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2화

다음날, 아침부터 대주교에게 불려가 혼이 났지만, 폰은 아무래도 좋았다. 카리타스의 손수건은 들키지 않았고 반나절 만에 독방에서 풀려났으니 말이다. ‘이게 웬 행운이람.’ 콧노래를 부르며 거주 관의 제 방에 돌아온 폰은 코지의 잔소리가 노랫소리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들떠 복도에서 누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뭐야. 네 녀석이 왜 벌써 나왔지?”

폰에게 메쳐졌던 얀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러자, 폰이 ‘얀의 따까리’로만 기억하는 센이 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실없이 웃으며 얀의 어깨를 쳤다.

“대~단하신 분이 오셨다잖아. 쟤랑 똑같은 나이인데 벌써 신성력이 엄청나다고 소문나신 분 말이야.”

얀과 센 앞에서 차게 식은 표정으로 일관하던 폰의 눈에 이채가 돌았지만, 두 사람은 얼굴도 모르는 열 살짜리 꼬맹이에게 질투심을 불태우느라 여념이 없어, 폰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봤자 성인이 될 때까지 그게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런 대우를 받는 게 웃긴다고.”

얀이 먼저 불만을 표하자 센도 동조하며 제 품에 있는 책을 고쳐 안았다. 눈을 반쪽으로 만드는 안경을 고쳐 쓰는 건 이젠 거의 습관이 되었다.

“날 때부터 신성력이 강해도 신께 충성하는 마음과 경건한 기도를 동반한 교육이 없으면 말짱 헛거라고.”

둘의 말에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평민 여자애가 감히’가 생략되었다는 것쯤은 폰과 코지에게도 쉽게 보였다. 웃긴 사실은 얀과 센도 평민이라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보통의 평민들과는 다르다고 굳게 믿는 이들이었기에 폰은 잠자코 이들이 정보를 더 뱉어내기만을 기다렸다.

‘분명 카리타스 이야기야, 렌이 어제 말해준 거랑 똑같잖아.’

자의식이 넘쳐나 복도 끝에서 끝까지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대화를, 견디고 견딘 끝에 알아낸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서 폰은 다소 허탈해졌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니까 나랑 동갑인 카리타스님은 8살 때 신전에 들어와 바로 수습 사제가 됐고 지금도 거주 관이 아니라 신전에 머무르면서 벌써 연설도 하고 계신단 말이지.”

“연설 말고 신탁.”

“맞다.”

“신탁 뜻풀이도 한다고 하니 네가 연설이라고 기억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얀 콤비가 사라지고 폰이 들었던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자 코지가 틀린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그러곤 대화가 뚝 끊겨, 의아한 표정의 코지는 폰을 바라보았고 생각에 잠긴 채 입을 다문 모습을 발견했다.

평소엔 행동 대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활발한 폰이 이상하리만치 신중하게 행동하자 코지는 답답한 듯 작게 발을 굴렀다.

“그래서 보러 갈 거야, 말 거야?”

“그게….”

센이 폰과 코지의 방문 앞에서 물러날 때 덧붙인 말이 폰을 생각의 호수로 빠져들게 했다. 내용인즉, 그 대단한 10살짜리 수습 사제님이 어쩐 일로 거주 관에 찾아오신 덕분에 네가 풀려났으니 감사한 줄 알라는 것이었는데, 끝까지 아무 대답도 안 하려던 폰이 ‘아직도 있냐?’라고 반응했고 얀은 ‘그~래, 아직 거주 관 어딘가에 계실 거다. 왜? 가서 신성력 좀 나눠 달라고 빌어보게?’라며 쏘아붙였다.

신성력이 코지보다 적어서 하마터면 거주 관에 머물지도 못할뻔했던 폰에게 신성력이 적다는 사실은 일종의 약점이었고 얀은 그나마 제가 가진 폰의 약점으로 그를 건드렸다. 당연하게도 폰은 짜증이 났지만, 카리타스가 거주 관에 왔다는 정보에 이미 굳어있어 비꼬기 반격 같은 건 생각해내지도 못했으며 굴욕감 같은 감정은 애초에 발생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 또래인데 신성력이 그렇게 많다는 거, 신기하지 않아? 나랑 보러 가자, 응? 혼자 가면 어색하단 말이야.”

