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운수 좋은 날
백업
놀랍게도 쓴 날짜 15년 전임
그래서 1박2일 나오고 까나리가 나옴
지금 글쓴이 나이 여기 주인공들보다 많음
당연히 어색하겠지만 못 고치는 이유는 요즘 학교생활을 모름(.....
1.
"얘들아 안녕? 오늘도 즐거운 아침~"
"……안녕하세요."
햇살 좋은 가을날 아침, 그리고 새로운 한 주의 시작. 신성여고의 활기찬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의 이도영 선생님께서는 기운이 넘치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우리의 2학년 1반 학생들 역시 당연하다는 듯 즐겁게 인사를 하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라면 참 좋았을 텐데. 도영의 환한 웃음에 돌아오는 건 어디서 뭘 하고 왔기에 얼굴에 살이 잔뜩 올랐다느니, 기름이 좔좔 흐른다느니 하는 비난의 속닥거림뿐. 참 바람직한 사제관계의 전형을 보여 주는 2학년 1반이었다.
"다들 얼굴들이 왜 그러니? 아아, 중간고사가 며칠 안 남았다는 충격에 이러는 건가? 잠도 자 가면서 공부해야지 안 그러면 몸 상해요."
우우- 도영의 진심어린 충고와 걱정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야유하는 학생, 욕하는 학생, 눈을 돌리는 학생, 아예 안 듣고 엎드리는 학생 등 유형도 다양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도영은 이번에도 자신의 깊은 마음씨를 학생들이 몰라준다는 충격에 깊은 자괴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렸다, 따위의 전개가 나올 리 없었다.
"추석 연휴 바로 다음날이 중간고사라. 너희에게 연휴란 없겠구나? 불쌍한 것들. 연휴 내내 시골에도 못 내려가고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구나아~"
이보쇼, 그 말이 아주 흥에 겨운 즐거운 환호로 들리는 건 우리들의 환청이요? 말끝은 왜 길게 늘이는데? 걱정 뒤에 바로 이런 소리가 나오니 우리가 당신을 신뢰할 수가 없는 거잖아! 라는 학생들의 눈빛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도영은 연타로 학생들의 가슴에 비수를 푹푹 꽂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 댔다.
"그럼 열심히 공부하렴. 난 최선을 다해 연휴를 즐겁게 보낼 계획을 짜러 가야겠구나. 이번 추석엔 해외여행이나 가 볼까?"
선생님, 정녕 학생들의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전달 사항은 없고…… 그럼 아침 조회 끝! 수고하셨습니다~ 아, 반장은 잠시 교무실로 내려와~"
2학년 1반의 아침 시련은 끝났지만(완전히 끝이 아니다. 아직 종례의 시련이 남아 있다) 반장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도영의 마지막 말에 얼굴 급 핼쑥해진 아이는 2학년 1반의 영광스러운 반장이라고 쓰고 도영의 노예라고 읽히는 신혜원. 괴로워하는 아이들 속에서도 애써 눈을 돌리며 쿨한 포스를 유지 중이던 혜원은 결국 마지막에 와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아,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또야? 진짜 불쌍하다."
"얼른 갔다 와. 이번엔 또 뭐 시키려고 저럴까."
"선생님보다 혜원이가 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지 않냐?"
"맞아. 선생님은 그냥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것 같다니까."
"……담임만 아니었으면 그냥……."
"자, 잠깐만, 혜원아 진정해!"
오늘도 순조롭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2.
"안녕하세요~"
"어머, 일찍 나오셨네요."
2학년 1반과는 사뭇 다른, 다정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어 주는 훈훈하고 밝은 교무실 분위기다. 유이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두에게 밝게 웃어준 다음 자리에 앉았다. 며칠째 일에 치이는 터라 잠이 부족해 아침부터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컨디션 안 좋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어차피 다들 힘든 판에 피곤한 기색 내보여봤자 다른 사람만 힘들어질 게 뻔하다는 인내의 정신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일을 시작하려 하는데.
딱!
"으악!"
누군가가 유이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화들짝 놀란 유이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한 걸 보면 위력은 꽤나 강했던 것 같다.
"오랜만이야. 신유이 선생님."
"……이도영 선생님?"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도영선배."
"옳지. 잘하네."
"선배님, 이런 짓은 하지 말라고 제가 누누이……."
"새삼스럽게 뭘. 이쯤 되면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또 당신이냐! 라고 빽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그놈의 지긋지긋한 대학 선배라는 것 때문에 아직까지는 참았다. 익숙해지라고? 몰래 다가와서 이마에 혹이 생길 정도로 딱밤을 먹이는 데 익숙해지라는 황당한 주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나날이 발전하는 도영의 은신술에 언제 다가오는지 알 수가 없어 익숙해지기는 글렀다는 게 두 번째 문제였다. 내가 어쩌다 저 인간과 엮여서 이 고생을.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찌푸리려는데 도영의 얄미운 화술은 이 순간에도 멈출 줄을 모른다.
"얼굴 찌푸리면 주름 생겨요. 나이 서른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그거 마흔 아닙니까? 그리고 저 아직 서른 아니라니까요!"
"후배야, 스물여덟이면 30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단다. 경험자의 조언이니 새겨듣거라. 그나저나 이거 맛있게 생겼네?"
유이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도영은 유이의 책상에 놓여 있는 화려한 초콜릿 바구니를 집어 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를 꺼냈다. 유이의 제자가 정성스레 만들어 준 초콜릿이었다. 나도 아까워서 아직 못 먹었는데 저딴 인간에게 넘겨줄 순 없어! 라고 속으로 발악하며 유이가 제지하려 들었을 때는 이미 그 초콜릿이 도영의 입 속으로 깔끔하게 사라진 뒤였다.
"그, 그건……!"
"에이, 보기보다 맛없잖아."
"그럼 드시질 말든가요. 정민이가 직접 만들어서 준 건데……."
"뭐야, 내가 고작 하나 먹은 게 그렇게 아까운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교무실 한편, 도영과 유이의 이 유치한 투닥거림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기, 선생님."
아침조회 후 도영의 생각 없는 부름에 낚여서 투덜거리며 내려온 반장 혜원이었다. 불렀으면 어서 지시사항이나 전달할 것이지, 후배 교사의 이마를 정성들여 가격하며 아침부터 한숨이 나오는 장난질이나 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은 왜 살고 있으며 왜 반장이 되었는지에 대한 회의가 마구마구 들었다.
