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차는 이야기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내가 부모님께 말도 하지 않고 타지 중학교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날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집에 오셔도 업무 뒤처리나 쉬시기만 하던 양부모님이 나를 앉혀놓고 몇 시간이나 이야기했으니까. 부모님은 몇 번이나 나를 설득했다. 아직 다시 잡을 기회가 있을 거라고, 학교 가서 얘기해볼 테니까 근처 학교로 하자고. 슬그머니 눈을 뜬 나에게 두 분의 당황스러움과 절박감, 그리고 피로감이 보였다. 내 붉은 눈과 마주치자 두 분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기다 날 꺼리는 감정까지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치 그 목숨과 맞바꿔 친 것처럼 나에겐 이 붉은 눈이 생겼다. 눈이 뜨거워지고 붉은 기가 올라오면 나는 무엇이든 그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물건의 뒤도 사람들이 가식으로 만들어낸 가면 뒤의 모습도. 알고 있다. 양부모님께서 좋은 분이라는 걸. 고아가 된 나를 거두어주고, 이 두 눈을 보고도 쫓아내기는커녕 의사 등을 불러 알아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의심과 꺼림칙함이 짙어졌을 뿐.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더불어 일도 계속 꼬여가자 부모님이 점점 지쳐가시는 게 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방에 박힌 나를 내버려 두었다. 핑계는 좋았다. 더는 상처 주고 싶지 않다, 혼자 있고 싶을 거다. 한번 손을 놓기 시작하니 양부모님은 최소한의 교류만을 유지한 채 그대로 나를 방임했다. 내가 방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학교에 오랜만에 갔는데 큰일은 없었는지 어린아이가 하는 '괜찮아요' 한 마디를 그냥 믿고서. 나는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빳빳하게 핀 흰 천이 자비 없이 구겨졌다.
"이미 합격했고, 제 마음도 변치 않아요. 죄송해요."
이렇게 되기 전에 한 번 더 물어봐 주시지 그러셨어요. 부글거리는 원망을 두 눈에 담자 두 분을 시선을 피하셨다.
"...미안하다."
다 큰 어른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놀랍도록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하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언뜻 말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얼마나 치사한 말일까. 어떤 상황이든 끝내버리는 힘이 있으니까. 나와 큰아버지 눈치를 보던 큰어머니는 조심스레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어떻게 지내고 싶냐고. 그 뒤로 기숙사를 갈지, 아니면 지낼 집을 알아볼지 등을 이야기했다. 절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두 분은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다들 방 정리는 잘했겠지? 차나 다과를 준비하긴 했다만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군."
"세토, 나 이번엔 옷 안 이상해? 아야노 언니랑 같이 골랐어!"
"우와, 정말 잘 어울림다! 투피스라니 평소랑 다른 느낌이지만 이런 것도 괜찮네요."
"헤헤, 그치? 마리는 귀여우니까 이런 것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다들 엄청 바빠 보이네."
"어서 와, 이치카쨩."
모모의 보충도 끝났고,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아지트에서 지내는 사람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제각기 무엇을 하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모두와 달리, 아지트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생활감이 넘치는 풍경이었다면 지금은 모델하우스처럼 여기저기서 광이 난다. 천장에 이리저리 얽힌 파이프까지는 손보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백열전구 중간중간 꺼지거나 약한 것 하나 없이 평소보다 빛이 강하다. 공들였다는 게 이토록 눈에 보이는데 아지트다운 아지트 분위기 그대로라는 게 신기하다. 고서가 모인 책장이나 다트판 등의 인테리어는 그대로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구 인테리어를 직업으로 하는 부모님께서 보신다면 무슨 평가를 할까. 사실 인테리어 이전에 다른 평가가 문제지만. 애써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 자신의 옷을 살피느라 바쁜 마리의 어깨를 뒤에서 가볍게 잡았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무서운 분들도 아니고, 그냥 어떻게 지내나 보러 오시는 거라고 하니까. 그래도 낯선 분들인데 괜찮아, 마리?"
"으, 응! 조금 긴장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치카의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이치카쨩이 제일 기합이 들어가 있지 않아?"
"어라, 들켰네."
영혼이 하나 없는 말투로 툭 뱉고는 느리게 웃었다.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리는 한 박자 늦게 뒤돌아 내 모습을 보고는 살짝 입을 가렸다. 평소의 나는 불편하고 더운 게 싫어서 대체로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을 고수해왔다. 더운 여름에도 덥석 긴 팔을 잘 입은 메카쿠시단 내에서 내 복장은 제일 가벼운 편에 속했다. 그런 내가 오늘만큼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롱 원피스를 택했다. 목 부분은 카라가 접혀있어 단정한 멋을 더해주었다. 허리에는 짙푸른 리본이 메여 라인을 살려주고, 그 아래로 살짝 주름진 하얀 천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살을 덜 내비치겠다고 군청색 여름용 카디건도 걸치고 온 채였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아지트가 아니라 어디 놀러 가야 할 것만 같다.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잡고 가볍게 움직여 보다가 마리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마리, 오늘 내 복장은 어때?"
"무척 예뻐! 잘 어울려!"
"그럼 다행이야."
"...역시 단정하게 입는 편이 나은가."
키도는 짐짓 팔짱을 끼고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안정적인 긴 팔 후드와 칠부바지. 캐주얼하다면 캐주얼하고 꼼꼼하다면 꼼꼼한, 그야말로 키도만의 개성이 잘 드러난 복장이었다. 나야 부모님이 여기까지 오시는 건 처음이고 딸이라 더 신경 쓴 거라고 말하기도 전에 슈우야가 싱글거리며 키도 앞에 섰다. 아, 이건 그 패턴이다. 불똥이 튀지 않게 스리슬쩍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키도 이미 가지고 있잖아? 소중하디소중하게 품어온 하늘하늘한 스커트를... 크헉!"
키도의 주먹이 슈우야의 명치에 정확히 들어갔다. 키도의 복장만큼이나 안정적인 펀치에 작게 손뼉을 쳐줬다. 어디서 배우기라도 한 걸까.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다. 위력의 반동으로 두세 걸음 밀려난 슈우야가 제 배를 붙잡고 쓰러질 때쯤 키도는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시라키, 부모님은 언제 오신다고 했지?"
"역에 도착하는 건 정오쯤. 바로 아지트로 오진 않으시고 호텔에서 체크인 먼저 할 거야. 역으로 내가 두 분을 모시러 가니까 아지트로 갈 땐 연락할게."
"여기 계시는 동안 호텔에서 지내시는 거야? 하루 이틀만 있다가 바로 돌아가신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제가 지내는 곳은 셋이 자기엔 좁으니까요."
사실 잘 수는 있는데, 새삼 한 곳에서 자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해요. 뒷말은 어물거리며 넘기자 아야노 선배는 혼자 사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누구도 내 자취 집 초대한 적이 없다. 좀 좁을지도 모르겠지만, 언제 한 번 여자 단원들만 초대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미래의 초대 손님 NO. 1 키도는 부엌 가스레인지 앞에 서더니 왼쪽 벽면을 바라보았다. 현재 인원수만큼이나 벽에 일렬로 붙은 시계가 일제히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럼 시간이 많이 남았군. 점심은 먹어두는 게 좋으려나."
"그게 좋을 거야. 부모님이 점심 같이 먹고 가자고 하셨거든."
"혹시 그거 알려주려고 일부러 아지트에 와준 검까?"
"사실 조금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상담? 이치카가 상담? 그리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다들 짠 것처럼 쪼르르 몰려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정중앙 내 자리도 비워놓은 채로. 그 사이로 쏙 들어가니 내 무게 때문에 소파가 푹 꺼지며 양어깨에 마리와 아야노 선배가 부딪혔다.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도 맞닿은 사람의 체온은 따뜻하기만 하다. 할 말을 고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키도, 슈우야, 세토 세 명이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분명 외모는 다 다른데 눈빛이 비슷해서 그런가 좀 닮았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다. 누구든지 오랫동안 함께 살아가다 보면 닮아간다고, 그렇게 가족이 되어간다고. 피가 이어져 있어도 떨어져 사는 관계와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함께 살아온 관계 중에 누가 더 가족답다고 할 수 있을까. 답을 말하는 대신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있지, 가족한테 어디까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피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끈끈하게 연결된 한 가족을 보며 나는 그렇게 물었다.
8월 중순도 지났으니 날짜상 한여름은 아닐 텐데 왜 날씨는 여전한 걸까. 이러다간 2학기 시작되고도 계속 하복 신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지트는 골목 너머에 있기에 가는 길 내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햇빛을 피해 그늘만 쏙쏙 골라 나아가니 함께 걸으면서도 옆으로 나란히 서는 일은 없었다. 터벅터벅 뒤따라오는 발걸음을 듣기만 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땀을 닦아가며 내 뒤를 쫓는 부모님이 보였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기합이 들어가신 건지 어디 계약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세미 정장풍의 옷을 입고 계셨다. 부모님이나 나나 TPO를 멋지게 어겨버렸다.
"이치카, 아직 멀었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생각보다 더 으슥한 곳에 있구나."
부모님은 고개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주변을 살펴보았다. 가는 길을 외워두려는 건가 싶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곳 자체가 두 분께 낯설 터였다. 본가는 주택가에 있고, 회사는 상업지역에 있으니 두 분께서 이런 골목길까지 갈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뭔가 불안한지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것만 보면 내가 어디 수상한 데에 모시고 가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몇 년 만에 만난 가족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었다는 뉴스가 어제 나온 것 같은데, 설마 내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사이비 종교는 아니지만, 수상한 단체는 맞긴 해서 뭐라 말을 못 꺼내던 중, 그 단체에서도 가장 수상한 인물이 골목 맞은 편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왔다, 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슈우야?"
"친구니?"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죠? 크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카노 슈우야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잘 부탁드려요~"
슈우야는 그 특유의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이래선 부모님이 날 이상한 단체에 빠진 딸로 봐도 할 말이 없을지도. 오늘만큼은 부모님도 오시니 좀 더 부드러운 웃음을 만들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오랫동안 본인 자신을 의심해온 탓에 속이기만 하면 이런 모습이 되어버리는 모양이다. 뭐, 슈우야답지만. 첫인상이 혹시 나쁘게 찍힌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부모님은 내 친구와 처음 만났다는 것 자체에 더 정신이 팔리신 것 같았다. 가벼워 보이는 슈우야에게 명함이라도 꺼낼 것 같이 깍듯이 인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서로 대비되었다. 그보다 왜 슈우야가? 아지트에서 모두와 함께 대기하고 있어야 할 텐데. 혹시 몰라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따로 온 연락도 없었다. 먼저 앞서 걷기 시작한 슈우야 옆에 바짝 붙었다. 슈우야의 발끝은 아지트를 빙 돌아가는 길로 향해있었다.
