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눈 밖에 난 이야기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나와 히요리가 영문을 몰라 서로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뒤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몇몇 단원들이 나타났다. 내 눈에야 히요리로 보이지만, 아무래도 다른 단원들 눈에는 웬 거구의 남성이 날 넘어뜨린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바짝 경계하며 날 감싸는 단원과 영문을 몰라 어이 없어 하는 히요리 사이를 중재하느라 잠시 진땀을 뺐다. 히요리와 오래 알고 지낸 히비야라도 있었으면 이 사람이 히요리라는 걸 금세 알아챘을텐데, 히비야는 다른 단원들과 함께 쓰러진 히요리를 데리고 먼저 아지트로 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만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 말하는 나조차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눈이 맑아지는 뱀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보여서 뒤쫓았더니, 갑자기 그 남자에게 히요리가 빙의되었다니. 최대한 차분히 말하려고 해도 중간중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뱀에게 죽을 뻔한 것이 한 달도 채 안 되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들 비일상적인 경험이 많다보니 내 말을 의심하진 않았가. 내용이 내용이라 그런지 표정이 하나 같이 굳어버렸을 뿐. 당사자인 히요리는 형형한 눈빛을 감추지도 않은 채 바뀌어 버린 제 팔을 감쌌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논쟁으로 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째서 히요리가 빙의를 한 것인지, 이게 눈이 맑아지는 뱀이 맞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걱정과 우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다다른 결론은 아지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긴 길을 되돌아가며 우리는 그보다 더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무수한 여름을 반복하며 걸어온 길에 무언가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신타로씨의 붉은 눈이 계속 그 흔적을 더듬었다.


검은 색. 그건 태초의 세계와 닮아있었다. 위아래, 시작과 마지막, 나와 상대방 그 모든 게 애매한 곳에 그저 그 붉은 눈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했다. 그것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그 상태가 영원히 유지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붉은 눈은 무언가를 바라고 말있다.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 소원으로 만들어진 무수한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에 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붉은 눈이 나를 보는 일도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대로 잊혀져 사라지는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이 상태를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세계는 잘못되었다. 그릇된 것을 비추고 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설사 모든 걸 뒤섞어 아예 하얀색으로 바꾸어 버린다고 해도.

그러나 모든 노력은 바친 결과는 검은색 뿐이다. 육체도, 자아도, 생명도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다른 이의 것으로 치환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미 존재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죽은 생명이 시체를 남기듯 의미 없는 독백만을 늘어놓으며.

아아. 아무리 바란다 하더라도 그 붉은 눈은 더이상...


"이제 곧 깰 것 같아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마주한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다시금 맞이한 금색 눈과 내 붉은 눈이 마주하자 잠시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눈을 뜨자마자 달려들면 어쩌지 걱정도 했지만, 의외로 그는 결박된 몸과 주위를 둘러보고 큰 미동없이 얌전히 있었다. 온갖 감정이 그 안에서 몰아쳤지만 반항의 여지도 보이지 않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가 빠지기만 기다렸는지 슈우야가 내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지켜주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런 것치곤 잘게 떨리는 손이 애처로워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나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지만 눈의 능력으로 적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덕분인지 생각보단 버틸만 했다. 모두 다 같이 있기도 하고. 잠잠한 반응을 경계하며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신타로씨가 대표처럼 그 앞에 섰다.

"내 예상이 맞았네. 우리들의 능력이 풀리는 조건은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 히요리의 경우에는 직접 자기 자신의 몸을 보면 돌아오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면 내 능력 때문에 밀려난 원래 의식이 돌아올 거고, 그 원래 의식은..."

히요리는 말하다 말고 목을 매만졌다. 하긴 이 더운 여름날 3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없이 옮겨지던 몸이다. 목이 마를 만도. 세토가 자연스럽게 히요리에게 물을 건네는 걸 확인하고 애써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안녕. 눈이 맑아지는 뱀."

"하..."

긍정도 부정도, 하다못해 말조차도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는 뱀이 맞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뱀은 8월 15일에 얽힌 우리들만이 아는 존재. 눈이 맑아지는 뱀이 아니었다면 대체 그게 뭐냐고 묻는 게 보통이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신타로씨가 지난 루트에서 나타난 눈이 맑아지는 뱀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말했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전해받은 두 명, 아야노와 마리도 신타로씨 바로 뒤에서 눈이 맑아지는 뱀과 대치하고 있었다. 항상 잘 웃는 두 사람이 저렇게 누군가를 노려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랜시간 축적된 분노가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체 뭐하러 다시 나타난 거야?"

"몇 번을 다시 오든 상관없어. 난 더이상 두렵지 않아!"

마리가 눈을 부릅 뜨자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한 붉은 빛이 나타났다. 모든 뱀을 다스릴 수 있는 눈을 합치는 뱀, 통칭 여왕뱀. 눈이 맑아지는 뱀도 일단 뱀이니 억누르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가슴 쪽이 뻐근해지는 감각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걸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는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곧이어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목을 긁어내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결국은 실성한 걸까. 아니다. 이건...

"당신은 이미 두려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여왕."

명백한 조소다. 뱀은 멈추지 않고 긴 혀를 놀렸다.

"모른다는 것, 즉 미지는 곧 공포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저를 보는 그 눈! 인간들이 주인이나 여왕을 바라보던 그 눈이니까요. 아아, 말하고 나니 그립군요. 스스로도 누구라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 그렇기에 주인은, 그리고 여왕은 인간들을 피해 숨어 살았죠."

"...시끄러워."

"인간들을 피한다는 건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괴물이라며 공격하고, 죽이고... 설사 사랑하여 함께 있는다 해도 결국은..."

"그만해!"

"떠나가죠. 당신의 아버지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여왕."

마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오늘 낮에 보았던 코자쿠라라는 성만 남은 비석이 떠올랐다. 마리의 아버지. 어머니와 달리 어쩌다 돌아가셨는지 듣지 못했지만,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마리가 어머니와 아지랑이 데이즈에 들어간 것도 100년은 더 지난 일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죽고도 남을 시간이다. 사랑한다 해도 이 수명 차이 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 그 아자미조차도 아지랑이 데이즈까지 만들었다가 실패했으니까.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뱀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삐뚤게 웃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겁니까. 인간들은 당신에게 불행밖에 주지 못해요."

"허세 부리는 건 그쯤하지 그래?"

"...눈을 꿰뚫어 보는 아이."

더이상 들어줄 수가 없어 끼어들었다. 슈우야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길래 안심하라는 의미로 가볍게 토닥였다. 마리 말대로 두렵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워할 만한 이유도 없다.

"너야말로 무서워 하고 있잖아."

