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샤 회지 내용

30507자

소녀는 그리다니아의 한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전혀 닮지 않았던 소녀는 쉽게 가정에서 도태되었다. 소녀의 부모는 소녀를 방치하고, 학대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를 괴롭혔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살이 된 소녀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부모를 피해 숲으로 달아났다. 다행히도 자신은 잘 먹고 자라지 못해 몸집이 작았었고,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기 수월했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는 소녀를 찾지 못하였고 엄한 곳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한참을 숨어 눈물을 흘리는데,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어린 미코테 한 명과 커다란 몸집의 휴런 여성이었다. 그것이 스승, 테누반과의 첫 만남이었다.

 

소녀, 페테시아 루누는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눈을 떴다. 어쩐지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과거의 꿈을 꾸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건너편에 있는 상인과 백발의 소녀와 소년을 한 번씩 힐끔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상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괜히 누군가가 말 거는 것은 사절이었다. 한참을 덜컹거리는 마차에 불편해하며 생각했다. 내가 왜 그리다니아로 향하고 있는가. 사정은 일주일 정도 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달에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고 붉은 유성들이 떨어졌다. 테시아는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 죽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아니라 스승님이 계셨더라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절망할 틈 따윈 없었다. 다시 얻은 기회였다. 더는 빛나지 않는 소울 크리스탈을 손에 쥐고 병사들의 대피를 도왔다.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했다. 저 괴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전에. 대피를 도우던 테시아는 이상한 에테르의 흐름을 감지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루이수아가 서 있었고, 불안함을 감지한 테시아는 다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한 사람은 무섭다. 루이수아가 그랬다. 테시아는 넘치는 불안감을 애써 집어넣은 채로 루이수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각박했다. 루이수아가 뒤돌아 웃어 보이며 시야가 바뀌었다. 테시아의 손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숲속에 풀썩 소리를 내며 넘어질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커다란 나무들과 수풀만이 가득했다. 익숙했다. 동시에 낯설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테시아에게 무언가가 속삭였다.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네? 놀라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들려오던 목소리는 자신을 탓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기력했던 과거를 떠올린 테시아는 모르도나를 나와 성 코이나크 재단을 향해 걸어갔다. 풍맥은 열려있고, 날아서 가면 더 일찍 도착하겠지만 그녀는 날아가는 것보다 걸어서 가는 것이 더 좋았다. 재단으로 향하는 이유는 제7 재해 이후로 나타난 크리스탈 타워에 관한 연구를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이런 게 자신이 하는 일이었으니까. 테시아는 성 코이나크 재단에 도착해 책임자를 찾았다. 책임자로 보였던 람브루스는 자신은 책임자가 아니며 책임자는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그쪽도 꽤 자유로운 영혼인가 보군. 허탈하게 말한 테시아는 람브루스에게 부탁을 하나 들었다. 에테르 모래를 가지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려운 것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지정된 장소로 갔다. 도착한 곳에는 이미 누가 왔다 간 듯 에테르 모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둘러봐도 소용없어! 네가 찾는 에테르 모래는 이미 내가 챙겨왔거든. 아무리 찾아도 부스러기 하나 나오지 않을 테니 포기해. 그 대신 다른 에테르 모래의 위치를 알려주지. …그건 이크살 족의 손에 들어갔어. 보아하니 크리스탈을 정화하는 데 쓸 모양이던데? 갖고 싶으면 빨리 가보는 게 좋을걸! 안 그러면 또 나에게 뺏길 테니까! 네가 어떻게 손에 넣는지 기대하고 있겠어!”

 

…뭐야? 테시아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의문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리를 떠 이크살 족이 있는 검은 장막 숲을 향해 갔다. 다행히 먼저 에테르 모래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주섬주섬 챙겨 가지고 가려던 순간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나 다 봤어! 너 대단한 녀석이구나! 거침없이 적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 어찌나 용감한지…… 넋 놓고 보느라 가져갈 생각도 못 했네. 이걸 어쩌나~ 좋아, 그 에테르 모래는 네가 가져가. 아, 그리고 선물을 준비해놨어. 거길 돌아다니는 놈들이 밟아 뭉개기 전에 빨리 가지러 가라고!”

 

목소리가 알려주는 곳으로 가보니 어떤 물건이 있었다. 그 물건을 들어 올리니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헤헤, 어때? 놀랐어? 우르드의 선물에 있던 돌을 갈아 만든 에테르 모래다. 내 작은 성의니까 잘 넣어둬. 아, 널 놀리려고 그런 건 아냐.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양보하는 거야. 나는 사람이 만드는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거든. 그중에서도 특히 너처럼 강한 녀석이 만드는 역사를 좋아하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멋진 활약 보여달라고! 그럼, 또 만나자, 모험가!”

 

목소리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테시아는 순간 무엇이 지나간 거지 싶었지만, 원하던 에테르 모래는 모두 손에 얻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성 코이나크 재단으로 돌아갔다. 재단의 사람들은 에테르 모래를 가져온 테시아를 반겨줬고, 테시아는 웃으며 모래들을 건넸다. 의문의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할까 했지만, 굳이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악의는 없어 보였고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빅스와 웨지였다. 시드와 빅스와 웨지, 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는지 회포를 풀었고 빅스의 알라그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시드는 이곳에서 얻은 기술은 자신을 위해 쓸 생각은 없다며 웨지에게 말을 걸었다.

 

“웨지, 우리 사훈이 뭐지?”

“네, 넵! 그, 그러니까……… ‘기술은 자유를 위해서’……?”

“맞아. 우리는 결코 인간을 위협하는 기술을, 제2의 알테마 웨폰을 만들어서는 안 돼.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해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봉인할 거다.”

“제법 멋진 말을 하는데 그래. 인간의 역사를 움직인 건 항상 그런 강한 의지였지.”

“이런…… 이제야 오셨습니까. 대체 연락도 없이 어디서 뭘 하다 오신 겁니까?”

“그야 물론 열심히 ‘에테르 모래’를 찾고 있었지! 웬 재밌는 녀석이 있길래 줘버렸지만 말이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테시아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붉은 머리에 붉은색과 청록색의 눈. 남성 미코테 치고는 꽤 다부진 몸. 그리고 귀엽게 생긴 얼굴. 테시아는 꽤 흥미를 느끼며 붉은 머리의 미코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테시아의 시선을 느끼고는 마주 보며 웃었다. 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었다.

 

“안녕! 약속대로…… 또 만났지? 모험가! 내 이름은 ‘그라하 티아’다. 샬레이안의 발데시온 위원회에서 나왔어. 나도 이번 조사에 참여한다! 아차,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이름이 뭐야?”

“……페테시아, 루누.”

“잘 부탁한다, 페테시아. 좋았어! 드디어 ‘노아’가 활동하기 시작하는군!”

“……노아?”

“그래. 우리 크리스탈 타워 조사단의 이름이야. 이제 성 코이나크 재단 단독으로 하는 일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그냥 조사단이라고 하면 나중에 들었을 때 멋있지 않잖아~ 그래서 알라그 제국의 대마도사 ‘노아’의 이름을 빌렸지!”

“그럼 이제부터 우리 ‘노아’는 방어 체계를 파괴하고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한다. ……다들 준비됐나?”

“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시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부르면 시키는 것을 할 뿐이었다. 고명하신 학자님들이 할 일을 굳이 모험가인 내가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준비가 마무리되었는지 그라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시아와 그라하, 그리고 기술자들이 크리스탈 타워 내부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람브루스의 지도하에 재단을 지키기로 했다.