“잠시만…. 내가 만나러 가도 될까….”

“아우 정말!”

도무지 호수 밑바닥에서 폰이 올라올 것 같지 않자, 코지는 억지로 폰의 손을 당겨 제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코지, 폰, 너희 어디가?”

“혹시 이번에 갑자기 거주 관에 오셨다는 분이 어디 갔는지 알아?”

“글쎄…. 대주교님 방 근처에 머무르신다는 건 아는데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몰라.”

“알려줘서 고마워!”

코지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카리타스의 위치를 찾는 동안 제 뺨에 든 멍이 부끄러워 여전히 만남을 고민하던 폰은, “나를 싸움꾼 같은 거로 생각하지 않을까?”라고 중얼거렸고 코지는 “걱정하는 게 그거였어? 그냥 엎어졌는데 길에 뭐가 있어서 부딪히는 바람에 멍들었다고 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렇게 거주 관을 쏘다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붉은 옷의 아이가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의자에 앉아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을 뿐이고 폰과 코지가 그의 등 뒤의 어딘가에 도착한 것이었다.

긴장해 발걸음을 멈춘 폰은 제 옆구리를 찌르는 손에 울상을 지었다. 굳건한 신전의 담을 연상케 하는 코지의 회색 눈동자는 기세로 폰을 눌러버렸고 그렇게 폰은 한 번 심호흡하더니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내밀어 카리타스가 앉은 의자로 향했다.

‘평소에도 예쁜 정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단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앉아있자 공간은 현실감을 잃었고 되레 그런 꿈 같은 느낌에 폰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무난하게 오늘은 날씨가 좋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려고 했다. 실제로 날씨도 좋았고 정원의 햇살은 온순했다. 하지만 폰이 서두로 던진 말에 코지는 이마를 짚었다.

“넘어졌어요.”

“네?”

뺨에 생긴 멍 자국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냅다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제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던 폰은 단말마 같은 작은 소리를 내곤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망했다. 무슨 생각으로 말을 걸었지? 코지한테 하라고 할걸.’

“저기 괜찮다면….”

“네?”

“멍을 치료해드려도 될까요?”

어느새 카리타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폰 앞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나마 빨리 정신을 붙잡은 코지가 이번에도 그를 도왔다. 코지는 복도에서 정원으로 들어와 폰의 어깨를 흔들어 가볍게 타박했고, 카리타스에게 “이 덜렁이가 자기 혼자 넘어져서 얼굴에 이런 걸 달고 왔지 뭐예요.”라고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뒤늦게 폰이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카리타스는 그의 뺨에 손을 대었고, 폰과 코지가 간신히 만들어낼 수 있는 신성력의 빛이 구체 모양으로 카리타스의 손에 나타났다.

“이건 손수건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주세요.”

작은 속삭임에 폰은 그제야 눈동자가 초점을 잡아챈 듯 똑바로 카리타스를 볼 수 있었다. 회색 비 같은 눈물이 걷힌 하늘색 눈은 이제껏 폰이 본 하늘 중 가장 맑고 예뻤다고 자부했다.

“와! 정말 다 나았잖아? 감사합니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지만, 그 말을 듣지는 못한 코지가 신기한 듯 손뼉 치며 웃었고 카리타스는 치료가 잘 되어서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아까, 몸이 아니라 머리와 입의 긴장만 풀렸던 폰과 다르게, 이 작은 붉은 옷의 아이에게 마음을 연듯한 코지는 제 소개를 하며 자연스럽게 폰에게 대화를 넘겼다.

“제 이름은 시도폰이고, 폰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코지랑 같이 거주 관에 살고 있고, 뛰어다니면서 노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그러다가 거기까지 올라간 건데….”

말끝을 흐리며 폰이 ‘카리타스’라고 수 놓인 손수건을 내밀었고 자연스레 화제는 손수건으로 옮겨졌다. 코지는 그 손수건이 이분 거였냐며 놀랐고 카리타스는 잠깐 멈칫하더니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아, 제 손수건이 당신의 것과 바뀌었었나 봐요. 당연히 제 것인 줄 알고 오늘은 손수건을 들고 오지 않았는데….”