내 붉은 눈을 보고 이번엔 눈이 맑아지는 뱀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눈이 맑아지는 뱀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공포였다. 감정을 너머 속마음이나 전후 상황까지는 읽어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 눈은 거짓만큼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무서워 하는 것일까. 아까 뱀이 했던 말을 바탕으로 떠오르는 추측들을 쭉 나열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러다 또 사라지는 건 아닐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뱀의 몸이 약하게 움찔거렸다. 이게 정답이구나. 확신과 함께 결론을 내렸다.

"네 말대로 자신이 스스로도 누구라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서워 하고 있잖아, 지금."

뱀은 침묵했다. 고개를 숙이고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히요리 안에서 지금까지 모형처럼 굳어있던 뱀이 그대로 인간이 되어 나타난 것처럼.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뱀 역시 자신이 왜 사라지지 않고 왜 이 세계에 존재하는지 전혀 모르는 거니까. 그 깊은 숲속에 혼자 있던 걸 보면 당장 우리에게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동안 이 뱀이 한 짓이 있다보니 불안해서 그냥 각자 갈 길 가자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같이 지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나 불안한 부분은 확실히 짚고 가야만 한다. 아직도 몸이 굳은 마리를 내 뒤에 숨기고 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보다 훨씬 큰데도 이렇게 숙여서 눈높이를 맞추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침묵해봤자 네 손해일 뿐이야. 너 스스로도 모르는 존재를 혼자 생각한다고 알 수 있겠어? 네가 아는대로 다 말하도록 해."

"아는대로?"

겨우 말을 하나 싶더니 뱀은 작게 쿡쿡 웃기만 했다. 우리를 죽이려 할 때 광기 어린 웃음과도, 방금 전 우릴 비웃던 웃음과도 달랐다. 허탈하고 공허했다. 마치 빈 깡통같았다. 곧이어 바람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내 눈은 만능이 아니..."

"내가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이곳으로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뱀이 말을 잠시 끊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금색 눈동자에 담긴 나는 겉으로는 침착해보였다. 실제로는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눈에 비친 뱀은 불안할 정도로 평온했다. 모든 걸 다 포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나를 보고 올곧게 의구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나를?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불안함은 말이라는 형태가 되어 나를 찔렀다.

"바로 네 목소리였다. 눈을 꿰뚫어 보는 아이."

"더 들을 것도 없겠어."

"히요리?"

"이 뱀,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해요."

분명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는데, 대답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붉은 눈이 된 눈이 맑아지는 뱀, 아니 히요리는 묶인 몸이 불편한지 잠시 바르작거리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지금 이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의연한 태도였다.

"이 뱀에게 무언가를 묻기 전에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정리하죠? 제가 저를 보자마자 돌아와서 논의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아, 그 전에 이것 좀 풀어주고, 제 몸도 방에 잘 눕혀주시고."

"알겠어, 히요리!"

"지시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구나, 너..."

"그렇지만 히요리 말도 일리가 있어요. 우리끼리도 입장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얘기해봤자 서로 피곤할 뿐이잖아요."

"그것도 그렇지..."

신타로씨가 이마를 짚을 동안, 세토와 히비야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히요리의 지시에 따랐다. 척척 지시하는 히요리만큼이나 저 둘이 움직이는 것도 무척 자연스럽다. 히비야는 그렇다 치고, 세토는 알바 때문에 몸에 벤걸까.

어느 정도 주변 정리가 되자 우리는 또 거실에 모였다. 이젠 10명이 넘는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게 익숙하긴 하지만, 작은 히요리가 있던 자리에 거구의 남성이 있는 게 영 어색했다. 히비야도 옆 사람을 연신 흘끔거리느라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키도도 미미하게 찌푸린 표정으로 주변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그렇군. 그럼 뭐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일단 히요리의 능력부터 할까."

기다렸다는듯 신타로씨가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하얀 종이에 날카로운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치카가 히요리를 보았을 때, 뱀은 분명 모형처럼 아무 미동이 없다고 했지. 그래서 우린 목숨 대신으로 그대로 굳어진 줄로 알고 있었어."

"그런데 오늘 갑자기 제 능력이 발현했고, 거기엔 눈이 맑아지는 뱀이 있었다는 거죠?"

"응, 네 시선이 닿는 곳을 보니까 그곳에 딱 눈이 맑아지는 뱀이 있었어. 아마 그게 능력 발현의 계기가 된 게 아닐까."

"그러고보니 이치카쨩은 그게 눈이 맑아지는 뱀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한 거야?"

"그게... 타이밍이나 생김새 때문에."

코노하씨의 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거기까지 말하기엔 너무 억측이길래 돌려 말했다. 이것만으로도 납득하기엔 충분한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히요리의 능력은 빙의하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아.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하니 딱 이렇게 되던걸."

"원래도 아빠나 코노하의 몸을 제멋대로 썼으니까, 저녀석."

평소처럼 말 톤은 높았지만 슈우야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속일 여유도 없는 걸까. 하긴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부딪혔던 건 그의 조력자로 있어야 했던 슈우야다. 순간 에이토 오빠와 함께 있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속이 쓰려왔다.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텐데... 위로차 몰래 손등을 토닥이니 그제야 슈우야는 날 보고 어설프게 웃었다. 억지 웃음이라도 웃으니 조금이라도 낫다.

"어라, 그럼 눈이 맑아지는 뱀의 능력은 빙의였던 건가요?"

"아줌마, 그날 일 잊어버렸어? 그 뱀이 자기 입으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능력이라 그랬잖아."

"아하하... 그랬던가?"

"히비야 말이 맞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은 뱀들 공통이고, 눈이 맑아지는 뱀은 그걸 위한 지혜를 전수하는 걸로 보여. 그리고 그 기반이 되었던 소원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계속 침묵을 고수했던 마리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대화가 아니라 독백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눈이 맑아지는 뱀은 가장 태초부터 있던 아자미의 소원으로부터 태어났어."

어느새 붉게 변한 마리의 두 눈이 우리에게 향했다. 뱀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나에게 닿자 반달처럼 곱게 접혔다.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실제 뱀앞에 서 있던 것처럼 경직되었던 몸이 순식간에 풀어진다. 메두사라고 해도, 여왕뱀을 지녔다고 해도 역시 마리는 마리다. 그 점을 되뇌이며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으음, 그렇다 해도 지혜를 전수하는 능력이라니 굉장히 추상적인 느낌임다. 자아가 있던 뱀이니 대화하는 것처럼 알려준 걸까요."

"어쩌면 그 지식을 알고 그걸 이해할 자아가 있던 것 자체가 그 뱀의 능력이었을지도 모르겠군. 히요리의 목숨 대신이 되고 난 이후에는 자아가 사라졌으니 능력이 빙의 정도로만 열화된 거고."

