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밟히는 이야기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평화롭네."
"그러게."
슈우야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TV에서는 원래 모모가 출연하기로 했던 드라마 1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이 드라마 역시 뻔하디뻔한 러브코미디라 평화로운 장면이 연속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모모가 출연했다면 좀 다르게 보였을까. 그래도 지난 여름날을 떠올리면 역시 우리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여름날의 원흉도 지금 우리 곁에 있어서 문제지만.
자연스럽게 눈의 온도를 높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3층까지 시야가 닿자 온통 검은 누군가가 보였다. 눈이 맑아지는 뱀. 아자미와도, 코노하씨와도 다른 모습을 가진 그가 못 박힌 듯 의자에 앉아 굳어있었다. 아무 미동이 없어 누군가 저 방을 시공간째 오려낸 것 같다.
저게 길고 긴 탁상공론 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눈이 맑아지는 뱀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으니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게 하는 것. 사실상 보류였다.
당연하지만 뱀은 반발했었다. 자신이 그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그러나 바짝 올라간 눈썹과 다르게 눈빛은 텅 비어있었다. 코노하씨와 맞먹는 신체 능력이 있을 테니 맘만 먹으면 우릴 뿌리치고 나갈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말뿐인 공방을 몇 번 주고받다가 결국 뱀은 귀찮다는 듯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등과 목은 자존심대로 꼿꼿하게 세워져 있지만, 그렇다고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마, 저 녀석은 지금도…
아무 말 없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있으니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럼에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뱀을 노려보았다.
"눈이 맑아지는 뱀은 오늘도 방에만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아. 벌써 일주일째네."
"아자미도, 나도 한 번 생각에 잠기면 며칠이 지나있곤 하니까 눈이 맑아지는 뱀도 비슷한 것 같아."
"아하하. 옛날 생각나네요. 언제 한 번 마리가 방에서 하루 종일 안 나온 적 있지 않슴까."
"걱정해서 문 열었더니 심야 애니메이션 정주행이었지~"
"카, 카노!"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버티는 거 보면 뱀은 뱀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저렇게 둬도 돼?"
부루퉁한 히비야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붉은 눈동자에 비친 풍경엔 여러 감정이 뒤섞여 떠다녔다. 그래도 우리끼리 한참 떠든 이후여서 그럴까. 뱀이 막 나타났을 때보다는 다들 하나같이 잔잔했다. 그 중심의 선 신타로씨만 해도 고작 외출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이내 감겨있던 눈이 떠지더니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에게 향했다.
"이치카, 어떻게 생각해?"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뭐? 아, 아니. 나는 그냥, 그…"
당황하는 신타로씨를 보니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별 거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받아쳤다. 그 둔한 신타로씨도 내 반응이 뭔가 이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 채 최대한 여상하게 대답했다.
"지금으로썬 아마 저희가 말을 걸어도 소용없을 거예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능력을 쓰지 않은 채로. 검푸른 눈동자에는 당연하게도 뱀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상태인 뱀한테 무슨 말이 닿을까요."
유명한 책 중에 그런 말이 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그 안에 갇힌 자를 굳이 꺼내줄 의향은 없다. 그렇지만 알을 깨트리고 나온다면, 진정으로 태어나려고 한다면…
"당사자도 움직일 때까진 일단 내버려두죠."
이어지려는 생각을 붇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속이는 아이."
"으응~? 이게 누구야?"
여름의 긴 해도 넘어간 시간. 불이 거의 꺼진 아지트 내에서 검은 옷을 입은 두 이가 마주했다. 자다 깨서 물 마시려던 것뿐인데 왜 하필이면 나랑 마주친담. 아니, 일부러 나 혼자일 때 온 거겠지. 카노는 불평을 삼키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연노랑 머리카락 아래, 붉게 빛나기 시작한 눈에 상대방이 비쳤다.
눈이 맑아지는 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휘감아 놓은 그는 마치 어둠과 한 몸인 것 같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두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사람 형체를 한 생명체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켄지로와도, 코노하와도 너무나도 다르게 생긴 괴물. 그러나 어째서일까. 카노는 그가 친숙한 아버지 모습일 때 마주한 것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마치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듯이 속이며.
"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까먹고 있었네. 이거 눈이 맑아지는 뱀이잖아?"
"장난은 그쯤하고."
"으음~ 무슨 이야기?"
"너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글쎄? 나는 세토처럼 눈을 훔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어서 모르겠는걸?"
카노는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거리며 뒤를 돌았다.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아도 아직 그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은 어려웠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나서야 다소 진중한 말이 이어졌다.
"있잖아, 착각하지 마. 예전에는 내가 너한테 협박 당해 이것저것 얘기해야만 하는 신세였지만 이제는 아니야."
"지금의 내가 협박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만."
"오산은 그쪽이 하고 있지.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거든."
"슈우야!"
거실에 울려 퍼지는 청아한 목소리에 카노는 눈을 크게 떴다. 이내 불쑥 나타난 걱정 어린 시선에 카노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내가 싫어하는 밤에 파묻히려 할 때마다 너는 이렇게 와주는구나. 이미 위층에서 상황을 보고 왔는지 이치카는 거침없이 다가와 카노와 뱀 사이에 굳건히 섰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별거 아냐. 마주친 김에 가벼운 이야기를 조금."
"…그래?"
"응, 정말로."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게 네 역할이 아니라면."
날카롭게 둘의 대화를 끊은 뱀은 눈짓으로 이치카를 가리켰다.
"이쪽이 그 역할인가?"
"…글쎄. 일단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되겠군."
"애들은 자야 할 시간이잖아."
상황에 맞지 않게 다감한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고개만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뱀이 미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는…"
"그러니 어른끼리 이야기하는 건 어때?"
목소리가 다가올수록 먹에 흰색 물감을 탄 듯한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루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휘휘 흔들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두 아이가 자리를 피해주자 하루카가 똑바로 서서 뱀을 마주 보았다. 완전히 다른 두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같은 점이라고는 붉은색 단 하나였다. 침묵 속에서 하루카의 둥근 눈이 곱게 접혔다.
"아니면 이쪽이 더 이야기하기 편할까?"
어둠을 가리고 하얀 끈 같은 것이 튀어나와 하루카를 감싸기 시작했다. 잿빛 머리카락은 점차 희게 변해가고, 선명한 붉은 색이었던 눈에선 점차 채도가 빠져갔다. 지난 여름날에 머물러간 모습으로 그가 부드럽게 상대방을 불렀다.
"형제."
"있잖아."
멍하니 마리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리와 닮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있었다. 아까까지 마리의 분홍빛을 보아서 그럴까. 순간 코노하씨가 우리 곁에 돌아온 줄 알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탁하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시야를 감질였다.
"하루카씨?"
"코우스케가 눈이 맑아지는 뱀의 기억을 보는 게 힘들다면 내 기억을 보는 건 어떨까?"
하루카씨는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부분을. 설마. 두근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져 바로 내 귀 옆에서 심장이 뛰는 것만 같다.
"더 정확히는 또 하나의 나, 코노하의 기억을."
"코노하씨를 말임까?"
"응. 코노하도 눈이 맑아지는 뱀이 다시 나타나는 데에 일조한 것 같고, 마리의 말처럼 기억을 가진 사람의 감정이 영향을 준다면 차라리 이쪽이 덜 괴롭지 않을까 해서."
"그렇지만 지금 코노하는 없잖아? 어떻게 본다는 거야?"
"내가."
어쩐지 목이 바짝 타서 마른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겨우 꺼낸 목소리는 까끌까끌했다.
"제가 꿰뚫어 보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자아가 있든 없든 내 눈이면 뱀은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코노하씨를 보면…"
"그 이치카쨩의 시선을 내가 세토에게 이어준다, 맞지?"
"시라키씨, 누나."
"능력의 연계라니. 복잡해보인다만 가능할까?"
"가능해."
모두의 시선은 마리에게 향했다. 순진무구하며 한 없이 깊은 눈빛으로 모든 시선을 마주한 마리는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탓인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한 번 꾸물거린 것 같았다. 마치 메두사처럼. 아니, 메두사답게.
"모두의 능력은 내가 합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어."
"마리…"
"세토는 어때? 코노하의 기억, 볼 수 있을 것 같아?"
세토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루카씨가 세토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믿으라는 뜻일까.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이 참 이상하게도 듬직한 어른처럼 보였다. 아. 머릿 속을 스치는 생각에 잇새로 작은 감탄이 흘렀다. 그러고보니 마리가 기억을 전달받을 때 신타로씨와 아야노 선배의 마음이 같이 전달되어 괜찮다고 했던가. 그래서 하루카씨가 본인으로 해보자고 한 걸까. 하루카씨에서 나로, 나에게서 아야노씨로 전달되어 세토에게 전해진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하루카씨와 눈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미소는 마치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해주는 것 같았다. 그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주변 분위기에 마음이 놓인 건지 세토도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럼 해보겠슴다!"
