칭하듯 좌우로 굴리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병찬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그 집요한 응시는 병찬을 내심 긴장하게 만들었다. 형 솔직히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요⋯.

"저는 뭐 기상호랑 선후배였다 뿐이지 우리 둘 중에 기상호한테 참견할 권리가 있다면 그건 분명 형이라고도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형이 고집하는 그런 방식은 이제 틀렸다고 봐야하지 않아요? 벌써 세 달 짼데 아무런 차도가 없잖아요. 그렇게 사는게 짐승이랑 뭐가 달라요? 진짜 걔 망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테고."

그 말에 병찬의 눈이 일렁였다. 누군가가 제 심장에 얼음 송곳을 찌르고 달아난 것처럼 가슴이 짙푸른 싸늘함으로 물들었다. ⋯내가 상호를 망치는 사람이야? 그런 생각은⋯ 결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영락없이 그에게 해가 되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이 병찬은 슬펐다. 왜냐하면 차마 아니라고 단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이 영과 일로 간단히 나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은 절대로 영이나 일이 될 수 없고 영과 일 사이의 무수한 틈 사이에 존재했다. 영과 일처럼 보이는 것마저 극한에 가까운 결과값이었을 뿐 절대 영과 일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병찬은 그에게 있어 무해한 존재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삶의 무게가 요즘만큼 벅차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준수야, 확실히 너 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줬다면 좀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병찬은 제가 지나쳤던 무수한 가능성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병찬의 자리를 준수가 대신하는 세계선이 머릿속을 광폭처럼 오갔다. 병찬이 그랬던 것처럼 한도가 없다시피한 신용카드를 건네주거나 때때로 섹스를 해주지는 못 했을 지라도 이른 새벽녘에 강제로 운동을 시켰다거나, 그의 인맥을 총동원해 일자리를 구해다 주었다거나, 우울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 할 정도의 빽빽한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던가 하는 그만의 엄격한 상냥함으로 상호를 위로해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상상해 보았자 어쩌겠는가? 병찬은 공상을 즐기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사실 병찬은 눈 앞의 성준수 못지 않은 현실주의자였다. 병찬이 믿는 것은 언젠가 지나가리라 하는 식의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었다. 

병찬은 과거의 기상호를 기억한다.

그 마음 속에 있던 미미하지만 결코 꺼지는 법 없던 빛을, 권태로운 낯 이면의 갈증을, 죽어도 빛으로 돌진하는 그의 뜀박질을, 가장 낮은 온도의 열정을, 겉으론 가망이 없는 체 하지만 그 가망 없는 세계 끝자락에 발만이라도 걸쳐 보고 싶어 열과 성을 다하던 어느 체육관에서의 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제게 주었던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애정을 기억한다. 그것을 병찬이 기억하는 한 상호는 언제고 괜찮아질 수 있을 터였다. 그 아이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빛을 믿어주는 병찬이 있는 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실체화할 수 없는 마음이었지만 병찬이 포기한다면 영영 소생하지 못 할 것이기도 했다. 그의 역사를 내밀하게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 병찬이었으니 그 역할은 오롯이 병찬의 몫이었다. 그래서 상호가 병찬을 거울 삼아 다시 한 번 일어나는 때를 병찬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곤 못 하겠다."

자존심 상하네⋯. 병찬은 스트로우의 끝을 아랫니로 지근지근 씹으며 말했다.

"네가 상호 아낀다는 거 알아."

"⋯."

"그런데 나도 많이 아껴. 걔가 다쳤을 때 연락두절 됐던 거, 그 뒤에 도망치듯 식 올릴 뻔 했던 거 전부 후회하고 있어. 그래도 상호가 다시 한 번 나를 선택해준 한 나는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걔를 지탱해줄거야."

"제가 보기엔 형이 착각하는 것 같아요. 형은 지금 그냥 걔가 불쌍해서⋯."

"준수야."

"⋯네."

"그동안 이야기 들어줘서, 상호한테 관심 가져줘서 고마웠어.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까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앞으로는 따로 시간내기 힘들고 말야. 상호랑 이야기 나누고 싶으면 우리 집 주소 알려줄 테니 언제든지 놀러와."

먼저 일어날게. 뒤에 잡지사 인터뷰가 있어서. 병찬이 부러 부산스레 옷을 껴 입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집 주소를 남겨준다는 전언은 어떻게 보면 기만에 가까웠는데, 준수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확신하고 있기에 가능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비상한 두뇌는 아니더라도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준수는 방금 전 병찬이 그어 놓은 선을 분명히 인지하였을 테고 부러 토 달지 않은 것은 연장자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갑작스레 그어진 관계에 대한 수긍에 가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을 꺼내어 보여줄 수도 있었던 병찬이 준수의 말에 다소 패배적인 태도를 고수한 것은 병찬의 진심을 가장 먼저 듣는 이가 생긴다면 그것은 필시 상호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준수의 눈에 삐뚤어진 연인으로,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로 보이든 간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병찬의 발걸음은 평소와 다름 없었지만 두 눈의 빛 만큼은 싸늘히 식어갔다.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 듣고 싶기도, 어떤 말조차 필요없기도 했다. 그들이 겪는 일은 이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의 경우였고 그들 자신보다 그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인터뷰는 방송국 근처의 카페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병찬은 상암동으로 가기 위해 근처의 유료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횡단보도 앞은 각자의 사정으로 바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는데, 그곳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니 거리의 차가운 공기와 노점상에서 흘러 나오는 음식 냄새, 사람 머릿수만큼의 체취가 한 데 섞여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고장난 신호등이 깜빡- 깜빡- 점멸하고 있었다.

