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4화

푹찍

편지로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카리타스는 신전으로 돌아간 후 연락이 없었다. 성서를 외우려 앉아있던 폰은 창문으로 신전 쪽을 올려다보다가 맞은편의 코지에게 혼나기 일쑤였고, 그런데도 자꾸 흘깃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왜 카리님이 연락이 없는지 궁금하긴 한데 바쁘신 거겠지. 우리랑 다르잖아."

"그렇지…."

결국, 담당 주교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성서를 깔고 엎드린 시도폰은 제 팔에 얼굴을 묻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웠다. 코지는 제 앞에서 하늘거리는 폰의 머리카락 뭉텅이를 펜으로 쿡쿡 찌르다가 반응이 없자, 하던 대로 책을 읽었다.

아침부터 줄줄 내리던 비는 세차게 흐르지 않았지만 온종일 창문에 물줄기를 냈고 폰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책들도 죽죽 늘어졌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공기는 따뜻하고 눅눅해서 코지도 성서와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훨씬 재미있는 다른 책을 골라와 앉았다. 오늘 성서 외우기는 글렀다, 생각하며 코지가 책의 제1장을 다 읽었을 즘, 폰이 고개를 들었다.

"잘 잤니?"

"내가 언제부터 자고 있었지?"

전혀 모르겠다는 멍한 얼굴로 폰이 묻자, 코지는 자기가 읽고 있던 책의 몇 장을 집어 보였다.

"이만큼 읽었어."

"오래 잤네. 웬일로 안 깨웠어?"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폰은 일어날 생각은 않고, 여전히 엎드려 팔에 턱을 얹은 채 말했다.

"어이구, 깨운다고, 일어날 것, 같았으면, 내가, 깨웠, 겠지."

코지가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여, 폰은 슬금슬금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팔을 들어 확인해 본 결과, 천만다행으로 성서에 침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에 힘을 잔뜩 준 폰이 성서를 읽기 시작하자 코지도 읽던 책을 덮어두고 성서를 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진도는 달랐지만, 소리 내서 외우는 것이 아니어서 문제는 없었다. 비는 저녁 동안 점차 약해지다 달이 조금 높은 동쪽 하늘에 떠 있을 때 완전히 그쳤다.

"내일은 아침부터 빨래해야겠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코지는 달을 바라보며 말했고 폰은 그 말에 저녁때 먹지 않고 꿍쳐둔 부식을 떨어뜨릴 뻔했다. 한가득 음식을 입에 문 채로 무언가 말하려던 폰은 다시 입을 닫았다. 빗물을 머금은 바람을 타고 풀과 흙의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고 두 사람은 조용한 밤공기를 즐기다 잠들었다.


코지가 예상한 대로 일과 시작부터 아이들은 빨래해야 했다. 저마다 제 몫의 빨랫감을 가져가는 아이들에게 맑게 갠 하늘의 햇살이 쏟아졌고, 그중엔 폰과 코지도 있었다.

또래보다 몸이 튼튼하기로 유명한 폰의 빨래 바구니는 코지의 것보다 조금 커서, 종종걸음으로 걷는 코지의 그림자 옆엔 겅중겅중 걷는 폰의 그림자가 속도를 맞춰 걷고 있었다.

빨랫감의 무게를 적당히 분배해서 건조대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도 기술이라며 얀이 한창 유세를 떠는 것을 지나쳐 폰과 코지도 빨래를 널었는데, 일이 다 끝날 때쯤, 폰은 주변을 살피다가 조용히 코지에게 다가갔다.

"다 널었어?"

"응, 거의. 그래서 말인데…."

폰이 코지의 귀에 속삭인 말에 코지는 진심이냐고, 덩달아 목소리 낮춰 되물었다. 사뭇 결연한 얼굴로 폰이 고개를 끄덕이자 코지는 한숨을 쉬곤 망을 봐줄 테니 빨리 다녀오라며 뒤돌아섰다.

"허락해 주는 거야?"

"뭐, 내가 도와주면 안 들킬 테니까 도와주는 것뿐이야. 말려서 밤에 나갔다가 들키면 그게 더 안 좋아."

"고마워. 빨리 다녀올게. 얼굴만 잠시 보고 올 거니까!"

"그래그래."

대충 손을 흔들어주는 코지를 뒤로하고 폰은 땅을 얕게 밟아 최대한 조용히 언덕 위로 뛰기 시작했다.

