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화

"폰!"

"응?"

"빨래 다 널었으면 놀러 가자! 이쪽은 다 끝났어."

"나도 곧 끝나니까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빨랫줄을 스치며 지나갔다. 맑은 햇빛 아래 널린 갖가지 천들은 부드럽진 않았지만 깨끗하고 구김이 없었다. ‘폰’이라 불린 아이는 빨래 바구니에 남아있던 마지막 천을 야무지게 털어 빨랫줄에 걸었다.

물방울이 점점이 묻은 손은 대충 털고 친구들이 모여있는 들판 끝으로 달려간 아이는 빨랫감이 담겨있던 빈 바구니가 들판의 바람에 엎어진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뛰어다녔다. ‘폰’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각자의 일이 끝나자마자 신이 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내팽개치고 놀고 있었다.

남부 지역의 맑은 날은 북부보다 빈번하지만, 아이들은 마치 열흘 만에 이런 날을 맞은 것처럼 놀았고, 놀이 장소는 처음 그들이 모인 곳에서 한참 위로 옮겨졌다.

“잠깐만! 우리 여기 오면 혼나지 않아?”

주근깨 있는 아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모여있는 아이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과연 아까보다 나무의 수가 줄어들고 찬송가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거주 관에서 신전 사이의 숲에서만 놀 수 있었다. 거주 관과 신전은 건물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었으니 놀이 공간의 경계는 아무리 아이들이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양 갈래 머리를 한 아이가 말을 보탰다.

“맞아……. 게다가 오늘은 신전에 신탁이 내려오는 날이니까 더 주의하라고 하셨어.”

아이들은 굳이 주어를 듣지 않아도 누가 그 말을 했는지, 그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뭔가 말할 것이 있는 표정이었던 아이도 양갈래 머리를 한 아이와 눈을 마주하곤 생활복에 묻은 풀잎을 털어냈다. ‘폰’도 순순히 내려갈 생각으로 몸단장하는데,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것을 털어내다 문제가 생겼다.

“앗!”

갑작스레 숲 아래 들판에서 아이들에게 불어온 강풍이 폰의 손수건을 가지고 신전 쪽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나 저것만 가지고 올게, 다들 먼저 가 있어.”라고 말할 정도로 손수건은 조금 먼 잔디 위에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별일도 다 있다며 중얼거린 폰은 사제나 기사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그러자 바람은 그를 시험이라도 하듯 한 번 더 손수건을 위로 옮겼다. 당황한 폰은 이젠 아예 신전 뒤 정원으로 들어가 버린 손수건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정원에선 바람이 갇히니 손수건이 더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하지만 잘못했다가 나오지 못하는 건 손수건뿐만이 아니게 될 것으로 생각한 폰은 손수건을 포기하는 것도 고려하였는데, 이는 폰의 머릿속에서 제안된 지 수 초도 되지 않아 기각되었다.

사제와 기사는 공식적으로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으므로 신전의 보급품을 받아 생활한다. 신전 아래에 예속된 거주 관의 아이들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물품은 성인들 것과 구분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전의 누구라도 아이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

만약 신전에서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이 발견된다면, 그 주인을 찾지 못해도 아이들이 그곳 근처에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만다.

‘그러면 안 돼.’

고개를 저은 폰은 자세를 낮춰 정원에 숨어든다. 찬송가는 어느새 멎어있었는데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제단에 서서 연설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폰은 정원을 마주 보는 신전의 복도 양 끝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빠르게 달려가 손수건을 낚아챘다. 더는 어딘가로 도망치지 못하게 주머니 가장 깊은 곳에 그것을 쑤셔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전에 의탁 되기 전, 어머니가 읽어주신 동화에 나오는 의적 같다고 생각한 폰은 신전의 생활복이 아니라 어둡고 낡은 옷을 입은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여야 할 테니 어두운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그런 사람이라면 왠지 자신에게 익숙한 옷을 오래 입을 것 같았다.

‘별로다……. 안 어울려.’

긴장이 풀려 미적미적 걷고 있던 폰에게 별안간 귀청이 떨어질 법한 큰 소리가 들이닥쳤다. 이 소리에 묻혀,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소리는 폰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정원에 등을 돌리고 있던 폰은 큰 소리에 놀라 걸음을 재촉하였고, 그가 있었던 정원에 도착한 발소리의 주인은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 붉은 기의 갈색 머리카락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마른 나뭇잎이나 가지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이는 복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새파래진 안색으로 정원에 도착하였다. 폰이 숨어서 동태를 살피던 나무를 붙잡고 간신히 숨을 고른 그는, 제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의 이름을 알기엔 아직 어렸다. 훗날 그는 폰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구원 같았다.”라고 말한다.