 

내부로 들어가서는 일사천리였다. 빠르게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키고는 전진하려던 차에 시드가 막아섰다. 타워 내로 진입하는 것은 테시아를 비롯한 모험가들에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라하는 놀라 무슨 소리냐 외쳤지만 각자 잘하는 일을 하자며 경험이 많은 모험가들에게 타워의 공략을 맡기고 자신들과 샬레이안의 현자인 그라하 티아는 타워에 대한 조사를 맡자는 것이었다. 그라하는 뚱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다며 테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명 ‘고대인의 미궁’의 공략을 잘 부탁한다며 끝나고 연락 달라고. 테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워의 공략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공략은 어렵지 않았다. 그야 테시아는 카르테노 전투를 겪은 모험가였고, 다른 모험가들 또한 경험이 많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도 꽤 많았으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라하에게 연락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일행들은 사당으로 들어왔다. 그라하는 수고했다며 크리스탈 타워 발굴사에 네 이름이 길이 남을 거라며 어깨를 토닥여 왔다. 새침하게 손을 쳐낸 테시아는 사당에서 만나 싸운 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드가 내부의 방어 체계에 대해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곡도를 가진 몸집 큰 사내와 싸운 이야기를 하니 그라하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티탄’이란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시드는 그것만으로 알 수 있냐 물었더니 그라하는 알라그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인연이 있다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다들 많이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적당히 넘기고 좀 더 내부를 살펴볼 뿐이었다.

 

크리스탈 타워 중심부인 시르쿠스 탑을 발견한 일행들은 다시 조사지로 돌아갔다. 앞으로 할 일도 많으니 잠시 쉬며 작전 회의를 할 참이었다. 그라하는 테시아에게 수고했다며 피곤하겠지만 보고까지 잘 부탁한다면서 다시 어깨를 토닥였고, 테시아는 이번에도 손을 쳐내며 람브루스에게 보고할 준비를 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테시아는 자리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있었다.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어차피 그들도 그걸 바라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난 당분간 여행이나 다녀야겠다. 오랜만에 몸 좀 풀고 다음번엔 꼭 크리스탈 타워에 들어갈 거야. 말려도 소용없어. 무용담은 직접 봐야 제맛이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도 시드를 도우셔야지요. 아니면 지금까지 당신이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 위원회에 보고해도 상관없단 걸로 알겠습니다.”
“…………저기, 내가 더 높은 사람이거든요? 칫, 알았어. 어차피 내가 페테시아를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진지했던 대화에서 바보 같은 대화로 넘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던 테시아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귀를 쫑긋 세우며 그라하를 바라봤다. 그런 테시아를 보며 웃음을 흘린 그라하는 쉬는 동안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조심하라며 말을 해주고는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이번에도 쳐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테시아는 멈춘 손을 조용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필요하면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서.

 

한참을 자기 관리에 힘썼는데도 부름이 없기에 테시아는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사지에 도착해 람브루스를 찾은 테시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전이 없는 거냐고. 람브루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도저히 시르쿠스 탑으로 침입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라하 티아가 끼어들며 말했다.

 

“기억나? 크리스탈 타워 앞에 침입자를 섬멸하는 ‘여덟 검사의 앞뜰’이 있었잖아? 구조는 다르지만 시르쿠스 탑 입구도 그런 방어 체계가 단단히 지키고 있거든. 이것들이 얼마나 성가신지 몰라! 나랑 시드가 이것저것 시험해보고는 있지만 도저히 답이 안나와.”

“……어떻게든 해주십시오,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며 그라하에게 답한 람브루스는 다시 테시아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며, 자신들은 고대 기록을 좀 더 샅샅이 뒤져봐야겠다고 말하는 때였다.

 

“그럼 그 방어 체계, 우리가 좀 봐도 될까?”

“……뭐야?”

“그렇게 노려볼 것 없어, 현자님. 우리는 당신들…… 노아 편, 이거든.”

 

나는 우네, 옆에 있는 음침한 녀석은 도가. 우리는 고대 알라그 문명을 연구하고 있어. 발데시온 위원회의 명에 따라 조사를 도우러 온 거야. 우네의 말에 람브루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세상엔 보기 드문 고풍스러운 이름이지만, 위원회 내에선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현재 본부였던 발 섬이 사라져 경황이 없을 텐데, 이곳으로 보냈다고? 자신들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에 도가는 연락이 엇갈렸을 거라며 너희는 자신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였다. 그라하가 자신의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주변인들이 괜찮냐 물었고, 그라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괜찮다며 손을 털어냈다. 우네와 도가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놀라워라. 자세히 보니 오른쪽 눈이 우리랑 같네?”

“…같아? 너희도 ‘홍혈의 마안’을 가졌다는 말이야!? 이 눈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가르쳐줘! 피처럼 붉은 이 마안은 이미 멸망한 알라그인의 특징…… 하지만 나는 이 눈을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았어. 그런데 같은 형제라도 마안이 나타나는 건 딱 한 사람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

“……미안하지만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눈과 알라그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뿐. 네가 그 인연에 이끌려 여기에 왔듯이, 우리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왔다……. 그러니 우리를 믿어주지 않겠는가?”

“……미심쩍긴 해도 조사에 끼워주자. 돌려보낸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흠……. 당신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자네들의 신원은 나중에 위원회를 통해 확인하겠네. 그래도 괜찮겠지?”

 

도가와 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람브루스는 두 사람을 고문으로 받아들이고 방어 체계를 보여주고 의견을 듣기로 했다. 테시아에게 동행을 요청했고, 할 게 없던 테시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라하 또한 재밌는 현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함께한다고 했다.

 

시르쿠스 탑 입구 앞에 도착하니 머리를 싸매고 낑낑거리는 시드가 있었다. 테시아는 그가 뭐 마려운 개 같다고 생각했다. 강아지는 아니다. 시드는 나이도 많고 강아지 정도로 귀엽지도 않으니까. 아무튼 소리 없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니 놀라 일어난 시드가 테시아를 바라봤다. 언제 왔어? 아까. 기척 좀 내! 둘의 대화를 듣던 그라하가 중재를 했다. 자자,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그러면 안 되지. 라고 말하며 두 사람을 소개했다. 간단한 소개를 끝내고 현황을 듣는 그라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도저히 방법을 찾지 못해서였다.

 

그때였다. 우네와 도가가 문을 향해 다가갔다. 시드는 소용 없다며 사람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우네가 웃으며 설마 이런 가냘픈 팔로 문을 열려고 하겠냐고 했다. 도가 또한 우리가 여는 것이 아닌, 알아서 열리는 거라며 우네와 도가가 함께 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문이 빛나더니 열리기 시작했다.

 

그라하는 바보같이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어 다시 앞을 바라봤다. 다들 놀라 우네와 도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만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 네로였다. 네로는 오자마자 시드와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지만 끼워달라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정보도 제공했다.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들 네로를 데리고 조사지로 돌아갔다.

 

도가와 우네의 이야기를 들은 조사지 사람들은 테시아를 바라봤다. 잔데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한다고 한다. 테시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도가와 우네는 감사를 전했다. 그라하는 혼란스러운 모양이었지만 테시아는 굳이 그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가 이겨내길 바랐으니까. 그리고 그라하는 테시아의 믿음대로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길 택했다. 그다운 선택이었다.

 

시르쿠스 탑 안에 들어가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시황제 잔데와 싸워 이기고, 어둠의 세계에 들어가 요마와도 싸웠다. 물론 테시아를 비롯한 모험가들은 승리했고, 다행인지 뭔지 네로도 구출했다. 그렇게 모든 게 마무리되고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줄 알았다.

 

“크, 큰일입니다! 람브루스님, 빨리 오십시오! 그라하 티아 님이…… 시르쿠스 탑에서 장치를 정리하던 조사원들을 죄다 밖으로 내쫓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대체 왜 그런……!”

 

그라하 티아가 시르쿠스 탑에서 정리하던 조사원들을 전부 내쫓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라하의 반응의 람브루스를 비롯한 주요 인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크리스탈 타워로 향했다. 물론 테시아도 포함이었다. 꽤 다급한 표정이었다. 타워 앞에 도착해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다가오지 마! ……그 문은 곧 닫힐 거다.”