"신유이.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야. 선배에게 그 흔한 초콜릿 하나도 못 주겠다니."
"그게 아니라……!"
"저, 선생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닥거림에 보다 못한 혜원이 도영을 불렀지만 계속 무시당했다.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둘은 헤어 나올 길이 없어 보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 난 세상을 잘못 타고났어.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나같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은……."
"선생님!"
두 번을 불러도 도영이 전혀 듣는 기색을 안 보이자 폭발한 혜원은 도영의 귓가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질러 버렸다. 교무실이 울릴 듯한 큰 소리였지만 정작 도영은 별로 놀란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옆에 있던 유이가 놀라서 의자를 뒤로 젖혔는데,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어머, 유이야 괜찮니? 안 다친 건 아니지?"
"아…… 아야……."
"서, 선생님…… 괜찮으세요?"
"……혜원이니? 괘, 괜찮아. 아야야……."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은데?"
형편없이 넘어져버린 유이는 도영의 말마따나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넘어지며 허리를 삐끗했는지 연신 허리를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왠지 일이 심각해진 것 같다. 원인제공자 혜원은 어쩔 줄을 모르고…… 도영은 이 상황에 일으켜줄 생각은 않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쓰러진 유이를 찍으려고 하고 있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엽사 한 장 찍으려고 했지. 에이, 벌써 일어나면 안 되는데, 아쉽네."
"……대체 선배님은……!"
"아, 혜원아. 그런데 너 왜 왔냐?"
참다못한 유이가 폭주할 기세를 보이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버리는 도영이었다. 감탄할 만한 순발력이었다.
"조회 시간에 선생님께서 오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내가 그랬나? 기억 안 나는데."
"네?"
머리에 총 맞았냐! 혜원과 유이가 동시에 황당하게 도영을 쳐다봤지만 역시나 도영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딱히 시킬 일도 없는데? 에이, 그냥 가라."
"……."
"왜, 불만 있어?"
"아, 아니요."
있다 한들 뭐라고 얘기하리오. 불만을 토로해봤자 그 상대가 도영인 이상 아무 소용없다는 걸 진즉에 깨달은 혜원이었다.
"그럼 말고. 에이 벌써 수업 시작하겠네? 올라가 봐야겠다. 안녕~"
그러고는 도영은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유이와 혜원은 하염없이 멀어져가는 도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분은 대체……."
"연구대상이야."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글쎄. 조금 있어봐야 알 것 같은데……."
"그런데 선생님은 1교시 수업 없으세요?"
"응? 아, 1교시는 없어. 그 뒤로 쭉 연강이기는 하지만……."
"힘드시겠네요."
"뭐…… 견딜 만해, 아직까지는."
무언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혜원은 유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업무가 많은 것에 대한 동정인지, 아니면 도영에게 시달리는 같은 처지로서의 동질감인지 모호한 표정으로.
3.
"유이야~"
점심시간이지만 밀린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밤도 꼬박 샐 생각하니 그건 죽어도 싫고, 또 일이 많다고 대충하는 것은 성미상 맞지 않는 일이라(학년부장의 질타가 두렵기도 했다) 차라리 점심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또 어디선가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을 부르는 하이 톤의 목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귀가 찢어질 듯하다.
"까꿍! 누구게?"
까꿍?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교무실에서 이런 유치한 짓거리라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 유이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이야 정신세계 독특하기로 도영과 쌍벽을 이루는 정화밖에 없었다. 둘의 공통점은 첫째로 제정신이라고는 국 끓여 먹은 지 오래라는 것이고, 둘째는 둘 다 유난히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것이었다. 도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자신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오는지 잠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유이였다.
"……당장 손 치워."
"누군지 맞춰 보라니까?"
"5초 내로 손 치워라, 유정화."
"에이, 들켰네. 어떻게 안 거야?"
"니 목소리는 100m 전방에서도 구분 가능해."
"하긴, 내 목소리가 좀 꾀꼬리 같기는 하지."
착각은 자유라고 했다.
"너 또 왜 온 거야?"
"또라니! 안 본지 한참 된 것 같은데?"
"바로 어제 봐 놓고는……."
"어머,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안 보고 싶었어."
"뭐? 안 보고 싶었다고? 실망이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라는 레퍼토리는 3년째 지겹도록 듣고 있다. 저거 보통 연인 사이에서 쓰는 말 아닌가. 차였을 때 상대한테 물 확 끼얹으면서 하는 말. 근데 내가 왜 저 소리를 맨날 듣고 있는 거지.
"유정화,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에에? 이걸 다 해야 돼? 언제까지?"
"내일 아침회의 전까지."
"뭐? 이걸 어떻게 다 해?"
"그러게. 니가 대신 해 줄래?"
"헤헤, 사양할게."
어디선가 빠직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참아라 신유이.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 아하하…… 그런데 너 할 일은 다 끝내고 이러고 있는 거야?"
"물론이지! 난 여유로우니까, 후훗."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에이, 그럴 리가."
"아니면 빨리 사라져 버렷!"
"으응? 나 아직 할 말 있단 말이야. 나 버리지 마~"
"어차피 잡소리 할 거잖아. 방해되니까 빨리 사라져."
"잡소리 아냐! 저기…… 방해 안 할 테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으응?"
지금 옆에 있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소원 들어주게 생겼니? 눈치는 어디로 밥 말아 드셨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나는 초롱초롱 눈빛 하지 마!
"너밖에 들어 줄 사람이 없단 말이야. 제발…… 플리즈-"
"싫다니까."
"일단 들어보기나 해 줘. 부탁이야아……."
"……에휴 귀찮아. 듣기만 할 테니 말이나 해 보든가."
듣는 순간 지는 거라는 사실을 아직까지 유이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이야, 오늘 나 대신에 보충수업 한번만 들어가 주면 안 돼?"
"보충? 무슨 보충?"
"오늘 7시에 2학년 논술 보충 있는데…… 오늘 딱 한 번만 나랑 시간 바꾸자. 으응?"
