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글

낙엽

나무에서 태어난 것은 나무로 돌아간다

BGM : Raujika - Cry More

악몽과 같던 그 시간이 끝나갈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그 무엇인가

행복, 사랑, 기쁨과
슬픔, 분노, 우울과
나.
당신 없는 나.

  그 날도 평범한 날이었어야만 했다. 아직은 살짝 추운 겨울, 몸서리를 치며 눈 쌓인 낙엽을 밟은 클러치는 눈살을 찌푸리곤 몇 번 발을 털어냈다. 분명 겨울은 갔을 텐데, 아직도 그늘 아래엔 눈이 소복해 겨울의 그림자마냥 이곳 저곳에 남았다. 얼어버린 눈, 그런 눈이 오두막 근처에 가득이었다. 리프나가 몇 번이나 눈뭉치를 뭉쳐 내 던진 것이 셀 수 없을 횟수가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눈은 그득히 쌓여 있어 그만큼 이번 겨울이 추웠나, 아니면 그만큼 이번 겨울이 슬펐나,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리프나가 슬슬 깰 시간이다. 평소라면 언제나 그렇듯 잠에 취한 웅얼거림을 기대하며 오두막에 들어갔을 테지만, 오늘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클러치는 귀를 앞으로 쫑긋거리며 '오늘은 아직인가',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오두막 안은 아직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했고, 작은 촛불 하나만 일렁인다. 늦은 아침까지 잠에 드는 리프나는 잘 때 비치는 햇빛을 싫어해 창문을 전부 막은 탓이었다. 창문을 열까, 잠깐 생각도 했지만 우리의 생활에 무한한 건 시간밖에 없으니 그냥 그대로 두자고 마음을 먹고는 리프나 옆에 앉았다.

  "분명 이 때 즈음에 처음 만났지."

  작게 되뇌였다. 갈 곳 잃은 크리쳐들이 흘러들어온 작은 사원. 찾는 건 다른 누군가였지만, 대신 다른 누군가를 찾았다.  리프나는 조금 달랐지. 갈 곳 없어 혼자 떠돌며 짐승 같이 겨우 삶을 이어 오다 간절히 바라던 누군가의 온기를 찾아 목구멍이 막힌 것 마냥 나오지 않는 말을 겨우 연습해 온 곳이었다. 불도 피울 줄 모르고, 사냥이라고는 열 번 해야 한 번 성공할까 말까 한 작은 아이가 겨우 잡은 맛 없고 질긴 살덩이를 눈물 흘리며 삼키던, 그런 숲에 자리를 잡아 두 번의 겨울을 나고 세 번째의 봄을 맞는다. 우리는 이렇게 늘 다시 돌아오는 봄날을 맞게 되겠지.

  리프나가 잠깐 뒤척였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마냥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게 불안했는지 클러치는 리프나를 작게 흔들었다.

  "리프나."

  "......우웅, 끄으응......"

  아무래도 이 정도 흔들림으로는 깰 것 같지가 않다. 클러치는 쇠사슬로 리프나를 안아올리고는, 얼굴을 쓸어올리며 목에 주둥이를 부볐다. 작은 잠꼬대와 함께 리프나가 눈을 떠 주었지만, 평소에 보여주던 잠에서 깬 직후의 비몽사몽한, 하지만 클러치를 봐서 기쁘다는 듯한 미소 대신, 근심 어리고 무언가 잘못된 듯한 울먹이는 표정으로 클러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악몽을 꾸었을까. 너의 미소를 앗아간 그 걱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클러치는 이내 참지 못하고 물어본다.

  "리프나. 악몽이라도 꾼 거야?"

  리프나는 클러치의 표정을 보고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걱정으로 얼룩진 얼굴이 천천히 평소와 같이 돌아오는 듯 했다. 리프나는 날개를 살짝 퍼덕이며 클러치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바닥을 딛고는, 방금 지은 표정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다는 듯 발랄하게 당신의 쇠사슬을 잡아당긴다.

  "악몽이요? 난 언니 코가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깼는데. 그거, 다시 한 번 해 주면 안 돼요?"

  그릉거리며 친근하게 얼굴을 부벼 오는 리프나의 모습에 클러치는 잠깐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분명 네 얼굴은 그렇지 않았어. 무언가 잘못 돌아가는 듯 한 그런......

  "......언니?"

  리프나가 클러치의 품에서 얼굴을 들고서는 다시 한 번 클러치를 부른다. 클러치는 잠깐 멈칫하더니, 작게 고개를 털고 일어난다.

  "......어? 아냐, 괜찮아. 하지만 날 걱정스럽게 한 벌을 받아야지?"

  클러치는 리프나를 덮치고는, 리프나의 배를 간질거린다. 리프나가 꺄르륵 웃으며 오두막 밖으로 도망가는 걸 보고, 클러치는 생각한다.

'그래, 별 일 아닐 거야.'


