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time apocalypse: ⁎

remake

쪄뱅온。 by 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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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재난과 기적은 어떤 동질성을 공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고 없이 삶을 꿰뚫었다가 다 녹아 없어져 버리고 나면 사라지지 않을 상해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된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그로부터 오는 허무를 견디는 건 이제 현대인이 갖춰야할 일종의 소양이었다.


낡은 기억이 묻은 꿈에서 눈을 떴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아득해져 눈을 굴리자, 이윽고 어디에도 피가 말라붙지 않은 방이다.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을 그르릉거리던 가상의 위협은 사라지고 마음 한 켠에 사소한 안심이 배겨든다. 

덕분에 그는 늑장을 부리듯 베개 속으로 머리를 부비며 이 난장 속을 잘도 살아남은 위대한 솜덩이의 감촉을 느낀다. 뒤통수는 물론, 목덜미에서 때로 귓불까지 감싸오는 감촉은 푹신함의 극한이다. 이렇게 포근한 물건이 세상에 있다니 우습기도 하다고,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이제는 일상이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공룡은 뒤척임 없이 그저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결국 길게 내쉰 숨 하나가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이제와서는 그래도 아주 간간이, 자그마한 소음이나 음성이 콘크리트 벽을 타고 넘어오는 날도 있기는 했으나 포함해 온통 고요임에는 이견이 없다. 더이상 이웃의 칩거를 내 방 안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소요는 없다. 그런 세상이었다. 어쩌면 그런 습관일지도 몰랐다.

그건 일례로 공룡이 가끔 혼잣말을 할 때 손을 쓰는 것과 같은 습관이다. 또 한편으로는 슬리퍼를 신고도 소리 내지 않고 걷는 법을 아는 것과도 같고, 그 이외에도 쓸데없이 바스락거리고 스치는 소리, 혹은 의도치 않게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사그라뜨릴 줄 아는 것과도 같다.

토막 상식.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질 때는 손으로 코끝을 잠시 쥐면 간지러움이 멎는다.

사태가 일단락되었음에도 대개는 그런 버릇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그는 종종 그게 어떤 형태의 진화는 아닐까 하는 추론을 했다. 역병이나 멸종, 그 모든 사건이 마치 음모론처럼, 우주 단위로 구성된 섭리의 일부라고 한다면 이 모든 트라우마는 또는 인류라는 하나의 생물종을 가리키는, 필연의 이정표와 같은 셈이 아닌가 하고.

물론 말이 안된다는 건 알고 있고, 그냥 운명론에 책임을 돌리고 싶은 심산이다. 폭력과 멸절의 시대 이후, 우리는 공생이라는 방법 속에 서로를 밀어 넣어가며 살아왔지만 그 이전에는, 아니 사실은 그 이후에도 일상을 비집는 끔찍한 경험의 예속이 때로 잦았으므로. 그렇게 타당하진 않은 방식으로 사고를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그냥 다 그렇게 될 것이었을지도 모른단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고,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도 같다가 도리어 무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종교를 믿는 마음도 이와 같겠지. 어느 날 잠뜰과는 그런 대화를 했다. 반쯤 부서진 교회 건물을 내려다보며 독백하다시피 나눈 대화였다.

이미 다 죽은 도시인 줄로만 알았으므로 그날 귀를 간지럽히던 그 때아닌 시끌벅적함이 제법 반갑게 다가오기도, 반대로 신경에 거슬리기도 했던 탓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걸어 나와 두리번거리던 다음엔 둘 다 헛웃음을 흘린 기억이 있다. 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앞으로 문전성시를 이룬 수많은 신도, 혹은 예비신도들을 보며.

뭐 기대할 게 있나? 공룡은 짧은 물음을 던질 뿐이었으나, 잠뜰은 그 풍경을 조금 더 길게 내려다보았고 이내 양 손으로 난간을 쥐었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켜듯 허리를 눌러 늘였다. 글쎄 ···. 담담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는 복도를 먼지처럼 스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컵을 쥐었다. 이전부터 무엇도 담겨있지 않던 컵에는 이제 미미한 물기마저 찾아볼 수 없고, 덕분에 말라붙은 목이 아우성을 친다. 때문에 공룡은 보드라운 양말 밑면을 바닥에 대고 느리게 걸음을 돌렸다.

날이 춥지 않음에도 양말까지 한 겹 잘 덧 신어진 것은 그래두는 편이 조금이라도 나았던 때의 잔재이기도 하며, 일면 남은 트라우마의 발현이기도 하다.