그 말과 동시에 모두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그래서?"
눈이 맑아지는 뱀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였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은 마치 혀처럼 하루카의 전신을 훑었다. 일단은 들어는 주겠지만 하나라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공격하겠다는듯이. 노골적인 태도에도 하루카는 태연자약하게 손을 내저었다. 코노하와 같은 모습으로, 코노하와는 다른 식으로 웃으면서.
"하하. 그렇게 보채지 마. 과정 말 안 했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믿을 것 같았단 말이야."
이제와서 코노하의 기억을 봤다고 하면 믿겠어? 하루카가 눈이 맑아지는 뱀에 맞춰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하루카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코노하의 기억을 보는 데에 성공했어. 그 기억의 끝자락에서 사라져 가는 네 모습이 보였지."
하루카는 허공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코노하의 기억 속에서 눈이 맑아지는 뱀은 끝없이 손을 뻗었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자꾸만 긁어모으려 했다. 대체 코노하는 무슨 심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것일까. 또다른 자신이어도 하루카는 그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던 것은 오직 하나. 그 발버둥이 통했다는 사실 뿐.
"그리고 네가 그랬지? 이치카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그래."
"그건 정말 이치카의 목소리가 맞았어. 본인도 인정했으니까. 다만, 더 정확히는 어린 이치카라고 해야할까, 다른 세계의 이치카라고 해야할까?"
손가락으로 하루카는 허공에 그 모습을 그려냈다. 눈이 맑아지는 뱀 손에 닿은 또다른 손가락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답게 작고 보드라운 동시에 아이답지 않게 꼿꼿하던 그 손을.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검푸른 머리카락 사이 붉은 색이 자리했다. 이치카. 어린 아이인 채 아지랑이 데이즈에 갇혀있던 소녀. 몸도, 마음도 미처 크지 못한 채 비극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는 본인의 열망을 뱉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까 자신만의 생각을 솔직하게.
"아무래도 정황상 네가 이치카의 소원을 붙잡은 게 맞는 것 같아. 음. 그걸 소원이라고 해도 된다면."
"그게 무슨 뜻이지?"
눈이 맑아지는 뱀이 또다시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하루카는 여전히 기분 나쁜 내색 없이 검지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끝에 눈이 맑아지는 뱀의 시선이 닿았다. 무기질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냉정한 눈. 이렇게 보니 조금 닮은 것 같다. 그 소원을 내뱉던 이치카의 눈빛과. 그리고 어쩌면. 하루카는 손으로 한 쪽 눈을 가렸다. 보이진 않지만 열기를 통해 자신의 눈 역시 붉은 색임이 생생히 느껴졌다. 조금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생각에 그건 소원이라기 보단 저주 같아서."
손틈새로 인상을 찌푸리는 뱀이 보였다. 똑똑한 녀석이니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지금까지 모르는 척 했을지도 모른다. 눈이 맑아지는 뱀은 이치카의 소원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니 당사자가 모를 리가. 그렇지만 계속 눈을 돌리는 꼴을 하루카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친구들을 해치게 만들었던 원흉.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이치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괴로워했으면 좋겠대. 네가. 우리가 그랬던 것만큼."
피보다도 비릿한 시선을 손끝에 묻히며 하루카는 해사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게 네 이야기의 독자가 내린 판결인 것 같아."
어때? 질문이 던져지기도 전에 뱀이 하루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그 팔을 붙들며 하루카는 멀거니 생각했다. 코노하의 모습으로 미리 변해있어서 다행이다. 이윽고 고요한 밤에 어울리지 않는 굉음이 아지트에 터져나왔다.
"음, 저기요?"
"…"
"저기~ 이치카씨~?"
"…"
곤란하네. 카노는 제 팔을 거의 끌어안듯 잡고 있는 이치카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워낙 조용해서 그 소리마저 큰 것만 같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뱀은 타이밍 좋게 나타난 하루카가 데리고 가고 이렇게 덜렁 둘만 남겨졌다. 피곤하기도 하고 긴장이 풀려서 돌아가려고 하니 이치카가 카노를 붙잡고서 줄곧 이 상태.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영 불편했다. 지난밤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카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검푸른 머리카락만 보였다. 잠자다 일어났으니 트레이드 마크였던 붉은 리본은 당연히 없었다. 카노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키고 이치카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있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미안해."
"아니, 아니! 미안해할 것까진 없는데."
"미안해."
말 끝이 젖어있다. 놀란 카노가 이치카를 억지로 떼어냈다. 이치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만은 카노 눈에 또렷하게 보였다. 저절로 눈이 커지며 입이 다물어진다.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그건 내가 한 게… 아니, 그렇지만 그건 나고…"
"이치카쨩."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과거의 나는…그래선 안 되었어. 어떻게 그런 걸 벌이랍시고 함부로 입에 담아서…"
"나 좀 봐봐, 이치카쨩."
카노가 무릎을 굽혀 억지로 시선을 맞추자 그 뺨 위로 이치카의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엔 이치카가 놀라 입을 헙 다물자 카노가 선선히 웃으며 이치카의 눈가를 손끝으로 닦아주었다.
"나는 이치카쨩 마음 이해해."
"그렇지만 나 때문에 뱀이 나와서 너나 모두를 무섭게…"
"애초에 이치카쨩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구?"
"아냐, 나는 그냥 보조였을 뿐이니까. 어차피 내가 없었어도 분명 모두는…"
"기억나?"
카노가 검지손가락 하나를 제 입에 갖다 대며 이치카의 말을 끊었다. 어리둥절하게 젖은 눈을 끔벅거리는 이치카는 퍽 어려 보였다. 평소보다도, 동시에 제 나이에 맞게. 이런 애가 자신을 달래줬다고 생각하니 새삼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카노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펼쳐 조심스레 뺨을 감싼 채 이치카의 고개를 서서히 올렸다. 자연스럽게 이치카의 시선이 카노 발끝에서부터 얼굴까지 순차적으로 훑었다. 마침 다시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카노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그 날 밤 이치카쨩이 내게 해준 말."
"그 날 밤?"
"아무래도 오늘은 이치카쨩한테 그 말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내가 해줄게. 양심이 있는데 받은 만큼은 해야지."
"무슨…"
카노는 양팔을 과장되게 펼쳤다. 이치카가 무어라 말을 끝맺기 전에 조심스레 이치카를 안았다. 안았다고 하기엔 팔이 약간 몸에서 붕 떠 있었지만, 손바닥만은 제대로 이치카의 등에 닿았다. 퍼져나가는 온기에 이치카는 그제야 카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숨을 삼켰다. 곧이어 느린 박자에 맞춰 카노가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둘의 거리가 가까워 위로하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속삭여졌다. 간지럽기도 하고 복받치는 느낌에 이치카는 쓰러지다시피 카노에게 기댔다. 카노와 다르게 힘껏 상대를 끌어안은 이치카가 그 품에 울음을 묻었다. 치사해. 반칙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눈물에 푹 잠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걸 알아들은 건지 카노는 그저 작게 키득거리며 더 세게 안아줄 뿐이었다.
그날 밤과는 달리 이치카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었다. 카노가 안아 그 모습을 가려버렸기에 멀리서 본다면 그냥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막상 안고 있는 카노조차도 이치카의 어깨가 작게 들썩거리지 않았으면 우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밤이니까, 모두 자고 있어서 참는 것일까. 아니면… 카노는 슬슬 이치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새벽녘을 닮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치카가 예전에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고 했던가. 카노의 눈빛이 낮게 침잠했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이치카가 집에 돌아갈 때 몰래 따라가기도 했고, 얼마 전엔 직접 부모님도 뵌 적이 있으니까. 그걸 모르더라도 딱 보면 좋은 환경에서 자란 티가 난다. 그래도 환경이 어떻든 아무래도 가족이 단 둘뿐이면 맘 놓고 울기 힘들지. 하나뿐인 가족을 슬프게 할 수 없으니까. 카노는 이치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같이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익숙한 향이 났다. 카노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이치카가 한 번 움찔하더니 카노를 밀어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가와 양 뺨이 불그스름했다.
"이제 괜찮아? 더 울어도 되는데."
"됐어. 충분해."
"정말로~?"
"…놀리지 마."
"아하하, 기분 나빴어? 미안해."
카노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밤이라서 목소리는 작지만,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태도. 속이고 있구나. 이치카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눈가를 문질렀다. 본인이 해놓고 본인이 부끄러워하면서 속여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더 부끄러워지잖아. 괜히 모난 마음을 접고 이치카는 짧게 한숨을 뱉어냈다.