동그란 눈이 바삐 깜빡였다. 그때마다 부드러운 라떼색을 띤 홍채가 사라졌다가 드러나길 반복했다. 상호는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 당긴 채 천장의 얼룩을 응시하고 있었다. 희디흰 천장에 베이지색으로 난 얼룩은 심장 모양 같기도 하고 우화에 나오는 여우 모양같기도 하다. 주말 오전, 잡지사와 인터뷰가 있다고 일찍 집을 나선 병찬의 방에 여느 때처럼 숨어 들었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상호는 이불 자락에 밴 병찬의 살냄새를 깊게 들이 마시며 눈꺼풀을 내렸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그 이마 위로 어른의 손등이 내려 앉을 것만 같았고 제 볼품없는 살갗을 다정하게 쓸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저를 아이로 머물고만 싶어지게 만들어주는 손. 

한밤 중에 병찬이 제 얼굴이나 어깨, 무릎 따위를 쓸어보다가 돌아가곤 하는 사실 정도는 상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 낮잠을 길게 자는 상호가 밤 일찍 눈을 붙이기란 어려운 노릇이었으니까. 그 손짓은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애처롭기도 하였고 저명한 고전 소설 속의 어느 박사처럼 그가 빚어낸 어떤 피조물을 점검하는 것 같기도 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한 것이었다. 그 손길을 받고 있노라면 상호를 내내 괴롭히던 불면증도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손등에 밴 익숙한 향기가 비강에 스며들면 자는체 하던 일도 곧 숙면으로 바뀌곤 했다.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가을 바람이 스며들었다. 문득 뺨이 간지러웠고 아니나 다를까 뺨에 병찬의 것으로 추정되는 긴 머리카락 한 가닥이 붙어 있었다. 베갯잇에 뺨을 비벼대다 옮겨 붙은 모양이었다. 바람에 날려 보내려던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상호는 문득 그것을 삼키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걸 삼키면 그때의 병찬을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정작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하니까. 그런 일을 극복하기 위해선 머리카락을 삼키는 것 정도의 기행을 펼쳐야 겨우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딱 이맘때였다. 일 년 전, 시월의 초순. 프로선수가 된 병찬은 이미 서울에서 출퇴근을 반복하던 실정이었고 그 뒤를 이어 상호가 드래프트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대로만 하면 문제없다는, 믿을 만한 연장자의 말은 상호로 하여금 팽팽했던 긴장을 한시름 놓아두게끔 만들었다. 본격적인 준비에 앞서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오라는 감독의 전언이 있었다. 단 이틀의 휴가를 받은 상호는 부산에 내려 왔고 마침 상호 뿐만 아니라 뿔뿔이 흩어졌던 지상고 원년 멤버 몇 명이 내려와있던 참이어서 그리운 인연들이 모여 술 한 잔 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호는 훗날 드래프트에 실패하더라도 이 날의 음주가 제 발목을 잡지는 않았으면 해서 제 앞의 잔을 모두 물린 뒤 사이다만 홀짝였다. 모임이 파한 뒤 귀가하는 사차선 도로에서 음주운전을 하던 SUV 한 대가 상호를 들이 받았다. 상호는 온 몸을 날려 피해 보았으나 다리 한 쪽을 크게 다쳤다. 뼈가 산산조각 났고 큰 수술이 이어졌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와 그의 형제들이 '살아서 다행이다.' 라고 하는 걸 듣고 '정말 다행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을 무렵 상호는 인터넷 뉴스 기사에 그날의 교통사고가 작게 실린 것을 발견했다. 음주운전 차량 뿐만 아니라 음주 후 귀가하던 대학생 기 모 군까지도 힐책하듯 실린 기사에 상호는 억울했지만 그런 역정도 곧 사그라들었는데, 그것은 그의 연인이던 병찬이 어저께부터 연락두절 상태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하여도 상호는 병찬과 저 자신 사이에 있는 서울과 부산 만큼의 물리적인 거리를 생각하면 이만큼 연락이 두절된 것도 그리 이상하지 만은 않다고 애써 합리화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괜한 자존심을 세우기 보다는, 아직 현실 감각이 잘 와닿지 않아 약간은 부유하는 공포심과 난생 처음 입원해보는 1인실 병실에서의 붕 뜬 마음과 사무치게 보고 싶은 마음, 병찬과 부상의 고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을 한데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햄 저 사고나ㅆ어요 ㅠㅠ 다리 부서졋는데 수술도 잘됏고 다른데도 멀쩡해요 근데 농구못하게되면어떡ㅎ가죠? 한 시간, 반나절,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상호가 전화를 걸었지만 오랜 신호 끝에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그 의미없는 행위를 열흘 가량 반복하고 나서야 상호는 체념하게 된 것이다. 그제야 막힌 수전이 터지듯 온갖 감정이 노도처럼 그를 덮쳤다. 앞으로의 장래에 대한 공포심과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가장 조용한 상태가 가장 시끄럽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릿속에 넘실대는 내면의 속삭임 때문에 하루종일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팀 감독과 짧은 전화를 나눈 밤에는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홀로 싸움을 이어가던 상호는 문득 앞으로 영영 병찬과 닿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병찬에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전적으로 신뢰에 달린 문제였다. 이 오랜 무응답의 원인이 병찬의 죽음이 아닌 이상 그 무엇도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호는 앞으로 병찬의 무엇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그와 함께 겪게 될 수많은 인생의 변곡점마다 싸늘하던 병찬의 외면이 떠오를 텐데, 어떻게 감내한단 말인가?