"무슨 일 있어?"
"조금 어질러져 버렸거든. 거의 다 왔을 것 같아서 연락도 못 하고 내가 나온 거야."
"모모랑 마리가 차랑 다과 준비하다가 컵이라도 깼어?"
"직접 본 것처럼 정확하네, 역시 이치카쨩."
정말이냐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슈우야는 작게 웃으며 놀란 건 오히려 자기 쪽이라고 덧붙였다. 이 경우는 내가 아니라 매번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메카쿠시단이 더 신기하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주위에 우리 외 아무도 없는 것을 살피고 슬그머니 눈의 온도를 높이니 슈우야는 열심히 문자를 쓰고 있었다. 부모님이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겉으로는 싹싹하게 대화하는 것으로 속이고, 실제로는 연락 중이라. 왜 슈우야가 대표로 나왔는지 알겠다. 알고 보면 부끄러움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처신을 가장 잘하는 게 슈우야이기도 하고. 속닥속닥 작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부모님의 관심을 계속 환기했다. 오실 때 힘들지 않았는지, 이 도시엔 처음 오는지, 날이 더운데 괜찮으신지 등. 능숙하게 화제를 툭툭 꺼내는 슈우야에게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이끌었다.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이런 작전 중 속일 때 더 슈우야와 호흡이 잘 맞는 느낌이다. 부모님도 똑같이 느끼셨는지 우리가 이끄는 대화 흐름에 따라오다가 문득 말을 던지셨다.
"둘이 많이 친한가 보구나. 오래 알고 지냈니?"
"음~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따님분께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신세라면 저도 마찬가지예요. 많은 도움을 받았죠."
"혹시 둘이..."
"아, 이제 다 왔어요."
무언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가로채며 손가락으로 아지트를 가리켰다. 그럴싸한 명패 하나 없이 심플한 107호 문이 우릴 반겨주었다. 가볍게 세 번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키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다 치운 모양이구나. 부모님께 한 번 눈짓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삐걱 소리와 함께 찬 공기가 마중 나오고, 그 안쪽에서 작은 문으로는 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원이 옹기종기 모여서 우릴 맞이해다.
"어서 오세요!"
메카쿠시단에. 누군가 몰래 덧붙인 말에 작게 웃고는 모두의 곁에 서서 활짝 웃었다.
"제 친구들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차향은 원래 은은하게 올라오는 법이지만 10잔이 넘는 양이 있으면 그게 모이고 모이면 강해지고 만다. 주로 차를 마시던 테이블로는 전원의 찻잔이 올라가기만 해도 빠듯한 터라 깔끔하게 부모님과 내 것만 남겨두고 다른 건 식탁으로 빠졌다. 소파에 앉은 것도 나와 부모님, 그리고 아지트를 대표하는 키도와 아야노 선배만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식탁 쪽에라도 앉으라고 했지만 신경 쓰였는지 슬금슬금 모여들어서 결국은 또 바글바글 모이게 되었다. 우리는 앉아있고 주위에는 사람이 서 있으니 영화에 나올 법한 대부라도 된 기분이다. 거기다 부모님도 나도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탓에 친구 소개가 아니라 무슨 검사라도 하러 온 것 같다. 아까부터 향만 내뿜는 차는 거의 줄지 않았고, 부모님이 사 오신 화과자도 초반 몇 개 먹은 이후 손도 안 댄 채다.
자기소개 때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딱딱하진 않았다. 나는 한 명 한 명 정성껏 소개해 드렸고, 다들 밝게 부모님을 맞아주었다. 심지어 모모는 익숙한 얼굴이라 그런지 드물게 부모님 얼굴에 웃음이 피기도 했다. 그 직후 우리 회사 광고 모델 해줬으면 좋겠다고 흑심을 드러내시기도 했지만 어쨌든 웃은 건 웃은 거니까. 히요리는 집안이 집안이라 짧게나마 아는 체도 하셨다. 부모님은 내가 성별, 나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많은 친구를 사귀었구나. 진심에서 안도한 목소리에 나는 대답 대신 편안한 미소로 응했다.
아지트를 간략히 둘러볼 때도 의외로 평가가 후하셨다. 가구 인테리어를 하시긴 하지만 우리 기업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데, 그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먹혔는지 이런 것도 괜찮다며 메모까지 하셨다. 문제는 두 분의 반응에 어깨가 으쓱해진 키도가 다 같이 지내기에 좋다고 툭 던진 한마디였다. 일순 두 분의 표정이 굳더니 목소리 톤을 한 단계 낮아지셨다.
"건물 구조나 인테리어 배치가 독특해서 분위기 있긴 하다만 실제 생활을 한다면 글쎄..."
"거기다 건물이 꽤 골목 깊숙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하기엔 좀 위험할 것 같더구나."
평소와 달리 직설로 말씀하시며 싱긋 웃으시는 두 분을 보고 가장 굳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혼내실 때, 단호하게 거절하실 때 늘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분위기를 풀어보자 싶어서 차를 권했지만 입도 안 댄 차가 식어가는 만큼 두 분의 반응도 냉랭했다. 직접 여기까지 보러 오신다길래 나는 사실상 허락해주신 거라고 착각했다. 막상 와보니 마음이 바뀌신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강하게 말리기 위해 일부러 오신 걸까. 내가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고 계산해보고 있을 때 어머니가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셨다.
"이치카, 잠깐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나에게만 살짝 말하려는 생각이셨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모두 다 들었을 거다. 아니, 일부러 들으라고 말씀하신 거겠구나. 보이지 않아도 모두의 굳은 표정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다 같이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끼리 따로 얘기한다는데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부모님과 나만 대화하게 되면 어른 대 아이, 2 대 1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해지기에 그건 피해야만 한다. 이것 참. 지금 내가 부모님과 대화를 하는 건지, 무슨 거래 현장에 나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금방 입으로 빠져나갈 것 같은 한숨을 미소로 승화시키며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하시기 어려운 말씀이실까요?"
크지는 않지만, 주변에도 잘 들릴 만큼의 크기. 이렇게 대놓게 화제를 꺼내버리면 억지로 데려가기도 어려울 거다. 두 분도 이 정도는 예상했는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로 눈빛을 한 번 교환할 뿐이었다.
"이치카, 네가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는 건 잘 알겠다. 우리를 보고도 긴장을 할지언정 특별히 더 잘 보이려고 하는 아이들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장소도 너무 으슥한 곳에 있고, 생활하기에도 지금의 집이 훨씬 낫지 않니? 친구들이랑 지내는 건 같이 살지 않아도 할 수 있잖아."
"그냥 듣기만 했을 때도 생각했지만 직접 와보니 더 모르겠구나. 왜 굳이 같이 살고자 하는지."
와,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시네. 생각할 시간을 벌 겸 목도 타서 미지근해진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최고급 차라고 할 수 없겠지만 모두가 고민하고 고른 차다. 은은한 향을 음미하며 초록 물결에 비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긴장했나? 아니면 불안한가? 둘 다 아니다. 나는... 코 부분에서 꼿꼿하게 세워진 찻잎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아버지, 어머니."
아까 두 분과 똑같이 싱긋 웃었다. 목소리 톤은 한 톤 낮아진 상태였다. 한순간이지만 두 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은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긴장하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오히려 나는 이 대치 상황을 내심 즐기고 있다. 모모의 매니저분과 통화했을 때처럼.
"합리적인 이유가 듣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제 솔직한 마음이 듣고 싶으신가요?"
상대가 강경하게 나온다면 나는 나대로 나아가면 된다. 그동안 내가 보고 배워온 방식대로. 그야말로 시라키답게. 왜냐고 물으신다면 얼마든지 대답해드리죠. 살짝 진심을 섞어 더 진한 미소를 덧그리자 누군가 작게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걸 말하면 괜히 걱정만 끼칠 거라고 생각한 걸 말해야 한다고 본다."
가족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그 질문에 키도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것처럼 바로 명확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말에 찔린 두 사람, 슈우야와 아야노 선배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키도의 기준은 필시 이 둘 때문에 세워진 거겠지. 키도는 대놓고 한숨을 쉬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뭔가 있는 건 분명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불안해하는 것보단 차라리 어떤 말을 듣고 걱정하는 게 나아."
두 죄인의 고개가 더 깊이 수그러든다. 작게 미안하다는 말도 들린 것 같다. 하긴 두 사람이 진작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면 우리 이야기의 전개는 상당히 달라졌을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을 기다리던 키도의 심정도. 둘 다 왜 숨겼는지 이해할 테지만 가족이자 단장으로서 아주 갑갑했겠지.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던 입장이지만 지금은 슈우야와 아야노 선배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아무 말도 안 한 채 숨기는 건 내가 맨날 하던 것이었으니까. 그러면 나도 부모님께 죄송해하며 고개를 숙여야 할까.
"역시 그런 걸까... 나 말이야. 지금까지 부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별일 없이 잘 지낸다고만 했지. 그렇게 말한 걸 후회하진 않아. 어쩌면 본가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너희를 못 만났을 테니까."
나는 슈우야와 아야노 선배와 반대로 고개를 천장을 향해 들었다. 이리저리 얽힌 파이프에 총총 박힌 알전구가 시야에서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한다면 데려갈 것만 같았고, 그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부모님이 좋은 분이라는 것도 알고, 에이토 오빠도 악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이 기억을 안고 과거로 간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거다. 거짓으로라도 웃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나를 딸이라고 불러주신 두 분을 나는 계속 가식으로 대할 셈인가? 살짝 눈을 감자 어두운 배경 속으로 아까까지 본 전구 불빛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아지트에서 지내기 위해서라도 그런 식으로 넘길 수 없겠더라고. 다 말하기도, 말을 안 하기도 어려워."
"저희 사정이 사정이니 역시 다 말하는 건 무리겠지만, 저는 시라키가 생각한 것을 솔직히 말하면 된다고 생각함다."
"솔직히... 제일 어려운 말이네."
