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리우리테 / REMIND / 1000일 기념 로그
우리는 다시 세계를 유영해
최근 세리우가 이상하다.
"리우,"
"미안해, 리테. 나 지금 좀 바빠서."
아침에 부스스 눈을 뜨면 이미 외출 준비를 끝내곤 밥상만 차려 놓은 채 어디론가 훌쩍 가버린다거나.
"아! 여기 있었네. 리우야, 나—"
"어어…. 급한 일 아니면 이따 링크셸로 말해줄 수 있어?"
시장에서 겨우 만나도 듣는 둥 마는 둥.
"혹시 리우 어디 갔는지 봤어?"
"아…, 글쎄에……."
"오늘 안엔 돌아오지 않을까요, 빛의 전사님?"
뭔가 찝찝한 주변 반응까지.
오늘로 벌써 나흘째. 자신이 착각하나 싶어 곱씹어봤지만 역시 이상하다는 결론에 다다른 리테가 홀로 주점에 앉아 중얼거렸다.
"진짜 무슨 일이지…?"
시키지도 않은 안주가 서비스로 나왔다는 걸 기뻐할 정신도 없는 건지,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와그작대며 턱을 괴었다. 그리곤 짐짓 심각한 얼굴로 지난 며칠을 되짚었다.
처음 리우의 이상함을 감지한 건 이틀 전. 드디어 낚은 터주를 전리품 삼아 귀가한 날이었다. 입질에 몰두하느라 연락하는 것도 잊어서 뒤늦게 사과할 결심으로 링크펄을 켰는데 몇 번이나 시도해봐도 리우가 받질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지 싶어 돌아가보니 집에 있길래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자신이 올 때까지 다른 일을 하느라 저녁을 걸렀다는 대답을 들었고, 결국 같이 야식을 먹었더랬다.
평소 식사는 거르지 않는 성격의 리우가 뭘 하느라 이 늦은 시간까지 공복이었을까 하다가도, 자신 역시 전투나 낚시가 진행될 때면 더러 끼니를 놓치곤 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쨌든 새벽에 직접 해먹은 떡볶이는 더 할 나위 없이 맛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날 생각해보니 새삼 기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리우는 아무리 뭔가에 집중한들 링크펄은 꼬박꼬박 답하는 성격이지 않던가. 연락이 어렵다면 최소한 받아서 이따가 다시 걸겠다는 말이라도 남기는 편. 그런 그가 몇 번이나 링크펄 통신에 응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이후 하나씩 되짚어보자 점점 평소와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가령 리우의 외출 시각이 빨라졌다는 것과, 지난 며칠 간의 행선지를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 심지어 자신에게도 어딜 다니는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아침, 급하게 온 연락을 받고 자신에게 인사조차 깜빡한 채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확신하게 된 거다. 리우에게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생겼다고.
"나도 들어줄 수 있는데."
뭔가 자신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겠지. 리우는 정말 곤란한 주제를 제하곤 대개 자신과 상황을 공유해왔으니까. 그나마 평화로워진 후엔 각자 할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즈음 서로의 하루를 얘기하는 편이었다. 그런 리우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다.
그렇지만… 어쩌면 워낙 급박한 사안이라 자신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건 아닐까? 사실 난 괜찮은데 내 생각을 더러 하느라 망설이는 걸 수도 있잖아?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 마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게 인지상정! …인데. 그게 궁금해서 대화를 걸어보려 해도, 일단 같이 있질 못하니 도통 기회가 안 났다. 심각한 일이면 오히려 더, 같이 터놓고 풀어보면 좋으련만.
살짝 뚱한 감정을 지우지 못한 채 리테가 안주를 한 입 더 물었다. 이 상황에도 질겅질겅한 오징어는 꽤 맛이 좋은 것이, 라자한 일대를 배회하고 있을 모 용기사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듯했다.
"어머, 영웅 씨. 왜 맛있는 특별식을 먹으면서 그리 울상이야?"
"…아. 아스카 씨."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아스카-시로가네 골목 주점의 주방장-가 두 번째 서비스 접시를 들고 착석했다. 얼마 전 동네 건달에게서 가게를 구해준 소녀가 사실 나이로 따지면 소녀도 아니고(!) 무려 이 세계의 종말을 막아낸 영웅임을 알게 된 후로, 그녀는 리테를 부쩍 귀여워했다.
