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無題6

흑성

"난 처음이었는데. 책임져 줄 거죠?"

처음 만난 그 날 몸을 겹치고 일어나 내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이었다. 당돌하게 웃으면서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책임질 거란 생각은 단 1mm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는 그런 목적으로만 만나는 사람이 있는 이들도 많다고 하고, 애초에 전 날 처음 만난 사람이 그렇게 말해봤자 누가 진심으로 들을까.

"그래요. 책임 질게요."

…그런 사람이 여기 있었네. 웃으며 말하는 눈색도 머리도 새까만 그 남자를 보며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난 농담이었는데. 이제와서 농담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할 것 같아, 웃으며 잘 부탁한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일이 왜 이렇게 꼬였지?

그 때부터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휴학을 한 채로 여행을 다니던 상태였기에 일행이 한 명 정도 늘어난다고 해서 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밤하늘을 보는 것은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이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 동행자가 생긴다는 것은 나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이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해결이 가능했다. (정말로!) 여자 혼자 다니면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도 쉬웠는데, 그가 함께 있으니 어쩜 이렇게 편할 수가 있는지! 될 수만 있다면 평생 같이 다니고 싶을 정도로 그는 굉장히 좋은 여행 파트너였다.

그렇게 다니며 서로 말도 놓고, 호칭도 서서히 바뀌어갔다. 나는 그 사람을 오빠라 부르며 조금씩 말도 놓기 시작했다. 서로 장난도 치며 툭툭거리다 같이 웃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면 다닐 수록 그 사람이 점점 좋아져갔다. 취미도 취향도 이해해주고, 얘기를 들어주기도 잘하고. 이래서 동기 애들이 연상을 좋아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모든 연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유독 그러는 것이겠지. 항상 다정하고 친절하고…. 이런 사람이면 연애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다 연애를 하게 되고 나서도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다. 사소하게, 손을 잡고 다닌다던가 몸을 겹치는 날이 좀 더 늘었다던가…. 아니, 늘진 않았나? 어쨌든 딱 그 정도의 차이였다. 오빠는 여전히 다정했고 친절했고…. 화도 잘 내지 않았다. 왜지? 나를 그냥 어린애로 보고 있나?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라 조금 뚱해질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오빠는 그만큼 다정했다.

여행을 마치고 복학을 하면서 오빠와 동거를 시작했다. 어차피 졸업 논문만 작성해서 제출하고 통과하면 졸업이었으니 집과 대학의 거리는 상관 없었다. 교수님 죽어버려, 하며 책상에 고개를 쳐박고 우는 소리를 낼 때면 오빠가 토닥여주며 다정히 달래주었다. 진짜 너무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해? 진짜, 완전 너무해.

근데 사람이 아닐 줄은 몰랐지……! 이건 아니지 않아?!

집 안에 있는 검은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며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대책을 찾고 있었다. 아니 근데 애초에 사람 집에 호랑이가 왜 있어. 문도 다 잠겨있었을텐데, 뭐가 난리가 났던 흔적도 없었는데. 오빠는 어디 간 거야? 문 단속을 안 했나? 아니, 애초에 여기에 호랑이가 왜 있냐구…! 야생동물 그쪽에 전화를 해야하나? 119가 우선인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으니 호랑이가 냅다 제게 달려들어 제 입을 막았다. 공격 당한다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 슬쩍 눈을 떴을 때 있던 것은 제 애인으로 같이 살던 오빠였다.

"……? ……? ??? ??????"

"잠깐, 잠시만요.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오빠가 왜 거기서 나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최대한 들은 것을 정리하자면 애초부터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천계… 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곳에는 오빠와 같이 동물이나 영물로 변하며 인간의 모습도 있는 존재가 있는데 그들을 신수라 한다고 했던가. 어쨌든 오빠가 그런…… 그런 거라는 것 같았다. 잠시만, 그럼 여태 애취급 했던 것도 그런 거야? 그렇게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무래도 나이차가 너무 심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나 뭐라나……. 이게 말이 되냐고. 도저히 현실감이 없는 얘기에 볼까지 꼬집어보기도 했다. ……아픈 걸 보면 현실이 맞는 것 같았다.

나 그럼, 인간이 아니라 그, 그…….

신수.

그래요, 신수. 신수랑 사귀고 있던 거에요?

내 질문에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들킬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었다. 믿기지 않아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것도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니 좀 가라앉은 것 같…기는 무슨!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이건! 끙끙거리며 이마를 짚고 있으면 걱정스레 바라보는 오빠의 모습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든 아니든, 저 사람은 이미 내가 오래 알고 있던 사람임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내가 아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애초에 전부를 다 내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뭐어,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인간이든 신수든 무슨 상관이냐 싶기는 했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한 오빠가 맞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오빠였다. 다정하고 친절하며 화도 잘 안 내는 바보 같은 내 애인. 그 때 그렇게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 이제는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은 무슨 장난을 쳐볼까. 입을 맞추고 도망가면 냅다 잡아서 똑같이 입을 맞춰주겠지? 자기 전에 올라타서 누워볼까? 아니면 오늘은 예쁘게 차려입고 수제 요리를 해줘볼까. 작게 키득키득 웃으며 이것저것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매일매일이 즐겁기만 해서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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