"아냐. 덕분에 기분은 나아졌어. 고마워. 그렇지만 오늘 일은…"
"비밀이란 거지? 알고 있어. 이치카쨩도 저번에 나 울었던 거 비밀로 해줬잖아."
"설마 공평하게 오늘은 나만 울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시답잖은 대화로 분위기를 풀어가던 그때 이치카의 뒤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뇌를 찔렀다.
"설마 하루카군…"
"히요리!!!"
카노의 시선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치카는 달려 나갔다.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내려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을 벌컥 열었다. 실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멈출 수는 없었다. 굉음에 깬 건지 검은 눈을 비비던 히요리가 이치카와 눈이 마주치자 와작 인상을 구겼다.
"몸을 빼앗아줘, 얼른!"
"알고 있어요!"
별다른 설명이 오간 것도 아닌데 역시 얘기가 빠르다. 히요리의 눈이 잠시 붉게 빛난다 싶더니 곧장 작은 몸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치카도 서둘러 자신의 눈을 빛냈다. 우선 당장 눈앞에 있는 히요리의 몸 상태는 정상. 고개를 올리자 하루카씨의 목을 붙들던 뱀이 스르륵 손을 놓았다. 잔뜩 구겨진 표정은 아까 본 히요리와 똑 닮아있었다. 하루카는 붙잡혔던 목을 잡고 두어 번 기침하더니 흐리게 웃었다. 눈이 붉고 몸 상태에도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 걸 보니 능력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다…"
이치카가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내자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단원들이 모두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하하, 고마워. 덕분에 안 다쳤어."
"안 다치기는! 네 목 좀 봐!"
타카네씨는 거의 비명 지르듯이 하며 하루카씨의 몸을 살폈다. 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남아있었지만 하루카씨가 진정하라며 양손을 저을 때마다 서서히 옅어져 갔다. 그만큼 두 눈의 색은 선명했지만. 새삼스럽지만 정말 엄청난 능력이구나. 혹시 몰라 계속 하루카씨의 몸 상태를 살피던 나는 서서히 눈에서 열기를 뺐다. 이젠 정말 습격을 당했다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옆에 있던 아야노 선배는 나를 한 번 흘끔 보고는 하루카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루카 선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으응. 같이 얘기하다가 저쪽이 화내지 뭐야."
"얘기라면 혹시…"
"코노하의 기억."
아. 모두의 입에서 한탄이 새어 나왔다. 타카네씨는 아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참지 못하고 등을 한 대 크게 쳤다.
"갑자기 이런 밤중에 뭘 한 거야!"
"아, 아파! 타카네! 그렇지만 뱀이 먼저 방에서 나왔는걸."
"눈이 맑아지는 뱀이?"
"슈우야랑 이치카랑 먼저 얘기하고 있길래 내가 데려간 거야. 아, 맞다. 이치카 괜찮아?"
"네?"
"아까 표정이 안 좋길래… 어라, 혹시 울었어?"
"아니요."
"으음."
하루카씨가 지긋하게 바라보길래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말 자체는 태연스레 잘 나왔지만 얼굴을 빤히 보면 역시 티가 날 터였다.
"아무튼 그래서?"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히요리가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맑아지는 뱀의 모습을 한 히요리가.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나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일단 내가 또 이 몸을 계속 잡아두고 있으면 돼?"
"음.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해주겠나."
"어쩔 수 없네. 기분 나쁘지만.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건 알지?"
"물론이다. 그 전에 수를 찾아야지."
키도가 단장답게 단언하자 주변 애들이 동의하듯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만 꼿꼿하게 서서 바닥만 노려볼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참 이상한 몸이야."
"이상하다니?"
히요리는 뱀의 몸으로 손을 느리게 쥐었다 펴며 말을 골랐다.
"시간이 이런데도 딱히 졸리지 않아. 며칠 동안 방에만 있었으니 식사도 안 했을 텐데도 배고프지도 않고. 무언가 필요하다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어."
"그러고 보니 마리도 우리랑 만나기 전에는 밥을 안 먹었다고 했었죠?"
"지금은 매 식사마다 오늘은 뭐냐고 묻지만 말이다."
"키, 키도…! 그러면 내가 먹보 같잖아!"
"하하, 잘 먹는 건 좋은 검다."
"밥만 그러면 다행이지. 심야 애니 보다가 늦게 일어나기도 하잖아~"
"카노!"
"어쩌면 그게 뱀의 특징일지도 모르겠어."
투닥거리는 대화에 하루카씨의 말이 툭 던져졌다. 날카로운 말투와 달리 어조가 너무나도 평이해서 오히려 위화감이 일 정도였다.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저 멍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깊고도 공허했다.
"잠시 코노하의 몸으로 돌아갔을 때 느꼈는데, 부족한 게 없어서 오히려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부족한 게 없다는 건 곧 필요하거나 바라는 것도 없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오히려 텅 비어있는 느낌이야. 그래서 소원을 먹는 걸지도 모르겠네."
"나는 텅 비어있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마리는 마리니까요."
세토가 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흘러내린 양 옆머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해사하게 웃는 마리를 보자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속이 턱 얹힌 기분이었다.
"대화도 좋지만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하지. 오늘 키사라기들도 다시 아지트에 와서 얘기하겠다고 했으니 다 피곤한 상태면 곤란해."
"그렇네~ 자, 이만 자러 갈까!"
"안 자면 키 안 큰다."
"…그거 꼭 나를 곁눈질 하면서 말해야 했어, 키도?"
"그래도 저 아저씨보다는 크겠지."
"아무렇지 않게 심한 말을 한다, 히비야군?"
도란도란 분위기를 풀어나가며 흩어지는 모두를 한 발짝 뒤에서 지켜봤다. 마치 이 공연의 관람객처럼. 나는 지긋이 답답한 가슴을 눌렀다.
"괜찮아…"
슈우야 덕분에 기분은 나아졌다. 하지만 기분과 현실은 엄연히 별개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뭘 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 밤도 푹 자기엔 글렀다.
점점 더 빠져든다. 푸른 하늘을 마주 보며 그와 똑 닮은 심연 속으로. 방울이 되어 날아가는 공기는 구름과 꼭 닮아있었다. 위도 아래도, 과거도 미래도 애매모호한 공간에서 분홍빛만이 선명히 빛났다. 기쁜 듯, 그래도 조금은 아쉬운 듯 나른하게 눈꺼풀이 감기어 간다. 산화되어 가는 육체 사이로 태양 빛과 형제의 발악이 빠져나간다.
이제 이 몸의 본래 주인이었던 하루카를 구할 수 있다. 그 아이를 구할 거란 약속도 지킬 수 있다. 텅 비어있던 몸이 온전하게 채워지는 기분이다. 이걸로 더 이상…
「눈부셔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그저 푸르기만 했던 하늘이 점차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간다. 그 안에서 빛나는 2개의 태양은 더없이 붉었다. 그 시선이 물었다. 이게 맞는 엔딩이냐고. 나에게 묻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섬뜩하여 입을 다물었다.
"목숨 대신은 싫어!!!"
형제는 자신의 목소리에 묻혀 저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그 비명마저 있지도 않은 심장을 아릿하게 했다. 소원. 다른 말로 욕망. 늘 나에게 부족했던 것. 나 자신에겐 없기에 그토록 타인의 것을 끌어오고 싶었다. 하루카의 소원도, 히비야의 소원도. 이제 그것들이 온전히 나를 채울 터인데도 막상 눈앞에 또다른 소원이 들이밀어지면 눈이 멀고 마는 것이다.
네 말이 맞아. 이치카. 나에게 너희들은 항상 너무나도 눈부셔.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부러울 정도야.
아, 그렇구나. 나는 너희를.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애매모호한 세계에서 위와 아래가 정해졌다. 가라앉은 형제는 아래, 남아있는 열망은 위에. 이제 모래알정도 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 육체도, 이 세계마저도 너희의 뜻을 막을 수 없어.
「당신이 그토록 질투하는 저 세상에서, 아자미를 비춘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걸 바란다면 내가─
"─정말 그걸로 괜찮아요?"
손을 뻗어 코노하씨를 힘껏 잡았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코노하씨가 얼기설기 엮어가며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연필로 죽죽 그은 러프처럼 흐릿한 코노하씨가 나를 보며 옅게 웃었다.
"'나'는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없다는 거 알지?"
"알아요. 당신은 '코노하'씨가 아니니까. 이건 그냥 아까 본 기억을 리플레이하는 나의 꿈이니까."