일반적인 보충수업은 전담 교사가 각각 정해져 있었지만, 논술 수업은 시간과 힘이 많이 드는 만큼 한 주에 한 명씩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수업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보통 1시간씩 하는 다른 수업과는 달리 무려 3시간 연강이라는 악조건 때문에 학생들이나 교사들이나 가장 들어가기 싫어하는 수업이었다.
"나 지금 일 많은 거 알잖아. 다른 사람 알아봐."
"히잉, 애들이 너 들어가면 제일 좋아할 텐데. 너 올해 스승의 날에 인기투표 1위 했잖아.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스승의 날에 왜 인기투표를 하느냐는 묻지 마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신성여고의 오랜 전통이다. 어디까지나 건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투표이며 익명성이 확실하게 보장되어 뒤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깨끗한 선거…… 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고, 스승의 날 한 달 전부터 교사들끼리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서로 견제하는 웃지 못 할 풍경이 흔히 보인다. 암암리에 온갖 뇌물과 협박과 비리가 자행된다는 소문도 있으나 거기까지는 확인된 바 없다. 참고로 도영은 이 투표에서 매년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안드로메다로 가 버린 정신세계로 봐서는 정화도 도영과 뒤에서 1,2위를 다투어야 할 것 같으나, 외모지상주의에 찌들어버린 신성여고에서 비쥬얼쇼크라는 자존심 하나만으로 매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몇 표 차이도 안 났으면서…… 니가 들어가도 충분히 좋아할 거야. 그리고 2학년 득표율은 니가 더 높았잖아?"
"에, 그랬었나?"
"13표 더 높았잖아. 기억하고 있다고."
그걸 전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단지 유이의 천재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심 정화에게 밀린 게 분했던 걸까.
"칫,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나 오늘 할 일 많댔잖아. 그 수업 대신 들어갔다간 밤을 새도 다 못 끝내."
"에이, 그냥 학년부장한테 한 번 깨지고 말아."
"니 일 아니라고 막 말해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나만 아니면 되니까, 헤헷."
나만 아니면 돼? 1박2일 찍니? 복불복 정신을 운운하며 자신 앞에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 이 인간의 입에 까나리 열두 컵을 들이붓고 싶다는 충동에 잠시 사로잡힌 유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바꾸자고 하는 거야? 단지 귀찮아서는 아니겠지?"
"칫, 날 뭘로 보는 거야? 연수 일정이 갑자기 오늘로 변경돼서 그래. 6교시부터 나가야 돼."
"연수라고? 너랑 진짜 안 어울리는 단어 같은데?"
"나도 이제 그만 놀고 공부 좀 하려고, 헤헤~"
머리가 점점 지끈거렸다. 물론 아침부터 급격히 나빠져 가는 컨디션 때문만은 아니다. 저게 정녕 교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나 착하지? 그럼 응원하는 뜻에서 대타 좀 해줘. 그럼 하는 걸로 알고 나 갈게~"
"자, 잠깐만! 해준다는 말 안 했잖아!"
"에이 까짓것 한번만 해줘! 알라뷰~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야! 유정화!"
그리고 정화는 빛의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잠시 패닉상태에 빠져 있던 유이가 현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후였다.
"……신이시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라고 푸념해도 돌아오는 건 텅 빈 교무실의 침묵과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뿐이었다.
4.
석식 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사를 마치고 노닥거리던 혜원은 이도영 선생님이 또 자신을 부른다는 핑계로 친구들 사이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원체 거짓말을 잘 못 하는 혜원이 더듬거리며 발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친구들은 상대가 도영이었던 만큼 "아, 또? 그럼 고생해~" 하며 - 몇몇은 은근히 재밌어하며 - 자연스럽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건 서글픈 일이었지만, 오늘만은 친구들이 매정하기 그지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혜원이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워낙에 교무실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데다가 입 가볍기로 유명한 도영이 다른 교사들 이야기를 종종 주절거리기 때문에 웬만한 선생님들의 근황은 다 알고 있는 혜원이었다. 보통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 영양가가 없기 때문에 혜원은 수업 중 도영이 그런 내용의 잡담을 시작하면 차라리 엎드려 자는 편을 택하지만, 어느 날 잠도 오지 않아 멍하니 정신 놓고 있던 판에 도영이 이번에 한 잡담의 내용은 선생님들의 식성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먹어 보았다는 온갖 엽기적인 음식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혜원은 점심시간을 앞두고 속이 뒤틀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은 깨알 같은 정보라고 하면 정은이 샌드위치를 비롯한 빵 종류를 좋아한다는 것이나, 오이가 들어간 음식을 유이에게 먹이면 경기를 일으킨다는 것 등이었다.
혜원은 문득 정은에게 뭔가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 전공인 혜원이 콩쿠르 준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에 바쁜 와중에도 만사를 제치고 자신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던 정은이었다. 그게 내내 고마우면서도 마음에 걸렸던 혜원은 ‘내일은 선생님께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드릴까' 하는 생각을 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계란을 으깨고 빵을 자른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워서 몇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보기 좋은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었다.
'선생님이 계셔야 할 텐데…….'
없다……? 오전에도 안 계시더니, 또 타이밍을 잘못 맞춰 온 건가. 초조한 표정으로 교무실을 두리번거리던 혜원은 끝자리의 구석진 곳에 누군가가 책상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왠지 익숙한 실루엣이라 혜원은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시, 신유이 선생님?"
유이는 산더미같이 쌓인 종이들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단순히 엎드려 자는 것이라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빨갛게 달아올라 어쩐지 아파 보이는 유이의 얼굴에 당황한 혜원은 급히 유이를 일으켜 세웠다.
"서,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으음…… 누구……?"
"저 혜원이에요. 혹시 아프신 건 아니죠?"
"아, 아니…… 어, 여긴 어디……?"
몽롱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유이는 자신이 교무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음을 알고 허탈하게 웃었다. 분명 난 (정화가 떠넘기고 간) 보충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정신 드셨어요?"
"아아, 정신 들었어. 깜박 잠들었나 봐."
"다행이다. 선생님 쓰러지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엄청 아픈 얼굴로 엎드려 계셔서……."
"아, 그랬니? 좀 피곤해서 그런가봐. 괜찮아."