다행히 폰은 그 길로 거주관에 무사히 도착해 하루를 마무리했다. 같이 놀았던 아이 중에도 들킨 이가 없어, 거주 관은 조용하고 안온한 분위기로 밤을 맞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 몸이 근질거리던 아이들은 또 숲으로 내달렸다. ‘폰’도 빼지 않고 아이들과 뭉치고, 구르고, 흩어졌다가 손수건을 잃어버릴 뻔했던 곳까지 금세 올라왔다.

‘또 여기네.’

아이들은 지난번처럼 내려가야 할지, 휴일이라고 사제님들도 봐주실 테니 여기서 놀지를 결정하고자 토론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폰은 술래잡기보다 숨바꼭질을 더 좋아해서 나무가 많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신전 근처에서 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신전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이야기했다.

과반수의 아이가 찬성하여 폰은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신전 근처에서 놀았다. 이따금 아이들은 토론할 때 둘러앉았던 것처럼 잔디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아 간식을 먹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뛰어다닌 탓에 지친 아이들이 빠지자, 술래잡기로는 재미가 없을 수의 사람만 남았다.

‘폰’은 여전히 잘 뛰어다니는 쪽이었고, 이 넘치는 체력으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폰의 무리는 신전 탐방을 목적으로 움직였다. 말리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휴일이니 괜찮을 거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폰과 몇몇은 일렬로 신전 정원에 숨어들었다. 개중 앞장선 아이가 당황한 듯 속삭였다.

“야, 휴일이라며? 누가 오는데.”

그 뒤에 선 아이는 제 앞의 아이 어깨를 누르며 슬쩍 고개를 뺐다.

“우리 또래인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지? 옷도 달라.”

폰은 위로 올라간 네 명 중 가장 마지막에 서 있었는데 세 번째 아이가 “붉은 옷은 치유 사제님들만 입는 옷 아니야?”라고 말하기 전까지 새롭게 등장한 아이의 옷 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슬퍼 보여.”

하늘하늘한 베일과 자줏빛 머리칼의 그림자 아래로 보이는, 하늘과 같은 색의 눈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던 것이다. 아이들이 숨죽여 어제 폰이 숨었던 나무 뒤에 똑같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붉은 옷의 아이는 정원을 감싸 안는 담 위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저 아이가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기다릴지, 그냥 지금 바로 내려갈지 고민하던 아이들은 조금 기다리기로 하였다. 내심 붉은 옷을 입은 또래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이다.

“누가 말을 걸어볼래?”

첫 번째 아이가 묻자, 두 번째는 시선을 피했고 세 번째는 고개를 저었다. 폰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내가 해볼게.”라 답하며 심호흡했다.

“흑.”

정말 짧은 순간, 소리라고 해도 될까 싶은 날숨이 정원의 풀들을 건너 폰의 발을 묶었다. 붉은 옷의 아이는 아까 낸 소리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정체나 이름 따위가 궁금해도 우는 사람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며 두 번째 아이가 일어섰다.

그런 와중에, 울던 아이는 눈물을 닦으려 꺼낸 손수건을 손에서 놓쳐 바람결에 정원 외각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마침 손수건은 아이들이 숨어있던 나무쪽으로 날아왔고 그것을 주우러 갈 힘도 없는 듯이 아이가 가만히 서 있자, 폰은 다른 아이들이 말릴 새도 없이 튀어 나갔다.

떨어진 손수건에 새겨진 문양이 제 손수건의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어 바꿔치기할 계획은 틀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거 말고 이걸로 닦…으세요.”

무심코 또래에게 하듯 반말로 말을 끝내려던 폰은, 우는 아이의 옷을 의식해 급히 말의 어미를 바꿨다. 그러곤 지쳐 떨어진 아이들에게 주려고 꺾었던 향이 좋은 들꽃과 제 손수건을 겹쳐 그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아이가 눈물을 닦으면서도 꽃과 저를 번갈아 보며 바라보자, 폰은 머쓱하게 주절주절 설명을 덧붙였다.

“꽃을 보면 기분이 좋잖아요. 다 울고 난 뒤엔 웃었으면 해서…….”

정말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맑은 하늘처럼, 비 내리는 눈동자가 눈물을 멈추고 맑게 개어 꽃처럼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폰의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눈물을 말끔하게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꽃을 눈물 자국난 뺨에 가져다 댄 아이가 바람대로 환하게 웃자, 폰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황한 폰은 상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그의 손수건을 돌려주는 것, 제 손수건을 돌려받는 것도 잊은 채 허둥지둥 정원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기엔 제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폰은 사나운 들개에게 쫓기는 사람 같이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잊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 기억해낸 건, 아이들이 모여있던 들판에 돌아왔을 때였다. 정확하게는 주근깨 있는 아이, 코지가 그 손수건은 뭐냐고 물었을 때인데, 그제야 폰은 손수건 한구석에 자수로 새겨진 단어를 발견한다.