때문에 걸음은 소리 없이 주방을 향했다. 망설임 없이 미끄러지듯 나아가 곧 냉장고 앞에서 멈추어선다. 손잡이를 쥐고 조금 힘을 주어 당기면, 곧 문 사이로 새어나온 냉기와 옅은 주광색 불빛이 주방에 스민다. 방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깃불을 보는 때였다. 불. 빛. 온기는 없으나 나긋하게 느껴지는 풍경에 조금 감상에 잠길듯 하다 그냥 물 한 병을 꺼냈다.

라벨도 붙지 않은 플라스틱 병 안에서 물줄기는 컵 벽면을 따라 가늘게 흘러내리고, 공룡은 그 앞에 주저 앉아 컵을 기울였다. 불빛이 가신 냉장고 앞 자리는 공허했으므로. 아니 그보다는 공허를 닮았으므로. 가만히 컵을 기울이고 있으면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또한 그것의 일부였으며, 때문에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그 소리를 길게 듣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잠들었다. 


몸이 흔들려 깨어보니 늦은 오후였다. 비몽사몽한 시야에 인영이 희끄무레하게 비쳐 꿈인가 했다. 그러나 그 인영은 그가 다시 잠에 빠져들기라도 할라치면 놓치지 않고 어깨를 흔들어오는데, 때문에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간신히 흐린 눈을 깨우면, 사실 그보다 먼저 억센 흔들림으로 그것이 제 오랜 소꿉친구임을 깨닫는다.

몸을 일으키며 흐아암 하품을 밀었다. 동시에 등짝으로 매서운 손길이 날아든다. 통증에 번쩍 정신이 들고, 오후에 일정이 있었단 사실은 덕분에 뒤늦게나마 떠오른다.

“미안 미안. 아우 미안 ··· ! 하다고!”

방으로 쫓겨 들어가는 와중에도 뒤에서 퍽 퍽 쳐오는 손길은, 힘이 실려있지 않지만 맞은 곳이 꽤 아리다. 그러니까 현관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쯤에야 문득 어떤 의문이 찾아든 것은 그 때문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흐르듯 질문을 띄웠다.

“뜰님은 근데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공룡이 그렇게 묻는 이유는 공룡이 이곳에 이사 오게 된 지 이제 겨우 며칠이 될까 말까 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건 이사라기보단 사실 그냥 빈 집에 몸을 비집어 사는 것에 더 가까웠는데, 걸어서 돌아갈 거리에 집은 없었고 물건을 대충 주워다 마련한 대피소는 열악했으므로, 일단 당장 주인이 없는, 개중에 말짱한 집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던 결과다. 

다행히 횡포했던 군용 무기의 위력 사이에도 살아남은 아파트가 몇채는 있었고, 공룡은 따라서 안심하는 동시에 채 커튼도 다 걸리지 못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그 지나간 시대의 잔재를 어떻게 보아야할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열어보면 다수는 먼지가 좀 쌓였을 뿐 꽤 살만했으므로 그곳이 새로이 거처가 되었다. 아니래도 바닥을 쓸고 창문 몇 개를 갈고, 보아서 좋을 것 없는 잔해들을 좀 치우고 나면 어쨌든 살 수 있겠거니 싶었고, 때문에 몇주를 꼬박 이 때아닌 대청소에 썼다.

아주 멀쩡했던 곳부터 먼저 골라 정돈하고 나면 누가 무슨 말을 안해도 순서는 알아서 돌아갔고, 더 많이 깨지고 찢긴 곳은 물자를 찾아오느라 몇 달이 더 걸렸다. 그렇게 덜 어린 사람과 덜 나이 든 사람, 덜 어려운 사람들이 차례차례 집을 얻고 나면 수순에 따라 스물, 스물하나 하는 청년들이 가장 마지막이 됐다.

공룡은 그때 갓 스물하나였으므로 사이에선 거의 끝자락에 배정 받은 편이었다. 불만은 없었으나 예상보다 길어진 대피소 생활에 지쳐 쓰러지듯 첫발을 들였고 그래도 습관처럼 도어락 비밀번호는 어떻게 바꾸어 두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아마 알려준 기억은 없었고.

”그냥 다 눌러봤는데.”

너 생일이더만. 그 대수롭지 않은 중얼거림엔 아 ~ ! 하고 운율 있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맞다 그랬지. 복잡하게 설정할 정신도 없어 떠오르는 숫자를 그대로 입력했던 건 제 딴엔 자연스러워 잊고 있던 사실이다.