코노하씨치고는 빠른 목소리. 가짜라는 티가 나서 나는 울음을 참으려 눈을 꽉 감았다. 그럼에도 코노하씨가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눈을 아무리 감아도 틈새로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져 코노하씨의 얼굴을 적셨다. 코노하씨는 분명 웃고 있는데도 나 때문에 우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셨어요?"
결국 질문을 던졌다. 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알아도 참을 수 없었다. 나와 함께 눈이 맑아지는 뱀이 이곳에 나오게 한 원인. 꿈속이라 할 지라도. 아니, 오히려 꿈속이니까 코노하씨에게라도 원망을 쏟아내지 않으면 답답할 것만 같았다.
"내가 뭐라고, 그 뱀은 또 뭐라고 그렇게 손을 내미셨냔 말이에요!"
"그렇지만…"
"차라리 코노하씨가 사는 게 더 좋잖아요! 본인이 살고 싶다고 바란 적 정말 없으세요?"
빽빽 외치다 보니 목이 갈라졌다. 그럼에도 한 번 쏟아져 나오는 말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소리칠 때마다 코노하씨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남들만 위할 수 있는 거예요? 코노하씨는 정말 본인이 살길 바라지 않았나요? 애초에 본인 스스로 바라는 게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런 건 살아도 산다고 할 수가…"
"응, 그래서 내가 사라지고 하루카와 형제가 살아남은 걸지도."
코노하씨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코노하씨는 여전히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한 그 어떤 말들도 코노하씨에겐 자그마한 파문조차 일지 못한 것만 같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입만 벙긋거리자 코노하씨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나는 항상 모든 게 신기했어. 무언가 바라는 게 많은 너희가."
나, 너희. 자신과 우리를 구분 짓는 단어. 코노하씨가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걸 이제야 실감하고 만다. 코노하씨가 있었을 때도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도 못했고, 함께한 시간은 무척이나 짧다. 그런데도 막상 눈앞에 선이 그어지는 걸 보니 도저히 허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절로 손에서 힘이 빠지자 코노하씨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뒤늦게 손을 뻗어봐도 잡히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유령처럼.
"이치카."
상황에 맞지 않게 코노하씨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러니하게 그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예고에도 없던 비가 쏟아져 내리며 나와 코노하씨를 푹 젖게 했다.
"네가 바라는 건 뭐야?"
그렇게 묻는 코노하씨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져 여러 번 덧칠해 버린 수채화처럼 탁해져 간다. 점점 잿빛이 되어가서 그럴까. 덧없는 미소 위에 하루카씨가 겹쳐 보였다.
"나아가."
그걸 바란다면 네가─
"헉…!"
숨을 토해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새벽인지 어두컴컴한 시야는 아까 그 아지랑이 데이즈를 연상하게 해 정신이 어지러웠다. 얼굴은 눈물로, 몸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새벽녘 한기가 닿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꿈? 그게 정말 단순한 꿈?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내 다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떨림이 멎을 때까지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모두를 생각하면서.
이제 곧 가을이구나. 막상 떠오른 햇빛은 여전히 뜨겁지만 꽤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아야노는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머플러를 하지 않으니 맨 목에 찬 공기가 바로 닿아 더 실감이 났다. 끝나지 않는 8월도 어느새 이번 주면 끝나간다. 시원섭섭함을 달래듯 마지막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아야노는 기지개를 쭉 켰다. 오늘도 늦여름 하늘을 시원스레 파랗고, 구름이 크게 얹혀 있었다. 신타로는 점심에 온다고 했으니… 아야노가 남은 시간과 할 일을 손가락을 접어 세고 있을 때 뒤에서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까만 문틈 사이로 검푸른 머리카락이 먼저 흘러나왔다.
"저기, 아야노 선배. 잠깐 상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치카쨩."
이름을 부르자 이치카가 왜인지 민망한지 제 팔을 문지르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언제나 무덤덤했던 아이가 이러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아야노는 일부러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드디어 가족 찬스가 필요해진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헤헤, 미안. 슈우야랑 잘 지내는 것 같길래."
이 말에는 대꾸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아야노는 작게 웃으며 의자 2개를 끌어왔다. 앉아서 얘기하자는 뜻을 눈치채곤 이치카가 곧바로 아야노 옆에 앉았다. 나란히 앉아 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이런 늦여름에 이상하게도 어느 한여름이 생각났다. 지금과 달리 해가 다 지고 팬저마스트가 울려 퍼지던 그때, 가족에게도 말 못했던 걱정을 이 아이에게 흘려 버렸었다. 뒤늦게 두려워서,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 하는 게 괴로워서. 이제와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었다. 아야노는 자신도 모르게 제 목을 매만졌다. 그때와 달리 아야노의 목에는 붉은 머플러가 없었다. 대신 이치카의 붉은 리본은 여전히 머리 뒤쪽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거기가 자기 자리라는 것처럼.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을 때 이치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에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처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아야노 선배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번에는 아야노가 입을 꾹 다물 차례였다. 마침 생각하던 그때의 자신과 이치카가 닮아 아야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이치카쨩 그건..."
"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이치카는 그저 자기 말을 쭉 늘어놓았다.
"마리도, 슈우야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괜찮다고 해주었지만 솔직히 제 맘은 편치 않아요. 저는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될까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야노는 고민했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하면 이 아이의 고민이 길어지기만 할 것이었다. 반대로 뭐라도 해야 한다고 하면 과거의 자신처럼 무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민의 끝에 아야노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 자신이 있던 아지랑이 데이즈와는 정반대인 풍경. 그 위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이치카가 어른거렸다. 그래, 이 아이도 나와 다르지. 아야노는 고개를 돌려 이치카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이치카 역시 고개를 돌려 아야노를 보았다. 마주 본 시선은 목소리보단 침착하여 웃음이 나왔다.
"있잖아, 이치카쨩. 내가 아지랑이 데이즈에 들어가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니?"
뜬금없는 소리에 이치카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아야노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이 아이는 분명 본인만의 답을 이미 갖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멋대로 답을 내기보다는 참고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이 더 나았다. 이 아이는 자신보다 똑똑한 아이니까.
"내가 뛰어내린 것마저 그 뱀의 속셈 중 하나라는 걸 알았을 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모든 걸 잃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낀 감정은. 그건 정말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표현하기 마땅한 단어가 없어 웃으며 얼버무리니 아야노 대신 이치카가 표정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말란 뜻으로 아야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로 갈 수는 없어. 우리는 과거를 끌어안고 미래로 가기로 했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연장선이라고 해야 할까?"
"연장선…"
"이치카쨩,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냐고 물었지? 내가 보기엔 그 반대 같은걸. 하고 싶은 게 있는 거 아냐?"
"…"
"이치카쨩, 우리가 괜찮다고 한 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
아야노가 손을 뻗어 이치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영 어색한지 이치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결결이 손가락에 감기고, 그 끝에 붉은 리본이 걸렸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을 즐기며 아야노가 곱게 눈을 접었다.
"나랑은 결이 다르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말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 괜찮아. 우리는 네가 뭘 하든 함께 앞으로 나아가 줄게."
"저는…"
이치카가 말을 끊고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에 아야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치카의 시선이 한참 애꿎은 바닥을 긁다가 결국 아야노와 마주했다. 검푸른 눈동자에는 열기가 일렁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가 겪은 모든 루프의 기억을 알고 싶어요."
"역시 그런 거였구나."
이치카의 대답에 아야노는 그만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고 말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 중에서 나한테 왔던 거였구나. 기억을 전해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아야노는 이치카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더니 이내 힘주어 잡았다. 세토 때와 다르게 전해줘도 괜찮을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야 이 아이는 우리와 함께하기 전부터… 아야노가 숨을 잠시 들이마시고 눈을 꾹 감았다 뜨니 검기만 했던 두 눈이 피보다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응, 전해줄게."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독자인 너에게.
"저기, 누나. 왜 이번엔 이치카쨩이 틀어박힌 거야?"
"아하하…"
"이치카쨩 무슨 일 있나요?!"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
카노와 모모의 공세에 아야노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기억을 전해준 직후 온몸을 벌벌 떨던 이치카가 떠올라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뭐라도 말해야겠다 생각했는지 한참 동안 입을 오물거리던 이치카는 잠시 혼자 있고 싶다며 방 안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키사라기 남매가 올 때까지 쭉 같은 상태. 어느덧 3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야노가 눈가를 비비니 신타로가 알 만 하다는 듯 한숨 섞인 말을 내쉬었다.
"결국 전해준 거야? 그 기억을."
"응, 하나도 빠짐없이. 으음, 그게 꽤 무겁긴 하지."
"무슨 물건 드는 것처럼 말하네요, 누나."
"그래도 이치카라면 괜찮을 거야."
"뭐, 저 녀석이라면 그냥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쁜 거겠지."