"하하, 그렇네요. 그래도 사실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 이미 생각해봤죠?"
찔리는 구석이 있어 눈꺼풀을 들고 세토를 보자 그의 눈 주위에 빛의 잔상이 이리저리 오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인 후에야 겨우 세토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붉은 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봄날의 개나리와 같은 샛노란 색. 훔친다는 그 능력과는 정반대로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정직하게 바라보는 그 눈이 나를 보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들 본심은 명확함다. 칼이나 가위처럼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로요. 그게 말로 나올 때 저마다의 기준을 거쳐서 나와서 달라지는 거죠.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른 법이니 그 어떤 기준이 정답이라고 저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슴다."
세토의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무슨 동화 구연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예리했다.
"그렇지만 가족이나 친구같이 소중한 사람에게 전할 말은 그만큼 많이 고민하는 법 아님까. 그렇게 고민해서 나온 말은 어떤 것이든 분명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함다."
그러니까 카노도, 누나도 고개를 들라며 세토는 슈우야의 등을 호탕하게 두드렸다.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 환해진다 싶더니 평소대로 웃기 시작했다. 그 풍경이 신기해서 잠시 멍하니 보게 되었다. 너는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까. 나도 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으로 감정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서 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더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걸. 드러나지 않는 만큼 거침없고 뾰족하기만 하다는 걸 아는 만큼 나는 무서웠다. 웃는 얼굴로 나에게 그 칼끝을 들이밀고 있을까 봐. 그 칼을 보는 게 괴로워서 피하기도했지만, 사람에게 능력을 쓰는 걸 멈추지도 않았다. 언제 찔릴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내가 미리 알고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혼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어떻게 너는. 나는 다시 한번 세토를 보았다. 여전히 세토의 눈동자는 샛노란 색이었고 다정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너의 그 눈으로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보다 직접적으로 본심을 알 수 있는 그 눈에 비친 세상은 내가 본 것보다 더 심했을 텐데.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의 말에 끊임없이 찔려왔던 너는 어떻게 올곧은 눈빛을 할 수 있는 걸까. 남들 눈으로부터 도망치고 반칙과도 같은 힘을 쓰며 살아온 나에게는 쉬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와 너,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든 걸까. 내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세토는 그걸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아까보다도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저 본심은 직접 그 사람의 말로 듣고 싶은 법이라는 검다. 어떻게 말을 할지는 고민할 수 있지만, 말을 할지 말지는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슴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솔직히 전하세요, 시라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이잖아요. 그 말에 어딘가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가족. 그렇구나. 무섭다며 가족에게서 도망친 나와 달리 너는 가족 곁을 지켰기에 그렇게...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쥐어졌다. 모처럼 차려입은 하얀 원피스가 와그작 구겨지자 뽀얀 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고 옷 주름을 조심스레 펴주었다. 마리. 작게 이름을 부르자 마리는 똑바로 내 두 눈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치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 세상은 의외로 겁먹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노란 눈에 이끌려 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분홍색 눈이 똑바로 세상을 보지 않던 검푸른 눈을 격려해주었다.
"외로워서요."
처음 제대로 꺼내 본 내 본심은 정말 단순했다. 그저 보호자가 아니라 부모님으로서 딸의 진심을 듣겠다고 말씀하신 두 분은 그 단순한 한 마디에 서로의 손을 꼭 잡으셨다. 저 손을 마지막으로 잡은 게 언제였더라.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손으로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너무 말이 짧았다 싶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자발적으로 집에서 나간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도 우습지만, 그동안 힘들고 외로웠어요. 혼자 사는 것 자체도 힘든데 타지라 아는 사람이 없어 기댈 곳도 없었죠. 아프면 혼자 버티고, 슬플 때도 홀로 울었어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힘들단 말은 한 번도..."
"그랬다간 본가로 다시 데려갈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건 싫었어요."
"그렇게..."
목이 멨는지 쥐어 짜낸 것 같은 목소리.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내 귀를 의심하며 목소리의 주인을 부르니 나 그리고 아빠와 같은 검푸른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눈빛 속에는 후회와 괴로움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신 게 처음이라 당혹감이 올라왔다.
"그렇게 우리가 싫었던 거니."
"그건 아니에요."
생각할 새도 없이 즉답이 튀어 나갔다.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겉치레로 아셨을 테니까.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조심스레 두 분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오는 촉감이 영 낯설었다. 메카쿠시단의 사람들과는 다른, 세월에 깎여 주름이 지고 거칠어진 손. 행여나 또 놓치게 될까 봐 힘주어 잡았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수도 없이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백 마디 말보다 이런 교감이 더 크게 와닿는지 두 분의 호흡이 한층 편안해졌다. 그래도 본심은 나 자신의 말로 전해야만 하는 거니까. 흘낏 세토를 보자 세토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보였다. 잘하고 있다는 무언의 응원에 조금은 용기가 생긴 기분이다.
"저도 알아요. 두 분께서 많이 노력해주셨다는 걸. 고아가 된 저를 망설임 없이 입양해주셨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아셔도 저에게 뭐라 하거나 내쫓지도 않으셨죠. 저는 두 분께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그저 그 당시의 저도, 두 분도 우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버거웠을 뿐이에요."
감사함과 원망스러움이 상반된 감정일지라도 공존할 수 있단 걸 이제는 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나와 주변 상황에 눈이 멀어 그저 미워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소녀는 새 부모님께는 상처밖에 드리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부모님보다는 이 세상 자체를 원망했다고 생각한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세상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추상적이었고, 아자미의 말대로 내 선택으로 생긴 일이라 받아들이기엔 버거웠다. 그래서 당장 내 눈앞에 있고 내 문제를 해결해준다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어른에게로 대상이 바뀌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울고 화내는 나를 받아주셨던 건 두 분이 '부모님'이어서 가능했던 거겠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차분하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버지, 어머니. 저를 봐주시겠어요? 너무 놀라지는 마시고요."
두 분은 이미 보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는 말을 꾹 참는 거로 보였다. 잠시 단순히 포개져만 있는 우리 세 사람의 손을 바라보았다가 손을 뒤집어 내 손을 맞잡았다. 맞닿은 손바닥은 손등과 달리 주름지지 않아 반질거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아버지,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하자 두 분은 비명과 함께 숨을 삼켰다. 내 눈에 비친 두 분에게서 경악과 회상, 그리고 아릿한 고통이 엿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내가 따로 살게 된 것도 있어서 두 분은 이 붉은 눈을 보지 못했으니까. 집에 돌아갈 때마다 태연자약하게 검푸른 눈으로 인사를 드리는 나를 보며 두 분은 이제 붉은 눈 같은 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일시적이었을 거라고.
그렇지만 꿈이 아니라 현실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생 품고 가야만 할 것이다. 메두사나 아지랑이 데이즈 같은 이야기까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계속 안고 가야 할 것이라면 두 분께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이니까. 최소한 이 눈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막상 두 분의 감정을 여과 없이 목도하니 가슴 한쪽이 찌릿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큼 메카쿠시단의 시선이 느껴져서 괜찮았다. 응원과 따스함이 가득한 눈빛들. 정말 홀렸다고 해도 과언이 정도로 모두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다.
"여기 있는 제 친구들은 알아요. 이 눈도,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쩌면 두 분보다도 더 저를 잘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힘들 때 바로 곁에서 저를 지탱해준 사람들이거든요."
그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응해주었다. 키도와 신타로씨, 하루카씨는 조용한 미소로. 마리와 모모, 아야노 선배는 활달한 대답으로. 그에 슈우야는 능청스럽게 말을 보태고, 기분 좋은지 에네처럼 텐션 높아진 타카네씨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히비야는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가 히요리의 주먹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덕분에 혼자 어떻게 버티며 지냈는지 잊어버리게 되어서 말이죠. 앞으로도 친구들과 같이 지내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두 분께 이렇게 간청드리는 거예요."
크고 난 후에도 좋은 딸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이 말만큼은 차마 할 수가 없어 대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흐트러질까 계속 매만졌던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 아래 세 사람의 손이 있었다. 아무리 놀라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던 손이. 무언가의 대답을 기다리며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자 머리 위로 한숨이 떨어졌다.
"네가 이렇게 행동할 때마다 나는 타이치를 생각하게 된단다."
"아빠를요?"
"그래. 네 친부인 타이치라면 어떻게 했을까... 타이치라면 분명 말렸을 거다. 타지에서 지내는 것도 불안한데, 우리가 잘 모르는 애들과 지낸다니 안 될 일이라면서."
"...아빠라면 정말 그랬을 것 같네요."
나는 정말로 아빠를 사랑했지만, 아빠가 정말 좋은 아빠였는지를 생각한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어딜 나가면 다칠까,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며 나를 지키기에 전전긍긍했으니까.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나를 지키는 건지, 안전하다는 집에 가둬두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아빠가 계셨다면 분명 이렇게 타지에 나와 사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을 거다. 아빠 생각에 잠겨있으니 이번에는 쿡쿡 작게 웃는 소리가 떨어졌다.
"반대로 하나코라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겠지."
"...엄마요?"
"이치카는 잘 모르겠구나. 타이치랑 정반대로 원하는 건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거든. 전혀 안 그렇게 보이면서 한 번 정한 일에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 나가는 게 정말 똑 닮았어.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까."
엄마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거기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나는 아빠 때와 다르게 공감도 못 하고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그냥 날 많이 사랑하고 좀 밝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저돌적인 분이셨던 걸까. ...잠시만, 엄마와 똑같다는 건 나도 저돌적인 성격이라는 거잖아. 독립할 때랑 지금 빼고는 얌전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런 적이 있나? 확실히 메카쿠시단과 만난 이후로는 그런 일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이미지와 쉬이 어울리지 않아 끙 소리를 내니 갑자기 머리 위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건 머리에 손. 낯선 감각을 자각하자 이번엔 내가 굳어질 차례였다. 두 분의 눈은 부드럽게 휘어졌지만.
"그렇지만 그 둘은 둘이고, 우리는 우리지."
"우리는 이치카 네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 결정하지 싶었어."
"우리가 말린다고 안 들을 거라면 거기까지였겠지. 그렇지만 계속해서 설득하고자 한다면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어주고자 했단다."
"이게 우리 방식이지. 잘 알아두렴, 우리 딸."
"...네. 아버지, 어머니."