"어떻게 뱀의 육체와 자아가 분리되어 저렇게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야노 선배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다.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머릿속에 여러 가설이 피어올랐다가도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간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능력자체가 비상식적인 것이긴 했지만, 일련의 일을 겪으며 겨우 그 실체를 알게 된 참이다. 그런데 그게 끝나자마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심지어 그 실체를 알려주었던 눈이 맑아지는 뱀조차도 모른다. 아무도 정답을 모르고 정답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문제를 파고 있는 기분이다. 생각은 달라도 답답한 심정은 다 똑같은지 내내 인상을쓰던 타카네씨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아아, 복잡해! 일단 히요리 능력 얘기 중이었으니 그것만 얘기하자고!"

"아, 네! 정리하자면 눈이 맑아지는 뱀은 자아를 가진 상태에서 직접 지혜를 전수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거예요. 그게 히요리에게 이르러선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하는 능력으로 조금 변질된 거고."

"그거 혹시 그 뱀의 몸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통할까?"

하루카씨가 툭 뱉은 말에 모두의 시선이 히요리에게로 쏠렸다. 본래 모습과 같은 점이라고는 검은 머리카락밖에 없는데도 히요리는 그새 익숙해졌는지 태연해 보이기만 했다. 도도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히요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테스트 해보죠."

"그럼 그 뱀이 깰 수도 있으니 다시 묶어야겠네."

"당연하죠. 단단히 묶도록 하세요."

"그럼 실례하겠슴다."

...다시 봐도 지시하는 쪽이나 지시받는 쪽이나 자연스럽다. 중간에 너무 조이는지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본인이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꾹 참는 게 보였다. 몇 번 힘주어도 풀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히요리가 우리를 쭉 둘러보았다. 붉은 눈이 마치 혀처럼 우리를 훑고 지나간다. 맹수 앞에 선 사냥감이 된 기분이 이런 걸까. 살짝 소름이 올라오려는 팔을 문지르고 있으니 거구가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누구지. 어디로 간 거지. 모두가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살폈다. 일단 나랑 슈우야는 아니고, 신타로씨도... 두리번거리기 바쁜 와중에 유일하게 한 사람이 꼿꼿하게 서있었다. 시선을 천천히 내리자 보들보들해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작은 손이 생경한 걸 만지는 것처럼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기분 나빠."

"히요리다."

"히요리네."

"히요리네요."

"...지금 뭐하는 거지."

정신이 돌아온 눈이 맑아지는 뱀에게 히요리는 히비야의 모습으로 코웃음을 쳤다. 마치 꼴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말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대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절반 정도는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을 대비해 주시하고 있던 나는 그가 웃음으로 맞받아 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아직도 두려움이 잔존해있긴 하지만, 비록 적의가 없다고 해도 그의 성질 자체가 죽은 것 같진 않다. 위태로운 냉전은 히비야의 몸이 휘청거리면서 끝났다.

"어? 방금 무슨 일이..."

"역시 다른 사람 몸에 가는 것도 가능하네요. 빙의한 당사자는 그 당시 기억을 못 하는 것 같고."

"그건 그렇고 처음인데 너무 능숙한 거 아니냐..."

"흥, 누구랑 같이 능력 제어니 뭐니 하는 수업 들은 덕분에 이론은 빠삭하거든?"

"잠깐만! 히요리 방금 나한테 온 거야?! 아! 그런 귀한 순간을 왜 떠올릴 수 없는 거야?!"

"그만해, 히비야! 표정 완전 이상하니까!"

"히요리가 제일 먼저 나한테... 악!"

"윽!"

히요리는 짜증을 내며 히비야를 밀쳤다. 평소대로였다면 티격태격하는 헤프닝 정도로 끝났을 거다. 지금의 히요리가 뱀의 몸만 아니었다면. 8월 16일날, 그때의 나처럼 히비야의 작은 몸이 날아올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둥글게 모여있었고, 히비야는 벽 대신 하루카씨에게 부딪히고 멈추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자 안 그래도 하얗던 뱀, 히요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히, 히비야?!"

"하루카!"

"진정해, 진정! 히요리 너 지금 네 몸이 아니야!"

"...미안해. 이렇게 셀 줄은 몰랐어."

"괘, 괜찮..."

"으응. 나도 괜찮아. 걱정마, 타카네."

안심시키려고 웃는 하루카씨의 두 눈은 붉었다. 소유자가 원하는 육체를 구축하는 힘을 가진 눈을 깨우는 뱀. 고통스러운 나머지 저절로 능력이 발휘된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한 능력군인 히비야는 맞은 부위를 부여잡고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그 곁에 쪼그려 앉아 내 능력으로 히비야의 몸을 살폈다. 엄청난 고통과 당혹스러움이 여과없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까지 얼굴이 찌푸러졌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히비야 몸을 꼼꼼히 살폈다. 부상이라고 해봤자 약간의 내상 출혈 정도. 멍은 좀 들 수 있지만 건강이나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적의를 가지고 때린 게 아니라 장난삼아 때린 정도라 이정도로 끝난 것 같다. 장난임에도 이정도라는 게 끔찍하지만. 세상에, 그럼 코노하씨의 신체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 뱀을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또다시 척지는 일은 사양하고 싶어졌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당장은 눈앞에 있는 히요리부터 달래야 한다. 항상 도도하던 그 히요리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자신의 손만 꼭 잡고 있다. 피가 몰려 붉어진 손을 잡아 풀어주었다. 작게 떨리는 붉은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안에 있는 히요리도. 명심하자. 지금 내가 잡고 있는 게 크고 굵은 손이여도 내앞에 있는 건 있는 건 어린 아이다.

"히요리, 너무 걱정하지마. 다행히 몸에 큰 문제는 없어."

"맞아. 이치카쨩이 말한 거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표정 풀어, 히요리쨩. 응?"

"...네."

"당장 그 몸에서 나오고 싶은 것도 알겠지만 잠시만 참아줘."

"알아요. 이 몸이 함부로 날 뛰게 둘 수 없죠."

히요리가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줄 대신 그렇게 스스로를 포박하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슈우야가 박수를 가볍게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내 눈에는 표정이 굳은 게 보이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분명 웃는 얼굴일 것이다. 이럴 때마다 광대처럼 굴어서 분위기를 푸는 건 슈우야의 특기니까.

"자자. 어쨌든 그 뱀의 능력이라 그런지 조금 찝찝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말 유용하겠는걸. 마침 우리 히요리 단원이 수업을 잘 들은 우등생인 덕분에 능력 제어도 탁월한 것 같고~"

"그래. 사용 범위나 제약 같이 세세한 건 차차 알아가도록 하지. 다들 지쳤을테니 오늘은 이정도로 해둘까."

