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를 느끼기까지
생일 축하해 마후유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들린다. 아직 1월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온도는 적당히 따뜻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은 그러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넓어 보이는 공간에 양손으로 팔을 쓸어내렸다.
이제 막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세카이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기로 정하고 나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언타이틀을 재생했다. 나의, 우리의 마음에서 피어난 노래가 울리며 강렬한 빛이 나를감싼다.
눈을 감았다 뜨면 세카이의 풍경과는 다른 생김새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세카이에는 끝없는 공허와 철골 구조물만이 존재했을 텐데 지금 보이는 것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숲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곳곳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빛 조각들로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열어보면 여전히 언타이틀이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원래 세카이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우선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했다. 여기 혼자 있으면 모두 찾아오기 힘들 테니까.
천천히 걸어가면 잔디가 사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걸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숲에 다시 현실로 돌아갔다 와야 할까 싶었을 때 근처 수풀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수풀 뒤로 가보니 작은 동물들이 모여있었다.
"앗, 누가 왔어!"
모여있는 동물들은 강아지였다. 모두 4마리로 각각 검은색, 노란색, 갈색, 회색의 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연두색의 별 모양 브로치를 차고 있었다. 방금 말을 한 건 노란색 강아지였다
"무슨 일 있니?"
곤란해 보이는 모습에 말을 걸자면 검은색 강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푸른색 눈이 하늘에 비쳐 밝게 빛났다.
"그게… 악기를 옮기고 있었는데 어디가 걸린 건지 움직이질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각자 하나씩 악기를 들고 있었다. 기타, 키보드, 베이스. 그리고 돌아보면 숲 바닥에 놓여있는 드럼이 보였다. 옮겨야 하는 게 저거인 걸까.
"내가 한 번 봐도 될까?"
"아, 네! 물론이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럼에 가까이 다가가면 가장 큰 드럼 받침대부분에 풀이 묶여있는 게 보였다.. 이것 때문인가? 별로 찾기 어려운 곳이 걸린 건 아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손을 조심스레 엉킨 부분을 풀어냈다.
"이러면 됐을 거야."
"우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겠어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차례대로 꾸벅 인사를 하는 강아지들을 보다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을 했다.
"혹시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까?"
내 말을 들은 강아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강아지가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저희는 모르지만… 아마 종달새들이 알고 있을 거예요. 항상 하늘을 날아다니니까요. 여기서 앞쪽으로 쭉 가시면 종달새가 사는 곳이 나올 거예요."
그러면서 앞발로 한쪽을 가리켰다. 어딜 봐도 똑같은 숲으로 보였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그럼 나는 가볼게."
"네, 조심히 가세요."
"또 만나요!"
강아지들의 인사를 받으며 길을 나섰다.
등 뒤에서 강아지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
말해준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니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니 하늘색의 종달새가 나뭇가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을 닮은 빛을 띠는 새는 민트색의 클로버 장식을 머리에 하고 있었다. 종달새는 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나를 눈치채고는 노래를 멈추고 말을 걸어온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노래를 참 잘 부르네."
"후후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야?"
"아! 맞다!"
"응?"
하늘색 새는 나무에서 내려와 내 앞에 앉았다. 눈높이를 맞추려 쪼그려 앉으니 새가 총총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게… 원래는 꽃과 나무 열매를 모아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길을 잃어버렸어. 노래를 부르면 다들 찾아와주지 않을까 해서 부르고 있던 건데…"
"그렇구나…"
주변을 둘러봐도 나와 하늘색 새 외에 다른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돌아가는 길 주변에 기억나는 부분은 없을까?"
이 숲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겨서 특징적인 풍경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살아온 새에게는 다른 풍경이 보일지도 몰랐다.
"음… 글쎄 특이한 모양의 나뭇잎이 날아가는 거랑… 보라색 빛무리가 보였어."
나뭇잎이야 지금 보이는 것만 해도 전부 다르게 생겼고 빛무리는 어디든 떠다니고 있는데.
"그렇지! 내가 여기까지 올 때 보라색 꽃을 따라왔어. 그 꽃은 한 줄로만 피어있어서어서 길을 찾기 쉬우니까 꼭 보라색 꽃 주변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했거든."
새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곳보다 꽃들이 많이 보이는 걸 알 수 있었다. 새가 앉아있던 나무 밑에는 작은 열매와 꽃들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있었다.
꽃을 자세히 보니 선명한 보라색 꽃이 일렬로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새의 것으로 보이는 바구니를 들고는 새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아마 내가 길을 알고 있는 거 같아. 괜찮다면 데려다줄게."
"! 고마워!"
내 손에 올라온 새가 바구니를 든 손 쪽으로 옮겨갔다. 보라색 꽃들을 따라가다 보니 점점 꽃들이 늘어났고 커다란 꽃밭에 도착했다. 꽃밭 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그 안에서 세 마리의 또 다른 새들이 날아왔다.