빨랫감이 어느 정도 널려있어 아이들의 시야를 가려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것들에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간 폰은, 신전과 거주관 사잇길 가장자리의 숲으로 몸을 숨겨서 움직였다.

대주교가 보면 우리 교단에 성직자가 아니라 도적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날랜 움직임이었기에, 오래 달리지 않고도 폰은 신전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어디쯤 있으시려나?'

근처에 있는 나무 중 가장 두꺼워 보이는 나무 뒤에 숨어, 살짝 고개를 내민 폰의 시야엔 텅 빈 신전 복도만 보일 뿐이었다. 그날 카리타스와 만난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따스한 정오의 햇살이 풀과 작은 꽃, 사람들이 가져다 둔 화분의 화려한 꽃을 공평하게 비추는 동안 누구도 정원을 찾지 않는 게 이상했다. 폰에겐, 한 명쯤은 이런 풍경을 봐줘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물론 코지가 들었다면 '어제만 비가 온 것뿐이지 그제 점심땐 맑았어.'라고 오류를 잡아줄 생각이었지만.

요리조리 고개를 빼서 둘러보아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도 폰은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려가지 못했다. 카리타스가 있기를 바라는 건지, 정말로 누군가 있다고 느끼는 건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초조해진 폰은 과감하게 신전 담벼락 아래에 몸을 숨겼다.

정원에서 거주관 쪽으로 난 문이 열리면 잽싸게 숲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은 폰은, 어떤 소리라도 들리길 바랐다. 얼마 되지 않아 폰은 사람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바라는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흐느끼는 것과 비슷한 비명이 짧게 울려 복도를 타고, 정원의 담벼락을 넘어 폰에게 닿았다. 곧이어 훈계조의 목소리가 상대방을 타박하는 것이 들렸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빗속에서 말하듯 웅얼거리며 대답했고 얼마 가지 않아 그것도 멈췄다.

'누구지…. 익숙한데.'

조금 더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집중하자 폰의 머릿속에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올리비아?'

다 같이 술래잡기를 하러 언덕으로 올라왔던 날, 조심성 없이 말을 흘려 단체로 소지품 검사를 하게 만든 아이였다. 폰의 입장에선 괘씸한 아이임이 틀림없지만, 그것보단 올리비아가 왜 신전에 있는지, 왜 혼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지가 더 문제였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엔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상대방은 올리비아가 얼마나 하찮고, 쓸모없는 아이인지, 그런데도 올리비아에게 일을 시켜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불쌍한지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폰은 참다못해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언덕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손구호를 보내는 코지를 발견하고 정원으로 가려던 몸을 틀었다.

'올리비아 방이 어디였더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걸렸다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 등을 떠미는 듯한 느낌도 있었기에, 폰은 올리비아의 방이 저와 같은 5구역에 있다는 것만 되새기고 올라올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내려갔다.

"카리님은 못 만났구나?"

"응…."

넋이 다소 나간듯한 폰의 표정에 코지는 의문스럽다는 눈치를 주었지만, 폰은 이따 저녁 먹고 이야기하자며 빨래 바구니를 들었다. 코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제 바구니를 들어 폰에게 얹어주었다.

"뭐야?"

"망봐준 값이라고 생각해."

폰은 툴툴거렸지만, 바구니를 들고 나아가던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하지만, 코지가 '오늘은 성서 많이 외울 수 있지?'라고 물었을 때 발을 헛디딜 뻔하긴 했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

코지는 은근슬쩍 제 눈을 피하는 폰을 흘깃 쳐다보다 별다른 말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묵묵히 걷던 두 사람의 시야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10년 차 농부처럼 목에 수건을 걸고 지친 듯이 걸어오던 얀과 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걸음을 늦췄다. 두 무리는 서로 노려보며 걷다가 거주관에 도착했고 복도에서도 서로 닿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빨래는 제대로 했냐? 더러우면 다시 하라고 할 거다."

"걱정하지 마셔, 깨끗이 씻은 발로 지근지근 밟아줬으니까."

얀이 시비를 걸었고 폰도 걸려들어서 아득바득 받아치자 코지는 천장만 바라보다가 센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풀밭에 다녀오셨나요?"

"뭐야 왜 존댓말이야. 소름 돋게."

"아오. 전 원래 존댓말 썼거든요."

"쟤는 반말이고 너는 존댓말이냐? 그냥 너도 말 편하게 해."