"그러자. 피곤해 죽겠어."

"히요리, 미안하다만 오늘 밤은..."

"이 상태로 있으라는 거지? 알고 있어."

히요리는 새침하게 대답하고는 누구보다 먼저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빨리 쉬고 싶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우리들로부터 자기자신를 떼어내려는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니지. 우리를 죽여왔던 장본인의 몸으로 좋아하던 사람을 날려버렸으니까. 아마 정신적으로 가장 피로한 것은 히요리일 것이다. 다들 그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누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친건지 각자 잘 준비를 시작했다. 두 번째로 자리를 피해버린 사람을 지그시 보다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하다. 그 흔한 풀벌레나 새소리도, 하다못해 에어컨 소리도 안 들린다. 제법 차가워진 밤공기에 이불을 여미며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수면을 방해할 만한 그 어떤 소음도 없지만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한 탓에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흩트려 놓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날 이후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누가 인생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냐며 날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다.

...다른 애들은 괜찮을까.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걱정만 앞선다. 결국 잠에게 항복 선언을 하고 눈을 떴다.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보니 현재 시각 3시 11분. 한밤 중인 어둠이 그야말로 검기만 했다. 그를 밀어내듯이 눈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고선 다른 애들의 상태를 쭉 살폈다. 에이토 오빠와 부모님, 과거의 일을 정리해서인지 이젠 고소공포증도 나아져 아래층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은 다 자고 있었다. 잠을 설치거나 악몽이라도 꾸는지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빨리 뱀의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다같이 사이좋게 수면 부족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1층까지 능력 범위를 넓혔다가 텅 빈 방 하나를 보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오늘 잠은 다 잤다. 하품 같은 한숨을 내쉬고선 주섬주섬 외출복을 꺼내 입었다.


"잠이 안 와?"

"이치카쨩?"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말과 함께 입꼬리도 비틀어 올리니 슈우야는 잘못 저지르다 들킨 어린 아이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뭐라고 변명할 지 찾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화장실 자다 깼다도 하기엔 슈우야도 외출복 차림이다. 걸어가려던 방향도 출입문 쪽이고 이제와서 능력으로 속이기에도 늦었다. 애초에 내가 말을 건 시점에서 몰래 나가려던 게 진작 들켰다는 건 알 거다. 완벽한 현장 검거. 무슨 말을 하든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본인도 인정하는지 슈우야는 항복의 신호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정말 이치카쨩은 속일 수 없다니까."

"이번엔 속이려던 것도 아니었잖아."

나는 슈우야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슈우야를 잡아끌었다. 당황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익숙해질듯 익숙해지지 않는 온기에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그래도 놓지 않고 계속 붙잡은채 기어코 출입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우리 머리 위에서 쏟아지며 서로의 얼굴이 여실히 드러났다. 더이상 조용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밤 속에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 잠깐 같이 걸을까?"

늦은 여름날 밤의 시답잖은 담화의 신호가 울렸다.


별 하나 없이 깔끔한 밤 하늘에 히끄무레한 달 하나가 걸려있다. 며칠 전에는 반달이었는데 어느새 초승달이 될 정도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가로등만이 쭉 이어진 골목길을 슈우야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우리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일렁였다. 저번 밤에 둘이 함께 걸었을 때는 슈우야가 계속 이야기를 해줬는데 지금은 조용하다. 내가 같이 걷자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정직하게 걷기만 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침묵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한 발자국 남짓한 거리, 서로의 속도에 맞춰 걷는 발걸음, 가끔씩 스쳐가는 손과 손. 서로의 자잘한 행동들 속에 밤과 같은 묘한 긴장감과 편안함이 공존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까.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은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조용히 곁을 지키는 게 더 내 특기이기에. 골목길을 벗어나자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이치카쨩은 무섭지 않아?"

드디어 이야기의 물꼬가 트였다. 고개를 돌리니 슈우야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어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슈우야의 눈동자를 닮은 샛노란 달과 시선이 마주쳤다.

"전혀 무섭지 않다고 하면 역시 거짓말이겠지."

"이치카쨩..."

"그 뱀도 뱀이지만, 나 때문에 더."

겨우 툭 진심을 꺼내자 바로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굳이 그쪽을 보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팔트에서 폭신한 공원 바닥을 밟으니 이젠 발소리마저 한숨 죽었다. 몇 번 지나치기만 한 공원 안은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시소는 제각기 다른 의자가 내려가 있었고, 구석에 있는 모래 놀이터에는 누군가가 놓고 간 모래삽이 꽂혀있었다. 모래알이 신발 틈새로 파고드는 걸 무시하고 한 그네에 앉았다. 두 개의 그네 줄이 동시에 삐걱거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할 말을 정리해야 해서 입꼬리는 금세 내려갔지만. 신발코로 애꿎은 땅만 파며 조심스레 말들을 혀로 굴렸다.

"내가, 정확히는 11번째 뱀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이유로 루프마저도 어그러질 뻔 했잖아. 그랬던 것처럼 이 뱀의 등장도 혹시 나 때문인 걸까 싶어서 그게 조금... 두려워."

자려고 눈만 감으면 그 뱀이 한 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 날 내 존재로 아야노 선배의 공백을 메꿀거라던 말, 그리고 오늘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다행히 일이 잘 풀리긴 했지만 내 존재는 루프마저도 이어지지 못하게 할 뻔 했고, 이제는 모든 일의 원흉인 눈이 맑아지는 뱀을 존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가해자와 마주치게 된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힘들어 하고 있다. 가해자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떤 일인지,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런데 그걸 어쩌면 내가, 나 때문에... 누군가의 탓이라고 돌릴 수도 없는 죄책감과 억울함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갑자기 생겨난 11번째의 뱀. 내 존재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내 뱀은 루프를 끊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새삼 생각해보면 루프를 끊는 핵심적인 역할은 신타로씨와 아야노 선배, 그리고 마리이지 않나? 내 역할은 기껏해야 그들을 조금 더 이끌뿐. 아마 내가 없었어도 언젠가 모두 살아남는 미래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할텐데 굳이 나라는 불안요소를 안고 갈 필요가 있었을까. 이렇게 눈이 맑아지는 뱀마저 다시 돌아오게 한 나는 왜 이 세상에...

"거짓말 아닐까?"

땅굴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었던 나를 슈우야가 끄집어냈다. 그의 특기인 거짓말로. 슈우야는 말 사이사이 제스처를 섞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히요리쨩 말대로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한 거 일지도 몰라. 신타로군의 뱀도 그렇지만, 이치카의 뱀도 이레귤려고 눈이 맑아지는 뱀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한몫하기도 했잖아. 복수심에 그런 말을 한 거 아니겠어? 그 뱀이라면 그러고도 남아."