"리우 때문에요…."
근처에 그 유명한 빛의 전사들이 산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하지만 알고 보니 로잘리테는 강하고 귀여운 아가씨였다. 생각보다 이웃에겐 친절하고, 불의는 참지 못하는, 그래서 세상이 칭송해온 소탈한 영웅 그 자체라고 할까. 하여간, 이후 그녀가 이 식당의 단골손님이 되면서 두 사람은 가끔 이렇게 여자끼리만 하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녀가 말한 '리우'가 또다른 빛의 전사임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스카가 희한하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언약자라는 그 치유사님 말이야? 두 사람 사이 좋은 거 아니었어?"
"그야 사이는 좋은데요……."
은근히 신경을 쏟았던 탓일까, 한 번 시작된 말은 쉬지 않고 쏟아졌다. 며칠 전부터 보인 리우의 이상행동을 나열하는 리테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하다못해 얘기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흐음."
아스카는 그런 리테의 사정을 가만히 곱씹더니, 대뜸 물었다.
"두 사람이 몇 년 정도 알고 지냈다 했지?"
"음, 그게… 올해로 대략… 10년쯤 된 것 같아요."
"그래?"
10년이라는 얘기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진다.
10년. 10년이라. 가만히 중얼거리던 입이 멈추고.
"내가 얼마 전에 들은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들은 얘기요?"
뭐지? 싶은 찰나, 아스카가 리테에게 제안했다.
"나랑 잠깐 어디 좀 가볼래?"
“신생제 15주년 기념으로, 장인이 제작한 만병통치 하이포션을 단돈 1000길에 판매합니다!”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마련되어 있어요, 좋은 추억 만들고 가세요—!”
“안에 자리 없으니까 밖에서 기다리세요! 밀고 들어오셔도 못 앉혀드립니다. 계속 그러시면 불멸대에 신고할 거에요!”
울다하의 장터 앞은 곳곳에서 찾아온 객의 발길을 잡느라 시끌벅적했다. 어딜 가도 빈 가게가 없었고, 온통 줄을 선 손님으로 가득했다. 사막의 장사꾼들은 이 바닥을 주름잡아온 노련함을 살려 돈을 쓸어모았다. 심지어 사파이어 길에 한 자리 얻지 못한 보부상은 아예 노점을 차려 천막 아래서 길거리 음식을 만들어 사람을 받기까지 했다.
“와, 오랜만이다.”
리테는 새삼스러운 풍경에 감탄하며 스쳐가는 행인을 가볍게 피했다. 그 사이 더 왕성해진 축제가 리테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그녀가 신생제의 울다하를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단지, 몇 년 전 신생제를 즐기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이 난리법석을 마주한 뒤로 한동안 이 시기에 울다하를 피한 탓에 세월의 변화가 낯설 뿐이었다. 축제 분위기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 빛의 전사 이름값이 올라 여기저기서 자신을 발견하곤 일대에 소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무명 모험가일 때가 좋기도 했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가 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더 눌러 썼다. 울다하는 나나모 폐하의 독살 미수 사건 이후로 특히 리우와 자신의 인상착의가 자세히 알려진 도시라 자칫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생길지도 몰랐다. 이제 적대감은 없겠지만… 빛의 전사를 모르는 사람도 드물 테니 이 모험가 가득한 시장에서 정체가 드러나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이쪽이야, 이쪽. 여기 좀 비켜주세요! 사람 지나갑니다—!”
아스카는 리테를 데려오고부터 곧장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발디딜 틈도 없어보이는 길 사이를 뚫고 가는 모습이 불멸대 대위를 방불케 했다. 혹시 아스카 씨는 거주 구역에서 가게를 차리기 전에 이름 날리던 모험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기세였다.
“아스카 씨, 어딜 가는 거예요?!”
“곧 알게 될 테니 조금만 참아 영웅님!”
“으앗! 그냥 리테라고 불러주세요!”
아스카가 목적지도 얘기해주지 않은 채로 리테를 끌고 왔으니, 그녀가 이렇게 묻는 것도 당연했다. 당당한 영웅 언급에 리테가 화들짝 놀라며 화제가 바뀌었다. 넉살 좋은 이웃 사장님이 씨익 웃으며 다시 인파를 헤쳤다.
대체 그녀의 목적지가 어디이길래. 분명 ‘그 치유사님이 뭘 하고 있을지 예상이 가’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데려온 건데.