상호는 병찬과 같은 구단 소속이자 제 고등학교 선배였던 준수에게 병찬의 행방을 물었다. 준수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그 다음 날 먼저 전화를 걸어 와 병찬이 가족 휴가를 다녀왔음을 일렀다. 휴가 다녀온 사람 치곤 그 형 얼굴이 너무 안 좋던데. 야 근데 그 형 소식을 왜 나한테 물어? 야 됐어. 듣기 싫어. 대답하지 마. 지금은 너 몸 회복하는 데만 신경 써. 전화가 끊긴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수화기를 붙들고 있던 상호였다. 고등학교 선배에 불과했던 준수도 이만큼이나 제게 마음을 할애해 주는데⋯ 하다 못해 괜찮느냐고, 성의 없는 문자 한 통이라도 왔었다면 온 힘을 다해서 그에게 당위를 부여해주었을 텐데. 

상호는 병찬과의 인연을 제 쪽에서 먼저 놓았다.

정확히 두 달 뒤 병찬의 결혼 소식을 접한 상호는 제가 놓은 것이 비단 인연의 끈만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재활하면 일상생활 정도는 무리없이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의사의 권유를 거절한 것은 충동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농구를 못 하게 될 운명이라면 일상생활조차 못 하게 되는 것이 나았으니까. 적어도 그때의 상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뒤늦게 후회하며 돌아온 병찬이 상호의 불행을 오래도록 곱씹으며 두고두고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까. 당신이 두고 간 것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만 싶어서 그때의 상호는 자기 자신을 망치는 일에 몰두했다.

방문 너머로 도어락 열리는 소리와 부산스런 기척이 들려 왔다. 인터뷰를 했다는 것 치고는 상당히 빠른 귀가가 아닌가 싶었다. 

병찬은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사 온 식료품들을 대충 올려 놓고 화장실로 건너가 간단한 세면을 마쳤다. 상호의 방문이 열려있는 것이 이상해서 들어가 보았다가 방이 텅 빈 것을 보고 병찬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현관까지 나와 신발장에 상호의 신발이 제대로 있는 것을 확인한 뒤, 허리를 숙여 식탁 밑을 살피고 커튼 뒤를 괜스레 들추어 보았다가 그 상태로 집을 몇 바퀴나 돌고 나서야 마침내 다다른 것이 병찬 자신의 방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중간이 도톰하게 올라와 있는 이불을 발견했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광경을 보자마자 깊은 환희가 덮쳤다. 침대 머리 맡까지 다가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익숙한 풍경이 이다지도 생경하게 보일 수 있구나 싶었고 이 낯섦이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머리 끝까지 덮힌 이불을 살짝 끌어 내리고 익숙한 얼굴을 시야에 가득 담았다. 한낮의 채광 아래서는 상호의 뺨에 솟은 솜털 하나까지 세밀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 콧잔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병찬은 포착해냈다. 푸흣, 소리에 상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도둑질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귓가를 붉게 물들인 채였다. "제 방에 벌레가 들어와서 잠깐 여기 와 있는 거예요."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처럼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응, 누가 뭐래?" 고개를 숙여 붉게 물든 귓가에 입 맞춰주자 상호의 어깨가 잘게 튀었다. 

"인터뷰⋯ 했어요?"

"으으응, 미뤄졌어."

"그렇게 막 당일통보 해도 되는 거예요?"

"으으응, 아니, 안 되지. 그런데 거기도 어쩔 수 없나 보더라고. 뭐 어쩌겠어."

"그럼 그냥 상암동 산책한 사람 되셨네요."

큭큭. 병찬이 상호의 어깨에 뺨을 묻은 채 웃었다. 그때마다 맞붙은 몸이 잘게 진동했고 살갗 아래 요동치는 맥박마저 생생하게 느껴졌다. 형 바람 냄새 나요⋯ 상호가 눈앞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말했다. 상호는 햇빛 냄새 난다. 병찬이 파자마의 깃 안쪽으로 얼핏 드러난 목덜미를 파고 들며 대꾸했다. 

"요즘 이상해요. 전엔 인터뷰나 광고 같은 거 부담스럽다고 안 했으면서⋯."

"응, 그런가? 하다 보니 재밌어져서⋯."

"오늘 뒤에 일정⋯ 없어요?"

"으응⋯ 없어."

살갗에 닿는 따스한 피부의 감촉에 온 근육이 이완되는 듯 노곤한 감각이 몰려 들었다. 약간은 나른한 느낌에 취해 느린 대답을 이어가던 병찬이 돌연 눈을 부릅 뜨고 상호와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 그의 말에 얽힌 함의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 까닭이었다. 상호는 이따금씩 에둘러 성적 욕구를 표현하곤 했다. 병찬은 그가 여전히 저와 몸을 겹치고 싶어한다는 것이 벅차도록 기쁘다가도 제게 원하는 것이 고작 이런 것에 불과한 아이의 사정에 금방 기세가 꺾였다. 섹스는 병찬이 상호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작고 낮은 곳에 있으며 하잘 것 없는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요청이나마 제 눈치를 보며 겨우 이어가는 상호의 기대를 배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리를 바짝 세운 병찬이 슬랙스 섬유에 제 손바닥을 비볐다. 손바닥에 괸 땀을 닦아내다가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손 좀 씻고 올게" 하며 자리를 뜨려던 병찬의 팔을 상호가 낚아챘다. 괜찮아요, 깨끗해요. 별 거 아닌 대답에 왜 그리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병찬은 약간 일렁이는 눈으로 상호를 바라보다가 그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대낮부터 섹스라니 한창 때도 낯부끄럽단 이유로 기피하던 걸 이제와 하는 것이 못내 우스운 병찬이었다. 상호를 제 아래에 눕힌 채 그의 파자마 단추를 하나씩 톡톡 풀어 나갔다. 고무줄로 된 하의는 금세 허물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러는 동안 바깥에서 자동차 경적소리와 오토바이 배기음이 창틀을 타고 넘어왔다. 오랫동안 볕을 쬐지 못한 속살이 병찬이 기억하던 것보다 약간 희었다. 목덜미부터 시작하여 어깨를 타고 엷은 색의 유륜과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 뼈가 불거진 골반, 근량이 줄어든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병찬은 쉬지 않고 입맞춰주었다. 

