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403 Forbidden Ⅰ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이치카는 보았다.

상자 속 작은 세상이 불타는 것을.

검은 소년 대신 하얀 소년이 대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붉은 머플러가 노을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이 눈으로.

열망, 분노, 허무, 그리고 사랑. 10년 조금 남는 삶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격렬한 감정들이 두 눈에 아로새겨졌다. 아자미의 눈을 통해 TV처럼 지켜보던 이전까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을에서 탄 냄새가 풍겨왔고, 절규 소리에 귀가 울렸다. 손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웠다. 매순간마다 소름이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이치카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작은 몸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목숨을 잃고 아지랑이 데이즈에 갇힌 뒤로 이런 적이 있었던가. 아자미가 모든 진실을 전했을 때도 몸이 떨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어차피 모두 끝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나 이들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과 소원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것도 아지랑이 데이즈 너머 저쪽 세상에서도 계속.

「어, 어째서 이런...」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이치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도 뭐라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드는 생각이란 하나뿐이었다.

「아자미가 저들의 곁에 있어 주라고 했으니까...」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착한 아이인 그대로인 이치카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종말 실험, 거꾸로 뒤집힌 저녁놀, 물빛의 꿈, 그리고..."

이치카는 단어 하나하나 말하며 한 발짝씩 나아갔다. 물결처럼 파장이 퍼져나가며 점차 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향해갔다. 원래도 이곳 아지랑이 데이즈는 아무것도 없긴 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기에 이곳에 들어온 자의 마음을 비추기 마련이다. 태양도, 저녁놀도, 비도 누군가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곳엔 그저 어둠만이 존재했다. 끝도 없고 셀 수 있는 것도 없이.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는지조차 애매한 어둠 속에서 이치카만이 분명한 목표를 보고 나아갔다. 피처럼 붉은 눈으로 어둠 속에 누군가가 남긴 기록을 이정표 삼아서.

마침내 도달한 끝에서 이치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려서 키가 작은 이치카는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나서야 그를 볼 수 있었다. 눈이 맑아지는 뱀. 정확히는 각성한 마리의 능력으로 완전히 돌로 변한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부릅뜬 눈과 선명한 조소가 영원히 박제된 채로. 이치카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과 그는 말 그대로 어둠 그 자체니까.

"이래서야 이번에는 제대로 기록 못 하겠네요."

이치카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남긴 지난 루트의 기록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바닥을 발로 문질렀다. 그러나 한 번 깊게 새겨진 집념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이치카는 그것을 강하게 짓밟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당신이 이길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들은 이 정도로 끝내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저쪽에 선택을 맡긴다고 했지만 다들 어찌나 눈빛이 살아있던지..."

이치카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이곳에 새겨진 집념. 그건 단순히 눈이 맑아지는 뱀의 것만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절망으로 끌려가도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손을 뻗는 서술에선 메카쿠시단의 의지가 느껴졌다. 모든 걸 깔보는듯한 문장들은 어쩐지 반대로 그들을 우러러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마저 당신의 의도인가요?"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기에 이치카는 자신의 말만 계속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나 비극이에요. 심하고, 무르고, 하찮으며..."

잠시 말이 끊기며 천천히 붉은 눈이 감겼다.

"눈부셔요."

이치카는 자신이 지켜본 광경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그들이 간절했던 만큼 어느 것 하나 빛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지켜본 자라면 누구든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이치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곱게 감겼던 눈이 스르르 떠지고, 시선이 올곧게 앞을 향했다.

"이 이야기가 이대로 끝나지 않길 바라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이런 비극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내일로 향해 갔으면 하지만... 당신, 눈이 맑아지는 뱀."

이치카는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심장을 가리켰다. 키가 작아 닿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손끝은, 시선은 꿰뚫어 버릴 정도로 정확하게 심장 쪽으로 향했다.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돌처럼 굳은 채 이 아지랑이 데이즈에 갇히는 건 당신의 죄에 비해 너무나 작아요. 이건 벌이 아니에요. 도망친 거죠. 죄에 맞는 벌을 받지도 않고 도망친 거예요."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양오빠와 그를 겹쳐보며 이치카가 인상을 썼다. 오빠는 지금쯤 어떻게 살까. 조금쯤은 후회하며 살고 있을까.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괴로워했으면 좋겠어요, 저 사람들이 느꼈던 것만큼."

끓어오르는 속에서부터 토해낸 말은 저주였다. 그게 오빠를 향한 것인지, 눈이 맑아지는 뱀을 향한 것인지는 이치카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그토록 비웃었던 사랑에 괴로워하고."

이치카는 자신이 아는 부정적인 감정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원망을 담아서.

"당신이 그토록 질투하는 저 세상에서, 아자미를 비춘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단호한 말투와 달리 손가락 끝이 점차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저에게 그런 벌을 내릴 자격도 권한도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의 배우가 아니니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못내 아쉬움이 묻어났다. 지켜보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이치카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이야기만큼 쓸쓸한 건 없을 테니까.

"음, 가볼게요. 애초에 당신을 찾으러 왔던 건 아니라서."

이치카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이 이야기의 몇 번째인지 모를 엔딩과 그 시작을 보기 위해서. 캄캄한 어둠 속 손톱자국처럼 남겨진 기록 위로 작은 발자국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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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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