그러나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유이는 여전히 많이 피곤해 보였다. 퀭하니 들어간 눈이며 하얀 얼굴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다크서클 등이 지금 유이의 상태를 알려 주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
단지 피곤했다고 해도……. 작년 담임이 유이였던 터라 유이의 건강이 평소에도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혜원은 괜히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지 자꾸 염려가 되었다. 더군다나 지금 시간이라면, 설마 식사조차 하지 않으신 건가.
"저…… 그런데 선생님 저녁은 드셨어요?"
"응? 지금 석식시간이니?"
"네. 거의 끝나 가는데요."
"어머. 저녁시간 내내 잔 건가……."
유이는 낭패라는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어떡하지. 혜원은 문득 자신의 손에 샌드위치 가방이 들려 있음을 자각했다.
'이걸 드려야 되나……?'
"어떡하지.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네? 왜요?"
"아아, 할 일이 좀 많아서…… 반도 못 끝냈는데 오늘 또 보충수업 들어가야 되거든."
"무슨 보충요?"
"너네 2학년 심화수업. 아, 너도 들어오지 않나?"
"어…… 오늘 유정화 선생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걔가 나한테 강제로 맡겨놓고 가 버렸어."
갑자기 강한 오오라가 느껴지는 것 같아 혜원은 흠칫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뭐…… 어쩔 수 없지. 휴……."
유이는 한숨을 내쉬며 옆에 쌓여 있던 종이들을 집어 올렸다. 보충 자료로 쓸 프린트인 것 같다. 수업은 앞으로 3시간, 저런 상태로 제대로 수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샌드위치 가방과 퀭한 유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 혜원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저, 선생님, 이거라도 드시고 하세요."
"응? 이게 뭔데?"
"샌드위치요. 간단하게 드시기 좋을 거예요."
"어머, 어디서 이런 걸……."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정말?”
뚜껑을 열며 너무 예쁘네, 하며 방긋 웃는 유이를 보며 혜원은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랐다. 잘 웃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환하게 웃으면…… 평소의 까칠함 때문에 유이가 이렇게 밝게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혜원이었다. 잠시 정신이 아찔해진 것을 애써 추스른 혜원은 유이가 기쁜 표정으로 샌드위치 한 쪽을 집어서 입에 넣는 것을 보았다. 원래 샌드위치 좋아하시나? 맛있다고 해 줬으면 좋겠는데.
“……혜원아.”
“네?”
……뭔가 선생님 표정이 이상하다.
“너…… 여기 오이 넣었지?”
오 마이 갓. 이 선생님 오이라면 질색을 한다는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애초에 유이에게 주려고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라서 아무 생각 없이 오이를 집어넣었는데. 아니 선생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오이 못 드시는 줄 몰랐다고 발뺌하기에는 알고 있었다는 티가 이미 너무 나 버렸고, 그렇다고 원래 다른 사람 주려고 만든 거라고 변명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고. 혜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의는 아니었다고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이는 듣는 척 마는 척 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통 안에 든 걸 깨끗하게 전부 먹어치웠다. 어지간히 배가 고프기는 했나 보다. 내심 안도하는 혜원에게 맛없어, 라고 불평하는 건 먹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았지만.
5.
혜원은 유이와 나란히 걸어 교실에 도착했다. 가는 내내 유이가 혜원의 손을 꼭 잡고 가는 바람에 혜원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유이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창백한 유이의 안색이 영 마음에 걸려 괜찮겠냐고 계속 물었지만 괜찮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보기에는 전혀 괜찮지 않은데. 혜원은 걱정을 속으로 삼키며 제 자리를 비워둔 친구들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도영님의 노예 왔구나. 어서 오셔."
"이해린, 노예라고 하지 말랬지?"
"야야, 아퍼! 그나저나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었어? 또 그냥 부른 거야?"
"아, 뭐…… 항상 그렇지 뭐."
도영에게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빠져나왔으나, 도영을 본 일이 없으니 마땅히 할 말이 없어 혜원은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단순한 해린은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저 단순무식한 성격도 가끔은 편하기는 하다. 수업을 시작하든 말든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자신에게 말을 걸려는 해린 외 몇몇의 무리들을 시끄럽다는 말로 간단히 입 다물게 만들고 혜원은 유이의 수업에 집중했다. 아니 사실은 유이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까 유이의 웃는 얼굴을 본 이후로 이상하게 뭐에 취한 마냥 얼굴이 계속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쿵 뛴다. 수업 내용은 듣고 있기는 한데 다른 생각에 밀려 머릿속에 박히지가 않고 죄다 공중으로 흩어진다. 에잇, 어차피 시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뭐. 저 선생님은 교무실에서는 다 죽어가더니 교단에만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바뀐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오늘은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열성적인 것 같다. 작년에 유이가 담임으로 있을 때부터 느꼈지만, 성격은 은근히 까칠한 것 같아도 정말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 하나 대충 하는 게 없는 선생님이었다. 학기 첫날에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는 진짜 선생님이고 싶다는 유이의 자기소개를 듣고 얼마나 감동했던지. 물론 지금이야 교사의 덕목이라고는 한 가지도 갖추지 않은 도영을 담임으로 만나 천국과 지옥을 골고루 체험하고 있지만.
“야, 혜원아.”
“…….”
“야! 귀 먹었냐?”
“아 왜. 시끄럽다니까.”
“이번에 새로 온 교생 말이야. 봤어?”
“보기야 봤지. 근데 관심이 없어서.”
선생님 얼굴 보기도 바쁜 이 소중한 시간을 끈질기게 방해하는 이해린의 얼굴을 교과서로 퍽 내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 엘리트한 모범생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므로 그럴 수는 없다. 선생님 앞이라서 봐준다고 참을 인자 하나를 그린 혜원은 어쩔 수 없이 해린의 수다를 대충이라도 들어 주었다. 저 입을 닥치게 만들 방법은 애초에 없으니까. 그런데 교생 선생님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 조 테이블에 앉은 애들이 죄다 귀를 쫑긋하며 관심을 보인다. 평소에는 학교에 누가 오든 말든 관심조차 없는 애들이 왜 저러나 생각해봤더니, 이번에 온 교생 선생님이 좀 많이 예쁘다. 결국엔 선생도 얼굴로 해먹는 직업이라는 건가.
“해린아, 교생이 왜?”
“한정민 쌤 말하는 거지? 완전 인형처럼 생긴 분.”
