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숨죽여 웃었다 (1)

후나란 K...그뭔씹au *불시에 퇴고할 수 있음*

유곤은 가끔 그 여자를 생각했다.

짝짝이로 신고 나온 슬리퍼 밑으로 발갛게 얼어있던 조그만 발을 생각했다.

피울 줄도 모르면서 담배를 빌려달라고 하던 입술을 생각하고, 불을 붙인 담배를 향처럼 들고 있던 가는 손가락을 생각했다.

동그란 손톱을 생각했다.

핏방울이 맺힌 도톰한 입술을 생각했다.

그 입술 사이를 비집는 하얀 입김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무 잦게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포크로 크게 말아올린 파스타를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서. 두 접시 째였다. 입가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맞은 편에 앉혀둔 백팩을 노려보았다. 가방의 아래가 불룩했다. 아무렇게나 움켜쥐느라 찌그러졌던 천이 부풀어오르며 바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게 그 여자의 웃음소리인 것 같았다. 유곤은 물로 입을 헹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생각하기는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은 충동으로 가득했다. 고개를 젖히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 여자.

남편이라는 놈은 그 여자를 꼭 '씨발년'이라고 불렀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조그만 동네가 떠나가라 고함을 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여자를 찾아댔다. "이 씨발년아!" 그러면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 여자는 뭐가 좋은지 방긋방긋 웃으면서 남편에게 달려갔다. 제 발보다 훨씬 큰 슬리퍼를 질질 끌다가 몇 번이고 넘어질 뻔 해가면서. 그 다음엔 어김없이 남편이 그 여자의 따귀를 철썩 내리쳤다. 무어라 윽박을 지르면 여자는 안 그래도 조그만 몸을 한껏 수그려서 살금살금 물러났다.

그 여자네 집 시멘트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유곤의 방에서 다 보였으므로 유곤은 그 여자의 고개가 돌아가다못해 기어코 바닥에 풀썩 엎어지는 꼴을 매일 두 세번씩은 봤다. 매번 그랬다. 매번 그렇게 얻어맞을 것을 알면서도 남편이 부른다고 포르르 포르르 잘도 튀어온다 싶었다. 짧고 검은 머리는 빗질이나 제대로 하는지 산발을 해 놓고선. 오렌지색 머리띠로 삐죽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눌러놓은 모양새로. 유곤은 그 여자를 내려다보며 정수리에 침을 뱉어주듯 바보아냐, 라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여자의 남편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양아치 새끼였다. 체격은 왜소했지만 심술이 양 볼부터 턱 밑까지 두껍게 붙어있었다. 여자에 비해 나이가 한참은 많아보이는 그는 머리까지 조금씩 벗겨지려고 하고 있었기에, 유곤은 그 기름에 번들거리는 낯짝을 '메기'라고 불렀다. 메기는 매일같이 술에 취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손버릇이 안 좋은 건 아내를 대할 때에만 국한되는 건 아닌 모양인지 도박판에서조차 툭 하면 싸움질에, 하우스에선 칩을 훔치다 걸려서 흠씬 두들겨맞은 적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화풀이를 꼭 제 아내에게 했다. 그 여자. 목덜미며 윗가슴팍에 보라색 멍을 달고 사는 그 여자. 숨 죽이고 웅크린 채로 남편의 쏟아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견뎌내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었다. 맞지 않을 때에도 맞고 있는 것 같은 위축된 태도로 다녔으니까.

한유곤은 다니던 법대를 때려치우고 가족과도 연을 끊은 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남홍리까지 흘러들어온 남자였다. 그리고 우연히 남홍리에서 '부 사장'이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법학대학 중퇴, 의절, 그리고 미필이라는 배경에도 그는 유곤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며 한사코 제 밑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특이해보였지만 사기를 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부 사장은 동네에서도 신임이 두텁고 인망이 높은 남자인 것 같았다. 집주인과 모종의 연이 있었는지 세를 싸게 깎아주는 것도 모자라, 보증금까지 턱 얹어주며 유곤이 머물 곳을 빠르게 얻어 주었다. 후미진 동네,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가운데 그나마 큰 주택의 2층에 세들어 사는 것 뿐이었지만 유곤은 그 곳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날부로 가진 돈이며 당길 수 있는 월급까지 탈탈 털어 낡은 오토바이까지 하나 샀다. 일을 한다고 해도 부 사장의 호출이 있기 전까지는 자유였으므로 유곤은 사장이 얻어준 집에서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애초에 들고 나온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책들은 집 주인 아저씨네 서재에서 빌려온 먼지 수북한 것들 뿐이었지만 그런대로 보는 재미는 있었다.