문고리를 돌려 집 밖을 나섰다. 이제 좀 낯익기 시작한 현관문을 걸어나오면 곧이어 가로로 길게 난 복도가 눈에 들어온다. 평범하게 길고 평범하게 하얗고 평범하게 녹음이 지며 평범하게 햇빛이 드는.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제 좀 낯이 익기 시작한 그 길은 공룡이 비밀번호를 정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을 들이지 않은 이유의 또 한 편이다.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아직 닫히지 않은 그 사이를 낯설게 보다 이내 눌러 닫았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와 화장실을 찾고 침대를 찾고 찬장을 열어보던 그때처럼. 더듬어가며 길을 찾던 순간 손 끝으로 느껴지던 생소한 벽지 촉감처럼.

다음으로는 어색한 정적만이 감돌았으므로 오래 공룡의 집이 되었던 건 바닥 장판의 한 켠 뿐이었다. 피부를 밀어내는 것만 같은 공기와 생경한 여백 속에서, 공룡은 누워 길게 잠들었고 그 사이에 몇 번 집 근처를 오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나, 답이 없자 잠시 내버려두는 듯 굴었다. 

어깨가 배기고 등이 배겨 눈을 떴다. 어쩐지 조금 싸늘한 기운에 몸을 웅크렸다. 기울어진 시야로 바닥을 길게 봤고, 한참 지나 누워있던 바닥 장판 무늬가 집에 있던 것과 똑같이 생겼단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잠들었고 어느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괜히 아무도 없는 곳에 실례합니다 –  인사를 했고, 이내 작은 화장실 창문부터 서랍장까지, 문이란 문을 전부 찾아 열어 청소를 했다.

몇시간을. 쌓인 공기를 내보내고 새 공기를 들이면서, 벽과 바닥에 충분히 몸을 부대끼고 문대고 그 다음에야 공룡은 낯선 이불 속에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조차도 전부 발로 조물조물 밟아 바짝 말린 다음의 이야기다. 충분히 뻔뻔해질만큼 시간이 흐르고 바람을 들이고 햇볕을 쐰 다음. 

나중에 들어보니 잠뜰은 첫날 밤새 전부 정리하고 잠들었다고 해서 다르구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내 바삐 일을 하는 것도 같은 줄기일까, 직접 묻기에는 좀 껄끄러운 질문이 일었으므로. 

”미친, 해 개 뜨거워.”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이 깬다. 그러고 보니 난간을 넘어오는 낮 볕이 유난히 눈부신 날이었다. 아파트 복도가 반은 그 하얀 볕에, 반은 아이보리색 그늘에 잠겨있었고, 공룡은 자기도 모르게 안쪽으로 몸을 당겨 그늘에 등을 댔다. 닿는 곳마다 서늘한 콘크리트 벽의 온도가 싸하게 옮는 여름이었다. 7월. 아니면 8월인가? 저도 모르게 올라있던 체온의 감각이 그제야 계절을 가늠하게 만든다.

”벌써 여름이네.”

어디서 우는지 모를 매미 소리가 뒤늦게 맴맴 귀를 울렸다. 햇볕에 노출되었던 피부가 익숙하게 화끈거리고, 청명한 바깥 녹음을 담은 시야 뒤로 어떤 풍경이 맴돌았다. 어느 지나온 여름의. 환영같은.


그 여름 우리에겐 아지트랄 것도 없었다. 낮에 해가 바로 들지 않으면서 사방이 막혀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지붕이 있는 도망치기 쉬운 곳을 찾아 서성였으나 종내에는 그럴 힘도 없어 그냥 길 한 구석에 몸을 앉혔다. 지명은 알 수 없었고, 그저 다른 곳보다 좀 덜 후덥지근한 그늘 한켠이었다. 

앓는 소리 한번, 부채질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어 대개는 그저 축 늘어져서 아슬아슬하게 명을 아낄 뿐이었는데, 그해 여름엔 유난히 해가 뜨거워 알게 모르게 고열로 쓰러져가는 사람이 많았다. 현기증에 잠시 눈을 감으려 했다가 그대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그 자신조차도 앞날을 모르는 채로 늘어져 있다 얼핏 고개를 돌리면 그렇게 잠든 이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내려다볼 때면, 혹은 나 자신조차도 몇 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그것을 눈에 담고 말았을 때면 햇빛에 닿은 피부가 유난히 따가웠다. 그럴 때면, '눈은 보지마', 잠뜰은 팔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그렇게 써주곤 했으므로 공룡도 똑같이 했다. 그 잉크 없는 글자를 읽느라 잠시 골몰하고 나면 얼마만큼은 잊어버릴 수 있었고, 따라서 지나치게 죽음이 가까워질 때면 그렇게 흔들어 깨워주고 흔들어 깨워주는 게 말 안해도 서로의 몫이었다.