별 거 아니라는듯 가벼운 말투와 달리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슈우야는 떨리는 눈동자로 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말해달라는 것처럼.

"거짓말은, 아니었어."

그 바람에 응해줄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로 유들유들하게 분위기를 푸는 게 슈우야의 역할이라면, 냉정할지라도 진실을 파악하는 게 내 역할이니까. 정면으로 보고 있지 않더라도 입을 꾹 다문 슈우야의 얼굴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위로 마지막으로 보았던 뱀의 얼굴이 겹쳐졌다.

불안할 정도로 평온하던 자세, 체념한 듯한 태도, 올곧게 나만 보던 눈동자. 기운이 쭉 빠져 위태로워 보이긴 했어도 그 속에 거짓은 없었다. 오히려 내게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이 나에게 있다는 걸 확신하는 투였다. 지금 누구 덕분에 내 정체성까지 흔들리고 있는데 참 뻔뻔스럽게도.

"...그렇다고 그 말이 진실일 거란 뜻은 아니야."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내 바람에만 근거한 가설을.

"내 능력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상태와 감정을 파악하는 것 뿐이니까. 아무리 거짓인 일도 상대가 그걸 진짜 있었던 일로 받아들인다면 내 눈에도 진실을 말하는 걸로 보여."

"한 마디로 그 뱀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거야? 알고 보면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치카쨩이 아니라든가~ 아니면 환청이나 꿈이었다든가~?"

"맞아. 그래서 누누히 말했잖아. 내 능력은 만능이 아니라고."

하나의 가능성을 말한 것 뿐인데 슈우야는 그걸로 만족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편해진 것 같은 표정에 몰래 한숨을 삼켰다. 지금은 이걸로 됐다. 계속 불안해 하는 것보다는 임시방편으로라도 숨을 돌리는 게 더 낫다. 설사 우리가 이걸 진실이라 믿는다 해도 그게 진짜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힘을 벌 수 있으니까.

기분전환도 할 겸 가볍게 발을 굴렸다. 내가 앉은 그네가 쭉 뒤로 올라가자 삐그덕 우는 소리가 났다. 오르락 내리락하자 묶지 않은 머리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검푸른 머리는 어스름한 새벽과 닮아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어차피 나중에 다른 애들과도 해야하니까 이쯤해두고. 슈우야는 어때?"

"나? 나는 뭐~"

짜여진 각본처럼 또 가볍게 말하려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발을 지면에 딛고 억지로 그네를 세우니 슈우야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어색하게 웃었다. 속이지 않은채 지어낸 억지 미소. 예전에 내가 부탁한 대로 진심을 말하려고 노력 중이구나. 그 마음이 고마워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나도 그를 따라 웃어보였다.

"역시 안 괜찮구나."

"솔직히 말하면... 응."

"그럴 것 같았어."

"그렇게 티 났어?"

"아니, 언뜻 보기엔 괜찮아 보였어. 그렇다고 괴롭지 않을 일이 아니니까, 이건."

가해자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는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올해 여름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던 나니까. 더군다나 슈우야는 그 뱀과 가장 오래 얽혔던 사람이다. 가족과 자신의 목숨으로 협박당하고, 강제적으로 그에게 협력하기까지 했다. 그런 자와 겨우 떨어졌다가 다시 만난 건데 멀쩡하다면 오히려 무서울 거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까봐 거짓말을 하며 버텼다. 비단 슈우야 뿐만이 아니다. 다들 제각기 버티고 있다. 고작 하룻밤이었지만 이 눈을 통해서 모두 보고 말았다. 땅바닥에 발바닥을 댄 채 그네를 느리게 흔들었다. 요람에 잠든 아기가 점점 잠에 빠져들듯 슈우야도 차근차근 제 마음에 젖어들었다.

"...무서워."

"응."

"모습도, 목소리도 다르지만 그녀석인 거잖아. 아버지 몸을 빼앗고, 누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나를 헙박하고, 우리를 죽이려 한..."

"그렇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때가 생각나서 두렵고... 괴로워서... 나..."

"슈우야."

그 이름을 부르며 미동조차 하지 않은 그네 앞에 섰다. 까만 후드를 뒤집어쓴 슈우야는 그대로 어둠 속에 흡수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고개도, 허리도 굽어있어 유독 작아보이는 그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덜 외롭도록, 누군가가 작아진 그를 보지 못하도록.

"그 마음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도 넌 나처럼 도망가지 않았잖아. 그게 난..."

품 안에서 작은 몸이 들썩거렸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에 맞춰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슈우야가 내 옷깃을 붙잡는 사이에도 옆에서는 내가 앉았던 그네가 앞뒤로 소리없이 흔들렸다.


눈이 어둠에 적응된 것인지, 날이 밝아진 것인지 이젠 골목 사이사이도 잘 보였다. 야간 일을 끝내고 집에 가는 사람, 술을 마시고 휘청거리는 사람, 이르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것 같지 않은 시간에도 늘 사람들은 존재하고, 그 틈에 우리가 있었다. 가로등 불빛도 한층 약해져 그림자도 희미해졌다. 짧아진 그림자를 대롱대롱 달고서 걸으니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치카쨩 앞에서 또 울다니."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저번과 달리 이번엔 나 혼자 울었어!"

"그렇다고 설마 나도 똑같이 울라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민망한지 슈우야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 볼이나 눈가나 똑같이 붉어져 있어서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귀엽기도 하고, 이런 와중에도 눈색은 그대로라서 조금 기특하기도 했다. 슈우야가 나보다 연상이지만. 후드를 벗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서 올려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쳐서 아무 일 없던 척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거겠지. 태연자약하게 뒷짐지고 걸으며 물었다.

"좀 개운해졌어?"

"응, 덕분에. 이치카쨩은?"

"나도 네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어."

"정말?"

"응. 정말로."

아무리 말해도 슈우야는 영 미심쩍은지 나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저러고 있으니까 더 여우 같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자는 것보다 나았다고,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니 슈우야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배시시 웃었다. 눈썹도, 입꼬리도 힘이 과하게 들어간 곳이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늘어뜨린채 부드럽게 선의를 품은 그 미소에 일순 숨을 삼켰다.

"그보다 벌써 아침이 되어버렸네."