그렇게 제법 편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여느 오후처럼 책상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창문 밖으로 시야 가장자리에 걸리는 물체가 있었다. 까만 것이 통통 튀듯이 시야 윗부분을 가로질렀다. 유곤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까만 뒤통수. 그 아래로 주황색 원피스가 보였다. 그건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방의 방향으로 미루어보아 옆에 딱 붙은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어떤 남자 앞으로 달려갔고, 가까이 가자마자 머리통을 퍽 얻어맞았다. 무어라 고함소리가 몇 번 이어지더니 불쌍할 정도로 잔뜩 움츠러든 몸이 뒤를 돌았다. 유곤은 그 때, 바람이 불어 날린 앞머리 밑으로 동그란 이마를 보았고, 앙다문 도톰한 입술 가장자리에 번진 핏물을 보았다. 추운 것도 모르는 듯 입고있는 민소매 원피스의 끝자락을 조금 말아쥔 가는 팔을 보았다. 그 여자는 금방 사라졌지만, 유곤은 잠시간 그 자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날이 그 여자, 나규리를 처음 본 날이었다.

규리는 '뻔하게 불쌍한' 여자였다. 각자의 불행은 제각기 안타까운 법이겠지만 적어도 유곤의 눈에는 규리의 불행이 참 뻔했다. 뭣 모르는 어린 나이에 팔려온 개처럼 늙은 남자와 결혼을 하고, 서툰 솜씨로 열심히 아내의 본분이라는 것을 다하면서도 툭하면 서방의 모진 매를 맞아야 하는 그런 것. 부부지간이라기 보다는 불공정 계약을 맺은 노예와 그 주인 같은 것. 유곤의 머리는 규리가 불쌍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래서 누군가 그녀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직면해야 할 그녀의 인생이고, 유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가래 낀 고함을 질러대는 메기같은 남자를 턱을 괴고 내려다보았다. 전반적으로 발음은 다 뭉개져있었지만 씨발, 돈, 언제, 따위의 단어가 명확하게 들릴 때가 있었다. 판돈이 모자랐나. 그 때 규리는 손으로 한쪽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우나? 유곤은 혀를 쯧 찼다.

유곤을 제외한 동네 사람들 중 누구도 규리를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메기'의 성질을 알아서인지 그 집에 대해서는 참견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노인네는 규리가 제 임자를 만난 거라고 했다. 그 여자, 어릴 적에는 좀도둑질을 하고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지는 도둑고양이였으니 이제 주인 만나서 교육 받는 거라고. 그 땐 지금보다 더 작았겠지. 더 작고 더 말랐겠지. 더 불쌍했겠지. 그런데 그때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겠지. 동정표도 못 받는 불쌍한 여자. 그런 주제에 원피스는 괴로움이라곤 모르는 화사한 오렌지 색깔이었다.

규리와 처음 말을 트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오후에 출근을 했다가 오토바이를 끌고 퇴근한 늦은 저녁. 겨울이라 벌써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했고 유곤의 집 앞에 있는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켜져있었다. 헬멧을 벗고 담배를 물었다. 유곤은 라이터를 꺼내려다, 시멘트 계단에 쭈그려앉은 작은 등을 발견했다. 오렌지색 가로등 빛이 오렌지색 치맛자락을 비추었다. 그 여자다.