“유정화보다 더 예쁜 것 같지 않아?”
“에이, 그래도 유정화가 더 나은 것 같던데? 교생은 다 좋은데 너무 말랐어.”
교생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얼굴에 대한 제각각인 평가가 같이 딸려 나왔다. 교사 품평회라도 열 작정인가. 웬 여자들이 여자 외모를 그렇게 감상하고 앉아 있는지, 한심한 것들. 이라고 애들을 욕하면서도 자기도 속으로는 ‘그래도 신유이 선생님이 제일 예쁘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혜원은 미처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사람 이 학교 출신인데, 완전 엘리트였대.”
“정말? 얼굴도 예쁜데 공부까지 잘해?”
“전교권에서 놀았다던데? 근데 그 와중에 연극부 활동까지 했다더라. 예쁘고 연기 잘해서 축제 때 매번 주인공 맡았대.”
“그럼 연기자 같은 거 하지 왜 굳이 선생님을 했대? 아까운데.”
“길거리캐스팅 엄청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대. 근데 그 이유가 중요한데,”
“거기 6조, 집중 안 하니?”
신이 나서 해린이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까칠하기 그지없는 유이의 지적에 혼비백산한 아이들은 죄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필기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아, 너 때문에 지적받았잖아. 멍충아. 유이를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에 괜히 혜원은 제 머리를 주먹으로 몇 번 쳤다. 그런데 그때 해린이 눈치도 없이 또 혜원을 불렀다. 이젠 정말 뭐라고 해도 단단히 무시해야지 생각하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는데, 해린이 귀에 대고 혜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교생이 굳이 연예인 안 하고 사범대 들어간 거…… 신유이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어.”
“에? 왜?”
신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자 이상하게 과민반응해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내가 왜 이러지. 수업 중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를 낼 뻔한 입을 급히 손으로 틀어막고 혜원은 해린에게 빨리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해린이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겠다는 결심은 그새 어디로 날아간 지 오래다.
“교생이랑 신유이랑 너무 각별한 관계라서, 그 사람이 졸업 후에도 신유이 옆에 계속 있고 싶어서 선생님 된 거래. 그래서 학생 때부터 자기는 꼭 이 학교 선생 할 거라고 다 말하고 다녔다는데?”
“엥? 진짜?”
“본인이 직접 한 말이라던데? 그리고 실제로도 그 교생 신유이랑 엄청 친했대. 농구부 선배가 알려 줬어.”
내용은 허무맹랑한데 말하는 투를 보니 왠지 허투루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아무리 친했다고 해도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굳이 교사를 택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긴가? 과장된 거겠지.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니까.
“에이, 원래 꿈이 선생님이었겠지.”
“아니라던데? 원래 연예인 데뷔할 생각으로 예체능계 지원했었대. 그래서 연극부도 했잖아. 근데 갑자기 다 포기했다는 거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근데 진짜 둘이 친하기는 해. 요즘 보니까 하루 종일 붙어 다녀. 밥도 같이 먹고 산책도 같이 하고, 출퇴근할 때 보니까 차도 같이 타고 다니고.”
“…….”
“교생이 학교 다닐 때는 둘이 사귀네 마네, 아예 같이 산다는 소문까지 돌았대.”
이 정도면 심각하다. 혜원은 문득 1교시 시작 전 교무실에 갔을 때 유이의 책상에 놓여 있던 초콜릿 바구니를 떠올렸다. 한정민 선생님이 직접 만들어서 준 거라고 했다. 먹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 그 초콜릿의 정체가 교생의 선물이었다는 말이지. 여전히 열심히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유이의 하얀 얼굴이 갑자기 너무 얄밉다. 환하게 웃는 유이 옆에 교생이 붙어 있는 상상이 일어나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 한번 웃어줬다고 얼굴 붉히며 좋아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교생 앞에서는 항상 그렇게 살갑게 군다니. 그리고 뭐, 사귀어? 같이 산다고? 뭔가 크게 배신당한 느낌이다.
6.
혜원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유이가 교실을 나가는 걸 보았다. 강의는 어떻게 피곤한 기색 없이 잘 마쳤지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많이 힘든 기색이 보이는 것 같다. 어디로 가는 건지 신경 쓰였다. 따라가 볼까. 그런데 쉬는 시간만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이해린은 교실이 떠나가라 크게 혜원을 불렀다. 남의 속도 모르고.
"혜원아아 뭐해애애~ 같이 놀자."
"뭐 하려고."
"얼음땡."
"몇 살인데 유치하게. 안 해."
"니가 술래 해. 그럼 시작!"
아이씨, 안 한다니까. 일곱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진짜 하기 싫었는데 이미 시작되어버렸다. 그새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 잡아보라며 자기를 약 올리는 이해린한테 단단히 열 받아서 전력으로 뛰어나갔다. 유치한 건 싫어도 지는 건 또 못 참으니까.
혜원은 뛰어다니면서 계속 시계를 보았다. 깐족거리던 이해린은 당연히 잡았고, 저만치서 내 쪽으로 달려오는 술래를 피하려고 책상을 밀치면서 달리지만 생각은 딴 데 가 있었다. 10분밖에 안 되는 쉬는 시간은 이미 끝났는데, 선생님이 오실 때가 한참 지났는데 오지를 않는다. 펄펄 뛰어다니던 애들도 슬슬 지쳤는지 설렁설렁 걸으면서 부채질만 연신 하고 있었다.
"야, 그만 하자. 힘들다."
"선생님 왜 안 와? 쉬는 시간 끝났는데?"
"내가 찾으러 가 볼게."
"가지 마. 알아서 오겠지."
"갔다 올게."
안 그래도 유이가 걱정되었던 혜원은 찾으러 가보겠다며 교실을 나섰다. 아예 안 왔으면 좋겠다고, 이대로 수업 끝이면 좋겠다고 단순한 해린이 헤헤거렸지만 무시했다. 어디서 선생님을 찾아야 하나, 나오긴 했는데 막막하네. 복도를 왔다갔다 거리다가 저 끝에 여교사휴게실이 있는 걸 보고 그쪽으로 가 보았다. 여기 계실 것 같긴 한데, 선생님들만 들어가는 곳인데 들어가도 되나. 아무도 없나? 머뭇거리며 빼꼼 고개만 내밀어 보았는데 실루엣이 보이는 게 누가 있는 것 같다.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유이가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혜원이 들어와도 미동도 없는 걸 보니 깊게 잠든 것 같았다.