신타로가 아야노와 카노 사이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가 출렁이자 카노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목을 과할 정도로 꺾으며 카노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던졌다.
"신타로군~ 묘하게 자기가 이치카에 대해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네?"
"그야 이전 루프 기억들도 있으니까. 잘 안다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우리 루프에 함께 하기 전까지는 모르지만."
"우리 루프에 함께 하다니? 이치카쨩은 휘말린 게 아니야?"
모모가 소파 뒤에서 신타로의 양어깨를 꽉 붙들며 묻자 신타로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정도로 엄살은! 모모가 붙잡다 못해 아예 앞뒤로 흔들자 신타로의 목소리가 여지없이 떨렸다.
"휘, 휘말렸다면 휘말린 거고 선택했다면 선택한 거지!"
"뭐야, 그게."
"우연이든 뭐든 나는 모두와 함께하고 싶다는 거지."
"와악!"
"이치카쨩!"
"미안, 많이 기다렸지?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좀 오래 걸려서."
이치카는 세 명이 앉아 꽉 찬 파 옆에 기대어 섰다. 카노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하자 이치카는 짧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숨을 잠시 고르고 이치카는 물꼬를 텄다.
"사실 지금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횡설수설할 것 같은데. 그래도 다들 들어주실래요?"
"얼마든지."
"그보다 새삼스레 그런 거 묻는 거야?"
"그것도 그렇네."
헛웃음이 새어 나오며 이치카의 표정이 살며시 풀렸다. 한층 편안해진 이치카가 기억을 더듬으며 나른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직도 과거의 내가 그런 걸 바란 것도, 그게 이루어진 것도 용서되지 않아요. 그때 메카쿠시단도 아닌, 그냥 관찰자에 불과한 내가 멋대로 흘린 말이니까. 그렇지만."
이치카는 잠시 말을 끊고 옆쪽을 바라봤다. 아야노, 신타로, 카노. 이차카가 가장 신뢰하는 세 사람. 그 세 사람이 모두 시선이 마주치자 제각기 다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고, 지금의 나는 메카쿠시단의 단원이니까."
이치카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는 마치 힘을 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그냥 관찰자가 아니다. 모두와 함께 선택하는 입장이니까 당당해져도 된다. 이치카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부릅떴다. 모두를 한 시야에 담으며 청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메카쿠시단 NO.11 시라키 이치카. 그 뱀의 처분에 대한 제안이 있어요. 모두 다 같이 정해주세요."
겁을 먹어 너무 빙빙 돌아와 버렸다. 이 불합리한 세상에 휘둘러질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선택으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이번에도 똑같다. 우리가 정하고 나아가자. 늘 그래왔듯이.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어둠. 또다시 어둠으로 돌아왔다. 또 그 꼬맹이가 내 몸을 빼앗았나. 이번에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았던 시간.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풀어내는 녀석의 눈빛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이전에 봤던 시선들이 겹치어 보았다. 몇 명은 적대감 어린 눈으로 날 노려봤고, 몇 명은 시선을 내 쪽으로 아예 돌리지도 않았었다. 어린 녀석들이 그래봤자 간지럽지도 않았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그저 사실만 전한다는 태도가 더 속을 들끓게 했다. 심지어 형제의 모습을 한 채로.
어째서 주인과 여왕은 너희 같은 존재를 사랑한 것이지.
나는 그냥 잊히게 두고서.
분명 당신을 바랐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그 소원으로부터 태어난 나는 그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그건 나의 것이었다. 나만이 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이 그 의문에 억지로 답을 새겨 넣었다. 아자미, 아무렇게나 피어있던 꽃의 이름. 한 소년병의 아내이자 어린 딸의 어머니. 그게 주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우리와 이 세계를 탄생시킨 주인이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만 정의해지는 존재일 리가 없다. 그런 불완전한 존재일 리가.
나는 정답을 찾아야만 했다. 위대한 주인에게 어울릴 정도로 완전무결하게. 그걸 위해서라도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 마음 하나로 내 존재를 연명해 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전부 필요 없었다고 해버리면, 그 노력의 결과가 이것이라면 내가 뭐가 되는가.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나는 무엇인가.
죽음에서 벗어나려 소원을 갈구하다 보니 이제 그로부터도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만의 육체를 얻고, 소원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주식으로 삼고, 어느 날 갑자기 불완전한 세계로 튕겨 나갔다. 이젠 소원이 없이도 살아남아 인간처럼 더러운 숨결을 내뱉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어째서 이러한 의문에 얽매여야 하는가.
아예 이 어둠에 잠식된다면 이 끝없는 미지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게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적어도 당신은 내가 있음으로써 그 공포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는데, 나에게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고 순순히 눈을 감자니 죽음의 공포가 또 고개를 내민다. 역시 사라지기는 싫다. 죽고 싶지 않다. 소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와 당신에 대한 충성심마저 깎아내며 이어온 삶이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누가 나를 바라봐 줘.
잊지 말아줘.
발견해 줘.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지만 어쩌면. 수많은 루프 속에서도 한결같이 날 노려보던 그 눈이라면. 항상 최선책을 찾아 움직이던 그 눈이라면. 무언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역겹다. 그렇지만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날 억지로 끄집어낸 것처럼. 부유하는 정신 상태로 위로 손을 뻗었다.
"다시 한번, 안녕. 눈이 맑아지는 뱀."
눈을 뜨니 붉은색이 나를 보고 있었다.
"혼자 온 건가?"
"그래."
"대담하군 그래."
"새삼스레. 그보다 유예 기간은 끝났으니 서론은 건너뛰고 결론부터 이야기할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뱀을 천천히 관찰했다. 몸을 빼앗기기 전에 한 얘기가 얘기이다 보니 바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하루카씨와 대화하기 전까지 방에 박혀있던 뱀이니 그냥 체념하고 원래대로 돌아간 걸지도 모른다. 체념 따위도 용서할 마음 없지만. 나는 뱀의 앞에서 보란 듯이 양손을 펼쳐보았다. 아무것도 없건만 뱀은 내 손이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너에겐 2가지 선택지가 있어."
이윽고 왼손을 강하게 쥐었다.
"원래대로 마리에 의해 석화된 후 아지랑이 데이즈에 갇히는 것."
원래 맞이했던 우리의 엔딩이다. 이제 마리도 여왕 뱀을 제어도 가능하고, 세토와 아야노 선배의 능력 덕분에 제각각인 우리가 한 마음으로 모아 메두사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몇 차례의 실험으로 마리가 굳이 우리의 뱀을 취하지 않고서도 아지랑이 데이즈를 다시 여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놀란 아자미와 마주 보는 것은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주치자마자 혼났지만. 끝나버린 세계에 가까운 곳이니 뱀의 건이 아니면 열지 말기로 정한 후에야 풀려났지.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반대쪽 손은 아예 뒤집었다.
"아니면 모든 기억을 가린 채 이 세상의 구석에서 살아가는 것."
참 우습게도 내가 제안한 선택지였다. 모든 기억을 전해 받았지만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바랐는지는 결국 알지 못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다른 관점에서 모두의 여름을 본 내가 한 생각이다. 그래서 어차피 이렇게 다른 엔딩이 나와 버렸으니 한 번 받아들이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제안했다. 과거의 내 생각은 알 수 없었어도 이번에 키도의 능력이 기억까지 가릴 수 있다는 걸 알기도 했으니까.
"안식과 망각 중에 무엇을 고를래?"
주먹 쥔 손과 뒤집힌 손을 뱀 앞으로 쭉 내밀었다. 뱀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군. 나에게 선택권이 있기는 한 건가?"
적나라한 비웃음에 양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고통이 박혔다. 아픈 소리 내는 대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들으라는 듯이 아주 대놓고. 그럼에도 뱀의 표정에 그 어떠한 요동도 볼 수 없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의자에 등을 푹 기대자 끼익 소리가 났다. 다리를 꼰 채 빙글 한 바퀴 돈 나는 뱀을 바라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야기나 할까, 눈이 맑아지는 뱀."
뱀이 슈우야에게 했던 말을 따라 하며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천천히 깜박일수록 눈에 서서히 열감이 오른다. 이윽고 온전히 붉어진 눈동자를 올려 뱀을 담았다. 그에게 떠오른 불쾌함과 다소의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을 꼼꼼히 꿰뚫어 보고 나서야 느리게 말을 꺼냈다.
"무거운 얘기 하는 게 내 역할이냐고 물었지?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내 역할인 게 맞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나에게 준 역할이 그랬잖아. 툭 치듯 물으니 뱀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나와 뱀이 마주 보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상황. 아야노 선배가 전해준 기억 속 몇 번이고 나왔던 장면이 저절로 생각했다. 표정은 서로 바뀌었지만. 나는 떨리는 두 손을 지 낀 채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 건너뛰어 버렸던 서론부터 차근차근 시작할까."