카리타스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자 폰은 괜찮다고 손사래 쳤다가 ‘뭐가 괜찮냐’고 말하는 듯한 코지의 눈빛에 “나중에 찾으러 갈게요!”라고 덧붙였다.

“그래 주시겠어요? 문지기에게 미리 말해둘 테니 정문으로 들어오시면 될 것 같아요.”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폰은 신전의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긴장하여 표정을 굳혔다가 혹여 카리타스가 말을 철회할까 겁나, 자연스럽게 태연한 척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신전에 사신다고 들었는데 거주 관엔 어쩐 일이세요?”

“들었다고요? 누가 제 얘기를 하던가요?”

아까와는 다르게 차가워진 어조에 폰은 카리타스의 표정을 읽어보려 했지만, 뱉은 말의 온도를 모르는 것처럼 태연한 낯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매사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왔던 코지도 쉬이 다른 말을 꺼내기 힘든 무거운 정적이 정원에 감돌았다.

폰은 얀과 센의 존재를 절대로 카리타스에게 알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 저랑 친한 기사님 중에 렌이라고 독방을 담당하는 분이 있는…. 있으신데, 그분이 저와 또래인데 신전에 있는 분이 있다고 말해주셨어요. 그것 외에는 없어요. 전혀.”

애써서 겨우 그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폰은 또 카리타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독방’이라는 단어에 눈을 찡그리는 카리타스를 보지 못했고, 그걸 알아챈 코지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독방 기사와는 어떻게 친해지셨나요?”

‘독방’이라는 단어에 카리타스가 힘을 실어 말하자 폰은 제 실수에 놀라 입을 틀어막곤 눈빛으로 코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집요하게 모든 것을 캐물었고 코지도 그것을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손수건을 잃어버린 죄로 독방에 간 일과 그 이전에 있었던 독방행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폰은 빨래터가 있는 호수 밑에 잠겨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이야기를 전부 들었음에도 표정은 그것을 듣기 전과같이 무덤덤한 카리타스는 거의 기절한 듯한 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은 독방에서 풀려난 거죠? 아까 그곳 말고 다른 아픈 곳은 없나요?”

“네? 네네, 평소보다 훨씬 빨리 풀어주셨고 다치거나 아픈 곳도 없어요.”

카리타스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손을 놓지 않았고 아까보다 강하지만 조금 온기가 돌아온 어조로 말했다. 코지는 폰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빨개졌다 하는 것을 보며 나중에 꼭 놀려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거주 관의 규칙을 잘 모르지만, 당신이 그 정도의 벌을 받아야 할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보다 더한….”

잠깐 말을 멈춘 카리타스는 폰의 손을 놓았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제가 거주 관 환경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든 해볼게요. 문제점이 뭔지 대강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폰은 카리타스가 놓아버린 제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거주관을 돌아보고 싶으시다고요?"

의외의 말에 코지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리타스를 내려다보았다. 카리타스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고 셋은 준비된 차가 식었으니 점심을 먹고 움직이자는 폰의 제안을 따라 식당부터 가기로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필이면 식당으로 가는 복도 바로 앞에서 얀과 센을 만나는 바람에 폰은 제 입을 때리는 상상을 했다.

"..."

"..."

"뭐야?"

폰이 아무리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아도 평소처럼 놀림이나 비아냥이 날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카리타스를 알아본 듯 아까보다 조금 움츠러든 모습으로 서 있었고 간신히 카리타스에게 본인의 신분과 이름을 소개하고는 발언권을 잃었다.

위축된들 제 성격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니 얀은 카리타스에게 수행원이 필요하지 않냐 물었으나 카리타스는 잔잔하게 웃으며, 뒤의 두 사람에게 안내를 맡겼으니 수습 사제님들은 더 중한 일을 하러 가시라고 말하곤 그대로 얀과 센을 지나쳐 식당으로 향했다.