"선생님……?"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유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깐 쉬려고 왔다가 졸음을 못 이기고 잠들어버렸나 보다. 하기야 엄청 피곤해 보이긴 했지……. 깨워야 하긴 하는데 왠지 깨우기가 싫다. 미안하기도 하고. 어떡하지? 가만히 서서 갈등하다가 혜원은 그냥 유이 옆에 털썩 앉아 버렸다. 그리고 유이가 자는 모습을 관찰했다. 깔끔하고 왠지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였는데 자는 모습을 보니까 그냥 동네 편한 언니 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도 이렇게 편한 모습이면 좋을 텐데. 그런데 또 풀어진 모습의 선생님을 생각하니 조금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혼자서 상상하고 있는데, 유이의 자세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혜원의 어깨에 머리가 슬쩍 얹어졌다. 머리가 어깨에 닿는 순간 혜원은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찔했다. 어, 어……? 이거 뭐야,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바쁘게 지나쳐갔지만 몸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당황만 하고 있는 사이 유이는 혜원에게 완전히 푹 기대 버렸다. 코앞에 닿은 머리카락에서 샴푸 냄새가 은근하게 풍겨 왔다. 이거 어떡해야 되지? 아 진짜…… 머리카락이 제 얼굴을 간질이자 얼굴이 막 화끈거렸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가슴이 뛰어서 미칠 것 같다. 그냥 깨울까? 아니 그건 또 싫은데. 계속 이러고 있고 싶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는 제 맘도 모르고 선생님은 머리를 턱 얹어 놓고 속 편하게 잘도 잔다. 나보고 어쩌란 거예요, 선생님……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난감한 타이밍에 갑자기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했더니 이번에 새로 온 교생, 신유이 선생님이랑 그렇게 친하다던 그 교생 한정민이다. 혜원이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이 이상한 자세를 보고 정민의 안색이 확 바뀌더니 정색을 하고 혜원에게 다가왔다.
"야, 너 누구야? 왜 여기 있어?"
이 밑도 끝도 없는 말투는 뭐지. 화가 이만큼 솟은 표정을 보니 싸움이라도 걸 기세다. 다짜고짜 제게 짜증을 내니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불쾌함보다는 이 상황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아, 저…… 보충수업 하다가 선생님이 안 보여서 찾으러 왔어요."
“근데 왜 이러고 있어?"
"그게…… 선생님이 잠들어 버리셔서……."
어물어물 변명해도 표정이 바뀔 기색이 안 보였다. 제가 물어봐놓고 듣는 것 같지도 않다. 아니 저 선생님 진짜 뭐야? 그리고 왜 계속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고 보는데? 안 그래도 이해린이 한 얘기 때문에 정민에 대한 인상이 별로 안 좋았던 차에 저런 막나가는 태도를 보니 혜원도 정민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성격 더러운 교생 같으니.
"너네 친해?"
"예?"
"너 신유이 쌤이랑 친하냐고."
아니 이 뜬금없는 질문은 뭐냐고. 질문하는 태도가 마치 쌤은 내 건데 네까짓 게 뭔데 그러고 있냐고 묻는 것 같다. 와 완전 빈정 상하네. 교생이면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것 같은데 이 네가지 없는 태도는 뭐야?
"작년 담임이셨어요. 왜요?"
혜원도 최대한 퉁명스럽게 받아쳐 주었다. 둘 사이에서 미묘한 불꽃이 튀었다. 정민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 얘가 지금 눈을 똑바로 뜨고 날 보는 거니 지금? 완전 건방지네?
"빨리 나가. 여기 학생 들어오면 안 돼. 나 유이쌤이랑 할 말 있어."
"선생님 지금 수업 들어가셔야 된다니까요? 저 쌤 데리고 나가야 돼요."
"아 그럼 빨리 깨우든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저 교생은 눈치도 없나. 자고 있는 사람 앞에서 소란 피우면 어떡하라고. 유이쌤은 왜 저딴 인간이랑 친하게 지내고 난리야? 완전 싸가지 제로구만. 정민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유이가 깨 버렸다. 아웅, 왜 이렇게 시끄럽지……. 비몽사몽 하던 유이는 제 머리가 혜원 어깨 위에 턱하니 얹혀 있는 걸 알고 깜짝 놀라서 급히 일어났다.
"어머, 미안. 나 또 잠들었니?"
"선생님 얼른 가요. 애들 기다리고 있어요."
"어어 그래."
정민이 뭐라고 할세라 혜원은 급히 유이를 이끌고 나갔다. 문을 막 열고 나가려는데, 혜원을 따라 급히 따라 나가는 유이를 정민이 붙잡았다.
"쌤 수업 언제 끝나요?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뭐, 기다린다고? 둘이 진짜 같이 다닌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 그런데 이 수업 열 시나 돼야 끝나는데? 저 교생은 할 일도 없나. 왜 기다리고 난리야. 영 못마땅해서 혜원이 한마디 툭 내뱉어 버렸다. 둘이 얘기하는데 낄 자리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이미 나와 버린 말 뭐 어떡해.
"수업 열 시 넘어서 끝나는데요? 한참 멀었어요."
"그래, 정민아……. 늦게 끝나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쟤가 왜 끼어들어? 기분 나쁘게.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는데 유이마저 혜원에게 맞장구치면서 먼저 가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아씨, 쟤 때문에 망했잖아. 정민은 혜원을 최대한 노려봤지만 혜원도 만만치 않았다. 교실로 가는 사이 유이만 모르는 둘의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7.
다음날 아침, 잠을 설친 혜원은 아침자습 시간을 꾸벅꾸벅 졸면서 보냈다. 1교시 수업이 뭐지, 아 또 지긋지긋한 도영쌤 수업이다. 담임으로 마주치는 것도 피곤한데 수업까지 들어야 되다니. 잠이나 더 자려고 책상에 엎드렸는데 수업종이 쳐 버렸다. 에이, 졸려 죽겠는데……. 도영이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 혜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도영과 같이 앞문으로 들어왔다. 웬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나 심드렁했던 혜원은 방긋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이 확 달아났다. 헐, 한정민이다.