“그라하 티아……. 갑자기 조사원을 쫓아내셨다는 말에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크리스탈 타워를 봉인하려는 거지요? 연락이라도 한마디 주셨으면 좋았겠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서두르실 만도 하지요. 자, 어서 이쪽으로 오셔서 봉인을…………….”

“……미안. 난 그쪽으로 못 가.”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봉인을 안 하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문제라도……!?”

“우네, 도가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 방식대로 사명을 다할 뿐이야.”

“하지만 지금 에오르제아에서 크리스탈 타워의 힘은 너무 거대해. 이 탑이 진정 올바르게 쓰이려면 고대 알라그 문명과 맞먹는 기술력이 필요할 거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

“……그래, 시드 말이 맞아. 문명의 진보를 기다리다간 우네와 도가의 피도 사라져서 크리스탈 타워를 영영 제어할 수 없게 되겠지. 하지만 잔데가 그랬던 것처럼…… 안에 사람이 든 채로 크리스탈 타워를 봉인한다면 어떨까?”

“자네, 설마………!”

“난 크리스탈 타워와 함께 잠들겠어.”

“바보 같은 소리!”

 

테시아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지만, 마지막 문장만은 확실하게 들렸다. 바보 같은 소리였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를지 모른다. 그런 시간을 혼자 감내하는 게 꼴 보기 싫을 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일그러진 테시아의 표정을 보고 그라하가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알라그를 따라잡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그 날까지 나와 이곳의 시간을 멈출 거야. 내가 눈을 뜨면 다시 크리스탈 타워를 움직일게. 미래로, 또 미래로 전해진 희망의 증인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빛의 힘을 전하기 위해! 이게 내 운명이야. 그리고…… 노아 사람들에게 한 가지 부탁할게. 앞으로 나아가서, 미래를 개척해줘. 지나간 슬픔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너희뿐이야.”

“…………이미 마음을 정했나 보군……. 미래를 개척하라 이거지. 거참 막중한 임무로군. ……좋아.”

“페테시아…….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네 이름부터 찾아볼게. 네 이름은 분명 역사에 남아 밝은 빛으로 날 이끌어줄 거야. 그럼 난 이만 쉬러 갈게……. 생각난 게 이것저것 너무 많아서 좀 피곤하네! 너희가 만든 역사 너머로…… 이 희망을 전하고 올게.”

 

그렇게 그라하는 뒤를 돌아 타워 내부로 들어갔고, 타워의 문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닫히기 시작했다. 모두가 뒤돌아 조사지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두를 때 테시아만이 홀로 뒤를 돌아보며 멈춰 섰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하듯 고개를 숙이더니, 강한 의지를 품은 표정과 함께 고개를 들어 뒤돌아 사람들을 따라갔다. 그가 말한 대로, 그를 이끌 밝은 빛을 만들기 위해…….

 

페테시아 루누는 사랑을 모르는 자였다. 스승인 테누반은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줬지만 그게 뭔지 가르쳐주진 않았다. 언젠간 너에게 알려줄 사람들이 나타날 거야. 뭐든지 알고 있는 스승님은 그 말만 남긴 채 그렇게 떠났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그런 자들은 없었고, 살아오면서 사랑은커녕 혐오만 늘어날 뿐이었다. 당신이 틀린 거예요, 스승님. 저는 사랑을 할 수 없어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크레드, 위리앙제, 야슈톨라, 알피노, ……알리제까지. 민필리아를 잃고 책임감만으로 있던 새벽의 모두가 눈앞에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을 때, 테시아는 인정했다. 틀린 건 자신이라고. 나는 이들을, 새벽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감정이 들 리가 없다고……. 한 일주일 정도를 미친 사람처럼 지냈던 것 같다. 타타루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안 했을 거다. 그가 바라는 대로 새벽을 깨우기 위한 조사가 시작됐다. 크리스탈 타워의 협간을 조사하던 테시아는 어떤 물건을 발견했고, 그와 동시에 낯선, 그러나 가슴이 아릴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흐려지는 시야로 타타루가 보였다. 다녀올게. 닿지 않을 말을 전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알 수 없는 공간에 와있었다. 온통 보라색인 식물들, 빛으로 가득한 하늘. 경계하며 앞으로 걷던 테시아는 상인으로 보이는 자를 만났다. 그에게 들은 얘기는 제법 놀랄 법했다. 세계에 어둠이 사라진 지 100여 년이 되었단 이야기였다. 상인은 놀란 테시아에 술을 권했고, 테시아는 거절하고 다시 갈 길을 갔다. 길을 가다 보니 관문 같은 곳이 나타났다. 저곳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는 순간 어느 여성이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당신은 누구시죠?”

“…그건 내가 할 소린데.”

“허락받은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 허락해주던지…. 둘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여성의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살펴본 테시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건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이라 그랬다. 당연히 낯선 곳이니 낯선 사람들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테시아는 로브로 얼굴을 가린, 아마도 남성 같은 자를 바라보며 두 눈을 끔벅였다.

 

“수고가 많네, 라이나. 저자는 내 손님이니 이제부턴 내가 모시도록 하지.”

“하아…. 역시 당신의 손님이었나요, 수정공. …마음대로 하세요.”

“……?”

 

처음 보는 자의 손님이라니, 그렇다면 저자가 날 여기로 부른 장본인인가. 목소리가 익숙한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협곡에서 들은 목소리와 로브를 쓴 사내의 목소리는 닮아있었다. 테시아는 경계심인지 적대감인지 모를 감정을 들고 사내의 안내에 따랐다. 인적이 드문, 아무도 없는 숲 공간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도 모를 곳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시아는 로브를 쓴 사내를 바라봤다. 이제 말해봐, 여긴 어디야? 테시아의 물음에 사내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제1 세계이고 테시아를 소환한 자가 수정공이라 불린 로브를 쓴 사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른 새벽의 혈맹을 소환한 것도 자신이라 했다. 영혼뿐이지만…. 테시아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수정공의 멱살을 잡았다. 수정공은 당황했지만, 딱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네가 애들을 건드린 거야, 감히?”

“…원래는 자네만 부르려 했지만… 여러 번 시도 끝에서야 부를 수 있게 된 거라네. 그들은 그 과정에서 불려왔을 뿐이야.”

“그렇다면 돌려보내.”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의지로 이곳에 있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뭐?”

 

수정공은 위리앙제가 이 세계로 넘어온 장면이라면서 설명해주었다. 원초 세계에 제8 재해가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그로 인해 새벽도, 자신도, 모두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테시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중얼거렸다. 그런 거라면…. 이내 표정을 풀고는 수정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야, 어쩔 수 없지. 그 애들이 돕는다면 나도 도울게.”

“………고맙네. 그럼 마을… 크리스타리움으로 안내하지.”

“……크리스타리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받으며 향한 곳에는 거대한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타워가 있었다. ……그냥 크리스탈 타워잖아. 이게 왜 여기에…. 속으로 생각한 테시아는 뭔갈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수정공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너 그라하 티아지?”

“………그게 누구지? 잘 모르겠군.”

“……진짜 아니야?”

“음……. 내가 불러온 자 중에는 그런 자는 없었어.”

“……이상하네…. 크리스탈 타워에 있는 건 그라하 뿐일 텐데…”

“타워 내에 사람은 없었다네.”

 

그래? 그럼 됐어.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떼며 말했다. 수정공은 로브 아래로 테시아를 빤히 바라봤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어있는 눈빛이었다. 수정공은 바로 감정을 갈무리하고 크리스타리움의 안내를 시작했다. 중요 지점의 담당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을 거라며 말해주고는 만나보고 성견의 방으로 오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테시아는 수정공의 지시대로 세 군데 정도를 돌아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성견의 방으로 돌아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원초 세계에서는 찰나인 시간이지만, 제 1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라케티카 대산림에서 야슈톨라가 말한 죄식자의 에테르… 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별거 아니라 치부하고 넘겼다.