  그 날도 언제나와 같았다. 적당히 물고기를 잡았고, 리프나가 화이트데이라며 흰 열매를 잔뜩 따 왔다. 단 맛도 전혀 없고, 시고 쓴 이상한 맛에 둘 다 먹자마자 뱉었지만 먹지 않아도 기분을 내기에는 적당했다. 운이 좋게도 그 날은 놓은 덫에 새 몇 마리가 걸렸고, 저녁은 풍족할 예정이었다. 다만, 다른 덫을 확인하러 간 리프나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클러치는 불도 다 피워 놓고, 잡은 멧비둘기도 잘 손질해 둔 채로 한참이나 모닥불 앞에서 기다렸다. 덫이 조금 멀리 있긴 했어도, 조금 어둡기는 했어도 밤눈이 밝고 주변에서 오래 지낸 리프가나 돌아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모닥불이 사그러들어 숲의 어둠이 클러치의 수정에 미칠 때까지도 리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어둠에 삼켜진 것일까, 온갖 걱정들을 안고 클러치는 몸을 일으켜 리프나가 떠난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 쌓인 낙엽이 버석대며 밟히고, 찬 냉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오늘따라 별빛은 약하고, 보름달조차도 숲을 밝혀 주지 못했다. 마치 겨울로 돌아온 듯 서리가 온 나무에 서려 있었고, 리프나의 발자국은 점점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땅에 코를 박고 리프나의 체취를 찾으려 했으나 반쯤 녹아 얼어붙은 땅은 모든 발자국을 숨겨버리려 하는 듯 했고, 빛나던 눈은 점점 그 빛을 잃어 가듯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리피! 리프나!"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의미 없는 메아리 뿐. 풀벌레조차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정적이 어둠과 같이 숲을 채웠다. 하지만 그 순간 달빛이 클러치의 앞을 비추었고, 마치 마법과도 같이 작은 발자국이 밝게 빛났다. 덫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그 작디 작은 발자국은 분명 리프나의 것이었고, 클러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발자국을 따라 깊은 언덕으로 뛰쳐나갔다. 

  숨이 목구멍 끝에 걸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어 더 이상 뛸 수 없을 만큼이나 왔을 때야 발자국은 끝이 났다. 나무라고는 하나도 없는, 풀만 가득한 들판. 이런 곳이 숲 주변에 있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클러치의 눈에 가장 먼저 비춘 것은 언덕 위에 형편없이 쓰러진 리프나였다. 마치 인형이 널부러진 것 마냥 힘 없는 몸이 언덕 위에 떨어질 듯이 걸쳐 있었다. 급히 달려가 리프나를 안아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지만, 겉으로는 전혀 상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리프나가 눈을 떴다.

  "......언니에요? 여기라면...... 모를 줄 알았는데."

  "리피, 이게...... 무슨 소리야? 모를 줄 알았다니? 대체 왜? 나한테 뭘 숨기려고?"

  리프나는 고개를 돌린다. 어딘가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저 눈만 뜬 채로 언덕 너머를 바라본다. 리프나의 날개의 흰 꽃은 점차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하고, 마치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클러치에게 꽂아 준 흰 꽃도 같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무에서 태어난 건, 나무로 돌아가는 법이에요. 돌아갈 때가 되었어요...... 너무 오래 떠나 있었네요."

  리프나가 앞발을 겨우 들어 클러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 마치 그 감촉은...... 나무와 같아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리프나가 점점 가벼워진다.
  흰 꽃들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꽃에서부터 시작된 빛은 리프나의 전신을 뒤덮는다. 

  "항상 바다와 같았어요. 물고기가 없어도, 바다는 그 곳에 그대로 있겠죠? 언니에게 가라앉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클러치가 급히 리프나를 잡아보려고 하지만, 쇠사슬은 허공만 가른다. 빛이 커진다. 빛이 모두를 덮을 만큼.

  "안녕, 언니."


  리프나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빛은 사라졌다. 밤벌레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밝디 밝은 보름달이 클러치를 비춘다. 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따듯한 밤 공기가 코 끝을 스쳤다. 

  리프나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어린 나무 하나만 남았다. 마치 그 곳에 겨우 싹을 틔워 조금 자란 것 마냥, 리프나의 꽃을 닮은 흰 꽃이 겨우 하나 피어 있다. 아찔하게 머리가 아파 왔다. 큰 충격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이었을까. 너무나도 갑자기 다가온 이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프나는 어디 갔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겨우 앞발을 들어 흰 꽃을 만지려고 하는 그 때 ㅡ

  눈을 떴다. 온 몸이 나른하고, 살짝 추운 기운이 돌았다. 어두운 오두막의 통나무를 닮은 빛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꿈이었구나. 정말, 이런 악몽도 없지. 가슴을 쓸어내린 클러치는 리프나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든다. 

  흰 꽃잎이 떨어진다. 푸르디 푸른 나뭇잎이 떨어진다. 고개를 든 그 위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이 천장과 같이 하늘을 가렸고, 리프나의 꽃을 닮은 흰 꽃들이 무수하게 피어 있었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비와 같이 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철렁 내려앉은 그 가슴에 고개를 조금만 돌려 보면,

  나무 아래 흰 꽃잎에 덮인 클러치가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


  ".......언니! 언니...... 일어나 봐요, 언니...... 냐악......"

  머리가 아파 왔다. 영 띄이지 않는 눈을 겨우 뜨니, 리프나가 온통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클러치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 정도 흔들림으로는 깨지 않을 듯 하는지, 아직도 클러치가 일어난 걸 모르는 듯 계속해서 클러치를 흔들고 있었다.

  "언니, 언니......"

  "리피?"

  클러치의 한 마디에 리프나가 클러치의 얼굴을 돌아본다. 놀랐던 얼굴이 확 밝아지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클러치의 품에 부볐다. 영문을 모른 채로 어리둥절하던 클러치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와 같던 오두막. 언제나와 같던 그 곳이었다. 리프나는 클러치가 움직일 수도 없게 클러치를 꼭 붙잡고 훌쩍였다.

  "언니가...... 힘들어 해서 깨우려고 했는데, 안 일어났어요. 그냥, 한참동안 흔들었는데도 안 일어나서......"

  "......꿈이었구나."

  훌쩍이는 리프나 옆에는 흰 열매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마치 화이트데이를 기념하려던 것 마냥. 클러치는 한 알을 입에 넣었고, 너무나 단 맛에 아찔해졌다. 그래, 눈이 쌓여 있기는 너무 늦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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