상호의 오른쪽 종아리를 단단히 받친 병찬이 메스 자국으로 흉측한 무릎을 공연히 응시했다. 혀를 내밀어 핥으려는데 상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때요?"

"뭐가?"

"제 상처⋯ 어떠냐고요."

"어떻긴⋯ 수술했나보다 싶지."

"그게 끝?"

상호는 어쩐지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를 눈짓으로 일별한 병찬이 넓직한 혀로 흉터를 핥기 시작하던 찰나에 상호가 종아리를 거칠게 흔들어 병찬을 뿌리쳤다. 신생아의 발길질처럼 두서 없는 몸짓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찬이 가슴팍을 맞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섹스 도중에만큼은 드물게 온순했던 상호였기에 병찬은 이런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뾰족한 뒷꿈치에 가격당한 명치 부근이 아릿했고 고통의 정도로 보아서는 한참 멍으로 남을 것 같았다. 병찬은 손바닥으로 그곳을 느리게 누르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다가도 제 어떤 발언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의아해하며 방금 전 대화를 복기해보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상호가 운을 뗐다.

"왜 아무렇지 않아요?"

"⋯."

"형은 아파야지. 다른 사람 다 관심 없어도 형 만큼은 아파야지."

"안 아파."

"⋯왜! 왜!"

"아무런 느낌 안 드니까."

"형은 이거 보면서 두고 두고 나한테 미안해해야지!"

"⋯내가 네 다리 이렇게 만들었어?"

상호는 차마 병찬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작게 벌어진 입이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대변해주고 있었다. 약간은 매몰차게 느껴지는 말과 덩달아 차갑게 굳은 병찬의 표정을 보면서 왜 어느 날은 한없이 제 역정을 전부 받아주고 저 대신 죽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가 지금처럼 바닥도 모르고 모질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상호는 생각한다. 그런 태도의 역전이 어찌 그리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지. 그러면 상호는 명치로부터 불명열이 고이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맞받아치고 싶다가도 한없이 차가워지는 때의 병찬은 왜 그리 맞는 말만 하여서 저를 더 초라하고 볼품 없이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병찬은 상호의 도전장 같은 두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해주었는데, 그 속에는 어떤 경멸도 멸시도 분노도 없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어서 상호는 또 한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다. 입술을 감쳐물던 병찬이 다시 한 번 운을 떼었다.

"그리고 재활 거부한 건 너야."

"씨발, 그래. 형은 이런 사람이었지. 내가 잊고 있었어요."

"야."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 형이 어디 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콱 죽었으면 좋겠어요."

부릅 뜬 삼백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저도 모르게 거친 말을 내뱉은 상호는 그보다 더 거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턱 끝까지 구역감이 치달았다. 이곳에 더 머물다간 한도 끝도 없이 쏟아내게 될 것만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상호가 허물처럼 벗겨진 파자마 하의를 낚아채고 단추가 죄 풀린 상의를 단단히 여몄다. 자리를 뜨려던 그를 병찬이 다시 침대에 앉혔다.

"너 다시 한 번 그딴 저속한 말 쓰기만 해."

"씨발 진짜⋯."

"상호야, 형 봐봐."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내가 말했지. 형한테 얼마든지 화내도 돼. 근데 그런 말은 쓰지 말자고."

"지금 대화 못 하겠어요⋯ 형 제발 나 좀 그냥 보내줘⋯."

병찬에게 팔을 단단히 구속당한 상호가 하릴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어깨가 안으로 바짝 말려들고 말꼬리는 정처없이 늘어지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병찬은 한없이 단단하고 결단코 쓰러지지 않는 어떤 초월적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상호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그런 존재.