슈우야를 너무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돌렸다. 육교 너머로 짙푸른 어둠을 밀어내며 해가 고개를 내민다. 땅 아래에서부터 붉은 빛이 퍼져 올라오고, 넓게 퍼진 구름에 서로 상반되는 색이 뒤섞였다. 주황색과 분홍색 그 사이쯤의 오묘한 색이 우리 머리 위에서 일렁거렸다. 저녁 노을이 온 하늘을 붉게 태워버릴 것 같다면 새벽 노을은 마치 물들이는 것만 같다. 푸른 하늘에 붉은 물감 한 방울이 떨어져 각각의 색들이 뒤엉키고 동화되어 간다. 결국은 청명하게 변하고 말 것을 알면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이치카쨩."

"응?"

"괜찮을 거야."

새벽녘이 슈우야의 옆 얼굴을 비추었다. 해가 아무리 빛난다고 해도 그의 단단한 눈빛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모두가 있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응, 잘 될 거야."

나도 저런 눈빛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뒷말을 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이미 거센 장마를 거친 우리들은 분명 우리 생각보다 굳세져 있을 것이다.


새벽의 공기는 서늘하고 상쾌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 양 허파에 냉기가 가득 찼다. 한낮엔 덥기만 하길래 아직 여름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가을이 다가오긴 하나보다. 천천히, 차근차근. 가로등도 꺼지고 여명만이 흐릿하게 거리를 밝혔다. 얇은 외투를 여미며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우리는 골목으로 향했다. 이곳의 아침은 아직 멀었는지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길고양이만 나른하게 울 뿐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문 하나 여는 것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도둑처럼 발뒤꿈치도 들고 살금살금 걸어도, 철문이 덜컹 잠겨도 이제 왔냐며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렇게 잠을 설치더니 결국 잠들긴 한 모양이다. 이제와서 다시 자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나와 슈우야는 쇼파에 나란히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기어코 우리가 눈을 감아버려도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일찍 일어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 따끈한 된장국, 짭조름하게 간이 밴 연어구이, 그리고 눈이 맑아지는 뱀의 이야기가 곁들어진 아침 식사는 맛있게 체하기 딱 좋았다. 최대한 꼭꼭 씹어 삼키며 새벽에 슈우야와 나눈 이야기를 모두와 공유했다.

눈이 맑아지는 뱀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과 내 능력의 맹점, 그러니 그의 말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사항 정도였지만. 그러나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건지, 워낙 별의별 일을 겪어서 그런지 하나 같이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타로씨까지 비슷한 반응인 걸 확인하고는 나는 몰래 숨을 내쉬었다. 다른 애들이 날 믿어주는 것도 고맙긴 하지만, 신타로씨도 똑같이 생각한다면 어쩐지 안심이 된다. 내 심정과는 반대로 상황은 여전히 막막한 그대로여도.

어째서 눈이 맑아지는 뱀은 이곳에 다시 나타났을까. 빙글빙글 제자리를 멤도는 대화들 사이에서 괜히 젓가락으로 된장국을 휘휘 저었다. 새하얀 두부가 탁한 된장국 위에 동동 뜬 채로 마구 뒹굴었다.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결국은 그거네. 가능성일 뿐이라는 거."

"신타로..."

"괜찮아요. 사실이고."

"당사자 없이 우리들끼리만 얘기하는 거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탁상공론이지."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그 뱀이랑 정면으로 다시 맞붙는 게 제일 최선 아니야?"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카노의 손가락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그런 마음을 담아 구태여 고개나 시선은 돌리지 않은채, 살포시 내 손을 얹었다. 새벽 때처럼 작은 온기가 널 위로할 수 있기를.

"정작 그 뱀도 영문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요. 좀 더 원활히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선 저희 나름대로 여러 정보를 준비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지만 그 정보가 나올 곳이 없잖아, 우리는!"

"저기..."

아침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앞에 있는 반쯤 남은 밥은 다 식어서 이젠 김도 올라오지 않았다. 왜인지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은 평소 내가 아는 세토와는 사뭇 달랐다. 자신의 잘못을 이제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세토는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능력으로 그 뱀의 최근 기억을 한 번 볼까요?"

기억?

"세토, 속마음 말고 기억도 볼 수..."

"안 보는 게 좋을걸."

신타로씨는 나의 말을 냉철히 끊고 인상을 썼다. 안그래도 매서운 눈빛이 한층 더 까맣게 가라앉아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뱀의 기억이야. 까딱하면 누구 죽는 꼴 보게 될 거라고. 거기다 눈을 훔치는 능력은 폭주가 심하잖아. 모두가 죽는 걸 보고도 제대로 조절할 수 있겠어?"

"그건..."

"신타로."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던 신타로씨를 아야노 선배가 툭툭 쳤다. 까만 눈동자가 가리킨 곳에는 세토가 비라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있었다.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신타로씨의 얼굴에 삽시간 당황이 퍼져나갔다. 세토 앞으로 달려나가 두 손을 휘적거리는 게 이제야 내가 아는 신타로씨 같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중학교 시절 소문으로만 듣던 신타로씨를 실제로 본 기분이다.

"아, 아니 나는 너한테 뭐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 그 뭐냐, 그 능력은 아무래도 아자미도 잘 못 쓰던 것 같거든? 그리고 애초에 너도 그 능력 쓰는 걸 좋아하지 않다고 알고 있고. 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전과 달리 우리 목숨이 달린 것도 아니고! 꼭 그 방법만 있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너무 무리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알겠어? 응?"

"하하... 알겠슴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세토는 그런 거 잘 못 보니까. 있잖아, 나는 세토가 기억을 봐준다면 확실하고 좋을 것 같아. 그렇지만 역시 걱정돼."

세토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봐도 억지로 웃는 걸 알만큼 어색한 미소에 살며시 마리의 온기가 닿았다. 힘줄이 도드라진 세토의 손등을 가만히 쓸며 마리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세토가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꽃을 닮은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그건 눈앞에 아른거리는 무수한 기억들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루프를 기억하는 신타로씨, 그리고 그 기억을 공유한 아야노 선배와 마리. 시점은 다르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기에 그토록 냉철하게 막은 것이구나. 어쩐지 입안이 써서 무심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리는, 누나나 신타로씨도 괜찮슴까? 그런... 기억을 봤는데도."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세토가 조심스레 물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진중해보였다. 정작 당사자들은 본인들끼리 시선을 몇 번 주고받고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뭐, 내용이 워낙 충격이기야 했지만 어차피 내 기억이어서 그런지 받아들일 수 있었어. 내 뱀 덕분도 조금 있고."

"뱀이요?"

"그때에는 자아가 있어서 얘기하며 풀어줬거든. 지금은, 없지만."

신타로씨는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아마도 자신의 뱀과 직접 대화해본 건 나와 신타로씨가 유이하겠지. 의아해하는 단원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그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느린 고동이 내 뱀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리지만 의지가 강했던 나의 뱀. 더이상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지만 이렇게나마 느낄 수는 있다. 그 아이가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나와 함께 한다는 것도. 아야노 선배가 나와 신타로씨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꺼내며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마치 우리 둘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는 원래도 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신타로의 기억을 본 덕분에 추스릴 시간도 넉넉하게 있었어. 그쪽은 시간의 흐름이 이쪽이랑 다르거든."