 

그래서는 안 됐다. 좀 더 알아보고, 그를 추궁했어야 했다.

 

사건이 터진 건 이노센스를 토벌한 이후였다. 테시아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대죄식자의 에테르를 견디지 못하고 대죄식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다들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만 보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수정공이었다.

 

수정공은 평소와는 다른 말투로 그들을 배신하는 듯했다. 테시아의 몸속에 있던 에테르를 앗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새벽은 막으려 했지만, 그것을 위리앙제가 막았다.

 

수정공을 향해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후드가 벗겨졌다. 테시아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라하 티아… 결국 너였구나. 너는 계속 내 곁에 있었던 거구나….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당장 달려가 그에게 꿀밤이라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강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수정공이 쓰러지는 장면이 보였다. 그 뒤에 있는 건….

 

정신을 차리니 펜던트 거주관이었다. 속이 굉장히 울렁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침대에 엎드려 잠든 린을 조심히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 했다. 조심히 일어난 게 무색하게도 테시아는 린을 흔들어 깨웠다. 함께 성견의 방으로 향하기 위해.

 

성견의 방에서 모두에게 듣기로는, 자신에게서 에테르를 앗아가는 수정공을 에메트셀크가 뒤에서 총으로 쏘고 그를 데려간 모양이었다. 템페스트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말과 함께. 테시아는 만나면 똑같이 쏴버리겠다 다짐하고 템페스트로 찾아갈 방법을 찾았다.

 

“그럼 어서 템페스트로 가자.”

“어딘진 알아요?”

“그럴 리가.”

“위치도 모르면서 가자고 하는 거야?”

 

테시아는 산크레드를 노려봤다. 장난칠 때 아냐. 알아. 야슈톨라는 바보 같은 이야기 그만하고 어딘지 알고 있으니 따라오란 말을 남기고는 방을 먼저 나갔다. 테시아는 산크레드를 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

 

***

 

템페스트로 가는 길은 정말 고됐다. 알피노, 위리앙제, 테시아는 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그들을 데리고 물속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템페스트로 간 일행들은 온도 족과 그레놀트의 도움으로 에메트셀크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아모로트…. 에메트셀크가 만들어낸, 고대인들의 옛 도시.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산물. 일행들은 에메트셀크를 찾아 아모로트를 헤맸고, 그 과정에서 고대인들이 맞이했다던 재앙을 봤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이미 멸망한 과거의 산물들. 다시 살려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에메트셀크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의 이름은 하데스. 14인 위원회의 에메트셀크 좌에 오른 자. 쉽지 않은 상대였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테시아는 대죄식자의 에테르가 몸에서 역류하는 기분을 느끼며 대검을 들었다.

 

전투는 쉼 없이 돌아갔다. 하데스 역시 이기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하지만 위리앙제가 준비한 백성석과 현자들의 공격, 그리고 테시아의 에테르 도끼로 소멸하고 만다. 테시아는 자신의 몸에서 대죄식자의 에테르가 소멸한 것을 느끼고는 사라져가는 하데스를 바라봤다. 지켜보겠단 말을 남기고 사라진 하데스 뒤로 쓰러져있는 수정공을 발견한 테시아는 그에게 달려갔다.

 

수정공은 지팡이로 겨우 몸을 지탱하며 일어났다. 눈앞에는 무서운 표정의 테시아가 있었고, 뒷걸음질 쳤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테시아는 다짐대로 그에게 꿀밤을 먹여줬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그를 안았다. 돌아온 걸 환영해, 그라하 티아. 수정공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테시아에게 들릴 정도로만 답했다. 다녀왔어….

 

그렇게 모두가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테시아 자신은 언제든지 원초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새벽은? 이젠 그들이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일행은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아가는 도중, 엘리디부스가 아르버트의 육체를 뺏고 귀찮게 하긴 했지만 테시아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르버트는 소중했고 고마운 동료였지만, 새벽만큼은 아니었다.

 

새벽을 원초 세계로 돌려보낼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들의 혼을 매개체에 담아 옮기는 것이었다. 그 매개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거지만…. 수정공과 야슈톨라, 위리앙제라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테시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돌이 죄식자들 토벌에 나섰다.

 

소울 사이펀이 완성되었다. 새벽을 옮길 수 있는 도구였다. 테시아와 수정공은 엘리디부스와의 마지막 싸움을 이겨내고 마주 보며 웃었다.

 

“다음 모험에는 나도 데리고 가줘, 테시아.”

“그래. …라하. 다음 모험은 함께 하는 거야.”

 

그라하 티아는 웃으며 후드를 다시 썼다. 자리에서 일어나 타워의 꼭대기, 한 가운데에 서서 지팡이를 내리 쳤다.

 

나의 의지와 육체는 이곳에 남아 그들을 지킬 거다.

 

참으로 그다운 말이었다. 테시아는 빠르게 크리스탈화 되어가는 그라하에게 다가갔다. 소울 사이펀을 이용해 그의 영혼을 옮기고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봤다. 한평생을 자신과 세계를 위해 희생한 남자의 마지막은 아름답지만 초라해 보였다. 테시아는 차가워진 몸을 강하게 껴안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과거는 뒤로한 체 앞으로 나아갈 차례였다.

 

원초 세계로 돌아온 테시아는 현인들부터 깨웠다. 그들이 재활하는 동안 테시아는 크리스탈 타워로 향했다. 잠자는 고양이를 깨울 시간이었다.

 

“오늘 운세는 어때, 위리앙제?”

“흠…. 새로운 인연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새로운 인연? 알 것 같아, 테시아?”

“…응. 곧 올걸.”

 

테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꼬리, 붉은 두 눈동자까지. 테시아는 빙그레 웃으며 손 인사를 했다.

 

“어서와, 라하. 옷 잘 어울리네.”

“으응? 고마워, 테시아.”

“둘이 뭐야?”

“새로 새벽에 들어오게 된 그라하 티아야. 다들 잘 대해줘.”

“듣고 있어?”

 

알리제의 물음에 테시아는 못 들은 척하며 라하를 소개했다. 야슈톨라와 산크레드는 웃고 있었고, 위리앙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정리하고 있었다. 알리제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고, 그때 테라스의 밑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세요! 히포그리프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뭐?!”

 

알리제는 외침을 듣자마자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달려갔고, 알피노는 다급하게 난간으로 뛰어가 알리제의 이름을 외쳤다. 이미 저 멀리 가고 있는 알리제에겐 들리지 않았겠지만. 결국 알피노는 테라스를 나가 알리제의 뒤를 쫓았고 그라하와 페테시아도 서로 마주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웃으며 알피노의 뒤를 쫓았다. 평화로운, 모두가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

 

새벽은 샬레이안 본국으로 가기로 했다. 철학자 의회의 푸르슈노의 행동이 수상하고, 좀 더 상세한 연구를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일행은 배를 타고 샬레이안으로 향했다. 긴 시간이었지만 배 안에서는 꽤 즐겁게 지냈던 것 같다.

 

테시아는 라하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금방 깨버렸지만. 라하는 깨워서 미안하다며 곧 도착할 것 같으니 밖에 나갔다 오라고 권유했고, 테시아는 받아들였다. 피곤해 보이는 표정으로 선실 밖으로 나간 테시아는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고 귀를 팔랑였다.

 

뱃머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 여성이 있었는데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여성이었다. 내가 그를 어디서 봤더라…. 그 여성은 테시아를 돌아보며 뭐라 말을 했지만, 테시아에게 닿지 못했다. 테시아가 다가가자 여성은 사라졌고, 테시아만 바보같이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깼어? 거기서 뭐 해.”