상호가 주익대학교에 입학하여 막 상경했을 때였다. 병찬의 자취방에서 여느 커플과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늦은 밤에 갑작스레 불이 붙어 한바탕 섹스를 마치던 무렵, 병찬의 팔을 밴 채 침대에 몸을 늘어뜨린 상호가 '형은 살면서 제일 후회했던 일이 뭐예요.' 하고 물었다. 병찬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상호와 처음 만났던 언젠가의 예선 경기에서 무릎 통증이 재발하여 실려가듯 처치실로 이동했을 때의 기억을 꺼냈다. 나 중학교 때 있었던 일은 이미 알고 있지? 애당초 그리 심해질 부상이 아녔는데, 하필이면 그때 감독님이 그 정도 부상은 선수라면 다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 짚으셔서 방치하다가 그 사달 난거거든.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엄청 절대적으로 다가왔나봐. 그때 이후로 안 풀릴 때마다 자꾸 그 감독님이 생각나더라. 내가 잘 안 풀리는 게 다 그 사람 탓 같고 그러다 보면 잠도 잘 안 왔어. 그러다가 상호네 학교랑 처음 경기했을 때, 어, 응, 그때 나 무리하다가 쓰러졌잖아. 그땐 진짜 꼭지가 제대로 돌았나봐. 그때 처치실로 옮겨지는 동안 엄청 욕했거든. 씨발새끼니 죽여버리겠다느니⋯ 그동안 속으로 그런 말을 한 번도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육성으로 내뱉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 그때 뭔가⋯ 내가 없어지는 기분? 아직도 그 체육관에 내 무언가를 두고 온 것 같아. 나라는 인간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 그 때 떨어진 채로 아직도 체육관 구석을 굴러다니고 있는 느낌이랄까. 지금에야 다 잘 됐으니까 하는 배부른 소리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 그래도 나보다 연장자인데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던 건데⋯ 하다못해 남들이 다 듣는 곳에서 그러지 말걸. 그렇다고 그때 욕해서 죄송하다고, 내가 누구한테 말할 수 있겠니? 그때의 일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할 텐데⋯. 병찬은 여기까지 말하고 씩 웃었다. 상호는 그가 당연히 무릎 부상을 일찍 눈치채지 못 한 일에 대하여 진술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사정을 듣게 되어 조금 놀라던 참이었다. 그 얼굴에 뜬 의아함을 눈치챈 병찬이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부턴 조금 배부른 소리라 생각하고 들어 줘. 내가 그때 꿈이 한번 꺾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 생각해. 난⋯ 조금 오만해지지 않았을까? 전부 다 가정일 뿐이지만. 그의 말을 경청한 상호는 과거의 불행까지도 껴안을 수 있게 되는 삶의 경지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건 조금, 많이, 엄청,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지는 아우라가 병찬에게는 존재했다. 그런 것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 오래 적축된 성실함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병찬이 들려준 일련의 사연들이 상호에게는 마침내 초식의 경지에 도달한 무림 고수의 영웅 설화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이야기를 병찬은 하고 있는 것이다.

네 허물을 아무데나 벗어두지 말라고 야단치는 것이다. 허물을 자꾸 벗어두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육체를 얻고 너를 지배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제 경험에 빗대어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병찬이 상호에게만 보여주곤 하는 그의 진짜 상냥한 면면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상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쁜 말 해서 죄송해요. 할 수만 있다면 주워담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목을 지탱하는 근육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머리가 방향 감각을 잃고 휙휙 돌았다. 요리조리 튀던 턱을 한 손으로 단단히 받친 병찬이 상호를 그대로 끌어와 껴안아주었다. "형도 미안해." 병찬은 전혀 미안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앞의 아이가 섧게 우니까 덩달아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진 탓에 그리 말했다. 이럴 때면 둘은 영락없는 아이가 되었다. 힘껏 싸우고 힘껏 울고 힘껏 사과하고 둘만의 교류에 모든 마음을 소진시키는. 하지만 병찬이 아직 상호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기상호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되었으니까 매번 일이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화를 내곤 하는 병찬이었다. 그래서 상호가 자기 자신을 조금이나마 포기하려들면 항상 무서운 샌님 역할을 자처하여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이었다.

세 달 가량의 병원 신세를 졌던 상호가 병찬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육개월 뒤에나 벌어진 일이었다. 상호는 퇴원수속을 밟기도 전에 이미 학교에 휴학계를 냈고 친구에게 부탁하여 자취방에 있던 짐을 모조리 부산으로 부쳤다. 양친은 여전히 상호가 목숨을 건진 것에 감읍한 모양이었다. 이참에 푹 쉬는 것도 괜찮을 거야, 하는 말은 상호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 분명할 테지만 정작 상호는 지독한 고립감에 휩싸였다. 그런 양친의 집에서 상호가 오래 머물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어느 날은 우연히 티브이를 켰다가 농구 생중계를 목도하게 되었다. 상호는 한때 열망했고 이제는 완전히 놓기로 결심한 어떤 가능성의 세계를 두고 또 다시 명치가 죄는 걸 느꼈다. 공황 발작의 전조였다. 25층의 아파트 창문에서 확 뛰어내릴까 하다가도 이런 용기라면 차라리 병찬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상처가 여물지 못한 다리를 질질 끌며 택시를 타고 기차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서울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그 때 병찬은 와이프가 될 뻔 했던 여자가 남기고 간 스툴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날을 잡고 싶다는 병찬의 말에 급히 살림부터 합쳤다가 끝끝내 그 결정을 번복한 병찬이 파혼을 선언하자 그의 뺨을 한대 올려붙인 여자가 버리듯 떠맡기고 간 것이었다. 병찬은 제 때늦은 방황과 죽 끓듯한 변덕에 전부 장단 맞추어준 여자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 뿐이어서,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때려도 되며 정식 부부가 아니므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곤 하여도 위자료를 요구하는 만큼 흔쾌히 주겠다고도 했다. 원한다면 병찬의 만행에 대해 고발하는 기사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했다. 저 진짜 병찬씨 대학리그 뛸 때부터 팬이었어요. 여자는 가타부타 그 말만 남겨두고 떠났다. 반대쪽 뺨을 때리지도 위자료를 요구하지도 매스컴에 고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몇 개의 세간 살이를 남겨두고 갔고 그것을 모조리 처분하던 병찬이 조그마한 스툴 만큼은 차마 팔 수도 버릴 수도 없어 제 자취방에 들고오게 된 사정이었다. 