세 마리의 새들은 주황색, 파란색, 분홍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깃털과 비슷한 색의 클로버 장식을 달고 있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걱정 많이 했어!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음부터는 둘이 조를 짜서 다녀오도록 하는 게 좋겠다."
가까이 날아온 새들은 하늘색 새에게 다행이라는 말을 전했다.
"응! 이분이 데려다줘서 다행히 잘 찾아올 수 있었어."
"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친구가 무사할 수 있었어요."
"...나는 별거한 게 없는걸."
"아니에요, 많은 도움이 됐어요."
"네… 분명 혼자였으면 또 한참을 찾아다녀야 했을 거예요."
"아…"
하늘색 새는 길을 자주 잃어버렸었나 보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은 맞출 수 있게 됐지."
"시간?"
"헉! 그… 그게…"
"조금 있으면 식사 시간이었거든요.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당황한 듯한 주황색 새의 말 뒤로 파란 새가 말했다.
"아, 그렇네. 괜찮으면 같이 먹고 가지 않을래?"
하늘색 깃털의 새를 제외한 새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음… 글쎄, 나는 여길 나가서 만날 사람들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안될 거 같아."
"아쉽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같이 먹자."
"그래."
새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가는 길을 물어봤다.
"그런데, 혹시 숲에서 나가는 길을 알고 있을까? 너희들이 알고 있다고 들어서."
"아! 그런 거라면 저쪽의 붉은색 꽃을 따라가면 돼요! 가다 보면 나무들이 우거져서 어두운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안내해 줄 동물이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고마워. 그럼 나는 가볼게. 다음에는 길 안 잃게 조심해.
"응! 또 봐."
손을 살짝 흔들면 새들이 날개로 마주 인사해 주었다.
붉은 꽃은… 저거려나. 넓은 잎이 특징적인 붉은 색 꽃을 눈으로 좇아갔다.
꽃을 따라 걸으면 꽃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붉은 꽃이 자라있는 간격도 점점 넓어져 갔다. 더 이상 따라갈 꽃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주변이 울창한 나무에 가려져 어두워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꽃의 색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어디선가 불빛이 나타났다. 작은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어두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반딧불이 비치는 곳을 눈으로 좇아보니 움직이는 형체가 보였다.
"앗! 왔나 봐!"
자세히 보니 네 마리의 고양이들이 커다랗고 평평한 나무그루터기에 모여있었다. 각각 밝은 갈색, 검은색, 주황색, 푸른색 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분홍색, 청록색, 주황색, 파란색의 링을 앞다리에 장식하고 있었다. 저 고양이무리가 새들이 말한 동물인 걸까?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여기 사는 동물들이니?"
"아, 네! 저희는 여기서 동물들을 모아공연하고 있어요.."
갈색 고양이가 입을 열자 뒤에서에서 검은색 고양이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귀나 꼬리 끝이 푸른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별 모양 장식을 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다들 좋아해 주거든요!"
"뭐, 아직 만족하려면 멀었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다 같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그러고보니 고양이들이 앉아있는 그루터기가 무대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은 조명 역할을 해주는 걸까.
"그런데, 혹시 이 숲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너희한테 물어보면 된다고 들었거든.
"그건…"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죠!"
"...응?"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돌려보내는 건 안될 거 같아요."
차례대로 검은색, 주황색 고양이가 말을 마치자 푸른색의 털을 반반으로 가지고 있는 고양이가 어떤 물건을 내밀었다.
"...마이크?"
"저희와 노래 대결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노래 대결을?"
의아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대결을 요구하다니. 받은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어두운 곳에서 봐도 마이크의 닳은부분이 눈에 띄게 보였다. 이만큼 열심히 연습했다는 뜻이겠지. 그런 이들이 나에게 정말로 좋은 대결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거 같았다.
"나는 노래를 별로 불러본 적이 없어서 너희가 만족할 만한 노래는 부를 수 없을 거야."
"그… 그래도 듣고 싶어요!"
"…내 노래를?"
"네! 노래는 많은 것을 알려주니까요."
갈색의 고양이가 떨리지만 강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지 않다면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궁금하지 않으세요? 본인이 어디까지 부를 수 있는지."
주황색 고양이가 말했다.
별로. 라고 대답하면 실망하려나. 이 고양이들과 나는 기반부터가 달랐다. 감정호소도 도발도 내 안에서 열정을 끌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고양이들의 눈은 노래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냈다.
" 그러면… 조금만 불러 볼까?"
"...! 감사합니다!"
"그럼 저부터 시작할게요!"
별장식을 한 고양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으로나 왔다.