오토바이 시동이 꺼지고도 한참 움직이는 소리가 없자 웅크려있던 규리는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유곤과 눈이 마주쳤지만 규리는 바로 피하지 않았다. 코를 한 번 훌쩍인 다음에야 도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올이 군데군데 풀린 가디건으로 상체를 꼭꼭 감쌌지만 찬바람이 자꾸만 파고들어 속살을 엤다. 슬리퍼를 겨우 꿰어신고 나온 탓에 빨갛게 언 발끝은 아무리 꼼지락거려도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규리는 이 모든 것이 익숙했다. 유곤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뒤를 돌았다가, 느리게 연기를 뱉은 다음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규리는 난간에 머리를 콩 기댄 뒤로는 다시 유곤을 돌아보지 않았다. 유곤은 규리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오가는 말은 없었다. 형식적인 인사조차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규리는 때때로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하얀 입김을 뱉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유곤은 그녀가 운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불쌍해도 궁상맞은 여자는 아닌가보다 싶었다. 규리는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유곤은 정면만 보고 담배를 피우는 척 곁눈질로 규리를 훔쳐보았다. 세워 앉은 무릎, 까진 상처와, 종아리, 멍자국, 가는 발목, 뾰족한 복사뼈... 피부를 핥아 내려가듯이 눈동자가 아래로 굴렀다. 짝도 맞지 않는 커다란 슬리퍼에 담긴 발이 작다. 저런 걸 신고 다니니까 넘어지지. 칠칠치 못하게. 일곱 살도 아니고. 한참 바라보고 있던 규리의 발가락이 움칫 오므라들자 유곤은 제 시선이 들킨 듯 뜨끔해 눈을 휙 돌려버렸다. 애꿎은 담배나 앞니로 깨물어가며 뻑뻑 피워댔다. 필터 근처까지 바짝 태운 것을 계단에 비벼 끄고 안주머니에서 새로 한 개비를 꺼냈다.

시계를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유곤은 강박적으로 눈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번화가의 불빛이 멀리서 반짝거렸지만 그마저도 듬성듬성해 대도시처럼 화려하지는 않았고, 그 뒤로는 온통 새카말 뿐이다. 야경보다 별이 빛났다. 그런 생각들을 목소리 하나가 찢고 파고들었다.

"나 갈게."

무심코 옆을 휙 돌아보자 시야가 온통 주황색이었다. 천이 바람을 따라 펄럭이자 그 아래로 보라색 멍이 든 허벅지가 빼꼼 드러났다가 가려졌다. 유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규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따귀를 세게 맞았는지 뺨이 부풀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눈. 눈동자. 멍자국같은 눈동자. 가로등을 등지고 서 있음에도 선명하게 보랏빛을 띤 그 눈동자. 유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규리는 옅게 웃는 듯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슬리퍼가 시멘트 바닥에 직직 끌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번엔 인사해."

규리는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바람에 섞여 날아온 그 목소리는 유곤에게 똑똑히 들렸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되물으려 뒤를 돌아보았지만 규리는 이미 대문을 닫고 들어가버린 후였다. 유곤은 그 녹색 대문을 멀거니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짧아진 두 번째 담배도 계단에 대충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지 않은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런 날은 때때로 있었다. 유곤은 늦은 저녁 종종 담배를 피우러 나왔고, 규리는 종종 술 취한 남편에게서 쫓겨나있었다. 규리의 말대로 유곤은 고개를 까딱 기울여 그녀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대화 없이 계단에 앉아있기만 했다. 규리의 옷은 늘 같은 원피스와 가디건이었는데, 급하게 꿰어 신고 나온 슬리퍼만이 매번 바뀌었다. 짝이 맞을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고. 한 번은 맨발로 나와있었던 적도 있다. 발목을 삐었는지 복사뼈 아래로 손가락 하나 길이만한 멍이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이상하게 아주 빨간 색이었다. 입술처럼. 상처가 아니라 화장처럼 보였다. 유곤은 그 발을 감싸쥐는 대신 더 바라보지 않기 위해 제 재킷을 벗어 규리의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규리는 조그맣게 웃었던 것 같다.

규리는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외간 남자의 옷을 덮고 웅크려 앉아서는 눈웃음 살살 치는 짓도 서슴없이 해댔다.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건지, 어쩌자는 건지. 유곤은 끈덕지게 정면만 바라보다가 가끔 그 시선이 견딜 수 없을 때쯤 반격하듯 규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규리는 터진 입술을 가리지도 않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가 결혼했다는 자각도 없지. 팔푼이같은 게. 유곤은 어쩐지 그게 불만스러웠다. 아니면 초조했나. 담배를 씹어 피우는 버릇도 없는데 규리 옆에서 피우고 버린 꽁초에는 잇자국이 잔뜩 남아있었다. 일주일에 네 번은 유곤이 담배를 질근질근 씹어야만 하는 날이었다.