나름대로 뱀이 했던 걸 흉내 내며 손가락으로 손등을 톡톡 쳤다. 나름대로 내용을 정리하고 왔건만 막상 말하려니 긴장감에 흐릿하다. 내가 신타로씨였다면 좋았을 텐데. 뭐든 잊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온 건 내 선택이다. 나만 할 수 있는 게 있으니 내가 이 자리에 있다. 침착하자. 입을 여는 동시에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한 존재가 있었어."
"설마 지금 하자는 이야기가."
"일단 들어. 네가 했던 것처럼 총이라도 쏴야 할까?"
검지손가락을 들어 내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의사를 전했다. 뱀은 인상을 와작 구겼지만 의외로 더 뭐라 하지 않았다. 하루카씨처럼 목 졸리는 것도 각오했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다.
"대체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이제 와서? 뭐냐고?"
진심으로 묻는 건가 싶어 뱀을 천천히 위아래로 바라봤다. 지금 네 꼴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안 하고 어떻게 뭘. 다행히 눈빛으로도 설명은 다 되었는지 뱀이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이어서 계속할게. 그 존재는 이 세상의 변화를 쭉 지켜봐 왔어. 그러면서 무언가를 하나씩 바라게 되었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모와 신타로씨가 왔을 때만 해도 햇빛이 쨍쨍하던 한낮이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꽤 길어져 어느덧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파랑과 빨강이 오묘하게 공존하는 하늘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뱀의 눈앞에 양손을 쫙 펼쳤다. 아자미가 가졌던 뱀이 총 10가지였으니까.
"사라지고 싶다, 말을 쓰지 않고 타인을 알고 싶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다, 주목받고 싶다, 바라는 정신 또는 육체를 갖고 싶다, 어떤 것과 관련 있는 것을 알고 싶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해주고 싶다, 이 모든 마음을 통제하고 싶다…"
하나씩 말하면서 손가락을 접어보다가 결국 그냥 주먹을 꽉 쥐었다. 사전 설명은 이 정도면 되었다. 본론으로, 최초로 돌아가자.
"많은 것을 바랐지만 가장 맨 처음에 바란 소원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지."
"내가 누구인가."
대답은 기다렸다는 듯 뱀의 입에서 나왔다. 말을 끊고 잠시 뱀을 바라보자 뱀은 얼른 말하기나 하라는 것처럼 노려봤다. 슈우야를 먼저 찾아갈 때 짐작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초조했나 보지. 한숨에 말을 녹여냈다.
"그래, 그 존재는 누구라고 해야 할까."
눈을 살며시 감자 그 어두운 공간 위로 붉은 리본이 덧그려진다. 맨 처음 능력을 얻을 때 보고, 그 이후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만나고, 전해 받은 기억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이.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도 나에게 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쉬이 답할 수 없다. 그래서 들어온 것을 쭉 나열했다.
"누군가는 '괴물'이라 말했지. 그 존재를 사랑한 사람은 '아자미'라 칭했어. 그 존재로부터 태어난 존재는 '엄마'라 불렀지.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선 많은 사람이 '메두사'라고 하고 있어."
"결국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뭐가 정답이라 생각해?"
"감히 네 따위가 논할 존재가…!"
"그래. 없어, 그런 거. 이 세상에 존재에 대한 정답 같은 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오답도 아니지. 아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의문형으로 말을 끝내긴 했지만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뱀이 무어라 하기 전에 머리를 뒤로 휙 넘기며 얼른 말을 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가'하는 소원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어. 아자미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난 시점부터."
"아니, 그런 건..!"
"동시에 평생 이루어질 수 없었지."
"하?"
"그건 혼자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니까."
뱀을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자 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붉은 눈동자 속에 내 실루엣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내 눈도 마찬가지일 거다. 거울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는 자신 혼자만 있어선 알 수 없어. 스스로를 비춰줄 무언가가 필요해."
"그래서? 그래서 생겨난 게 이 빌어먹을 세상 아닌가."
"맞지. 하지만 하나 더 있었어."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린 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끝에 뱀이 찍혔다. 너. 말로도 간단명료하게 짚어주니 아자미를 닮은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자미는 스스로를 비추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너를 만들어낸 거야. 자기 자신이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그래서 너만이 유독 자아가 강했던 거 아닐까. 지금처럼 다시 나타난 것도 과거의 내 소원과 코노하씨의 힘도 있지만, 결국 너의 근원은 아자미의 분신 같은 거였기 때문일지도 몰라."
"할 이야기라는 게 이딴 두루뭉술한 얘기였나? 어이가 없군."
"바보 같아. 너는 이미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갖고 있었는데, 모든 걸 저버리고 그런..."
그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저절로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뱀이 정말 이걸 몰랐을까?
"...아니."
알았을 거다. 현상 유지만 하면 자아 유지도 가능하다는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저버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따로 있을 거다. 그 순간 내가 코노하씨에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애초에 본인 스스로 바라는 게 없다는 게 말이 되는지, 그런 건 살아도 산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 자아가 있는 이 뱀이, 사실상 살아있다고 봐도 되는 이 뱀이 바라는 게 없었다는 게 말이 될까?
"아니야."
없을 리가 없다. 없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무엇을 바란 거지? 그러고보니 뱀이 말했었다. 이 세상이 아자미를 비추고 있다고. 비록 뱀 본인은 그릇되게 비추었다고 말했지만. 그렇다면 이 뱀을 비춘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뱀의 붉은 눈을 보며 우선 서두를 뗐다.
"너는 바라고 말았던 거야. 아자미가 노려보고 있을 때 말이야."
뱀이 한 행동들을 모두 반대로 생각하자. 그가 행했던 모든 것이 그가 바랐던 것이라고. 그렇다면 뱀은 무엇을 바랐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문자답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머리가 팽팽 돌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뱀의 능력과 소유자의 소원은 상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동안 눈이 맑아지는 뱀을 소유했던 사람은 타테야마 선생님과 히비야.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소원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다."
내 혼잣말에 뱀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가득 채우는 온갖 감정에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너는 아자미에게..."
"닥쳐!!!"
고함과 함께 목에 고통이 박혔다. 숨이 막힌다.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뱀의 손을 긁었다. 고통에 일순 능력이 풀리고 눈물이 났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뱀이 보였다. 능력이 없어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아, 정곡이구나. 다급하게 한 손으로 허공을 내저었다. 지금 히비야를 통해 모두가 나를 보고 있을 거다. 지금 나를 보면 어떻게든 들어오겠지. 아직 들어오면 안 돼. 아직은. 이제야 겨우 핵심에 다다랐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붉은 눈을 더욱 부라렸다.
"네 까짓 게 대체 뭘 안다고!"
"…모르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
졸린 목으로 말을 겨우 뱉어냈다. 모른다는 말과 달리 최대한 확신을 담아 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이 난리이니 곧 애들이 올지도 모른다. 그 안에 최대한 말해야만 한다. 나는 따발총처럼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지금까지 내가 지껄인 건 그냥 추측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정말 단순히 내 망상뿐이라면 너는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 건데?"
"감히!"
"아아, 그렇지. 모른다는 것, 즉 미지는 곧 공포였지. 잘 알고 있지?"
뱀이 마리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최대한 치켜세웠다. 명백한 조소. 도발과 고소함, 고통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내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목이 점점 조여 고개가 치켜 올라간 탓에 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숨통을 트기 위해 손가락을 세워 내 목과 뱀의 손 틈 사이로 집어넣으니 생각보다 순순히 손가락이 쑥 들어갔다. 아. 역시나 내 예상대로. 나는 묘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에 너는 날 죽이지 못해."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따위 말이 나오는가?"
"그렇다면 여태껏 왜 날 죽이지 않았지? 모든 루프에서 말이야!"
내 말에 뱀의 손이 크게 움찔했다. 그 덕분에 목이 좀 편안해져 나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말했다.
"어린 뱀이어서 다 크길 기다렸다고? 천만에! 내가 이전 루프에서 본 뱀은 어리긴 해도 어엿한 한 마리의 뱀이었어. 그럼에도 날 죽이지 않은 건, 그 모든 루프에서 나와 웃기지도 않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던 건! 내심 기대한 거 아냐? 그도 그럴 게 내 뱀의 가장 근원적인 소원은!"
모든 손가락을 내 목과 뱀의 손 틈 사이로 집어넣었다. 외모와 다르게 손이 뜨거워서 영 어색했다. 나는 그런 뱀의 손을 단단히 잡고 외쳤다.
"너는 누구인가!"
단말마처럼 목소리가 찢어졌다.