"그럼 마리는요?"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괴롭긴 해도 모두와의 기억이라서 그럴까. 어쩌면 신타로랑 아야노의 마음도 같이 전달되어서 그럴지도 몰라."

마리가 두 주먹을 꽉 쥐며 밝게 웃었다. 양 주먹은 내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고, 미소 역시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어보이는데 왜 이렇게나 단단해 보일까.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여도 여러 아픔에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다. 나만 해도 그 날 이후로 꽤 오랫동안 잘 웃지 않았으니까.

마리가 워낙 순수해서 자주 잊곤 하지만 마리는 메카쿠시단 중 최연장자다. 그 깊은 숲속에 살아서 경험이 적을 뿐. 그 간극이 신타로씨의 기억으로 메워졌다면 우리 중 가장 가장 강한 건 마리일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세토는 씁쓸해보이는 미소를 걸친 채 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분홍색 눈이 나른하게 감긴다.

"...마리는 강하네요."

"정말?"

"강하지."

"역시 여왕이라는 걸까나~"

"으아아... 그렇게 부르지마!"

"어쨌든 저 공주님이 말하는대로 당신은 기억을 안 볼 거야?"

"공주님? 나?"

"으음... 다들 조언해준 것도 있으니 좀 더 방법을 찾아본 후에도 답을 못 찾겠으면 그때 써도 되지 않을까 싶슴다."

"흐응, 시시하네."

히요리는 더 볼 것도 없다는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예의상으로라도 설득 한 마디도 안 하는 구나. 세토는 멋쩍게 제 뒷목을 만지작거렸고, 그런 형제를 도우려는 건지 슈우야가 그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그래, 무리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그렇긴 해도 이번 임무는 꽤 어려운데? 우리끼리만 머리 굴린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거 말인데요, 카노씨! 있을 지도 몰라요!"

질문 있는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든 모모가 명랑하게 외쳤다. 모두의 시선을 능숙하게 모은 모모는 검지손가락으로 우리들 사이를, 아니 정확하게는 어느 허공을 찍었다.

"아지랑에 데이즈에!"


"흐랴압!!!"

히비야가 힘차게 기합 소리를 내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열을 눈으로 모으는 것처럼 갈색 눈동자도 점차 붉어졌다. 능력 제어 수업 덕분일까, 히비야는 예전보다 원할 때 능력을 쓰는 게 가능해졌다. 그건 좋은 일이지만 말이지...

"...그런데 꼭 저렇게 해야 하는 걸까."

"저렇게 해야 집중이 잘 된대."

나는 딱딱한 눈동자로 히비야를 위아래로 훑었다. 히비야는 지금 다리는 어깨너비보다 더 넓게 벌리고 무릎을 거의 직각으로 꺾은 채 서 있다. 그리고 양손으로 내 휴대폰을 꽉 쥐고선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체격이 작아서 그렇지 꼭 스모 선수가 경기 시작 전에 하는 기묘한 의식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까지 했는데 능력 사용이 안 되면 정말 민망하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작전은 온전히 히비야에게 달려있으니까.

이 상황은 모모의 한 마디로부터 시작했다. 우리들이 모른다면 아지랑이 데이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고. 다른 세계 사람에게 물어보자니.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다그쳤을지도 모른다. 보통이라면 말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린 이능력에 메두사, 루프까지 겪은 사람들이었다. 보통으로부터 한 걸음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는 뭐라 하기 보다는 좋은 생각이라며 칭찬하기 바빴다.

안 그래도 이전 루프에서 히비야의 능력으로 아지랑이 데이즈와 전화 연결을 한 적이 있었는지 진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아지랑이 데이즈에 있는 사람, 즉 타테야마 선생님의 현 전화번호를 가진 내 핸드폰을 「눈을 응시하는 능력」을 가진 히비야에게 쥐여주면 끝. 거절할 틈 따위도 주지 않았다. 너라면 할 수 있다고 온 단원들이 매달렸으니까. 그렇다고 홀라당 넘어가버린 히비야도 히비야지만. 아무튼 그렇게 부푼 기대를 품에 안고 히비야는 기묘한 의식, 아니 능력 사용 중인 것이다.

"느려, 히비야."

"히비야군 좀 도와줄까?"

"아줌마 도움... 없어도, 이젠... 나, 도... 혼자 할 수... 있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히비야의 양 눈이 온전히 붉어졌다. 피보다도 진한 눈동자로 내 휴대폰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었다.

"타, 테, 야, 마, 선, 생, 님! ...됐나?!"

휴대폰 화면이 바뀌더니 신호음이 들려온다. 통화 불가 안내 음성이 아니라 진짜 연결음이. 이게 정말 되네. 얼떨떨하게 히비야가 돌려준 휴대폰을 받아들며 「타테야마 선생님」라고 써진 수신 화면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능력은 핸드폰 전파에도 간섭이 가능하구나. 에네가 전파를 타고 다니는 걸 볼 때부터 짐작했었어야 했는데. 투시일 뿐인 내 능력도 이런 쪽으로 쓰는 게 가능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신호음이 끊기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보세요? 시라키냐?」

"선생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오, 그래. 잘 들린다. 그보다 깜짝 놀랐네~ 산 자한테 죽은 자로부터의 전화가 왔다는 괴담은 들어봤어도 죽은 자한테 산 자로부터의 전화가 왔다니 말이다.」

"그걸 지금 블랙 조크라고 한 거예요?!"

「이 목소리는 타카네냐? 크흑. 나름 혼신의 개그였는데 안 통하다니. 또 미간 잔뜩 찌푸리며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지? 안 봐도 훤하다.」

"시끄러워요!"

"하하, 선생님 여전하시네요."

"아빠."

「하루카, 아야노.」

그저 이름만 부르는 짧은 목소리 속에도 애정이 듬뿍 묻어나왔다.

「옆에 츠보미나 다른 애들도 같이 있어?」

"여기."

"바로 옆에 있슴다!"

"...응."

「하하, 목소리만으로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름이 불린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그렇구나. 늘 가벼운 태도 때문에 잊기 쉽지만, 이분도 누군가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자 아버지셨다. 그분의 제자 중 한 명인 나도 털털한 선생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웃고 말았다.

「새삼스럽지만 다들 참 잘 컸어. 이 아빠이자 형부이자 선생님은 뿌듯하단다.」

"주어 길어!"

「그보다 안부나 물으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냐?」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본론이고 목적이긴 하지만...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할 말을 고르고 기어코 뱉어냈다.