하루는 규리가 나오지 않았다. 메기가 나가라고 윽박지르며 소주병을 깨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유곤은 자연스럽게 담배를 챙겨 집 밖으로 나왔지만 규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떠밀려 나오겠지. 유곤은 옆구리에 겉옷 하나를 끼고 담배를 물었다. 메기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돈 안 내놓을 거면 꺼지라는 고함소리가 계속됐다. 며칠 전부터 하우스에서 카드가 제법 잘 되는지 메기는 늦은 오후부터 새벽까지 하우스에 틀어박혀있다가 한 번씩 집에 들렀다. 그리고 올 때마다 규리를 찾고, 치마폭을 뒤졌고, 이내 때리기 일쑤였다. 규리는 변변찮은 벌이도 없었기 때문에 보통 메기의 '돈 벌어오라'는 말과 함께 집 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메기는 담보로 맡길 것이라도 찾기 위해 집을 뒤엎다가 술기운에 쓰러져 잠에 들었다. 그러면 규리는 제 집인데도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날은 어쩐 일인지 규리는 끈덕지게 버티는 듯 보였다. 슬리퍼 직직 끄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그리고 메기가 제 아내를 대문에 갖다 밀치는지 텅텅 대문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규리가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담배는 두 개피 남아있었다. 그걸 다 태울 때까지 규리는 나오지 않았다. 메기는 제 분에 지친 듯 규리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방으로 구시렁거리며 들어가는 것 같았다. 유곤은 허리를 약간 숙여 대문 아래로 규리의 발을 찾았다. 검은색 삼선 슬리퍼 한 짝이 마당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규리는 보이지 않았다.

왜 버텨? 나오면 내가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냥 나오면 되잖아. 나와서 같이 있으면 되잖아. 내가 너 괴롭히냐? 니 남편이 지랄이지? 씹던 담배를 바닥에 퉤 뱉었다. 짜증이 났다. 여분의 옷가지까지 챙겨 가지고 나온 게 괜한 수고가 되어서 화가 났다. 골초도 아닌데 줄담배를 피는 날이 늘어서 짜증스러웠다. 입맛이 썼다. 불쌍한 척 집 앞에 웅크려서 떨고 있던 주제에, 이젠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는 주제에, 바닥이 차갑다고 슬쩍 유곤의 발등 위로 맨발을 걸쳐올렸던 주제에. 그렇게 구니까 흔해빠진 동정도 못 사는 거다.

그래도 저 한심한 메기 새끼에게 두들겨맞는 건 안 될 일이다. 유곤은 그 여자가 메기를 피해 제게로 달려오지 않았음에 마지막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규리가 주먹질을 버텨가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 날 알게 되었다. 오늘은 부 사장이 쉬도록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유곤은 간만에 책이나 생활용품을 보충하러 갈 생각이었다.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바깥으로 터벅터벅 내려오자 문 밖에 서 있는 규리가 보였다. 웬일로 슬리퍼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낡고 작아져서인지 규리는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있었다. 복사뼈 언저리에 생겼던 멍은 이제 보랏빛으로 익어있었다. 발목에서 무릎을 따라 눈길을 천천히 올리자 손에 들린 막걸리 병이 보였다. 메기의 술 심부름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유곤의 발소리가 뚝 멈추자 규리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보라색 눈. 햇빛 아래에서는 더 선명하게 보라색이었다, 발목처럼. 그런데 왼쪽 눈을 연신 비벼대는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유곤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규리에게 바짝 다가갔다. 규리의 정수리는 기껏해야 유곤의 턱에 닿을 정도였다. 성큼 다가온 인물을 올려다보기 위해 눈을 비비던 손을 떨어뜨리자 흰자위가 빨갛게 충혈된 것이 보였다.

"봐요."

규리가 어?하고 되묻는 말을 무시하고 유곤은 규리의 왼쪽 눈을 이리저리 살폈다. 눈물이 질질 흐르고 눈꺼풀이 약간 부어있는 것이 척 봐도 결막염이었다. 자꾸만 눈을 가리려고 드는 손을 탁 쳐냈다. 갸름한 턱을 단단히 잡아 고정시키자 규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옮을텐데... 그 조그만 중얼거림도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유곤은 일일이 거기에 대꾸해주지 않았다.

"아파요?"

"조금..."