“어…, 방금 여기 있던 여성분 못 봤어?”

“여기 너밖에 없는데….”

 

소름 끼치는 소리하지 말라며 산크레드가 자신의 양팔을 비볐다. 하여튼 엄살은…. 테시아는 한심한 표정으로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배가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올드 샬레이안. 그들의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샬레이안에 도착한 새벽 일행은 입국부터 문제가 많았다. 현인들과 알피노, 알리제는 문제없이 들어갔지만 전 푸른 용기사였던 에스티니앙과 테시아가 입국 절차에서 걸려버린 것이다. 에스티니앙은 전 군인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테시아는 왜? 의문을 가진 모두에게 입국 관리자가 말했다.

 

“페테시아 루누. 입국 기록이 있네요?”

“…어릴 때 왔었는데. 문제가 되나?”

“흠…. 문제를 일으킨 기록은 없네요. 통과시켜 드릴게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라하는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올드 샬레이안에 온 적 있어?”

“……어릴 적에. 잠깐.”

“왜 얘기 안 했어! 소개해주려 했는데!”

“지리까지는 몰라…. 진짜 잠깐 왔다 간 거란 말이야.”

 

테시아의 해명에 알리제는 찌푸린 미간을 풀었다. 그럼 됐어. 샬레이안에 대해 내가 설명해줄게. 라며 자신 있게 말하는 알리제를 보며 테시아는 옅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자 금방 정색했지만 말이다.

 

테시아는 새벽에게 올드 샬레이안의 이곳저곳을 소개받았다. 자신들이 도착한 지식인의 항구부터 시작해서, 발데시온 분관, 장터, 마법 대학, 그 옆에 있는 도서관과 마지막으로 르베유르 저택까지. 저택에서 만난 아멜리앙스는 쌍둥이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테시아의 기력을 쪽 빼놓고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테시아는 지친 표정으로 쌍둥이들을 데리고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물론 인사도 잊지 않고.

 

발데시온 분관에 모인 새벽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샬레이안에 남아 철학자 의회가 꾸미는 일을 알아내는 것, 그리고 사베네어 섬에 나타난 탑을 공략하는 것. 물론 테시아는 두군데 다 참여를 해야 했다. 힘들지 않겠냐는 라하의 질문에 테시아는 웃으며 라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떻게든 하겠단 뜻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테시아는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냈다. 탑을 공략해 사람들을 구해내고, 철학자 의회가 꾸미는 일을 파헤치기 위해 라비린토스를 뛰어다녔다. 그러다 걸려서 재판으로 넘어갔지만, 루이수아의 친구인 몽티세뉴의 도움으로 관대한 처사로 풀려나게 된다. 테시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선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새벽에게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왔다. 에오르제아 총사령부의 사절들이 찾아온 것이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멜위브 제독을 찾아오라는 말을 남긴 사절들을 보며 새벽은 서로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쨌든 부탁을 받았으니 찾아갈 차례였다.

 

“오랜만이군, 새벽의 혈맹.”

“오랜만입니다, 멜위브 제독님. 어쩐 일로 저흴 부르셨는지?”

“음. 갈레말 제국의 갈레말드의 조사와 생존자의 구조를 돕는 것을 함께 해주었으면 해서 불렀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가야죠. 그렇지 않나, 모두?”

“전 안 갑니다.”

 

테시아의 발언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당황한 듯한 제독과 새벽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테시아가 말했다.

 

“나는 제국이 싫습니다. 그들을 돕기는 더더욱 싫고요. 그들을 도울 바에야 혀 깨물고 자결하겠어요.”

“테시아!”

“그렇게 외쳐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라하. 하지만, 만약 싸워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구조나 조사에 참여하진 않을 거예요. 필요해지면 부르세요.”

 

테시아의 완강한 말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고, 테시아는 그런 일행들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제독실을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국 이야기만 나오면 역겨워서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감히 날 죽이고, 내 스승까지 죽게 만든 가증스러운 것들. 침략을 일삼고 자신들과 다른 인종들을 야만족이라 하대하는 것까지. 페테시아 루누는 그런 점들이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도울 바에야 자결하겠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테시아가 제국에 가게 된 건 바브일 탑을 공략할 때였다. 바리스 황제는 괴물이 되어있었고, 파다니엘은 조디아크를 소환할 준비가 끝나있었다. 불쌍하진 않고 안타까운 바리스 황제. 평생을 침략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죽인 말로가 저렇다니, 이래서 사람은 업보를 쌓지 말라고 하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린 테시아는 바리스 황제였던 것을 쓰러트리고 정상으로 올라가 달로 향하는 기구에 몸을 실었다.

 

달에 도착한 테시아는 달의 감시자라는 존재와 마주했다. 그는 조디아크에게 묶인 고대인들의 사념을 풀어달라는 부탁을 했고, 테시아는 얼떨결에 조디아크와 싸우게 됐다. 조디아크의 안에는 파다니엘이 들어가 있었고, 테시아는 솔직하게 약간의 사심을 담아 공격했다. 테시아는 아젬의 크리스탈을 이용해 아젬의 조각들을 모아 조디아크를 쓰러트렸다. 인제 어쩌지 하고 있는 그때 조디아크의 몸에 들어가 있던 파다니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마지막 조롱을 들으며 테시아는 다급하게 그 장소를 떠났다.

 

세계의 멸망을 막고 있던 조디아크가 죽었다. 당연하게도 세계에는 멸망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다시 지구로 돌아가 새벽과 합류한 테시아는 멸망의 일환으로 나타난 마수들을 처리해달라는 라자한의 태수, 브리트라의 부탁을 듣고 라자한으로 향한다. 테시아는 과거의 그 재앙들이 생각났다. 그때와는 다른 느낌의 공포를 느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테시아와 새벽은 마수들을 처리하며 나아갔지만 야수화는 끊임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태수인 브리트라가 움직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더더욱 불안감을 느꼈고 그 때문인지 마수화가 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나선 사람은 그라하 티아였다. 그는 제 1세계에서의 경험을 살려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테시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마수들을 베며 생각했다. 라하도 많은 일이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테시아를 보며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테시아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위신수들을 처리한 새벽은 주막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그때 그라하 티아가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며 1세계, 크리스탈 타워에 있는 엘리디부스와 논의를 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야슈톨라는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자연스레 시선은 테시아에게 쏠렸다. 아무래도 1 세계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것은 테시아 뿐일 테니까.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긴 것 같아 미안해.”

“……됐어. 다녀올게. 급한 일이니까.”

“조심해, 테시아.”

“마치 연인을 보내는 것 같은 표정이네요, 그라하.”

“놀리지 마, 야슈톨라….”

 

테시아는 귀를 팔랑이는 그라하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하고는 자리를 떴다. 한시가 급했다. 텔레포로 1 세계로 이동한 테시아는 성견의 방으로 들어가 엘리디부스를 찾았다. 엘리디부스는 테시아의 이야기를 듣고 과거에 테시아를 만난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타워와 자신의 힘으로 테시아를 엘피스, 고대 세계로 보내주겠단 이야기를 한다.

 

얼떨결에 과거 세계로 오게 된 테시아는 그곳에서 하데스와 휘틀로다이우스 라는 자들을 만난다. 하데스는 물론, 휘틀로다이우스 또한 본 기억이 있었다. 하데스의 도움으로 사역마인 척한 테시아는 그들을 따라다니며 정보를 캐내기 시작한다.

 

테시아는 그들과 함께 다니며 하데스의 목적인 파다니엘 후보, 헤르메스를 만나러 갔다. 그의 옆에는 메테이온이라는 푸른 새의 형태를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메테이온은 한 체가 아니었고, 여러 체를 우주로 날려보냈다며, 수치가 나오면 테시아에게도 알려주겠다 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헤르메스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테시아는 베네스라는 여성을 만나게 됐다. 테시아가 미래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베네스는 자세한 사정을 묻고, 14인 위원회인 자신도 들어야겠다면서 하데스도 끼어들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그냥 궁금하다고 끼어들었던 것 같다.