"선생님, 이쪽 세계에 눈이 맑아지는 뱀이 나타났어요. 엄밀히 말하면 뱀은 아니고 사람의 형태로."

「...뭐?」

"혹시 그 뱀의 소유자였던 선생님이나 아자미라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혹시 같이 얘기해볼 수 있을까요."

「음, 알겠다. 잠깐만 기다려봐라.」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주변 단원들의 숨소리가 없었다면 시간이 멈춘 줄 알았을 거다. 침묵 속에서도 통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설마 통화가 끊겼나? 불안함도 잠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희미하게 목소리 하나가 그 뒤를 이었다.

「여어, 실례.」

『뭐냐, 갑자기.』

"아자미?"

『이 목소리는... 이치카인가?』

"아, 네. 안녕하세요."

『이치카!』

「어이, 어이. 진정해! 지금 유일하게 저쪽 세상과 이어진 휴대폰인데 멈추기라도 하면 곤란... 악!」

별안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드라마에 삽입된 군중 소리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싸움 아닌 싸움이라도 하나. 할 것도 없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난처한 눈치였다. 신타로씨는 괜히 내 휴대폰을 두어 번 두드리기까지 했다. 고장 안 났다며 뭐라 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훅 가까워졌다.

『음, 상황은 켄지로한테 어느 정도 전해 들었다. 눈이 맑아지는 뱀이 그쪽에 있다는 게 정말인가?』

「어이, 사람 발을 밟아놓고 아무 일 없던 듯 말하지 말라고.」

"제가 능력을 써서 몸을 뺏어두긴 했어요."

『...확실히 그 놈 목소리군.』

「히요리까지... 이 형부는 슬프다.」

휴대폰 너머로 중년 아저씨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상대가 타테야마 선생님이라 그런지, 아니면 누가 들어도 연기라서 그런지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마저도 덮으려는듯 아자미의 목소리가 잔잔히 얹어졌다.

『눈이 맑아지는 뱀은 나조차도 잘 모르는 이질적인 능력이라 확실히 말해줄 순 없군. 그나마 정신과 육체가 존재한다는 걸로 추측해보자면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눈을 깨우는 뱀도 연관이 있을 거라는 것 정도일까.』

"코노하가?"

코노하씨 얘기에 하루카씨가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유독 눈 밑에 있는 반점이 진하게 보인다.

「자, 학생들. 조급하게 굴지 말고 하나하나 되짚어보자고. 눈이 맑아지는 뱀이 결국 소멸한 이유는 뭐였지?」

"그 당시 코노하가 히요리를 살리고 싶다는 소원 외의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뱀은 소원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그래. 그런데 여기서 사실 그 외의 소원이 존재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본래 뱀은 히요리를 살리겠단 소원으로 사라졌지만, 다른 소원 덕분에 자아만은 유지되었다면?」

"그리고 사라지기 직전까지 취하고 있던 육체, 즉 코노하의 영향으로 새로운 몸을 구성했다?"

「그런 거지. 동시에 여러 소원을 갖는 게 가능한지가 걸리긴 하다만.」

"가능할 거예요. 제 뱀도 동시에 여러 소원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꿰뚫어 보는 것 말고도 루프를 끊는 것도 자신이 가진 소원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래, 그런 마음도 있었지.』

회상이라도 하는지 아자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겼다. 눈을 꿰뚫어 보는 뱀. 아지랑이 데이즈에 갇힌 아자미가 품은 마지막 소원이자 나의 뱀. 그러고보니 내 뱀은 루프 외에 아자미의 어떤 마음에서 태어났을까. 잠시 궁금해졌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은 잠시 미뤄넣었다.

"잠깐만, 만약 그 가설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두 뱀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 소원이 존재한다는 거잖아?"

"코노하의 경우는 그 눈이 맑아지는 뱀의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소원을 받은 게 될 거고."

"눈이 맑아지는 뱀은 마지막에 들었다던 제 목소리와 관련된 소원을 잡은 거겠네요."

그런 거 바란 적 없는데.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글쎄. 어쩌면 지금의 이치카가 아니라 다른 루프 때의 이치카가 바란 것을 그녀석이 잡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뜻이죠?"

『이곳 아지랑이 데이즈는 시공간의 개념이 애매하니까 말이다.』

「어이, 그러면 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렵잖아. 알기 쉽게 하나씩 설명해.」

흐음. 아자미는 고민스레 비음을 늘렸다. 이내 단어 하나하나 신중히 늘어놓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아지랑이 데이즈는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로 내가 따로 만들어낸 곳이다. 그것도 10개의 뱀이 모두 모인 완전한 상태였던 내가. 즉, 아무리 손녀인 마리가 세상을 무(無)로 돌렸다 해도 그 시절 나의 힘에 비하면 부족하기에 이 세계까지 온전히 영향을 받진 않아.』

「아하. 그러니까 그거군? 아지랑이 데이즈는 완전히 루프되지 않았으니 이전 루프에서 있던 것들이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다는 건가?」

『그래. 뱀을 다 잃은 내가 이곳에선 존재하는 것도, 「눈을 꿰뚫어 보는 뱀」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다. 어쩌면, 그 뱀이 계속 루프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지. 소원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엔 그런 관념적인 것들이 남기 쉬우니까. 다음 루프를 대비한 지식을 이곳에 남겼을 가능성이 있어.』

"잠시만요. 그러니까..."

다급히 아자미의 말을 끊어내고 마른 침을 모아 삼켰다. 차분한 설명과 다르게 내 속은 마구잡이로 뒤엉퀴고 있었다. 아자미가 들려준 단어들이 문장을 이루지 못한 채 머릿속을 나뒹굴고 있는 기분이다. 아자미의 말, 그리고 눈이 맑아지는 뱀의 말. 그 중 거짓이 없다고 가정하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그 사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전 루프에서의 이치카가 빈 소원이 아지랑이 데이즈에 남아 눈이 맑아지는 뱀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건가?"

그러나 신타로씨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른채 정답을 내놓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의외로 신타로씨의 말을 긍정하는 대답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목소리 대신 뒤쪽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는 히비야의 숨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꺼진 휴대폰 액정에는 망연자실한 나만 비추어 보였다.

내가? 왜? 무엇을? 뭐 때문에?

도대체 무슨 짓을─

"이치카."

그순간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목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 들었다.

"괜찮아."

조그마한 온기가 굳어있던 내 손을 감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치카는 그저 이치카인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맑기에 한없이 깊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이치카가 우리한테 안 좋은 소원을 빌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부드럽게, 그리고 무엇보다 굳건하게 말하는 마리 덕분에 참았던 숨이 터져나왔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