더 볼 것도 없었다. 유곤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헬멧을 규리에게 던지듯 안겨주었다. 사잇골목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먼저 올라타 턱짓하자, 규리가 머리통을 헬멧에 폭 집어넣고 뒤따라 올라탔다. 등에 바짝 붙어 제 허리를 끌어안는 규리를 힐끗 돌아보고는 조용히 헛웃음 지었다. 아프냐고 물어봤으니 병원에 간다는 것쯤 예측할 수야 있겠지만, 저의 무엇을 믿고 이렇게 덥썩 따라오는지 어이가 없었다. 이대로 너를 데리고 멀리 떠나버리면 어떡하려고. 그 길에도 너는 물음 없이 따라와줄까. 남자를 믿는 것은 네게 얼마나 쉬운 일일까. 메기와 결혼할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어?

규리는 출발하지 않고 있는 유곤의 허리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제야 유곤은 발을 올리고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안과 진료는 금방이었다. 세균성 결막염이라는 것이 명확했고, 안대와 점안 항생제를 처방받아 나왔다. 규리는 있지도 않은 주머니를 뒤지는 척을 하며 초조해했지만 유곤은 그 요란스런 행동을 쳐다보지도 않고 제 지갑을 꺼냈다. 이따가 줄게요. 주머니도 없네. 그렇게 말하며 재킷 주머니에 약봉투를 쑤셔넣는 유곤을 쳐다보며 규리는 머쓱한 듯 안대를 연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유곤은 이것이 값싼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규리가 아니었어도 그런 꼴로 제 앞을 기웃거렸다면 끌고 병원에 왔을테다.

"밥 먹고 가요."

"밥?"

"메, 아니... 그 아저씨 저녁까지 안 오잖아요."

"...그래도 너무 늦게 가면 안 되는데."

지랄. 유곤은 조소를 억지로 삼켰다. 규리의 배가 타이밍 좋게 꼬르륵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규리는 가디건을 재차 여며 몸을 감쌌지만, 유곤은 그대로 규리의 한쪽 손목을 낚아채 식당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규리는 못 이기는 척 따라오다 그럼 여기가 좋겠다며 먼저 창가 테이블에 앉기까지 했다.

유곤은 맞은편에 앉아 메뉴판을 그녀 쪽으로 돌려서 펼쳐주었다.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인지 규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메뉴판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앞머리가 닿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음, 하는 소리를 내는 규리를 유곤은 턱을 괴고 보며 한참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이걸로 하겠다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쏟아진 앞머리 틈새로 힐끗 유곤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한 짝이었지만 '메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티는 역력했다. 유곤은 손가락을 쭉 뻗어 메뉴 사진 하나를 쿡 찍었다. <BEST>라고 적힌 보라색 딱지가 붙은 품목이었다.

"이거."

"이거? 카르... 카르보나라?"

대강 적힌 설명을 읽어본 규리가 그것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어하는 듯 보였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는 메뉴판을 유곤 쪽으로 다시 돌려 주었다. 유곤은 느긋하게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미트 소스 파스타를 주문할까 생각할 무렵 불쑥 규리의 머리통이 유곤의 시야를 가렸다. 유곤이 받치고 있던 페이지를 휙 넘기더니 한쪽 페이지를 툭툭 두드렸다.

"나 이것도."

뭔가 했더니 딸기 에이드였다. 옆 테이블에서 마시는 것과 같은 것. 궁금했던걸까. 유곤은 웃음기 섞어 '그러든가요'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규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번쩍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문을 마침과 거의 동시에 올려진 식전빵을 집어들었다. 덥썩 잡았다가 뜨거웠는지 떨어뜨리고는, 양 손 끄트머리로 조심스럽게 다시 빵을 집었다. 앗뜨, 앗, 따위의 경박스런 소리를 내며 빵을 입에 문다. 파삭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유곤은 빵 바구니를 규리 쪽으로 더 밀어주었다. 입가에 부스러기가 잔뜩 묻는 것도 모르고 빵을 씹는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바보같다고 말할 뻔 했다. 그녀가 우아하고 정숙할 거라는 예상은, 평소 행색이나 뛰어다니는 꼴을 보면 당연하게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누가 이 얼굴을 보고 유부녀라고 믿겠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거랑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리고 이런 거에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 메기가 더욱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씹새끼. 유곤은 빵 대신 욕설을 씹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신나게 식전빵 두 조각을 몽땅 해치운 규리는 막상 카르보나라가 앞에 놓여지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오자마자 못 먹겠다는 말을 할 수도 없어 우물쭈물 포크를 들었다. 유곤이 면을 깔끔하게 포크에 감는 것과 달리 규리는 면을 포크에서 놓치거나 떨어뜨리기 바빠 한 번에 두 가닥씩을 겨우 먹었다. 베이컨을 씹는 턱도 점점 느려졌다. 규리는 초조하게 유곤의 접시를 훔쳐보았다. 이미 반절은 먹은 상태. 반면 규리는... 일곱 가닥은 먹었을까.