"오늘은 여기 앞에 계신 한정민 선생님이 수업을 참관한단다. 예쁜 쌤 보니까 반갑지?"
반갑기는 개뿔. 왜 하필 우리 반인데. 혜원이 못마땅해 하는 사이 정민도 혜원을 발견했다. 환호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심드렁한 혜원의 표정이 워낙에 눈에 띄었으니까. 정민은 혜원에게 보란 듯이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입가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지만 눈은 혜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웃으면서 노려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게 재수 없다. 나 참 기도 안 차서. 혜원은 최대한 건방지게 비웃음을 날려 주는 것으로 응답했다. 정민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나이스.
도영이 평온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정민은 수업 참관할 생각은 안 하고 혜원과 기싸움하기 바빴다. 최대한 다른 학생들이 안 보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릴 궁리를 하고 있는데, 한참 혼자서 뭐라고 떠들던 도영이 갑자기 정민을 불렀다. 정민은 깜짝 놀라서 급히 손을 뒤로 숨겼다.
"중심지 이론에 대해서는 교생 쌤이 설명하실 거야. 한정민 선생님, 여기 서서 설명해주세요."
도영이 시키는 대로 서긴 섰는데……. 교단에 서니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원래 긴장 안 하는데 신혜원이 저를 빤히 보면서 팔짱을 끼고 어디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약을 올리니까 알던 것도 다 잊어버렸다. 아 진짜 내가 이 반에 왜 들어왔지. 이가 부득 갈렸다.
"어, 중심지 이론은 그러니까, 주변 지역에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중심지의 분포와……."
"교과서 그대로 읽지 말고 설명을 좀 해주세요. 쌤."
혜원의 말에 아이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 올리려는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학구열에 불타는 반장의 말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정민은 맘 같아서는 혜원을 한대 치기라도 하고 싶은 걸 애써 웃음으로 감추었다. 넌 이따 보자. 어떻게 설명을 계속했지만 이미 첫 단추가 어긋난 이상 계속 꼬이기만 했다. 혜원은 명백히 저를 깔보고 있었고.
"중심지가 하나라면 배후지의 형태는 이렇게 원형이 돼."
나름 이해를 돕겠다고 칠판에 원을 커다랗게 그렸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타원도 아니고 삼각형에 가까운 이상한 도형이 떡하니 그려져 있었다. 한쪽에 서 있던 도영은 빵 터져서 책상을 마구 두드렸다. 혜원은 말할 것도 없었고.
"쌤, 원 되게 못 그리시네요."
"어…… 내가 원래 좀 도형을 못 그려. 아하하…… 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좀 도와줄래? 반장 나와 봐."
진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눈치를 보아하니 신혜원이 반장인 모양인데, 저는 얼마나 잘하나 보자구. 정민은 미소를 지으며 혜원을 불렀다.
"내가 방금 가르쳐준 내용 있지? 이해한 대로 설명해 봐. 잘 이해했나 보려구 하니까."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정민은 혜원이 잘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공부야 잘할지 못할지 몰라도 아는 것과 설명하는 건 다르니까. 몇 번이나 연습하고 다른 반에서도 실습한 나보다 잘할까 설마. 그래봐야 학생인데. 그러나 혜원은 정민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칠판에 필기까지 하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중심지는 중심지 기능이 입지한 장소를 말하고, 중심지에서 재화나 용역을 제공받는 곳은 배후지라고 합니다. 최소 요구치라는 것은 중심지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
"교생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중심지가 한 개라면 배후지의 형태는 이렇게 원형이 되구요."
혜원은 칠판에 아주 깔끔하게 완벽한 원을 그렸다. 아이들은 마치 혜원이 선생님인 듯 도영이나 정민이 설명할 때보다 더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학생들을 여유롭게 한번 쭉 훑어본 혜원은 정민이 시키지도 않은 정육각형을 옆에 더 그렸다.
"중심지가 여러 개인 경우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이렇게 정육각형을 띠는 모양입니다."
아주 반듯하게 정육각형까지 그려낸 혜원은 얼 빠져서 감상하고 있는 정민에게 분필을 건넸다. 정민은 저도 모르게 얌전히 분필을 받았다.
"선생님 필요하실 것 같아서 정육각형까지 다 그렸어요."
"어, 어…… 잘했어."
정민은 하필 혜원에게 설명을 맡긴 걸 백 번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자리로 돌아간 혜원은 제게 세상에서 가장 환한, 그러니까 가장 얄미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학생들이 원형과 정육각형을 노트에 필기하느라 바쁜 사이, 정민은 혜원을 보고 정색하며 손으로 목을 슥 그어보였다. 넌 죽었어, 라고.
8.
둘의 은근한 기싸움이 계속되었던 살벌한 수업이 끝나고, 도영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정민은 씩씩거리며 혜원의 팔목을 붙잡고 복도로 끌고 나갔다. 혜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뿌리치지 않았다. 정민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혜원에게 쏘아붙였다.
"야, 너 나한테 원수졌어?"
혜원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선생님은 참 뻔뻔하기도 하지. 먼저 원수처럼 군 게 누군데.
"쌤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괜히 먼저 시비 걸고. 기억 안 나요?"
"내가 언제?"
"쌤이 저 처음 봤을 때부터 다짜고짜 화내셨잖아요. 진짜 그땐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거든요? 말투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해요?"
"너 때문에 어제 유이쌤이랑 같이 못 갔으니까 그렇지. 왜 방해질이야?"
"아니 제가 뭘요? 수업 기니까 오래 기다리지 말라고 기껏 생각해서 말해 줬더니 웬 심술이래."
혜원의 반말 섞인 비아냥거림에 정민은 이를 부득 갈았다. 한 마디도 안 지려고 든다 이거지. 어려서 봐주려고 했더니 기어오르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젠 반말질까지?
"웬 심술이래? 야, 나 너 선배거든?"
"쌤 같은 선배는 별로 대접해주고 싶지가 않네요. 근데 쌤 어린애에요?"
"뭐? 어린애? 보자보자 하니까……."
"왜 이렇게 유이쌤한테 들러붙어요? 맨날 졸졸 따라다닌다면서요?"
"따라다닌다니, 친해서 그런 거거든? 너야말로 무슨 사인데 유이쌤한테 자꾸 찝쩍대는 거야?"