새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우리 딸이라고 부르는 게 부끄러웠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있는데 그 앞에서 쓰다듬 받는 것도. 그렇지만 그만해달란 소리는 하기 싫었다. 두 분이 무안해질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그렇지만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분은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손을 딱 뗐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살살 빗고 있을 때, 부모님은 다 식은 차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두 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메카쿠시단을 향해 나와 비슷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이제... 현재 거주지 계약, 보증금, 이사 등... 해야 할 이야기는 산처럼 쌓였지만, 그 전에 이 말이 먼저겠지."
"우리 이치카 잘 부탁한다."
네! 일제히 울려 퍼지는 대답을 신호로 아지트는 다시금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히비야, 이런 느낌으로 타지에서 지내는 거 허락받았는데 어때? 참고돼?"
"우리 집이랑 너무 달라서 참고는커녕 더 어려워졌어!"
"역시 그렇구나. 그래도 뭔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흥, 다른 사람 따라 할 생각만 하다니 한심하네. 네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 히비야."
"으으, 히요리이..."
"후..."
옷으로 가득 찬 박스를 닫으면서 벽에 기대어 앉았다. 간단하게 옷 일부랑 자주 쓰는 물건들만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말았다. 이 작은 집에 무슨 물건이 이리 많은지. 분명 막 이사 왔을 때는 챙긴 물건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3년 살았다고 뭘 사고 받으면서 늘어난 모양이다. 본격적으로 이사하는 날에는 과연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기 싫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방 안 풍경과 구석에 쌓인 박스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가는구나 싶어져서 들뜨다가도 뭔가 섭섭하기도 했다.
아지트에서 살아도 된다고 부모님께 정식으로 허락은 받았지만, 바로 거기서 살게 된 것은 아니었다. 현재 사는 곳이 계약 기간이 남았다는 문제도 있고, 2학기 개학을 앞두고 급하게 옮길 필요 없지 않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지내고 있는 곳은 그대로 두고 올해 말에 이사를 하되, 자취방과 아지트 자유롭게 오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뭐, 내 눈에는 부모님께서 허락하긴 했지만 여러 사람과 사는 게 불안해서 이런 식으로 유예기간을 두신 것 같았지만. 그렇지만 부모님이 한 가지 간과하신 게 있었으니 이미 내가 아지트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며칠 동안 2층의 한방에서 자고 생활했기 때문에 큰 가구들은 못 옮겨도 살림살이 조금 갖다 놓으면 생활에 지장이 없을 수준이었다. 덕분에 오히려 지금 자취방이 내 개인 아지트가 될지도 모른다. 아지트로 가는데 나만의 아지트가 생기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게 감성에 잠겨 자취집을 한 번 둘러보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을 확인해보니 작은 화면에 다 담기지도 않는 인원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려고 부른 메카쿠시단이었다. 남자들은 빼고 여자만 불렀는데도 많네. 잠시만, 짧게 대꾸하고 문을 열자마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서 와."
"초대해줘서 고마워, 이치카쨩!"
"실례할게."
"혼자 살면 이런 느낌인가 보네요."
"생각한 것보다 넓다~"
조용했던 자취방에 발랄한 목소리들이 가득 찬다. 자유롭게 집 구경하라고 말한 뒤, 미리 냉침해둔 캐모마일 차를 인원수대로 준비했다. 은은히 우러난 노란빛이 투명한 유리잔에 채워졌다.
"어라, 벌써 짐을 싼 거야?"
"바로 챙겨갈 것들만 조금요."
"은근 양이 되는군. 역시 남자 단원들도 같이 올 걸 그랬나."
"다 들어오기엔 집이 좁기도 하고,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들 우르르 데려오는 게 좀 그렇잖아. 그리고..."
준비한 차와 다과를 거실에 있던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입꼬리를 씩 웃었다.
"여자들끼리만 있는 시간도 필요하잖아."
사실 이러려고 부른 거니까 남자 단원들한테는 짐부터 싸느라 늦게 간다고 해. 덧붙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리더니 옹기종기 거실에 모여앉았다. 소년들 빼고 소녀들끼리의 티타임의 시작이었다.
안 불렀으면 섭섭할 뻔했다. 내가 준비한 것이라고는 차와 다과밖에 없는데도 다들 어디서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있었던 일부터 TV 프로그램 이야기까지. 시기도, 장르도 불문하고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신기한 건 아무리 시간이 길어져도 질리거나 지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로 모모가 이야기의 화두를 던지고 저마다 말을 하나씩 쌓다 보면 듣기만 하던 나도 자연스럽게 끼어들게 된다. 능력의 영향도 있겠지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띄우는 걸 보면 모모가 괜히 아이돌인 게 아니구나 싶다. 한참 신나게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모모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타카네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나 에네쨩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이 모습일 때는 에네라고 부르지 말아달라니까... 그보다 나한테? 뭔데?"
모모가 탁자를 소리 나게 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타카네씨가 가깝다며 소리쳤다. 예사롭지 않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어쩐지 불길했다.
"하루카씨랑 어떻게 된 거야?"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타카네씨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모모를 밀어냈다. 그렇다고 히죽히죽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이런 자리에서 사랑 이야기가 빠지면 섭섭하지. 모모의 신호에 너도나도 모두 타카네씨 근처로 몰려들었다.
"저도 듣고 싶었어요! 타카네씨,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하루카 선배 곁에 꼭 붙어있고~"
"사귀는 거 맞지? 언제부터였어?"
"사, 사귀다니 그게...!"
"어머, 사귄다는 거 바로 부정 안 하네?"
"아! 진짜!"
히요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격침당한 타카네씨는 머리를 부여잡다가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대로 정지.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 옆에 있던 휴대전화가 거칠게 진동 소리를 냈다. 액정 속에는 에네가 자신의 양 갈래 머리를 두 손으로 꼭 모아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지랑이 데이즈 갔을 때, 그때 홧김에 고백했어요. 그게 다예요."
"그렇다면 메카쿠시단 공식 1호 커플이군."
"아아아! 괜히 그런 번호 붙이지 말아 주세요!"
"그렇군요~ 역시 두 분이라면 잘 될 줄 알았어요. 다행이에요~"
"아야노 선배, 얼굴이 너무 풀어졌어요."
볼을 가볍게 쿡 찌르자 아야노 선배는 표정을 풀 생각조차 없는지 여전히 헤실거리며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에 심통이라도 났는지 에네는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확 놓아버리고 액정에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신타로씨를 놀릴 때처럼 들뜨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러는 우리 후배님은 어떤데요?"
"네?"
"저, 저도 궁금했어요! 오빠가 무슨 짓은 안 했는지!"
"무, 무슨 짓이라니. 아무것도..."
당황해서 손을 휘젓던 아야노 선배의 말끝이 점차 흐려지더니 뚝 끊겼다. 아, 설마. 아야노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불안한 내 심정을 따라 하듯 하얀 커튼이 크게 펄럭거렸다.
"신타로랑 나는... 아직 그냥 친구 사이야."
"그냥 친구 사이라니 한심해. 그러고도 아사히나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더 저돌적으로 나가야지."
"일단 나 성씨는 타테야마인데... 그래도 영화도 같이 보러 가고, 나름 노력은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어요. 주인님의 둔감함은 세계적인 수준이니까요!"
"하긴 그 신타로씨라면 아예 대놓고 말해도 알아들을까, 말까 일지도 모르겠네요."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딱 봐도 화난 에네를 보고 고장이냐며 휴대폰을 두드리던 모습, 모모에게 무신경하게 살쪘냐고 묻던 모습이 차례차례 떠오른 탓이었다. 심지어 아야노 선배가 말했던 영화도 처음에는 모모랑 보러 가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었지. 머리는 좋은데 왜 눈치는 그토록 없는 걸까. 제삼자가 봐도 명백히 알 정도로 투명한 자신의 연심도 자각하긴 한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제각기 한 마디씩 툭툭 던지고 있을 때 키도가 탁자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경쾌한 소리와 달리 키도의 미간은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솔직히 나로선 신타로한테 언니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츠보미..."
"그러게나 말이에요. 왜 오빠 같은 거랑!"
"그렇지만 신타로도 좋은 사람이고, 누굴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책에서 그랬는걸."
"마리 말이 맞아. 신타로는 굉장한 사람인걸. 아직 좀 헤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전하려고 노력할 거야. 후회는 이미 질리도록 했어."
아야노 선배는 두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입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살짝 내려 뜬 눈 속에는 여러 후회와 미련이 켜켜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기억 속에서 늘 웃고 있던 아야노 선배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마냥 영웅으로만 보이던 이의 뒷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마음을 그 속에 눌러 놓고 있던 걸까. 가늠이 되지도, 가늠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때 역시 뭐라도 말하고, 아야노 선배를 돕겠다고 말해야 했을까. 그러면 아야노 선배가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때늦은 후회가 올라오며 가슴 한쪽이 찌릿하게 아파졌다. 아야노 선배처럼 가슴을 잠시 내리누르다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다 끝난 일이고, 잘 해결되었다. 이런 생각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당장 내 눈앞의 사람을 보는 게 낫다.
"혹시 도움 필요하면 얼마든지 얘기하세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응, 고마워. 이치카쨩도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서포트할 테니까!"
"네?"
저요? 갑자기 저는 왜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아까까지의 통증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뒤늦게 아야노 선배가 무슨 의미로 말한 것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바싹 목이 타서 다급히 차를 들이켤 때, 아야노 선배는 아예 쐐기를 박았다.
"어? 슈우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쿨럭!"
아, 괜히 마셨다. 이 타이밍에 사레라니. 저 말을 완벽히 긍정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제대로 숨을 못 쉬겠는데 그것보다는 뜨뜻미지근한 시선들이 더 괴로웠다.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나오는 것이라곤 기침뿐이었다. 얼마나 심하게 걸린 건지 눈물까지 찔끔 나오자 그제야 모모가 내 등을 찬찬히 쓸어주었다.
"이치카쨩, 괜찮아?"
"괘, 괜찮... 그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그야 슈우야랑 서로 이름도 부르고, 둘이 뭔가 애틋하다고 해야 하나?"
"둘이 같이 있는 시간도 꽤 길고, 호흡도 잘 맞고 말이죠~"
"그리고, 그리고 능력 제어 교실 했을 때 둘이 끌어안기도 했잖아."
"뭐?! 이치카쨩 언제 그런 일을! 나한테도 말해주지!"