그렇게 잠에 빠져가는 서로를, 흔들어 깨우고 다시 흔들어 깨우며 하루를 버텼고, 깨어 의미가 있을까 싶은 날에도 가끔은 남겨질 자신이 두려워 깨우고 또 깨웠다. 둘 모두 잠드는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불안이 또 서로를 깨우게 했다.

그러므로 그 지대한 불안과 초조의 역사를 거쳐 마주한 마지막이란 돌이켜보아도 우습기만한 무엇이었다. 감상도 격렬도 없는. 이를테면 촛불과도 같은 끝이었다. 소리 없이 타들어가다 종내에는 제가 녹인 촛농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야 마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헬기 돌아다니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었지, 한참 들여다본 후에야 겨우 그런 실마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결말의 전조일 것이라고, 희망이 있었더라면 진작 알아차렸을 법도 했지만 구조, 탈출, 희망 그 모든 것이 지워진 때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단서였다.

그래서 뒤늦게 알았다. 거의 일주일은 지난 후였다. 벽에 붙어있던 것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소리 없이 걸어 돌아갔으므로 두사람이 그것을 보게 된 건 그것이 붙은지 하루 이틀은 더 지나서였다. 그래도 꽤 넉넉히 챙겼다고 생각했던 식량이 느지막하게 동이 나고, 때문에 조심스레 나선 탐색 길에서. 

골목을 돌아 나오자마자 어지럽게 붙은 벽보는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하긴 그렇게 덕지덕지 붙여놓으면 누가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있겠느냐마는. 덕지덕지 붙어있어 오히려 종교의 시발점인가 했다. 드디어 생겨나는구나. 시기로 따지면 좀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찌푸린 눈에 '백신' '면역반응' 하는 믿기 어려운 단어들이 보여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백신이 살포되었다. 효과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들은 이제 대부분 움직이지 못하며, 몇몇은 면역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이제 곧 안전해질 것이다. 주변 사물로 위치를 표시하면 현재 마련 중인 대피소로 안내하겠다.

읽고 또 읽었으나 의미를 알 수 없어 한 번 더 읽었다. 빠뜨리는 것 없이 틀리는 것 없이. 꼼꼼히 읽으려 하면 할수록 음절은 서로 분절되어 머릿속을 흩어져나가는 것만 같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읽다 도리어 눈 앞이 어지러워져 여러번 되풀어 읽었다. 

사방이 탁 트인 길 한복판이었다. 그런 장소에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건, 두 사람 사이를 그것이 지나가려 했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가만히 서서 하나 둘 열다섯번, 그만큼은 읽은 다음에야 걸음을 옮겼고, 어딘가에 남아있을 식량을 찾아 두 시간 쯤 더 느리게 움직였다. 

돌아왔을 땐 해 질 녘이었다. 소리가 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밥을 먹을 때면 늘 들어가던 근처 창고에 몸을 앉혔다. 문이 열리지 않도록 무엇을 괼까 말까 하다가 괴었다. 빵 하나를 뜯었고, 먹기 전에 헛구역질을 했다.

면역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첫날의 어지러웠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로부터 한두 달 가량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던 기억이 떠올랐고, 길에 쓰러진 죽음들이 떠올랐다. 헛구역질을 한참 했으나 무엇도 올라오지 않았다. 붉어진 눈으로 다시 빵을 입에 넣었다. 넣기보단 우겨넣다시피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구 밀어 넣고 입 안 가득 씹었다.

그제서야 허기가 느껴지는 듯했으므로 우리는 사치스럽게 하나를 더 뜯었고 또한 밀어 넣었다. 헛으로 게워내느라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눈물이 고여서는 좀 억척스럽게 먹었고, 그날은 잠을 잤다. 불침번을 섰으나 잠을 잤다.

그러므로,

“그러게."

그런 답이 돌아왔을 땐 서로 눈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고 걸었다. 계단을 내리고 또 내려서 깨진 아스팔트 바닥에 발이 닿을 때까지. 쉼 없이 걸었다. 차라리 소리를 내면서. 뚜벅뚜벅 그런 소리가 아파트를 울리도록.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하지만 꾹 눌러 디디면서 아파트 앞에 섰다.

햇볕이 쨍했다. 해바라기가 피어있었다. 정말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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