전날부터 쏟아진 폭우 때문에 상호가 병찬의 집 현관 앞에 도착하였을 땐 이미 머리부터 발 끝까지 쫄딱 젖은 뒤였다. 여자와 파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병찬은 느닷없이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그녀가 무언가 놔두고 간 게 있어서 다시 들른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별 의심 없이 문을 덜컥 열어주었다. 놔두고 간 거 있어? 주인을 찾지 못 한 문장이 기다란 복도에 덩그러니 놓였다. 눈앞의 초라한 행색을 한 인영이 상호임을 알아본 병찬은 한동안 눈만 휘둥그레 뜬 채 그곳에 못 박힌 듯 굳어 있을 뿐이었다. 오늘 여기서 좀 재워주심 안 되나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가 한 마디가 마치 천근같이 무거웠다. 힘겨이 말을 마친 상호가 목발 짚은 몸을 살짝 휘청였을 무렵에 병찬은 막 물에서 건져올린 물고기처럼 몸을 펄쩍 뛰며 그를 부축해주었다. 부산의 본가에서 머물고 있다 하여서 재활과 요양에 힘을 쓰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몸도 성치 않은 아이가 서울까진 어떻게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아주 차가운 생명체가 병찬의 등에 답싹 업혀 영영 떨어지지 않을 듯 했다. 

꼬박 사흘을 열병으로 앓은 상호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둘은 기나긴 해후를 맞이했다. 여느 드라마의 재회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은 없었다. 상호는 겨우 한소끔 피어난 체력을 병찬에게 분노하는 데에 모두 소진했고 병찬은 그런 상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까봐 전전긍긍하다 보면 공회전 하던 대화는 결말 없이 종결되었고 시간은 휙휙 지나가 있었으니까. 

'왜 그랬어요? 나는 형이 절실했어요. 대체 어디에 있었어요?' 상호가 물으면 '어른의 사정이 있었어. 넌 영영 이해 못 할 거야. 그래도 네 걱정 정말 많이 했어, 진심으로.' 하고 병찬이 말하는 식이었다. 

병찬이 대답을 회피하면 상호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속이 비틀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소리로 신음했다. 

상호가 교통사고를 당한 날 병찬은 부친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길로 병찬은 차를 꺼내어 양친이 거주 중인 인천까지 단박에 달려 갔다. 인천의 모 대학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응급실 입원 수속을 마친 부친이 췌장암 4기라는 진단을 받은 뒤였다. 췌장암은 이미 발견한 순간부터 손 쓸 도리가 없다고, 의사는 위풍당당하게 걸친 가운이 무색할 만큼 무력한 어조로 낙관적이지 못한 전망을 전했다. 마침 비시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병찬은 구단에 연락을 넣었다. 부러 쾌활한 어조를 꾸며 내어 가족 여행을 다녀 오겠다 한 것은 어릴 적 숱하게 겪은 타인의 값싼 동정과 가식적인 작태에 대한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집에 우환이 든 선수는 어떤 퍼포먼스를 이루어도 가정사와 연관지을 것이 뻔했고 그런 낙인이 찍히면 어떤 식으로든 투자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누군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런 계산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펼쳐지는 자신에게 약간은 모멸감을 느꼈던 병찬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이 타계하신 후로는 유일무이한 상주로서 장례를 치르기에 바빴다. 장례 사실도 부러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병찬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는가 의아해 하면서도 마침내 그 기행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실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별에 대해 유예를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현실 회피와 다름 아니었으나 그때의 병찬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은 결코 없었다.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상호의 부상 소식을 접하였음에도 부러 모른체 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제 삶의 무게도 버거웠던 병찬이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대단히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병찬의 가책은 늘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삶에 짓눌리던 병찬이 차마 상호의 삶까지 포괄해내지 못 한 것. 상호가 가진 인생의 무게까지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그 시절 박병찬. 이를 상호가 들었다면 자신을 피부양자라도 되는 듯이 대하는 그 작태에 무척 분개할 것이 분명했지만 이것에 대해 이해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병찬이 제 입으로 진술할 일은 없었으므로 그때에도,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모를 일이었다. 병찬은 누구에게도 이해받고 싶지 않았다. 타인에게도, 상호에게도, 어쩌면 그 자신에게도. 왜냐하면 그런 것은 꽤 슬픈 일이지 않은가. 차라리 손가락질 받는 것이 세상엔 좀 더 나을 것이다. 

그런 병찬이라도 불쑥 상호에게 연락하여 모든 일을 진술하고 싶어지는 날이 있었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어, 따위의 개인의 사정을 호소하는 말은 어떤 면죄부도 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 건 누구보다도 병찬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이. 

모든 과정은 지나갔고 무책임하고 비정한 연인 박병찬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모든 것이 끝나 있었을 땐 일말의 염치 때문에 연락하지 못 했는데, 우습게도 부끄러운 줄은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게 사무치게 외로워서 병찬은 또 다시 무책임한 관계에 손을 벌리게 되었다. 부친의 난 자리가 더 없이 크게 다가올 모친에 대한 걱정도 분명히 있었고 곁에 남은 이 없이 고독했던 병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건실한 사회적 제도 아래에 자신을 종속시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결정이 제 오만이었음을 예식이 거행되기 바로 직전 깨달은 것은 정말이지 기적에 가까웠다고 병찬은 생각한다.

그래서 병찬은 항상 상호의 물음에 그가 분명 괴로워할 것을 알면서도 항상 어른의 사정이 있다고 일축하고 마는 것이었다.

언젠가 지난한 싸움의 끝자락에서 상호가 말했다.