"너와 대칭을 이루듯 내 뱀은 '너는 누구인가'하는 소원에서 태어났으니까! 아자미가 너에 대해 생각한 대답이 바로 내 안에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넌 날 죽일 수 없었어. 그리고 몇 번이고 물어봤던 거야, 나한테! 마지막엔 그마저도 포기했던 것 같지만!"
내 눈에는 아자미의 속에 있던 너, 눈이 맑아지는 뱀. 너를 진작에 알아챘다면 하는 마음. 그게 아자미의 소원인지, 눈이 맑아지는 뱀 본인의 소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부터 있던 그 소원이 루프를 끊고 싶다는 소망과 뒤엉켜 내 뱀이 생겨난 것 같다. 뒤늦게 태어난 쌍둥이처럼. 그 마음에서 태어난 뱀이 엉뚱하게도 다른 뱀을 찾아냈었다. 눈에 새기는 뱀과 코노하씨. 그래서 코노하씨가 자꾸 내 꿈에 나타났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어야 했다. 여왕인 마리도, 모든 기억을 가진 신타로씨도, 루프를 푸는 키를 가진 아야노씨도 아닌 내가. 아자미를 위해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굳건히 믿던 녀석이 비슷한 소원을 갖고 나타난 나를 이 녀석이 없앨 리 없다. 더 정확히는 없앨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지는 공포. 그걸 조금이라도 떨쳐낼 수 있는 간절한 단서가 바로 나 자신이니까. 목이 조이느라 꺾였던 고개를 숙여 눈이 맑아지는 뱀을 바라보았다. 뱀의 눈동자는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면서도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은 크게 떴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이 녀석도 은연 중에 알고 있던 거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바랐는지. 이런 와중에도 고소함에 웃음이 겨워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너도 알잖아.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질문 역시 영원히 정답은 나오지 않아."
결국 보든 게 다시 제자리걸음이다. 루프보다도 더 지독하다. 내 뱀은 예외적으로 루프를 끊어내겠단 소원도 있어 자아가 사라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게걸스럽게 존재를 탐하여 마침내 실존하게 된 이 녀석은? 망각이라는 축복도, 죽음이라는 안식도 쉬이 허락받지 못한다. 아아. 그래서였구나.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코노하씨 기억에서 본 어린 내가 보였다. '나'는 이걸 다 알고 있던 걸까? 모르겠다. 몰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네 답은 스스로 찾아내. 자신이 누구인지. 아자미와 달리 네 까짓 게 과연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감히… 감히!!!"
아. 이젠 슬슬 벅차다. 겨우 끌어모은 목소리는 허공은 긁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요 며칠 이 뱀 때문에 제대로 잔 날도 드물고, 오늘은 기어코 목을 졸리기까지 했다. 이제야 한계에 부딪히는 걸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야 할 정도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세치혀를 놀렸다.
"과연 네 눈엔 보일까?"
누군가의 눈을 통해야만 보인다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그 말을 읊조리며 뱀의 팔에 손톱을 세워 박았다. 눈앞이 붉은빛으로 어지러워지며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손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요란스럽게 문이 열리며 타임아웃을 알렸다. 됐다. 할 만큼 했다. 내 차례는 여기까지다. 히요리의 눈이 붉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그러게요."
왜인지 그리운 듯한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내 꿈은 요새 이런 존재를 데려오는 게 유행인가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담은 교실 창문을 등지고 그녀가 서있었다. 익숙한 머플러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새하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그 머플러보다 더 붉은 눈으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야노 선배…라고 하면 안 되겠죠. 눈에 새기는 뱀."
「으음, 맞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호칭은 좀 그렇네.」
"선배라 부르기엔 제가 헷갈려서요. 그럼 아야노씨로 부를게요."
「언니라고 해도 되는데.」
생전 입에 담아본 적도 없는 호칭에 입을 벌리니 아야노씨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다소 짖궂은 면모에 나도 그만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루프 중에 내가 타테야마가에 있던 때도 있던 모양이다. 신타로씨 시점이라 애매하긴 한데 그때 내 호칭이 언니였던가. 하도 많은 기억을 전달받았다 보니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되짚어 보려 하자 창가에 서 있던 아야노씨가 내 쪽으로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으니 꼭 짝꿍 같았다. 학년이 달라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왠지 어색해서 머리카락이나 베베 꼬았다.
「너에게는 고마워하고 있어.」
다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꿈에서 이런 말을 듣다니. 혹시 평소에 나 사실 이런 칭찬을 듣고 싶었던 걸까. 하필이면 상대가 아야노씨라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기분이 들어 괜히 시선을 피했다.
"천만에요. 아마 제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깨달았을 거예요. 그 신타로씨니까."
「으응,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내가 고맙다고 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야.」
끼이익. 의자 끄는 소리가 나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마주한 아야노씨는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한없이 깊고 부드러워 그대로 잠길 것만 같았다.
「날 발견해 준 거, 그리고 무엇보다 신타로나 슈야의 편이 되어준 거.」
"그건…"
「내가 한 선택이긴 하지만… 결국 아무런 대화도 못 하고 이렇게 된 게 무척 아쉬웠거든.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으니까. 내용과 달리 깜박하고 뭘 두고 왔다는 것처럼 덤덤한 말투였다. 오히려 너무 무거워 입을 다문 건 내 쪽이었다. 결국 모두가 죽고 본인도 뱀이 되어서 얘기 못 하고 끝났다는 뜻 아닌가? 나도 같이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런데 그래도 되나? 내가 드물게 갈팡질팡하고 있자 그 모습이 퍽 웃긴 지 아야노씨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후훗, 지겹던 여름을 벗어났으니 이젠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앞으로도 쭉 지켜볼게. 신타로의 눈으로.」
"…네, 지켜봐 주세요. 그, 아야노 언니."
마지막에 어색하게 부르자 아야노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해사하게 웃었다. 익숙하면서도 다른 미소. 비록 꿈이지만 이 순간을 잊기 싫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안녕.
안녕.
깜박. 눈을 떴다. 온몸이 찌뿌둥하면서도 정신은 아주 개운했다. 얼마나 잔 거지.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밤이라는 거였다. 너무 어두워 능력을 약하게 쓰니 그제야 방 풍경이 보였다. 천장이 익숙한 것을 보니 역시 내 방인 것 같았다. 애들이 옮겨줬나 보다. 지금 몇 시일까. 방에 아직 시계를 갖다 놓지 않아 능력을 써도 시간을 알 길이 없었다. 일단 일어나려고 상체를 일으키니 갑자기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놀라서 몸이 굳자 천장보다도 익숙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
분명 확실하게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뭐라 말을 걸기는커녕 고개를 도로 침대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잠깐 깼다가 다시 잠드는 모습은 아닌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음, 저기."
"…"
"슈우야?"
"…응."
"얼굴도 안 봐줄 거야?"
애원하듯 말해봤지만 슈우야는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많이 화났나. 입이 열 개라도 지금은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으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처럼 고요한 밤이 아니었다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진짜 한 때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응."
"그런데 이치카쨩은 들어가기 전에 웬만하면 들어오지 말라고 했고, 목이 졸리고 있어도 손이나 내젓고 있고."
"으음, 그건 진짜로 미안."
"또."
한 글자를 짧게 뱉고 슈우야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게 애써 울음을 참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또 눈앞에서 누굴 잃는 줄 알았어."
"미안해."
뇌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튀어 나갔다.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이 맑아지는 뱀에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한 행동은 슈우야의 트라우마와 유사하다. 모두를 위한답시고 아야노 선배가 혼자만의 작전을 해버린 것과. 어떻게 해야하지? 하필 방금 막 일어난 터라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선 더듬거리며 떠오르는 말을 쭉 늘어놓았다.
"진짜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멋대로 무리한 것도 미안해. 나는 그게…"
"아하하, 이러다간 이치카쨩이 울겠네."
슈우야가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렸다. 분명 우는 것 같았는데 눈가에 붉은 기 하나 없고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그만 입을 앙다물어 버렸다. 분명 나는 어두워서 능력을 쓰고 있는데도 지금 슈우야가 속이는 모습이 보이는 거다. 그건 즉 슈우야가 능력을 세게 썼단 뜻. 그 이유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몸은 좀 어때?"
"…푹 자고 일어나서 완전 쌩쌩해."
"목이 그런 꼴인데도?"
슈우야가 손끝으로 내 목을 조심스레 쓸었다. 내가 기절해 있던 동안 치료를 해준 건지 붕대가 감겨있었다. 붕대 너머로 느껴지는 손길이 어쩐지 간지러워 몸을 움츠리자 슈우야가 바로 손을 뗐다.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할 건지 미리 알려준 건 고맙지만 다신 혼자 그러지 마."