마지막 발언자인 센을 제외하고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췄다. 센은 혼자 걸어가다 멈춰서 뒤돌아섰고,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지난번 일은 괜히 시비 걸어서 미안했다. 말 편하게 해."

"제가 맞은 게 아니니까 사과는 폰한테 해주세요. 말 편하게 하는 건 굳이 거절하지 않긴 할 건데."

"그래…. 얀 너도 어서 사과해. 아까 사과하라고 했더니 왜 대뜸 시비를 걸어서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냐?"

폰이 얀을 올려다보며 거의 턱을 들이받을 정도로 까치발을 들자 얀은 양손을 들어 항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되지도 않는 일로 시비 걸어서 미안했다.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야."

네모나게 뜨던 눈을 원래대로 만든 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무례한 행동을 했으니 똑같은 거로 치자고 말했다. 궁금한 건 따로 있다고 말을 꺼낸 그는 저에게 집중된 시선에 괜히 바구니를 발로 툭툭 쳤다.

"갑자기 왜 사과하는 거야?"

그 말에 얀과 센은 서로 쳐다보았고 얀이 흠흠, 얕게 헛기침을 하다가 소매에 붙은 아마 풀잎을 떼어냈다.

"그 일 때문에 네가 독방에 갔잖냐. 넌 몰랐겠지만 난 그 일로 도서관 책장 청소하는 벌을 받았단 말이지."

"나는 얀 따라서 도서관에 갔는데 먼지가 굉장히 많더라고. 저 녀석이 청소하는 동안 괜찮은 책을 골라서 읽고 있었지."

"아무튼, 청소하다가 책 하나가 떨어져서 소리가 났는데, 그걸 들은 사제가 와서는 그것도 똑바로 못하냐며 뭐라 하더라고."

"이름이 뭐였지?"

"몰라. 기억도 안 나는데 언젠가 만나면 알아보겠지. 내가 당해야지 고칠 생각이 든다는 게 부끄럽긴 한데, 나도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니까…. 큼."

민망한지 말을 한번 끊은 얀은 어느새 은근슬쩍 미소 띤 나머지 세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날일 뿐만 아니라 여태 자잘한 것들로 시비 걸어서 미안하다. 위 사제들이 그렇게 했다고 너희한테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하는 거 충분히 알겠으니까 구구절절 더 말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나도 지나치게 반응했던 게 부끄럽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폰이 손을 내밀자 얀은 가볍게 그것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다 놓았다. 네 사람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들다가 얀과 센은 공동 목욕실로, 폰과 코지는 세탁실로 갈라졌다.

"신기하고 얼떨떨하네…."

둘만 남게 되자 폰이 먼저 중얼거렸다.

"그러게,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변하기도 쉽지 않은데. 엄청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봐."

"갑자기 변하면 죽는 거라는데."

"씁! 무서운 소릴."

불길한 소리를 한 죄라며 코지는 폰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고 폰은 웃으며 그것을 피했다. 폰은 코지의 손을 세 번 피했을 때 갑자기 생각났다며 개구리 튀어 오르듯 펄쩍 뛰어올라 코지와 거리를 벌렸다.

"뭐가 생각났길래 그렇게 멀어지는 거야? 나 뭐 묻었어?"

"아니, 올리비아 방이 어디였지?"

"올리비아는 우리랑 같은 구역이긴 한데 4구역 쪽에 더 가깝지. 5구역 세 번째 방이야."

"사실 아까 올라갔을 때 올리비아가 거기서 혼나고 있는 걸 봤거든."

"신전에 올리비아가 올라간 것만으로도 이상한데 혼나고 있었다고? 무슨 일인 거야."

"그걸 물어보려고."

"물어본다고 잘도 대답해 주겠다."

어이없어하는 코지를 두고 폰은 냉큼 빨래 바구니를 세탁실 창고에 던져두고 돌아왔다. 둘은 다시 복도를 돌아오며 올리비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예상되는 것이 없었다. 심각한 얼굴의 폰이 겨우 꺼낸 말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걱정되니까 물어봤다고 하면…. 말해주지 않을까?"

"올리비아 성격상 남이 걱정해 준다고 하면 고마워서 말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혼낸 사람이 입단속 시켰을 게 분명해. 힘들 거야."

"이게 아니면 협박밖에 없지 않아?"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폰은 폭력적이라며 내 친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한탄했지만, 코지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코지는 복도 맞은편에서 무언가 발견하고 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올리비아 온다. 울었다는 건 확실한 거 같네."