 

사정을 설명한 테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말을 많이 한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모두 지친 표정이었다. 베네스는 의구심을 가졌고, 하데스는 자신이 동포들을 추억하며 아모로트를 만들고 테시아를 불렀을 리가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테시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베네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종말의 이유를 찾을 때였다.

 

헤르메스를 다시 찾아간 테시아와 일행은 메테이온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메테이온이 부정적인 감정에 괴로워하고 있던 것이다. 메테이온은 참을 수 없었는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모습을 감췄다. 뒤나미스로 메테이온과 대화가 가능한 테시아가 주변을 살피며 메테이온을 찾았다.

 

찾아낸 메테이온은 상태가 이상했다. 자아가 여러 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답을 말해야 하는 통제 인격과 답을 말하고 싶지 않은 메테이온의 자아가 부딪히고 있던 것이다. 헤르메스가 답을 청하자, 결국 통제 인격이 나와 답을 고했고 그 답은 다른 별의 생명체들은 이미 멸망했거나 멸망하기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하데스는 메테이온이 종말의 시작이 될 거라 예상하고 헤르메스와 메테이온을 아모로트로 연행하려 했지만 헤르메스는 변신까지 하며 메테이온을 데리고 조물원으로 향한다.

 

테시아와 베네스, 하데스와 휘틀로다이우스는 조물원으로 가 헤르메스를 쓰러트리고 메테이온을 잡으려 하지만 헤르메스의 방해로 메테이온은 우주로 도망을 쳤다. 베네스가 마지막에 추적마법을 걸었지만 말이다. 헤르메스가 일행의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베네스와 테시아는 도망쳐 테시아가 처음에 엘피스에 도착한 장소로 떠났다. 베네스는 테시아를 돌려보내며 자신도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 테니 걱정하지 말란 식으로 말했다. 테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탈 타워로 돌아왔고, 다시 원초 세계로 향했다.

 

테시아는 엘피스에서 있던 일을 새벽 모두에게 전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듣고 추적마법이 걸린 메테이온을 찾는 것과 찾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샬레이안으로 가 쌍둥이의 아버지인 푸르슈노에게 하이델린과 대화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새벽은 우주를 왕복할 수 있는 기체의 축퇴로를 완성하는 조건으로 하이델린을 만나는 방법을 얻기로 하고 알피노는 바로 에오르제아 총사령부에 연락해 축퇴로를 만들 재료를 찾는 것에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일행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아이티온 별현미경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곳에는 리트아틴, 리위아, 일베르드 같은 악연들이 새벽을 가로막지만 파파리모, 문브뤼다, 오르슈팡, …민필리아까지. 그간 자신들이 쌓아온 인연의 덕분에 최하층까지 가는 데 성공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새벽을 가로막은 건 파다니엘, 아몬이었다. 테시아는 지긋지긋한 연을 끊겠다며 싸움에 나섰고, 일행들 또한 테시아의 뒤를 보조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 아몬은 전혀 싸움에 집중하지 못했고, 끝물에 아사히가 나타나 아몬에게 저주를 퍼붓고 함께 사라졌다. 끝까지 짜증 나는 놈들이야. 테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이델린을 만나러 갔다.

 

하이델린은 물었다. 당신의 여행은 좋았나요? 테시아는 말이 없었다. 그에 하이델린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듣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보여주세요. 마지막 시련이었다.

 

하이델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테시아는 그녀를 바라봤다. 인간은 이제 괜찮아, 베네스. 침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이델린은 테시아의 대답에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크리스탈을 연료로 메테이온을 쫓아가세요.”

“……당신은, 괜찮겠어?”

“걱정해주는 건가요? 상냥한 사람. 비록 나는 환생도 못 하고 소멸하겠지만, 제 마음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지킬 수 있기를…….”

 

그렇게 하이델린은 사라졌다. 최후의 고대인이 사라진 것이다. 일행은 복귀 후 레포릿에게 좌표 크리스탈을 넘겼다. 달에서 메테이온이 있는 울티마 툴레까지 워프하기 위한 장치를 전송받아 설치하는 동안 새벽 일행은 각자 마음에 남긴 것들을 처리하고 반드시 승리해서 귀환하자고 다짐한다.

 

테시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음에 남긴 것이 없었다. 아니,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현재 갈 수가 없었다. 카르테노 평원. 자신의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을 잃은 곳. 테시아는 발데시온 분관 휴게실에 누워있다 방주, 마도선 라그나로크가 완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뜬다.

 

엄선된 레포릿 선원들과 8명의 새벽은 야만신들의 도움을 받아 울티마 툴레로 출격한다. 울티마 툴레에 도착할 때쯤 메테이온이 나타났다. 메테이온이 나타나자 일행은 숨을 쉴 수 없었다. 테시아는 흐려져 가는 정신 속에서 산크레드가 메테이온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산크레드는 없었다. 테시아는 동료를 또 잃었다는 생각에 혼란에 빠졌지만, 야슈톨라의 일침으로 정신을 차렸다.

 

“당신이 지금 무너지면, 산크레드와 세계는 누가 구하죠?”

“……!”

“정신 차려요, 페테시아 루누. 싸움은 시작됐으니까.”

 

일행은 마도선을 나와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하는 도중 메테이온이 나타나 이곳은 자신이 발견한 절망한 다른 별의 재현이며, 일행이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에테르가 흩어진 산크레드가 새벽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일으킨 뒤나미스로 인한 현상이라는 걸 알려준다.

 

산크레드가 죽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다들 동요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간다. 일행이 알아낸 것은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은 떨어져 있고 물리적으로는 이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절망으로 가만히 머무르기를 바라는 뒤나미스가 지역을 뒤덮고 있었기에 일행의 앞길이 막혔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이 지역에 있던 용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귀한 체념이라 칭했다. 에스티니앙이 그건 고귀한 체념이 아니라 그냥 포기라 질타하자 어디선가 검은 별 새가 나타나 폭풍을 일으켜 에스티니앙을 감싸 소멸시키고 그의 뒤나미스는 새벽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육체를 버리고 영원을 얻었지만, 우주가 무슨 짓을 해도 끝난다는 걸 알아버려 절망한 이아 족에게는 야슈톨라와 위리앙제가 희생되었다. 오메가가 있던 별의 기계 종족 오미크론은 그라하 티아가 희생되었다. 그라하는 스스로 희생하기 직전, 테시아에게 말을 남겼다.

 

“테시아.”

“…….”

“있지, 먼저 이슈가르드로 가자. 지난번에 에스티니앙을 찾으러 갔을 때는 느긋하게 구경도 못 했으니까. 이번엔 네 추억의 장소를 안내해줘. 그리고… 넌 다양한 모험을 해왔잖아?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모험을 가르쳐줘. 가능하다면 그곳에 직접 가서. 이렇게 같은 시대에 사는걸. 누가 전해주는 영웅담이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라하 티아.”

“마지막으로… 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 대지를 누비고 바다를 건너고, 때로는 유구한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고! ……꼭, 약속이야!”

“라하!”

 

그라하는 그 말을 남기고 소멸했다. 테시아와 알피노, 알리제의 앞길을 열어주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 세 사람은 아무도 없는 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메테이온이 나타나자 알피노와 알리제가 무언갈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테시아는 그들이 뭘 하려는지 알고 막으려 했지만 두 사람의 결연한 눈빛에 말릴 수 없었다.

 

“당신을 또 혼자 둬서 미안해.”

“자네라면 분명…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테시아의 앞길을 열어줬다. 테시아는 수많은 희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지만 그들의 희생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새벽. 반드시 너희를 구할 거야. 다짐하며.