"잠시만. 모모, 진정 좀..."
"설마 정말 몰라서 물은 건 아니죠?"
정곡을 훅 찌르는 히요리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연기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연심을 숨긴다는 건 난생처음이었기에 티가 났을 거란 예상은 했다. 아니, 애초에 숨길 생각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슈우야를 좋아하는 만큼, 슈우야도 날 좋아했으면 했고 더 가까이 붙어 있고 싶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보다 그 욕망이 더 우선시 된 결과다.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부끄러운 것도 어쩔 수 없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을 느끼며 후드를 끌어다 머리에 썼다. 이걸로 붉은 기가 다 가려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시라키. 이건 진지하게 하는 얘기다만."
"뭔데?"
"정말 카노 그 녀석으로 괜찮은 거냐?"
짐짓 팔짱을 낀 키도가 지그시 내게 물었다. 잔잔한 눈빛은 진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놀리려고 진지한 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절로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키도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슈우야를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다. 슈우야,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나에 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게 분명하다.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꺼낸 걸까.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뭐라 답할지 궁리하다가 애써 가볍게 뱉었다.
"키도가 생각하기에는 어떤데?"
"뭐가 말이지?"
"슈우야, 정말로 별로인 사람이야?"
내 질문에 키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니 키도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접혔다. 날 떠본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카노 녀석, 태도가 항상 가벼운 데다가 매번 거짓말로 넘기려고만 해. 비밀도 많고 제일 중요한 일은 말하지도 않아서 걱정만 끼치는 녀석이다. 솔직히 말해서 너에게는 아깝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키도는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린 채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좋은 녀석이야."
짧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말에 그제야 나도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응, 나도 알고 있어."
키도를 따라 눈을 감고 눈꺼풀 위에 슈우야의 모습을 덧그렸다. 슈우야의 태도가 가볍지만 그걸로 항상 분위기를 띄우곤 한다. 메카쿠시단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웃고 지내는 건 슈우야의 덕이기도 하다. 거짓말이나 비밀은 조금 그렇긴 하지만 괜히 우리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그의 서투른 대응일 뿐이다. 좀 더 다가간다면, 아니 어쩌면 이미 그는 솔직하게 말하려 노력 중일 것이다.
느리게 눈을 뜨니 6명이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하나 같이 반짝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내 마음을 순순히 인정하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주춤 뒤로 물러나기 무섭게 모모가 바짝 나에게 달려들었다.
"있지, 이치카쨩은 고백할 생각 없어?"
"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하도록 해. 가족 더블 찬스는 흔치 않다고."
"앗, 절친 찬스도 있으니까!"
"전뇌걸 찬스는 어떠신가요?"
"자, 잠시만! 왜 제 이야기에서 유독 흥분하는 것 같죠?"
"가능성이 빤히 보이는데 한심하게 모른 척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지금 이 순간 키도나 에네의 능력이 간절했다. 후드만으로는 이 반응을 막을 수 없으니까. 애꿎은 후드만 잡아당기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더웠다. 환기하겠다고 에어컨을 안 틀고 창문만 열어두긴 했지만 이건 너무 더웠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그... 제가 누굴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저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지..."
"어머나~ 귀여워라.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소녀네요~ 그래도 마음이 확실하다면 움직이는 게 제일이에요."
"나중에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용기를 내."
"후회한 후에는 늦어요."
눈을 돌려버린 나에게 묵직한 충고들이 날아와 박힌다. 눈이 마주치자 입은 웃고 있어도 눈빛은 깊고 아득했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해 후회했던 이들. 무수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후회가 그 안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나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도 종종 붉은 눈으로 돌아가는 슈우야를 떠올린 나는 결국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됐잖아요. 넘어가요, 다음! 그렇지, 모모는 어때? 관심 있는 사람 있어?"
"나는 모두의 아이돌이니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말, 활기찬 목소리, 그리고 윙크까지. 이게 만약 예능 프로그램이었다면 아이돌로서 100점짜리 답변이었을 것이다. 여기가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는 게 문제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모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자 키도와 에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박장대소 속에서 오늘 내내 시니컬하던 히요리만이 두 손을 꼭 잡고 모모를 올려다보았다.
"모모씨, 역시 멋있어요!"
"모모, 쉬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뼛속까지 훌륭한 아이돌이구나."
"아! 방금 건 잊어줘~!"
모모는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모모에게는 미안했지만 화제가 완벽하게 넘어갔다는 점에 안도했다. 비록 내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내 맘도 모르고 매미들은 힘차게 울고 있었다.
태양이 내 정수리 바로 위에 떠 있다. 찌는 듯한 염천 아래에 나는 서 있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세밀하게 구성된 거리 사이로 늘어진 전선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있었다. 태양을 오래 쳐다본 탓에 빛의 잔상이 시야 내에서 어른거렸고, 그 뒤로 물빛 색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나는 아는 길을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그네가 흔들리는 공원을 지나고, 건물들 사이를 빠져나와, 역삼각형 모양의 표지판에서 우측으로 꺾었다. 이상하다. 여긴 분명 처음이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 발은 계속 나아간다. 겨우 발걸음이 멈춘 곳은 붉은색으로 변한 신호등 앞이었다. 검은색 아스팔트 위 칠해진 하얀 횡단보도는 오래된 것인지 중간중간이 지워져 있었다. 여길 건너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치카."
"코노하씨?"
하얀 횡단보도 너머에는 그보다도 더 하얀 인물이 서 있었다. 매미 소리와 함께 불어온 바람이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꿈이라는 생각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 일었다. 가까이 가기 위해 횡단보도로 발을 뻗자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를 트럭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더 가면 안 된다며 격렬한 브레이크 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그대로 굳어있는 나를 보며 코노하씨는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저기... 다들 잘 지내지?"
"...네. 잘 지내요. 물론 하루카씨도."
"그렇구나.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분홍색 눈이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접혔다. 따라서 웃고 싶었지만 몸이 굳어버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코노하씨,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어서요. 겨우 손짓해도 코노하씨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몸이 투명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있지,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괴물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갑자기 그게 무슨... 그야 당연히 될 수 있죠. 메두사의 후손인 마리도, 뱀인 코노하씨도, 붉은 눈을 가진 우리들도. 모두 친구가 되었잖아요."
"으응. 그런 게 아니라."
코노하씨의 몸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덧없이. 사라질 것만 같아 몸을 억지로 움직이자 이번엔 철근이 떨어져 내 앞을 막았다. 철근들 틈새로 보이는 코노하씨의 모습은 컴퓨터 액정 속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코노하씨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온몸으로 태양 빛을 받으며 점차 검게 그을려 가고 있었다.
"나의 형제와."
말이 끝날 무렵 코노하씨는 완전히 검은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분홍색이 아닌 금빛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태양 볕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땀에 절여있었다. 이게 무슨 꿈이지. 묻고 싶어도 정답을 알 만한 상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그의 얼굴이 눈꺼풀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마리, 너희 집에 같이 가자고?"
"응!"
갑작스러운 마리의 임무 요청에 단장인 키도는 당황스러운지 이마를 짚었다. 마리는 이미 갈 마음인 걸 티 내듯 가장 아낀다는 옷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기대감에 양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오늘의 마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 뒤에 있는 큰 배낭만 뺀다면. 어릴 때 본 학습 만화에나 나올 법한 모험용 배낭은 뭘 그리 가득 넣었는지 크기가 거의 히요리만 했다. 짐을 싸면서 들 수도 없다는 걸 눈치 못 챈 걸까. 마리라면 그게 가능하다는 한 편, 어차피 처음부터 혼자 갈 생각이 없어서 끝까지 싼 결과가 저 정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쩌지 저 정도면 세토도 힘들 것 같고 코노하씨는 와야 할 것 같은데. 그 코노하씨는 이제 없지만. 나도 모르게 하루카씨에게로 눈길이 가자 하루카씨는 천진난만하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코노하씨와 똑같은 얼굴 반점을 보다 아무것도 아니라 답했다.
"세토, 마리네 집은 얼마나 걸려?"
"3시간 정도임다."
"3, 3시간..."
무언가 떠올렸는지 신타로씨가 급격히 초췌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마리네 집에 가본 적이라도 있는 걸까. 그게 아니더라도 3시간이면 확실히 버겁긴 하다. 나도 떨떠름하게 있자 세토는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인지 목소리에 기운을 더 불어넣었다.
"숲 깊은 곳에 있어서 말임다. 아, 그래도 이번엔 시라키와 히비야가 있으니 덜 헤매서 더 빨리 가게 될지도 몰라요."
"좋아, 나도 이젠 능력을 잘 쓰니까!"
"뭐, 열심히 해봐."
"응!"
히요리의 응원 아닌 응원이 그렇게 좋은지 히비야의 입꼬리가 귀까지 걸렸다. 나와 모모가 공부에 매달리는 동안 히비야는 히비야대로 능력 제어에 집중했더니 그만큼의 성과가 나온 참이었다. 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물론, 요즘은 여러 활용 방법도 찾아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능력이 감정의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지금도 눈이 붉어져 버렸지만. 그 눈으로 초롱초롱하게 히요리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히요리의 주먹이 날아갔다. 키도도, 히요리도 어쩜 저렇게 동작이 깔끔한지 모르겠다.
히요리와 히비야의 상황이 마무리될 때쯤,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 막 논쟁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공부할 때 썼던 방을 정리하고 내려오느라 계단 쪽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신타로씨가 셀러리 같은 다리로 슬금슬금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태연한 척 흔드는 손과 요동치는 눈동자가 대비되어 조금 웃겼다.
"오, 그래. 그러면 잘 다녀와라. 난 좀 일이 있어서..."
"오빠, 또 히키코모리처럼 집안에 박혀있으려고?"
"집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지만 집, 아지트 밖에 안가잖아요. 그 유리와 같은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3시간 하드 트레이닝! 이 에네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타카네 너! 혼자 치사하게 에네인 상태로 갈 생각이냐!"
"어머, 치사하다니요! 이 모습도 저고, 무엇보다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슈퍼 프리티 전뇌걸의 활약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거기 어차피 인터넷 안 되어서 너 가봤자 그냥 시끄러운 고철 덩어리가..."
"신타로씨, 마리네 집 가본 적 있으세요?"
혹시나 싸움이 커질까 봐 잽싸게 신타로씨의 말을 끊어냈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고. 갑자기 내가 낄 줄 몰랐는지 신타로씨는 눈만 끔벅였다.