‘카리타스? 이름인가?’

왠지 모르겠지만, 이 사실을 공유하기 싫었던 폰이 은근슬쩍 손수건을 숨기자 아이들의 관심은 손수건에서 오늘 저녁 식사로 바뀌었다.

‘내일 돌려주러 와야겠다. 자유시간 때 세탁해두면 아침엔 마르겠지.’

예상대로 다음 날 아침, 손수건은 바짝 말라 있었지만, 폰은 정원에 올라갈 수 없었다.


평소에는 손수건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검사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 아이가 조심성 없이 흘린 말을 주워들은 거주 관 사제가 그를 추궁하는 바람에, 그날 아이들의 일이 다 알려지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없어진 것이 있다면 혼쭐을 내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사제 앞에서 아이들은 합죽이가 되었다.

폰은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손수건을 잃어버렸다고 자백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폰을 은근히 질투하는 ‘얀’ 수습 사제는 당당하게 물건을 잃어버렸다 말하는 폰에게 다른 것을 더 잃어버려놓고 손수건으로 대신하는 것이 아니냐고 집요하게 추궁했다. 이에 지지 않고 폰은 손수건 외의 물건은 수습 사제님께서 보시기에도 제 자리에 있지 않냐고 반박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트집 잡을 건수를 노리는 모양이 사제라기보다는 잡배 같다며 속으로 짓씹은 폰은 팔꿈치 위쪽에 묶어둔 카리타스의 손수건이 들키지 않도록 미동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소득도 없는데 굳이 몇 바퀴나 폰과 코지의 방을 돌아다닌 얀은 두 사람에게 생활복의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라고 명령했다. 폰의 주머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코지의 주머니에서는 손수건과 작고 투명한 돌이 매달린 가죽끈 팔찌가 나왔다.

시장에 나갈 수 있는 날에 그동안 모아둔 용돈을 써서 폰과 코지가 각각 산 팔찌였다. 폰은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잃어버릴 것 같다며 그것을 머리끈으로 사용했지만, 코지는 꼬박꼬박 손목에 끼고 다녔다.

사제들은 개인적인 사치품을 가져선 안 되지만, 아이들에겐 조금 너그러운 기준이 적용되었다. 아예 가지지 못하게 하면 반발이 생길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의견에 따라 거주 관의 아이들은 정식사제 서품을 받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용돈을 받을 수 있다.

얀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폰에게 나온 것이 없자 그는 괜히 코지에게 성질을 부렸다.

“거기 너,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있는 거냐? 그런 사치품에 벌써 눈독을 들이고 말이야.”

반박할 말이 많지만 참고 있는 코지의 모습이 겁먹은 것으로 보였는지 얀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결국, 그의 입은 폰이 “고작 해봐야 우리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으면서 뭐 그리 할 말이 많아?”라고 비꼬았을 때 닫혔다.

그러자 코지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고 얀은 붉어진 얼굴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폰!”

둔탁한 소리와 함께 폰의 고개가 돌아갔다. 얀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 번 더 손을 들었고 폰은 꼿꼿하게 서서 얀의 주먹을 노려보았다.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지르느라 휘청거리는 얀을 그대로 잡아 바닥으로 메친 폰은, 그 소리에 놀라 달려온 기사에게 붙잡혔고 그대로 독방행이었다.

“폰,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말을 잇지 못하고 끝을 흐린 코지는 독방에 난 작은 창으로 저녁을 전해주었다. 평소의 저녁도 사제답게 그리 풍족하진 않았는데 이런 징벌을 받을 때의 식사는 그것의 반 정도 되었다.

“괜찮아. 얀은 한 번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폰은 저를 아니꼬워하는 얀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대응해보았으나, 제가 잘해주든 삐딱하게 굴든, 얀은 일관성 있게 폰을 예의없이 대했다.

더는 못 참겠다. ‘한 번만 더 건드려 봐라’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폰에게 마침 시비를 건 날이 그날이었을 뿐, 코지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폰은 코지에게 위로를 건넸다.

코지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기사가 폰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 왔다. 꼬맹아. 이번엔 왜 들어왔냐?”

사실 폰이 그렇게 자주 독방에 가둬지지는 않았는데, 굵직굵직한 사건으로 독방 신세를 진 전적으로 인해, 거주 관 독방 담당 기사 렌은 폰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얀이 얀했어요.”

“뭐라고?”

“별것도 아닌 거로 괜히 꼬투리 잡혔다고요.”

폰이 툴툴거리며 대답하자 렌은 ‘그 나잇대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지.’리고 말하곤 ‘그래도 네가 이겼구나. 그건 좀 통쾌한걸.’이라고 덧붙여, 폰의 세모난 눈을 둥그런 눈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밖은 어때요?”