검은 고양이의 노랫소리는 크고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뒤이어 다른 고양이들의 노랫소리가 겹쳐 더욱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잘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조금 작다 싶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입을 열면 음정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째서인지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고양이들은 즐거운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같이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꽤 잘 부르시던데요."
"...너희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그런 거치곤 음정이나 박자도 정확하던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 즐거웠고요!"
싱긋 웃는 고양이에 마주 웃어주었다.
"나가는 길을 찾는다고 하셨죠. 반딧불이 하나를 데려가세요. 길을 안내해 줄 거예요."
주황색 고양이가 말을 마치자 반딧불이 하나가 내 눈앞에 날아왔다. 인사하듯이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럼 나는 가볼게."
"안녕히 가세요!"
작게 손을 흔들고 앞장서 가는 반딧불을 보며 따라갔다. 고양이무리에게서 멀어지면서 점차 밝아지는 숲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정말 나갈 수 있는 거겠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시간에 걸음이 빨라진다. 이미 25시는 지났을 텐데, 다들 기다리고 있으려나. 지각하면 에나가 화를 내겠지. 옆에서 미즈키가 말릴 테고, 진정되면 카나데가 새로운 곡을 들려줄 거야.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을 떠올린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적어지니까, 빨리 가야 하는데…
눈치채보면 반딧불이는 없어져 버린 다음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틈에 놓쳐버렸나 보다. 어떡하지. 반딧불이는 숲의 곤충이니 알아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다시 고양이들에게 돌아가기엔 시간이 더 늦어질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데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울고 있어요?"
"응…?"
내가 울고 있나? 손으로 눈가를 쓸어봐도 물기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분홍색 다람쥐가 작은 열매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지 않은걸."
몸을 숙이며 웃어주자 다람쥐는 희한한 소리를 냈다.
"히익…! 하… 하지만 슬퍼 보였는걸요…"
"…내가?"
딱히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다람쥐를 계속 말없이 바라보자 아! 하는 소리를 낸 다람쥐가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슬플 때도 화가 날 때도 웃게 되는 공간을 알아요! 이쪽이에요!"
하고 쌩하니 달려가는 다람쥐를 어차피 나갈 방법도 모르니 따라가 보기로 했다.
*
다람쥐를 따라 도착한 곳은 커다란 공터였다. 나무, 잔디마저 없는 넓은 땅 한 가운데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가 보였다.
"얘들아! 손님을 데려왔어!!"
분홍색 다람쥐가 손을 흔드는 무대 방향을 바라보면 노란색, 녹색, 보라색의 다람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털색과 비슷한 빛깔의 리본을 목에 매고 있었다.
"재료를 모아오랬는데 관객을 데려왔네."
"응! 이 사람이 화-안 하고 웃을 수 있으면 좋겠거든!"
"그렇대도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데려오면…"
"아니! 진정한 스타란 무방비 상태에도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겠지!"
노란색 다람쥐는 작은 몸집에 비해 유난히 큰 목소리가 났다.
"물론 우리의 스타는 그렇겠지만 지금은 다음 공연 준비로 빠듯한걸."
"아…크흠… 그렇지 미안하군."
"…나는 괜찮아. 생각해 줘서 고마워."
미안해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은 나가는 길을 알고 있을까?
"저기… 혹시 말인데 이 숲에서 나가는…"
"혹시!"
길을 물어보려는 나의 말을 보라색 다람쥐가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져 바라보면 다람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왕 오신 거 부품 모으는 걸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부품?"
"아아- 실은 우리가 조금 있다가 쇼를 할건데, 그 쇼에 사용할 장치준비가 덜돼서 말이야."
보라색 다람쥐의 말을 노란색 다람쥐가 이어받았다.
"그래, 괜찮다면 장치에 사용할 재료를 모으는 걸 도와줬으면 고맙겠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네 쌍의 시선이 느껴진다. 묘한 이질감에 눈을 깜빡이고는 입을 연다.
"뭘 찾아오면 될까?"
"이쪽으로 와보세요."
보라색 다람쥐를 따라 간 곳은 무대의 뒤편이었다. 여러 열매와 나뭇조각들이 널려있는 모습은 마치 겨울잠을 위해 만들어놓은 식량창고 같았다.
"이 열매와 나뭇가지들을 주워 와주세요. 일부러 꺾지는 마시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어와주시면 돼요."
가져와 달라고 한 열매는 아까의 분홍색 다람쥐가 들고 있던 그 열매였다. 재료를 모으러 다니고 있던 거구나.
"제가 같이 갈 거예요!"
어느새 따라온 분홍색 다람쥐가 말했다. 이런 재료들로 뭘 만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하고 수긍했다.
"그럼,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네! 따라오세요!"