"어, 어어. 이전 루프에서 몇 번..."
뭔가 잘못된 걸 느꼈는지 신타로씨가 다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봤자 한 번 나온 말이 사라질 리도 없지만. 나는 싱긋 미소를 띠며 쐐기를 박았다.
"그럼 가는 길도 잘 아시겠네요?"
"아, 알기는 하지만... 아, 그래! 나 말고도 세토도 있고!"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조금 걱정이었는데 길 아는 사람이 또 있다니 다행임다! 그렇죠,?"
"응! 신타로는 역시 듬직해!"
"진짜? 나 듬직해?! 아, 아니 그렇게 말해도 나는 안 갈 거니까!"
"안 갈 거야?"
"윽!"
마리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올려다보자 신타로씨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퇴치당하는 유령도 아니고, 이것 참. 머리는 좋은데 성격은 참 단순한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도망쳐 봐야 아지트 안이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뒤에는 내가 있다. 도망 못 가게 양어깨를 붙잡으니 나보다 큰 몸집이 종잇장처럼 크게 흔들렸다. 왜 이렇게 싫어하지. 롤러코스터 때처럼 토한 기억이라도 있나. 내가 의문을 담아 고개를 기울일 때, 마리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신타로랑도 같이 가고 싶은데... 안 될까?"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고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신타로씨."
"크윽... 나는... 나는...!"
신타로씨가 부들부들 떨면서 심장 부근을 콱 움켜쥐었다. 살짝 손을 놓으니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두 손을 대고 엎드렸다. 저 자세 만화에서만 봤었는데. 위로차신타로씨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마리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꽃을 닮은 분홍색 눈동자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고, 그걸 반영하듯 옆 머리카락이 꾸물거리며 춤을 췄다. 유원지 갔을 때보다 더 신난 거 아닐까. 집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뭐가 그리 좋은 걸까. 오랜 기억 속 아빠와 둘이 살던 집을 떠올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마리, 갑자기 집에는 왜?"
"이치카와 부모님을 봤더니 오랜만에 집에 가고 싶어졌어. 나도 부모님께 모두를 소개해주고 싶은걸!"
그렇게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마리의 말에 아지트가 순식간에 정적에 빠졌다. 마리의 부모님은 분명... 자신의 말이 가져온 파급력에 당황한 마리가 이리저리 둘러보자 마리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서둘러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안 가네, 마네 했던 신타로씨조차도. 한 편의 코미디를 본 것 같아 소리를 죽이고 작게 키득거렸다. 마지막으로 마리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을 때, 마리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주었다. 뱀처럼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내 손에 엉겨 붙었다. 아자미의 딸이자 마리의 어머니,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멀거니 우릴 지켜보던 하얀 머리의 여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응, 나도 마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어."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리와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내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마리는 두 손을 꼭 잡고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이치카라면 두 분 다 좋아하실 거야!"
오늘의 날씨도 맑음. 다르게 말하자면 오늘도 여전히 덥다는 말이다. 구름 하나 없는 청명한 하늘은 꼭 수면과 같아서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비칠 것만 같았다. 여전히 따가운 직사광선을 내뿜는 태양을 피해 우리는 나무 그늘로 숨었다. 그건 꼭 사람의 눈을 피해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만 같았다. 그 기분은 착각이 아닌 건지, 모모가 숲에 들어온 이후에는 그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무척 신기해했다. 우리 외의 아무도 없는 숲. 보통이라면 섬뜩해야 할 텐데 마리의 집이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그늘 덕분에 그리 덥진 않지만 소소한 매미 소리와 풀 냄새가 가득해 지금이 여름이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문제가 있다면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것일까. 괜히 신타로씨가 가기 싫다며 버틴 게 아니었다. 아지트의 가장 가까운 역에서 이 지역까지 오는 것만 해도 전철로 1시간. 그다음은 숲에서 도보로 두 시간 반이라는 가혹한 스케줄이었다. 사방이 나무라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힘든 데다가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곳에 있다 보니 제대로 된 길도 있을 리가 없었다. 짚을 벽조차 없는 자연의 대미로 속을 우리는 그래도 잘 헤쳐나가고 있다.
"어디 보자... 앞으로 15분만 더 걸으면 될 것 같은데."
"꽤 많이 왔구나! 저기 이제 어디로 가면 돼?"
"찍."
"오른쪽이라는 것 같슴다!"
"오른쪽 말이지. 아, 풀이 좀 덜 자란 곳이 있긴 하네. 돌부리가 많으니까 다들 조심해."
바로 우리의 눈 덕분에. 히비야가 마리 집 위치를 확인하면, 아야노 선배가 동물에게 우리가 다닐만한 길을 물어보고, 세토가 그 답을 확인한 후, 내가 그 길에 주의할 것 없는지 살펴본다. 총 4개의 호화스러운 프로세스를 거쳐 가며 조금 느리긴 해도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미로라고 표현했지만 이래서야 지도를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숲의 수장이라고 하는 작고 귀여운 햄스터 가이드까지 덤으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콜라에 콕 박혀있던 신타로씨가 고개를 들었다.
"...길을 알고 뭐고 내가 올 필요 없었잖아, 이거."
"조금이라도 정보가 더 있으면 좋은 거니까 말이다."
"그보다 오빠 콜라 한 병을 다 마실 셈이야? 그만 좀 먹어!"
"아아... 봐줘라... 나는 콜라 없으면 죽어..."
"신타로씨, 그 이상 콜라 드시지 마세요. 안 그래도 지친 몸이 탄산을 못 버텨요. 그러다간 또 토할걸요."
"주인님 컬렉션이 또 하나 늘겠네요! 구토 유원지 편 다음에는 숲속 편인가요? 이렇게 친절히 시리즈까지 챙겨주시다니~"
"에네도 지금 몸이 슬슬 한계니까 타카네씨로 돌아와."
"칫..."
혀를 차는 소리와 동시에 신타로씨의 휴대전화가 온통 파란색 조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픽셀이 깨지듯 푸른 빛이 물러나고 나니 하루카씨에게 업혀있던 타카네씨의 몸이 한 번 크게 움찔거렸다. 느리게 올라간 눈꺼풀 아래에는 에네와는 정반대로 붉디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눈 한 번 깜박이자 언제 그랬다는 듯 사라졌지만.
"아, 역시 이 몸은 불편해. 이렇게 멀리 올 때는 에네인 채로만 오는 게 좋은데. 덥거나 피곤한 것도 모르고."
"그 뱀이 만들었던 특수장치를 쓰지 않는 한, 정신이 오래 떠나있으면 실제 몸에 영향이 가니 어쩔 수 없죠."
"나도 알아. 그냥 아쉽다는 거지."
"에네도 좋지만 난 지금 타카네 모습이 좋은걸."
"바, 바보 하루카! 다들 있을 때 말하면 어떡해!"
그 말은 둘이 있을 때는 된다는 건가요. 잘 알겠습니다, 타카네씨. 초록빛 향연인 곳에서 분홍색 기류를 폴폴 흘려대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허허로이 웃었다. 사실 솔직하지 못한 타카네씨의 성격상 두 사람은 당분간 애매한 관계로 지내지 않을까 했는데, 이게 웬걸. 그동안 마음을 억누른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메카쿠시단 공식 1호 커플로 자리 잡은 두 사람의 연애 전선은 창창하기만 했다. 두 사람이 밝은 만큼 바로 옆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다. 타카네씨에게 한 대 맞기 전에 조금 표정 관리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신타로씨. 속으로만 핀잔 한마디 하고 있는데 아야노 선배가 이온 음료 하나를 꼭 쥐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신타로, 힘들면 콜라 말고 이거 마셔. "
"아아... 고마워...!"
신타로씨가 감사히 음료수를 받아들자 아야노 선배는 헤실거리며 웃었다. 웃는 건 좋은데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아야노 선배. 예전 신타로씨의 태도가 워낙 매몰찼던 탓에 아야노 선배는 신타로씨의 사소한 말에도 쉬이 기뻐하게 되어버렸다. 솔직히 자기 마음을 털어놓기만 하면 해결이었던 타카네씨, 하루카씨하고는 다르다. 신타로씨는 눈치가 없고, 아야노씨는 그 눈치를 뚫을 만큼의 적극성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뭐, 저 둔한 분을 꿰뚫으려면 어지간한 정도로는 안 되겠지만. 앞날이 어두운 건 결코 아닌데 뭔가 지지부진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어떻게 해야 소중한 선배를 도울 수 있을까. 고민에 잠기려는 무렵 갑자기 오른쪽 볼에 닿은 찬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주춤 몸을 물리며 뒤를 돌아보자 쿨러백과 음료수병을 들고 있는 슈우야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남의 속도 모르고 슈우야는 웃느라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미안,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거든~ 아무튼 이치카쨩도 뭐 마시면서 해. 주변 살피라, 단원들 몸 상태 체크하라 정신없잖아.
"조금 그렇긴 한데 괜찮아. 누구 쓰러지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그 누가 이치카쨩이 되지 않게 조심하란 소리지. 이치카쨩은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자기 자신의 상태는 못 보잖아~ 앗, 차가!"
반쯤 복수 삼아 받은 음료수병을 슈우야의 왼쪽 뺨에 갖다 댔다. 아까 나처럼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이번엔 내가 키득거리며 웃을 타이밍이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도 반달처럼 곱게 접어 웃었다. 놀릴 의도에 아직 말 못 한 진심을 조금 섞어서.
"대신 날 챙겨주는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한 마디 덧붙인 건 덤이었다. 태연자약하게 말하긴 했지만 역시 부끄러워서 슈우야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이만 가자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제일 앞에서 걸어가면서 슈우야에게 받은 음료수를 천천히 마셨다. 은근한 단맛이 혀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음료가 시원해서 다행이었다. 지금의 난 너무 더웠으니까. 지금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이렇게 치고 빠지는 것 정도가 고작이지만, 그래도... 장마 끝난 이후의 여름날처럼 내 연애 전선은 맑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마리네 집은 숲의 중간, 자연이 만들어낸 작은 공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2시간 30분이라는 대행진 끝에 도달한 목적지는 꽤 아담하고 귀여웠다. 2명 정도가 살기에 적당해 보이는 크기라고 할까. 장소도 그렇고 현대 건물 양식과는 전혀 달라서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을 일게 했다. 그 입구는 도착하자마자 마리가 집 정리해야 한다고 해서 여전히 굳게 닫혀있지만 말이다. 우당탕 소리만 들어보면 정리가 아니라 오히려 어지르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돕고 싶어도 마리가 막은 것도 있고 지치기도 해서 다들 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들을 이리저리 흔들자 파도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게 참 운치 있다.