그게 혹시 신생제와 관련이 있나? 예를 들어 리우가 최근 신생제 행사를 돕고 있다든가. 그게 모험가 사이에 퍼져서, 우연히 아스카 씨도 알게 되었다면….
하지만 리우가 굳이 그걸 제게 얘기하지 않을 리가 없다. 둘이서 같이 축제에 참여한 적도 많고, 오히려 그런 거라면 리우가 제게 먼저 제안했을 테다. 이번엔 오랜만에 신생제를 즐겨보지 않겠냐면서. 두 사람의 시작이 모험가였던 데다… 그들은 언제나 일상 속 탐험을 즐기니까.
“으으…. 복잡하게 생각하려니 한도 끝도 없잖아.”
안 그럴 사람이 그러니 더 알쏭달쏭하다. 어떤 이유를 가져다 대도 순 억지 같았다. 자신이 리우에게 어떤 의미인지, 리우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지난 10년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기에, 갑자기 찾아온 새 질문이 껄끄럽고 불편했다. 이제 와서 자신이 믿어온 만큼의 답이 안 나오면 어떡하냐는 불안이 샘솟는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리우는 대개 자신의 제안에 응해주는 역할이었다. 함께 여행하지 않겠냐는 물음과, 언약해달라는 요구와, 같이 싸워달라는 욕심과, 자길 잡아달라는 호소에. 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저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듯 먼저 피하고 거리를 두는 게 낯설다. 이제 이 세상에서 리우는 너무 당연한 제 사람이 되었는데. 그가 제게 속하지 않으려는 느낌이 들어 울적해진다.
“저기다.”
이러다 초일류 광부라도 되는 게 아닌가 싶던 차, 아스카가 리테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여전히 가라앉은 속을 애써 일으키며 그녀가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도무지 이 축제를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아스카 씨가 뭘 ‘들었는지’ 정도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분명 그게 치유사님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아스카가 가리킨 방향에는 유독 인파가 붐볐다. 두 사람은 관광객의 흐름을 따라 야외 전시장처럼 꾸며진 메인 홀에 발을 들였다.
“‘신생제 상징물 콘테스트’?”
“그래. 지금 여기에 전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모험가들이 모여있거든.”
의기양양하게 말문을 연 아스카가 이어 설명했다. 신생제 15주년을 기념하고, 세계가 멸망을 뛰어넘어 평화의 시대에 접어든 것을 축하하고자 울다하에서 유난히 크게 이벤트를 열었다던가. 최근 몇 년 사이 왕성해진 올드 샬레이안이나 라자한, 갈레말드와의 교역을 더욱 장려하기 위해 나나모 울 나모 폐하께서 친히 기획부터 운영까지 관장하고 있다고.
좋은 일이네. 속으로 생각한 리테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듯 척 보기에도 거대한 작품이 여럿 올라가고 있었는데, 다들 어찌나 열정이 대단한지 이 소란 속에서도 집중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저기 저건 울다하인 것 같고. 이건… 언약식장인가?’
구역을 나누어 전시된 출품작은 확실히 이 규모를 증명하듯 하나하나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개중엔 마더 크리스탈과 행성 하이델린, 위성 달라가브를 닮은 구조물로 추정되는 미완성품도 있었다. 게다가 목재, 석재는 물론, 얼음 샤드와 크리스탈을 활용한 빙정까지. 리테는 아주 간만에,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생각이 나서 조금 웃었다.
거기서도 가끔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싶은 유적을 탐방하곤 했는데. 사실 그녀를 포함한 대다수 학생은 멋진 문화재를 향한 관심보다 선생님 몰래 즐기는 수학여행 진실게임이 더 즐거웠지만.
그렇게 리우 찾기를 잠시 잊고서 대규모 이벤트 구경에 정신 팔리기를 잠시. 아스카가 그런 리테를 톡톡 건드리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소리를 높였다.
“장난 아니지? 이게 다 나나모 폐하께서 건 1등 보상 때문이야. 우승 상품이 무려…—,”
“어, 어어?!”
하지만 그녀의 말은 리테에게 미처 다 닿지 못했다. 때마침 리테가 익숙한 검은 귀를 발견한 탓이었다.
못해도 천 번은 넘게 본 저 뒷모습.
분명 자신의 언약자, 세리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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