저는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부터 형을 사랑했어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왜 하나 같이 비슷한 양상을 띠는 건지. 그럴 때마다 병찬은 타의에 의해 제자리로 옮겨지곤 했다. 병찬이 바랐던 유토피아가 아닌 아주 어둡고 낮은 태초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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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를 재운 뒤 홀로 아파트를 빠져 나온 병찬은 근처 금연 구역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담배를 피우던 중이었다. 시월 중순이지만 밤에는 벌써 겨울 못지 않은 찬기가 몰아 닥쳤다. 달랑 걸친 긴 팔 티셔츠의 소맷귀 사이로 칼바람이 휘휘 스며들어서 스니커즈 속 발가락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병찬은 담배 필터를 바삐 소진시키며 노는 손으로는 휴대 전화의 메시지함을 살피기 시작했다. 인터뷰어의 갑작스런 부친상으로 기약없이 연기되었던 인터뷰 관련으로 새 메일이 와 있었다. 선수님 무사히 귀가하셨는지요? 오늘은 귀한 걸음을 헛되게 하여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사정을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 인터뷰 날짜에 관해서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데, 셋째 주 중으로 가능한 날짜가 있으신지요? 시간은 오늘과 같이 정오 쯤에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병찬은 그 제안에 빠르게 회신하여 다음 약속 날짜를 잡았다. 병찬으로서도 여유가 있을 때 모든 일정을 최대한 빠르게 쳐 내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상호가 부산의 본가를 아주 나와 병찬의 집에서 자연스레 함께 살게 된 이후 그는 일련의 사건과 상호와의 동거를 통해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전까진 곧잘 거부하곤 했던 인터뷰나 CF섭외 요청을 열린 마음으로 승낙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병찬은 더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고 좀 더 단단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체급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본래 상암동 스튜디오에서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병찬에게 유독 호의적인 인터뷰어가 부러 병찬의 동네 근처로 오겠다고 편의를 봐 준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시즌이 시작되면 상호와 하릴 없이 떨어져야만 했던 병찬이었기 때문에 비시즌 기간이나마 그의 곁에 가까이 있고 싶었고, 그래서 인터뷰어의 호의를 기껍게 받아 들였다. 상암동에서 병찬의 자택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시간은 자연스레 그녀의 퇴근 이후로 조정되었다. 별도로 시간을 내지 않고 퇴근하는 길에 잠깐 들릴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 예정이 대충 저녁 아홉시 경이었으니, 병찬은 그동안 며칠 전 마트에서 사 온 식료품으로 소고기를 넣은 볶음밥과 미트볼을 넣은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두었다. 지름이 삼십센티나 되는 웍을 무심하게 흔들다가 복도 끝의 방문을 흘깃 눈짓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밤에 악몽을 꾸느라 잠을 전혀 자지 못했다며 결결이 피로를 호소하던 상호를 병찬이 곁에 붙다시피해서 겨우 재워준 것이 몇 시간 전이었는데, 아무래도 한잠에 든 모양이었다. 

완성된 음식을 보울에 옮겨 담고 래핑까지 마친 병찬이 식탁 위에 그것들을 작은 메모지와 함께 올려 두었다. 병찬이 귀가하기 전까지 상호가 깰 일은 요원해 보였으나 혹시 몰라 차려둔 것이었다. 복도 끝 방문 앞을 서성이던 병찬이 조심스레 문을 열어 젖힌 뒤 침대 맡에 앉아 상호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방금까지 물기를 묻혀 건조해진 손등에 찰기어린 살갗이 닿았다. 언젠가 정신이 또렷한 상태의 아이의 뺨을 쓸어보게 되는 날이 올까? 이따금씩 큰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해지는 섹스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 날이, 그런 기적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까? 병찬은 속으로 다녀 올게, 잘 자, 인사를 남긴 뒤 다시 방 밖을 빠져 나갔다.

인터뷰어가 일러둔 카페는 병찬의 집에서 도보로 십오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사용하는 테라스형 카페는 넓고 쾌적한 공간과는 달리 유독 사람의 발길이 뜸한 장소였다. 출입문을 지나며 인터뷰를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 선정이라고 병찬은 생각했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자가 병찬을 따스하게 맞아 주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병찬이 주문한 허브 티가 나왔다. 예상 질문을 리스트업하여 미리 받은 바 있었으므로 인터뷰는 난관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묘하게 침체된 낯을 한 인터뷰어는 질문을 하던 도중에 자꾸 숨을 삼키듯 말을 멈추었고 병찬은 그것이 퍽 의아하면서도 그가 먼저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 그녀의 기행이 며칠 전의 부친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들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 놓은 그녀가 병찬의 손목 어귀를 일별하며 말했다. 그 시계 말이에요. 저희 아버지도 즐겨 쓰시던 시계여서⋯ 자꾸 눈에 밟혀서요. 죄송해요. 그러더니 냅킨 몇 장을 집어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아내기 시작했다. 병찬은 매일 착용하고 다닌 덕에 이제는 저와 한 몸으로 느껴지는 손목의 시계를 괜스레 지분대었다. 검은 스트랩에 메탈블루 색상의 시침이 수놓아진 시계는 병찬 역시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으로, 까르띠에의 솔로 탱크 모델이었다. 이제는 단종되어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그건 별 것 아닌 우연의 중첩인 듯도 하였으나 병찬은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약간은 충동적인 마음으로 "저도 몇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 라는 단어를 꺼낸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지고 혀가 입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단어를 발음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모든 안면근이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병찬은 그동안 어떤 저주에라도 씐 사람처럼 강박적으로 그와 관련된 주제를 피하곤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비밀로 하려던 건데⋯ 작가님한테만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작가님은 건강검진 성실하게 받으세요. 술 담배도 하지 마시고요. 저는 물론 흡연자이긴 한데. 병찬의 말에 그녀가 작게 웃었다. 저도 술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처지인걸요.