"그늘이라 그런가. 뭔가 좀 서늘하다 해야 하나, 오싹하다 해야 하나..."
"서늘하다고? 난 더운데. 으음, 히비야군 어린 애니까 체온 높아서 그런 거 아니야?"
"어린 애 취급하지 마! 그래봤자 얼마나 차이 난다고!"
히비야는 욱해서 모모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음... 겉으로 보이는 키 차이만 해도 차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아니라 체온이라면 정말 얼마 차이는 안 나겠지만. 괜히 말했다가 열만 더 올릴 것 같아서 미뤄두고 잠시 상태를 확인하겠다며 끼어들었다. 눈을 붉게 물들이고 히비야를 조금 지친 거 외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메카쿠시단 내에서 멀쩡한 축에 속했다. 문제는 몸이 아니라... 보이는 게 영 의아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눈이 거짓을 보여줄 리 없는데도.
"이건 서늘한 게 아니라... 뭔가 불안한 걸 그렇게 느낀 것 같아. 느낌이 싸하다는 표현도 있잖아."
"불안? 이런 숲에서 싸할 게 뭐가 있지..."
"사람이 안 사는 숲이라?"
"지금 우리 때문에 바글바글한 거 안 보여?"
"그러고 보니 아까 숲의 수장이 그랬슴다. 최근에 저희 말고 이 숲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고."
"그걸 왜 지금 말하는데?!"
"가끔 길 잃고 헤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별거 아닐검다!"
"흐, 흠. 뭐 별거 아니겠지..."
말과 다르게 키도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쌌다. 조금이라도 표정을 숨기려는 키도와 다르게 신타로씨는 아예 대놓고 창백하고. 귀신의 집에서 벌였던 두 사람의 활약이 떠올라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처럼 이러다 토끼 보고도 놀라서 도망치는 거 아닐까. 귀신의 집은 범위라도 좁지 이 숲에서 뛰쳐나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도 히비야의 능력이 있어서 안심이긴 하다. 제어 교실을 당당히 졸업한 히비야의 솜씨는 이제 누구와 견주어도 될 정도였으니까. 문득 흐뭇한 마음에 히비야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가 옆에 있던 히요리가 갑자기 눈을 비비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히요리 왜 그래?"
"별거 아니에요. 먼지가 들어갔는지 갑자기 눈이 따가워서."
"먼지?! 어디 봐봐!"
"잠깐, 그 얼굴을 지금 어디다 들이미는 거야!"
먼지라도 떼어줄 생각이었는지 히비야가 바짝 얼굴을 들이대기 무섭게 히요리의 손이 나갔다. 순간적으로 싸대기라도 때리나 싶어 몸이 움직였지만 그저 손바닥으로 볼을 쭉 미는 정도였다. 히요리, 히비야의 다른 데는 가감 없이 때리면서 얼굴은 보호해주는구나. 이걸 좋게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 나무문이 벌컥 열렸다. 달뜬 숨을 내쉬는 마리가 밝은 미소를 그리며 우리 쪽으로 뛰어나왔다.
"다 치웠어! 이제 들어와도... 어? 싸우는 거야?"
"별거 아니다. 히비야, 히요리 그쯤 해두도록 해. 자, 그럼 가볼까."
단장 키도의 말에 히비야와 히요리가 다툼 아닌 다툼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단장이란 걸까. 우르르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일부러 맨 뒤에 서서 기다렸다. 두 사람이 이상행동을 보여서 그런 건지 나도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상태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히요리까지 살펴봐도 이렇다 할 이상은 없었다. 그럼 기분탓인가. 히비야의 싸함과 히요리의 눈, 그리고 뭐라 할 수 없는 나의 찝찝함. 여러 가지가 걸렸지만 당장 눈앞에 확인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털어버렸다. 서둘러 모두의 뒤를 쫓아가 나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닫았다.
그 찝찝함을 그냥 넘겨서 안 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와..."
마리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탄성부터 흘러나왔다. 겉에서 봤을 땐 작아 보였는데 그건 거대한 숲에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내부는 생각한 것보다 넓고 쾌적했다. 마리의 머리카락처럼 하얀 벽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나뭇결이 살아있는 여러 책장이 그 벽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 책장 하나도 비어있는 칸이 없었다. 소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서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거기서 종이 냄새 풍겨와 풀 냄새와 뒤섞였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있는 창문 쪽에는 생활감 넘치는 테이블이 있어 여기서 주로 책을 읽었다는 것을 짐작하기 쉬웠다. 좀 더 안쪽을 살펴보면 현대 문명과 떨어져 있단 걸 증명하듯 화덕이 있는 작은 부엌이 있었다. 침실은 더 구석에 있는 걸까. 살펴보려고 해도 사람이 많으니 지금으로선 무리다. 우선 첫인상은 마치 어렸을 때 갖고 놀았던 인형의 집에 들어온 것 같다. 그것도 숲속의 나무집 테마로 만들어진.
"다들 편하게 있어! 둘러봐도 괜찮아."
마리의 허락이 떨어지자 낯선 집 분위기에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다들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었나 보네. 그래봤자 작은 집 안이었지만. 나는 주변을 적당히 둘러보다가 가장 가까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책들의 향연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지트에서 본 것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극히 일부였구나. 아지트에 있는 건 그나마 최근에 쓰인 것들이었는지 읽을 만 했지만 이건 아예 읽을 수 없는 것도 꽤 존재했다. 이게 바로 고어(古語)인가. 박물관에 있을 만한 것에 손을 대려니 조금 떨렸다. 아무 책이나 잡고 페이지를 설렁설렁 넘기자 타자기로 찍어낸 글씨와 펜촉 느낌이 살아있는 삽화가 눈에 띄었다. 검을 든 왕자와 울고 있는 공주, 그리고 무시무시한 메두사. ...메두사의 집에 메두사가 악당인 그림책이 있어도 되는 건가. 괜한 걸 건드렸다 싶어 조용히 책장에 꽂아 넣자 근처에서 키도가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지하게 입을 꾹 가린 표정과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이건... 굉장하군."
"뭐가?"
"와아악!! 그건 안 돼!!"
"뭔데 그래? 어디, 어디... 푸핫!"
"보, 보지 말라구!"
마리가 다급하게 달려오자 키도는 자연스럽게 슈우야에게 스케치북을 패스했다. 마리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스케치북은 팔랑팔랑 잘도 넘어갔다. 바로 옆에 있는 나도 슬쩍 본 정도로 내용이 파악될 정도로 단순한 그림책이었다.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거침없이 그린 삽화에는 누군가와 많이 닮은 하얀 머리 여자아이가 검을 들고 있었다. 아까 내가 본 동화책에서 영감이라도 받은 건지 근사한 황금 왕관도 쓴 채였다.
다음 장에서 여자아이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드래곤 위에 올라타 있었다. 칼로 드래곤을 해치우는 중인 걸까. 저 드래곤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퇴치당하는 중인 걸까. 무시무시한 장면과 상반되게 해맑은 여자아이의 미소가 인상적이다.
결국, 전투는 승리했는지 다음 장에서 여자아이는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다. 옆에는 드래곤도 대동한 채로. 해치운 게 아니었나. 전투 후에 저렇게 해맑게 춤을 추고 있다니 사실은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뭐, 마리가 어릴 때 그린 그림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슈우야에게 스케치북을 뺏어 제자리에 고이 넣어두었다. 인제 보니 표지에는 굵은 글씨로 비밀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해서 키도가 보게 된 것이겠지. 범인인 키도는 입을 꾹 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고, 슈유야도 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폭소하고 있다. 그 둘 사이에서 마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고, 세토가 그런 마리를 겨우 달래주고 있었다.
"드래곤을 물리치는 것을 넘어 친구가 되다니! 정말 멋진 이야기였슴다, 마리!"
...저게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경우는 어설픈 위로보다는 이야기를 돌리는 게 더 나았다. 적당한 게 없을까. 화젯거리를 찾던 내 눈동자가 무언가에 끌리듯 구석에 있는 한 책상으로 향했다. 이 집과 같이 나이를 먹어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책상에 있는 것은 세 개의 서랍. 손을 갖다 대보자 잠겨있어 덜컹거리기만 했다. 작은 열쇠 구멍은 어디서 많이 본 것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슬그머니 마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양털처럼 뭉쳐있던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마리의 얼굴이 드러났다. 목에 걸린 작은 열쇠는 바닥에 쓸리며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아마도 저게...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 말을 걸었다.
"마리, 저 책상 서랍엔 뭐가 들어있어?"
"아, 거긴..."
분홍색 눈동자에 감정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움과 슬픔, 애틋함... 능력을 쓴 것이 아니라서 무수한 감정을 모두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나에게로 향하는 감정만큼은 호의로 가득 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리는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나더니 목에 걸려있던 열쇠로 굳게 닫힌 서랍을 열었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햇살을 받으며 하얗게 빛나는 먼지가 허공을 부유했다. 그 사이로 내 일기장처럼 군청색 표지의 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책이라기에는 그 흔한 제목이나 저자 같은 게 쓰여있지 않았다. 마리는 입으로 후후 먼지를 불어내고선 나에게 그 책을 내밀었다.
"읽어볼래?"
"잠가놓을 정도로 중요한 거 아니야? 봐도 괜찮아?"
"응. 이치카니까 괜찮아."
...판도라의 상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 이런 걸까. 마리에게서 책을 받아들고 손으로 표지를 쓸었다. 오래된 책 특유의 푸석한 감촉이 손바닥에 감돌았다. 제목도, 저자도 모르는 이 책을 손에 든 것만으로도 어째서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강한 기시감을 느끼며 겨우 책 표지를 넘겼다.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일기는 오늘 처음 써본다.」
"아자미..."