유곤은 면을 먹는건지 면으로 장난치는건지 모를 규리의 행위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빵을 허겁지겁 입에 넣고는 배가 불러서 파스타를 난감하게 쳐다보던 얼굴도 눈치챘다. 하지만 못 먹겠으면 알아서 남기겠거니 싶어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억지로 먹다가 체해서 또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까. 하지만 규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딸기 에이드로 중간중간 입을 적셔가며 열심히 카르보나라를 쪼아먹었다.

"못 먹겠으면 그냥 남겨요."

보다못한 유곤이 툭 말을 걸었다. 그는 이미 제 몫을 다 해치우고 냅킨으로 입가를 누르고 있었다. 규리는 씹던 것을 힘겹게 꿀꺽 삼켰다.

"아까워."

"...뭐?"

"아깝다구."

그리고 음식 남기면 벌 받는대. 괜히 덧붙인 한 마디에 유곤은 헛웃음을 지었다. 규리는 딸기 에이드를 빨대로 쭉 빨아 마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고는 유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곤은 팔짱을 끼고 규리의 얼굴을 한 번, 잔뜩 헤집어놓긴 했으나 양은 거의 줄지 않은 카르보나라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규리는 그러는 내내 유곤의 노려보다시피 쳐다봤다. 뭔가 강렬히 주장하고 싶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더러 어쩌라고요?"

"먹어줘."

규리는 냉큼 제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포장이라도 해 줄까 물어보려고 했더니 들고가서 처리하는 건 또 나름대로 곤란한 듯 했다. 메기가 보면 또 지랄할 것 같긴 한데, 그래서 이걸 정말 나더러 먹으라고? 유곤은 포크를 들고 규리를 힐긋 쳐다봤다. 규리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남이 손댄 거 먹기 싫다고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원체 잘 먹는 축에 속하는 만큼 파스타 한 접시 더 먹는다고 속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안약보다도 값싼 동정. 싸구려 호의. 유곤은 묵묵히 카르보나라를 입에 쑤셔 넣었다. 규리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웃어보이며 딸기 에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수다스러웠다. 여태 어떻게 그 말들을 참았는지 모를만큼 자꾸만 뒤에서 종알종알 말을 걸었다. 대체로 실없는 이야기였고, 이제는 눈이 별로 가렵지 않다는 말은 그 중에서도 세 번이나 나왔다. 운전에 방해되니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어도 맑게 웃을 뿐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규리가 쏟아낸 웃음들은 둘이 지나온 도로에 눈처럼 소복히 쌓일 것 같았다. 집 앞에 거의 도착하자마자 규리는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렸다. 뽁 헬멧을 벗어주곤 고개를 마구 도리질쳤다. 착 가라앉았던 머리카락이 다시 삐죽삐죽 솟았다. 유곤은 헬멧을 건네받고, 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 규리에게 쥐여주었다.

"하루에 네 번."

"알아."

"다 안 나았는데 약 다 떨어지면 말하고요."

"응."

"그리고 다음부턴 못 먹을 것 같으면 그냥 남겨요."

"싫어."

개구지게 웃으며 규리는 뒷걸음질로 제 집 대문 가까이 물러났다. 네가 또 먹어줘. 그 말이 인사였다. 잘 가라는 말도 없이 규리는 문앞에 세워두었던 막걸리 병을 집어들고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유곤은 담배를 피우는 척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에 모조리 피워버렸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음은 알지만 혹시라도 우려하는 일이 생길까봐서였다. 집에 잠깐 들린 메기가 규리를 발견하고 추궁하는 행위라든가, 제 동정을 오해하고 시비를 거는 행위 같은 것. 하지만 대문 안은 그저 고요했다. 유곤은 그로부터도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얼마나 길어질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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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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