인터뷰는 속전속결로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병찬과 자리를 옮겨 술을 한 잔 걸치고 싶어 하다가도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병찬은 약간 곤란한 미소를 걸친 채 "있어요, 결혼 예정인." 하고 말했다. 화들짝 놀란 인터뷰어가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셔서 몰랐다며, 이것 참 대단히 실례했다고 하며 악수를 청했다. 선수님 조속히 귀가하세요. 미래의 아내분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유쾌하게 내미는 손을 맞잡으며 병찬은 나이로만 따지면 어린 신부가 따로 없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187cm의 아내라니 조금 징그러울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웃었다. 오늘은 병찬답지 않게 말이 좀 많았다. 그게 별난 기행처럼 느껴지다가도 병찬은 문득 깨닫는 것이다. 오랫동안 제가 그런 말을 타인에게 나누고 싶었음을. 

귀갓길의 날씨는 몇 시간 전 보다 기온이 더 떨어져 있었다. 병찬은 옷을 여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보로 십오분이라 하면 커단 보폭을 가진 병찬에겐 실질적으로 그의 반절도 안 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금방 다녀오겠답시고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추위와 칼바람은 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주위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상실한 채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아파트 단지의 초입이었다. 집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상호를 껴안고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숙면을 취할 때의 그는 유독 뜨거웠으니까 무척 기분이 좋을 게 분명했다. 

잰 걸음으로 걸을수록 저 멀리 병찬이 사는 아파트 세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 주민이 밤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인지 희끗한 인영이 그 근처를 빙글 빙글 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추운 날씨에 티 한 장만 걸친 채로 산책이라니. 병찬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도 침대 안에 편안히 누워 잠들어있을 상호를 떠올렸다. 이윽고 병찬이 1층 공동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방금 전까지 내심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고 속단했던 인영이 제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놀란 병찬이 그 자리에 서서 인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주변에 그들을 제외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병찬의 깃털같은 몸짓은 마치 거인의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은 금방이었다.

상호는 귀신이라도 본 낯으로 병찬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은 너무나 위태로워서 마치 지면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두 팔을 벌려 병찬의 어깨와 목을 한껏 끌어 안자 그 품이 금세 가득 찼다. "여기서 뭐 해? 그것도 맨발로. 자꾸 형 마음 아프게 할래? 넌 추운 것도 몰라?" 상호의 추레한 행색에 괜스레 속이 상한 병찬은 만나자마자 잔소리부터 줄줄 늘어 놓았다. 슬리퍼라도 신고 올 것이지 맨 발로 이게 뭐람. 넌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아껴주지 않는 거야? 왜 그리 홀대하는 거야? 마음 속의 외침이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비집고 나올 것 같아서 병찬은 괜히 침을 한번 삼켜냈다. 

"나는 형이 진짜 죽은 줄 알고⋯."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을 용케 알아들은 병찬은 그의 말이 며칠 전의 일을 가리키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 족쇄가 되어 그의 정신을 부자유하게 만들었단 사실이 슬펐고 그 말이 혹여 현실이 되어 버릴까봐 전전긍긍했을 그의 지난 몇 시간이 안타까웠다. 그러다가도 병찬이 어디가서 죽기라도 했을까봐 맨 발로 뛰쳐 나오는 어떤 귀한 마음에 속이 울렁였다. 

병찬은 부러 아무렇지 않은체 하며 제게 답싹 달라 붙어있는 상호의 뒤통수를 쓸어주었다. 여기저기 뻗치고 윤기가 없어 푸석하지만 따스하고 보드라운 체취가 항상 배어나는 머리카락이 손샅마다 감겼다. 그러다가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음을 깨닫곤 평소와 다름없는 어투로 "형이 죽긴 왜 죽어?" 하고 대꾸했다. 

"내가 죽으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진짜로 죽으러 간 줄 알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병찬이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에게 분노하는 것으로 겨우 연명할 수 있었던 상호의 길 잃은 염증은 대체 어디로 가겠는가? 그 날카로이 벼려진 화살촉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리란 건 안 봐도 뻔한 일인데. 그러니까 병찬이 그 어떤 모진 말에도 끝끝내 살아서 질긴 생을 기워나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제 어린 연인을 위한 일이 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말은 삼류 문학이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진부하고 진부해서 아우라가 다 닳아버린 대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의 무게를 실감하게 될 줄이야. "상호야 형이 죽긴 왜 죽니? 우리 계속 또 봐야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글피도 계속 계속 또 봐야지." 그러다보면 아마 평생을 함께하는 것도 그리 별 일은 아닐 것이라고 병찬은 생각한다. 

옛날처럼 또 보자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그 말 한 마디에 청춘을 기탁한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 말에 상호는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병찬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사실은 아주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상호가 마음을 꺼내어 보여주는 몇 초 동안, 그 말은 일각을 다투는 와중에 남긴 유언처럼 느껴지기도 영원을 기약하는 맺음말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상호가 몸을 물리자 병찬은 엷게 미소지으며 눈앞의 머리통을 재차 껴안았다. 병찬의 눈꼬리에도 어느새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매우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에 대하여 영영 알 수는 없겠지만서도, 사랑의 언어를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이 으레 그렇듯 그들 또한 비슷한 형상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 내밀한 사정에 관해서는 아무렴 좋아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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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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