“너처럼 독방에 가둬진 애들은 없다만 경전 필사 같은 자잘한 벌을 받은 아이는 있는 모양이야.”

렌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장비를 정비하고 있었고 폰은 카리타스의 손수건을 팔에서 풀어 손에 쥐었다.

“렌, 혹시 신전에 갈 일 있어요?”

“이번 근무 시간이 끝나면 보고하러 가긴 해야 해. 너 또 거기에 갈 생각이냐?”

“설마요. 독방 열쇠는 대주교님 방에 있으니까 전 못 나가죠. 근데 전해줘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요.”

하다 하다 혹시 도둑질에도 손을 댔냐는 렌의 농담에 폰은 “어쩌면?”이라고 대답해, 되려 렌의 심장을 내려앉게 하였다.

“렌이 이 물건을 전달만 잘 해주면 도둑질이 아니게 돼요. 도와줄 수 있나요?”

“그게 누구 물건인지, 뭔지를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렌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얼굴의 반만 보이는 독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폰은 독방 안에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었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주위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손수건이에요. 자수로 ‘카리타스’라고 적혀있는 건데.”라고 속삭였다.

폰의 말에 렌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창문에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분과 엮인 거야? 손수건 잃어버린 거로 뭐라고 하실 분은 아니다만, 정말이지….”

“왜요? 저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던데? 그러고 보니 그 나잇대인 사람이 그 시간에 신전에, 그것도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이상하긴 했어요.”

“그래, 너희는 여기에서만 살고 그분의 존재도 아직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네.”

또래에 비해 당차고 똑 부러진 성격의 폰이지만, 제게 믿음직한 어른인 렌의 반응에, 폰은 다리에 힘이 빠져 창문 아래로 슬슬 가라앉았다.

“아냐, 그분이 그런 거로 화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근데 이런 걸 말해주는 건…. 손수건을 돌려주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야.”

보이지 않는 폰에게 양손을 휘저으며 당황해하던 렌은 ‘불가능’이라는 단어에 맞춰 표정을 굳혔다.

“그분은 너와 똑같이 여덟 살에 신전에 들어오셨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와 같은 해에 왔다는 건 알지. 너도 신전에 들어올 때 신성력 검사받았지?”

“음…. 그렇죠. 결과는 평범해서 별일 없었고요.”

“그런데 그분은 별일이 있었어. 신성력이 갓 정식사제가 된 사람들만큼 높게 나왔다고 해.”

순간 폰은 신성력이 없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신성력이 없다고 확인된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렌은 그런 폰의 생각을 모른 채 말을 이어나갔다.

“높으신 분들은 그분이 아직 어린 나이고 정식으로 교육도 받지 않은 데다가 평민이었으니, 슬금슬금 권력에 눈독 들이는 왕궁 놈들을 견제할 인재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겠지. 뭐, 이까지는 우리끼리 몰래 숨어서 떠드는 이야기니까 너무 믿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진 마라.”

어느새 다시 물 먹고 살아난 식물처럼 곧게 서 있던 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신전에선 그렇게 생각하기만 했을 거야. 더 놀라운 건 그분이 신탁을 받았다는 거지. 그래서 너랑 동갑인데도 신전에서 사제처럼 지내고 있는 거야. 그런 분한테 내가 어떻게 그걸 전해주겠어?”

렌이 장난스레 저의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들어 올리곤 말을 끝맺었다. 폰이 저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렌은 어쩌다 손수건을 가지게 된 것인지 물었다.

“어제 신전까지 올라갔다가 우연히 봤어요. 울고 있어서, 제 손수건을 빌려드렸는데. 아, 그게, 그분도 본인 손수건이 있었는데 그게 바닥에 떨어져서, 더러워졌을 것 같아서 빌려준 거예요. 아무튼, 그러고 나서 돌려받는 걸 까먹고 그분 걸 그대로 들고 돌아왔어요…. 제 건 줄 알았나 봐, 오늘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횡설수설하는 듯했지만 의외로 뜻은 잘 전달이 되도록 말하는 폰에, 렌은 잘했다고 칭찬하면서도 손수건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뜬 달이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독방으로 희미한 빛을 보냈다. 우중충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각지의 자리에서 시간을 죽였다.

교대시간이 될 때까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던 렌은 더 생각하는 건 자신이 할 테니 꼬맹이는 자라며 위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폰은 독방 바닥에 깔린 얇은 담요에 누워 제법 높아진 달을 보았다. 잠이 잘 오지 않아 손수건을 뒤적거리자 ‘카리타스’라는 글자가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럴 리는 없지….”

손수건에 새겨진 이름과 문양만 다를 뿐, 실은 폰의 손수건에 쓰인 것과 같은 재질이었다. 폰은 손수건을 다시 반듯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렌과 교대하러 온 기사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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