 

테시아는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격려를 들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마주한 메테이온은 이제 너에겐 나아갈 길이 없으니 절망하라 하지만, 테시아는 아젬의 크리스탈로 누군가를 불러냈다.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 였다. 에메트셀크는 창조마법을 사용해 새벽의 뒤나미스와 테시아의 마음을 설계도로 삼아 엮어내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엘피스 꽃이 가득한 들판을 창조한다,

 

엘피스 꽃으로 인해 절망의 뒤나미스가 옅어졌다. 새벽도 싸울 필요가 없었기에 테시아는 다급하게 다시 한번 아젬의 크리스탈을 사용한다. 새벽 일행은 다시 메테이온을 설득해보지만, 혼란을 느끼던 메테이온은 잔해별로 도망쳤다.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는 다시 별바다로 돌아가게 됐다. 에메트셀크는 별바다로 돌아가기 직전 테시아를 도발한다.

 

“바다에 가라앉은 해저 유적에 대해 알고 있나?”

“…뭐?”

“북쪽 비보의 섬은? 신대륙의 황금 도시는 어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남해제도의 잊혀진 무녀상 제사터, 남방대륙의 메라시디아, 거울 세계의 어딘가에 있는 놀라운 문명, 그리고… 에오르제아의 12 주신의 정체에 대한 진실. 궁금하지 않나?“

”…….“

”아젬의 크리스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보고 와야겠지.“

”빨리 가기나 해.“

”잘해보라고.“

 

에메트셀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새벽은 그 둘이 사라진 곳을 빤히 바라보다 잔해별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잔해별로 향한 새벽은 메테이온이 보았던 3개의 별의 멸망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자 메테이온은 자신 안의 멸망한 별들의 마음이 질투하고 있다며 다른 메테이온들과 합체해 종언을 노래하는 자로 변한다.

 

새벽은 어떻게든 싸워 이기려 하지만 막강한 힘으로 밀리고 말았다. 강한 바람에 날아가는 새벽을 보며 테시아는 마도선으로 귀환하는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버튼을 날려 보낸다. 마지막으로 그라하와 눈을 마주치며 웃은 테시아는 시선을 돌려 종언을 노래하는 자를 바라봤다.

 

그는 테시아보고 절망하라고 하지만 테시아는 말없이 종언을 노래하는 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신룡으로 변신한 제노스가 나타났다. 테시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꾸욱 참고 제노스의 도움으로 그의 등에 타 종언을 노래하는 자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테시아는 아젬의 크리스탈로 다른 빛의 전사들을 불렀다. 종언의 결전이 시작된 것이다. 종언을 노래하는 자가 막강한 공격을 하지만, 마도선에 있던 새벽의 기도가 테시아를 지켰다. 결국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테시아였다.

 

종언을 노래하는 자는 다시 검은 메테이온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테시아는 메테이온에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주었고 메테이온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당신도 결국 인간을 싫어했잖아. 그런데 어째서 날 막은 거야?“

”…나는, 그들에게 사랑을 배우고 이상을 배웠어. 그러니까 나는 그들이 사랑하는 세계를 지킬 거야. 죽지 않는 이 몸을 걸고서라도.“

 

테시아의 답을 들은 메테이온은 테시아의 답을 듣고 본래의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그 후 라그나로크에 테시아의 대해 알려주러 떠나고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제노스였다.

 

제노스는 영웅이 아닌 모험가로서 서로 목숨을 건 희열 넘치는 대결을 하자고 부탁하고, 테시아는 받아들인다. 그래, 너와의 악연도 끊을 때가 됐지. 두 사람은 뒤나미스를 불태우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마지막으로 혼신의 주먹질 끝에 제노스가 쓰러졌다. 테시아는 그와 떨어진 곳에서 비틀거리더니 결국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옆엔 숨이 끊어진 제노스가 있었고, 자신 또한 떠나야 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흐려져 가는 정신 속에 손에 무언가가 떨어졌지만, 그게 무엇인지 확인도 못 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떠보니, 눈물범벅의 그라하와 알리제, 알피노가 있었고, 뒤에서 안심하는 다른 새벽들이 있었다. 테시아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혼란을 느끼며 물었다.

 

”뭐, 뭐야…? 여기 어디야….“

”라그나로크 내부야. 정말이지, 혼자 그렇게 싸우는 게 어딨어?! 우릴 보내고 말이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건 그냥 못 넘어가!“

”아, 알리제…. 나 환자인데….“

”감내해요, 테시아. 알리제와 그라하가 걱정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당신이 혼날 짓을 한 건 맞으니까요.“

”내 편이 하나도 없네….“

 

어느새 라그나로크는 아이테리스에 귀환하였고, 타타루의 눈물 섞인 마중 인사를 들으며 새벽은 임무를 마쳤다.

 

이후에 그들은 새벽을 대외적으론 해체하고 민필리아가 세웠을 때처럼 비밀 조직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일단은 각자 흩어져서 활동하지만, 서로가 필요할 때 다시 모이기로 다짐하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부상을 치료하느라 할 게 없던 테시아는 야슈톨라와 알리제를 불러 차를 마셨다. 두 사람 다 바쁘다면서 흔쾌히 와준 것에 감사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그라하가 울티마 툴레에서 함께 모험하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

”으응, 근데 아직 몸이 다 안 나는 것 같다고 나중에 가자 하네.“

”그라하도 그라하지만, 당신도 그를 참 좋아하는 것 같네요.“

”어? 왜?“

”그야, 우리가 같이 모험하자면 슬슬 피할 거잖아요? 부담스럽다고.“

”별로… 그렇지는…“

 

야슈톨라의 말에 테시아는 시선을 돌리며 차를 홀짝였다. 물론 자신이 그라하를 편애하는 건 맞지만 그건 그냥 내가 구해줬으니까 그런, 구구절절 읊는 테시아를 보며 그만하라고 알리제가 입에 쿠키를 쑤셔 넣었다. 쿠키를 오물오물 씹어먹던 테시아가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며 물었다.

 

”…편애하는 게 티나?“

”세상 사람들 다 알고 있을걸. 그라하도 마음이 있던 것 같던데.“

”동경과 사랑은 가장 가까운 감정이죠. 헷갈리기도 쉽고요. 당신도 그를 사랑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왜, 왜 그렇게 생각해? 난 너희를 다 사랑하고 있는걸.“

”그야… 그라하와 있을 때의 당신은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걸요.“

”소…, 그 정도야?“

 

그럼요. 대단하네요. 세계를 구한 영웅을 무해한 소녀로 만드는 것도요. 놀리지 마…. 테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테시아는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그, 그럼 어떡해야 해…? 야슈톨라와 알리제는 서로 마주 보더니 테시아를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의 장난의 시작이었다.

 

”남자들은 평소와 다른 모습의 좋아하는 여성을 보면 좀 더 가슴이 뛰는 법이죠.“

”그래서, 이걸 입으라고?“

”봄처녀 드레스만큼 예쁜 드레스는 없어, 테시아.“

”치마는 좀….“

”어머, 입혀줄까요?“

”…갈아입고 올게.“

 

테시아는 포기한 듯 옷을 갈아입으러 떠났다. 사실 가림막 뒤로 갈 뿐이었지만, 실용성을 중시하는 테시아에게는 드레스는 불편하고 민망스러웠다. 하지만, 너에게 잘 보일 수 있다면….

 

”예쁘네요. 그라하 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홀리겠는데요.“

”정말! 자주 입어, 늘 칙칙하게 검은 옷만 입지 말고!“

”평소에 입던 옷이 편한데…….“

”군소리하지 말고!“

 

알리제의 잔소리에 테시아는 귀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테시아는 평소대로 단벌 숙녀로 살 테고, 알리제도 야슈톨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예쁘게 꾸몄으니, 이젠 상대를 불러낼 차례였다. 테시아는 그라하에게 연락하라는 알리제의 눈총에 어쩔 수 없이 링크셸을 연결했다.