"말했잖아요, 작년 담임이었다고. 담임쌤이랑 친한 것도 이상해요?"
"쌤 자꾸 건드리지 마. 난 3년 내내 완전 친하게 지냈거든?"
아니 뭐 이거 친목 배틀도 아니고, 누가 더 친한지 겨뤄 보자는 겨? 이런 유치한 짓에 말려들어서 똑같은 수준으로 놀아줘야 된다는 게 참 자존심 상하긴 하는데, 일단 싸움은 이기고 봐야지? 자존심 싸움에 플러스로 유이까지 걸렸으니 이제는 진짜 사생결단이 된 모양새였다. 애초에 유이 때문에 시작된 갈등이니 어떻게든 결판을 지어야 끝날 싸움이기는 했지만.
"쌤은 2주 뒤에 가면 끝이잖아요? 전 계속 있을 건데, 어쩌죠?"
"나 계속 쌤이랑 연락하거든?"
"아 그러세요, 기껏해야 카톡이나 하겠죠. 전 수업도 듣고 계속 얼굴 볼 건데."
"영상통화 하면 되거든? 그리고 나 계속 찾아올 거야."
"어휴, 유치해라. 맘대로 하세요."
"너 진짜……!"
흥분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정민과 냉정하게 비아냥거리는 혜원, 승기는 점점 혜원 쪽이 잡아가는 분위기다. 그런데 둘이 점점 언성을 높이고 있을 때, 또 혜원에게 뭔가 시킬 일이 있는지 도영이 어슬렁거리며 혜원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둘은 너무 열심히 싸우느라 도영이 이 유치한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유이쌤한테 너랑 얘기하지 말라고 할 거야. 너 진짜 싸가지 없는 애니까 가까이 하지 말라고."
"그딴 말을 쌤이 들을 것 같아요? 유이쌤이 저 되게 좋아하거든요. 얼마나 예뻐했는데. 물어보시든가."
"응? 둘이 유이 갖고 싸우는 거야?"
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더니 도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엄청 재밌는 거 봤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다. 지금 이거 다 들은 거야? 아씨 쪽팔려. 저 초딩 교생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이미지 다 구기고 얼굴 빨개진 혜원이 뭐라고 변명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 저 쌤이……"
"혜원이 유이 좋아하는구나? 몰랐네. 난 우리 혜원이가 날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에잉 섭섭해."
이 선생님은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가. 혜원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정민도 뭐 저런 선생님이 다 있지 하는 눈빛으로 도영을 바라보았다. 둘이 처음으로 의견 일치하는 순간이다.
"근데 어떡하지? 유이는 날 제일 좋아할 텐데."
응?
"누가 더 친한지 갖고 싸우는 것 같은데, 나 유이랑 대학 4년 내내 베프였거든.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인간이랑? 암만 봐도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유이가 그때부터 날 얼마나 잘 따랐는데. 과 전체에 유명했어."
경쟁자(?) 한 명 추가. 이 선생님의 허풍이 또 시작되었구나 하고 심드렁한 혜원과는 달리, 아직 도영에 대해 잘 모르는 정민은 충격 받은 모습이다. 이런 날라리 선생이랑 유이쌤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다고? 말도 안 돼, 도대체 유이쌤은 왜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야? 맞아, 쌤이 너무 착해서 거절을 못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런 파리들만 꼬이지. 도영과 혜원을 악마로 규정한 정민은 유이를 이 사악한 두 사람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정민이 결심하는 그 순간 2교시 종 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2교시의 2학년 1반 수업은 하필이면 유이였다. 유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교실로 들어오려다가 복도에서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삼인방을 발견했다.
"어, 여기서 다들 뭐해요?"
유이는 셋 다 나름 친한 인간들이라 반갑게 인사했는데…… 아무래도 실수한 듯 했다. 유이를 보는 셋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제일 먼저 정민이 궁금증을 못 참겠다는 듯, 뭔가 되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따지듯이 물었다.
"헐 유이쌤이다. 쌤, 도영쌤이랑 진짜 대학 선후배예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물어보는 거지? 그리고 이 분위기는 뭐지? 정민이는 그렇다고 대답하면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고, 도영선배는 눈치를 엄청 주는 게 아니라고 하면 날 죽일 것 같고…….
"어…… 맞아."
인정하긴 진짜 싫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럼 4년 내내 진짜 친하게 지냈어요? 베프? 진짜??"
베프라니,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관계였지. 내가 이 인간 때문에 그때부터 당한 게 얼만데.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도영의 눈빛이 너무 무섭다. 무언의 압박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결국 유이는 어……어, 친했지,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의기양양한 도영과 대조적으로 정민은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거봐, 우리가 얼마나 친한 사인데. 이제 믿겠지?"
"쌤, 그러면 이도영 쌤이랑 저랑, 누구랑 더 친해요? 한 사람만 고르라면 누구 고를래요?"
절망의 늪에서 마지막 희망을 건 듯 정민이 절박하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진짜. 이걸 대체 왜 물어보고 있는 거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유이가 황당해하고 있는데, 도영은 거기에 한술 더 뜬다.
"자, 우리 둘, 아니 혜원이까지 세 명이 바다에 빠졌어.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어. 넌 누구를 구할래?"
가만히 보고만 있던 혜원이 티 나게 움찔했다. 난 왜 끼우는데?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셋 중엔 내가 제일 정상적이고 괜찮지. 혜원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나머지 둘도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기대감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세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유이를 향했다. 눈빛이 활활 불타오르는 세 명 사이에서 유이만 난감하게 되었다. 이게 뭐야,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아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고! 어제부터 일진이 안 좋더니…… 왜 나한텐 이런 일만 생기는 거지?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유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 명은 대답을 재촉하기만 한다.
"쌤 저 안 버릴 거죠? 저예요 정민이."
"유이야 나 수영 못해. 선배를 죽게 내버려둘 건 아니지?"
"쌤 제가 어제 샌드위치 줬던 거 기억 못하는 건 아니죠?"
과연 이 황당한 상황에서, 집요하게 구애하는 세 명 중에 유이는 누구를 선택했을까. 뭐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이 수난을 피해갈 수는 없을 모양이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인기가 너무 많아 괴로운 신유이의 운수 드럽게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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