어안이 벙벙한 둘을 뒤로하고 폰과 코지는 카리타스를 따라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다 같이 식사를 하던 도중 코지가 거주관 내부 시설의 종류와 돌아볼 경로에 관해 이야기하자 카리타스는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고, 매일 코지를 따라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거주관을 돌아다니는 폰은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이 내심 억울하였다.

물론 사는 곳이니 대충 걷다 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 않지만, 남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에 폰은 얼마 없는 퍽퍽한 감자 샐러드를 포크로 찌르며 아직 한참이나 음식이 남아있는 나머지 두 사람의 그릇을 바라보았다.

"감자를 싫어하시나요?"

"예? 아, 아니요 그냥 심심해서…."

"이런, 말하다 보니 천천히 먹게 되네."

코지는 남은 음식들을 급하게 먹으며 속으로 카리타스도 눈치가 있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셋은 식사를 마치고, 미리 얘기했던 대로 거주관을 돌아다녔다.

거주관 내부 작은 정원의 분수대 앞에서 폰이 공놀이하다가 조각상을 하나 넘어뜨리는 바람에, 조각상 담당 미술가가 건축 자재를 허위로 기재하였던 사실이 밝혀져서 폰이 혼나다가 말았다는 이야기라든가, 코지가 경전 구절을 다 외우지 못해 그걸 외우려고 도서실에서 혼자 밤늦게 있다가 귀신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해당 장소를 지나다니면서 두 사람이 신나게 말해주었다.

당연히 본인이 아니라 상대방의 일을 이야기하였고 그럴 때마다 대상이 된 사람은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내며 그 장소에 얽힌 다른 일들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카리타스로서는 정보가 많아지니 달가운 일이었으나 어째 표정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다른 곳들은 다 둘러본 뒤 아이들이 실제로 잠을 자고 개인 짐을 두는 다인실에 도착했고 폰은 황색 표지의 노트를 들고 와 거침없이 넘기더니 노트의 종이 한 쪽을 카리타스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제가 받았던 꽃이네요?"

"네! 샐비어에요. 안료는 없어서 선화만 그려뒀는데 다행히 알아보시네요."

"평소엔 일기장을 살생부로 쓰는 애가 갑자기 꽃을 보면서 따라 그리고 있길래 신기했어요."

앞의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며 폰은 코지의 옆구리를 찌르려 달려들었고 코지는 가볍게 한 발자국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거기 꼭지에 보면 카리타스님 이름 써 놓은 것도 있어요."

"아니 그 부분은 접어서 보여드렸다고!"

"아하 그렇네요. 근데 기호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추가해도 될까요?"

폰은 의아해하면서도 군말 없이 카리타스에게 펜대를 넘겨주었고 카리타스는 제 이름 아래에 무언가 끄적거린 뒤 일기장을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종이는 처음 폰이 넘겨주었을 때처럼 잘 접혀 있었고 폰은 제 등 뒤에서 곁눈질하는 코지를 무시하고 노트를 소리 나게 덮었다.


"이제 둘러볼 만한 곳은 다 돌아본 것 같아요."

코지가 다인실 문을 열고 나가며 아쉬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지하 감옥 쪽은 저희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인가요?"

"네…. 아무래도 감옥이랑 묘지가 있는 곳이다 보니 저희는 축성 의식 외의 평상시에는 들어갈 수 없어요."

셋이 다인실 앞 복도에서 서성이자 멀찍이 거리를 두고 물러서 있던 카리타스의 수행원 하나가 나섰다.

"사제님, 이제 대주교님과 약속하신 시각입니다."

"이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폰은 다급한 마음에 다른 장소를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이미 갈 만한 곳은 다 가봤고 설령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은근히 저를 노려보는 수행원들이 신경 쓰였다.

"그럼 대주교님을 뵌 뒤엔."

"그 뒤로도 일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자, 가시지요."

애써 꺼내본 말도 수행원에게 잘렸다. 카리타스는 그를 잠깐 노려보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여기서 그를 나무라봤자, 폰에 대한 인식만 나빠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그는 풀 죽은 폰이 신경 쓰여 '언제 다시 거주관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까 했던 이야기에 대해선 더 생각해볼게요.'라고 덧붙이며 떠났다.