 

”…라하?“

-응, 무슨 일이야, 테시아?

”그으, 같이 샬레이안에서 놀까 하고….“

-응? 갑자기? 안될 건 없지만….

”……지식인의 항구에서 기다릴게.“

 

테시아는 당황해하는 라하와의 통화를 빠르게 끊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연한 표정을 짓는 테시아에게 야슈톨라는 전장에 나가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테시아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알리제와 야슈톨라는 잘하고 오라며 어깨를 토닥여줬고, 테시아는 삐걱거리며 분관 휴게실을 나와 지식인의 항구로 향했다.

 

테시아가 지식인의 항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라하가 도착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그라하를 보며 테시아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라하의 꼬리와 귀가 바짝 세워졌고 테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잡은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 어디가?“

”그냥, 아무 곳이나.“

”으응…?“

”넌 책을 좋아하니까 도서관에 가자. 가서 책을 좀 읽다가 지루해지면 밖에 나와 산책을 하는 거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스트 스탠드에 가서 뭘 먹으면서 별을 구경하자. ……할 얘기도 있고.“

 

그라하의 말을 무시하며 테시아는 빠르게 말했다. 그라하는 여전히 뭔지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따라가며 말했다.

 

”루트가 마치 데이트… 같네.“

”맞아, 이거 데이트야. 그러니까 잘 따라와야 해?“

”……어?“

 

테시아의 발언에 라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테시아를 따라갔다. 이내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푹 숙였다. 테시아는 그런 그라하를 보며 보이지 않게 살짝 웃었다. 역시, 귀여운 남자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서관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 읽을 책을 골라 정자로 나갔다. 테시아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냥 아무 책이나 골라왔다. 라하는… 뭔가 어려운 책을 골라온 것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연구 주제와 관련된 책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집중이 안 되는 상태로 책을 팔랑이며 읽던 테시아는 라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책 읽어?“

”책… 이라기보단 논문에 가까워.“

”무슨 내용인데?“

”음… 감정에 대한 논문인데… 이야기해 줄까?“

”음, 응.“

 

그라하는 귀와 꼬리를 살랑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본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응, 먼저 감정들에 관해 설명하자면… 흔히 심장으로 표출하는 것이 감정이라고 하잖아. 화가 나도, 슬퍼도, 사랑…이나 동경을 해도 박동이 빨라지는 건 심장이라서 그래. 논문 중 53페이지를 보면 대략적으로나마 그래프로 각 감정에 따른 심장 박동 변화가 나와 있는데…“

”……응.“

”그중 가장 큰 유사성을 보인 게… 동경과 사랑이야. 누군가를 본받고 싶은 감정과 곁에서 함께하고 싶은 감정이 가장 쉽게 혼동된단 말이지.“

”…그래?“

”응, 물론 이 외에도 억울함은 분노와 슬픔 사이의 변동을 따라가기도 했고,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이긴 하지만…, 역시 가장 비슷한 건 여전히 사랑이네. 그 내용을 수많은 사건과 가설, 입증으로 써둔 논문이야.“

 

그라하는 설명을 끝내고 테시아의 눈치를 봤다.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고는 생각했지만 테시아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테시아를 본 그라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냐 묻는 그라하에게 고개를 끄덕인 테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라하를 바라봤다. 그래, 이 감정은 사랑이야. 그렇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어….

 

책을 덮은 테시아는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책 돌려놓고, 산책하자. 그라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테시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함께 책을 반납한 두 사람은 분관 근처로 걸어갔고 끝내 지식인의 항구까지 향했다.

 

”슬슬 출출하지 않아? 테시아.“

”배고파? 그럼 라스트 스탠드로 가자.“

 

라스트 스탠드로 향한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별이 잘 보이는, 가장 끝자리였다. 이 정도 거리면 사람들이 우리 얘기는 못 듣겠지…. 만족하며 그라하를 바라봤다. 배가 꽤 고팠는지 입맛을 다시며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귀여워라. 테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라하가 왜 그러냐 물었지만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음식을 시킨 그라하가 할 얘기가 뭐냐고 묻자 테시아는 놀라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조용히 입을 뗐다.

 

”그게, 별건 아니고, 아까 야슈톨라랑 알리제랑 같이 차를 마셨거든….“

”그랬구나. 무슨 일 있었어?“

 

끝까지 자신을 걱정하며 바라보는 그 남자가 너무 좋아서, 테시아는 반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계속 말을 했다.

 

”응, 진짜 별거 아닌데, 별거일 수도 있고. 아까 애들이랑 대화했다고 했잖아? 그냥… 여자애들끼리 하는 얘기니까,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얘기가 나왔거든. 근데, 음, 나는 솔직히 사랑이란 것을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 사랑이란 단어는 내게 많이 무겁고 무서운 감정이니까.“

”…….“

”그런데…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묘한 잠정이 들어서,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마치 새벽의 모두가 1세계로 가면서 쓰러진 순간처럼, 1 세계에서 너를 잠시나마 잃었을 때처럼, 그리고… 원초 세계로 돌아와 너를 다시 만난 순간처럼…. 근데, 슈톨라가 뭐라는 줄 알아? 이게 사랑이래.“

”테시아.“

”내가 새벽을… 너를 많이 사랑하고 있는 거래. 그래서 얘기해주고 싶었어. 사랑한다고. 너를 많이 좋아한다고… 멀리서 너를 볼 때면 네게 달려가 안기고 싶을 정도로, 너를 많이 좋아해.“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의 영웅, 아니, 나의 테시아.“

 

 

라하는 주춤했지만, 안심하기도 했다. 자신과 같은 마음임을 알아서. 이 감정이 동경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어서. 라하는 웃으며 답했다.

 

”나는… 이 감정이 동경에서 끝날 줄 알았어. 항상 빛이 나는 나의 어둠의 전사는 1 세계에서도, 원초 세계에서도 앞으로만 걸어 나갔으니까. 언제나 내가 보는 건 네 뒷모습이었지. 그 자리가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

”아니, 정확히는 그 자리라도 감사했지. 하지만 사람의 감정과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어느 순간부터 함께 걸어 나가고 싶고, 먼저 가서 너를 기다리고 싶어졌어. 그리고 이제는 내 품까지 내어주고 싶어.“

”…라하….“

”…나와 사랑이라는 이 모험을 함께 해줄래? 이 온 마음으로 너를 좋아해, 테시아.“

”…응, 얼마든지…! 내가 별바다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 너 하나뿐일 거야, 라하. 더 이상 내 뒤에만 있지 말아줘. 곁에서 함께 해줘. …내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줘.

 

테시아는 손을 뻗어 라하의 손을 잡았다. 라하는 그런 테시아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고,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뒤에서 눈치만 보던 직원이 슬쩍 다가와 음식을 건넸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손을 뗐다. 음식… 분관 휴게실에서 모두와 먹을까. 라하가 권유를 했고 테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을 불러 포장을 부탁했다.

 

“아, 아직 사귀는 거 아니었어?”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아셨군요.”

“생각해보면 꽤 늦긴 했죠. 다시 만났을 때 고백할 줄 알았는데.”

“……뭐야?”

 

음식을 가져간 분관 휴게실에는 새벽의 모두가 모여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각자 먹을 걸 대충 챙겨온 상태였다. 걱정하며 모두에게 사귀게 되었다고 고백하자,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테시아는 산크레드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뭐야, 우리 빼고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둘 다 티를 그렇게 내는데 자각 못 한 것도 신기해.”

“연구 소재로 괜찮을 것 같은걸요. 나중에 연구하는 걸 도와줄래요?”

“싫어……!”

 

한동안 분관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세계를 구해 낸, 어느 영웅과 그의 반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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