계속 내 속을 채우고 있던 기시감이 짧은 단어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랬다. 이건 그녀의 일기였다. 그 누구보다도 긴 세월을 살아온 한 존재가 유일하게 직접 남긴 기록이었다. 눈이 맑아지는 뱀이 들려줬던 이야기에 차마 다 담기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고 세세한 그녀의 인생이 거기에 있었다. 짧고도 긴 그 역사는 우리의 일상처럼 행복하고 따사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가감 없이 쓰인 날 것의 감정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인간답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이 커졌고, 그에 비례해 소원 역시 비대해지자 그건 결국 커다란 절망으로 변해갔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도 그녀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절규하듯 휘갈겨 쓴 글자에서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국은...
혹시나 단 한 장이라도 뜯어질까 주의하며 그녀의 인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내 노력이 무색하게 눈물이 종이 위에 뚝뚝 떨어졌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페이지에 잿빛 동그라미가 점점 그려졌다. 미처 기술되지 못한 그녀의 엔딩을 대신하는 것처럼. 무아몽중에 빠졌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며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책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던 마리, 신타로씨, 아야노 선배만이 비교적 평온했다. 아직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내며 서둘러 일기장을 돌려주었다.
"미안. 중요한 건데 조금 젖어버렸어."
"으응. 아냐. 괜찮아. 오히려 고마워. 아자미, 그러니까 할머니 이야기를 봐줘서. 할머니도 좋아하셨을 거야."
"남의 이야기를 본 건데 정말 그럴까."
"분명 그럴 거야.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아자미랑 너는 뭔가 긴밀한 관계였던 것 같거든."
"저랑 그녀가요?"
"그래. 마지막으로 생긴 뱀을 건네줄 정도니까. 내 기억으로는 볼 수 있는 게 내 시점뿐이라 자세히는 모른다는 게 조금 아쉽네."
한 번 어깨를 으쓱인 신타로씨는 이내 저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럼 이제 슬슬 인사드리러 갈까?"
잠시 말뜻을 이해 못 하고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아 소리를 냈다. 성묘하러 가야 하는데 나 때문에 다들 기다리고 있었구나. 모두가 있는 곳에서 운 것도, 본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도 부끄러워서 후드를 올려 썼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힘차게 대답하며 따라오라고 나무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어서 나오라고 우릴 재촉했다.
"엄마~"
마리의 발랄한 발걸음 끝에 존재하는 건 따스하게 안아줄 누군가가 아니라 차가운 비석 3개였다.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라고 소개하는 마리의 목소리엔 쓸쓸함이 묻어났다. 주위에 풀이 무성하게 난 게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티가 났다. 비석을 가릴 정도라 마리 아니었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애초에 마리 아니었으면 이런 숲 깊은 곳에 올 일도 없었을 테지만. 덕분에 인사를 드리기 전에 비석 주변 정리부터 해야만 했다. 여름 한낮에 풀을 깎고, 비석을 닦고... 그나마 다행인 건 나무 그늘이었다는 것과 웬만한 도구는 집에 있었다는 거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이후에는 차례대로 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런 걸 줄 서서 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대부분 묘에 대고 인사를 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씁쓸했다. 제각기 대답이 돌아오지 못할 말을 건네고 준비해온 것을 그 앞에 내려놓았다. 편지, 과자, 술 대신 음료수... 메카쿠시단 만큼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챙겨온 국화를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음, 안녕하세요. 저는 시라키 이치카라고 해요."
인사까지는 좋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아 눈동자를 데굴 굴렀다. 아빠나 엄마 무덤 앞에서는 혼잣말을 잘만 했는데 주위에 눈이 있어서 그런지 마땅히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리의 근황이나 어떤 친구인지 등은 이미 앞에서 다 구구절절 말한 탓도 컸다. 그냥 조용히 묵념만 하고 빠질까. 괜히 비석만 노려보고 있으니 이름 몇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츠키히코.
코자쿠라...
코자쿠라 시온.
세월에 풍파 되어 이름의 일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변해있었다. 누군가가 무수히 불렀으나 이제는 잊힌 이름들이 거기에 있었다. 마리가 우릴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마리가 외에는 아무도 이름이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 새겨진 평범한 비석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우리의 여름을 잊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 시작점이 되어준 이들의 이름도 잊고 싶지 않았다.
"츠키히코씨, 코자쿠라씨, 시온씨. 마리와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박또박 그 이름을 부르며 감사 인사를 덧붙였다.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와 겹치지 않으면서도 꼭 전하고 싶은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마리와 만나지 않았다면 고통스러운 나날도 없었겠지만, 이렇게 다 같이 모여있는 미래도 없었을 테니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 나날들은 몇 번의 감사를 전해도 부족할 거다. 몹시 짧은 한마디임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만족스러운지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치카와 만나서 다행이야. 꼭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갈까?"
"벌써?!"
가자는 말에 신타로씨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시선이 숲길 쪽을 정처 없이 배회하는 게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인다. 돌아갈 길이 힘들어서 더 버티고 싶은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신타로씨는 손을 부산스럽게 휘적이며 우릴 설득하려 애썼다.
"마리 오랜만에 온 걸 텐데 좀 더 있어도..."
"아냐. 인사는 다 했으니까 난 괜찮아."
"다들 먼 길 오느라 많이 지쳤기도 하고..."
"길이 멀어서 지금부터 돌아가도 아지트에 도착할 때쯤엔 해가 진 이후 일 검다."
"숲속이라 밤이 되면 더 돌아가기 힘들어요. 노숙하고 싶으신 건 아니죠?"
"으으..."
"이런 곳에서 노숙이라니. 그런 건 있을 수 없...윽!"
"히요리?!"
허리를 꼿꼿이 핀 채 서 있던 히요리가 돌연 눈을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을 하루카씨가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신호처럼 우리는 둥글게 히요리 주변을 에워쌌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도 없고, 일사병이나 열사병이라고 보기엔 선선한 나무 그늘이니까 어폐가 있다.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작스러운 쓰러짐... 히요리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히비야를 보고 있으니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히비야를 처음 보았을 때가. 사람들 틈을 뚫고 히요리 눈앞까지 다가갔다.
"히요리, 왜 그래?"
"갑자기 눈이..."
불안감에 쿵쿵 울리는 심장 고동에 맞춰 눈의 온도를 높였다. 미약한 고통과 혼란, 당황스러움. 그리고... 뜨거워진 내 눈에 비친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히요리의 감정이 나에게 고스란히 옮아간 것처럼 혼란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쳤다. 지금 내 눈엔 붉은 눈이 보였다. 히요리의 붉은 눈과 그 안에 있는 검은 뱀의 붉은 눈이. 여전히 모조품처럼 보이는 뱀에게는 눈조차도 붉기만 하고 동공이 존재하지 않아 마치 가짜 같았다. 며칠 동안 미동도 없다가 갑자기 왜. 심지어 다른 뱀들이랑 보이는 게 다르지? 물어도 대답할 사람은 없고, 애초에 이 능력에 상식을 기대하는 것조차가 불가능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력감에 이를 악물었다.
내 눈으로 무언가 더 알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좀 더 면밀히 히요리를 관찰하고 있자 히요리의 붉은 눈이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건 꼭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히요리의 붉은 눈을 눈치챈 단원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히요리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몸을 돌렸다. 깊은 숲속에 있지만, 나무 같은 엄폐물들을 모조리 투시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내게 이곳은 평야와 다름없었다. 새도, 다람쥐도, 이 숲에 있는 동물이라면 누구든 내 눈에서 숨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보였다. 큰 나무 뒤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하루카씨와 비견될 만한 장신의 사람은 이 여름날 덥지도 않은지 긴 천을 몸에 두른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붉은 기가 미약하게 도는 검은 머리카락은 목 밑까지 자라있어 옷과 함께 여름 바람에 쉽게 흔들렸다. 창백한 얼굴에는 검은 비늘 같은 게 따닥따닥 붙어있었고 귀에는 코노하씨처럼 헤드폰 같은 게 달려있었다.
잠깐, 코노하씨?
무언가 알아차리려는 그때,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금색 눈을 보자마자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설마. 저 눈동자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와 대조해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땋은 뒷머리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안돼! 기다려!"
"이치카쨩?!"
친구들을 뒤로하고 반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투시 때문에 주변 나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팔이나 다리에 자꾸만 생채기가 났다. 돌부리에 걸려 몸이 휘청거려도 중심을 잡으며 계속 지면을 박찼다. 놓칠 수 없다. 절대로. 그야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 녀석은...
"거기 서!!!"
목이 쉬어라 외쳐도 녀석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체격 차 때문인지 아무리 달려도 저 녀석과 나의 거리는 좁혀지긴커녕 멀어져만 갔다. 숨은 턱 끝까지 올라오고 심장 박동은 점점 거세져 갔다. 쿵쿵 시끄러운 소리에 꿈에서 코노하씨가 했던 말이 뒤섞였다.
「괴물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의 형제와.」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의 꿈을 꾸는 것처럼 그리운 사람이 내 꿈에 나온 것뿐이라고. 그렇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미약하게나마 잔존해있는 코노하씨의 자아가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려고 한 것이라면? 그리고 코노하씨가 남아있는 것처럼 그 녀석도 어떤 형태로 이 세계에 남게 된 것이라면? 이대로 놓치면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아지경으로 달려 나가던 녀석이 돌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아래에는 험난한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덩달아 내 몸이 굳어졌다. 두렵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빽빽하게 심아진 나무를 손으로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른 침을 삼키고는 매미 소리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눈이 맑아지는 뱀!!!"
내 외침이 닿은 것일까, 결국 그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는 모습은 내 기억과 좀 괴리가 있었다.
"어라?"
낮은 목소리와 대비되는 가벼운 말에 내 발걸음이 일순 멈추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가다듬으며 느리게 그에게 다가갔다. 보이진 않지만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를 밀어내며 고개를 내미니 인기척을 느낀 그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어느새 붉게 변한 눈은 그 어떤 살기나 적의 없이 느리게 두어 번 깜박였다.
"이치카씨? 이게 무슨..."
"...뭐?"
맹세하건대 눈이 맑아지는 뱀이 켄지로 선생님께 있던 때에도 '이치카씨'라고 불린 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눈이 맑아지는 뱀이 아닌 제삼자라고 하기엔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게 수상했다. 나는 점점 눈의 온도를 높였다. 메카쿠시단원을 본다면 뱀까지 보일 정도로. 그러나 뱀도 아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 보이자 긴장이 그 자리에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더 선명해졌다. 내 눈을 의심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읊었다.
"히요리...?"
자신과 전혀 다른 몸집을 가진 사내 안에서 히요리가 왜 부르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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