"우는 사람한텐 세게 못 대하겠어…."

그렇다기엔 옛날에 얀을 울린 적이 있지 않으냐고 하려던 코지는 입을 다물었다. 올리비아 또한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손을 모아 거의 웅크리다시피 천천히 걸어오던 올리비아는 둘에게 먼저 가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폰과 코지는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 나한테 할 말 있어?"

"물어볼 게 있어서…. 따지려는 것도 아니고 혼 내려는 것도 아니고, 네가 걱정되어서 물어보는 거니까."

폰이 답지 않게 부드럽게 말을 꺼내자 올리비아도 안심한 듯 살짝 고개를 들어서 폰을 마주 보았다.

"뭐, 뭔데?"

"사실 내가 아까 신전에 올라갔는데."

"또 신전에 올라갔다고? 너, 너 지난번에 그러다가 독방에 갔잖아. 또 그러면-."

"아니 내 말 끊지 말고. 너는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올리비아는 울어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더니 고개를 숙였다. 코지는 이미 망한 거 아니냐고 물었고 폰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무책임한 답변만을 내놓았다.

어정쩡하게 멈춘 세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고 폰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에, 올리비아는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라고 말하며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빠르게 둘을 지나친 올리비아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코지는 혀를 끌끌 찼다.

"네 말대로 신전에 간 건 맞는가 보네."

"내가 잘못 봤다고 의심하고 있었어?"

"조금은. 근데 신전에 갔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으니까, 방금까지 신전에 있었던 것까진 사실인 거겠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뭘까?"

"무언가를 시켰는데 못 했다거나.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거나."

코지는 폰의 추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일이건 간에 올리비아가 신전 쪽 인물과 관련이 있다는 건 알게 됐으니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잘 살펴봐야겠다며 폰은 방문을 열었다.

"사제 회의는 내일이지? 아직 연락 없으셔?"

"너도 알다시피 여전히 무소식이야. 사제 회의 끝나면 좀 여유가 있으시지 않을까?"

그럴 거라며 다독인 코지는 저녁 전, 기도 시각이라며 폰을 일으켰다. 잠깐 누워있었지만, 폰은 기지개를 켜고 하품하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지겨워…. 신께서도 매일 반복되는 이런 기도는 질리지 않으셨을까?"

"점점 신기한 방식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하네. 옷매무시나 제대로 해."

건성으로 대답한 폰은 구겨진 옷을 적당히 폈고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신전 회의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나서야 폰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카리타스는 사과로 시작한 글에서 구구절절 자신이 부족해서 거주관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고 털어놓았지만, 폰과 코지는 전혀 그것을 이유로 카리타스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얀, 센이랑 화해했다고 말씀드리면 마음이 좀 나아지실 것 같아. 아무리 신성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린애는 안 되는 걸까…."

코지가 중얼거린 말에 폰은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펜을 들었다.

"왜 나한테 줘."

"네 글씨가 더 예쁘잖아."

"아니 그래도 네가 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 왜?"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고. 아, 또 바보 얼굴!"

폰은 종종 책 구절의 의미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코지가 말하는 '바보 얼굴'이라는 표정을 짓는데, 이번에도 그런 표정을 보이자 코지가 약간의 경멸과 놀림을 담은 얼굴로 폰을 바라보았다.

"마침 잘 됐다. 카리 님께 쓰는 거면 너도 글씨에 좀 더 신경을 쓸 테니까, 이번 기회에 네가 편지를 써보는 거야."

"말이 돼?"

"돼!"

말 끝나기 무섭게 코지는 펜과 종이를 든 폰을 그대로 밀어서 의자에 앉혔다. 두 사람의 편지 쓰기는 종이를 네 장 버리고서야 끝났고 폰은 더는 못 하겠다며 코지가 무언가를 더 지적하기 전에 편지를 봉투에 넣고 빠르게 봉해버렸다.

코지는 수고했다며 폰의 등을 약하게 두들겨 주었고, 편지는 언제나처럼 폰이 몰래 신전으로 올라가서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카리타스가 편지에 써둔 대로, 거주관에서 신전 쪽으로 올라가는 빨랫감에 넣어 두기로 했다.

"빨래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사제님들 옷 너무 무겁지 않아? 물먹은 옷들 몇 벌만 털면 손목 나갈 것 같더라고."