신난 듯이 폴짝거리려 뛰어가는 다람쥐를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면 아까 봤었던 열매가 열려있는 덤불이 가득 보였다. 다람쥐는 덤불을 보자마자 뛰어나가 잔디 위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거예요!"
"나한테 줘. 내가 들고 갈게."
"네! 감사합니다!"
다람쥐 손에 있던 열매를 내 손에 받아 들자 확연하게 작아 보였다. 다람쥐들끼리 했다면 하나씩 옮기느라 오래 걸렸을 일인듯했다.
이만하면 됐을까 싶었을 때 다람쥐도 이만 돌아가자는 말을 꺼냈다. 돌아가는 길엔 주운 재료들과 함께 다람쥐를 손에 들어 올려 걸어갔다.
"그런데, 죄송해요… 웃게 해드린다고 했는데."
"응?"
"도움만 받아버렸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웃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들은 말이지만, 이 아이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빤히 바라보면 다람쥐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얼마 뒤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따가는 꼭 웃게 해드릴 테니까요!"
"이따가?"
"헉! 어… 아, 다, 다 왔네요. 얼른 가요.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응 알았어."
돌아가면 다람쥐들이 보인다.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회의를 하는듯하던 세 마리의 다람쥐들은 우리를 발견하곤 인사를 건네왔다.
"도와줘서 고맙군! 이 정도면 일정에 맞출 수 있겠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그러고 보니, 이 숲에서 나가는 방법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죠?"
보라색 다람쥐는 그렇게 말하며 뒤쪽에 두었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펼쳐진 종이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지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부터 밖으로 나가는 길이 표시돼 있는 지도예요. 별 모양으로 표시된 곳으로 가시면 돼요."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로 가리킨 곳은 지도상에서 숲 바깥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지도를 받아 들고 조심히 접어 손에 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저희야말로 도와주셔 감사해요."
보라색과 초록색 다람쥐가 차례로 말했다.
"나도 별거 아니야. 쇼… 성공했으면 좋겠네."
"물론 성공할 거다! 기대하고 있으라고!"
왜 내가 볼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다람쥐들도 화답해 왔다.
"또 봐요!!"
숲속에 작고 귀여운 외침이 울렸다.
*
알기 쉽게 정리돼 있는 지도는 초행길인 나도 헤매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고요한 숲에 다시 사박거리는 잔디 소리만이 울렸다.
거의 다 왔나 싶을 때 고개를 들자 나무 뒤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숲의 경계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눈앞에 빛이 비쳤다.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눈을 감았다 뜨면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색색의 장식으로 꾸며진 공터는 마치 파티장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 보이는 커다란 테이블에는 하얀색, 갈색, 분홍색인 세 마리의 토끼가 앉아있었다.
무의식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의자를 꺼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요란스러운 폭죽 소리가 사방에서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생일 축하해!""
숲에서 봤던 동물들이 하나 둘 씩 주변에 모여들었다. 모두 나를 보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강아지들은 악기연주를, 새들은 춤을, 고양이들은 노래를, 다람쥐들은 쇼를. 각자 준비해 온 듯한 공연을 하나씩 보여준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깜짝파티. 가끔 보이던 수상한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나면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오늘이 누구 생일이었던가?"
이 말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
"후유… 마후유! 일어나봐!"
"...에나?"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무채색의 익숙한 세카이가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들도.
"나 참… 이런 데서 자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마후유, 많이 피곤해?"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멍하니 말을 듣고 있다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괜찮아. 신곡 데모, 듣고 싶어."
"아…"
"마후유, 잠깐 눈 감아볼래?"
"?"
의아함을 가지고 눈을 감자 나의 손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맞잡은 손이 이끄는 곳으로 걸어가자, 이제는 눈을 떠도 된다는 말이 들렸다. 언제부터인지 눈을 가리고 있던 누군가의 손이-아마도 미즈키일거라고 생각했다각했다.- 떨어져 나간다. 보이는 것은 작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케이크와 과자들, 조촐한 리본 장식이었다.
""생일 축하해, 마후유.""
아
"...나 오늘 생일이었구나."
"에에? 몰랐어?"
"곧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깜빡했어."
"나 참… 당사자가 생일을 잊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테이블 쪽을 바라보면 세카이의 버추얼 싱어들또한 전부 모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 같이 꾸민 거야. 다들 많이 도와줬어."
라고 말하며 버추얼 싱어 쪽을 바라보는 카나데에 저절로 미쿠에게 시선이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어주는 미쿠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 자, 이제 앉자, 케이크 커팅식 해야지!"
미즈키의 손에 떠밀려 다 같이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으면 어쩐지 좁은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많아졌구나."
"응? 마후유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손에 쥐어진 플라스틱 칼을 케이크에 대고 누르면 크림과 시트가 잘려 나간다. 그 속에서 세카이에 퍼지는 건 케이크의 단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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