"응, 미안해."
"1년간 들을 미안하단 소릴 오늘 다 듣는 것 같네~"
"그러면, 고마워."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손을 뻗어 조심스레 슈우야의 뺨을 감쌌다. 붉어진 눈동자를 보며 뒷말을 이었다. 괜찮을 거다. 고맙다는 건 진심이니까. 분명 진심은 전해질 테니까.
"믿어줘서."
내 말에 슈우야가 멍해지더니 이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마치 오류가 걸린 컴퓨터처럼. 뭔가 잘못했다.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과 슈우야가 내 손을 쳐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내 능력과 슈우야의 능력이 대치 중인 건지 슈우야가 울고 웃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실수했다. 진심은 늘 괜찮을 거라 생각한 내가 안이했다. 진심이든 어떻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별개인데. 초조함에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널 믿은 게 아니야. 고맙다는 소리 들을 자격 따윈 없어. 나는, 나는… 그냥 또 말리지 못했을 뿐이야."
"슈우야, 나는…"
"그렇게 자신 있게 해야 한다고 하니까. 사실은 싫었어! 남이 걱정하든 말든 앞서가 버리는 네가!"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슴에 깊게 베인다. 망연자실한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슈우야는 웃었다. 얼굴이 일그러뜨리며. 이윽고 모든 걸 덮으려는 것처럼 도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탁이야. 지금은 그 눈으로 보지 마. 제발. 제발 지금만큼은 그냥 거짓말하게 내버려둬."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슈우야에게는 보일 리가 없는데도. 어떡하면 좋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인간관계 관리는 제법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냥 처세술만 능할 뿐이었다. 갈등을 안 만들고 어쩌다 생기면 피할 줄만 알 뿐. 지금처럼 더 깊은 관계, 그것도 절대로 미움받기 싫은 상대와 갈등이 생겼을 땐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게 전혀 없다. 어떡하지. 이대로 미움받긴 싫어. 두 손을 꽉 붙잡았을 때 옆에서 다시 기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최악이야."
"…"
"이치카쨩 말고."
이번 슈우야의 목소리는 젖어있기는커녕 오히려 건조했다. 그 점이 더 마음을 짓찧어 놓았다.
"나는, 왜. 변하지 않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는 충분히 잘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 말이 너에게 통하기나 할까. 견디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정말 최악이야.
"가는 거야?"
"…이런. 여왕께서 친히 마중까지 와주시고 이것 참 영광이군요."
"보내주긴 하지만 난 널 용서할 수 없어, 평생."
"예, 응당 그러시겠죠."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뒤섞여 살아가는 게 이 세상이라는 걸 모두가 알려줬으니까. 받아들일 거야."
"어리석게도."
"뭐라 해도 이게 우리의 선택이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마리. 코자쿠라 마리."
"그런 걸 물은 게 아니…"
"시온의 딸이자 아자미의 손녀고, 메카쿠시단의 NO.4. 그리고…"
"하…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그러는 너에게 난 뭐로 보여?"
"─"
"응, 그럼 잘 가."
"마리."
"아, 이치카. 괜찮아?"
"응, 괜찮아."
몸 상태는. 괜한 말을 삼키고 아지트 문 앞에 선 마리 곁으로 갔다. 이제 해가 뜨고 있는지 이런 골목까지도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이르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녀석은 간 거야?"
"응, 갔어."
"결국은 정말 이렇게 됐네."
어쨌든 머리는 좋은 녀석이니 지금쯤이면 우리가 이미 기억을 꽤 지웠다는 걸 알았으려나. 아니, 어쩌면 선택권이 있긴 한 거냐고 물었을 때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하나 선별하여 지울 순 없어서 그냥 중간 부분을 뜯어내다시피 했으니 위화감이 꽤 컸을 거고. 아마 맨 처음 루프과 이번 루프, 기껏해야 그 직전 루프까지만 겨우 기억하지 않을까.
사실 그 녀석이 히요리에게 몸을 빼앗겼을 때 우리는 코노하씨의 기억을 봤던 것과 비슷하게 능력을 연계해서 기억을 건드렸다. 세토 대신 키도가 함께 했다는 것만 달랐다. 히요리가 억압하는 사이 내가 뱀을 보고, 아야노 선배가 전달하고, 키도가 눈을 가리는 능력으로 기억을 지운다. 정보 전달식인 세토와 직접 발동하는 식인 키도의 능력이 서로 달라 걱정했는데 이건 마리 덕분에 어떻게 조정이 되었다. 눈을 합치는 뱀. 모든 뱀을 통제하는 그 뱀은 겨우 연결만 하고 헤매는 우리를 휘어잡았다. 잘 되어서 다행이지만. 마치 누군가가 몸속에 손을 넣어 심장이 주물러지는 것 같던 감각은 아마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응. 그렇지만 히비야가 가끔씩 감시도 해줄 거고, 여차하면 히요리가 몸을 뺏어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아."
마리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예 기억을 뜯어버렸던 건 모두 결국은 뱀이 이렇게 떠나버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뱀 성격상 우리 말을 순순히 듣지 않을 테니까. 그게 전부. 그래서 기억을 지운 뒤에는 뱀의 머리카락도 조금 잘라뒀었다. …나도 그게 음습하고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렇지만 히비야의 능력은 매개체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확실한 매개체는 신체의 일부이니 어쩔 수 없었다.
여러모로 고생하며 작전을 이행했고 감시책도, 예비책도 있다. 우선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그 녀석 본인에게 달렸다. 뱀이 갔을 것 같은 곳을 쭉 짚어보다 흘끔 마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마리는 나에게 살포시 웃어주었다. 너무나도 평온해 보여 오늘 무슨 소풍이라도 갈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저기. 마리, 너는 괜찮아?"
"음… 응,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마리는 시선을 위로 던졌다. 마리를 닮은 적두운이 하늘에 걸려있었다.
"있잖아, 이치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물어봐도 돼?"
"왜냐니…"
그건 이미 모두와 의논할 때 다 말했던 것 같은데. 짐짓 팔짱을 꼈다. 그때 분명 육체는 그래도 히요리가 있으니 기억도 미리 가려놓고 뱀과 얘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렇지만 지금 그걸 물은 건 아닐 테지.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뱀에게 안식도 온전한 망각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구태여 그 논점을 흐리고 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니까 뱀 때문에 힘들어하던 내가 왜 뱀을 살리는 제안을 했는지 묻는 거다. 책망하는 걸까. 새벽 때 슈우야의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이 섬칫해졌다. 잠시 의중을 헤아리던 나를 마리가 조용히 불렀다. 언뜻 듣기엔 잔잔한 음성. 그에 왜 물은 건지 불현듯 깨닫고 조심스레 답했다.
"모든 기억을 보고 나서도 눈이 맑아지는 뱀은 정말 용서가 되지 않는 존재였어. 사실 지금도 여전히 그냥 아지랑이 데이즈에 유폐시키는 게 나았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지만 과거의 내가 바란 일이었고 그 코노하씨가 바란 몇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우리처럼 두 번째 기회를 줘봐도 될 것 같았어."
합리적인 이유를 물은 게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물은 거구나, 너는. 마리는 납득한 건지, 아니면 그냥 받아들인 건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다 한 마디를 뒤늦게 덧붙였다.
"그리고 마리에겐 좀 부끄러운 얘기겠지만 마리가 만든 동화가 떠오르더라."
"그, 그, 그 동화는 왜 갑자기?!"
"그 동화 마지막에 싸웠던 용과 친구가 되었잖아."
아직도 나에게 묻던 코노하씨의 모습이 선연하다. 괴물인 형제와 친구가 될 수 있냐고 물었던 게. 솔직히 나는 NO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당한 것도 있고, 당장 어제도 목이 졸리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친구가 되는 거랑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그리고 같은 하늘에 태양이 2개 있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와 비슷한 존재가 한 명 더 남아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아까 마리가 한 것처럼 시선을 위로 던졌다. 마리를 닮은 구름 위로 여왕이었던 마리가 떠올랐다. 날카로운 붉은 눈과 볼에 돋은 비늘 따위는 아자미와도 닮았지만 그 뱀과도 조금 닮아있었다.
"있지, 마리. 동화 속 이야기는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으음. 글쎄. 그래도 나는 믿고 있어."
하늘을 계속 보고 있는 채라 마리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목소리 톤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나와 비슷할 것 같았다. 조금은 시원스레 웃고 있을 거라고.
"나는 이미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이랑 멋진 친구들을 만나버렸는걸."
"응, 그렇네."
마리와 나는 조용히 웃었다. 이토록 불합리한 세계에서 아파했던 우리들은 또 바라고 만다.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동화 같은 엔딩이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는 있을 거라고. 어린아이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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