"그래도 또 온다고 하신 거니까 기다리자. 그때까지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는지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코지는 망연자실한 제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고 폰은 칙칙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얼굴이 밝아진 것은 저녁 식사 이후 센이 폰과 코지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였다. 문이 매우 천천히 열리자 센은 의기양양한 말투로 폰에게 저를 따라오라 명령했고, 한 번에 그 말을 따르기 싫었던 폰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이유를 물었다.

"그 대단하신 사제님이 가신다는데 네가 짐꾼 노릇을 해드려야 하지 않겠냐? 그분 덕분에 네가 풀려났으니!"

순간 코지와 폰은 놀라서 동그래진 얼굴로 서로를 보았고 코지는 다녀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폰은 얼굴에 절로 퍼지는 미소를 참기 힘들었다.

센은 어딘가 밝아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것 같았으나 폰이 방 밖으로 힘차게 나와 그에게 어디로 가면 되느냐 물어보자 손으로 대주교실을 가리킬 뿐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신이 나서 가벼워진 걸음으로 움직이던 폰은 뒤에서 수상하게 여기는 센의 시선을 의식하고 왈츠 스텝을 밟는 것처럼 파닥거리던 발을 조금 진정시켰다.

대주교실의 정원엔 몇 개의 나무 상자와 천 보따리들이 놓여있었고 폰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얼굴이 그 옆에 서선 폰을 향해 작게 손 흔들고 있었다.

"밤중에 이렇게 부르게 돼서 미안해요. 생각보다 선물을 많이 준비하셨더라고요."

"아뇨, 괜찮아요!"

씩씩하게 대답한 폰은 제 몫으로 주어진 보따리를 받아들고 신전으로 향하는 무리를 따랐다. 신전의 후문도 보지 못했던 폰은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이유 모를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작 이 정도 언덕을 걷고 힘든 건가 생각해보았지만 땀은 전혀 나지 않았고 숨도 멀쩡하게 쉬고 있었다.

마침내 신전 정문에 다다르자 그곳에 대기하던 다른 사제들이 카리타스 일행을 맞았다.

순간 짐만 두고 가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들도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르는 귀찮은 일은 하기 싫었는지 거주관 사람들을 제재하지 않았다. 폰은 보따리를 카리타스 침실 바로 옆방에 두면서 주위를 둘러보았고 다른 일행들은 빠르게 나가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가는 문 바로 뒤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폰의 손을 낚아채 무언가를 쥐여주고는 날래게 손을 빼버렸다.

"돌려드릴게요. 이렇게 줄 수 있을지는 몰랐네요."

"아…."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뿐인데 이상하게 속상한 기분이었다. 폰은 제 이름이 쓰인 손수건을 쥐락펴락하다가 돌아가야 한다며 저를 부르는 센의 외침에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해서 뒤를 돌아보았으나 침실로 들어가는 카리타스의 치맛자락만 볼 수 있었다.

혹여 손수건과 바스락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릴까 봐 몇 번이고 주머니를 확인하던 폰은, 거주관의 제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것을 꺼내보았다. 손수건의 접힌 면 안쪽엔 두 번 접힌 얇은 카드가 놓여있었고 펼쳐보니 종이 한 모서리가 울퉁불퉁하게 찢긴 모양이 나 있었다.

"이게 뭐야?"

"아까 짐 나르고 카리타스 님께 손수건이랑 같이 받은 건데 나도 이제 열어봐."

편지라고 생각했던 글은 예상외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글을 다 읽은 폰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종이를 다시 접은 채 제 일기장의 면지에 끼운 뒤, 다 풀려버린 다리로 기어올라 제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코지는 허탈하게 웃으며 경전 공부를 하러 책상에 앉았다.

"쌍방이잖아. 둘 다 바보였던 거고."

"... 카리님 욕하지 마."

"얼씨구 벌써 호칭이 카리님이야?"

"..."

베개에 얼굴을 묻은 폰에게서 이상한 신음 같은 것이 새어 나왔고 코지는 그것을 배경음 삼아 경전 필사를 시작했다.

'일기를…. 그것도 어제 일기를 찢어서 주시다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폰은 웃음이 멈추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어쩐지 편지를 자주 쓰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이런 기분이라면 매일매일 편지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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