폰이 투덜거리자 코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힘깨나 쓰는 편인 폰에게도 무거운 옷이니, 코지에겐 얼마나 무거울까. 폰의 말에 탈색된 것처럼 창백해진 코지는 손목을 주물렀고 폰은 신전에서 쓰는 옷까지 우리가 세탁하는 건 무리한 일이라고 말하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없다고?"

폰은 4구역, 올리비아의 다인실 앞에서 또 허탕을 쳤다. 올리비아와 복도에서 마주친 그날 이후로 자주 올리비아의 방에 들렀지만, 매번 자리에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 올리비아의 룸메이트는 썩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기에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밀고 들어가서 방을 뒤져볼 수도 없어서 폰은 순순히 물러났다.

얻어낸 것이 없어 힘을 쭉 뺀 채 걸어가던 폰은 기분 전환도 할 겸 도서관 근처의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게 내 잘못이라고?"

도서관에 도착한 폰에게 익숙하지만 낯설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코지가 이렇게 화난 건 거의 못 봤는데! 무슨 일이지?'

발소리를 죽인 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조심스럽게 벽에 등을 붙인 채 정원을 살짝 내다보았다. 녹색 머리의 두 사람이 정원 한구석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폰 쪽에서는 둘 모두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폰이 찾아다니던 올리비아가 코지를 노려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코지는 그에 동조하기는커녕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끼어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폰은 올리비아가 자신을 피했던 것을 떠올리고 일단 참견을 보류했다.

"네가 그때 안경만 제대로 쓰고 있었으면 내가 이런 짓, 안 해도 됐을 테니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그런 짓을 하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그걸 시킨 사람 잘못이잖아."

'잘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올리비아가 별 대답 못 하는 걸 보면 맞는 말이겠지.'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폰은 이때 뛰어들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랐어야 했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말문이 막힌 올리비아가 손을 덜덜 떨면서 벌인 돌발 행동은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아!"

"미친! 코지, 떨어져!"

작고 날카로운 물건이 올리비아 손에 들려있었다. 코지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뛰어오는 폰이 내지르는 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올리비아는 제 손에 쥐어진 물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았지만, 이미 코지의 옷은 허리 부근부터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뭘 빤히 보고만 있어! 그거 내려놓고 당장 어른 불러와!"

얼빠진 얼굴로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뛰어가는 모습이 영 미덥지 않았다. 폰은 코지에게 괜찮다고 계속 말해주면서 그를 부축해 바닥에 천천히 눕혔다.

덜덜 떨리는 몸을 지탱하면서도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폰은 그대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이 폰의 어깨를 눌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야 했다.

'손수건이 주인을 잘못 만났네.'

가지고 있는 천 중에 가장 깨끗한 게 손수건뿐이라, 폰은 손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지혈했고 동시에 적은 신성력을 쥐어짜 흘려보냈다. 응급 의료 처치법 중 자상에 대한 대처법은 가장 기초 단계였기에 폰이라고 해도 지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진 않았는지 출혈은 적은데….'

상처의 절대적인 심각성은 낮았지만 중요한 건 코지의 정신 상태였다. 흐르는 피가 더 없는 것을 확인한 폰은 그제야 코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코지…. 괜찮아. 괜찮아…."

"읔…. 아파, 무서웠다고. 내가, 왜, 하!"

언제 그렇게 흘렸는지 모를 눈물로 코지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있었고 폰은 무언가 위로할 말을 찾으려다가도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할 뿐, 다른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다행히 제대로 사람을 부르긴 했는지 사제가 달려와 상황을 살폈고 코지의 상처도 언제 있었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코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제는 환자의 안전이 우선이라며 코지와 폰, 두 사람을 저녁 기도에서 빼주었다. 개인 식도 따로 제공해 준다고 덧붙인 그는, 올리비아에게 싸늘한 말투로 따라오라고 말하곤 치료실을 나갔다.

말없이 나가려던 올리비아에게 폰이 한마디 했으나 올리비아는 미안하다는 말없이 나가버렸고 날뛰려던 폰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는 코지를 보고 가라앉았다.

상처가 나았다고 해도 코지의 몸은 아직 잘게 떨리고 있었기에 폰은 침대에 뛰어들다시피 날아와 코지를 세게 안아주었다. 평소라면 왜 이러냐고 웃으면서 밀어낼 코지였지만 이번만은 아무 말 없이 폰을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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